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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30] 신들의 음식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4
 





<< 신들의 음식 >>

The Food for Gods







“아빠! 아직도 쫓아오고 있어요! 속력을 더 내세요! 빨리요!”

“보다시피 있는 힘껏 밟고 있다! 네 동생이나 잘 챙겨라!”

“여보, 탄알이 얼마 안 남았어요! 더이상 쏘는건 무리라고요!”

“그렇다고 총을 집어던지진 말아요, 네시! 어떻게든 버텨봐요!”

“어떻게든이라니 그런 무책임한...”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건 아니에요!”

“아빠, 프래니가 떨고 있어요! 난방 좀 틀 수 없냐는데요?”

“지금 바깥 온도가 38도다! 거기, 준비해둔 얼음팩 있지? 이마에 대고..”

“그래 닐, 동생 입에 호흡기를 대줘라. 숨쉬는 공기가 섞이면 안돼”

“피부가 창백해져요! 이건 숫제 백조공주라고요!”

“손발을 계속 주물러줘. 이런 제기랄. 막혔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그럴 틈이 없어요! 저 미친 트럭들이 맥주캔 던지면 닿을 거리까지 왔어요!”

“할수없지, 가시 철조망을 뚫는다! 다들 몸을 숙여요! 안전띠 확인하고!”

“허크, 근데 뒤쪽 타이어에서 공기가......”

“지금 말해줘도 어쩔 수가 없소, 이게 지름길이니... 하나 둘, 으랏차차차!”

“-헤이호! 역마차 나가신다!”

“닐! 지금이 농담할 때냐!? 고개숙여!”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파란색 시보레는 철조망을 관통하여 반대쪽 길로 달려나갔다. 그들을 쫓아오던 몇 대의 매머드 트럭이 욕설 섞인 굉음을 내며 오던 길로 급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나간 길 위에 새까만 타이어 자국이 요란하게 박혔다. 사냥감을 포착한 약탈자의 본성이 그들을 사정없이 충동질하고 있었다.

해는 화창하게 떠 있었지만 적막한 길거리에는 인기척이 하나도 없었다. 사방에는 언제 죽었는지도 모를 파리한 시체들과 제때 수거하지 않은 쓰레기가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길가의 건물들은 깨진 유리창과 총구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시보레는 몇 번 더 거칠게 방향을 튼 다음에 지평선 너머에 있는 어떤 건조물을 향해 똑바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높다랗게 솟은 관제탑과 길다랗게 늘어선 빌딩들이 새하얀 유선형의 거체[巨體]들을 거만스럽게 사열하고 있는 곳 - 바로 공항이었다.





“얀센, 좀더 빨리 달릴 수 없나? 밴트럭 일곱 대가 번갈아가며 쫓아온다고!”

“이게 최대 속력입니다, 애버트 씨. 부스터라도 달아주시기 전에는 안됩니다.”

“애버트 씨, 본사로부터 급전입니다. 제트힐 외곽의 제4플랜트가...저어...”

“뜸들일거 없어, 타나베. 또 습격인가?”

“이번엔 아주 조직적이라는군요. 군용 헬기에 로켓포까지 들고 왔답니다.”

“정말 환장하겠군. 얀센, 길을 잘못 들었지 않나. 오른쪽으로 틀게!”

“애버트 씨,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길이 막혀 있어서 말이죠.”

“정말로 막혀 있군요. 시가전차 세 대가 상한 소시지처럼 널려 있습니다.”

“나도 보면 알아! 그보다 녀석들을 따돌릴 궁리를 좀 해보게 타나베.”

“죄송합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건...”

“난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라 해답을 바라네! 근데 이 소린 뭐지?”

“아, 비드폰vidphone이... 그런데 발신인이 좀...... 받아보시겠습니까?”

“마드리드인가. 용케도 일급비밀인 이 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군. 이리줘.”

“이걸로 조작하시면 됩니다. 혹시 영상을 차단하고 싶으시면...”

“내가 세살 먹은 어린앤줄 아나! 빨리 주기나 해. 여어 페드로, 안녕하시오?”

“안녕못합니다. 근로자들을 버려두고 혼자 낙원으로 떠나니 기분좋으쇼?”

“싸움을 걸려는 것처럼 들리는데.”

“당연히 싸움을 걸고 싶소. 조사해 보니 어제 분할계약에 서명을 했더군.”

“연방 경제재건위원회의 허가를 받은 일이오.”

“노조는 물론이고 경영회의에도 한마디 않고 말이오? 책임을 지셔야겠습니다.”

“지금은 보다시피 바쁘니 나중에 하면 안되겠소?”

“그래도 된다면 내가 왜 당신을 쫓는 자들을 보냈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군. 하지만 난 똑같이 대해줄 수가 없소. 잘있으쇼.”

“애버트! 당신은 천벌이 두렵......” <띠릭>

“천벌이라고, 쳇, 웃기고 있네! 타나베, 전파를 모두 끊어. 쉬고 싶군.”

“애버트 씨, 갈림길입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앞으로 곧장 달리게.”

“농담이시겠죠? 양옆의 길이 아니라 정면의 강으로 말입니까?”

“내가 부스터를 달아주지. 그쪽에 B란 단추를 누르고 전속력으로 달리게!”

“저는 운전수지 스턴트 레이서가 아닙니다!”

“난 이 차를 믿는 것만큼이나 자네를 믿네. 성공하면 보수를 두배로 주지.”

“떨어져도 저를 원망마십쇼!”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던 그 검은색 세단은 갑자기 뒤쪽 트렁크를 열어젖히고 그 안에서 항공기에나 달려있을법한 터빈엔진 두개를 노출시킨 뒤에 그 분사구에서 열화같은 불꽃을 뿜어대며 점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엔진이 밖으로 튀어나올 때 트렁크에 실려있던 짐들 중 몇 가지 운없는 것들이 밖으로 떨어져내려, 엉망진창으로 굴러갔다.

세단은 속도를 전혀 낮추지 않고 계속 전진하다가 강둑 끄트머리에 다다른 순간 허공으로 떠올랐다. 추적자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에 세단은 아슬아슬하게 반대편 강둑에 처박히듯이 착지하여 몇 분간 엉뚱한 방향으로 비틀거리며 나아가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착지하는 순간의 충격으로 인해 뒤쪽 타이어가 심하게 손상을 입고 차체도 삐걱거렸지만 그럭저럭 달릴 수는 있었다.

밴트럭에 나누어 타고 머리에 하얀 띠를 동여맨 채 ‘기업을 말아먹고 도주하는 애버트는 각성하라!’는 플래카드를 휘날리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추적해 오던 일련의 근로자들은, 낭패스런 표정을 짓고는 오른쪽과 왼쪽의 길로 흩어져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려가는 강둑 길 너머로 공항의 전경이 시원스레 뻗어있는 것이 보였다. 때는 늦은 오후였고 하늘에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직도 따라오고 있어, 주시?”

“몇 대는 따돌렸는데... 저기, 보라색 쿠페 한대가 끈질기게 붙었어.”

“이제 연료가 얼마 안남았다고. 대체 그 빌어먹을 공항은 어디 있는거야?”

“조금만 더 가면 돼, 할리. 운전이나 잘 해.”

“너하고 같이 보스를 털자고 한 내가 바보지.”

“그래서 어쩌자고? 지금 돌아가면 마커스가 널 봐줄 것 같애?”

“알았어 알았어, 말로는 못 당하겠...... 아차차!”

“아야! 왜그래? 바리케이드야? 네 덕에 천장에 머릴 박았잖아!”

“날쌘 녀석들, 저쪽 골목에 먼저 와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어. 악마같으니”

“밤길잡이 손베르크가 능히 생각할만한 술책이군.”

“이젠 어떡하지? 저 골목을 지나지 않으면 공항으로 가는 지름길을 탈 수가..”

“일단 저쪽 주차장으로 들어가.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엔......”

“야야, 진짜로 이걸 쓸 생각이야? 너무 무모해!”

“다른 좋은 방법 있으면 서면으로 제출해. 아니면 말고.”

“너 이럴때 보면 진짜 짜증난다. 주시Juicy라는 이름이 울겠어.”

“이름 갖고 트집잡을 시간 있으면 이거 옮기는 것 좀 도와줘. 먼저...”

“시체에 손을 대겠다고?! 감염되면? 아무리 호흡기를 달고 있어도...”

“그럼 이거 매단 채로 타고 갈 거야? 어느쪽이든 위험은 반반이라고.”

“너하고 싸우려고 한 내가 바보지.”

그 벽돌 건물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물류 운반 차량이 드나들던 대형 복층식 주차장이었다. 그 건물을 지나 공항으로 가는 길목을 물샘 틈 없이 막아선 서너 대의 쿠페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안경을 끼고 검은 타이를 매고 검은 구두를 신은 갖가지 피부색의 사람들이 절도있게 내려서서 기관총과 피스톨을 빼들고 안전장치를 푼 다음에 건물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주차장에 있는 다른 출입구는 이미 차단되어 있었고 비슷한 높이의 다른 건물들은 모두 5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서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길이라곤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들이 주차시설의 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몰고 온 쿠페의 열 배 정도는 되어보일 법한 장거리용 트레일러 한 대가 위로 뻗은 금속 연통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올리며 달려나왔다. 그 기세에 정문을 막고 있던 창살문이 과자처럼 부서져나가고 그 앞을 에워쌌던 검은 양복들은 옆으로 나동그라지거나 눈치빠르게 피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트레일러를 끌고 가는 트럭의 운전석에 앉아있던 두 여자 중 한명이 재빨리 주머니칼을 꺼내어 창문 옆에 매달아두었던 밧줄을 끊었고, 그 밧줄에 연결된 채 차체 옆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시체 두 구가 멍한 눈을 한 채 검은 양복들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뼈와 살이 분리된 것이 어떤 상태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들은 감염이 겁났는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를 황급히 피했다.

트레일러는 길목을 지키던 쿠페 중 두 대를 정통으로 들이받아 거북이처럼 뒤집어버리고는 또다시 경적을 울리며 공항을 향해 기운차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은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 이른 저녁이었다.





“코레니아행 401편 출발합니다! 더 타실 분 없습니까?”

“여기 있소---!!!”

“떠나지 말아-----!!!”

“가면 죽여버릴텨---!!!”

트랩 밖으로 나와서 더 탈 사람이 없는지 건성으로 확인하던 스튜어드가 확성기를 내려놓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돌아보니, 각기 다른 세 방향에서 각기 다른 세 차종이 각기 다른 세 추적대를 거느리고 아스팔트 위에 불꽃으로 된 항적[航跡]을 그려가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뒤에서 쫓아오는 차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과 소다수와 팝콘을 던지고, 압정과 기름과 썩은 나뭇잎을 뿌리고, 그다지 우호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유명한 수신호[手信號]까지 보냈다. 이제 편지만 주고받으면 줄 수 있는 건 다 주는 셈이었다.

스튜어드는 그 광경을 보면서 또냐 싶은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재수없으면 맞아죽겠군... 어째서 꼭 이런 손님들이 끼는 거지?”

낡았지만 물찬 제비같이 빠른 시보레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 안에서 콧수염을 기르고 깔끔하게 이발한 40대의 가장과, 토끼같이 놀란 눈을 하고 있지만 팔다리는 튼튼한 부인과, 장난스러운 눈매와 천연금발을 지닌 15세 가량의 아들과, 상태가 안좋은 듯 창백해진 얼굴로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가까스로 발걸음을 내딛는 13세 정도의 딸이 내려섰다. 그들은 몇 개의 간단한 짐가방만 든 채 차가 제대로 정지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어내린 뒤 트랩으로 달려왔다. 그들을 추적하던 매머드 트럭 편대는 난폭하게 활주로 위를 달려오다가 공항 내부 경찰대Airport Police의 잼탄Jam Bullet 공격을 받고 타이어가 끈끈이에 엉켜버려, 자기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기막힌 추태를 보여주었다.

“여기 예약표 있소.”

“어디보자, 허클 반 걸프딕 씨와 가족 세분. 맞군요. 어서 타십시오.”

“딸아이가 아픈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없겠소?”

“당직 의사는 모두 행방불명이고 승무원 중엔 간호교육을 받은 자가 없네요.”

“좌절스럽군. 하다못해 이 증상이 ‘그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거요?”

“‘그것’은 아닐 겁니다. 그 병은 고열이 특징인데 따님은 얼음처럼 차갑군요. 틀림없이 뭔가 다른 종류의 가벼운 감기일겁니다. 아스피린이라도 드릴까요?”

“필요하면 내가 말하겠소. 어쨌든 고맙소. 여보, 갑시다. 너희들도.”

그 다음에는 세단이 우아하지만 급하게 쫓기는 듯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 채 그곳에 도착했다. 떡벌어진 체구에 푸른 눈을 한 북구계 운전수가 앞좌석 문을 열고 먼저 내린 다음, 뒷좌석 문을 열고 주인이 내리도록 배려했다. 구부러진 허리에도 불구하고 고집센 표정을 잃지 않은 색슨계 백발노인과, 초조함과 불안과 충성심이 샐러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급히 서류들을 챙겨서 그를 뒤따르는 동양계의 비서가 차례로 내려섰다. 운전수가 트렁크를 열고 안에 있던 몇 가지 트렁크를 꺼냈지만, 노인은 그가 건네준 짐들이 어째 출발할 때보다 훨씬 적어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베르! 이런, 로베르! 내 귀여운 강아지가 들어있는 케이스는?”

“.................................”

“.............아무래도, 아까 부스터 전개할 때.....”

운전수가 눈만 멀뚱거리는 사이에 사태를 파악한 비서가 이야기했다.

“뭐야~!!!!!! 그게 어떤 개인데! 뼈대있고 유서깊은 명문가의 자손이라고!”

“회장님, 애초에 같이 태우지 않고 트렁크에 넣은 것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개가 문제가 아닙니다! 회장님이 사셔야죠!”

“주 경찰에 연락해. 아무리 기능이 마비되었어도 분실물 정도는 찾겠지, 응?”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마드리드가 보낸 놈들이 바로 코 앞까지 왔고, 이 항공편이 떠나면 당분간 코레니아 행은 뜨지 않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애버트 씨, 운전수로서 제가 하는 일에 저런 자들과 싸우는 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제게 시키고 싶으시다면 보수를 세배로 주셔야 할겁니다요.”

“.....................”

밴트럭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몰려오는 쪽을 잠깐 바라본 노인은 잠시동안 갈등하는 듯 하더니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아아, 이런! 마일스 G. 애버트씨가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자 이리로. 일행이 두분이십니까? 짐은 이리 주십시오. 뭐라고요, 도중에 분실물? 공항 근처는 AP가 순찰을 도니까 그쪽에 말해 두겠습니다. 암요, 이정도야 서비스죠. 나중에 제 성의를 잊지만 말아주신다면 충분합니다. 충분하고말고요!”

스튜어드의 눈에 띄게 정중한 안내를 받아가며 그들은 트랩을 올라갔다. 그들을 쫓아오던 밴트럭들은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예 항공기의 출발을 막아버리기 위해 앞쪽 활주로로 집결하여 즉석 시위를 벌이려 했지만, 공항 내부 경찰대가 불도저와 포크레인 등을 긴급 투입하여 그들을 반대편으로 유인했다.

마지막으로 점보 트레일러가 도착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것은 도전적인 눈매와 초콜렛빛 피부를 지닌 자주색 정장의 20대 여성과 그녀보다 약간 어린 듯하지만 오히려 키는 훨씬 더 크고 뽀얀 피부를 지닌 보라색 정장의 여성이었다.

그들은 항공기 가까이까지 와서는, 갑자기 뱀처럼 길다란 트레일러의 차체를 무리하게 휙 틀어서 가까스로 유턴시켰다. 그러고는 자동운전장치를 조작하여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다가 점차 속력을 높이도록 맞춰둔 뒤에 양쪽 문을 열고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쿠페 군단의 한가운데로 파고 들어간 트레일러는 폭발물이 실려있었던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폭발을 일으켰다. 간편한 핸드백만을 손에 든 두 사람은 화려한 불꽃놀이의 역광[逆光]을 받으며 트랩으로 여유롭게 뚜벅뚜벅 걸어와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예약한 마커스 듀발씨 일행 대신에 왔어요. 예약권 명의 변경신청은 이미 했고요.“

“주시 제임스씨와 할린 할리데이씨라... 됐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스튜어드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이면서도 그들을 통과시켰다. 각박해진 요즘에는 남의 항공권을 빼앗거나 훔쳐서 대신 타러 오는 이들도 흔했지만 그들을 일일이 단속할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항공사는 자리만 채우면 그만이었기에 그다지 크게 신경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 은색 비행기는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고 높이 날아올랐다.





“나는 퍼스트 클래스를 요구했을 텐데, 이 사람들은 다 뭔가?”

“애버트씨,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희 사정도...”

“그런 말이 어디있나. 도피를 하던 죽을 쑤던 나는 어디까지나 사업가일세. 사업가로서 장래에 대한 면밀한 구상과 검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정체도 근본도 모를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아이들이 떠들어대고 사방에 세균이 그득한 3등석을 타고 가라는 소린가?”

“퍼스트 클래스는 현재 운영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담당할 인력이 없고 전원도 부분적으로 끊어져 있어서요. 사실 이 비행기가 나는 것만 해도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비사도 많이 줄어든 상태거든요.”

스튜어드의 진땀빼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주름이 가득한 애버트의 얼굴은 도무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며 항변했다.

“항공사는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걸 기대하신다면 개인용 세스나를 빌리시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결국 애버트는 툴툴거리면서 자리에 돌아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비서가 다가와 싹싹한 미소를 띠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한다.

“몇시간만 참으시면 되는 일입니다. 다들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겠죠.”

“난 내 사연 말고는 어떤 사연도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일세.”

“..............................”

“거 정말 시끄럽군... 우민들 같으니라고!”

그 실랑이를 한쪽에 앉은 채 듣고 있던 걸프딕 가족이 자기들끼리 얘기한다.

“세상에 저럴 수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부자 대접을 받고 싶어하다니!”

“아무리 처지가 바뀌어도 자각을 못 한다니까.”

“아빠, 그런데 신문 보셨어요? 저사람 공장에서 실은 화학무기를 생산했대요!”

“저런 족속들은 자기 자신 빼고는 뭐든지 생산할거야. 돈이 된다면.”

허클은 무심하게 얘기하고는 노트북을 꺼내들고 뭔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닐, 프래니는 좀 어떠냐? 체온이 돌아왔니?”

“많이 좋아졌다고 본인은 웅얼대는데 제 눈에는 잘 모르겠어요.”

“프래니 이제 안 아파. 프래니 놀고 싶어.”

“...13살짜리가 6살짜리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게 안아픈 거냐?”

“그래도 15살짜리가 50살처럼 구는 오빠보단 낫지.”

“뭐야- 요게!”

“둘 다 그만 하거라! 프래니, 모포 하나 더 덮어라. 닐은 저쪽 코너에 가서 식수를 좀 받아와라. 여기 티켓 있다.”

“말로는 천연암반수라고 하면서 실은 뒷뜰 수도펌프로 길어낸 그런 물들이요?”

“쓸데없는 소리 마라.”

소년은 머쓱한 얼굴로 씨익 웃으며 누워있는 동생의 볼을 한번 가볍게 꼬집고는 티켓을 받아들고 뒤쪽 배급실로 향했다. 누군가가 켜 놓은 위성 TV에서는 시원스럽게 생긴 아나운서가 CG처리된 아메리고 지도를 보여주며 새 소식을 알려준다. 그 지도의 대부분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고 푸른색으로 표시된 나머지 부분도 점점 붉게 변해가는 추세였다.

“...레이시아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무서운 속도로 세력권을 넓혀나가는 중인 문제의 괴질[怪疾]은, 아메리고 북동부를 완전 마비 상태에 빠뜨리고, 남서부와 북서부로도 옮겨가는 중입니다. 연방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소년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항공기 안은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치 피난처와 같은 우울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물방울 무늬가 찍힌 타이를 헐렁하게 늦추고 한숨 돌리며 종이컵에 든 합성 잼보니로 건배를 하는 두 명의 젊은 여자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래도 멋지게 해냈지?”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너와 해낸것치고는 멋졌지.”

“비꼬는 거야, 할리? 내 방법 어디가 맘에 안 들어?”

“주시 넌 무모 그 자체잖아.”

“이봐, 내 스타일이 좀 위험을 무릅쓰는 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너한테만 위험을 떠넘기지는 않잖아. 네가 끝까지 따라와준 거지, 내가 널 끌어들인 건 아니라고 보는데.”

“호 그래? 그럼 마커스를 구워삶아서 고주망태가 될때까지 술을 마시게 한 건 누구지? 그러고 나서 암시를 걸어 금고번호를 알아내고 그의 부하들 눈을 피해 그 자리를 빠져나오느라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도록 고생한건?”

“그 대신에 금고를 실제로 딴 건 나잖아. 도망치기에 앞서 조직의 장부를 경찰에 우송하고 녀석들이 눈채못채게 조작까지 해놓고 덤으로 킬러 몇 명도 저승으로 보냈다구. 뭐 걔네들이 알아서 함정에 걸려든거지만 말야.”

“덕분에 나는 계속해서 의심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마커스와 다른 간부들 사이를 끝없이 넘나들며 거짓말을 부풀리느라 죽을 뻔했지. 그건 왜 빼니?”

갈색피부의 주시는 점점 이 토론이 지겨워졌다. 게다가 며칠간 잠을 못 자서 눈꺼풀도 납덩이를 단 것처럼 무거웠다. 그녀가 한발 물러섰다.

“알았어, 할리. 우리 둘 다 공적이 있지만 너의 공적이 더 대담무쌍한 활약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인정할게. 하여간 우린 둘다 남에게 지기 싫어해서 탈이야. 안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붙어다니는 건지도 모르지. 난 내가 너에게 지는 것도 싫지만, 네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아. 나 이상한 걸까?”

“우리 둘 다 이상한 거야.”

그들은 잠시동안 서로를 마주보며 쿡쿡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시가 살기[殺氣]를 띤 얼굴을 하고 재빨리 상의 안주머니에서 매그넘 미니어처를 꺼내어 뒤편을 향해 살짝 겨누었다. 하지만 그쪽에는, 생수병을 들고 가족에게 돌아가는 소년과, 식어버린 음식을 조달하여 고용주에게 들고 가는 동양계 비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그래?”

“......아냐, 긴장이 덜 풀린 탓이겠지.”

그녀는 권총을 다시 집어넣고 술을 한잔 더 따랐다.

지루한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갔고 이윽고 스튜어드가 활기차게 말해준다.

“앞으로 30분 후면 코레니아 수도에 도착합니다. 내릴 준비를 하십시오.”





“하필이면 저 속물이 우리와 같은 조라니!”

“네시, 바네사, 여보, 목소리를 낮춰요. 어차피 이 ‘볼일’만 끝나면 또 만날 일은 없을테니 그 동안만 참읍시다.”

“당신은 정말 속도 좋군요. 나는 저런 인간이 곁에 있는 것만 해도 버티기 힘든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훈련이에요. 당신도 내 회사에서 일해보면 알거요. 당신 직장 말고.”

“무골호인 다 되셨구려. 지금의 당신을 보고 대학 때 열렬한 사회운동가였다고 대체 누가 믿겠어요.”

“당신만 믿어주면 충분해요.”

허클과 그의 가족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까다로운 방역과 여러가지 검진절차를 거친 뒤에 비로소 입국을 허가받고 공항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401편을 타고 온 승객들은 각자의 볼일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거대한 도시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그들과는 약간 다른 무언가를 찾아온 허클과 그 가족들은 곧바로 외국인을 위한 특별관리센터에 가서 두툼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 신청서는 어떤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특별허가를 내어 달라는 취지였는데, 그 신청이 받아들여진 뒤에 보니까 바로 그들과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같은 조[組]로서 문제의 시설을 방문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애버트 일행이었다.

그 시설 내부 이곳저곳을 안내받으며 돌아다니는 사이에, 허클은 애버트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와 (“이 길로 갑시다. 왜냐고 묻지 말고 그냥 그렇게 해. 내가 말하는데 따르지 않겠다면 당신이 나가”) 그것을 묵묵히 받아줄 뿐인 고용인들과 (“회장님이 무조건 옳습니다. 예 물론이죠. 근데 월급은 분명히 올려 주시는 거죠?”) 그에 대해 분노를 누르지 못하는 부인 바네사와 (“속물을 속물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불러!”) 틈만 나면 애버트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져 골탕을 먹이려 드는 (“아저씨는 무기를 만들었으니 돈좀 벌었겠어요? 근데 법적으로는 전범 아닌가요? 세금은 얼마나 냈죠? 구세군 모금은요?”) 아들 닐과 아직까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비틀비틀 걷고 있는 딸 프래니 (“괜찮아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근데 아빠 머리끝에 감도는 그 후광은 뭐죠?...해롱해롱”) 때문에 노심초사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 어서 빨리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하고 빨리 나가야지 안 그러면 ‘그것’에 걸린 불쌍한 딕 조르디아노보다 내가 먼저 저세상 가시겠어. 그에 비하면 저기 같이 걸어가는 두 여자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가이드가 뭔가 말하고 있군.

“이제 여러분이 방문을 신청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로 넘어가죠. 아시다시피 지금 전세계는 5년 전의 어느날 갑자기 퍼지기 시작한 신종의 괴질로 인해 치명적인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나 아메리고는 세계최강의 국력에도 불구하고 그 괴질의 타격을 가장 크게 입어서 일부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마비되고 생활도 매우 힘들어졌죠.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그쪽에서 어렵게 찾아오신 분들일테니 더 자세히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계속 걷다가 어떤 무균실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가이드가 신호를 보내자 기밀문이 열렸고, 그들은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살균복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줄지어 길다란 멸균통로를 지나갔다. 샤워기 비슷한 기구에서 차가운 소독액이 흘러나와 살균복 전체를 흠뻑 적셨고, 곧이어 천장에 설치된 건조기가 그것을 적당한 온도로 말려주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마침내 통로 맨 끝에 위치한 실험실 비슷한 넓은 방으로 들어섰다. 사방은 하얀 타일과 세라믹 패널로 이루어져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는 역시 살균복 차림의 직원들이 뭔가 복잡한 기기와 재료들을 갖고 실험을 거듭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마스크 내의 확성장치를 통해서 말을 계속했다.

“흔히 여러분이 ‘그것’이라고 부르는 괴질 - 정식명칭은 따로 있습니다만 - 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떤 치료법도 예방법도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아니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랬죠. 하지만... 4년간의 끈질긴 연구 끝에 코레니아의 몇몇 학자팀이 의외의 예방약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자연에 없는 걸 특별히 합성해내거나 귀한 재료에서 힘들게 추출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애버트였다.

“안내원 양반, 좀 간결하게 해 주지 않겠나. 강의는 대학때 들은걸로 충분해.”

애버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바네사까지도 그 말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이드는 보조를 맞추어 함께 웃더니 침착하게 다음 얘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하죠. 험, 그 예방약이란 코레니아에서만 일반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어떤 전통 음식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만 그때만 해도 그 예방효소의 효능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해서 그냥 ‘효과가 있다더라’ 정도로만 알려지고 정확한 계량은 불가능했지요. 그러나 요 수년 내에 양자 컴퓨터를 사용한 효소 고분자 정밀검사법이 개량되면서 좀더 정확하게 그 음식과 괴질의 상관관계를 밝혀내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그는 실험실을 한바퀴 돌아보며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바로 그 작업이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만...기술적인 문제는 잘 모르니까 생략하고, - 이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나중에 참고문헌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아메리고어로 번역된 것도 있지요. - 일단 나갑시다.”

그들은 무균실을 빠져나와 살균복을 반납하고 다시 행렬을 지어 가이드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음식 자체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그 본래의 형태는 그다지 만들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기에, 이곳 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여러가지로 복제나 이식이 행해졌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버전들이 오리지널을 뛰어넘을 수 있었는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지만, 시도는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요.”

그들은 시설 내부에 위치한 커다란 식당에 도착했다. 녹색 벽이 아늑했다.





“그러나 이번에 괴질의 치료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이 음식의 새로운 버전은 절대로 외부에서 모방할 수 없는 우리만의 특급 비밀입니다. 유전공학적으로 개량된 재료와 정밀하게 계량․배합된 양념을 사용해서 보다 깊은 맛과 향이 우러나고 동시에 괴질에 대한 항체를 길러주는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음식이기 때문이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정보부는 꽤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음식’이 나오기에 앞서 간단한 전채요리로 입맛을 돋구고 있었다.

가이드가 테이블가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어느 한 사람에게 시선이 멎더니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갑자기 무장한 경비원들이 달려와 애버트의 비서를 둘러쌌다. 그 중 둘이 비서의 팔을 꼼짝 못하게 잡아채고 나머지 한 명이 그의 품에서 커프스 단추로 위장한 초소형 비드캠VidCam을 떼어냈다. 가이드가 한숨을 쉬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렇게 헛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나타나죠.”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붙잡혀있는 비서에게 다가가서 이야기한다.

“타나베 카즈히데 씨. 왜 당신이 자포네스국 자위대 정보3과 일위[一尉]라는 사실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물론 본명은 따로 있고 아메리고 국적은 위장취득한 것이라는 사실도?”

“.......................!”

순간 비서는 무서운 힘으로 양쪽의 경비원을 떨쳐내고서 테이블을 박차고 뛰어올라 가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방금 전까지 그의 양말 안에 숨겨져 있었던 강화플라스틱제 아미 나이프가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

“끼얏!”

사람들 틈에 끼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주시 제임스는 그때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살기를 다시 느끼고 그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았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코레니아의 일에 자기가 상관할 필요는 없었고 게다가 뭔가를 하려고 해도 안전조치랍시고 그들이 총을 회수해갔기 때문에 나설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식전 운동이 너무 격렬하면 안좋죠.”

가이드는 그냥 웃고만 있다가 몸을 살짝 낮추더니 매끈하게 생긴 양념통을 하나 꺼내어 재빨리 상대의 얼굴에 뿌렸다. 정체모를 붉은 가루가 호흡기와 눈을 자극하는 바람에 비서는 공포에 질려 동작이 둔해졌다.

“-이때다!”

그 틈을 노려 경비병들이 그를 포박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주시를 옆에서 할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가이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양념통을 들어 보였다.

“코레니아의 고춧가루는 멕사칸도르의 칠리 다음으로 맵죠. 이것은 그걸 150배 정도 농축하여 대인 제압용으로 개발한 신경마비 파우더입니다.”

사람들은 감탄하는 눈초리였으나 비서가 끌려가는 걸 떨떠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애버트는 볼멘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저 사람이 스파이 혐의가 있다 해도 일단은 아메리고 시민이고 내 고용인이오. 나중에 대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가이드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으로 그에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애버트씨? 연방정부가 당신의 회사 분할을 눈감아주고 출국할 때에도 굳이 잡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출국 전에 정보국 인사와 은밀히 만나시는 걸 봤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애버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운전수가 불안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건지......”

“당신네 나라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하지만...여기서 뭔가를 알아내실 생각은 그만두십시오. 그 음식의 비밀은 여기가 아니라 몇 군데 다른 시설에서 분산 연구중이니까요.”

애버트는 벌레씹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젓다가 그 건방진 코레니아인에게 뭐라고 나지막하게 그르렁거리고는 다른 이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운전수와 함께 그 자리를 피하여 달아나버렸다. 여행 도중에 애버트에게 감정이 있었던 사람들, 특히 바네사는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런데 가이드가 자기 남편이 있는 쪽으로 와서 뭐라고 말하는 걸 보고, 그녀는 적지않게 당황했다. 너무 낮은 소리로 말해서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제공해 주신---감사-----협력----”이라는 정도는 귀에 들어왔다. 뭘 제공해? 뭘 감사하고? 협력이라니?

그녀는 급히 남편 옆자리에 앉아서 귓속말로 대화했다.

“허크, 당신.........”

“응, 뭐요?”

“길게 묻지 않을게요. 아메리고를 배신한 건 아니죠?”

“당신도 애버트를 한방 먹이고 싶어했잖소?”

“하지만......”

“걱정말아요. 그 대신 정부교섭을 통해 정식으로 그 요리법을 아메리고에 소개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저쪽도 그건 찬성이라고 하니까. 사실 내가 여기 온 건 대사관과 협력해서 그 교섭을 시작하기 위해서거든.”

“당신이?! 평범한 식품회사 부장인 당신이요?!”

“괴질 이후로 전문가가 많이 줄어들어서 나한테 기회가 떨어졌다오. 식품의약청의 신임장과 함께.”

“내가 들은 이야기들 중 가장 멍청한 이야기네요!”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당신 남편이지.”

“미운 사람. 내겐 한마디 말도 없이.”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좀 떨어진 자리에서 의욕없이 요리를 깨작거리던 닐과 프래니가 그것을 보고 서로 속삭였다.

“오빠, 엄마 아빠가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괴질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렸나봐.”

“무슨 병?”

“사춘기 열병.”

“...에이 설마...”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음식이 커다란 자기그릇에 담겨 테이블에 올려졌다. 종업원들이 질서정연하게 그 묘한 향취를 풍기는 음식을 작은 그릇에 덜어서 그곳에 늘어앉은 외국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주시와 할리는 생각지 못한 냄새에 잠시 코를 움켜쥐었다.

“이거...마늘 냄새? 흡혈귀 퇴치엔 그만이겠어.”

“뭔가 더 섞여있는 것 같은데.”

“이 양념 좀 봐, 엄청 화끈하게 발라놨군.”

허클과 그의 가족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허클도 문제의 음식 자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왔기 때문에 부인이나 아이들에게 설명해줄 만한 수준이 못되었다. 그 음식은 배추과의 식물을 통째로 여러가지 양념에 절이고 오랜 시간 동안 잘 삭인 다음 썰어서 모양새를 내는 것이었다. 그 기이한 향취에 대해 사람들이 의견이 분분하자, 가이드가 한마디 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역사를 헤쳐왔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전보다 나아진 면도 많고, 스스로 뿌듯해할 만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그에 비례하여 어두운 면도 많지만 그건 우리 스스로가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요.”

“하지만 그게 이 맛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가이드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랜 시간동안 숙성과 발효를 통해 다져진 양분과 맛의 조화 - 그것이 바로 이 자랑스런 음식의 핵심입니다. 괴질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고, 내일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가 고난의 세월을 통해 ‘성숙’해 왔듯이, 이 음식은 기나긴 겨울철 동안의 ‘발효’를 통해 진짜 음식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알듯 말듯한 얘기지만 흥미롭긴 하군요.”

허크가 이렇게 대답하고 그 음식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기묘하고 안타까운 맛이 났다.

맵고 짜면서도- 단순히 그것 뿐만이 아니라- 발효로 인한 신맛과 사각거리는 배추의 감촉이 함께 어우러지고- 동시에 속에 품고 있던 수분이 밖으로 나오면서 느껴지는 시원함- 그리고 재료 자체에 숨어있는 약간의 쓴맛- 그 모든 것이 그 안에는 들어 있었다. 허크는 거부감을 억누르고 조금씩 더 맛을 보며 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씩 맛을 보기 시작했다.

허크는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생각했다. 괴질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 어쩌면 이것은 신이 우리에게 준 또 다른 기회가 아닐까?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무관심하게 방치해 왔던 또 다른 문화와의 새로운 만남을 갖기 위한 그런 기회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아메리고에 전해야 한다. 애버트같은 치사한 방법이 아닌 떳떳하고 정의로운 방법으로. 그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익숙지 않은 맛에 적응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노력하는 부인과 자녀들을 자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옆 테이블에서는 정장차림의 두 여자가 열띠게 떠들고 있었다.

“생각해봐- 괴질로 고통받지 않는 유일한 나라에 와서, 그 비결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씹고 있는 거잖아. 진짜 재미있지 않아?”

주시의 천진스런 그 표현에 할리가 좀더 문학적인 옷을 입혔다.

“그래...... 뭐랄까..... 말하자면 마치......”

“마치?”

“넥타... 마나... 암브로시아...”

“뭐야 그게?”

“.....<신들의 음식>.”





THE END





(C) ZAMBONY 200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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