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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7] 8월의 산들바람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4
 





<< 8월의 산들바람 >>

The August Breeze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놀라움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오, 바스티안...! 정말로 당신인가요?”

“힐데가르트, 얼마나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했는지 몰라요.”

중세 게르마니아 의상을 차려입은 그들은 고풍스런 장식물과 가구들로 채워진 목조 건물의 응접실 안에서 놀라움에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약간 머뭇거리면서도 서서히 가까이 다가서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를 힘껏 껴안았다. 여자는 붉은머리에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지닌 미인이었고, 남자는 갈색머리에 야위었지만 강단있어 보이는 얼굴을 가진 호청년이었다.

“난 신을 믿지 않았는데, 그런 나에게도 신은 은혜를 베푸는군요!”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지 맙시다.”

그들은 뭔가에 홀린 듯이 서로의 눈동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리드미컬하게 서로의 얼굴을 겹치고 키스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순간, 여자 쪽에서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외면했다. 당황한 남자가 어쩔줄 몰라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고, 여자는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막았다.

“컷!”

그들이 서 있는 응접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대형 세트였다. 자세히 보면 가구와 그림들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붐 마이크와 카메라들이 눈에 띌 것이다.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는 사각[死角] 속에서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기 일들을 하던 수많은 스탭들이 짜증과 피로감 때문에 고개를 떨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개중에는 흥미롭게 앞을 바라보며 ‘또 시작이로군’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짓궂은 표정으로 수첩에 뭔가를 적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며 신중한 동작으로 카메라 하나하나의 각도까지 바꿔나가던 땅딸막한 남자가 메가폰을 무기처럼 휘둘러대며 앞으로 뛰쳐나가 울화를 터뜨렸다.

“폭스! 이번이 대체 몇번째야? 자네 때문에 스케줄이 한달이나 밀린 거 아나?”

방금까지만 해도 어거지로 순진가련한 표정을 자아내며 교태[嬌態]를 부리던 그녀는 세트 한구석에 놓여있는 보조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옆 테이블에 놓여있던 담배를 한대 빼물고 거만스런 얼굴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하늘 높이 피워올리며 그녀가 가시돋힌 목소리로 응수했다.

“감독님. 자꾸 그러시면 곤란하죠. 키스신 찍기 전에 리오에게 입단속 좀 시켜 달라고 제가 미리 말하지 않았던가요? 저도 노력하는 중이라고요.”

거의 다 벗겨진 머리 꼭대기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중년의 감독은 그녀의 거만한 대답에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아직까지 세트 중앙에 멀뚱히 서 있던 청년에게 다가가 화가 덜 풀린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말해보게, 데자네이 군, 아까 양치질은 제대로 한 건가?”

청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저께는 그것때문에 뺨까지 맞아서 두 번이나 했는걸요.”

더욱 더 열받은 감독은 발길을 돌리려다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오른손 검지를 들어올리며 다시 청년에게 질문했다.

“...그럼 치약은 어디 제품을 썼나?”

“엘 마디그라 제약의 신제품이죠. 그게 문제가 되나요?”

“그건 경우에 따라 다르지. 무슨 향이었나?”

“박하향이오.”

“이제 알겠구만. 자넨 트레일러로 가서 좀 쉬게. 이 장면은 나중에 하지.”

껑충한 키의 리오 데자네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기 트레일러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감독은 화를 가라앉히고 속으로 열까지 센 뒤에 다시 여자 쪽으로 다가가서 조용하지만 감정이 팍팍 실린 목소리로 다그쳤다.

“플로라, 대체 어디까지 우릴 물먹여야 속시원하겠어? 내가 이 바닥에서 생활한지 30년이 넘지만 당신처럼 까다로운 배우는 처음 봤어. 세상에 상대가 체리향이 아닌 박하향 치약을 썼다고 키스신을 거부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야!”

피곤한 얼굴로 담배를 뻑뻑 피우던 플로라 폭스는 꽁초를 재털이에 비벼 끄더니, 거추장스런 스커트 자락이 서로 엉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벌떡 일어서서 감독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니코틴으로 인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알고 감독은 움찔했다.

“아시잖아요? 플로라 폭스와 일하려면 그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걸.”

“그래도 이건 정도가 너무 지나쳐! 처음에 촬영 시작할 때는 시나리오가 맘에 안 든다고 일곱 군데나 고치게 하더니, 전번 로케이션 때는 풍향이 알맞지 않다느니 햇볕이 뜨겁다느니 핑계를 대며 일정을 뒤바꿔 버리고, 세트나 소품도 자네 때문에 교체한 게 몇가지나 되는 줄 아나? 제작비는 뛰어오르고 스케줄은 늘어지고 스탭들은 지치고 지금 현장 꼴이 말이 아니라고! 영화는 자네 혼자 찍는 게 아닐세! 내가 감독인가 자네가 감독인가?”

플로라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비웃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감독의 어깨를 한 손으로 꽉 붙들더니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감독은 울분에 몸을 떨면서도 자신을 간신히 억제하고 고개를 저으며 내뱉었다.

“......빌어먹을. 맘대로 해. 하지만 내일부턴 좀 제대로 해 달라구.”

“제가 내키면요. 오늘은 이만 하죠. 여러분 안녕.”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는 스탭들 틈을 헤치고 플로라는 촬영장 출입구로 다가갔고, 그 근처에서 기다리던 그녀의 매니저가 급히 코트를 건네주었다.

“아! 그리고 로만. 휴게실 사탕은 망고 맛으로만 채워놓는 거 잊지 마세요.”

“...........................”

감독은 그녀 쪽은 바라보려고 하지도 않고 짜증스런 얼굴로 대본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조감독과 촬영기사 몇몇을 곁으로 불러들여 심각하게 의논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정을 변경하여 그녀가 나오지 않는 다른 장면들부터 찍으려는 모양이다. 멍하니 있던 스탭들도 차차 제정신을 차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한구석에서 그 소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스크립터 한 사람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던 분장 조수에게 말했다.

“세상에, 저렇게 오만방자한 짓거리를 해도 짤리지 않는 비결이 뭘까요?”

“모르겠어요. 소문으로는 거물 프로듀서를 등에 업고 있어서라나...”

“그래도 어쩐지 트집잡는게 점점 억지스러워지지 않아요? 얼굴만 반반하지 연기도 별로던데.”

“분명히 저러다 큰코 다칠 날이 올 겁니다. 이 바닥이 다 그렇죠.”

“하여튼 저 여자만 없으면 이 현장도 그리 힘들지는 않을텐데 말예요.”

“누가 아니래요.”





큰코 다칠 날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뭐가 어째? 주연을 갈아치운다니? 그게 말이나 돼?”

흥분한 플로라를 매니저인 세실이 말리려고 한다. 그들은 플로라가 점점 길어지는 촬영기간 동안 촬영장에만 묶여있는 것에 싫증이 나서 잠시동안 휴가를 얻어 스카보로의 해변 호텔에 와 있었다.

“플로라, 이건 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냐.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하지 마. 내가 직접 가서 따지겠어!”

플로라는 세실의 손길을 뿌리치고 질풍처럼 달려나가, 자기가 아끼는 붉은 람보르기니 스포츠카를 운전하여 큰길로 나왔다. 그녀는 스피드를 즐기는 편이라서 운전사를 두지 않고 직접 운전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가 한번은 큰 사고가 날 뻔 하여 한참동안 매스컴의 추적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큰 사고 없이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혼자시군요. 무슨 일이 있나요?”

“네, 내일 아침 신문에 날 일이죠!”

친절한 수위에게 냉소를 쏘아붙인 플로라는 차를 주차시켜 두고 뛰어들어갔다.

감독은 사무실에 앉아서 뜨뜻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을 쬐며 서류를 검토 중이었다. 전국 사방팔방에서 날아온 배우들의 프로필이었는데, 거기에 첨부된 사진들은 하나같이 플로라와 비슷한 타입의 여성들이었다. 플로라는 자기를 밀어내고 다른 배우를 물색한다는 말이 사실임을 직감했다.

감독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자리를 권했다. 항상 화장실 휴지처럼 구겨져 있던 그의 얼굴은 간만에 오월의 하늘처럼 산뜻하게 개어 있어서, 그를 꼴사납게 생각했던 플로라에게는 더욱 아니꼽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뛰어들었다.

“제게 의논 한 마디도 없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죠?”

“...의논했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라고 보나?”

“적어도 이렇게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겠죠. 안 그래요?”

감독은 검은테 안경을 벗고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해둔 뒤에 책상 뒤에서 나와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작은 키가 어제보다 한 뼘 정도는 자란 것 같았다.

“만약 자네가 능력이 모자란다거나, 사람들과 좋게 지내지 못한다거나, 내 마음에만 안 든다거나 하는 정도였다면 나도 이러지는 않았을 거야.”

“본론만 이야기하시죠.”

“-벌써 예산이 1억이나 오버했고 스케줄은 줄어들줄을 모르는데 촬영된 분량은 전체의 30%도 채 안된다고. 이게 다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나?”

“모든 잘못을 다 제게 돌리실 작정이신가요?”

“그 편이 내게는 제일 납득할 만하게 여겨지거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자네 덕에 다른 출연진과 스탭들이 못견뎌하는 게 눈에 밟힐 걸세. 몇 명은 현장을 떠나버렸고 또 몇 명은 신경쇠약으로 치료받는 중이야. 난 분명히 로저 코먼처럼 영화를 빨리 만드는 걸 즐기는 인간은 아니네만, 그렇다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영화를 붙들고 내 인생을 탕진할 생각은 없어.”

플로라는 분노에 몸을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마른 여름날 논바닥처럼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내게 이러실 수는 없어요... 대릴이 가만있지 않을걸요...”

그러나 감독은 안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릴 메이어 말인가? 그친구는 더이상 딕센의 중역이 아냐. 어제 주주총회에서 결정났어. 아마 지금쯤은 채권자들을 피해서 유로슈 어딘가에...”

플로라는 피가 머리 끝으로 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 그럴리가 없어! 나를 속이려고 그런...!”

그녀는 악에 받혀 테이블 위의 유리 재떨이를 벽에 대고 힘껏 집어던졌지만 감독의 얼굴은 냉정했다. 그는 청소부를 불러 정리를 부탁한 뒤 책상 뒤로 다시 돌아갔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가 주게. 난 일을 해야 하거든.”

플로라는 비참한 기분에 잠겨, 그곳을 도망치듯이 떠났다. 지나가던 배우들과 스탭들이 그녀를 보고 경멸 혹은 동정에 찬 얼굴로 소근거렸다. 그녀는 급히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다가 다른 차 두대를 들이박아 상처를 냈다. 달려나온 수위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제지하는 것을 무시하고 플로라는 난폭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아스팔트 타는 냄새가 났다.

달리고 싶었다. 이대로 달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너무 흥분한 상태라서 뭐가 뭔지 몰랐던 거라고.”

“그런 상태에서는 운전대를 잡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당신이라면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빼앗기고 모든걸 잃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그건 내 알 바 아닙니다. 하여튼 변상은 해주셔야 겠는데요.”

그들은 고속도로 옆에 차를 세워놓고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었다.

플로라의 차는 앞 범퍼와 오른쪽 헤드라이트가 망가져 있었고, 상대방 남자의 차는 뒤편에 그보다 훨씬 심각한 손상을 입고 가느다란 연기까지 모락모락 뿜어대고 있었다.

플로라는 그러잖아도 비참한 판에 접촉사고까지 내서 더욱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 하여튼 경찰이 끼여들기 전에 어떻게든 합의는 봐야 했는데 상대방이 너무나도 침착한 태도로 그녀의 잘못을 지적하고 따지는 바람에 화만 치솟았다.

“지금은 돈이 한푼도 없어요. 회사에서 약속한 보수는 물거품이 되었고 저금한 돈은 까먹은지 오래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없어요?”

그녀의 도전적인 언사에 기가 질린 상대방은 끌끌 혀를 찼다. 플로라는 검은 머리에 탄탄한 체격을 갖춘 그 남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눈동자로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왠지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기분나쁘게 느껴졌다.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그 눈동자만은 바라보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는 잠시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난 이 차를 내 생명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돈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변상을 받는 쪽을 생각해 보아야겠군요.”

이 말의 의미를 지레짐작한 플로라가 인상을 되는대로 구기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난 그렇게 막된 여자는 아니거든요.”

상대방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 저도 당신의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플로라의 얼굴이 가을날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럼 어떤 의미죠?”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해 주었으면 해요. 변상 대신에.”

플로라는 잘 알아듣지 못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거 아닌가요?”

“그럴리가요. 배우이신 플로라 폭스 씨가 맞을 텐데요.”

나도 유명하긴 꽤 유명한가보다 라는 만족감을 느끼며 플로라가 물었다.

“그래서 내게 뭘 해달라는 건데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자세한 건 내일 여기서 만나 이야기하죠. 손해볼 일은 없을 겁니다.”

“클럽...<리날도>?”

그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치열은 약간 고르지 못해도 하얀 치아가 그런대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껄렁한 태도에는 어딘가 음험한 데가 있었다.

“스윙재즈를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이죠. 시간은 점심때가 어떻습니까?”

플로라는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다음 날, 플로라는 매니저를 고향으로 떠나보내고 숙소를 허름한 독신자 아파트로 옮기는 등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남자가 타고 온 차를 본 그녀는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차가 말끔하게 고쳐진 것을 보고 놀랐다. 의심스런 생각이 들어 어디서 고쳤냐고 캐물었지만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런 말만 빼고는.

“분명 어제 그 차가 맞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들은 그 어둑어둑하지만 아늑한 분위기의 클럽에서 각자 비용으로 간편한 식사를 하고 몇 가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남자의 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도착한 것이 바로 이 썰렁한 교외 주택가였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이란 게 뭐죠?”

그녀는 다 썩어가는 담쟁이 울타리로 둘러싸인 낡은 2층집을 보고 물었다.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집안 곳곳이 내려앉아 있고 흰 페인트는 먼지와 풍상으로 인해 회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집안에 사람이 살기는 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는 속임수에 빠진 건 아닌가 싶어 초조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이런 데 살아본 일은?”

“없어요. 어릴 때 살던 동네는 더 비참했죠.”

“그럼 얼굴을 좀 펴시지 그래요?”

“하지만 거기는 생동감이라도 있었죠. 여기는 마치 버려진 무덤 같은데요.”

그는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서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신이 하기에 따라서는 무덤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어요.”

“영문 모를 소리만 하지 말고...”

“설명은 나중에. 일단 들어오세요. 제집은 아니지만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뭔가 앞뒤가 안맞네요. 당신이 도둑이라는 뜻인가요?”

“제가 도둑이라면 좀더 나은 집을 털 겁니다.”

그녀는 체념하고 그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정원은 이름모를 꽃들이 가득했지만 세월과 함께 자라난 잡초들이 그 위를 아스트로 돔처럼 빽빽하게 뒤덮고 있어서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원에 깔린 포석[布石]을 밟고 앞뜰을 가로질러 문으로 걸어갔다.

초인종은 망가진지 오래였고 자물쇠도 형편없어서 문은 몇 번 잡아당기니까 금방 열렸다. 오랫동안 기름칠을 안 해서, 경첩이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집으로 들어선 뒤에 문을 닫으며 남자가 말했다.

“잘 들어요. 저 안방에는 다 죽어가는 노인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아마 당신을 보자마자 오래 전에 헤어진 딸로 생각할 겁니다. 당신은 거기에 적당히 맞춰 연기를 해 주십시오. 제 부탁이란 그겁니다.”

어이가 없어진 플로라는 항변하려 했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사기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해 주시겠습니까?”

“..................”

“하실 수 없다면 수리비 내시던가. 전 어느쪽이든 상관없으니까요. 참고로 저 차가 좀 까다로운 녀석이라 수리비도 집 한채 값 정도는 들었습니다.”

역시 함정에 걸린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오기가 생긴 플로라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아니, 누가 할 수 없다고 그래요? 하면 되잖아요!”

남자가 눈가에 주름을 그리며 웃음지었다.

“그럼 시작하죠.”

플로라는 후회 반 호기심 반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누구? ......거기 누구요...?”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로 사방을 도배한 그 방 안에는 먼지투성이의 장식장과 거미줄로 둘러싸인 화장대, 벽에 붙은 옷걸이 몇 개, 그리고 방 한쪽을 가득 메운 침대가 있었다. 침대 위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주름투성이 노파 한 명이 두꺼운 이불을 잔뜩 덮고 오들오들 떨며 누워 있었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고 조명도 따로 없어서, 침대 한켠에 놓인 싸구려 전기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만이 노파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플로라는 유령이라도 나올듯한 분위기에 오싹해졌다.

“아, 죄송해요.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여, 역시 돌아가는 게... 저 그럼, 이만...”

당황한 플로라가 돌아서서 나가려 할 때, 노파가 한쪽 손을 이불 밖으로 내밀고 희미한 목소리로 외쳤다.

“앨리스.......? 앨리스냐...?”

플로라는 방 바깥에서 태연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플로라는 잠시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마음을 다잡고 다시 돌아서서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놓인 작은 의자를 침대 옆에 옮겨놓고 그 위에 앉아서 노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앨리스예요... 좀 어떠세요?”

노파는 손을 뻗어 허공을 잡으려는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플로라는 재빨리 두 손을 내밀어 그 손을 꽉 잡았다. 희미한 온기와 함께 뼈와 가죽만 남은 팔의 헐렁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혈관과 주름이 소름끼쳤다.

“......괜찮다.... 다 괜찮아..... 네가 이제 왔으니... 네가...”

노파의 눈에서 수정 같은 눈물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플로라의 마음 속에서 오싹함이 물러나고 대신에 측은함과 안타까움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노파의 주름진 손을 어루만지면서 다른 손으로는 티슈를 꺼내어 노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동안 거기에 함께 있었다.





그 기묘한 생활은 한달 가까이 지속되었다.

플로라는 쥐꼬리만한 저축과 실업보조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새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후에는 그 주택가로 출근하다시피 해서 최소한 5~6시간에 걸쳐 불쌍한 노파를 돌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물론 언제나 그녀를 실어다주고 밖에서 지켜보는 것은 ‘그 남자’의 몫이었다.

“할머니가 당신에 대해 물어보면 어떡하죠?”

“좋을대로 둘러대요. 남편이든 남자친구든 매니저든 하인이든.”

“하인이 좋겠군요. 운전사라고 해도 되겠고.”

“왠지 그 말을 한 게 무지하게 후회스러워지는군요.”

“때는 이미 늦으리.”

플로라가 사악하게 눈을 치켜뜨고 혀를 쑥 내밀었다.

물론 돌본다고 해도 대부분의 일과는 곁에 있어주면서 식사를 챙겨주고 이야기를 듣고 적당히 맞장구쳐주는 정도였지만, 가끔 가다 그녀가 앨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어떤 특정한 과거 사실에 대해 물어보면, 얼버무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앨리스, 열세살 때 달리기 경주에서 타온 트로피 생각나니? 정말 멋졌지!”

“그럼요, 기억하고말고요. 그 백합꽃이 장식된 달걀처럼 생긴 거죠?”

“아냐, 그건 바느질 경연대회고, 내가 말하는 건 달리는 사람 모양을 한...”

“마, 맞아요. 제가 착각했어요. 그때 백미터를 달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앨리스, 무슨 소리냐? 네가 출전했던 건 마라톤이었어!”

“그, 그렇네요. 맙소사, 이 나이에 벌써 치매면 큰일인데...”

“어떻게 젊은 애가 나보다 더 기억력이 떨어지니. 쯧쯧”

“먹고 살기가 하도 바빠서 말이죠.”

“그럴테지... 정말 미안하다... 바쁠텐데 이렇게...”

결국 이대로는 곤란하겠다 싶어진 플로라는 노파가 잠든 사이에 그 집을 샅샅이 뒤져 그 집안의 과거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락과 2층 방들을 뒤지니 의외로 많은 것들이 나왔다. 흑백 앨범과 꼬불꼬불한 글씨로 쓰여진 일기장, 나무상자 안에 담긴 옛 장난감과 그림책, 가족들이 한데 모여 노래하는 걸 녹음한 릴 테이프까지 있었다. 그녀는 그 중에서 중요하다 싶은 것들을 추려내어 자기 숙소로 가져온 뒤에 밤을 새워 그 기록들을 읽어가며 그 집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리고 상상하고 느껴보려고 했다.

그녀는 진짜 앨리스가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느꼈을까를 나름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녀 자신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진에 나타난 진짜 앨리스는 플로라와 전혀 닮지도 않았다는 것이 신경쓰였다. 붉은머리에 사파이어빛 눈동자와 고양이 같은 날카로운 눈매에 귀여운 미소를 지닌 호리호리한 플로라와는 반대로, 앨리스는 풍성한 금발머리에 약간 통통한 얼굴과 밤색 눈동자를 지니고 항상 복스런 웃음을 보여주는 시골처녀 스타일이었다. 사진은 십수년 전의 것이긴 했지만 그동안 성형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여기서 크게 달라질 리는 없었다.

“그 할머니는 어떻게 나를 딸로 생각하는 거죠? 이렇게 다른데...”

그 남자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치매거나 눈이 어두운 거겠죠. 하여튼 그점은 걱정말아요. 철석같이 믿으니”

플로라는 너스레를 떠는 그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았지만 곧 다른 일로 생각을 돌렸다. 부엌 한구석에 쓸쓸히 서 있는 빗자루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어두침침한 집 분위기를 개선하는 것이 플로라의 다음 임무였다.

“엄마, 잘 보세요. 얼마 뒤면 이 집이 옛날보다 더 깔끔하게 바뀔테니까.”

“앨리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그녀는 노파를 안심시키고 그녀가 잠든 걸 확인한 뒤 걸어나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플로라도, 그 노파 앞에서는 순해빠진 양처럼 조심스럽게 굴었다. 그녀의 오만방자함을 피부로 느꼈던 영화사 사람들이 그 광경을 봤더라면 아마 기절초풍했으리라.

“아주 감동적인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팔자에도 없는 머리수건을 감고 장갑을 끼고 총채를 들고 그 남자가 말했다.

“......꼭 나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나 혼자서는 몇 달이나 걸릴텐데.”

“난 할 일이 있습니다.”

“댁만 그런줄 알아요? 나도 오전에 일 나가야 한다고요. 겨우 찾아낸 식당 알바인데 촬영소에 다시 돌아갈 때까지는 꽉 붙들어야죠.”

“할말 없군요.”

그들은 먼지를 뒤집어써가며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했다.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물건들 위의 먼지를 털고 거미줄과 벌집을 걷어치우고 가구들의 배치를 바꾸고 창문 유리를 갈아끼우고 커튼을 깨끗이 빨아서 다시 달아놓고 방들의 도배를 새로 하고 전열기구의 퓨즈를 갈고 냉장고에 식품을 새로 채웠다. 거기에 더하여 내려앉은 지붕을 고치고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정원의 잡초를 솎아내고 꽃들이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화단을 넓히고 삐뚤빼뚤하게 서 있던 나무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한 것은 집 주위를 둘러싼 낡은 울타리를 최대한 새것처럼 보이게 수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노파가 외롭지 않게 말벗을 해 주는 시간도 계산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은 생각보다 넉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주일만에 집안 정리가 다 끝난 것은 순전히 그 묘한 남자의 손재주 덕분이었다. 그는 플로라의 경탄 어린 눈길을 받아가며 보통 일꾼 서너명이 하루종일 해야 될 일을 서너시간 만에 해치웠다.

“혹시 직업이 정원사나 목수예요? 아니면 DIY 판매사원?”

“전에 비슷한 걸 해본 적은 있지만, 직업으로 삼은 적은 없어요.”

“거참... 그런데도 재주는 프로급? 놀라운 일이네요!”

“저에겐, 제게 이런 일을 시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데요.”

“아시잖아요? 플로라 폭스와 일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걸.”

“......................”

그거야 어떻든 간에 정리가 마무리된 후, 플로라는 근처 복지시설에서 빌려온 휠체어에 노파를 태우고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깨끗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파는 다리가 많이 쇠약해져 있어서 혼자 2층으로는 올라갈 수가 없었기에 플로라가 업고 올라가야 했다. 걱정에 가득하던 노파의 얼굴이 점점 기쁨으로 충만하더니, 마지막으로 정원에 나와서 놀랄만큼 깔끔하게 바뀐 화단과 나무들을 보고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앨리스...정말...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릴 때는 자기 방 치우기도 싫어하던 네가... 이렇게나 훌륭하게... 고맙다... 고마워...”

“놀라실 거라고 제가 그랬잖아요.”

“넌 정말 착한 아이야.... 전에도 그랬지만...”

이리저리 둘러보던 노파가 갑자기 정원 한구석에서 말라비틀어진 사과나무 한 그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세요? 저 나무가 어때서요?”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제게 숨기실 게 뭐 있어요. 말씀해 주세요.”

“앨리스, 기억 안 나니? 저 사과나무... 매년 이맘때면 저기서 딴 사과를 갖고 네가 우리집 특제 애플파이를 만들어 주었었지. 다른 요리는 못해도 그것만은 세상에서 네가 최고였다. 그런데... 이제... 저 나무에 더이상 사과가 열리지 않게 되었으니...”

플로라는 어설프게 질문한 자기자신을 저주하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요. 엄마 소원이시라면...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얘야, 그럴 것 없다. 난 그저......”

“사과는 다른 데서 구해야겠지만... 제 손맛은 그대로겠죠? 걱정마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당신 스스로는 걱정하고 있죠?”

노파와 작별하고 집을 나서는 플로라에게 다가온 그 남자가 짓궂게 속삭였다.

“저 할망구, 집을 고쳐줬더니 이젠 밥을 내놓으라고 하네. 기운없게시리..”

“당신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죠. 이번엔 저도 도와드리지 못합니다.”

“마침 요리할줄 아냐고 물어보려 했더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군요.”

“살다보면 느는건 눈치뿐이라서요. 그나저나 지겹지는 않습니까?”

“족집게군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불쌍하지만... 있지도 않은 딸 노릇을 하는 건 정말이지 못할 짓이라고요. 언제 이 일이 끝나죠?”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겁니... 음? 왜 그러시죠?”

플로라는 차에 오르려다가 무심코 몇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시계탑 쪽을 바라보고는 깜짝 놀랐다.

“시계탑에서... 카메라를 지닌 사람이 이쪽을 보고 있어요.”

“당신이 아는 얼굴일지도 모르겠군요. 이걸로 살펴보세요.”

그녀는 재빨리 선글라스와 머플러로 얼굴을 가리고 차안에 들어앉더니 그가 건네준 쌍안경을 들고 시계탑 쪽을 관측했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찰거머리 나이젤이잖아!”

“난처한 인물인가요?”

“알아주는 파파라치인데... 전에 내 사진을 찍으려다 혼쭐난 적이 있어요. 어떡하죠?”

“뭘 걱정합니까, 지금은 연예계를 떠나 있는데?”

“저놈은 그런 걸 가리지 않아요! 게다가 만약, 내가 다시 복귀하게 되면...”

남자는 계기반의 스위치를 조작하여 차창을 어둡게 만들고는 한손으로 턱을 괴고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하더니 어떤 결론을 내렸다.

“당신은 내일도 같은 시각에 이리로 오십시오. 저는 다른 일이 있으니 혼자서 찾아와야 할 겁니다. 내일만 그렇게 하면 됩니다.”

“무슨 일이요?”

“좀 처리해야 할 것이 생각났어요.”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더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플로라는 애플파이의 연구에 매달렸다. 앨리스가 남겨놓은 일기들 중에 조리법같은 게 있었다면 간단했겠지만 그녀는 그 요리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는지 조리법은커녕 이름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플로라는 노파와의 대화를 통해 그 파이가 어떤 맛이 났고 다른 집의 파이와는 어떤 면에서 달랐는지 알아내는 한편, 그 집의 텃밭이나 그 마을 주변의 농장에서 주로 수확되는 재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가능한 모든 재료를 실험해 보았다. 물론 돈이 모자라 곤란할 때는 그 남자의 지갑을 우격다짐으로 털어야 했지만, 그는 그다지 싫은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플로라는 메이플[단풍] 시럽과 다진 생강과 탄산수와 흐물흐물하게 볶은 사과와 대륙산 흑설탕이라는 묘한 재료를 총동원하여 앨리스의 조리법을 대충이나마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어때요?”

“너무 달아서 무덤에 묻힌 송장도 벌떡 일어나겠는데요.”

“상관없어요. 저 할망구에겐 당뇨는 없으니까. 그보다도, 맛있냐고요?”

“아무래도 맛있다는 것은 상대적인 표현이라서.”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앞치마를 벗어서 개어놓은 뒤 접시에 파이를 덜고 노파가 누워있는 방으로 향했다. 머쓱해진 남자는 그냥 주방에 남아서 접시에 남은 메이플 시럽을 살금살금 핥기 시작했다. 갑자기 안방 쪽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그는 주방을 박차고 나와 그리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죠?”

“안돼...... 이럴수는 없어... 돌아가시면 안돼요.. 안된다고요!”

노파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름진 피부 여기저기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호흡이 점점 불규칙적으로 변해갔다. 방 한쪽에는 플로라가 떨어뜨린 접시가 깨진 채 흩어져 있었고 플로라 본인은 침대 옆에 바짝 달라붙어 노파의 손을 쥐고 얼굴을 내려다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이 약해지고 맥박이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옆으로 다가가서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맥박을 재 보더니 주방으로 달려가서 물 한잔을 떠 왔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파란색 캡슐 두어 개를 꺼내더니 그걸 물과 함께 환자의 입 안으로 흘려넣었다. 보통 때에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의 얼굴이 놀랄 정도로 심란해 보였다. 환자의 호흡이 안정되었지만 나락에 빠진 정신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길지는 않을 거라는 게 이런 거였나요?”

“이 노인의 신체는 당신을 만났을 때 이미 회복불능이었습니다. 이 약도 잠깐동안 고통을 덜어주는 정도에 그칠 겁니다.”

“그럼 어째서? 어째서 나를 이런 연극에 끌어들였죠? 무슨 의미가 있다고!?”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플로라는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로부터 사흘 밤낮 동안 그 집에 머물면서 정성들여 노파를 간호했다. 일주일 전, 이러는 것도 지겹다고 말하던 때의 나른한 얼굴빛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직 누군가를 살리려는 일념으로,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물수건을 갈고, 냉찜질을 하고, 좋은 약을 수소문하고...

그러나 결국, 노파는 나흘째 되는 날 오전에 숨을 거두었다.

눈물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플로라와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던 남자의 눈 앞에서, 노파는 죽기 직전에 잠시동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딸의 얼굴을 더 보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잘 돌아가지 않는 입을 우물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결국 희미한 신음소리 몇 마디만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하직했다. 그녀의 입술을 읽어보려고 노력한 플로라였지만, 결국 알아낸 말은 ‘용....서....’라는 단어 하나뿐이었다.

플로라는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시트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나 남자가 어깨를 붙잡고 뭐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신의 역할은 이제 끝났습니다. 더이상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끝난 겁니다.”

“.....................!”

“아시겠습니까?”

플로라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콧등에 주먹을 한대 날렸다. 타격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충격 때문인지 남자는 잠시 비틀거렸다.

“당신에겐 인정이란 것도 없어?! 죽어버렸다고... 친척도 하나 없이 죽어버렸다고... 이대로 푸대자루처럼 내버려두고 가라니 대체 어쩔 생각이야!?”

코를 어루만지면서도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실로 나가서 창 밖을 보시죠.”

무슨 소린지 의아해하며 거실로 가서 전망창 밖을 바라본 플로라는 깜짝 놀랐다. 찰거머리 나이젤이 한 떼거리의 동료 기자들을 데리고 이 집 쪽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 알지도 못하는 죽은 노인과 수상한 남자까지 같은 집에 있는 걸 저들이 알면... 어떤 스캔들에 휘말릴지......!”

그 수상한 남자가 멍든 얼굴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버려두고 가지 못한다고 한 건 거짓이었습니까?”

플로라는 또다시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고 발끈했다.

“...두 쪽 다 진심이야! 하지만... 한 쪽은...................”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겠죠. 인생이란 어차피 취사선택이니까.”

플로라는 그를 무시하고 상의를 걸친 뒤 손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선글라스와 머플러를 찾으려고 가방을 열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얼굴을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당당하게 나가세요. 그들은 절대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 괴상한 소리로 내 얼을 빼놓으려 하는군.”

“-나를 믿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나요?”

플로라는 대답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순간 사방에서 디지털 카메라의 플래쉬가 터졌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젠 될대로 되라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잖아?

“저, 실례합니다. 혹시 플로라 폭스......”

기자들의 선두에 서 있던 족제비같이 생긴 30대의 남자가 중절모를 치켜세우고 민첩하게 달려와서 그녀에게 말을 걸려다 갑자기 얼어붙었다. 그는 잠시동안 자기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뒤로 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군요. 어이 즐로토프, 다들 철수시켜!”

“뭐야 이거, 폭시 플로라[여우같은 플로라]의 숨겨진 가족 발견! 이라더니 완전 헛짚었잖아? 에이 젠장.”

“이봐 나이젤 형씨, 금쪽같은 시간을 어떻게 보상해줄 참이야? 나는 반 다이크 검사의 특급 수사발표까지 제쳐두고 이리로 달려왔다구!”

“난 코넬리아의 콘서트 취재도 밀어두고 왔는데?!”

“자자 다들 진정하고... 일단 아까 찍은 사진은 삭제하자구. 실수로 일반인을 찍어버린 게 탄로나면 사생활 침해로 콩밥먹을수도 있어.”

“자네가 말 안해도 벌써 지웠네!”

속으로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던 플로라는 그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나는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고 변장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못 알아보는 걸까?

그녀가 그러거나말거나 그 유쾌한 3류 기자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주택가 저편으로 사라져 갔고,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플로라 또한 반대쪽 길로 접어들어 급히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정체모를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극도의 피로와......

상실감.

그리고 일말의 안도감이.......





“어째서? 어째서 죽지 않으면 안되죠? 고생 끝에...이제야 만났는데... 이렇게 죽는 걸 보려고 만난 게 아니잖아! 눈떠! 에잇, 숨쉬란 말얏---!!!”

절규는 오열로, 오열은 낮은 흐느낌으로, 흐느낌은 비탄에 가득한 신음으로.

그곳은 눈보라 소리가 울려오는 극지방의 통나무집 안. 낡은 군용 침대에 누워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노신사의 주검을 앞에 두고, 낡은 방한복 차림의 그녀는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길어올린 듯한 깊은 슬픔을 사방으로 발산하며 그 자리에 엎드린 채 울부짖는다.

그 처절한 목소리에는 슬픔과 함께, 일종의 광기마저 깃들어 있다. 한참동안 그렇게 울던 그녀가 다시 일어서서 소리지른다.

“.........용서해 달라고? 나를 버려놓고, 그렇게 고생하게 해놓고, 이제 겨우 찾아와서 얼굴 좀 보려고 했더니... 기껏 하는 말이 그거야? ....무얼 용서하면 되는데? 숨도 안 쉬고 침도 못 뱉는 (침대 쪽으로 침을 탁 뱉는다) 그런 비곗덩이가 되어버린 판에, 난 대체 누굴 용서하면 되는데? 누구를?”

비탄으로 이글거리던 얼굴은 어느덧 사막처럼 공허해져서 허공을 바라다본다.

그녀가 다시한번 중얼거린다.

“누구를.............................!!!”

분을 못 이긴 그녀가 흐느끼며 시체 위에 쓰러진다.

시체의 가슴을 마구 두들기면서.

조명이 점차 어두워진다.

“컷! 아주 좋았어!”

깐깐한 얼굴에 염소수염을 기른 키큰 남자가 메가폰을 휘두르며 외친다.

침대에 누워있던 남자가 분장을 떼며 일어나고, 그 위에 포개어져 있던 여자도 얼굴을 닦으면서 일어서서 세트 바깥쪽으로 걸어온다. 둘다 기나긴 대장정을 마친 대상[大商]들처럼 피로감과 승리감이 반반씩 섞인 표정을 짓고 있다.

“플로라, 대단한 연기야! 분명 이번 작품은 내 일생 최고 걸작이 될거야!”

“아직도 미흡한걸요.”

“플로라, 멋있었어. 그런데 내 가슴을 너무 세게 때려서 입원해야 할까봐.”

“죄송합니다. 감정이 너무 지나치게 들어갔나봐요.”

“아냐, 그대같은 후배에게 얻어맞는 거라면 얼마든지 사양 않겠어!”

“아예 다음 작품은 액션물로 갈까요?”

“하하하핫! 그것도 좋겠지.”

출연자와 스탭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정리를 하고 있는 사이에, 양해를 구하고 빠져나온 플로라 폭스는 촬영장 바깥에 놓인 간이의자에 주저앉아 담배를 빼물었다. 하지만 불은 붙이지 않고 그냥 물고만 있었다. 이번 감독이 금연주의자라는 이유도 있었고, 또한 자기 자신의 인내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먼발치에서 스탭들이 그런 그녀를 보고 소근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욕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

“하여튼 저 여자가 없었다면 이 현장도 정말 시시했을 거예요.”

“누가 아니래요.”

세실이 다가와 전화기를 내밀었다.

“나한테?”

“그래, 젊은 남자 목소리던데.”

짓궂은 윙크를 보내며 자리를 피해주는 매니저에게 눈을 한번 흘겨보이고 나서, 플로라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어, 요즘은 화났을 때 운전대를 잡지는 않겠죠?”

“이...사기꾼!”

그 검은 눈동자의 남자였다.



10



“출연한 영화 잘 봤습니다. <8월의 산들바람>이었죠? 요즘은 잘 지내십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잘 지낸다는 건 상대적인 표현이라서.”

그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계속했다.

“이번엔 내가 한방 먹었군요. 이젠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그 일 얘기라면, 모르겠네요. 때로는 아무런 생각이 안 나지만, 때로는 오래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처럼 치밀어올라오기도 하거든요.”

“그 덕분인지 연기도 좀 나아진 것처럼 보이더군요. 성공적인 복귀에다가.”

“그건 사실이죠. 그나저나 그때 그건 어떻게 된 거죠?”

“뭐가요?”

그 남자는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딴청을 부렸다.

“어물쩡 빠져나갈 생각 말아요. 그 기자들.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어요. 마치 딴 사람을 본 것처럼 말하더군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죠?”

“그 노파가 당신을 딸로 믿은 것과 같은 이치겠죠.”

“그들이 전부 치매에 걸렸을 리는 없고... 그럼 당신... 최면술사?”

그는 두 손을 과장된 몸짓으로 흔들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환각술사Illusionist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죠.”

“사람의 눈에 그곳에 ‘없는’ 사물을 보이게 한다는 말인가요?”

“아뇨. 그렇게 환상적인 건 아닙니다. 그곳에 ‘있는’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 뿐이죠. 혹은 그 사물의 상태만 약간 왜곡해서 보여줄 수도 있고. 사람의 시각에 간섭하는 건 꽤나 미묘한 문제라서요.”

그가 지나가던 여종업원을 잠시 바라보자 플로라도 그쪽을 같이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그 종업원이 인기 가수 코넬리아 콘웨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적어도 플로라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무심코 브리 치즈를 집어들던 플로라의 손이 미끄러졌다.

“......그때.....당신 차......!!!”

“눈치챘군요. 당신 차와 거의 비슷하게 경미한 손상이었죠. 후훗.”

“역시...당신은 사기꾼이었어.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처음부터 계획적인 건 아니었어요. 계획에 필요한 사람을 찾던 중에 당신이 일으킨 사고를 당하게 된 거고, 그때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린 뒤 조작을 좀 한 거죠.”

플로라는 애꿎은 고기조각에 포크로 구멍을 숭숭 뚫어가며 질문을 시작했다.

“하지만 왜 내가 필요했죠? 당신이 직접 연극을 했어도 좋았을...”

“아까 말했지만, 시각 정보를 바꾸는 경우에도 그 대상물의 속성까지 완벽하게 바꿀 수는 없거든요. 자동차면 자동차, 인간이면 인간, 그 중에서도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로만 바꿔 보여줄 수 있어요.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앨리스 메리도터와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 여성이 필요했습니다.”

“그 앨리스...라는 여자가 직접 왔으면 되는거 아닌가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앨리스 메리도터는 그로부터 1주 전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거든요.”

“.......................”

“그녀는 학생 시절에 어머니와 대판 싸운 뒤 사이가 틀어져서 가출했습니다. 그런 뒤 십수년 동안 따로 떨어져 살면서 연락도 안 하다가, 친척으로부터 어머니가 오래 못 살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는 화해하러 달려오던 참이었죠. 마약을 과용한 운전사가 몰던 매머드 트럭이 그녀의 자가용을 덮쳤습니다.”

플로라는 뜻밖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딱 벌리고 듣고만 있었다.

“앨리스는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혀서, 결국 제게 의뢰를 해 왔고, 저는 그걸 받아들였죠.”

“자, 잠깐만! 죽은 사람한테서 의뢰라뇨?”

검은머리의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제 사무실에 사이비 영매[靈媒]가 한 사람 있다고만 해 두죠. 이런 일도 꽤 복잡해놔서 함부로 설명하기가 좀 그렇군요.”

“그나저나 이제와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예요?”

남자는 눈을 찡긋해 보이며 감미롭게 속삭였다.

“당신의 애플파이를 한번 더 맛보고 싶어서입니다.”

플로라의 얼굴이 갓 딴 딸기처럼 새빨개졌다.

“이번에도 너무 달아서 송장이 어쩌고 하면 죽여버릴 거예요.”

“걱정 안합니다. 당신의 파이를 먹으면 되살아날테니.”

“---푸후훗!”

그들의 잔이 경쾌하게 맞부딪혔다.





THE END!





(C) ZAMBONY 200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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