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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6] 인생설계사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2
 





<< 인생설계사 >>

Life Planners







“야, 말라깽이!”

나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쭈뼛거리며 돌아보았다.

혹시 꿈에서라도 만날까 두려운 얼굴들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아직 귀는 안 먹은 모양이네? 지금, 가지고 있냐?”

하교길에 이런 외딴 골목이 있다는 것은 교육정책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때문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이런 애들에게 당해야 하니까.

“뭐, 뭐를 말야?”

나의 자신없는 대답에 그들 중 제일 눈매가 매서운 한 명이 짜증을 냈다. 길게 기른 머리를 불가사리 모양의 머리핀으로 꾸민, 보통 키에 약간 얼굴이 긴 2학년생이었다. 반팔이라 노출된 팔 여기저기에는 조그만 상처자국들이 있었고, 왼쪽 뺨에도 십자 모양의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교복도 어딘가 삐딱하게 입고 있어서 영 인상이 험악했다. 선도부장이 자기 언니만 아니었다면 걸려도 벌써 걸렸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애가 듣는 데서 그런 얘길 하면 안된다는 것 쯤은 나도 알고 있다.

“이거 안되겠네. 전번에도 그렇게 어물쩡 빠져나가려 하더니 말야.”

그애를 둘러싸고 서 있던 꺽다리와 통통이 두 명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러게. 진짜 한번 매운 맛을 봐야 쓰것구나, 응?”

나는 뒤로 돌아서 그 골목을 서둘러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반창고 붙인 애의 눈짓 하나에 다른 두 명이 재빨리 내 양옆에 붙어서 팔 하나씩을 단단하게 붙들고 나를 찍어눌렀다. 인상을 잔뜩 구긴 반창고가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와, 손가락으로 내 턱을 치켜세우고 억지로 자기를 올려다보게 했다.

“도망가시겠다고? 그렇겐 안 되지.”

“미...미화야, 그러니까 그게 안 주겠다는 게 아니고... 아직 엄마 월급날이 안 돼서 집에 돈이 없거든...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안될까?”

“그건 네 사정이고. 갚을 건 갚아야지. 니네 엄마 지갑을 뒤지던지 어쩌던지”

“난 그런 건...”

그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매몰차게 내 뺨을 한대 올려붙였다. 안경이 허공을 가르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웃기고 있네! 이 풍진 세상에 너만 혼자 잘났고 우리는 다 악당이냐? 잘 들어 한유진. 우리가 뭐 우리만 잘먹고 잘살자고 달라는 건줄 알아? 니네같은 약골들 보기 딱해서 보호해 주겠다는데 웬 군소리야.”

내가 언제 보호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나?

“어쭈, 눈초리가 왜 그래? 꼴리냐?”

나는 황급히 눈동자에 드러난 불만의 기색을 지우려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무슨...”

“꿇어.”

“제발, 그것만은...”

“꿇으라고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릎을 꿇은 채로 아무 반항도 못하고 세 명의 발길질을 견뎌내는 건 치욕이었다. 나는 그 말대로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나를 붙들고 있는 두 손아귀에 힘이 들어와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 실랑이의 와중에 내 책가방이 땅에 떨어져 힘없이 나뒹굴었다.

“이게!”

나는 팔꿈치로 내 오른팔을 붙들고 있던 홀쭉한 애의 배를 쳤고 그 애는 낮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다. 왼팔을 붙잡고 있던 통통한 애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왼팔을 세차게 흔들어 그 애를 옆으로 밀었다. 보다 못한 반창고가 앞으로 달려나와서 내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아랫배를 사정없이 쳤다. 구역질이 밀려왔고 의식이 아득해졌다.

“네가 감히 우리 <서태후>를 물로 봤다 이거지?”

“욱, 캑캑.... 아우”

“더이상 봐주지 않겠어. 각오하라구!”

“너희들 무슨 짓이야?”

갑자기 끼여든 누군가의 목소리에 놀란 나는, 아픔을 참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안경이 없어서 사물이 온통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내 단짝친구의 것이라는 사실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당장 그만둬. 세명이서 하나를 괴롭히다니 너무해.”

반창고가 구겨진 인상을 더욱 구기며 도도하게 내뱉었다.

“강규연, 너하고는 상관없잖아? 학원땜에 바쁠텐데 빨리 가던 길이나 가셔.”

“상관 있어.”

나는 어설프게나마 괜찮으니까 놔두라고 말하려 했지만, 반창고가 또 한번 내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결국 희미한 신음소리 몇마디만 낼 수 있었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래, 어쩔건데? 선생에게 고자질이라도 할래?”

반창고가 나를 다른 두 명에게 내던져 주고 나서 그애를 노려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은 반창고였다. 그애는 고양이가 참새를 잡아채듯 날카로운 동작으로 규연이의 땋은 머리를 잡아채고 목을 붙잡았다. 규연이는 상대의 가슴을 밀치고 빠져나오려 했지만 반창고는 무릎찍기로 규연이의 넓적다리를 치고 그애를 넘어뜨렸다.

규연이는 일어서려고 버둥거렸고 다른 두 명에게 붙들린 채 잘 안 보이는 눈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어떻게든 도우려고 기를 썼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눈물이 나오고 터진 입술이 쓰라렸다.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이 골목에 차가 다닐 리가...”

“바보, 그게 문제야? 어서 길 옆으로 피해!”

“안되겠어! 너무 가까워!”

“--우라질!”

가까스로 반창고와 그애의 부하들은 옆길의 쓰레기통이나 전봇대 뒤로 피했지만, 위를 보고 넘어진 채 일어나려 애쓰던 규연이는 아직 일어나지 못했고, 붙잡혀 있다가 갑자기 풀려난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리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중간한 거리에 서 있는 나로서는 어느 쪽이든 가능했다. 규연이 쪽으로 달려가 그애를 구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못본 척하고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경이 없어서 잘 안 보이는 지금으로서는 뭔가를 하려고 해도 자신이 없고 움직임이 둔해질 터였다.

제대로 생각한다면 못본체하고 피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논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규연이는 나를 생각해서 일부러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여기까지 와서 싸움까지 걸었다. 그냥 저대로 버려둔다면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내 책임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여전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후들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동안에도 보라색 승용차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 앞이 어두컴컴해지고 익숙한 풍경이 자취를 감추었다. 발 밑의 땅이 석고같은 하얀색으로 물들었고 어둡던 사방도 똑같은 흰색으로 차차 바뀌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희어서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때가 묻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리둥절한 나머지 눈을 껌뻑거렸다. 달려오던 자동차도, 쓰러져 있던 규연이도, 서태후 패거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한쪽 바닥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내 안경임을 알고는 급히 주워들어 얼굴에 썼다. 알에 흙이 묻어서 엉망이었지만 다행히 금은 가지 않았고, 안경테도 크게 망가지지 않아서 안심이었다.

“.....................어?”

안경을 쓰자 그냥 흰색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 생각했던 주변의 모습이 약간 다르게 보였다.

그곳은 엄청나게 넓은, 대강당이나 체육관을 넘어설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머리 위 저 높은 곳에는 하얀 천장이 뻗어 있고, 내가 서있는 곳 주위에는 온통 하얀 책상들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얀 칸막이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들 앞에는 각각 몸에 딱 붙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피부와 머리색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백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그들 중 일부가 들여다보고 있는 컴퓨터를 닮은 기계의 스크린도 백색바탕에 회색 문자로 세팅되어 있었다.

나는 대체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어서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어라? 당신은 여기 사람이 아니군요. 어떻게 들어왔죠?”

뒤를 돌아보니 역시 상하로 나누어지는 흰 옷을 입은 어떤 소년이 서 있었다.

“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소년은 나보다는 연하로 보였지만 얼굴은 어딘가 노숙한 티가 났고, 머리는 아까의 자동차와 똑같은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군데군데 자주색으로 액센트를 주었다. 위에는 두루뭉실하게 생긴 흰 블라우스셔츠와 흰 조끼를 입고 아래에는 재질이 뭔지 궁금한 흰 바지를 입었으며 발에는 얼마 전 단체관람에서 보았던 발레 댄서를 연상케 하는 흰 슈즈를 신고 있었다. (발끝을 들고 걷지는 않았지만)

외국인인 듯한 외모로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게 되게 신기했다.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이네... 여긴 클라이언트client가 올 수 없는 곳인데... 죽었든 살았든 간에 말이죠.”

그는 손으로 턱을 괴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말야, 여기는 대체 뭐하는 곳이야? 난 골목길에서 차에 치일 뻔..”

“--인생설계사의 집합소지.”

오른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그쪽에는 레게파마를 하고 익살스런 미소를 띤 채 담배 비슷한 것을 피우며 연기를 뿜는 갈색 피부의 아저씨가 서 있었다. 복장은 다른 이들과 똑같았지만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거울처럼 앞이 비치는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연기를 뿜어댔지만 이상스럽게도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연기가 아니라 무슨 수증기나 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생설계사요?”

“응.”

“그럼...무슨 보험회사 같은 건가요? 우리 엄마도 보험공단에서 일하시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의미를 찾아보려고 말을 계속했다.

“아니, 이름은 비슷하지만 좀 달라. 예를 들자면...”

소년이 당황하여 그의 말을 막으려 했다.

“키리에, 이 사람은 클라이언트야. 그런 걸 함부로 알려주면...”

“뭘 그리 딱딱하게 구냐, 새미? 어차피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저쪽에 돌아가서 말해봐야 아무도 안 믿을 걸. 어쨌거나, 이렇게 ‘흐름’이 뒤섞이는 일은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인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명 저 위편 FCS 친구들이 간밤에 잼보니를 너무 과하게 한 탓이겠지.”

“FCS라뇨?”

“흐름총괄국Flow Control Station이지. 권한은 세지만 바보들이 많아.”

“거긴 또 뭐하는 곳인데요?”

“쉿.”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을 거의 무시하고 그 아저씨는 내게 다가와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나는 멈칫하며 그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요!”

“오, 낯선 사람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거로군? 실례.”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1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때의 그 지하실이 생각나 밤에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것이 한두번이 아니어서 그러잖아도 걱정이 많은 엄마를 더욱 걱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몇 번은 저도 모르게 학교 옥상에까지 올라갔다가 차마 뛰어내리지는 못하고 다시 내려오곤 했다. 세상에 엄마와 나 둘뿐인데 내가 없어지면 엄마는......

그는 더이상 묻지 않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소년도 우리 뒤를 따라왔다.

키리에라는 그 남자는 걸으면서 품에서 하얀 석판같은 것을 꺼내어 그 위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뭔가를 읽고 있었다. 나는 디지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 석판 위로 수많은 문자들이 마치 철가루를 넣은 장난감 칠판에 쓴 글자들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부잣집 막내딸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우리 반의 귀공녀 이소망도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다.

나는 아까의 질문을 계속하려 했지만 그는 나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석판에만 집중하며 끊임없이 하얀 칸막이들 사이를 걸어가다가 마침내 뭔가를 찾아낸 듯 얼굴이 환해지더니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틀었다. 나는 그에게 질문하는 것을 포기하고 소년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나도 모르니 묻지마’라는 얼굴로 외면할 뿐이었다.

“드디어 도착이다. 바로 여기군. -리사, 네 클라이언트가 찾아왔어!”

“뭐라고요? 농담이겠죠. 여긴 그쪽 사람이 올 수 없도록 되어...”

“그런데 왔다니까. 그게 바로 사는 재미지. -그건 그렇고, 휴지통 좀 빌려줘.”

칸막이 저편에서 약간 사팔뜨기 기미가 있는 눈을 한 금발 소녀가 일어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쓱해진 나는 그냥 한손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아, 안녕.”

“진짜네! 안녕하세요... 하, 이거야 정말!”

키리에는 벙글벙글 웃고만 있었고, 새미는 그 옆에서 툴툴거리는 중이었다.

“이 친구가 너를 담당하는 인생설계사야.”

“아, 그래요... 잘 부탁해.”

우리는 얼떨결에 악수까지 했다.

“근데...... 인생설계사가 대체 뭐지?”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말해줘도 되나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키리에는 담배 비슷한 그 물체를 하얀 휴지통에 버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요즘 나오는 구름말이CloudRoll는 예전만 못한 것 같군.”

새미가 그런 그를 흘겨보더니 몰래 그의 다리를 꼬집었다.





“당신들이 우리 세계 사람들의 인생을 조작한다구?!”

나는 순식간에 머리 위의 하얀 천장까지 뛰어오를 정도로 놀라서 소리쳤다.

리사가 어쩌면 좋을까 싶은 표정으로 말을 우물거렸다.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키리에가 태평스런 얼굴로 끼여들어 말을 정정한다.

“조작이라니 그 무슨 억울한 말씀을. 우리는 말 그대로 ‘설계’를 해줄 뿐이야. 너희들 ‘클라이언트’들이 태어날 때 이곳에서는 한명당 1~2인씩 인생설계사가 배정되어 삶을 꾸려나가는 방향을 컴파일하는 거지. 그 방향은 최신의 통계자료와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최대한 세밀하게 제시되지만, 최종 선택권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아. 우리는 분기점과 흐름도를 작성하여 운명한정장치Destiny Limiting Device에 입력할 뿐이고, 그 가능한 분기점 중에서 실제의 길을 선택하는 건 너희들의 자유의지에 따른 거야.”

“자유의지 치고는 폭이 되게 좁네요.”

“헤, 무한한 자유라는 건 단지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거지. 그 정도야 살다 보면 다 알게 되는 거잖아?”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사는 더더욱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리사의 자리를 벗어나 계속 걷고 있었다. 나는 놀라움이 다소 가신 눈으로 무한하게 뻗어 있는 흰 책상의 행렬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한명 한명의 인생을 책임지는 건가요?”

“뭐 꼭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지. 이를테면... 아 박주몽 어르신, 이리 좀 돌아봐 주세요.”

“나 지금 바빠, 안 보이나?”

“알고말고요. 우리 계[界]의 인기스타 아니십니까.”

키리에가 말 실수라도 할까 두려워졌는지 새미가 끼여들어 참견했다.

그 영감님의 자리는 다른 이들보다 두 배는 넓었는데, 그 위에 올라앉아 있는 컴퓨터의 크기도 훨씬 컸다. 화면 위에는 스무 개가 넘는 다양한 빛깔과 형태의 작업창이 떠올라 있었다. 노인은 쉴새없는 손놀림으로 각각의 작업창을 넘나들며 무언가를 계속 입력하고 수정하고 확인하고 계산하고 재배치하고 있었다.

“때로는 이 분처럼 보통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 설계사도 있는데, 이런 분들에게는 2명 이상의 인생을 동시에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가 맡겨지지. 이분은 최고 기록 보유자야. 한번에 24인을 동시에 설계해준 일도 있다구.”

“정신 헷갈리게 하지 마. 그 아가씨는 클라이언트인가?”

“옷을 보면 아시잖아요.”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오르고 눈은 주름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 않을 듯한 그 노인은 나를 잠시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의자를 돌리고 일에 파묻혔다.

“...그 때문에 가끔 부작용도 있는데,”

“야 이놈 키리에, 그건 말하지 마!”

“뭘 어때서 그러세요. 영감님 잘못도 아니었는데.”

“아 글쎄 말하지 말라면 말하지 마!!!”

그 자리를 떠나면서 키리에는 내게 살짝 속삭였다.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24인의 설계 프로그램이 변환과정에서 뒤엉키는 바람에 한 사람의 머릿속에 24인의 인격이 들어가버리는 사건이 생겼지 뭐야 글쎄!”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 같은데.

“그나저나 키리에 씨, 어디까지 데려갈 생각이에요?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클라이언트가 모르도록 하는 게 규칙...”

리사의 말에 키리에가 석판을 내보이며 답했다.

“이 아이는 특별한 경우야. 아까 FCS와 연락을 취했는데, 이 아이를 여기에 데려온 건 아무래도 사고가 아닌 모양이다.”

“사고가 아니라고오?!”

새미가 다람쥐같은 얼굴을 잔뜩 부풀리며 소리질렀다. 리사도 놀란 눈치였다.

“그래. 이 아이를 돌려보내기 전에 꼭 보여줄 것이 있어.”

나는 그의 쾌활한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진 것을 보고 불안해졌다.





“여긴 GNN[지구방송] 중계실인가요?”

우리는 그 끝없는 하얀 칸막이의 행렬을 따라가다가 발 밑에 나타난 동글뱅이 모양의 뚜껑을 열고 아래쪽의 어딘가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서 사방에 수많은 화면들이 가득한 어떤 방에 다다랐다. 무미건조하지만 따뜻하고 포근하던 위층에 비해 상당히 을씨년스럽고 몸이 떨리는 곳이었다. 나는 교복 옷깃을 여몄다.

“아니. 하지만 비슷한 일을 하기는 해.”

키리에는 그곳에서 복잡하고도 우스꽝스럽게 생긴 기계들을 손보는 젊은 여성에게 몇 마디 말을 했다. 위쪽 사람들과는 달리 파란색으로 통일된 옷을 입고 파란 모자를 눌러쓴 그녀는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기계를 조작하여 화면 중 일부에 무언가를 떠오르게 했다. 내 얼굴이 나왔다. 평소의 재미없는 생활. 일에 찌든 엄마와의 갈등. 학교에서 괴롭히는 아이들. 그리고...

“나잖아.”

“그래요. 여기에서... 클라이언트들의 인생을 모니터하도록 되어있죠.”

리사는 망설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모니터 결과와 우리의 인생설계 프로그램을 비교해서... 각 설계사의 분기별 종합성적을 매기게 되어 있어요. 그 성적이 좋으면 좋을수록 설계사에게도 다음 분기에 컴파일할 수 있는 분기점의 폭이 훨씬 넓어지고, 그것은 다시 클라이언트의 선택권을 넓혀주는 결과가 되죠. 하지만 그 반대로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을 경우는... 선택권이 점점 줄어들고, 종국에는...”

그녀의 망설이는 얼굴을 보고 나는 가슴이 오그라들었지만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야?”

“단 하나의 분기점만이 남게 되죠...... ‘죽음’이라는.”

“--이런 염병.”

평소에 쌓였던 울분까지 겹쳐서 욕이 튀어나왔다.

새미가 시니컬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실은 염병할 일이 또 있어요.”

“뭐?”

그는 키리에를 보고 말했다.

“이쪽은 내가 설명해야겠지?”

“잘 아네. 네게 맡기지.”

“유진양, 따라오세요.”

나는 더더욱 불안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그들을 따라갔다.

중계실의 파란 불빛들이 멀어져갔다.

계속 걷던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리사에게 물었다.

“만약에, 이건 진짜 만약이지만... 아까 말한 일이 내게 일어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지?”

“설계종료 당시의 레벨에 따라 이후의 처분이 달라요.”

“그러니까 좀 알기 쉽게 말하면?”

“레벨이 높은 편이면 약간 더 어려운 처지의 클라이언트에게 배속됩니다.”

“레벨이 안 좋으면?”

“자기가 맡아왔던 모든 클라이언트의 일생을 합친 기간동안...”

“그 기간동안?”

“말할 수 없어요.”

“궁금하잖아. 뭐야? 대체 어떻게 되는건데?”

“금기예요.”

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 한참 티격태격했고 키리에가 그걸 보며 웃었다.





“세상에! 사방이 온통... 책과 디스크야!”

“여긴 이미 평가가 완료된 클라이언트들의 일생을 모아두는 기록실이죠.”

우리는 하얀 공간으로 다시 올라와서 한참 걸어가다가 또 다른 다이아몬드 모양의 뚜껑을 열고 지하로 지하로 내려갔다. 아까와는 또 다른 곰팡내나는 큰 방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기록물들이 온갖 나라의 언어로 레이블이 붙여진 채 온갖 형태의 책장 위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 책장 또한 끝없이 사방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다. 접는 사다리에 올라서서 정리를 하던 녹색 옷의 창백한 남자에게 새미가 다가가서 몇마디 말을 하자 그가 우리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재미있겠다. 좀 봐도 될까?”

평소에 책을 좋아하던 나는 호기심에 이런 말을 했다.

“넌 관광하러 온 게 아냐. 그리고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허가가 필요해.”

키리에가 점잖게 꾸짖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새미가 내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장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얘기했다.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은 클라이언트도 분기별 평가가 끝나면 이곳에 기록이 옮겨지게 되고, 그것을 다시 재평가위원회Rescoring Committee가 심사하여 기록의 영구보관 여부를 결정합니다. 심사에서 떨어지면 여기에도 저장되지 못한 채 완벽하게 폐기되죠. 그러는 동안에 그 사람의 일생이 끝나고 여기에 기록이 하나도 남지 못하면, 지상에서도...........”

“지상에서도?”

“클라이언트 주변의 그 누구도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아무리 세월이 안 지났어도?”

나는 왠지 답답해지는 가슴을 억제하며 이렇게 물었다.

새미는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래?”

키리에가 안됐다는 얼굴로 끼여들었다.

“상관이 있어.”

“어떤 상관이죠?”

새미가 가장 후미진 곳의 책장을 가리켰다.

“저 아래 칸을 보세요.”

나는 차마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가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재평가 지수 최저 : 곧 폐기할 예정>이라고 쓰인 유리판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도저히 못 보겠다는 듯 리사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키리에는 심각하면서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살펴보고 새미는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럴..............수가?!”

그 칸에 꽉 차 있는 기록물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거짓말이지? 그럴리가 없어... 난 지금까지 누구도 괴롭히지 않고 얌전히 살았다구! 나쁜 짓도 하지 않았고... 아니 그거야, 생각은 많이 했어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단 얘기지! 난 오히려 피해자라구!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난 전혀 기회란 걸 갖지 못했단 말야! 그런데 어째서...”

나는 흥분하여 나오는대로 마구 떠들어댔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들은 냉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리사만이 측은함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모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에가 다정하게 내 어깨를 잡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유감이지만 유진양, 여기의 심사기준은 선이나 악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건 어차피 당신네 클라이언트들의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고, 한두가지 예외를 빼면 절대 불변도 아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기준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아. 우리는 단지 ‘세상의 시스템’일 뿐이야.”

“난 그런 어려운 거 몰라!”

난 빽 하고 소리지르며 발을 굴렀다.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째서 내가... 어째서 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거야! 당신들 말대로라면 내 레벨은 점점 낮아지고 따라서 선택지도 점점 줄어들겠지. 그러면 난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릴테고, 내가 남겨둔 ‘인생’은 폐기되어서... 그러면 난 더이상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는 거잖아! 엄마도 규연이도 날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나같은 애는 없었다는 것처럼... 그런 건 싫어!!!!!”

나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리사가 내게 다가와 위로하려 했지만 새미가 그녀를 제지했다.

그리고 나는 키리에에게 달려들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소리질렀다.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그냥 놔두지!”

키리에가 정중하게 나를 떼어놓고 석판을 들어 보였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나도 답해줄 수 없어. 그 답은... 스스로 생각해봐.”

석판에 나타난 상형문자 하나가 형광[螢光]을 내며 깜빡이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歸’[돌아가다]라는 문자와 비슷했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어떻게 하라는......!”

“힌트를 주지. 네가 시청률 100%의 드라마를 만든다고 한번 생각해 봐. 어떻게 하겠어?”

“뭐..................?”

나는 순간 그 빛에 둘러싸여 정신을 잃었다. 희미하게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정말로 이렇게 하는게 저 아이에게 좋은 걸까?”

“낸들 알아. 스스로 올바른 결론을 찾아내길 빌 뿐이야.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나는 38,2724년 동안 ......로 살아야 하니까요.”

“미안, 리사, 너를 탓할 생각은 아니었어.”

“...나는 믿어요. 저 소녀는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길 바래. 정말로.”

...하지만 대체 뭘 하란 말인가?





눈앞이 밝아졌다.

보라색 자동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규연이는 여전히 넘어진 채였다.

나는.........

여전히 못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꿈인가? 아니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하게... 또렷?

눈 앞의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잖아!

얼굴에 손을 대 보자 아까와는 다른 게 느껴졌다.

“......내 안경!”

안경이 코 위에 틀림없이 얹혀져 있었다.

“...........꿈이............ 아냐..........?”

나는 그 순간 무엇을 해야 될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규연이 옆으로 달려가서 그애를 일으킨 다음, 길 옆의 담벼락 쪽으로 힘차게 밀어제쳤다. 너무 세게 민 나머지 담장에 머리를 부딪혔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애를 밀어내는 데 열중한 나머지 내 자신의 몸은 아직 자동차가 오는 코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어떻게든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까 실랑이할 때 까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고 나는 범퍼에 정통으로 부딪혀 뒤로 쓰러졌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지만 내가 지른 것은 아니었다.

머리를 땅에 부딪히는 순간, 지구의 자전이 멈추고 은하수가 땅에 내려왔다.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꼬박 3일이 지난 뒤였다. 출혈이 약간 심하긴 했지만 차가 제때 급정거했기 때문에 상처는 가벼운 외상[外傷] 몇 군데로 끝났고, 내장을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엄마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휴직계를 내고 바람같이 달려와 사흘 밤낮을 간호에 매달렸던 모양이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손을 붙잡고 어린애처럼 울어대는 그 모습을 보니 얼마나 코가 찡했던지.

“아이참, 엄마. 칠칠치 못하게 뭐야. 규연이가 보고 있어...”

하지만 역시 입으로는 이런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체면이란 무서운 것이다.

“<버럭> 시끄러워! 말썽부리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사고라니... <훌쩍> 난 너마저 잃고 나면 어떻게 사나 했다...”

후유증이 남아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은 한달 정도 입원해야 했다.

나는 누워서도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치료비를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운전자와 합의가 되었고, 규연이 부모님도 사건의 정황을 듣고 책임을 느껴 얼마간 도와주시기로 했다.

엄마는 매일 출근하면서 내가 하루동안 먹을 음식이나 갈아입을 옷, 그밖에 여러가지를 챙겨주었고, 내가 ‘이젠 어린애 아냐’라고 앙탈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머리를 손질해주거나 이를 닦아주거나 별별 사소한 일을 다 돌봐주었다.

학교 공부는 규연이가 이틀에 한번씩 필기한 것을 빌려주어서 어떻게든 따라갈 수 있었지만, 별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서운 애들에게서 벗어나 병실에 누워있는 게 마음 편했다.

바깥 소식이 궁금하면 라디오를 들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TV는 잘 안 보니까...

‘...에 의하면, 중앙은행에 나폴레옹 군대 비슷한 복장을 한 3인조가 나타나 강도와 격전을 벌였다고 합니...’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꺼버리는게 낫겠다. <딸깍>

나는 입원해 있는 동안 그 이상야릇한 ‘인생설계사’들과의 만남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로 꿈이 아니었을까? 나는 엄마한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 끙끙 앓다가, 진짜 친구라 할 만한 규연이에게만은 꿈이라는 전제를 붙여서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규연이도 처음에는 황당하다고 느낀 모양이었지만 점점 끝으로 가면서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그래서 끝인데, 대체 그때 그 레게파마 아저씨가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규연이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난 알 것도 같아.”

“정말?”

“달려오는 차로부터 네가 나를 구했을 때, 처음에는 너무 무섭고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안 났거든. 그런데 며칠동안 그때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 순간의 너는 어딘가 달랐어. 평소의 해파리같은 모습과는 달리... 아차차 미안해, 네가 해파리를 좋아한다는 거 알아... 정말로 멋져 보였어.”

“에이, 위로하려는 말이라면 그만...”

“위로가 아냐. 난 본대로 느낀대로 말할 뿐이야.”

그애는 내 눈에 시선을 맞추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의 너는, 뒤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열의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어.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 아마도 그게 해답 아닐까?”

“그게 시청률 100% 드라마하고 뭔 관계라니?”

“재미없는 드라마는 아무도 안 봐줘. 그리고 재미를 끌어내려면... 먼저 열의가 있어야지. 안 그래?”

좀 이상한 논리였지만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한달 뒤, 6월도 거의 끝나갈 즈음 나는 실밥을 뽑고 퇴원했다.

한달만에 다시 보는 바깥 세상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야, 말라깽이! 병원에서 빌빌 기어다닐줄 알았더니 용케도 나왔네.”

“날 불렀어?”

나는 여전히 야비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다가온 서태후 패거리를 돌아보았다.

반창고의 머리엔 불가사리 대신 영덕게 머리핀이 달려 있었다.

“그래, 너지 누군 누구야. 지난번에는 다쳐서 봐줬지만 이번엔 결말을 내야겠어. 이번엔 차도 없는 조용한 곳이니 지난번같이는 안될걸.”

나는 약간 겁이 나긴 했지만 마음을 굳히고 반창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의 달라진 눈길 때문인지 그애가 잠시 움찔했다.

“더이상 너희들 말대로는 안하겠어. 그냥 여기서 하지 그래?”

“뭐, 뭐야. 건방지게. 그 태도가 뭐냐고.”

나는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서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놀랄만한 짓을 했다.

손을 들어올려 그애의 뺨에 붙어있는 반창고를 확 떼어버린 것이다.

“................이!!!!!!”

“야, 상처도 없는데 반창고는 왜 붙이고 다니냐? 그렇게도 다치는게 겁나?”

그애는 새빨개진 얼굴을 맥도날드 종이봉지마냥 우그러뜨리며 화를 냈다.

“...시, 시끄러. 남이사 반창고를 붙이든 소설을 쓰든! 하여간에 너 각오해!”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겁나지 않아.”

“.....................”

“-넌 나를 겁먹게 하지 못해.”

“......................!!”

“한번 더 말해줄까?”

새빨개진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급기야는 창백해졌다.

갑자기 속이 안좋아졌다며 물러서는 대장을 두 부하들이 부축하여 교실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아직 수업종은 울리지 않았다.

교실 반대쪽에 있다가 그것을 지켜본 규연이 나를 바라보고 V사인을 보냈다.

나도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렸다.

그러다가 멈칫하며 내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진짜 나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교과서를 챙기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형광등이 없는 천장 중간 부분에 커다란 직사각형의 하얀 공간이 나타나더니 그 위에 문자 비슷한 것이 새겨졌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키리에의 석판...’

그 문자는 잠시 뒤에 사라졌지만,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汝爲好好’[잘하고 있어!]라는 것이었다.





THE END!





(C) ZAMBONY 200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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