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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3] 헬가 2/6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8
 


3. 비니



“그럼 이제까지는 벨싱키의 통신회사에서?”

닐센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나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먹고살만은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로부터 성을 물려받으라는 변호사의 편지를 받고 화들짝 놀랐죠. 그래서 일단은 휴직계를 내고 앞일을 어떻게 결정하면 좋을까 생각해 보려고 내려왔어요.”

“흐음, 거참 부럽네. 나도 이만한 집을 물려줄 부모가 있으면 좋겠수.”

옆에서 음식을 게걸스럽게 해치우며 마타다가 빈정거렸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계속 우물거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 송어 타르트 진짜 맛있는데요. 역시 할멈은 일류예요!”

목에 걸고 있던 낡아빠진 초생달 모양 목걸이를 꺼내어 말없이 들여다보던 할멈이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나의 요리는 올라프슨 공이 인정하신 거니까 당연하지.”

“아, 네. 그러시군요...”

나는 그녀의 기고만장한 기분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타르트 하나만 더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좀 기다려. 주방에 가서 가져와야 하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 그럴 것 없어. 혼자면 충분해.”

그녀는 빈 접시를 들고 방문을 나섰다. 곁눈질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닐센이 내게 비밀이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근데 비니, 이거 아십니까? 저도 여기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듣던 소문이긴 하지만, 저 노파, 마녀가 아닐까 하는 얘기가 있어요!”

“요, 그거 나도 들었수다. 읍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 절대로 내려가지 말라는 지하실에서 온갖 이상한 실험을 한다는군요!”

“어떤 날에는 읍내 공동묘지 근처에서 번갯불을 일으키는 걸 봤다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두 분 다 너무 심심하다보니 미신에 물든 거 아녜요? 21세기 중반인데 마녀가 어떻고 마법이 어떻고 하는 건 너무 허황된 얘긴데요?”

마타다가 정색을 하고 받아쳤다.

“내 고향 무카바에서는 아직도 죽은 자의 영혼을 존중하는 관습이 있수.”

닐센이 끼여들어 외교적으로 마무리했다.

“뭐 어쨌든...단순한 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저 노파에게 기분나쁜 데가 있는 건 사실이 아닙니까?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 이런 얘기죠.”

“그나저나 여기엔 언제까지 있을거유, 로스트레선?”

“...라스트라센이에요. 에또, 한 5월 20일쯤에는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때 어딘가에서 요란한 록큰롤 멜로디를 딴 18음계 벨소리가 들려왔다.

마타다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밖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에이, 하필 이다 아주머니는 꼭 이럴 때 전화야... 잠깐 실례하우!”

의외로 고향과 가족을 사랑하는 보통사람일지도... 라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달려나간 방향에서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헬가의 것이 분명한 씩씩거리는 소리와 마타다의 것이 확실한 능글맞은 목소리가 맞부딪히더니, 또 한번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음식을 가져오던 헬가와 전화받으러 나가던 마타다가 중간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할멈이 상기된 얼굴로 뛰어들어와서 아귀처럼 소리질렀다.

“닐센! 또 내 험담했지? 남이 못들을 줄 알고 뒤에서 수근대지 마! 검은지빠귀, 너도 주인이면 주인답게 입단속들 좀 시켜! 마녀가 어쩌고 번갯불이 어째?”

저렇게 귀가 밝은 걸 보면 마녀가 맞는지도...

닐센이 어깨를 으쓱했고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

닐센이 한숨을 쉬더니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후우! 날 때부터 저랬을까요, 아니면 한때는 사랑에 목매단 처녀였을까요?”

나는 할멈이 나만했을 시절을 그려보려 했지만 도무지 잘 되지가 않았다.



4. 헬가 - 1699년



“아스트리드님! 더이상은 못하겠습니다. 제발 그것만은...”

“헬가, 약한 모습 보이지 않기로 했잖아. 한번이면 돼. 제발 부탁이야.”

남들 앞에선 위엄덩어리로 행세하는 이 사람이 내게 이런 소릴 해도 되나?

“자, 어서.”

“아................”

나는 울음섞인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가 내민 조그만 녹색 약병을 울며겨자먹기로 받아들었다. 아침부터 대체 몇 병이나 들이켰는지 속이 이상해질 지경이다.

나는 그 병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말고 의심스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거, 잘못되면 해독제는 있나요?”

“아마 여기 어디쯤에...... 걱정말고 쭉 들이켜.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다만 피부나 머리색이 좀 바뀔 따름이니까. 게다가 영구[永久] 주문은 걸지 않았으니까 몇 시간만 지나면 본래대로 돌아온다구. 날 믿어.”

그렇게 믿었다가 어떤 지경이 되었는지 그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열이 뻗쳐서 그동안 쌓인 속내를 속사포같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믿으라고요? 믿으란 말씀이시죠? 그동안 전하께서 어떤 일을 해 오셨는지 아신다면 그렇게 속편한 말씀은 못하실텐데요! 미용마법이라고 연고를 발라서 두꺼비 딱지 가득한 피부를 만들어놓지를 않나, 건강마법이라고 물약을 마시게 해서 위장이 뒤틀리고 창자가 꼬이게 하질 않나, 결계[結界]마법이라고 제 실내복에 주문을 걸었다가 난데없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불타 죽을 뻔하지를 않나, 공격마법이라고 저를 표적으로 이상한 불꽃을 마구 쏘아올리시질 않나... 그전에 그 이동[移動]마법은 또 어땠죠? 저를 무슨 장터 구경거리마냥 맹수 우리에 가둬두고 주문을 걸었더니 어디로 이동했나요? 호수 밑바닥이었다고요, 호수! 경비대장이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저는 프레이아의 물레를 돌리며 발두르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었을 테죠!”

그녀는 백금빛으로 빛나는 머리를 두가닥으로 묶고 상의 소매를 걷어부친 채 이국[異國]의 두꺼운 책들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약초와 기타 잡것들을 섞다가 나의 히스테리 섞인 반응에 놀란 토끼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전혀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거 놀라운걸. 내가 5년동안 그대와 함께 살았지만 그렇게 말 많이 하는건 처음 보는데. 역시 호라티우스의 웅변술은 효과가 있었어! 물론 나는 귀찮아서 안하고 그대에게 떠넘겼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도 철부지인 걸까.

5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시녀 노릇을 하면서 처음 만났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여러가지 면들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차라리 몰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것들도 섞여 있었다. 이를테면...

그녀는 싸늘하게 웃으며 짐짓 떠보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약은 그만두고 다른 걸로 할까? 왜 지난번에 피렌체에서 들여온 그...”

나는 등골이 오싹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그 정체모를 물건에 사람을 태운 채 하늘에 띄우려다 벌써 두 명의 병사가 골로 가지 않았던가. 그 다빈치인지 뭔지 하는 인간의 낙서조각은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실현될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황당한 것들 뿐이었다.

“차라리 약이 낫겠군요.”

“진작 그럴 것이지.”

“해독제는요?”

그녀는 잡동사니가 쌓인 곳을 한참 뒤지다가 둥근 약병 하나를 꺼내어 보였다.

“그럼..............”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드린 뒤에 코르크 병마개를 따고 안에 들어있는 요상한 액체를 꿀꺽 삼켰다. 갓 딴 박하와 토나카이의 뿔과 덩굴장미의 잎사귀와 거미 뒷다리를 섞은 듯한 기괴한 향기가 입속을 가득 메웠다. 순간적으로 구토감이 밀려와서 입을 막고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어째 몸 속을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뭔가 말할 수 없이 평온한 느낌이 찾아왔다.

뭐랄까, 기운은 없지만 묘하게 안정되어 있는... 착 가라앉은...

잠시동안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아스트리드를 돌아보고 어떠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손으로 입을 가리고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먹거리고 있었다. 웃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그녀가 재빨리 내 앞에 금박으로 장식된 손거울을 들이댔다.

나는 말문이 막힌 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는 처음 보는 백발 노파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런데 자세히 보니 노파가 입은 옷과 머리장식은 방금까지 내가.......

“헬가, 그대는 나이든 얼굴이 훨씬 아름답군. 다시 봤어.”

“전하, 이게 대체.............”

나는 아스트리드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녀는 배합이 좀 잘못된 것 같다며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만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옆에 놓아둔 둥근 약병을 가리키며 (어느새 얼굴에 걸맞게 쉬어버린) 노인의 목소리로 추궁하려 했다.

“해독제가 있다면 왜......”

그러나 그녀는 병마개를 열더니 병을 뒤집어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병은 비어 있었다.

“사실은 아직 효력을 역전시키는 공식을 못 찾아냈어. 그래서 별일 있겠나 싶어 그대를 안심시키려고......”

몰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것 - 이를테면 이런 무책임한 성격!

덕분에 나는 그 곰팡내나는 지하 실험실에서 5시간 동안 쑤셔오는 어깨와 뚜둑거리는 허리, 침침해진 눈과 아련해진 청각을 벗삼아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톡톡히 체험해야만 했다. 이 제멋대로인 주인의 말에 따라 또 다시 이상한 약을 삼키느니 차라리 이그드라실에 목을 매달고 말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래요! 차라리 저를 쫓아내시는 한이 있어도 더이상은 안됩니다!”

본래대로 돌아온 내가 얼굴 피부를 어루만지며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그래도 바깥에서 살 때보다는 잘먹고 잘자는지라 꽤 얼굴 모양이 나아진 편이었다. 왠지 음울한 인상을 주는 이목구비와 자루걸레같은 검은 머리는 여전했지만...

“아쉽군. 내일은 그대가 관심있을 만한 걸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네? 무슨?”

“요즘 발드헤임의 푸줏간 아들에게 열을 올리고 있지? 날 속일 생각은 마.”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얘기냐.

“어디서 그런...........”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래서 말야, 실은 그대에게 딱 맞는...”

“제게 말입니까?”

“동방의 미약[媚藥] 처방전을 때마침 손에 넣었지. 어때, 탐나지 않아? 언제 변할지도 모르는 그의 마음을 꽉 잡는 거라구. 그대의 그 손아귀로.”

그녀는 내 두 어깨를 살짝 붙잡고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는 별의별 수를 다 쓰는구나 싶어서 나는 속마음과 달리 짜증을 냈다.

“그런 도움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자연을 거역하는 짓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무지하게 관심이 솟아나고 있겠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전하야말로, 라군헤임 성의 사촌오라버님과...”

내가 뭐라고 따지려는 그 순간에 실험실 문이 벌컥 열리고 짙은 색의 턱수염을 기른 풍채 좋은 남자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아스트리드의 존경하는 아버지이자 이 일대를 다스리는 영주인 시구르 올라프슨임을 알아차린 나는 재빨리 옆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음, 헬가인가. 지난번 송어 타르트는 좀 설익은 것 같더군. 다음엔 잘 좀 해주게. 그건 그렇고, 아스트리드. 할 얘기가 있다.”

그는 나를 지나쳐서 경쾌한 걸음으로 자기 막내딸에게 다가가 뭐라고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는 내게 물러가 있으라고 손짓했고 나는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가서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올라프슨의 인자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가 문틈으로 들려왔다.

“......아직도 마법이냐? 이제는 언니 오빠들처럼 좀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나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 자리에 못박혀 더 들으려 했지만 그걸 눈치챈 아스트리드가 문 쪽으로 손을 뻗어 소리없는 주문을 걸었다. 반쯤 열려 있던 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고 그녀의 의사를 짐작한 나는 하릴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나저나 그날 내놓은 송어 타르트는 모처럼 내가 전면에 나서서 만든 비장의 메뉴였는데... 그런 소리를 듣고 나니 기운이 쫙 빠진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저녁 준비에 열심인 다른 하인들의 일을 도와주며 별 시덥잖은 주제로 수다를 떨다가 식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허름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리맡에 놓여있는 필사본의 <사가Saga>를 보니 3년 전의 어떤 날이 뇌리에 떠올랐다. 당시 나는 요리, 청소, 세탁 등의 기본적인 노동에서 어느 정도 풀려나 아스트리드의 전속 시녀로 지명되어 여러가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었다.

“잘 하고 있겠지?”

“아, 아스트리드님...”

나는 열심히 깃털펜으로 의미도 모르는 룬 문자를 베껴쓰다가 아스트리드가 다가온 것을 알고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그녀는 무술 연습을 마치고 금방 온 듯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날의 진도를 확인하며 여러 가지 머리아픈 사항을 되새기는 지루한 작업이 끝난 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어째서 저같은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건지요? 저는 아스트리드님을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읽기나 쓰기 없이도 그런 건 잘할 수 있습니다.”

“간단해. 내가 공부하기 싫어서 그냥 떠넘기는 거지.”

“또 그런 말씀을....”

“어느 정도는 사실이야. 영주나 영주 부인이 되기 위한 공부는 지겹기 짝이 없어.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석궁을 쏘고 말을 달리지. 게다가 요즘은 또 다른 일에도 흥미가 생겼거든.”

“또 다른 일이라니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딘가 쓸쓸하고 지친 듯한 기운이 배어나왔다. 때로 무책임하긴 해도 항상 자신만만하고 도도한 그녀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얼버무렸다.

“나중에 말해주지.”

그것이 마법 연구에 대한 얘기라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그러나 저는 전하와 같이 영특한 분에게는 미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공부를 하는 건 의미가 없는...”

“헬가.”

그녀는 정색을 하고 내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고 싶어. 그대는 그대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똑똑하거든.”

“전하...?”

“나는 한 명이라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

솔직히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대체 내 공부 얘기를 하다가 그런 얘기가 왜 나와?

“그러니 어제 내준 숙제를 안 하고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 어디 있지?”

“...............웃”

나는 발두르의 투구에 겨우살이를 넣으려다 들킨 로키같은 표정을 지었다.

“또 안했다면 벌로 피타고라스 정리 3백번 쓰기야.”

“저, 전하.....그것만은......제발..........!!!”

회상에서 깨어난 나는 책을 펼쳐들고 몇줄 읽다가 등잔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한 말을 생각해보니 당시 그녀가 지었던 쓸쓸한 표정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잠에 빠져드는 바람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잊어버렸다.





“헬가, 오늘 정말 근사한걸.”

“그렇게 봐주니 고마워. 너도 정말 멋져.”

나는 너무나 흥분하여 이게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을은 몇 년에 한번 있는 축제를 즐기러 나온 인파 때문에 어딜 가나 북새통이었다. 광장에서는 짚단과 장작과 액[厄]을 상징하는 인형을 한데 모아놓고 커다랗게 불을 피운 뒤에 그 더미를 에워싸고 한떼의 남녀들이 2인 1조가 되어 전통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들은 꽃잎과 새의 깃털로 꾸민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고 남자들은 낚시 미끼와 사냥용 칼로 장식된 털옷을 입고 있었다. 빙하에 가까운 탓에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긴 이 지방의 축제는 언제나 따뜻한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잠시 꿈꾸는 듯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약간 반갑지 않은 얼굴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그 갸름한 얼굴에는 새침하게 생긴 눈코입이 붙어 있었고 얼굴 주위에는 붉은 기운이 도는 금발이 물결치고 있었다.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다부지고 활달한 인상을 주는 소녀였다. 버터빛 머리칼을 가진 선량한 눈동자의 내 파트너는 내 기분도 모르고 그 얼굴을 향해 손짓했다.

“밀라가 웬일이지? 이번에는 마을 일 때문에 못온다고 했는데. 신경쓰이네.”

“나보다 더 신경쓰여?”

“무슨 바보같은 소리야. 밀라는 내 친척일 뿐이라고. 잠깐만 보고 올게.”

내게 양해를 구하고 광장을 빠져나가 그 여우같은 연갈색머리의 여자에게 달려가는 발드헤임 푸줏간 둘째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뜻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내 손은 드레스 속주머니에 곱게 잠들어 있는 파란 약병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스트리드가 일 때문에 밖에 나가있는 사이에 그녀의 처방을 보고 어설프게 조제한 그 무언가가 들어있는 병 말이다.

일주일 전에 그녀가 뭐라고 말했더라?

“이번엔 확실히 성공이야. 소감 어때?”

“바보가 된 기분이랄까요---”

나는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어 중얼거렸다. 동방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나라에서 가져왔다는 그 비방[秘方]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실험대상이 바로 나였으니까.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니까 괜찮아.”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워요.....”

그렇다고는 해도 그 시금털털하기 그지없는 탕약을 마시고 난 뒤의 취한 듯한 기분은 확실히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것이었다. 완벽하게 도취상태에 빠져든 나는 포도주먹은 여우마냥 반쯤 눈이 풀린 채 마침 눈앞에 서 있던 아스트리드를 끌어안고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당신은 너무나 착한 사람이며 나는 가슴이 쿵쾅거려 도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둥 나 자신도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희한한 말을 쏟아부었던 모양이다.

3시간쯤 뒤에 약효가 떨어진 내게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던 그녀가 어떤 부분에서 갑자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은근슬쩍 얼버무리는 것을 보고 혹시 내가 그녀에게 청혼이라도 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괴이쩍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냐, 무슨 소릴.. 그런 일은 없었어!”

“그럼 왜 거기서 말을 끊으시는지요?”

“.......아, 아무튼 그런 일은 없었다고!!! 더이상 묻지 말도록!!”

허둥지둥하는 주인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아무튼, 비록 3시간이 한계였지만 그 약의 효과는 최고였다!

“헬가. 이건 내 첫번째 성공작이지만 아직은 검토해 봐야 할 일이 있으니 함부로 밖에 가지고 나가면 안 돼! 나는 아네르슨과 함께 저쪽 마을의 수확을 점검하기 위해 며칠간 자리를 비울 거야. 이 실험실 열쇠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마! 알겠지!”

그런 연유로, 실험실에 들어가는 건 간단했지만 문제는 내가 그 약을 마셔버려서 이제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아스트리드의 서류를 일일이 살펴보며 배합을 알아내어 아무에게도 눈치채지 않게 그 약을 재현하려 했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그 결과물이 내 주머니 안에 있다.

프레이아여, 나를 용서해 주소서.

나는 춤추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구석으로 빠져나와 반대편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있을 때는 저렇게 밝게 웃는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한번도.

“..........................”

나는 확실히 그와 교제 중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기억에 남을 만한 어떤 일을 벌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둘 다 너무 쑥맥이었던 탓이다. 게다가 그의 먼 친척인 밀라가 나타나면서 우리 사이는 더이상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 서먹서먹하고 어색했다. 내가 밀라에 대해 너무 신경을 써서 그가 불편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도 그녀에 대해 뭔가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인지는 나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어찌될지 불보듯 뻔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 끝에 이 약병을 들고 나오기로 했다.

-그들이 이쪽으로 온다.

“헬가,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실은 밀라가 가족들과 함께 왔는데 나를 만나보셔야겠다고 한참 성화래. 아무래도 오늘은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그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마음은 영 편치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축제는 앞으로 며칠 더 있으니까, 또 만나면 되지 뭐!”

일부러 기운을 내서 크게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가 걱정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정말 괜찮겠냐고 묻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와 밀라는 내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쓸쓸하게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침울해졌다. 그러는 가운데, 광대 몇몇이 걸어와 과일로 저글링을 하며 활짝 미소지었고, 춤을 멈추고 쉬던 남녀들이 다시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둘을 바라보던 내 귀에 이상한 말소리가 환청[幻聽]처럼 들려왔다.

‘괜찮을까? 이런 거짓말을 해도......’

‘아휴 이런 새가슴. 쟤는 네가 뭐라 해도 다 믿어. 예민하게 굴지 마.’

‘그렇지만 정말 놀랐어. 오늘 자정에나 올 거라고 했잖아? 몰래 만나기로..’

‘물고기 말리는 일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지 뭐. 근데 쟤 아직도 저기 있네?’

그 순간, 그와 함께 다정하게 걸어가던 밀라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 잠깐동안 떠오른 표정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렸을 때 마을 아이들이 놀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장난감을 잠시 빌린다고 해놓고 아예 집으로 들고 갈 때 지었던 표정과 똑같았다. 가난한 마을이어서 장난감이라 해봐야 짚과 나무토막으로 만든 것이 고작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 얼굴에 떠오른 당혹감을 읽었는지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계속 걷기 시작했다.

이것은 환청이 아닐지도 몰라. 나는 갑자기 뛰어서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광장을 완전히 벗어나 달무리가 보이는 생선창고 뒷길로 접어들려 할 때 겨우 그들을 따라잡았다. 숨을 헐떡이며 내가 소리질렀다.

“저, 에릭.”

“응?”

그가 순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가벼운 궁금증과 당혹감이 섞인 눈초리.

나는 밀라를 무시하고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며칠 뒤에 네 생일 때 주려고 했지만... 지금 줄게. 우리 성 안에 꽤 용한 치료술사가 있는데 건강에 좋다고 지어줬어. 난 하나 더 있으니까...”

“성질도 급하지. 그 말 하려고 그렇게 뛰어왔어?”

밀라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약병을 바라보았다.

“괜히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늑대로 변한다거나 백 년간 잠에 빠진다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얘는 할머니한테 옛날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섞여나왔다.

“소문에 듣자하니 너희 주인인 영주의 딸은 마법사라며? 그러면 시녀인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

“난 그저 에릭이 건강하길 바랄 뿐이야.”

밀라가 심술궂은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래? 그러면 네가 시험삼아 마셔보시지. 그러고도 아무 일 없으면 에릭에게 마시도록 하자. 괜찮은 생각이지?”

아, 안돼! 그렇게 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운이 좋으면 약에 취해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에릭에게 안길지도 모르지만 재수없으면 밀라에게 엉뚱한 소릴 하거나 아예 둘에게 버림받고는 길가의 풍향계나 지나가던 아줌마 아저씨를 붙잡고 실언을 할지도 몰라. 어쩌면 좋지?

“역시 자신이 없나보네? 자기가 못먹는 약을 남에게 권하면 쓰나?”

밀라의 날카로운 지적에 화가 뻗쳐오른 나는 약병을 뺏아들고 소리쳤다.

“좋아. 하지만 네가 한 말에 책임은 져야 할걸! -오딘에게 영광을!”

나는 격정에 찬 몸짓으로 병뚜껑을 열고 안의 액체를 두 모금 정도 마셨다.

그리고 기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

“헤, 독약은 아닌 모양이네. 내가 좀 지나쳤나? 애썼어 헬가.”

밀라의 짓궂은 한마디에 이어 에릭이 병을 내 손에서 잡아채 갔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감사히 마실게. 오딘에게 영광을!”

물론 그가 마신 뒤에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뭐야!?

둘은 내게 작별인사를 하는둥마는둥하고 그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나는 어두컴컴한 길 위에 털쩍 주저앉아 힘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결국 모든 게 내 착각이었고 그 약의 조제도 실패였나?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그 난리를 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나는 억지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성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파묻혔다. 그러나 심란한 나머지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아서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타[出他]에서 돌아온 아스트리드의 수발을 돕다가 영문도 모른 채 병사들에게 끌려나가 심문관 앞에 출두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밀라와 마을사람들 몇 명이 서 있었다.

“푸줏간 에릭이 어젯밤 갑자기 죽었고, 그제 자네가 건네준 약물 말고는 수상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해명할 셈인가?”

“---그럴 수가?!”

밀라는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표독스런 말투로 내가 마녀이며 자기가 에릭의 마음을 차지하는 게 두려워 독을 먹인 게 틀림없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갖은 욕설과 원망을 다 쏟아냈다. 그에 이어 마을의 치료술사가 에릭의 증상을 기록한 서찰을 제출했고 그 내용을 말로 상세히 설명했다. 그 다음에는 에릭의 형이 분명한 버터빛 머리의 험상궂은 사내 하나가 나와서 에릭의 평소 생활이 얼마나 단정하고 예의바른 것이었으며 나와의 교제에 대해서도 크게 반대한 일은 없었고 그가 자살을 생각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고 얘기했다.

“헬가 니벤헤임, 그대의 변명은?”

나는 완전히 토르 앞에 선 헤임달이 되어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밀라는 중요한 얘기를 모두 꾸밈없이 말하긴 했지만 명백히 한가지를 빼먹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는 나도 그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걸까? 지금 이렇게 내가 살아있는 걸로 보아 에릭이 죽은 이유는 따로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나는 악의에 찬 사람들의 눈길 앞에서 무슨 말이든 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고 가슴 한쪽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더이상 할 말이 없다면, 명백한 정황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헬가 니벤헤임을 푸줏간 둘째 에릭 라스트라센의 살해범으로 확정하며, 형벌의 집행은......”

“잠깐 기다리게!”

사불상 가죽으로 만든 군복을 차려입고 백곰가죽 망토를 두른 아스트리드가 심문관실 문을 박차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와서 그 말을 가로막았다.

“아스트리드님! 아무리 전하라도 지금은 곤란합니다!”

“그대들은 사람을 잘못 체포했다. 그 말을 하러 왔다.”

“증거가 있사옵니까?”

“이 아이가 그 청년에게 준 약은 내가 조제한 것이다. 이 아이는 그것이 병을 고치는 약이라 믿고 준 것뿐이다. 이것이 내 처방전이다.”

거의 포기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험실이 어질러진 것을 보고 내가 멋대로 약에 손댄 걸 알아차렸다고 해도, 어째서 저런 거짓말까지? 그녀는 내 시선을 눈웃음으로 받아넘겼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독약을?”

“애초에 만들려고 했던 건 독약이 아니었으나, 배합에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시녀를 구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시는 것은 아니신지?”

“내가 저런 말라빠진 검은지빠귀 한 마리 때문에 내 명예를 더럽힐 증언을 하겠는가? 시녀는 죽으면 또 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진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걸 알아주기 바란다.”

말라빠진 검은지빠귀? (약간 울컥)

하여간에 그 폭탄선언을 듣고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심문관은 마을사람들과 심각하게 토의를 벌인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아스트리드 전하의 증언에 대해 검토해본 결과, 헬가 니벤헤임의 살해 혐의를 인정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인정되어, 그녀의 신병을 석방한다. 그러나 대신 아스트리드 전하께는 영주님과 의논하여 라스트라센 집안에 충분한 손해배상을 해주실 것을 권고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물론 알아들었다. 자, 헬가.”

마땅찮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밀라와 마을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광야에서 성인을 만난 유랑자의 심정으로 그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눅눅하기 짝이 없는 심문실을 나와 아스트리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동안에도 나는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환청에 시달렸다. 주인님의 약물 때문에 내 몸이 이상하게 변하기라도 했나?

‘마녀가 권력과 손을 잡았군. 영악하기도 하지.’

‘세상은 똑같은 것들끼리 모이는 거라니까.’

‘심문관님, 정말 이대로 끝내도 좋다고 생각하세요? 마을 여론이...’

‘아무래도 좋아. 근데 칼손. 자네 아버님을 설득할 수 있겠나?’

‘어쩌겠습니까. 영주의 집행관에게 짓밟히지 않으려면... 밀라, 기운 내라.’

‘에릭......저년을 잡아죽이기 전엔 내가.......’

‘--밀라!’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가 이렇게나 가까운 것이었다니.

의자에 걸터앉은 아스트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바보같은 짓을 했군.”

“......사실입니다.”

그녀는 혀를 차며 양피지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래서 이걸 보고 약을 만들어 그 청년을 녹이려고 하셨다?”

“네, 그렇습니다만 어째서......”

“멍청하긴, 내가 제대로 배합할 때 옆에 있었으면서 기억 안 나? 여길 봐, 모두 똑같지만 한 가지가 틀렸잖아. 양귀비가 아니라 키네도리스를 써야 했어.”

“......아!”

“혹시나 누가 침입해서 이 비방을 훔쳐갈까봐 가짜를 대신 넣어두었더니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군. 그것도 내가 가장 믿었던 그대가 말야. 어떻게 생각해?”

나는 모기소리로 중얼거렸다.

“...........니다만....”

“뭐라고? 좀더 크게.”

“...그러나 전하 역시, 그걸 제게 보여주심으로써... 제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도하신 것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합니다만...”

솔직히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가 부정해주길 바랬다.

진짜로 그것은 모두 실수였고, 다만 내가 어리석은 탓에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이다. 아스트리드님은 언제나 옳고, 나를 함정에 빠뜨릴 생각 따위는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녀는 양피지를 촛불에 갖다대어 태워버린 다음에 쓴웃음을 지으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넘어간 사람이 어리석은 게지.”

“......전하?”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내 말을 가로막고 문을 가리켰다. 무엇 때문인지 대단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 그만 물러가라.”

“전하!”

“물러가라고 했다!”

나는 그 기세에 눌려 그 방을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초생달 모양의 목걸이를 꺼내어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내가 수습 시녀로서의 과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되었을 때 그녀가 직접 걸어준 것이었다. 나는 그 목걸이를 잡아떼어 방 한구석에 내동댕이쳤다.

메말라있던 눈에서 조금씩 눈물이 나오더니 어느덧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나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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