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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8] 머릿속의 속삭임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3
 





<< 머릿속의 속삭임 >>

The Other Voices







내가 그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살려주세요. 사방에서 날 에워싸고 있어요!”

“네?”

공원 벤치에 앉아 그 다음날이 마감인 어떤 기사를 송고[送稿]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타나서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홍색 환자복을 깔끔하게 입은 젊은 아가씨였는데,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묶었고 눈매는 약간 가느다란 편이었다. 얼굴 골격으로 보아 중국계인 듯 했다.

“안 보여요? 머리 위에 엄청 끔찍한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고요. 성게같은 몸통에 고슴도치같은 가시에 거미같은 다리들이 달려있고... 석류석처럼 빨간 세 눈이 가운데에... 아!”

아무 말도 못하고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계속 지껄이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더니 그 입으로부터 마치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어깨를 들먹거리는 걸로 보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뜻하지 않은 방해에 불쾌함을 느꼈지만, 간신히 인내심을 끌어내어 작업을 일시중지시키고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은 뒤에 벤치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어깨를 붙들고 진정시키려 했다.

“자아자아, 마음을 가라앉혀요. 괴물같은 건 없어요. 이제 멀리 가버렸어요.”

그러나 그녀는 훌쩍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아니에요.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 내게 다가와서 뭔가를 하려고 해요. 너무나 끔찍해요... 하늘, 하늘이 온통... 보랏빛으로... 안돼!!!”

상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군. 나는 그녀의 어깨를 계속 토닥여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곤란한 표정으로 사방을 돌아보며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공원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레이링[淚嶺]-!”

그 남자는 단거리 경주라도 하듯 숨을 헐떡이며 잽싸게 우리 곁으로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계속 내 쪽을 힐끗거리는 그의 눈에는 미안함과 불안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게 처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빠, 지만 오빠 맞지? 날 혼자 버려두지 마. 여긴 너무... 너무...”

“미련하긴! 내가 널 왜 버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산책 나갈 때는 반드시 내게 알려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니!”

“말할 수가 없었어... 시간이... 돼서... 말문이.... 전혀...”

“맙소사! 또 그 시간 타령이야! 정신차려! 맞서 싸우라구! 레이링...안돼!”

내가 영문을 모르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사이에, 그 남자의 품에서 차차 안정을 되찾나 싶었던 그녀가 갑자기 눈을 번쩍 크게 뜨더니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상한 언어로 뭔지 해독할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공원을 거닐던 사람들 몇몇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데려온 개 한 마리가 맹렬히 짖어댔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오후 1시였다.

“안되겠어요.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저리로 갑시다. 내 차가 있어요.”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로 착한 아인데... 이런 폐를 끼치다니..”

순박하게 생긴 청년은 양을 잃어버린 양치기 개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맘 변하기 전에 빨리 따라오기나 해요.”

그에게 이끌려 내 자가용으로 따라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언어를 뱉어내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무슨 기도문 같기도 하고 방송 연설문 같기도 했지만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였다. 그 언어는 때로는 프랑스어처럼 부드럽게 휘감기다가, 이탈리아어처럼 능글맞게 파도치기도 하고, 때로는 아랍어처럼 탁하고도 성스러운 울림을 들려주다가, 때로는 중국어처럼 우스꽝스럽게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했다. 음절과 음절 사이의 호흡이 매우 불규칙적이었고, 때로는 발음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억지로 발음하느라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저것이 과연 인간의 언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아무래도 내가 듣기에는 그 언어가 한 사람이 하나의 목적으로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역할을 분담하여 한 마디씩 주고 받는 식으로 들렸다는 점이다. 단 한 사람의 입에서 그렇게나 다양한 어조, 음색, 감정, 높낮이, 기타 등등이 차례로 튀어나오는 건 진짜로 처음 봤다. 지난 번에 예술계 기자와 함께 관람했던 원로 여배우의 1인극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윌리엄 프리드킨이 이 광경을 본다면 십자가를 치켜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환호작약했을 게 틀림없다는 엉뚱한 망상까지 떠올랐다.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난 거죠?”

“...한달 쯤 되었어요.”

차 뒷좌석에 드러누워서도 계속해서 뭔가를 지껄이는 그녀의 이마에 물수건을 대 주며 그가 대답했다. 그녀의 이마엔 식은땀이 가득했고 쉴새없이 목과 성대를 움직였기 때문에 벌써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나왔다. 한바탕 끝내고 나면 아마 한동안은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목이 쉬어 있을 것이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실내 공기를 조절하며 계속 질문했다.

“병원에는?”

“몇 군데 들러봤지만 다들 신통찮은 대답만 해서... 며칠 전에 저 건너편의 정신과로 옮겼죠. 그나마 그쪽 선생님이 명의라는 소문이어서...”

“저 건너라면 혹시 피철면[彼 哲勉] 클리닉인가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시죠?”

나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을 얼버무리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 병원의 원장이 전부터 온갖 추문에 휘말려 평판이 안 좋다는 사실을 굳이 내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음악이라도 틀까요? 마음을 안정시키려면... 모차르트라던가 야니라던가.”

“아뇨, 괜찮습니다. 이제 좀 나아지는 것 같군요.”

그녀는 지친 듯 말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청년이 정성스레 인공호흡을 했고, 잠시 후에 호흡이 안정된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일일이 돌보려면 힘드시겠어요.”

“뭘요, 별...거 아닙니다. 이 애가 내게 해준 일에 비하면...”

“잠이 들었으니 이동하기 곤란하겠죠. 병원까지 태워다 드릴까요.”

그의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돌았으나 곧바로 예의바른 거절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바쁘신데 저희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시동을 걸었다.

“걱정마세요. 기왕 시간 까먹은 김에, 갈데까지 가 보죠 뭐.”

“.....................”

그는 뭐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곧 시무룩하게 입을 닫고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길잃은 고양이처럼 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다리를 옆으로 오므린 채 자고 있었다. 내 차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키도 보통을 약간 밑도는 편이었기에 크게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초면에 이렇게 신세를 져도 괜찮을지...”

“고마우면 <주간 납골당> 좀 구독해 줘요. 거기에 글 쓰니까.”

“아, 하지만 저희는 이미......”

“농담이에요, 농담.”

“그, 그렇군요. 그렇겠죠......”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차를 공원 주차장 밖으로 몰고 나갔다.

웃을 타이밍을 놓쳐버린 청년은 어색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복합 인격 장애입니다.”

피철면 박사는 이름 그대로 얼굴이 두껍게 생긴 사람은 아니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의 마른 꼬챙이같은 외모는 그다지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영업용으로 갈고 닦은 미소와 정중한 태도는 그런대로 믿음직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친절하고 싹싹하게 사람을 대하면서도, 가끔씩 뭔가를 생각하며 주름진 눈으로 곁눈질을 하고 입가에 교활한 미소를 알듯말듯하게 흘리는 모습을 보면 괜시리 오싹해지는 것이었다. 몇 해 전에 선배와 함께 취재했던 모 정치인도 꼭 이런 스타일이었는데, 그는 지금 뇌물공여혐의로 감방에 가 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내게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은 이상스럽게 차갑고 땀으로 젖어 있어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이상한 환각을 보는 거야 흔하다 쳐도, 자기도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로 지껄이는 것이 흔한 일인가요?”

나는 아무래도 그 커플의 일이 신경쓰여서, 며칠 후 문병하러 온 김에 의사에게 직접 얘기를 들어보려 하는 중이다. 물론 그에게는 그냥 그들의 친한 친구인데 어떻게 도움될 일이 없을까 해서 물어보는 거라고 둘러댔다. 아무래도 기자라고 하면 이런 인간들은 경계하게 마련이고, 정식으로 취재를 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밝힐 필요도 없었다.

“그 지껄임...들어보셨다고 했죠? 외국어라고 확신하십니까?”

“아뇨, 아직은.”

실제로 내가 아는 외국어 중에 그런 말은 없었다. 방송국이나 통신사에 근무하는 친구를 졸라대어 내가 모르는 각국의 언어로 된 인터뷰를 시험삼아 들어보았지만 그 중에도 비슷한 언어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았어도 그런 이상한 말들을 끊임없이 지어내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우리말과도 별로 유사점이 없고 그렇다고 단순한 신음이나 비명과는 또 다르고...”

의사는 무심한 태도로 차트를 들춰보면서 내게 말했다.

“인간의 무의식이 해내는 일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주 놀랍죠.”

이런 사람들은 프로이트만 들이대면 뭐든 다 해결되는 줄로 생각한단 말야.

“환자는 이민 온 노동자이고 고등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릴 때 수많은 도시를 전전하며 다양한 환경을 접한 바 있다죠. 그렇다면 그때 인상깊게 들었던 언어들이 뒤섞인 채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가 어떤 이유로 억압된 내면이 표출되면서 그게 튀어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어설픈 설명으로 다 해결된다면 나도 병원 개업하겠다.

“그러면...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발작이 일어나는 건 어째서일까요?”

“정신적으로 굴절된 사람의 경우에도 일정한 규칙성이란 건 존재합니다. 일종의 특정 시간에 대한 강박증이 결부된 거겠죠. 마치 방송국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프로그램을 내보내듯. 정해진 인격의 일부가 특정 시간에 반응하여...”

“아, 네.....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마지못해 눈웃음을 치면서 납득하는 척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맹이 없는 설명에 실망하여, 물어보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치료는 어떻게?”

“매일 규칙적인 시간을 정해서 심리요법과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차도가 있을까요?”

“그거야 모르죠. 결국 병의 원인은 환자 마음속에 있는 거니... 저희는 단지 저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도와줄 따름이죠. 험, 험......”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은근히 귀찮다는 느낌이 배어나왔다.

그것을 보고 나는 지만이 복도에서 머뭇거리며 들려준 얘기가 생각났다.

‘이민자 보조금과 제 봉급을 탈탈 털어서 치료비를 꼬박꼬박 내고는 있지만... 왠지 그 선생님은 저희를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아요.’

아직까지 치료비가 밀린 일은 없으니 돈 때문은 아닐테고, 이민자에 대한 편견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복잡한 심경을 웃음으로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지 못해 유감이오.”

“아 그런데, 레이링의 담당 의사는 누구죠? 그분도 뵈었으면 싶은데.”

“나발원[羅 發原] 선생인데 지금은 자리에 없어요.”

“원장님께서 직접 진찰하시는 일은?”

“나는 입원 때 초기진료를 맡고 그 뒤는 담당의 몫이죠. 좀 바빠서... 오늘은 정말로 특별히 시간을 내 드린 겁니다.”

그는 권태로운 표정을 지으며 책상 위의 벨을 눌러 누군가를 호출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나는 방을 나오기 전에 일부러 문을 천천히 닫았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취재를 다니면서 몸에 익은 습관인데, 의외로 쓸만한 이야기를 건질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그런 때였다.

“부르셨나요?”

원장실로 통하는 다른 문으로 들어온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303호실 환자 있지? 다음 목요일에는 내가 직접 진찰할테니, 특진실로... 그래, 오후1...”

그때 문이 닫히는 바람에 그 다음은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303호실은 바로 레이링의 병실이었다.





“남주나[南 朱螺] 기자 되십니까?”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잡지사 근처의 허름한 간이식당에서 설렁탕으로 점심을 때우던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의 남자였다. 그는 7월의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색 중절모와 남색 롱코트, 남색 통구두로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에 비해, 모자에 가려서 잘 안 보이는 그의 얼굴은 이상스럽게 창백했다.

“별 일은 아닙니다. 혹시 최근에 만난 그 환자...”

“그녀가 어쨌다는 거죠?”

“...단순한 정신병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인가 하고 의심하시나 본데, 그쯤에서 그만 두시길 바랍니다.”

“............................”

그의 말투는 정중하고 신사적이었지만 동시에 싸늘한 냉엄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예의를 무시하고 남은 설렁탕을 후루룩 소리를 내며 들이마신 뒤에 이쑤시개로 이를 설렁설렁 쑤셔가며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참을성있게 기다릴 뿐이었다.

“내가 의심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주간 납골당>의 편집후기에 그 환자 얘기를 눈에 띄게 많이 하시더군요.”

“그것까지 다 읽어주다니 되게 고맙군요.”

“뿐만 아니라 당신이 그 소녀의 주변을 맴돌며 여러가지를 캐묻고 다닌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난 벌떡 일어서서 가방을 집어들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기분 탓인지 모자챙 아래에 숨겨진 두 눈이 붉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그쪽에서 일부러 날 찾아온 건, 오히려 그 아이가 단순한 정신병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라고 했죠? 대체 당신들 누구예요? 뭣 때문에 나를 막는 거죠?”

“아마 말해줘도 믿지 않을 겁니다. 조사를 그만두십시오. 전할 말은 그것 뿐입니다.”

그는 싸늘한 태도로 돌아서서 식당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한여름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가 머물러 있던 자리에는 원인모를 냉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식당 출입구로 달려나와 주변을 살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들어갔을법한 골목을 골라서 들어가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내 앞의 커브를 살짝 스쳐지나가는 어떤 희미한 실루엣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은 듯한... 낯선 형태를 띤...

거미다리를 지닌 성게?

................에이 설마.

그 순간, 문득 내 뇌리에 오늘이 목요일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시계를 보니 마침 낮 12시 25분이었다. 조금 무리하면 2시 편집회의 전에 돌아올 수 있겠지.

원장이 직접 레이링을 진찰할만큼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어느 시내 빵집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거기서 일하는 하지만[河 志滿]씨 좀 바꿔주세요. 아주 급한 일이에요.”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달려온 지만과 병원 앞에서 합류했다.

원래 그 말고도 연락을 취할 곳이 한 군데 더 있었지만, 그쪽은 연락이 닿지 않아서 포기했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대체 무슨 일이죠? 퇴근 뒤에 보러 갈 참이긴 했지만...”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얘기할게.”

나는 걸어가면서 간략하게 내가 엿들은 얘기를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남색 코트의 사내에 대해서도. 지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정말 이상한 얘기로군요. 그자들은 또 누굴까요?”

“모르겠어. 혹시 레이링이나 그녀 주변 사람이 마약상이나 폭력단과 연루된 일이 있었어? 어쩌면 그자들이 신종 마약을 그녀에게 실험해서...”

“전혀요. 같이 온 동료들도 모두 순박한 사람들이고 일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어요. 너무 지나친 생각이세요.”

“그럼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원장이 특진에 대해 일러주지 않았어?”

“제겐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

“지만씨 있는 데서 레이링에게 직접 얘기한 적도?”

“없어요.”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뛰다시피 걸어서 접수계로 다가갔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미 1시 10분전이었다.

“원장님은 어디 계시죠?”

“지금은 특진 중이시라 만나실 수가 없어요. 한 2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오시면...”

나는 내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고 으름장을 놓았다. <주간 납골당>은 주로 이런 데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안 만나주신다면 있는얘기 없는얘기 다 지어서 대문짝만하게 써 드리죠.”

접수계 아가씨는 명함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에선 연락이 안 되는데요.”

“직접 찾아가겠어요. 어디에 계시죠? 특진실이라고요? 몇층 몇호?”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어리둥절해하는 지만을 홱 잡아끌고 가장 가까운 엘리베이터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뒤에서 접수계 아가씨의 허둥지둥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선생님? 특진실 가까이에 누가 있죠? 빨리 알려줘요. 지금 기자가...”





“......정말로 성가시게 하는군. 이제는 마취를 시켰으니... 어디......”

특진실의 단단한 금속문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은 나와 지만은 젖먹던 힘을 다해 문을 밀어제쳤지만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지만이 어느정도 감을 잡은 듯한 얼굴로 초조해하며 서 있는 사이에 나는 골똘히 생각을 거듭하다가 가방에서 복잡하게 꼬인 철사로 만들어진 도구 여러 개를 꺼내어 그 중 하나를 문의 열쇠구멍에 넣고 가만히 돌렸다. 자물쇠가 열렸다!

“...........................???”

지만이 의심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걸 느끼고 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걱정마. 우리집 열쇠를 잊어먹었을 때만 쓰니까.”

삼엄한 경찰의 수사망을 뚫고 절도전과 18범의 그 누군가를 인터뷰했을 때 몰래 빼내온 거라고는 죽어도 말 못한다. 그럼!

우리는 가만히 문을 열고 숨을 죽인 채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그 안에는 플라스틱 덧문이 또 하나 있었지만 이쪽은 열려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통과했다. 그리고 마침내 특진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커다란 금속 침대 위에 가죽끈으로 레이링을 묶어놓고 그녀의 옷을 메스로 살금살금 도려내는 중인 피철면 박사의 모습이 있었다. 마치 인형놀이에 열중하는 어린애 같았다.

“레이...!”

“쉿.”

지만이 저도모르게 소리를 지르려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레이링은 양 어깨를 드러낸 채 마취에 빠져 정신없이 자고 있었고, 피 박사의 얼굴에는 내가 그전에 어렴풋한 인상으로만 느꼈던 음흉한 미소가 확실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는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당황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다, 당신들은? 어떻게 여기에?”

“그보다도 박사님이 지금 뭘 하고 계신지 설명 좀 해주실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미리 꺼내두었던 카메라의 셔터를 힘차게 눌렀다.

지만이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레이링은 박사님을 철석같이 믿고...”

눈부신 스트로보의 빛을 온몸에 받은 의사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우리를 향해 소리질렀다.

“이, 이건 치료를 위한 불가피한 구속이었소. 그러는 당신들이야말로 남의 업무를 함부로 방해한 것이 아니오? 당장 경찰에...”

“경찰을 찾으신다면 여기 있습죠.”

뒤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접수계 아가씨와 경관 몇을 대동하고 낯익은 얼굴이 하나 서 있었다.

“현수 선배!”

지만이 나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아시는 분?”

나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어, 잘 지냈냐. 밥먹고 와보니 네가 이 병원 이름을 대며 연락했다고 하길래 뭔일인가 하고 들러 봤다. 내친김에 이 근처 순찰 돌던 정복[正服]들도 몇명 같이 모셔왔지.”

스포츠맨같은 떡벌어진 체구에, 유들유들하게 웃음띤 얼굴을 한 30대 초반의 사복경관이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해 왔다. 이 리현수[裏 賢獸] 선배야말로 아까 말한 절도 18범을 2년 8개월간의 대추적끝에 검거한 전설의 그 사람이었다.

“하여튼 네가 끼면 꼭 뭔가 일이 터지잖냐, 안 그래?”

“헤헤, 그거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욕이다.”

“에익~ 그렇게 딱 잘라 말할 건 없잖아요!”

“-나도 원래 이런 놈 아니었어.”

현수 선배는 히죽거리며 앞으로 걸어나와 박사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당신에겐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도 있습니다. 물론 돈만 있다면 <시민 타임즈>를 볼 권리도 있지요. 이상 끝.”

황당해하던 피 박사의 눈에 잠시동안 이글거리는 불꽃이 타올랐으나, 그는 얌전히 경관들을 따라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대로 끝날 거라고 여기면 오산이야.”

그가 혼자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너무 작아서 나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만은 침대로 달려가 가죽끈을 풀고 레이링의 뺨을 두들겼다.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중년 의사 한 명이 들어와 각성제를 주사하고 그녀를 진단했다. 보아하니 담당의사인 나선생 그 사람인 모양이다.

“.................꺼거[兄]...”

레이링은 겨우겨우 눈을 떴지만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다.

나는 지만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편집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벌써 2시 5분 전이었다.

“기사님, 빨리 좀 가 주세요. .........어?”

“왜 그러시죠, 손님?”

당차 보이는 40대의 택시기사 아줌마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둘러댔다. 택시가 병원을 빠져나올 때, 그 남색 옷의 남자가 정문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공판정은 엉망진창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종 변론 전까지는 그런대로 잘 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 변론 바로 전에 피해자로서 중요한 진술을 제공할 참이었던 레이링이 또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진술 기회는 물건너가버렸다. 하필이면 바로 그때 오후 1시가 될 게 뭐람!

게다가 여러가지 유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작으로 인한 괴상한 언행이 법관은 물론이고 방청객들에게도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고, 그 때문인지 아니면 피 박사가 연줄을 동원하여 이리저리 애쓴 탓인지는 몰라도, 결국 이 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공소기각 판결을 받고 말았다.

“거 안됐군. 좋은 병원을 새로 소개시켜 드릴까? 언제든 말만 하라구!”

피 박사는 여유만만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띄우고 우리 곁을 지나치며 빈정대는 말투로 지껄였다.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와 승리감이 함께 떠올랐고, 입은 그날따라 유난히 일그러져 보였다. 그가 때를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무고죄로 기소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인정이 많으니까 봐준줄 알아!”

“.....................................”

우리는 증인석의 길다란 나무의자에 레이링을 눕히고 계속해서 헛소리를 하며 몸을 뒤트는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만은 물론이고 기소를 담당한 검사와 방청석에 와 있던 레이링의 이민자 동료들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변호인과 악수를 나누며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피 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기자님께 면목이 없네요.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이 꼴이라니...”

“지만씨 잘못이 아니잖아. 그것보다 레이링이 좀 회복된 것 같으니 일으켜줘.”

어느새 발작을 그친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고, 겁에 질린 얼굴로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진 거야?”

“레이....”

지만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진 거지? 내가....내가 다 망쳐버린 거지! 모두 다 나 때문에.....!!”

“레이링 때문이 아냐. 운이 따라주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최선을 다해 위로하려 했다.

“나, 난.... 난........ 우와아아아아....................!!!!!!”

그녀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고 조용하던 공판정은 금세 어수선해졌다. 자리를 떠나던 방청객들이 우리 쪽을 돌아보았고 직원 몇몇이 달려와서 우리를 거의 끌어내다시피 하여 밖으로 내보냈다. 검사는 의례적인 위로의 말을 몇 마디 남기고는 또 다른 사건을 맡기 위해 제3호 법정으로 달려갔다.

언제부턴가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법원 휴게실로 자리를 피한 우리는 그곳 벤치에 말없이 걸터앉았다.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물었고 지만과 레이링의 동료들이 좀처럼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기분이 정말 뭣같았다. 월차까지 내며 매달렸는데 이런 결과라니.

“.............................?”

그때 나는 빗속에서 누군가 익숙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남색 옷의 남자. 이번엔 하나가 아니고 셋이었다!

“남기자님? 왜 그러세요? 남기자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미친듯이 휴게실 밖으로 달려나가 앞뜰로 통하는 작은 출입구를 찾아내어 빗속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약올리는거야 뭐야-------------------!!!!!!”

나는 점점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어두침침한 하늘을 향해 벽력같이 소리질렀다. 뒤늦게 따라온 지만이 숨을 헐떡이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엉거주춤하게 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피우다 떨어뜨린 담배꽁초가 잔디밭에 떨어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지만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였다.

“그래, 잘 지내? 레이링은 좀 어....... 뭐?!”

나는 편집실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자살?!”

몇몇 부원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걸 느끼고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자살이라니 무슨 소리야? ....응, 응, 다른 의사한테 갔는데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서... 그래서 매일 울었단 말이지... 그래, 음, 그러다가 그저께 옥상에서 뛰어내... 맙소사! 그래서 지금 상태는 어때? 아, 골절 약간에... 아휴,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네. 응, 알았어, 좀 있다 갈게. 기운내.”

나는 한시름 놓았다고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남기자, 무슨 안 좋은 소식이야?”

“응? 아뇨... 아는 동생이 병 때문에... 다행히 고비는 넘겼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이 기사 교정 좀 봐줘. <세계의 괴이쩍은 사이비 과학> 특집 제2호인데, 차정목[車 正木]씨네 팀이 어제 밤을 꼬박 새웠어. 덕분에 전부 다 KO상태니까 남기자가 힘 좀 써 달라고. 응?”

나는 시계를 흘낏 쳐다보았다. 오전 10시 48분이었다.

“저, 편집장님. 그전에 문병 좀 다녀와도 되겠죠? 좀 급한 일이라...”

“다 해놓고 갔다와. 부지런해서 남주나? 엉?”

“................네.”

나는 남의 이름 갖고 말장난을 밥먹듯 하는, 센스없는 편집장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수정액과 빨간 연필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문제의 교정쇄를 살피던 중 약간 신경쓰이는 부분을 발견했다. 기사 본문과는 별도로 단신 비슷하게 한쪽 구석에 참고삼아 실리는 몇 줄 안 되는 글이었는데, 쓴 사람은 밝혀져 있지 않았다.



인류는 외계인의 방송 중계탑인가?

-현직 대학교수 황당한 주장-

국립 한심대학에서도 내놓은 괴짜로 알려진 노상식 교수(51)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어떤 외계의 종족에게 감시당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네들의 항성간 장거리 통신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일부 민감한 인간의 두뇌를 전파 송신용 릴레이 비슷한 용도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 그 과정은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통 피험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꿈에서 이상한 것을 본다거나 하는 정도로 끝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감각이 예민하고 두뇌가 뛰어난 이들은 깨어 있는 동안에도 송신되는 내용을 환각으로 보게 되고, 더욱 심할 경우에는 송신 중인 데이터를 음성 언어로 바꾸어 자기 입으로 지껄이게 된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이 이론에 따른다면 이제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던 수많은 정신병의 기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하지만, 과연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지는...



나는 이 기사를 들여다보고 한참동안 넋을 잃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중계탑?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할까?

만약에 이 이론이 진짜라면......

“후아암, 주나씨, 우리 기사 때문에 고생하네.”

내가 찾던 사람이 요란한 하품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데스크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자다가 커피 한잔이 땡겨서 잠깐 나온 듯, 종이컵을 들고 있다.

“아 정목씨. 마침 잘 왔어. 여기 이 노상식이란 사람, 요즘은 뭐해?”

“아 그 사람... 전부터 좀 괴상한 이론을 많이 내놓아서 왕따를 당했는지 통 연락이 닿질 않아. 알려지지 않은 지방대로 갔다는 얘기도 있고, 혹은 조폭과 결탁하고 이상한 연구를 하다가 집에 불이 나서 죽었다는 소리도 있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르겠단 말야.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진짜로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지경이라니까. 근데 왜?”

“아냐, 그냥 좀 궁금해서...”

정목씨는 원 싱겁기는, 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또 다시 숙직실로 밀린 잠을 보충하러 들어간다.

나는 기사의 그 부분을 복사한 뒤 교정쇄를 편집장에게 넘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혹시나 싶어 차를 타기 전에 주변을 빠짐없이 돌아봤지만 남색 옷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도 이젠 신경과민 다 됐군.’





“레이링!”

“주나 지에지에[姉]!”

그녀는 팔 다리에 흉물스런 깁스를 한 채 침대에 꽁꽁 묶여 있었다. 몇달 전에 보았을 때에 비해 얼굴이 더욱 수척해졌고 가느다란 눈은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옆에서 죽 그릇을 들고 떠먹여 주던 지만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좀 어때? 그렇게 하고 나니까 속이 좀 시원해?”

“미안해요............”

금방이라도 울 듯이 다시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자니 측은해 죽을 지경이다.

“내게 미안할게 뭐 있어. 사과는 지만씨한테 해야지. 옆에서 챙겨주느라 해골이 다 되었잖아. 어이구.”

“난 오빠에게 짐만 되고...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어서... 그래서...”

“또, 또! 계속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나을 병도 안 나아. 자, 한입 더.”

그런 식으로 죽을 떠먹여주는 지만을 보자니 아빠펭귄이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레이링을 보고, 나는 허리를 살짝 굽혀 그녀와 눈을 맞춘 뒤에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말야, 샤오지에[小姐], 남에게 사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냐. 남에게 사랑받기 위해 사는 거라고.”

“...........................”

“그러니까, 지만씨에게 미안하면, 빨리 기운을 차리고 그가 너에게 해준 것을 똑같이 돌려주면 되잖아. 앉아서 울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아무것도...”

“그래.”

그러나 여전히 우울에 사로잡힌 레이링은 내 눈을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머리는 어떻게 하고요? 몸이 아무리 건강해져도... 이렇게 계속 머릿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몸이 멋대로 움직이면... 대체 어떻게 제대로 살 수가 있겠어요!”

나는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지만이 우리 사이에 끼여들어 뭔가를 보여주었다. 벽에 걸려있던 시계였다.

“레이, 오후 1시 13분이야. 기분 어때?”

“뭐? 농담하지 마, 오빠.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데 이렇게 말짱할 리가 없...”

내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만씨 말이 맞는데. 내 시계도 확실히 1시 13분 55초야.”

“지.......진짜?”

그때까지 감정을 억누르고 태연한 척하던 지만이 갑자기 그녀에게 달려들어 목을 껴안고 볼을 부비기 시작했다. 그녀도 얼떨떨해져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레이! 희망이야! 희망이 있어! 이것봐... 너 아직도 나를 알아보잖아!”

“으응! 그 이상한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어! 아아 세상에, 이거....꿈이 아닐까? 진짜로 나은 걸까?”

“그거야 내일 1시가 되어보면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이게 완전히 나은 게 아니라고 해도... 오늘 이렇게 멀쩡하다는 건 정말로 희망이 남아있다는 얘기야!”

“꺼거[兄]........”

두 사람은 너무나도 흥분에 겨워 나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지껄였다.

지만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레이링의 붕대로 칭칭 감은 손을 잡는다.

“만약 나은게 아니라고 해도... 내가 매일 1시마다 곁에 있어줄게!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내가 곁에 있어줄게! 괜찮겠지?”

레이링의 눈은 눈물로 인해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간만에 보는 좋은 모습이네. 이제 그만 난 가봐야겠다. 일 나가야 해.”

“남기자님, 정말 고마워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여튼 너무너무 고마워요. 세상에 감사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저도요, 지에지에!”

나는 그 한쌍의 바퀴벌레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는, 미련이 남을까봐 휙 하고 돌아서서 병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잠깐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고마우면 <주간 납골당> 좀 구독해 주라. 말로만 그러지 말고.”

“생각해 볼게요!”

“미련한 것들, 농담이었어.”

나는 휘파람을 불며 그 자리를 떠났다.





종합병원 앞뜰을 걸어가는데 등 뒤에 누군가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그 남색옷의 사내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또 당신이군. 아직도 볼일이 남았어?”

“이제는 볼일이 없다는 걸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남기자.”

나는 맥이 탁 풀렸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한데... 너무 제멋대로잖아. 나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손을 떼라고 했다가 이젠 필요없다고 하다니... 내가 무슨 로또복권 추첨기인줄 알아?”

“아마도 당신은 진실을 파악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글’을 보셨다면.”

“그 글?!”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서 호주머니속에 집어넣었던 복사본을 꺼내보았다.

하지만 그 종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백지였다!

“이제 그 내용은 당신의 기억에만 존재합니다. 그 기사를 썼던 기자분조차도 지금은 기억 못할 겁니다.”

그 말은 편집장에게 넘겨준 원본도 역시...

“철두철미한 보안관리군.... 그럼 한가지만 물어보지. 그렇다면 당신네는 그... 뭐냐, 한전의 수리팀 같은 존재인가?”

“좋으실 대로 생각하십시오. 어쨌든 당신이 보살피던 그 아가씨는 이제 더이상 우리 네트웍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녀의 정신은 너무 섬세해서 우리의 송수신을 감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때문에 스스로가 생명유지를 포기하는 극단적인 결과에까지 이르렀으니, 그녀와 연관을 맺어봤자 우리들도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럼.... 레이링은 앞으로 평생동안 그 이상한 증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거지? 보증할수 있어?”

“기억의 잔상[殘像]은 남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심각하게 고통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남색 중절모 아래 감춰진 얼굴이 살짝 웃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네는 이미?”

나는 그 말 뒤에 공백을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훨씬 적합한 유닛을 찾아냈거든요. 이제 그 아가씨는 자유입니다.”

“더 적합한? 그건 누구지? 설마 난 아니겠지?”

창백한 얼굴 위의 보라색 입술이 살짝 위로 말려올라갔다. 이번엔 진짜로 웃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웃을 줄도 알다니.

“당신의 두뇌는 우리의 용도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너무 고지식한 데가 있어서 말이죠.”

“칭찬으로 들어도 될까?”

“욕입니다.”

....이자식들... 날 아주 가지고 노네?

“아무튼, 이제 다시 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남기자. 당신도 부디 남들에게 사랑받는 삶을 사시기를. 그게 어떤 건지는 저희들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건 함부로 기원하지 마.”

“충고를 받아들이죠. 그럼.”

그 말과 함께 남색옷의 그 사내는 차차 투명해지더니 마침내 기화[氣化]하여 사라져 버렸다. 말해도 안 믿을 거라는 게 이런 거였나?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앰뷸런스 한대가 달려들어왔다. 차 뒷문이 열리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긴급태세에 들어가더니, 들것에 실린 환자를 차에서 내려 응급실 쪽으로 급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번 환자는 좀 골치아파.”

“유명한 정신과의 아니었습니까? 어쩌다 이렇게......”

“낸들 아나. 전에 비슷한 환자를 치료했다더니 그러다가 옮았나보지.”

나는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을 들여다보았다.

들것 위에는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외계의 언어로 별별 이상한 소리를 다 지껄이며 몸을 이리저리 비비꼬고 뒤틀어대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니 기쁘게도라고 해야 하나?)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맙소사, 피철면 선생이잖아!”

구경꾼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는 발길을 돌려 병원 밖으로 나갔다.

햇살이 밝게 내리쬐고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누가 멀리서 송신해준 것이 아닌, ‘나만의’ 콧노래가.





THE END!





(C) ZAMBONY 200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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