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분류 전체보기 (326)
창작의 샘터 (88)
패러디 왕국 (85)
감상과 연구 (148)
일상의 기억 (5)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2003-06-13] 페인트 잇 블랙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1
 





<< 페인트 잇 블랙 >>

Paint  It  Black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더이상 옛날의 푸르고 아름다운 별이 아니었다.

행성 전체의 모든 표면을 검푸른 점액질의 바다가 뒤덮고 있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사용 가능한 우주선을 타고 어떻게든 탈출했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 그리고 생물들은 무자비한 검은 콜타르의 물결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뼈만 남은 채 화석처럼 변하더니 급기야는 먼지로 분해되어버렸다. 아비규환, 연옥, 나락, 야마의 왕국, 앙페르, 인페르노, 헬, 하데스의 나라 -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지옥이 거기에 펼쳐지고 있었다.

탈출한 이들은 최후의 결의를 내렸다.

-----------더 늦기 전에, 지구 전체에 불을 놓자고!

다행히도(?) 지구궤도에는 군비경쟁 때 비축해 둔 수많은 군사위성들이 줄을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탑재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전략․전술 핵탄두, 통상탄두, 스페이스 네이펌, 신호탄, 예광탄, 훈련탄, 급기야는 태양면 폭발 반응 실험에 쓰려고 달기지에 배치된 Bk42 항성관통탄까지 동원되었다.

그 옛날 예산 낭비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억지로 배치되었던 반사위성포와 대공요격용 펄스 레이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신중한 계산을 거쳐 지구의 모든 표면적 위에 고른 비율로 각종 미사일과 레이저를 쏟아부었고, 이곳저곳에서 엄청나게 큰 규모의 폭발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연쇄반응이 엄청난 기세로 행성 전체에 퍼져 나간다.

그리고 지구는-

태양도 울고 갈 불의 행성이 되었다. 사실은 겉표면만 타오르는 거니까, 속까지 활활 타는 태양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인류는 지난 수십년간 개척해 둔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아예 과거와의 인연을 끊고 다른 행성계로 옮겨가기로 결심, 준비를 추진한다. 오직 향수에 사로잡힌 몇 사람만이 지구궤도의 스테이션에 남아, 더이상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지구를 바라보며 코넬리아 콘웨이의 마지막 히트곡 <The Greatest Fireball of All>을 아날로그 레코드로 질릴 때까지 듣는 것이었다.

“어어?”

“왜 그래?”

“저 황도면 위의 불꽃...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어.”

“그럴리가... 눈의 착각이겠...”

그러나 아니었다.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들 중 한 가닥이 마치 의지를 가진 누군가의 손처럼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위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엄청난 홍염[紅炎]의 촉수는 대기의 마찰과 반 알렌 대의 자기반응을 견뎌내고 마침내 지구궤도 위로 뛰어올라, 스테이션을 한입에 삼켜 버린다!

“이봐! 브룩클린-5! 응답하라! 어떻게 된 거야!”

“달기지, 달기지, 이쪽의 상황이 이상하다. 그쪽 망원경에 뭐가 잡히나?”

지구의 속박을 벗어나 넓은 우주공간으로 뻗어나온 촉수는 순식간에 우주의 극저온에 노출되어 꽁꽁 얼어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음기둥은 마치 생명에의 의지로 가득한 것처럼 꿈틀거리며 우주의 심연을 건너, 달로, 화성으로, 목성으로, 토성으로, 그리고 그보다도 먼 곳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며 그 끔찍한 검은 점액질의 바다를 각 행성에 심어놓는다.

외행성에 피신하여 한숨 돌리고 있던 인간들은 자기들을 향해 뻗어오는 장대한 촉수를 투시광선으로 관측한 결과, 얼음의 겉껍질 속에 불타는 얼음이, 그리고 그 아래에 끊임없이 맥동[脈動]하는 시커먼 젤라틴의 생명질[生命質]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경악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정녕 이 우주에 도망칠 곳은 없단 말인가?

태양계가, 또 다른 행성계가, 그리고 은하 전체가,

검게- 검게- 새카맣게-

암흑의 저편으로-

두 번 다시-

영원히-





딩동!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 친절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동시에 불이 켜진다.

“놀라셨죠? 물론 위 영화의 마지막은 픽션입니다. 실제로는 그 ‘괴물 콜타르’는 - 미안해요, 아직도 정식명칭을 결정짓지 못한 모양이에요 - 30년 전 자랑스런 아메리고의 과학팀이 발명해 낸 미생물탄에 의해 완전히 일소되었답니다! 그 덕분에 우리들도 여기에 앉아 흥미진진한 영화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 한 번 그때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해결을 위해 힘쓰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이로써 초 스펙터클 신작 3D피처 「Forever Dark」의 시사회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제공에 딕센 유나이티드 엔터테인먼트, 딕센 오일 코퍼레이션, 알레그리시모 네트웍 사, 스튜디오 핀치필드, 교육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라슈펠 장학재단, 그리고 광고대행의 메카 파워슈트라우스 에이전시였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여러분 -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플로라 폭스였습니다!”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불도 다 켜지고 미화원이 들어와서 청소를 시작한 그 공간에, 한 사람의 동양계 중년부인과 그녀를 따라온 소녀가 남아 있었다.

오십대에서 육십대 사이로 보이는 그 부인은 엄청나게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하얗게 센 백발을 끄트머리만 보라색으로 멋드러지게 염색하고 있었으며, 몸에 맞는 수수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소녀는 열아홉쯤 되어보였는데 머리를 소년처럼 짧게 깎고 꽤 요란스런 귀걸이와 탄생석이 달린 목걸이로 치장을 했다. 일부러 찢은 자국을 낸 쫄청바지와 활동적인 배꼽티 차림이 옆의 부인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끝났네요.”

“음.”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보고 있던 소녀가 하품을 하며 봄날 고양이처럼 활짝 기지개를 켰다. 부인은 그녀의 교양없는 행동에 질책의 눈길을 보냈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녀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이모, 대체 이 영화가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보러 가자고 하신 거죠? 이모 취향은 이런 것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나도 특별히 재미있어서 보러 온 건 아니다.”

“그러면요?”

“저놈들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지어낼지 궁금해서 왔단다.”

“엔딩의 미래 장면 말인가요?”

“아니,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거짓말이지.”

“에에?”

“일단 여기서 나가자꾸나. 어디 조용한 카페라도 가서 이야기해 주마.”

부인이 발밑에 내려놓았던 소포를 집어들며 말했다.

그들은 극장을 나와서 몇분동안 헤맨 뒤 적당한 노천 카페를 찾아서 자리를 잡았다. 8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민트향 아이스티와 시트론 쿨라타로 더위를 식힌 뒤, 호기심이 동한 조카가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그 영화에 나왔던 다큐멘터리 부분이 다 거짓이라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을 한데 모아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부분만 들춰내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꼴이지. 그리고 남은 사실들도 입맛대로 순서를 바꾸거나 적당히 각색해서 아주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려고 애 좀 썼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 중년부인은 시계를 잠깐 들여다보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도 약속이 있고 나도 우체국에 들러야 하니 짧게 끝내마. 그러니까 그건 대충 30년 전, 내가 고만해[高 漫駭] 교수님과 대판 싸우고 달무리 연구소에서 쫓겨난 직후에...”

“잠깐만요! 누구하고 싸우다 쫓겨나요? 이모가요?”

“그때는 아직 철이 없었지.”

부인은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꼭 너만한 나이였다. 너처럼 외모에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진짜로 상상이 안 가네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죠?”

“그 얘기를 하자면 우리 모국의 바닷가에서 딕센의 흉물스런 유조선이 조난당한 것부터 시작해야겠구나.”

“영화하고 다르네요. 그 사건은 육지와는 멀리 떨어진 공해상에서 일어났고, 지나가던 물새 두 마리가 죽은 정도였다고 했잖아요?”

그 부인의 안경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았니.”





바다는 온통 새까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맑고 푸른 바닷물 속에 온갖 생명들이 뛰놀며 대자연의 신비를 보여주던 그 해역은 더이상 옛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못했다. 주변의 바다를 뒤덮은 검고 끈적거리는 그 물결은 계속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물고기나 바닷말을 단조로운 모노톤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물결의 중심에는 부분부분 흉칙한 골조를 드러내고 옆으로 드러누운 채 검푸른 연기를 뿜어대는 커다란 철제 건조물이 있다. 검은 물결은 그 리바이어던[大海獸]의 갈기갈기 찢어진 옆구리에서 마치 상처입은 동물이 피를 흘리듯 시시각각 조금씩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물체의 위쪽 하늘에는 수십 대의 헬리콥터와 소형 오토자이로가 수확하느라 바쁜 일벌들마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생존자를 구하거나 상황을 보고하거나 소화액을 뿌려대거나 관계자들을 실어나르거나 하는 중이었다.

한 사람이 바닷가의 방파제 위에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물 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는데 도수가 매우 높은 안경과 촌스럽게 한가닥으로 땋은 머리가 눈길을 끌었다.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연갈색 니트 스웨터와 소매 없는 재킷을 입고 색이 바랜 머플러를 둘렀으며 아래는 그냥 군데군데 약품 얼룩이 보이는 헐렁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실험용 하얀 가운이라도 입혀 놓으면 그런대로 어울릴지도 모를 정도였다.

왼쪽 손에는 두꺼운 책 몇 권이 가득한 종이봉지를 들고 있었으나 오른쪽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오른쪽 손을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핸디TV를 꺼내어 급하게 채널을 돌렸다. 수신 상태가 고르지 못하여 화면이 지직거리고 노이즈가 낀다. 하지만 황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아주 똑똑히 들려왔다.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현장에서는 지금도 불을 끄고 바다가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천 명의 작업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조난당한 유조선에 타고 있었던 승무원 서른 명은 재빨리 대피하여 구조된 모양입니다만, 주변에는 다른 일로 나와 있었던 선박이 몇 척 더 있어서, 피해는 예상보다 더 커질 듯 합니다.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은 물론, 마침 일주일 전 근처 바다에 추락한 무인 우주탐사선 사그라다-5의 잔해를 찾던 탐사 팀도 사고에 휘말려들었다고 합니다.

해안 경비대와 전략해군은 합동대책본부를 개설하고 근처 기지의 인력을 모두 차출하여 구조 및 오염물 제거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번에 전복된 유조선은 다국적 석유재벌인 딕센Dixen의 소유로, 해양 전문가들은 이 선박이 악천후를 무릅쓰고 지름길을 찾아 무리한 우회를 하다가 우리 해안으로 잘못 들어와 암초를 만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환경부와 산업자원부 장관은 급히 비상회의를...”

그녀는 TV를 끄고 한참동안 냉랭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 검은 물결이 그물에 목이 걸려 죽은 갈매기들과 그밖의 온갖 쓰레기들을 담은 채 해안으로까지 쓸려오는 것을 알고는, 발걸음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끄트머리만 엷은 갈색으로 물들인 앞머리가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에 휘날려 제멋대로 나풀거렸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눈에는 어느 새 뚜렷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 검은 물결의 일부가 이상스런 암록색의 광채를 발하면서 파도나 바람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이리저리 뻗어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채고 잠시 멈춰섰지만, 자기가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쇳조각으로 베니어판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모가 현장에 있었단 말이에요? 게다가 ‘그걸’ 최초로 발견할 뻔했다고요?”

“하지만 발견하지 못했지. 그때는 눈 앞에서 고향의 바다가 오염되는 걸 보고 너무나도 화가 나서, 다른 건 신경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한참 지난 뒤에야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아 그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게지.”

“그래서 그날 밤에 그 괴물이 근처 군부대를 습격해서 탱크부대 3개 사단이 장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묵사발이 되었던 거군요?”

부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그 헐리우드 액션을 그대로 믿는 게냐?”

“아니에요?”

“너희 외가가 거기서 식당을 하고 있었던 건 너도 알지? 마침 외박 나온 어떤 병사가 밥 먹으러 왔다가 들려준 이야기인데, 탱크는 커녕 지프차도 동원된 일이 없었어. 대신에 스케일은 작지만 훨씬 무섭고 끔찍한 일이 있었단다. 지금의 네 또래만한 젊은이 둘이, 밤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그날도 어김없이 밤이 찾아오고 세상을 삼켜버릴 듯한 어둠이 몰려왔다.

유조선이 처박힌 해안으로부터 약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해안감시초소에, 한 명의 군인이 막 순찰을 끝내고 들어와서 총을 지정된 곳에 놓아두고 진흙으로 얼룩진 군화를 닦고 있었다. 옆에 놓인 간이침대에서는 비번인 덩치 큰 선임병이 속옷차림으로 모포를 눌러덮은 채 간만의 단잠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병사는 몸이 점점 추워지는 것을 느끼고 커피라도 한잔 할까 싶어서, 좁다란 초소 한가운데에 놓인 석탄난로 위에 물주전자를 올려놓고 지난번 외박 때 몰래 들여온 무언가를 찾아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뒤틀린 자세로 선잠을 즐기고 있던 선임병은 집에 계신 어머니나 헤어진 애인이라도 꿈에서 만나고 있는지 호탕하게 잠꼬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공사 수주 관계로 뇌물을 먹은 모 군장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

결국 이리 뒤엎고 저리 뒤엎은 끝에 커피믹스를 찾아낸 젊은 병사는 주전자 쪽으로 가려고 일어섰다가 묘한 소리를 듣고 멈춰섰다.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베니어판을 슥슥 긁어대는 듯한 불쾌하고도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그는 재빨리 한쪽에 놓아둔 총을 집어들고 초소 문 옆에 붙은 채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바깥쪽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조심스레 내다보았지만 어두워서 아무 것도 식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왠지 한쪽의 백사장이 다른 쪽보다 훨씬 더 어둡고 칙칙하게 보인다. 기분 탓일까?

그는 살그머니 간이침대로 다가가서 선임을 흔들어 깨웠다.

“......아움... 뭐냐? 잠도 못자게......”

후임은 대답 대신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술 위에 검지손가락을 붙였다.

“무슨 일이야?”

“밖에 뭐가......”

그는 상대방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 잠이 퍼뜩 깨어 재빨리 옆에 개어놓은 옷을 챙겨입고 탄띠와 철모를 착용한 다음, 자기 총을 꺼내어 들고 와서 문 옆에 귀를 바짝 대고 있는 후임에게 다시 물었다.

“밖에 뭐가 있다고?”

“아직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있는건 확실합니다.”

“본대에 연락했냐?”

“아직 안했습니다. 장상병님께 말씀드린 뒤에 하려고...”

“임마,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띄면 일단 무전기는 켜놔야 할거 아냐. 그건 그렇고, 거기 널부러져 있는 그 봉다리는 뭐야?”

숨겨둔 커피믹스를 들켜버린 후임은 움찔했다.

“아, 이, 이건 장상병님 잠 깨우시라고 제가 특별히 준비한 겁니다.”

“웃기고 있네. 내가 자는 사이에 커피 때리려고 했지? 이건 압수다.”

울상이 된 후임의 얼굴을 못본 척하고 선임이 지시했다.

“짐승 소리는 아니고... 지나가는 고물장수나 물놀이 온 조폭들인가? 셋을 센 다음 문 열고 밖으로 나가봐. 내가 엄호할테니까.”

“본대에 연락 안합니까?”

“뭐라고 연락할건데? ‘여기 쇠긁는 소리가 나는데 어떡할까요?’라고? 연락했다가 아무것도 아니면 어쩌고? 보나마나 별거 아닐테니 걱정마.”

더욱 더 울상이 된 후임은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누구냐? 여기는 통행 금지 구역이다. 손들고 조명 앞으로...... 헉!”

어정쩡한 자세로 검문을 시도하던 후임이 갑자기 뭔가에 발이 걸린 듯 앞으로 넘어졌다. 당황한 선임이 어깨에 멘 총을 오른팔 밑으로 돌리며 소리쳤다.

“야, 왜그래? 풀뿌리라도 있냐?”

“장상병님... 지....... 진흙이...... 휘발유....... $#&!!!”

선임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욕을 내뱉으며 엎어진 채 땅바닥에 못박혀서 버둥거리던 후임의 모습이 서서히 어둠에 휩싸여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위를 매직펜이나 먹물로 시커멓게 칠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야! 한일병! 한개피[韓 凱陂]!”

장난같이 들리는 후임의 본명을 외쳐가며 그 역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방금까지 그가 누워있던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있는 거라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컹하고 질척거리고 찐득찐득한 검푸른 물질의 막[膜]같은 것이... 주변 일대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코를 찌르는 강렬한 내음에 현기증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코를 막았다. 썩은 휘발유나 쓰다 남은 캥거루표 구두약의 냄새를 연상케 하는 불쾌한 무기질의 악취였다.

그는 초소 안에서 들고 온 무전기의 전원을 넣고 재빨리 암호를 말한 뒤 숨가쁜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여기는 제3초소, 이상한 소리를 탐지하고 초소 밖으로 검문하러 나간 한개피 일병이 눈앞에서 소실[消失]. ...예 그렇습니다. 감쪽같이 없어졌... 진짭니다! 현재 밖으로 나와 탐색중. 적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음. 그런데 이상한 것은...”

통신을 보내며 잠이 확 깬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병사는 몇 발짝 발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뭔가에 발이 걸린 듯 뒤로 자빠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엉덩이와 발이 땅에 달라붙은 듯 꼼짝하지도 않았다. 깊은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

“.........................???”

고개를 숙이고 발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리던 병사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의 쇠붙이 긁는 듯한 소리가 더욱 더 세차게 들려왔다. 진흙과 콜타르와 액체 아스팔트가 뒤섞인 듯한 기분나쁜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수리술술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그의 양옆과 앞뒤에서 갑자기 그 덩어리의 일부가 위로 솟아올라서 얇은 멕시코빵이 샌드위치 내용물을 감싸듯 병사를 집어삼켜버렸다.

병사는 너무나도 갑작스런 일에 놀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오직 그의 철모와 통신기만이 주인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제3초소, 무슨 일인가? 제3초소, 응답하라! 장방형[張 邦炯] 상병! 응답해!”





“오싹하군요. 그럼 부대에서 일어난 전투는요?”

“그놈은 부대 근처에는 오지도 않고 곧바로 다시 바다로 사라졌어. 아무래도 그때는 생겨난지 얼마 안 된 터라 육지에서 오랫동안 움직이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지. 만약 더 깊숙히 들어와서 하수도나 가스관을 통해 내륙으로 퍼져나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그랬다면 아마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도 못했겠죠. 근데 왜 그렇게 웃으세요?”

중년부인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혼자 키득거리다가 헛기침을 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전투장면, 고증이 하도 뭣같아서... 세상에 거기 나오는 군인들이 입고 있던 옷에, <창천 1동대>라는 표식이 붙어있지 않았겠니! 예나 지금이나 저자들의 무지는 변하지를 않는다니까. 들어가는 돈의 액수만 바뀔 뿐이지.”

이모의 유머감각을 전혀 이해 못한 조카는 멀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보니 그 다음 장면에서는 바라비아 근해를 경비하던 아메리고의 잘나신 군인들이 그 괴물과 만나 용감하게 싸우고, 약점이 불이라는 걸 알아내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단다.”

이모가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조카에게 주의를 주는 듯 까딱거렸다.

“그러면요?”

“그 당시 통신사에 있었던 친구에게 들은 얘긴데,”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걸 발견한 것은 바라비아의 땡전 한푼 없는 불쌍한 어부였단다.”





바다는 파도 한 점 없이 잔잔하기만 하다.

압바스 아리바는 점심을 먹다가 문득 생각난 듯 빵조각을 약간 뜯어내어 배 옆으로 던졌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주위를 맴돌던 물새 가족이 잽싸게 내려와서 빵조각을 가로채었다. 그들이 가져가고 남은 나머지는 물 속으로 가라앉아 알록달록한 비늘을 뽐내는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었다.

그는 식사를 끝내고 도시락을 치운 뒤 낚싯대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배 한편에 드러누워 물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갈색 피부의 통통한 하랍 인이었는데, 깨끗하게 세탁한 흰 셔츠와 튼튼한 작업용 바지를 입고 장식술이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멋진 콧수염도 기른 30대 후반의 아저씨였다. 비록 고기는 잘 안 잡히고 집세는 밀려 있었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알라께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그가 주위 풍경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약 14분 후였다.

“.................아니?”

배가 떠 있는 부분을 제외한 사방의 바다가 검은 점액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역겨운 타르 냄새가 났다. 주변을 날던 새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놀라서 황급히 모터를 작동시켰으나 배는 제자리를 맴돌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검은 끈적이들이 마치 사르갓소의 해초들처럼 스크류에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는 주머니칼을 들고 나와 그것들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놈들은 그가 손을 댈 때마다 스르륵 물속으로 물러났다가 그가 손을 거두면 다시 스크류와 선체에 달라붙어 그를 약오르게 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압바스는 배 주위에 펼쳐져 있는 검은 막 사이사이로 이미 말라붙어 화석처럼 되어버린 물고기나 불가사리의 유해가 유령처럼 흐늘흐늘 떠 다니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오던 그 끈적이가 마침내 배 위에까지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압바스는 그것들을 배 밖으로 몰아내려고 동분서주했으나 도무지 효과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이상한 쇳소리 때문에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결국 절망하여 성냥을 꺼내들고 배 이곳저곳에 불을 붙였다. 이 정체 모를 악마들에게 배와 자신을 내주느니 차라리 알라께 공양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재수없으면 알라가 아니라 아후라 마즈다가 맞으러 올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는 십수년 전 아메리고의 소위 ‘정의로운 해방’에 대항하여 길거리에서 분신시위를 벌이다가 죽어간 그의 할아버지를 평생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TV에나 나왔지만 나는 이게 뭐람?’

그러나 다행히도 분신자살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 이상한 점액질은 불이 붙자마자 갑자기 뻣뻣하게 굳더니 서서히 배 위로부터 물러나기 시작했다. 압바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모터를 작동시켜 불붙은 채로 배를 몰고 달아났다. 주변 해역을 가득 메운 검은 타르는 불꽃으로 둘러싸인 압바스의 배가 지나갈 때마다 마치 동네 양아치에게 겁먹은 초등학생이 길을 스스로 비켜주듯 말없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배가 홀랑 다 타버리는 바람에, 압바스는 남은 판자조각 하나에 매달린 채 물 밖으로 목만 내밀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물론 그는 물에 뛰어들기 전에 남은 성냥과 신문지, 물고기 기름으로 횃불을 만들어 그 검은 악마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의 무서움을 경험한 탓인지 그놈들은 쉽사리 달려들려고 하지 않았다.

수시간 후, 그의 조카가 부른 구조 헬기가 도착했을 때 압바스의 머리는 공포와 경악으로 인해 눈[雪]처럼 하얗게 세어 있었다.





“정말 구사일생이었네요.”

“그러게 말이다. 마침 그놈들이 불에 약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가족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화석이 될 뻔 했지!”

“그 뒤 그 아저씨, 어떻게 되었어요?”

“친구 말로는 한동안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지만 조카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아서, 그 뒤로는 깨달음을 얻고 메카로 가서 성직자가 되었다고 하던가.”

“역시 튼튼하고 봐야 겠네요.”

“그래, 그렇게 해서 바라비아해 일대를 휩쓴 뒤, 그녀석은 파프리카 대륙으로 흘러가서...”

“그 잘 빠진 미녀들이 파도타다가 집단으로 먹혀버리는 장면 말인가요? 곧이어 괴물은 해안에 상륙해서 페르시안 카페트처럼 퍼져 나가고, 경찰이 달려왔다가 자동차째 먹히고, 부두교 주술사들이 나타나 주문을 외우니까...”

“그게 말이다,”

조카는 또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눈앞이 아찔해졌다.

“사실 먹힌 건 한 명이었고, 게다가 건장한 남자였어.”

“..........”

“엄청난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그 영화처럼 스펙터클한 건 아니었지. 그런 장면을 연출하려면 멋대가리 없는 콜타르 덩어리보다는 백상어라는 멋진 생물을 스카웃하는 편이 더 좋았을 거야. 희생자를 슈퍼모델로 바꾼 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만 말이다.”

“근데 그런 건 또 어떻게 아셨죠?”

“수년 전 국제 학회에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만났지. 들어보겠니?”





“알겠어 마루바? 신이 노하시니 너무 멀리까지 파도를 타러 나가서는 안돼! 스테레오니 디스코니 하는 백인의 풍습으로 바다를 더럽히는 것부터가 말도 안된다구. 이 바다는 예로부터.....”

마른 장작같이 퍼석퍼석하고 쭈글쭈글한 노친네가 염주를 흔들며 지껄여댔다.

‘그 할멈, 되게 시끄럽네. 그런다고 누가 땡전 한풀 줄줄 아나.’

쿠완타오 마루바는 엉터리 점술가인 마와디 노파의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겠지만 귀찮기 짝이 없는) 충고를 까맣게 잊고,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해안을 따라 휘파람까지 불면서 걸어갔다.

그는 지난 몇달동안, 물좋은 관광지인 이곳 백상아 해안에 위치한 친척의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다가, 비수기가 찾아오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카디프타운에 돌아가서 누나의 사업을 도울 예정이었다. 마침 도시로 돌아가는 그날이 바로 내일이었기에, 그는 마지막으로 이 잊지 못할 바다에서 젊음을 만끽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짙은 눈썹과 초롱초롱한 눈매, 떡벌어진 체구가 매력인 19세의 청춘이다.

“여기가 좋겠다. 마침 밀물이니 딱 알맞겠는걸.”

그는 해변에 자리를 편 다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할아버지한테서 배운 목공예 솜씨로 직접 깎은 목제 서프보드를 집어들었다. 그는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일광욕 중이던 다른 관광객들 사이를 지나서 바다 쪽으로 달려갔다. 몇몇 한가한 아가씨가 그의 건강미 넘치는 근육과 강렬한 개성을 풍기는 얼굴을 보고 윙크를 보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히얏호------!”

물에 들어가자마자 금세 흐름을 타고 물 위를 거닐기 시작한 그의 보드는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비록 사람 키를 넘길만큼 큰 파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물살이 꽤 급해서 능숙하게 타기는 힘들었다. 해변에서 그를 향해 환성과 박수소리가 들려오자 신이 난 쿠완타오는 보드를 발에 고정시킨 채 3단 회전 묘기를 선보였다. 그의 흑갈색 피부 위에 젖은 물방울이 반짝거렸다.

박수소리가 더욱 커지다가... 갑자기 멈췄다.

“......?”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무슨 일이 났나 궁금해진 쿠완타오가 보드를 멈추고 그 위에 올라앉은 채 해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쪽에는 별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쇳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아이구 저런! 젊은이 조심해! 파도가-- 검은 파도가-!!!”

“빨리 나와요! 빨리!”

“꺄악- 이미 늦었--!”

‘왜 저러지? 백상어나 범고래도 아니고 고작 파도 때문에? 이 근처는 그렇게 위험한 파도는 없...’

그러나 쿠완타오는 다음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거대한 타르의 장막이 그를 덮친 것이다. 아까는 모기소리만하게 들리던 정체모를 쇳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우고 미친듯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조용하던 해변은 삽시간에 비명과 경악으로 가득 찼다.

신이 아니더라도 그 무언가가 노한 것만은 확실했다.



10



“경찰은요?”

“신고를 받고도 한참 늑장을 부리다가 그 끈끈이들이 바다로 돌아간 뒤에야 나타났지. 차도 영화에서 본 것처럼 미끈한 코르세어가 아니라 너무 낡아서 털털거리는 포니테일이었어.”

“그럼 부두교 주술사나 작살을 들고 덤벼든 줄루족 전사들은요?”

“다들 도망치기 바빠서 확실한 건 아니지만, 주술사로 분장하고 관광객과 사진을 찍던 장사꾼이 얼떨결에 말려들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게다가 줄루족이 사는 곳은 그 지방과 정반대편이고 그들은 평상시에 창을 지니고 다니지도 않아.”

“......너무해...”

이모는 조카의 질렸다는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 뒤에 녀석은 유로슈 쪽으로 방향을 돌려... 게르마니아 근해로 갔지.”

“아, 그 터프한 금발남자가 목숨걸고 크루즈 도중에 만난 아가씨를 구한다는 다이나믹하고도 닭살돋는 대목이요? 설마 그것까지 뻥은 아니겠죠?”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만,”

이모는 안경을 고쳐 쓰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단다.”



11



“지루하신가 보죠?”

크루즈의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20대 후반의 그 여자는 쾌활한 청년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황갈색 머리에 초록 눈을 하고 콧날이 오똑한 20대 초반의 사내가 칵테일 잔을 든 채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둘 다 어디선가 빌려온 듯 어색한 파티 복장을 입고 있다는 점은 똑같았지만, 그녀의 비쩍 마른 얼굴이 권태로움에 찌들어 있는 데 비해, 청년의 얼굴은 그런대로 기운차고 이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눈썰미도 좋으시지. 사실은 좀 지루했죠. 바쁜 친구 대신 온 건데 생각보다 별로네요.”

여자가 은발로 염색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을 받았다. 눈동자는 촉촉한 검은색이고 얼굴은 수척하지만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코는 약간 큰 편이었고 입은 보통이었다. 싸구려지만 세련되게 코디한 반지와 목걸이로 액센트를 준 것이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이해합니다. 이런 자리는 사실 오래 끌수록 재미가 떨어지거든요. 게다가 이쪽 바다는 파도도 없고 너무 단조로와서... 프로일라인...?”

“오로라 메른하이너예요. 게르마니아 연방의 향수는 모두 제 손을 거치죠.”

이제야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악수를 청했다.

“저는 루퍼트 딘입니다. 덴베른에서 직물을 거래하고 있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로라는 문득 바다를 쳐다보았다.

“직물을 취급하신댔죠? 그럼 이제까지 꽤 다양한 빛깔의 천을 보셨겠네요?”

“그거야 물론이죠.”

“그럼 저 바닷물같은 빛깔도 있었나요?”

“글쎄요. 바닷물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데... 어떤 색깔 말씀이시죠?”

오로라는 뭔가에 홀린 듯 계속 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검푸른... 아니 칠흑같이 검고 깊은... 어딘가 녹색 기운도 감돌고... 만지면 진흙처럼 철벅거릴 것만 같은... 거기에다 더해서 몇 가지 향수를 잘못 섞어서 뿌린 듯한 역겨운 향내도 느껴진다면 좋겠죠. 마치...”

루퍼트는 그녀의 말을 듣고 당황스런 표정이 되어 바다 쪽을 돌아보았다.

“메른하이너 씨, 그건 정상적인 바다의 빛깔이 아닙니다. 어떻게......”

오로라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말을 맺었다.

“그래요, 마치 ... 벨벳 커튼 같은...”

“.......................!!!!”

그때 기관실 쪽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유람선의 한쪽 끝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두 사람이 놀라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선내 방송이 들려왔다. 당황과 짜증을 반쯤 섞고 그 위에 혼란스러움으로 소스를 친 듯한 째지는 목소리였다.

“저는 이 배의 선장입니다. 승객 여러분께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만, 지금 즉시 선실로 들어가셔서 피난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짐을 줄이고 귀중품만 챙겨서 구명정 쪽으로 가십시오. 저희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침착하게...... 우아악!”

어느새 주변을 뒤덮고 있던 콜타르의 막이 배 위로 슬금슬금 기어올라오더니, 선장실 창문으로 스며들어가 그 속을 국자처럼 휘젓고 있었다. 배의 절반 가량을 침식해 들어간 그 모습은 마치 옛날의 싸구려 괴물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바다문어를 연상케 했다.

선원 몇명이 소방용 도끼를 들고 달려나와 선장실로 치고 들어가려 했으나 도무지 파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 질척거리는 덩어리는 즉석에서 검은 촉수를 계속 만들어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휘감고 공중에 들어올려 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이들의 비명과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자들의 노성[怒聲]이 불협화음의 유쾌한 하모니를 이루며 유람선 안에 시끌벅적하게 울려퍼졌다.

“-우리도 빨리 도망쳐야겠네요... 그렇죠? 딘 씨? 루퍼트?”

오로라는 루퍼트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저 촉수에 잡혔거나 선실로 도망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녀는 바닥을 가득 메운 콜타르의 추적을 피해서 구명정 쪽으로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기분나쁜 검은 물결은 마치 의지를 가진 자벌레처럼 바닥을 뒤덮으며 착실하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쇠붙이를 쇠붙이와 맞부딪히는 듯한 껄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우아하지 못한 크루즈가 어디 있담! ... 우우, 그레타 그 계집애.... 만나기만 해봐라! 반쯤 죽여놓을테니까---!’

그녀는 콜타르의 막에 달라붙어버린 가짜 에멘탈 구두를 벗어버리고 맨발에 불이 나도록 뛰었다. 배가 점점 옆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람 살려-!! 살려줘요-!! 내겐 홀어머니가 계시다고-!!!”

“-맙소사! 딘 씨!”

오로라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루퍼트가 검은 촉수에 양발이 묶인 채 꼴사나운 자세를 취하며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저거 얼굴만 반반하지 행동력은 영 아니잖아?

구명정 쪽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어쩔까 고민하던 오로라의 다리에도 검은 점액질이 휘감겨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발을 빼면서 옆 테이블에 올라와 있던 장식용 촛불을 집어들고는, 그 버릇없는 물체에 대고 휘둘렀다.

“저리 가---!!!”

그러자 놀랍게도 그 물체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스르륵 물러났다.

오로라는 놀란 얼굴로 손 안의 빨간 촛불과 그 점액질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뭔가 깨달은 얼굴로 아직 붙잡히지 않고 도주중인 사람들에게 외쳤다.

“불! 불을 붙여요! 불을 겁낸다구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사람들은 그녀가 시범을 보이자 비로소 그 말뜻을 알아듣고 여기저기서 불을 붙이거나 빼 와서 콜타르의 덩어리에 대고 맹렬하게 휘둘러댔다. 덕분에 촉수에 잡혀있던 몇몇 사람들도 구출되었다.

“에잇, 이거나 먹어라!”

“영차!!!”

루퍼트는 오로라가 다른 승객들과 함께 조리실의 재래식 오븐을 통째로 들고 와 촉수 곁에 던져놓고 폭파시킨 덕에 풀려날 수 있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빌려온 연미복이 너덜너덜해지고 머리 앞부분이 불에 그을리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구명정을 타고 횃불을 휘둘러가며 그 해역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어... 고맙습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아직도 거꾸로 매달렸을 때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루퍼트는 말을 더듬어가며 오로라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피곤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막으면서 자상하게 한마디 했다.

“짐이 되지 않는게 도와주는거예요.”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12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각색을 해먹을 수가 있죠! 영화에서는 남자가 아주 잘난듯이 그 대사를 하던데! 꿈이 왕창 깨져버렸어.”

“오로라는 그후 세계 각지에 지점을 갖고 있는 향수회사의 중역이 되었어. 그러다 우연히 우리 모국에 홍보차 들렀었는데, 마침 내가 심포지엄 때문에 묵고 있던 호텔의 옆방에 투숙했지. 처음에는 식당에서 만나 시간때우기로 이런 저런 얘길 하다보니 거기까지 화제가 옮겨간 거야. 아마 그녀에게 저 영화를 보여준다면 배를 잡고 웃을 걸.”

“이거 정말 갈수록 흥미진진하네요. 다음으로 넘어가죠. 그래서 결국 아메리고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슈넬 대통령이 비상각료회의를 소집하여 울화를 벌컥 터뜨리고, 딕센의 양심적인 대주주가 자진해서 찾아와 해결책이 있다고 비굴을 떨어대며 안심을 시키죠, 이건 어때요?”

이모는 점점 길어지는 조카와의 대화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대답을 했다.

“각료회의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 대통령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 몇몇 요인들이 서류를 들고 오니까 살펴보고 사인만 했다더구나.”

“말도 안돼요! 그런 중대한 일을 그럼 대체 누가 결정했대요?”

“그 딕센의 ‘양심적인 대주주’지 누군 누구겠어.”



13



“...아직 저희들도 정확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최선을 다해서 상황을 파악 중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아 주시길 부탁.....”

딕센 오일 코퍼레이션의 대변인이 육지에 잡혀올라온 생선같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가며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대답하느라 땀을 빼고 있었다. 반쯤 하얗게 센 머리에 고급 코안경을 꼈지만 눈, 코, 입은 어딘가 잘못 붙어있는 듯한 애매한 인상을 주는 그의 얼굴은 그러잖아도 주름투성이인 판에 영업용의 거짓 미소까지 만들어내느라 더욱 더 주름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딕센 측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겁니까? 자칫하면 국제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요.”

“어느 사건 말입니까? 벌써 레이시아 3개국, 파프리카 4개국, 유로슈 2개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골치가 아픕니다. 하지만(그는 이 말을 특히 강조했다 - 기자 양반, 굵은 활자에 대문자로 써 주시오, 대문자로!), 그 중에서 딕센의 유조선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코레니아Corenia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건 뿐이니 섣부른 보도는 삼가 주십시오!”

대변인은 더욱더 궁지에 몰리는 느낌을 받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아메리고에까지 그 ‘괴물 콜타르’가 상륙할 가능성도 있습니까?”

열이 오를대로 오른 대변인은 심술궂게 쏘아붙였다.

“---당신같으면 그러길 바라겠습니까?!”

그는 밀려드는 기자들의 손을 뿌리치고 비호같이 차에 올랐다.

그를 태운 승용차는 한참동안 달려가다가 교외의 호화주택 앞에 멈춰섰다.

“와일리 씨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른 손님들도 와 계시고요. 이리로.”

대변인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을 겸한 중앙식당으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이 엄숙한 얼굴로 둘러앉아 있었다. 매서운 눈초리를 자랑하는 회계감사국의 국장에서부터 목석같은 얼굴을 한 국방부 차관, 젊고 재기발랄하지만 다소 주눅이 든 듯한 국제법률사무소 직원, 당찬 얼굴로 사람들을 응시하는 환경운동단체의 간사, 도대체 무슨 일로 자기를 불러왔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만 굴리는 생물학자에 이르기까지 별별 인간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상석에서 그들을 아우르며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딕센의 최고 주주이자 공동창립자인 버나드 T. 와일리였다.

오뚜기 같은 둥글넓적한 체형에 윈스턴 처칠같은 허수룩한 얼굴을 하고 솥뚜껑 같은 손으로 테이블을 툭툭 쳐 가며 수리부엉이같은 눈빛으로 방 안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와일리의 존재감은 가히 한폭의 그림 같았다. (그게 예술적으로 가치있는 그림이 될지 어떨지는 별문제로 하고)

대변인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보고 사태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들은 분명 아무 일도 없는데 한가로이 저녁식사나 하려고 일부러 모일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정재계에 폭넓은 인맥을 지니고 있는 와일리의 저녁식사는 펜타곤 국방회의만큼의 무게를 갖고 있다는 우스개까지 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음, 왔구만, 아치. 거기 앉게나. 여러분. 우리 딕센의 대변인인 아치볼드 R. 해롤슨 씨를 소개하겠소. 아주 유능한 친구지.”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간 뒤에 좌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면 이제 올 사람이 다 왔으니, 얘기를 시작해야겠군. 그러잖아도 바쁘신 분들을 이렇게 모이시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해 11월부터 근 8개월 동안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그... ‘괴물 콜타르’에 대한 것이오. 아직 제대로 된 이름이 없으니 그냥 이걸로 부릅시다.”

사틴-파프리카 혼혈인 환경운동가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애초에 그 소동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딕센이 아니었소? 그런데 이제와서 당신이 연방정부라도 되는양 이렇게 회의를 연다는 건 언어도단...”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오. 아시다시피 그 괴물을 만들어낸 건 우리가 아니오. 아니 말하자면 우리는 부분적인 원인제공은 했을지 몰라도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은 아니라는 얘기요. 해양운송의 역사 중에서 유조선 전복사고는 골백번도 더 있었지만 이번 같은 결과를 초래한 사고는 한 번도 없었소. 그것은 곧...”

“뭔가 다른 이유가 더 개입했을 거라는 말입니까?”

단발의 여성인 회계감사국장이 납세거부자를 심문하는 듯한 얼굴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렇소.”

와일리는 정치적인 의도가 빤히 보이는 고양이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

“하지만 그 원인이란 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 와일리씨는 알고 계신지요?”

금발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갖춘 젊은 남성 법률가가 눈을 빛내며 질문했다.

“그 때문에 바로 여기 계신 엔리코 살바토레 박사를 모셔 온 겁니다.”

“저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그 사틴계의 중년남자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분야는 우주에서의 생물학 응용이지 석유제품이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천만에요. 박사님이 유로슈연합의 우주탐사에 관여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건 사실이지만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게슴치레한 눈으로 살바토레를 바라보던 와일리는 군장성에게 부탁한다.

“아그니 스리파젠다 소장, 당신이 설명해 주시겠소?”

목석같은 얼굴의 그 브라만 여성 군인은 단련된 거구를 벌떡 일으키고는 중앙의 스크린 옆에 가서 섰다. 방 안이 어두워지고 슬라이드가 작동되었다.

“이것이 작년 10월에 코레니아 서해에서 일어난 유조선 전복사고의 상황 사진들입니다. 자세한 경과는 이미 언론을 통해 수 차례 보도되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은 중대한 사항이 한 가지 있었지요.”

사진이 바뀌었다. 불국사 3층석탑만한 유선형의 인공물체가 화면에 나왔다.

“유로슈연합이 쏘아올린 무인탐사선 사그라다-5입니다.”

살바토레가 움찔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 탐사선은 해왕성과 최근 새로 발견된 제10행성 ‘데카’를 돌아본 다음에 귀환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제 시스템의 고장으로 인해 본래 착륙지인 이스파니올라 대신 엉뚱한 코레니아 앞바다에 추락했습니다. 그 때문에 연합에서는 코레니아 정부의 허가를 받고 조사선을 보내어 데이터를 회수하려 했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파이어 피쉬’호가 전복된 것이로군요.”

대변인이 알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그니 소장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 정보부에서는 이 캡슐에 실린 화물 중에 무언가가 파이어피쉬에서 유출된 석유성분과 반응하여 이번의 사고를 촉발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로서는 유로슈연합이 이 탐사선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를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입니다.”

그에 이어 와일리의 사정없는 추궁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도토레[닥터] 살바토레, 그 탐사선에는 무엇이 실려 있었습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을 싣고 돌아올 예정이었습니까?”

얼굴이 창백해진 살바토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꺼냈다.

“글쎄요... 워낙 사소한 일이라 지금 와서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기밀도 아니고 하니... 사실 그 캡슐에는 제10행성에서 발견한 전혀 새로운 종류의 미생물 화석이 담겨 있었습니다. 너무나 중대한 발견이라 일단은 비밀로 하고 증거품이 우리들 손에 도착한 연후에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그만 사고가 일어나서... 수습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결국 발표를 못했죠. 증거물은 커녕 탐사선의 잔해도 못 찾았으니...”

불이 다시 켜졌다. 와일리가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든 게 들어맞는군. 그게 화석이 아니라 일시적인 가사상태였다고 하면...”

환경운동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네 얘기는... 이게 단순한 지구적 환경파괴 문제가 아니라 우주 생물의 침략이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아니, 이게 무슨 만화도 아니고...”

살바토레가 강변했다.

“엄밀히 말하면 침략은 아닙니다. 석유로 인한 바다오염은 유조선 사고나 폐기물의 무단투기, 심지어는 프린터 카트리지의 재활용을 게을리하는 데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겁니다. 조건은 우리 인류가 이미 만들어 두었던 것이죠. 저 생물은 우연히 우리가 멋모르고 깔아둔 멍석에 날아들어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인과응보란 거지요.”

참가자들이 저마다 다른 의견을 꺼냈고 테이블 주위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와일리가 테이블을 두들기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지금 우리는 잘잘못을 따지려고 여기 와있는게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태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메리고에도 ‘괴물 콜타르’는 쳐들어올 겁니다. 이미 전 지구 해양 중에서 4분의 3이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메리고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막는단 얘깁니까? 지금까지 알아낸 건 기껏해야 녀석들이 불을 무서워한다는 건데... 세계의 바다를 한꺼번에 홀랑 태울까요?”

회계감사국장의 깐깐한 발언에 모두들 웃음보를 터뜨렸다.

와일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말을 받았다.

“그것도 가능한 방법 중 하나지만 되도록이면 최후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소. 지금은 차선책을 궁리하는 중이지요. 이 일에는 각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실무에서 뛰어줄 수 있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오. 살바토레 박사, 당신은 유로슈연합에 이 이야기를 확실하게 전해주길 바라겠소. 대통령께는 아그니 소장과 델핀 국장께서 잘 말씀드려 주실 거라 믿소. 다른 방면은 내가 맡도록 하지.”

살바토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의심스런 표정이었다.

와일리의 고개짓에 아그니 소장이 불을 끄고 슬라이드를 다시 작동시켰다.

“바로 이 사람이 우리에게 그 방법을 알려줄 것이오. 아니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믿고 있소.”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화면을 지켜보았지만 그들은 와일리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건지 의아해했다. 화면에 비친 사람은 도수가 매우 높은 안경을 끼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가닥으로 땋은 동양계의 젊은 여성이었다.

사진에 찍힌 그녀는 장갑낀 손으로 시험관을 들고, 떫은 감이라도 삼킨 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하얀 가운 차림으로.

“레이시아인?”

“생화학자입니까? 하지만 너무... 젊군요. 그다지 알려진 얼굴도 아니고.”

“정말로 맡겨도 괜찮은 겁니까? 버나드... 당신은 애초부터 황당한 짓거리로 유명하긴 하지만 이번만은 좀 도가 지나쳐요.”

와일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가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난 승산 없는 일에는 돈을 걸지 않소.”

그는 담배 연기를 허공에 뿜어대며 5년 전 세계석유박람회에서 그를 찾아와 모종의 프로젝트에 지원을 해 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렸던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을 잠시동안 생각했다.



14



“드디어 주인공 등장이네요.”

“글쎄, 주인공이라 해야 할지 어떨지... 하지만 해럴슨 씨가 들려준 얘기로는, 그때 와일리의 태도는 아주 결연해서 거기 모인 사람들도 감히 거역하지를 못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도무지 모를 일이야. 그전에 박람회에서 그의 호텔방까지 쳐들어가 ‘당신의 석유로 더럽혀진 바다에 책임을 져야 할거 아니냐’고 소리를 질러댔을 때는 아무 말도 없이 경비원을 시켜 쫓아낸 주제에.”

“그 해럴슨이란 영감, 작년에 장례 치른 그분 맞죠?”

“그래, 그때도 내가 마침 여기에 왔었지. 그 옹고집 와일리를 보좌하느라 속깨나 썩었던 모양이더라. 어찌나 줄담배를 피웠는지 폐가 다 타버렸다더구나.”

얘기를 듣던 조카는 갑자기 미심쩍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째서 영화는 이모에 대해 한마디도 안한 거죠?”

이모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테이블보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자식들에게 속았거든.”



15



“FIRE[발사]!”

고압전류와 화염방사기로 삼엄하게 경비되고 있던 폐수처리장 안으로 정체가 심히 불투명한 무선 유도식 미사일 세 발이 발사되었다. 각각의 미사일은 외부의 유도에 따라 자로 잰 듯 정확한 궤도를 그리며 처리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점액질의 웅덩이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일어난 것은 폭발이 아니었다. 웅덩이 상공에 도착한 미사일의 탄두 외피가 갑자기 벗겨지면서 수백 수천 개의 조그만 시험관이 튀어나와 점액질 위로 후두두두둑 떨어져내렸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계속해서 꾸물거리던 점액질 덩어리가 갑자기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갖가지 소용돌이를 그리더니, 스스로가 내부로부터 분해되어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점액질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몇 가닥의 흐늘거리는 나일론 실타래와 맑은 물만이 남아 있었다. 물론 쇳소리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커다란 모니터 몇 개와 복잡한 기계류가 널려 있는 어느 커다란 방 안에서 헤드세트를 착용한 군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결과를 체크하고 데이터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젊은 동양 여자와, 주걱턱에 싱글벙글한 웃음으로 속을 감추고 있는 억센 서양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정면 모니터에는 폐수처리장 안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영상과, 전자 현미경을 통해 확대된 세포 모식도[模式圖]같은 것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면, 모양이 확연하게 다른 두 가지 세균 비슷한 물체가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입니다. 모두가 박사님 덕입니다.”

“수식대로 정확히 만들었으니 결과가 제대로 나오는 건 당연하지요. 그리고 저는 아직 박사가 아닙니다. 학위를 따지 못했으니까요.”

그 젊은 여자가 차갑게 말했다. 한갈래였던 머리는 이제 두갈래로 땋아내리고 있어서 마치 여러 해 유급한 여고생같은 인상을 주었다. 연구용 가운에 붙은 ID카드에는 <한청[韓 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음,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몹시 당황스런 표정으로 아메리고 육군 제81기갑사단 소속의 더들리 헬마우스 중위가 대답했다. 동맹안보를 위해 남부 코레니아에 수십년간 주둔해 오면서 신물나게 많은 현지인들을 만나봤지만 이런 인물은 처음이었다.

그가 만난 현지인들은 대부분 두 가지 유형 중 하나였다. 자기에게 빌붙어서 아첨을 일삼으며 동족들 앞에서는 자기도 아메리고인인 것처럼 위세를 떠는 부류와, 아메리고에 관련된 일에는 무조건 핏대를 세우며 열혈과 고집으로 맞서는 부류. 대체로 이런 유형이 아니면 이들 유형이 혼합되어 있거나 때에 따라 바뀌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여자는 자기의 연구와 생활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모든 일에서 태연자약하고 담백한 태도를 취했다. 때로는 그게 지나쳐서 아메리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들을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헬마우스 중위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하지만 그녀가 해낸 일은 분명 놀라운 것이었다. 재야 연구자로서는 더더욱.

“이제 실험 결과를 공표하고 저 미생물탄을 대량생산해서 전세계에 보급하면 세계는 구원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 냈습니까?”

“우연이죠 뭐. 바다가 썩어들어가는 걸 보자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석유성분을 정화하는 동시에 다른 생물에게는 무해한 미생물을?”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뭐, 자금이 장난 아니게 들어가서 너무 비현실적이란 이유로 연구실에서는 사실상 매장당한 터였지만 말이죠. 그런데 발표는 언제 하죠?”

“곧 하게 될 겁니다만... 한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헬마우스의 어조가 갑자기 심각해진 것을 알아차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들으면 실망할 이야깁니까?”

“실은 그렇습니다. 상부에서는 이 연구를... 한박사, 아니 한 조교수님이 아닌 저희 연구팀의 명의로 발표하고 전세계에 보급했으면 한다고 전해 왔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조치이고, 조교수님께는 응분의 보상이...”

“-대단히 고맙군요.”

그녀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솟아나오는 화를 억제하며 말을 받았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요?”

“그러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헬마우스가 손가락을 움직여 딱 소리를 내자 우락부락한 헌병 둘이 서류뭉치를 들고 달려들어왔다. 여성 한명, 남성 한명으로 둘 다 눈매가 심상치 않았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것은 아메리고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세계의 이익을 위한 겁니다. 계속해서 협조만 해 주신다면 대가는 약속하겠습니다. 전에 쫓겨나셨던 연구실로 돌아가실 수 있게 주선해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단지 이 서류에 서명만 해 주시고 모든 연구자료를 저희에게 넘겨주시면 모든 게 끝납니다. 물론 이후에도 본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해 주셔야겠죠.”

헬마우스의 신사적인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두 헌병은 눈을 부릅뜨며 인상을 썼고, 위협적으로 손가락 마디를 꺾어대기 시작했다. 가슴의 홀스터에서는 언제라도 빼들 수 있도록 준비해둔 권총이 말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세 사람과 모니터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헌병이 건네준 펜을 받아서 서명을 했다.

“자료는 당번병을 통해 제출하지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공표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이걸로 지구는...”

“-딕센은 아직도 이렇게 치사하게 일을 한답니까?”

헬마우스는 속으로는 당황하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얼버무렸다.

“무슨 말씀을... 저희는 어디까지나 연방정부의 결의로...”

“순진한 얼굴 하지 말아요. 그 배후에 딕센의 로비가 있다는 건 알만한 얘기죠. -이봐요 중위, 혹시 당신에게 그럴 권한이 있다면 그 늙어터진 와일리 영감에게 가서 똑똑히 전하세요. 앞으로는 제발 이렇게 살지 좀 말라고.

안 그러면-”

헬마우스는 순간 그녀의 두 눈 속에서 초신성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움찔했다. 저런 눈빛을 또 어디서 보았더라? 바라비아의 뜨거운 사막?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여든 어떤 광장? 어쨌든-

“안 그러면 뭡니까?”

“-그때는 진짜로 지구 전체에 불을 질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얼음장같이 단호하게 잘라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갔다. 기세에 눌린 헌병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두터운 강철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잠시 후에 문 저편에서 누군가가 발로 걷어찬 듯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헬마우스는 웃는 얼굴로 부하들을 돌아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16



“-그게 끝이야.”

“그런 법이! 어떻게 이모의 연구를 가로채고도 한마디도 안한 거죠?”

“결국 그 덕에 입막음으로 연구비 몇푼을 얻고 연구소에도 복귀하게 되었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았어. 마치 자식을... 아니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먹은 느낌이었거든. 동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겠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지.”

“삼십년간 안 터뜨리고 용케 살아오셨네요. 저 같으면...”

“말해봐야 믿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한동안은 아메리고 정보부가 친절하게도 감시까지 붙여줘서 나는 할 수 없이 연구에만 몰두했었다. 그러는 새 이십년이란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어. 감시가 덜해지고 내 지위도 확고해진 건 그때 쯤이었지.”

“그래도 십년 전인데, 그때는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이미 괴물 소동이 일단락되고 그 일로 인해 아메리고의 위상과 딕센의 기업 이미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있었거든. 다윗같은 용기를 가졌다고 해도 아무런 준비 없이 덤벼들기는 힘들었지. 게다가 사람들은, 이미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을 잃고 재미나는 이야기거리로만 받아들이더라구. 그러니 어쩌겠니?”

이모는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역시 딕센이 설치고 다니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 나는 연구만 하는 척 하며 방금 네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여러 경로로 모으고 정리했단다. 언젠가는 세상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조카는 이 엄청난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듣다가, 곁에 누군가 놓아 둔 신문지를 무심코 펴 보았다. 여러 기사들 중에 ‘버나드 T. 와일리 드디어 대선 출마!’라는 헤드라인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녀는 이모를 자극할까 걱정되어 그 신문을 다시 접어놓고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 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한 말을 와일리가 전해 들은 건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뻔뻔한 영화를 만들 리가 없지. 지구에 정말로 불을 지르다니!”

그녀의 두 눈에 30년 전과 똑같은 불꽃이 되살아났다. 초신성의 불꽃이.

“아................”

그제서야 조카의 얼굴에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떠오른 것을 깨달은 부인은 자기 잔에 남은 차를 순식간에 다 비웠다. 차가운 액체를 너무 급하게 넘긴 탓에 목이 아팠다.

“그만 일어나자.”

그들은 카페를 떠나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를 걸어갔다. 그러다가 중간에 우체국을 발견한 중년부인은 조카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그리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이모가 나왔을 때, 조카는 그녀가 아까 들고 있던 커다란 소포 뭉치를 지금은 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모는 그것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에게도 말 안할테니 좀 알려주세요. 그거 뭐였어요?”

“아니 안돼, 말해줄 수 없어. 내가 일부러 아메리고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 영화 때문인줄 알겠지만, 실은 이쪽이 더 중요했지. 그 이상은 비밀이야. - 사실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어. 이걸 정말로 해야 하나? 하고. ...하지만 그 멍청한 영화를 보면서 그걸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굳힐 수가 있었단다.”

조카는 골이 나서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데, 너는 남자친구 만나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흥, 이모의 그 황당한 얘기 때문에 다 물건너갔어요. 책임지세요.”

“하여튼 요즘 애들은 제멋대로라니까! 좋다. 오늘 저녁은 내가 사마.”

“우후후.”



17



그로부터 정확히 24시간 후.

여전히 딕센의 대주주이자 대통령 출마자로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던 칠순의 버나드 T. 와일리는 생일 만찬 도중에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특송으로 배달된 어떤 소포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참석한 손님들은 모두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례적인 박수갈채와 환성을 일발 장진한 채.

옆에서 보고 있던 붉은머리의 측근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물어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음, 별거 아니지만... 분명 내가 전에 거래했던 회사에서 보낸 걸로 되어있긴 한데, 잉크나 문양이 좀 어색하군... 내용물도 뭔지 모르겠고. 자네가 한번 열어보겠나?”

“그렇게 하죠.”

하지만 그 포장을 뜯어 본 측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에 금속 케이스가 들어있는데, 그냥 열 수는 없게 되어 있군요.”

와일리는 길쭉한 케이스를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쪽 구석에 PUSH라고 적힌 지문 모양의 단추가 있었다. 와일리 본인의 지문을 감지해야 열리도록 자물쇠를 걸어둔 모양이었다.

“검사는 제대로 했겠지?”

“금속탐지기, 폭발물 탐지기, 세균탐지기, 전부 OK입니다.”

“꽤 거추장스럽게 하는 선물이군. 그럼 일단 열어봐야지.”

“해체업자를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건 내 체면과도 관련된 문제야.”

걱정스러워하는(그중 반 이상은 그런 체만 했지만) 사람들의 눈 앞에서 그는 마침내 자물쇠에 오른손 검지를 가져다댔다. 찰칵 소리와 함께 케이스가 반으로 갈라지고 내용물이 드러났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이건!!!!!!!!!!!!!!!!!!!!!!”

와일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급성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정신차리십시오! 주치의!!!”

측근과 급히 달려온 의사가 정신없이 그를 구호하는 동안, 옆에 있던 비서가 와일리의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힘없이 구르고 있던 그 내용물을 집어들고 살펴보더니 역시 깜짝 놀랐다.

낡은 잼보니 병 안에서 검푸른 점액질 한 조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돼’라는 쪽지와 함께.





THE END!




Original (C) ZAMBONY 2003.06.11.

Revision (C) ZAMBONY 2003.06.13.

:
위로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RSS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