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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2] 허풍선이 남작의 탄생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55
 





<< 허풍선이 남작의 탄생 >>

The  Young  Baron  Munchausen

―낭만의 시대, 에피소드 1―





이스탄불, 1739년



“아직도 아무런 반응이 없나?”

“끈질긴 녀석들입니다. 3시간동안 대포알을 퍼부었는데도 끄떡없습니다.”

“직접 쑤셔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 총수[銃手]들을 모두 소집해.”

“차르Czar께는 뭐라고 보고하면 좋을까요?”

“그건 자네에게 맡기지. 지난번에 보낸 전령이 돌아올 때까지 궁리해 둬.”

“포위공격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잿빛 군복을 차려입은 한떼거리의 남자들이 어두컴컴한 야전 텐트 안에서 지도와 삼각자와 컴퍼스와 잎담배를 낡은 탁자 위에 펼쳐놓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을 하고 있었다. 텐트 내부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밀폐가 잘 된 나머지 등잔불을 켜 놓아야 할 정도였고, 모여 있는 군인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벌써 몇 개월이나 질질 끌고 있는 포위전에 지친 나머지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심정을 애써 감추려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안에서 한발짝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당하는 것은 이쪽이다.

“돌격대를 보내기 전에 상황을 좀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척후를 보내죠.”

갈색 머리에 북극해처럼 차가운 눈을 지닌 키큰 장교가 제안했다.

“그동안의 전투로 인원이 많이 줄어들었는데 그런 위험한 임무를 맡으려는 자가 있겠나? 보냈다가 당하면 괜히 병사만 낭비하는 꼴이 아닌가.”

머리숱이 별로 많지 않은 비대한 몸집의 장군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용병을 보내면 되죠. 마침 실력은 바닥이지만 의기충천한 녀석이 있습니다.”

“어디 출신인데?”

키큰 장교가 그에게 얇은 두루마리를 하나 건네주며 대답했다.

“독일인인데 자칭 귀족이라더군요.”

장군은 코안경을 꺼내어 쓰고 그 빛바랜 추천장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카를 프리드리히 히에로니무스 폰... 이봐, 세르게이의 병대[兵隊]에 게르만 말썽꾼이 하나 있다더니 이자인가?”

“난리도 아닙니다. 매일 자기 삼촌과 신대륙에 가서 사냥한 얘기나 늘어놓죠.”

짤막하게 설명하는 키큰 장교의 얼굴에서 알듯말듯한 짜증이 묻어나왔다.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그 젊은이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이 확실했다.

장군은 코안경을 도로 집어넣고 상대방에게 그 두루마리를 돌려주면서 짐짓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이자의 능력이 정찰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키큰 장교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참으로 잔인무도한 대답을 내놓았다.

“시체를 건져내면 적어도 적군이 어떤 무기를 쓰는지는 알아낼 수 있겠지요. 총알구멍과 칼자국을 검사해서.”

혀를 차며 장교를 바라보던 머리숱 적은 장군은, 옆의 동료들과 잠시동안 의논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근엄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그자에게 전사시 특전에 대해 알려주고 만약의 경우 고향에 보낼 유서를 쓰도록 하게. 시간이 없으니 2분 안에 모두 처리해야 할 것이야.”

키큰 장교는 짝이 약간 안 맞는 군화 뒤축을 서로 부딪히며 경례를 붙인다.

“그럼 즉시 착수하겠습니다.”

“--잠깐, 세묘노프, 아직 안 끝났네.”

장군의 황급한 한 마디에 장교는 막사를 나가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더 있습니까?”

“위험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가까이 오게.”

장군은 목소리를 낮추고 몇 가지 지시를 덧붙였다. 장교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러면 제가 악당이 되어버리잖습니까.”

장군이 능글맞은 얼굴로 이죽거렸다.

“그럼 아닌가?”

장교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이미 자기의 허파나 염통이 그런 중노동을 견뎌낼 수 있을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옛날에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저 발이 움직이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것 뿐이다.

소년이 입은 잿빛 군복은 흙탕물과 지푸라기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뾰족한 군모는 반쯤 구겨져 있었으며, 등에 메고 있던 녹슨 장총은 총신 절반이 떨어져나간 채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약간 붉은빛이 섞인, 헝클어진 금발 머리는 공포에 질린 얼굴 위에서 나풀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은 일그러지고 두 눈은 충혈되고 얇은 입술 속에서는 헐떡거리는 소리와 욕지거리가 규칙적으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 해도 위엄있는 군인으로서 본받을 만한 표본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몰골이었는데, 하기야 다른 누구라도 붉은 모슬렘 모자와 하얀 비단옷에 금빛 어깨띠를 메고 꽤 성능이 좋은 화승총을 손에 든 건장한 투르크인 열 여덟 명이 뒤에서 일사불란하게 쫓아오고 있다면 외모에 신경쓸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열 아홉살이란 나이에 비해 앳되 보이는 그 소년은, 복잡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는 유리창을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깨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2층 높이 아래에 말먹이로 모아둔 듯한 거대한 건초더미가 보였다. 그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곳을 향해 과감히 뛰어내렸다.

어중간한 키에 어정쩡한 몸매를 갖춘 그의 몸이 노란 쿠션 위에 닿았다.

“--윽!”

푹신할 것으로 기대했던 건초의 감촉이 이상하게 딱딱했다. 아래쪽이 뭔가 불순물이 섞여 있거나, 혹은 너무 햇볕에 오래 말려서 갈대풀처럼 말라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고양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데굴데굴 굴러서 건초 더미 아래의 벽돌길 위로 착지했다. 반쯤 남아 있던 총신의 나머지 절반이 없어졌고 몸 여기저기에 긁히고 베고 멍든 상처가 늘어났다.

“...망할... 너무 급하게 뛰어내리다 보니 유리 파편에...”

머리 위의 깨어진 유리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경비병들은 아직 이쪽의 외딴 광장에는 신경쓰지 않고 있으니, 아직 도망치기 전에 한숨 돌릴 여유는 있을 터였다.

그런데 소년이 허리를 굽히고 아까 동여맨 다리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흐르는 것을 알아챘을 때,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독일인이군. 액센트를 들어보니 알 만해.”

비정상적으로 착 가라앉은 중년 남자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왔다. 약간 혀꼬부라지는 억양이 섞여있긴 했지만 그것만 갖고는 국적이나 인종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누, 누구냐!”

소년은 재빨리 장총을 들고 일어서서 짚더미를 등지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변에는 바퀴없는 낡은 수레와 화약통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딜 보고 있나. 그런 실력으로는 금방 죽어.”

이번엔 독일어다.

갑자기 등 뒤의 짚더미가 우수수 소리를 내며 흩어지더니 누군가가 그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소년은 뒤돌아보려 했으나, 그 전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날카로운 금속을 그의 목덜미에 대고 내리눌렀다.

한여름의 흑맥주처럼 차가운 칼날이 끔찍할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염병할!”

짚더미가 이상스레 딱딱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냐고 물었지? 하지만 예의가 있다면 자기 이름부터 말했어야지.”

소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억누르고 태연함을 가장하며 소리질렀다.

“전쟁터에서 이름 가르쳐주고 싸우는 놈 봤어!”

“확실히 우리 기준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내가 가본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는-”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적병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고함을 지르며 동료들을 불렀던 것이다.

“쳇, 좀더 쉬다가 밤이 되면 빠져나가려 했더니 다 틀렸군. 자, 따라오게나!”

등 뒤의 사내는 황급히 칼을 거두고 소년의 팔목을 단단히 붙잡은 뒤 마라톤의 경주자처럼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뜻밖의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소년은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면서도 자기를 붙들고 달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려 애썼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베고 긁힌 상처가 아픈 것조차도 까먹을 정도였다.

아랍인들처럼 길다란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터번을 쓰고 있었지만 얼굴로 보아하니 유럽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유대계인 듯도 하고 갈리아의 피가 섞인 듯도 한 그의 매끈한 얼굴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절박함보다는 오히려 상황을 즐기는 장난기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고, 넓은 이마 한편에는 초승달 모양의 상처자국이 있었다.

사방으로 튀는 화약의 불꽃과 빗발치는 총알 사이를 헤치며 그들은 또 다른 건물 안으로 달아났다. 그 후로도 미로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은 벽돌길을 한참동안 헤맨 뒤에야 추격을 따돌리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인적이 없는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소년을 놓아주고 꼿꼿하게 서서 호흡을 조절했다. 그렇게 뛰고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신경인지 모르겠다.

사십대 초반쯤 되어보이는 그 남자가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천년의 고도를 뜀박질로 주파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소년은 숨을 헐떡이며 악다문 이빨 사이로 단어 하나하나를 힘겹게 뱉어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남자는 머리를 매만지며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전혀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연금술사다.”





“이 길이 틀림없는 거야?”

초조함과 의혹, 그리고 약간의 거만스러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소년이 물었다.

손에 들고 있는 장총은 없어진 총신에 길다란 각목을 붙이고 노끈으로 동여맨 뒤 접근전용 나이프를 연결하여 그런대로 총검의 모양새는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바바리아의 선술집에서 빌어먹다 온 거지같은 몰골은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적들이 성 안쪽의 주민들을 대피시키면서 물도 장작도 모두 못쓰게 해 놓아서 얼굴을 씻을 수도 없었다.

의문의 남자는 그의 건방진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이래뵈도 이 도시의 구조에 대해서는 연구 좀 했지. 3년 전에 샤Sha를 모시고 여기 술탄을 만나뵈러 왔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는 저 높은 창문에서 얼굴에 베일을 두른 아가씨들이 재스민 꽃잎을 뿌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지. 자네와 함께 그 러시아 친구들이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광장은 일요일마다-”

“관광하러 온거 아니니까 길안내나 해. 아니면 날 내버려두고 벽하고 실컷 얘기하던가. 내겐 할 일이 있어. 어서 빨리 성 안의 병력 상황을 알려야 한다구.”

“무뚝뚝하군. 독일인은 다 그런가?”

“그걸 알고 싶으면 우선 여기서 살아나가야 해. 나가고 난 뒤에는 내가 잘 말해서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게 해줄테니 나갈 때까지만 날 안내해 달라 이거야.”

“어이, 마치 우리가 거래를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제대로 말하자면 자네가 내 포로 아니었나?”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 둘 다 투르크에게 잡히면 그땐 차이가 없게 돼. 당신도 그걸 바라지는 않겠지?”

“영리하군.”

의문의 남자가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다.

“과찬의 말씀.”

소년 역시 냉랭하게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자기 조국도 아닌 나라의 군대를 위해 목숨거는건 좀 바보짓 아닌가? 하기야 나도 조국같은건 버린지 오래지만.”

“물론 조국은 조국대로 사랑하지만, 이 문제와는 관계없어. 난 그들과 계약을 맺었고 요구하는대로 할 의무가 있어. 이건 내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귀족으로서의 긍지가 달린 일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그렇게...”

“내게 묻는다면 긍지란 건 식사하고 이쑤시개로 쓰기에나 적합하다고 할 걸.”

“누가 물어 봤어?! 함부로 지껄이지 마!”

소년의 눈에 불꽃이 튀는 걸 보고 남자는 입을 닫았다.

잠시 후에 소년이 물었다.

“명예나 긍지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얼 위해 살지?”

그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자유.”





그들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성벽을 따라 한 시간쯤 걸어갔을 때 전방에서 엄청난 함성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재빨리 양쪽으로 갈라져 어두컴컴한 건물 문턱에 몸을 숨기고 지켜보고 있자니, 한떼의 투르크 병사들이 말을 타고 겁에 질린 세 명의 침입자를 쫓아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침입자들은 쥐색의 러시아 군복을 입고 지친 얼굴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세상에... 이고르! 알렉세이!! 바실리까지!”

소년이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경악하여 중얼거렸다.

추격하는 데 신물이 난 투르크인들이 숙련된 솜씨로 조준을 마친 뒤 방아쇠를 당겼다. 세 명 중 두 명이 끈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맥없이 쓰러져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손발을 꿈틀거리다가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남은 한 명은 운좋게 총알을 피하여 좀더 멀리 달아날 수 있었지만, 적병 한 명이 투포환처럼 집어던진 장검이 그의 등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검은 머리의 젊은 슬라브인 병사는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추격자들이 말을 멈추고 그를 둘러쌌다.

소년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알아챈 코트의 남자는 맞은편 벽에 숨은 채 그에게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보기좋게 무시당했다.

“안돼!!!”

소년은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그 엉터리 총검을 치켜들고 무작정 돌진했다.

멋드러지게 수염을 기른 투르크인이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개머리판이 그가 탄 말의 볼기짝을 강타했고, 말은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 때문에 옆쪽에 서 있던 다른 말도 덩달아 놀라 요동을 쳤고, 타고 있던 병사들은 말을 진정시키려다 실수로 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소년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개머리판으로 균형을 잃은 병사들을 땅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굴러떨어진 병사들은 성난 말발굽에 밟히지 않으려고 엉금엉금 기어서 피하기 시작했다.

다른 두 병사가 그것을 보고 소년 쪽으로 총을 겨누었으나 갑자기 그들이 탄 말이 벌에라도 쏘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주인을 태운 채 반대편으로 황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코트의 남자는 그 모습을 감정 없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상아빛 권총을 다시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소년이 땅에 엎어진 러시아군 병사를 안아 일으키고 뭔가를 묻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어. 네 말대로라면 나는 대체 뭐야? 누가 명령했지?”

병사는 다시 몇 마디를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다 축 늘어졌다. 소년은 그의 눈꺼풀을 감겨주고 땅바닥에 눕힌 뒤 상기된 얼굴로 일어섰다.

“칼리시니코프? ...키다리 세묘노프... 그 자식이!”

다시 투르크병들이 몰려오는 낌새를 눈치챈 코트의 남자는 소년의 팔을 잡아끌고 옆에 나 있는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뒤돌아보며 소리질렀다.

“무슨 얘길 들었길래 그렇게 안달이지!?”

“별로 즐거운 얘긴 아냐.”

남자가 앞서 달려가면서 깝죽거리는 투로 말했다.

“설마 막중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외국 촌놈이 실은 미끼고, 그가 발에 불나게 도망치며 적의 주의를 끄는 동안 진짜 척후가 숨어든다는 건 아니겠지?”

소년이 분을 참지 못하고 격하게 소리질렀다.

“다 알면서 왜 물어!”

“너무 뻔한 줄거리니까. 오직 눈치 못채는 건 그 불쌍한 촌놈뿐이지.”

“...................”

“그런데 오히려 진짜 척후가 먼저 쓰러지다니, 자네 고용주도 골치 아프겠군.”

소년은 계속 뛰어올라가면서도 이를 악물고 상대를 외면했다.





끝도 없이 계속 이어져 있는 듯한 그 계단을 다 올라가 보니 그곳에는 커다란 금속제 실린더 몇 개가 각도를 조절하는 기구에 비스듬하게 연결되어 성벽 바깥을 굽어보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대포가 설치된 포대[砲臺]였다. 마침 그 포신들은 정확하게 러시아군 진지 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대포를 지키던 투르크병 두어 명이 칼을 빼들고 공격해 왔지만 코트의 남자는 능숙한 권총 사격으로 그들의 팔다리에 총상을 입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년도 엉성하게 땜질한 총검을 휘둘러 병사 하나를 쓰러뜨리고 난간 쪽에 서 있던 지휘관과 대치했다. 완고하게 생긴 하얀 수염의 지휘관은 건방진 게르만 풋내기가 휘두르는 총검을 자기의 긴 칼로 솜씨좋게 받아넘기고 오히려 그를 난간 쪽으로 밀어붙였다. 혈기만 앞선 나머지 상대를 제대로 보지 않고 덤비던 소년은 그에게 압도당하여 서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여, 고귀한 혈통! 많이 곤란해 보이는군.”

소년은 지휘관 뒤에서 실실거리며 서 있는 그 남자에게 소리쳤다.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줘!”

그러나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약실[藥室]에 화약을 채워넣었다.

“내가 뭐 아쉬워서? 애초엔 성문까지 같이 갈까 했는데 도저히 안되겠어. 난 지름길로 갈 생각인데, 자네도 빨리 방법을 찾는 게 좋을걸.”

소년은 지휘관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넘기며 다시 난간 반대쪽으로 돌아와서, 남자를 향해 악을 썼다.

“이런 의리없는! ...난 꼭 가야 해!”

“계약 때문에 말인가? 임무를 완수하려고? 무공훈장 감이군.”

지휘관의 칼날이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걸 구사일생으로 피하여 땅바닥에 구르면서 소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젠 아냐!”

코트의 남자는 대포알을 포신에 집어넣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개자식들에게... 내가 자기네들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소년은 연거푸 두 번 몸을 뒤집으며 칼날을 피했다. 누더기가 된 군복은 비참해 보였지만 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다시 일어서서 총검을 휘둘렀지만 상대의 날카로운 칼날이 총신 대신 이어놓은 나무막대를 오이 썰듯 베어버렸다.

“아차!”

지휘관은 모국어로 뭔가 말하며 절도 있는 몸짓으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때 대포 쪽에서 쿠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코트의 남자가 흥겹게 소리쳤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가 굳이 도울 필요도 없겠군! 오 르부아[또 봅세]!”

다음 순간, 그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을 취했다.

우레와 같은 굉음을 내며 포신에서 대포알이 튀어나오는 그 순간, 그 남자는 마치 곡마단의 곰이 풍선 위에 뛰어오르듯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그 대포알 위에 가볍게 뛰어올라, 한 손을 쭉 뻗고 다른 손을 허리춤에 가져다대면서, 노련하게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대포알에 올라선 채 드높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말도 안 돼.................”

소년은 물론이고 하얀 수염의 투르크 지휘관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포탄은 찌그러진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더니, 서서히 실속[實速]하면서 낙하하기 시작했다.

너무 멀어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 남자가 뭔가 반짝이는 것을 주머니에서 꺼내들고 하늘로 치켜드는 게 보였다. 그 반짝이는 물체들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위성이 행성 주위를 공전하듯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마자 그를 태운 채 떨어져내리던 대포알이 뭔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다시 위로 떠오르더니 점점 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희한한 남자는 하나의 점이 되더니 급기야는 영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설마... 구름 위까지 올라간 것일까? 천사들의 나라로 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이때다!”

뜻밖의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두 사람 중에서 먼저 제정신을 찾은 소년이, 개머리판을 재빠르게 휘둘러 자기를 겨누고 있던 칼날을 떨쳐버리고 하얀 수염의 투르크인에게 비호같이 달려들었다.

상대는 대항하려 했지만 죽기살기로 달려드는 소년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발을 헛디뎌, 비명을 지르며 난간 너머로 떨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어진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그는 코트의 남자가 방금 보여준 놀라운 탈출 묘기를 떠올리고, 잠시동안 대포 쪽과 계단 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계단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대포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시가 급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그 남자가 했던 대로 약실에 화약을 채워넣고 발사준비를 한 다음, 쓸 만한 포환[砲丸]을 찾아내어 화약통 옆에 있던 튼튼한 밧줄로 단단히 동여매었다. 그리고 그 밧줄의 다른 쪽 끝을 자기 몸에 묶고 포환을 집어넣은 뒤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에익!”

포성[砲聲]과 함께 시커먼 탄환이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거의 같은 순간 밧줄로 탄환과 연결되어 있던 소년의 깡마른 몸뚱이도 허공으로 끌려올라갔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내던진 반토막짜리 라이플이 포대 바닥에 허망하게 뒹굴었다.

“필 슈피스[잘 지내]!”

뒤늦게 포대로 올라온 한떼의 투르크 병사들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 미친짓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앞쪽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가는 대포알에 매달려서, 시계추처럼 뒤로 약 45° 늘어진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엄청난 공기의 압력 때문에 눈도 뜰 수가 없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는 몸에 연결된 밧줄을 두 손으로 꼭 붙들고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성모님 성자님 성부님 제가 살아난다면 꼭 보덴베르더에 괜찮은 성당 하나 지어드리겠습니다. 제발 무사히 땅에 내려앉도록만 해 주십시오!

그와 연결된 대포알은 포물선을 완전히 그리기도 전에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소년의 체중 때문에 실속[實速]이 더 빨라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죽는구나!’

소년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지탱하고 있던 한 가닥 끈을 놓아버렸다.

멀리서, 뭔가 깨지는 소리와 누군가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온 세상이 갓 짜낸 우유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놀라운 일이군. 그래서? 상처는 어느 정도지?”

“팔다리 골절이 약간 있지만 내장은 다치지 않았고 정신도 말짱합니다. 성채 주변에 있던 버려진 농가 바로 위에 떨어져서 생각보다 충격을 덜 받았습니다.”

“지금은 어디 있나?”

“군의관에게 집중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좀 진정되면 그때 보겠네. 내 군인생활을 해온지 50년이 넘지만 세상에 대포알을 타고 적진 정찰에서 살아돌아온 병사는 처음일세. 대체 누가 믿겠나?”

“믿기는커녕 허풍선이라고 놀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그 때문에 자네가 그를 그 지경에 몰아넣지 않았던가?”

“실수하는 건 사람이고, 용서하는 건 신이죠.”

갈색 머리의 세묘노프 알료사 칼리시니코프 대령은 뻔뻔스런 얼굴로 말했다.

“심판을 내리는 것도 신이라는 걸 잊지 말게.”

머리숱 적은 장군은 그렇게 답하고는 깃털 펜을 들었다. 대체 이 사건을 보고서에 어떻게 써넣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스탄불 공략은 실패로 끝났고 병사 하나가 살아 돌아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비범한 행위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높아졌고, 수도에서도 이 사건을 주목하고 있었다. 좋든 싫든간에 뭔가 변화가 닥쳐올지도 모른다.

“...설마 그 풋내기가 부대장이 된다던가 하는 일은 없겠지?”

“옛,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닐세....”

한편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부상병 천막에서는 온몸에 지저분한 거즈와 붕대를 처바른 금발의 깡마른 게르만 소년병이 자기보다 나이든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과장된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인도제도에서 원주민들이 쓰던 금단의 기술을 응용한 거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억지다!”

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테지만, 이제 소년은 좀더 요령을 익힌 터였다.

“그래서, 이 폰 뮌히하우젠의 말을 의심하는 건가, 자네는?”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소년의 당돌하고도 냉정한 눈빛에 주눅이 든 그 병사가 꼬리를 감췄다.

“어떻든 대포알을 타고 돌아온 건 사실이잖아? 그는 우리의 영웅이다! 우리 모두 카를을 위해 만세 삼창!”

“만세!”

동료들의 선망과 애정과 질투가 뒤섞인 환호성을 즐기던 중, 소년은 문득 그 희한한 남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명예나 긍지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얼 위해 살지?”

“자유.”

소년은 그제서야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라...........’

목발을 짚은 채 천막 밖으로 걸어 나온 소년은 고개를 들고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밤바람이 부드럽게 그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갔다.

소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 만 하겠는걸.’

그의 진정한 모험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THE END!

(C) ZAMBONY 200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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