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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3] 헬가 6/6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51
 


13.비니



나는 싸늘하게 식은 할멈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아스트리드에게 하늘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다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다 살다 보니 별걸 다 보는군요.”

마타다의 말대로였다.

아까 전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다이아의 조각들이 허공에서 맴돌다가 달빛을 받더니 방향을 바꾸어, 우리가 있는 잔디밭으로 앞다투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휘황찬란한 빛의 입자[粒子]로 바뀐 그 파편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그대로 통과, 쓰러진 할멈의 몸에 황금의 빗줄기처럼 내리꽂혔다.

그러자마자, 할멈의 몸 위로 새하얀 깃털 같은 묘한 물질들이 뒤덮이더니, 마치 곤충이 가을이 되어 고치를 만들듯 하나의 커다랗고 푹신푹신한 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그 고치는 엄청난 열과 빛을 내며 들썩거리더니 다음 순간 차갑게 식으면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아까 백금상이 그랬듯이 그 표면에는 동시다발적으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이프오르간의 음색과도 같은 영롱한 소리와 함께 고치가 서서히 갈라지더니 폭죽처럼 한꺼번에 팍 하고 터졌다. 사방에 하얀 깃털이 휘날리고 고치 속에 들어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너무나도 뜻밖의 광경에 제정신을 잃을 뻔 했다.

“......할멈? .....이 아니네....”

“세상에 이럴수가!”

“-헬가!!!”

그 자리에는 이미 70대 할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내가 초상화에서 봤던 음울하고 차분한 인상의 검은 머리 소녀가 누워 있었다. 물론 옆구리의 총상은 씻은 듯이 나아 있었고, 변하지 않은 건 입고 있는 낡은 옷 정도였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왠지 가뿐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그녀는 자기의 두 손을 새삼스레 내려다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기를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는 아스트리드를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프레이아여,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옵니까?”

“헬가!!!!!!!!!”

아스트리드가 다가가서 그녀를 다정하게 덥석 안았다. 아주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만날 수 없었던 육친과 재회라도 한 것처럼, 눈물 가득한 얼굴로.

나는 마타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전화를 꺼내들었다.

“...아스트리드님... 이게 대체......”

그녀는 그동안 전혀 쓰지 않았던 과거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응? 어떻게 된 건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그대가 살아났으니... 그걸로 된 거잖아?”

그 검은 머리의 소녀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보석! 클로드-루이가 보냈던... 없어졌어요!”

“그럼, 아까 그게......? 레 파스의 고서에서 말하던 현자의 돌...?”

“모여든 플로지스톤을 응축하는 중심핵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여우같은 샌님이 그래도 양심은 있었군. 그런데 내가 알 수 없는 건...”

나는 해후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때아닌 궁금증 때문에 헬가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콕콕 두드리며 물었다.

“할멈이...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그 헬가’였나요? 진짜로?”

그녀는 말없이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나의 서너 배는 나이를 먹은 모습을 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나보다 어려진 모습으로 나타나니 이거야 원 적응이 안 된다. 하기야 속은 여전히 그 능구렁이 늙은이일지 누가 알아.

“그랬군요. 좀 어리둥절하지만, 축하해요. 그나저나 여긴 밤바람이 찬데 성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제서야 아스트리드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말이 통하다니 기쁘군. 그대가 지금 이곳의 성주인가?”

“에에...뭐랄까. 그 비슷한 거죠. 옛날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한때는 당신 집이었으니, 사양말고 들어오세요.”

그녀가 나를 미심쩍은 얼굴로 뜯어보다가 헬가에게 물어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닌 것 같은데?”

헬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거리며 대답했다.

“라스트라센 가의 자손입니다. 밀라 아시죠? 그때 에릭과 제가...”

“아아.”

듣다보니 진짜 궁금한데 밀라가 대체 누구람? 나중에 한번 물어봐야지.

“이젠 검은지빠귀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글쎄 뭐 그건 상관없지만...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네요.”

“검은지빠귀?”

아스트리드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자 헬가가 멋적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댔다.

하여튼 우리 네 사람이 지친 몸을 이끌고 성으로 돌아가려 할 때 호수 쪽에서 음산한 그림자 하나가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나타나서 우리에게 총을 겨눴다.

“그렇게는 안 되지. 성주양반.”

“닐센! 아직도 살아 있었어?”

“이 정도로 죽어서야 쓰나.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런 판타지 영화 같은 쇼를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 다 죽어줘야겠어.”

“포기하라구! 이젠 유물도 다 날라갔고 당신 목표도 사라졌잖아!”

“못먹는 감 찔러나 보자라는 속담이 있지. 너희들은 날 화나게 했어.”

마타다가 그의 눈을 피해 뭔가를 꺼내려다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초콜렛색 손등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살짝 스친 상처여서 내가 손수건을 꺼내 지혈을 해 주었다.

“또 허튼 짓 하면 그땐 저승행이다.”

“치사한 놈......”

마타다와 나는 그저 이를 갈며 상대를 노려볼 도리밖에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조용히 관조하고 있던 아스트리드가 헬가에게 속삭였다.

“할 수 있겠지?”

“물론. 저도 그동안 공부 좀 했으니까요.”

“그럼 시작!”

아스트리드가 망토를 휘날리며 옆으로 뛰쳐나오면서 닐센을 향해 소리질렀다.

“본디 일리스트라투라Bondi Illistratura!"

놀란 얼굴로 총을 쏘려던 닐센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 자리에 못박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이게 뭐냐고 그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동안 헬가가 다시 뛰쳐나와 아까와는 또 다른 파우더를 뿌리면서 냉정하게 외쳤다.

“셉투스 바캄Septus Vakam!"

다음 순간, 닐센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훌륭한 전기통닭구이가 되었다. 그는 땅바닥에 쓰러져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며 울분 섞인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이거야 원, 우리가 나설 자리가 없겠군요.”

“이 바닥에서 생활한지 10년째지만 마법이 얽힌 사건이라니.”

“로맨틱하잖아요, 그래도?”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다보니 숲 뒤편에서 웬 젊은 남녀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정장 차림에 거울처럼 앞이 비치는 선글래스를 끼고 사무적인 기질과 즐기는 듯한 느긋함이 뒤섞인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들고 있던 핸드 스나이퍼를 상의 안쪽의 권총집에 집어넣고 마타다와 반가운 얼굴로 악수를 나누었다.

“이자식들, 형님이 위기에 처했는데 이렇게나 늦게 오냐?”

마타다가 소리지르자 그들이 그를 둘러싸고 집단으로 꿀밤을 먹였다.

“위성 좌표를 잘못 보낸 게 누군데 이제와서 그런 소리야.”

“게다가 네가 언제부터 형님이었냐?”

“하여튼 머리 나쁘면 평생 고생이라니까.”

“--어어, 때리지 말라구. 이래뵈도 난 다쳤어!”

그들 뒤편의 숲 쪽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여러 대의 경찰용 에어로모빌이 떠올랐다. 그 차들은 사이렌을 울리며 호수 주변에 골고루 착륙하여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절도범들을 체포하고 파괴된 헬리플레인의 잔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경관 몇 명이 달려와 마타다와 동료들에게 경례를 붙이고는 아직도 쓰러진 채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닐센을 연행해 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이런 개발[犬足], 여기서 빨리 데리고 나가 줘~ 저 미친 여자들만 없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아~ 감옥이고 뭐고 다 갈테니까 제발 번갯불만은~ 으으~”

정말로 단단히 혼난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끌려가는 그를 약올려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지금은 그것보다도 알아봐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아스트리드는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에 놀랐는지 헬가에게 뭔가를 열심히 묻고 있었다.

나는 마타다를 붙잡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 소개가 늦었군요.”

그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자기를 소개했다.

“하린 아크바입니다. 국제탐정길드 이다 [IDA = International Detective Agency]의 선임 특수 조사관이죠. 미리 알려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우어...............”

나는 눈 앞에 서 있는 보험 외판원같은 말투의 예의바른 남자가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벨싱키 뒷골목에서나 쓸 법한 하수구 언어로 속을 마구 긁어대던 삼류 정원사와 동일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그의 동료들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사람들도...”

“안녕! 반 도일입니다.”

파란색 정장의 동양인 남자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겉으론 미아찾기 전문이라지만 사실 맨날 여자나 꼬시는 놈이지.”

“어허, 실례되는 소릴!”

“여어, 조나단 스핀하트입니다.”

크림색 정장에 샘 스페이드 풍 중절모까지 쓴 백인 남자가 껄렁하게 인사했다.

“강력범 담당인 주제에 밤낮 여동생에게 쥐여 지내는 불쌍한 친구지.”

“하린, 이따가 조용히 대화 좀 나눌까?”

“처음 뵙겠어요. 도나 휴즈라고 해요.”

베이지색 정장에 무테 안경을 낀 사틴-레이시아 혼혈 여인이 나와 악수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토크쇼 사회자냐는 질문을 들어서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

“하린, 급여 통지서 안 받고 싶은 모양이네?”

“그럴 리가 있겠어? 이번 보고서도 잘 부탁해용.”

하도 많은 사람을 소개 받아서 정신이 멍할 지경이다.

“그럼 당신들은 오늘 밤에 이런 일이 있을 줄 다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사실은 지난 주말까지도 확증을 못 잡아서 망설이고 있었죠. 녀석들은 디프라이버즈Deprivers라고 불리는 악질적인 문화재 약탈범들입니다. 우리는 거의 7년에 걸쳐 녀석들의 리더인 카를레스 알바레를 추적해 왔죠. 여기서는 닐센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그자입니다.”

스핀하트라는 남자가 제법 분위기를 잡아가며 설명했다.

“아하......”

“실은 녀석들이 나타나자마자 급습할 예정으로 벨싱키 경찰과도 연계를 하고 준비를 갖추어 뒀는데... 이 멍청한 하린 자식이 좌표 전송을 실수하는 바람에 여기서 15킬로나 떨어진 로덴하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죠. 아가씨의 친구분들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야, 하린, 반성 좀 해라!”

반이라는 남자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잘난 듯이 얘기했다.

“저 자들이야. 내가 너한테 말했지, 비니? 얼마 전에 이 부근을 들쑤시며 다녔다는..”

헬가가 손가락질을 하며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지껄였지만 나는 손을 내저으며 무시했다. 일일이 대꾸하다가는 신경이 견뎌내지를 못할 지경이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 봐야겠네요. 나중에 경찰에서 몇 가지 물어보러 출두하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쓰레기들도 경찰에서 회수해갈 거고요. 아, 당신 친구들이요? 보고서에는 그냥 기계 고장으로 헬기가 추락한 거라고 써놓을테니 염려 놓으세요. 정말이지... 소란스런 밤을 보내게 해서 죄송합니다.”

휴즈 양이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그녀가 그나마 가장 정상으로 보였다.

“그럼, 이다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대모님이라 부르죠.”

반이 대답했다.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는 느낌이......”

그 유쾌한 탐정들은 나와 인사를 나누고 헬가와 아스트리드에게도 치하의 말을 한 뒤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왠지 미련이 남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추파를 던지던 하린을 제외하면 다들 얌전히 사라진 셈이다. 호수를 둘러싸고 이리저리 헤집어놓고 다니던 경찰관들도 먼동이 터올 때쯤에는 경비 몇 명만 남기고 감쪽같이 철수했다.

“이보게, 처자. 그래서 저 사람들이 집행관이라는 얘긴가? 아니면 포졸?”

“내 이름은 비네트고 비니라고 불러도 좋아요. 어...그리고, 네 맞아요. 아마도 그럴 거예요.”

아스트리드가 이 3백 년 후의 세계에 적응하려면 꽤나 오래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산전수전 다 겪은 헬가가 곁에 있으니 괜찮겠지.

“음, 근데 비니? 나는 이 성 바깥의 일은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하면...”

젊은 헬가가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내 팔을 붙잡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크와악! 더이상 말하지 말아요! 우선 좀 자야겠어!!!”

우리 셋은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성 안으로 들어와 아무 침대나 골라잡고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날, 거대한 파란 늑대와 백금으로 만들어진 공주님이 닐센의 얼굴을 한 투명 드래곤을 물리치고, 헬가가 아메리고의 대통령을 잡아와서 맛있는 타르트를 만드는 괴상한 꿈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은 역시 즐거운 일이 아니겠어?



14.에필로그 - 6개월 후



“정말로 떠날 거예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게 많다면서요?”

타오르는 붉은 금발의 비니 라스트라센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헬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는 아스트리드도 같은 의견이라고 했다. 너무나 변해버린 고향에 계속해서 눌러살기보다는, 애초에 알지 못했던 넓은 세계를 보러 나가는 게 좋겠다는 얘기였다.

“그럼 할 수 없죠. 아쉽네요. 할멈...아니 헬가의 요리솜씨를 더이상 맛볼 수가 없다는 게.”

“언제든 내 욕을 하면 달려올 거야. 나는 귀가 밝거든!”

헬가는 간만에 해맑게 웃었다. 몇 세기 만에 이렇게 웃는 것일까.

“그리고 아스트리드님도 한곳에 붙어있는 건 못견디는 편이거든. 우리가 계속 머물면 비니도 불편하잖아? 이제 새 관리인들도 구했으니 우리가 도울 것도 별로 없겠고.”

비니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성을 팔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이따금씩 쉬러 돌아올 건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보단 네가 있는 게 그래도 나으니깐. 특히나 저 지하실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가 없거든.”

“약속할게요. 어쩌면 이 성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죠.”

“꼭이야.”

비니는 헬가와, 그리고 아스트리드와 아쉬운 포옹을 나누고 그들을 배웅했다.

“라스트라센 양, 그대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언젠가 은혜를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살아남는게 갚는 거예요. 올라프슨 공.”

“확실히... 그대 말이 맞아.”

아스트리드는 밝게 웃으며 감사의 표시로 비니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21세기의 캐주얼 복장을 입은 두 사람의 모습은 아직도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신선한 매력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옷가지와 일용품과 몇 가지 마법도구를 꾸려넣은 짐가방을 챙겨들고 시구르드와 함께 성문을 나섰다. 아스트리드가 감개무량하게 성채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여기가 그리워지겠지.”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어요, 원하신다면.”

“하지만 그전에 먼저, 알아보고 싶어.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이, 대체 어떤 곳인가를. 그대가 같이 가 준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지.”

“어차피 우린 외따로 떨어진 세상에 버려진 두 마리 검은지빠귀니까요.”

“어, 저기 비네트가 달려오는데, 무슨 일일까?”

반쯤 닫히던 성문을 다시 열고 헐떡거리며 달려온 비니는 두 사람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기름종이로 곱게 싼 커다란 물건이었다.

“헉헉.... 이거, 드리려고 했는데 깜빡... 경찰이 현장조사 중에 헬기 잔해 속에서 찾았대요. 아마 도난당한 유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남았나 봐요. 어서 풀어봐요.”

아스트리드는 조심스레 그 꾸러미를 풀어 보았다.

안에 들어있던 것은 두 명이 함께 탈 수 있는 커다란 말 안장이었다.

“이건...... 비케의...............”

헬가가 놀라서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것을 만져보았다.

“세상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때..........”

“마음에 들어요?”

헬가와 아스트리드는 서로를 마주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다음 비니를 바라보고 감사를 표했다. 그들에게 아직 ‘추억’이 남아있는 한, ‘미래’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손을 흔드는 비니를 뒤로 하고 그들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들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비니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복도를 지나갈 때 핸드폰이 울렸다.

“네? 아, 에릭슨 씨... 마음을 정했냐고요? 네 물론이죠. 어떻게요? 죄송하지만 팔지 않는 쪽으로 하겠어요. 뭐라고요? 이해할 수 없다고요? 네 그럴 거예요. 하지만 제겐 꼭 여기에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어떤 이유냐고요? 유감스럽게도 그건 가르쳐드릴 수 없네요. 아뇨, 위락시설 개발은 다른 마을에서 알아보세요. 제게는 이미 다른 계획이 있어요. 저런, 그렇게 혈압을 올리시면 건강에 안 좋죠. 그럼 안녕히 계세요.”

3층 유물관 자리로 올라온 그녀를 낯익은 검은 얼굴이 맞이했다.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예요, 정말로?”

“걱정마세요. 요즘은 새로운 사건도 없고 해서... 몇달간 휴가를 낸 거니까. 필요하다면 뭐든지 시키시라고 달려온 겁니다.”

“정원사 자리는 벌써 채웠는데요.”

“그럼 뭐 다른 거라도. 음하하.”

“그러면... 이 계획서 좀 검토해 줘요. 내주부터 착수할 건데...”

그 서류를 들고 들여다보던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헬가의 민속마을?”

“크런치랜드같은 아메리고 쓰레기보다 백번 낫지 않겠어요?”





“곤란해요 곤란해. 이 이상은 태워줄 수 없어요. 이 구간은 파업 중이거든.”

얼굴에 반점이 있는 짧은머리의 버스 운전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할 수 없죠.”

검은 머리의 음울한 소녀와 백금빛 머리의 어른스런 소녀가 푸르스름한 털을 가진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려섰다.

인적이 없는 곳에 들어선 그들은 길 한쪽으로 비켜서서 시구르드가 거대하게 둔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먼저 등 위로 뛰어오른 아스트리드가 가지고 온 안장을 적절히 두들겨 펴서 시구르드의 등에 맞추는 데 성공했다.

곧이어 헬가도 뛰어올랐고, 그들이 꽉 붙잡고 있는 사이 시구르드는 청백색의 날개를 펴고 하늘로 도약[跳躍]했다. 그들의 발 아래로 바인란드의 푸르른 시골길이 끝없이 펼쳐졌다. 봄이 가까워져서인지 바람도 그리 쌀쌀하지 않고 저 멀리 빙하 지대의 빛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스트리드가 기운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헬가.”

“네, 아스트리드님?”

“‘님’은 빼기로 했잖아. 나도 그대와 같아지기 위해서 노력할 테니까.”

“그럼 그 말투부터 좀 바꾸시죠, 아스트리드. 속이 뒤집히거든요.”

가시돋힌 그 한마디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상대가 물었다.

“아직도 나를 미워해?”

헬가는 그 질문에 대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목에 걸고 있던 초생달 목걸이를 어루만지면서.

“그렇네요. ......아주 많이.”

그리고 서글픔과 망설임이 섞인,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죽이고 싶을 만큼.”

아스트리드가 고개를 돌려 헬가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그녀는 예상을 깨고 무척이나 기쁘다는 듯이 밝게 웃음지으며 말했다.

“사실은, 그 말을 듣고 싶었어.”

헬가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적어도 그동안 변하지 않은 게 하나는 있는 셈이잖아?”

헬가는 맥이 탁 풀린 얼굴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당신도 전혀 변하지 않았군요. 아무리 해도 못당하겠다니까.”

“그게 누구 때문인데 그래?”

“--푸훗!”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3백 년의 세월이, 그들 사이에 놓인 장벽이 눈 녹듯 사라졌다.

시구르드가 벽력같은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그 기세에 놀라 지나가던 여객기가 급히 기수를 돌리고 방향을 수정했다. 여객기 창문에는 대체 밖으로 날아가는 저 물체가 뭔가 궁금해하는 승객들의 놀란 눈동자가 가득했다. 시구르드는 그들의 눈을 조롱하듯 날쌔게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구름 저편에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THE END





Original (C) ZAMBONY 2003.07.30.

Revision (C) ZAMBONY 200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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