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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24] 성냥팔이 소녀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56
 





<< 성냥팔이 소녀 >>

The MatchMaid







거리에는 눈발이 세차게 날리고 있었다. 성탄절을 이틀 앞둔 시점에서 기온은 점점 더 내려가기만 했다.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 도시의 침묵을 깨고 작은 사람 그림자 하나가 거리를 숨가쁘게 질주하고 있었다. 보온효과가 의심스러운 낡은 코트를 걸치고 손에는 철사로 얼기설기 엮은 바구니를 든 그 그림자는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후드로 머리를 감싸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에서는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새하얀 입김이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발에 신고 있던 신발은 엉망으로 찢어져서 맨발이나 다름없었다. 몸 구석구석에 멍든 자국이 있었지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못 느낄 정도로 마음이 급해 보였다.

한참동안 그렇게 달리던 그림자가 이윽고 속도를 줄이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멈춰선 장소 바로 위에는 ‘몽펠라토 과자점’이라고 쓰여진 간판이 보였다.

“...................”

그림자는 조심스럽게 쇼윈도 앞으로 다가가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온갖 좋은 것들이 꽉 들어차 있을 그 진열장을. 후드 아래에 감춰진 작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짝였고 입에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탄식에는 자신은 결코 누릴 수 없는 평범한 행복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림자는 목에 건 펜단트를 꺼내어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잠시동안 눈을 감고 빨갛게 상기된 뺨을 차가운 유리창에 갖다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대로 어디론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도망치는 주제에 웬 궁상이람.”

“그러게 말야.”

그림자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진열장에서 물러섰다. 흑요석[黑曜石]처럼 새까맣게 빛나는 스틸폴리머제[製] 방호복을 입은 두 명이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 떠올라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3~14세쯤 되어보이는 소년과 같은 또래의 소녀였다. 깜빡거리는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그들의 금발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만 포기해. 네가 어딜 가도 우린 널 찾아낼 수 있어.”

“비둘기가 숲에 떨어진 빵조각을 찾아내듯이 말이지.”

그림자는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금발의 소녀 쪽이 더 빨랐다.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몸이 일순간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림자의 정면에 다시 나타나 그 움직임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금발의 소녀는 재빠르게 두 팔을 내밀어 오른손으로는 그림자의 멱살을 붙잡고 왼손으로는 그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겨냈다. 깊은 슬픔이 깃든 눈동자와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그리고 오소리의 꼬리처럼 부분적으로 희게 물든 검은 머리칼이 드러났다. 그림자의 정체는 그들과 같은 또래의 동양계 소녀였다.

“이렇게 쉽게 잡히다니 아무래도 우리 능력을 전혀 몰랐나본데.”

“그러게.”

먼발치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금발의 소년도 다가와서 포로의 양쪽 겨드랑이에 자기 팔을 끼우고 팔목을 위로 굽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했다. 그가 움직이는 방식 또한 소녀와 마찬가지로 특이한 것이어서, 마치 깃털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꼼짝없이 붙잡힌 검은머리 소녀는 그저 지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철사 바구니가 희미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금발 소녀가 풀숲에 떨어진 장난감 공을 찾아낸 강아지처럼 눈을 빛냈다.

“오빠, 이거 식은 죽먹기잖아? 이런 바보 하나를 갖고 왜들 그리 난리였을까?”

“그레타, 아직은 마음을 놓아선 안돼. 그 왕방울눈을 한 개들이 얘한테 모두 당한 걸 생각해봐. 무슨 속임수를 쓰기 전에 빨리 데리고 가자.”

“이 골칫덩이를 잡았으니 ‘할머니’도 좋아하시겠지?”

“그럼. 분명히 좋아하실거야. 지난번보다 더 큰 상을 주실지도 몰라.”

“그냥 쏴버리면 간단할걸 왜 이렇게 귀찮게 잡아오라고 하는건지 모르겠네.”

“어쩔 수 없잖아. ‘할머니’는 얘를 가장 마음에 들어하셔. 죽으면 곤란하대.”

“그나저나 저 바구니는 어떡하지?”

“내버려둬. 그런 싸구려 성냥에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

두 남매는 각자 포로의 한쪽 팔을 단단히 붙들고 공간전이Transfer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의 몸이 와이어 프레임처럼 투명해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온몸의 힘을 빼고 가만히 있던 검은머리 소녀가 갑자기 그들을 뿌리치고 눈덮인 땅바닥을 향해 도루왕이 2사만루에서 홈으로 슬라이딩하듯 재빨리 미끄러졌다.

“무슨 짓이야? 너...거기 가만...”

“오빠, 저거!”

여동생이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라 오빠의 주의를 돌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몇 발치 뒤에 놓여있던 철사 바구니에서 무언가가 화살처럼 튀어나와 두 남매의 등을 직격했다. 그 ‘성냥 다발’이 그들의 등에 와닿는 순간 한바탕 요란한 불꽃놀이가 벌어졌고 남매는 폭발의 충격파로 인해 각자 반대방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들 주변에 소복히 쌓여 있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서 액체로 변했고, 일부는 그대로 기화[氣化]했다. 땅에 엎드린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참동안 가만히 있던 검은머리 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뒤를 돌아보았다.

“.........................”

폭발의 충격 자체는 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땅으로 내동댕이쳐질 때 받은 타격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남매 중 오빠는 진열장 유리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여동생 쪽은 약간 떨어진 주차장 위에 처박혀 있었는데, 넘어질 때 주차 미터기에 정통으로 갖다박은 탓에 아무래도 다리 하나쯤은 부러진 듯 했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두 남매 사이를 지나 바구니가 떨어져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바구니를 집어들고 거기에 묻어 있는 눈을 털어냈다. 무덤처럼 고요하기만 하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그대로 일어서서-

“그렇게는... 안 돼...!”

검은머리 소녀가 뒤를 돌아보려 한 바로 그 순간, 가늘지만 억센 두 팔이 뒤로부터 다가와 그녀의 목을 붙잡았다. 호흡이 곤란해지고 맥박이 빨라졌다. 두 손을 목으로 올려 상대방의 팔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상대는 더욱 세게 조여올 뿐이었다. 처음에는 유령처럼 투명하던 상대의 두 팔이 점점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어깨 너머로 나풀거리는 햇살 같은 금발과 함께 여동생의 증오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어. 요 깜찍한 것. 보기좋게 우릴 속였겠다. 하지만 같은 수에 두 번 속지는 않아! 한스 오빠를 저 지경으로 만든 대가를 치르게 해줄 테야!”

검은머리 소녀의 얼굴이 자줏빛으로 물들어갔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을 부여잡고, 그녀는 뭔가 방법을 생각해내려 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고, 상대방의 팔 위에 겹쳐져 버둥거리던 그녀의 두 팔이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여동생의 얼굴에 의기양양하고도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검은머리 소녀가 팔을 늘어뜨리면서 미묘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어떤 도형을 그리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흥, 정말 사람 귀찮게 만드는 아이라니까. 아예 여기서 끝장을 내 버려야 뒤탈이 없겠어. ‘할머니’가 뭐라고 하든 너는 너무 위험해. 그러니까...엇?”

여동생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어느새 그들 앞에 떠오른 성냥 하나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불이 당겨져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지?”

팔의 힘을 빼지 않은 채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 성냥불을 바라보던 금발 소녀의 눈동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점차 동공[瞳孔]이 확장되더니, 뭔가를 찾아헤매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표정은 멍해지고 팔다리에는 힘이 빠져, 그 손 안에 붙잡혀 있던 검은머리 소녀는 지지대를 잃고 나무토막처럼 앞쪽으로 쓰러졌다. 마치 등잔불처럼 허공에 떠 있던 성냥불은 연소[燃燒]를 계속하면서 쇼윈도 근처로 이동하여 금발 소녀를 오빠가 쓰러져 있는 곳까지 이끌었다. 금발 소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오빠 옆에 주저앉아 바닥에 쌓여 있는 눈을 주워먹으며 네살바기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떠들어댔다.

“오빠, 일어나 봐. 정말 신기해. 온통 과자로 만든 집이야. 기둥은 박하사탕에 지붕은 블루베리 파이라구~ 빨리 일어나 보라니까. 안 일어나면 나 혼자 다 먹을거야 뭐.”

금발 소녀는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으로 환호성을 질러대며 열심히 눈을 주워다가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눈뭉치 중 일부를 아직도 뇌진탕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있는 오빠의 입에 넣어주며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거 봐, 사실은 오빠도 먹고 싶었으면서..... 캬하하.”

잠시동안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검은머리 소녀는 서서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바구니를 주워든 다음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기 전에 기쁜 듯이 웃는 금발 소녀 쪽을 흘낏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슬픈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게도 너희가 모르는 게 있었을 거란 생각은 왜 안 해 봤니?”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가 피워올린 몽환[夢幻]의 성냥불은 질량불변의 법칙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금발의 소녀는 계속 눈을 맛있게 주워먹고 있었다.





시 중심에 위치한 고층빌딩의 숲 속에서 검은머리 소녀는 잠시 쉬기 위해 멈춰섰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으나 달이 떠 있는 위치로 보아 점점 새벽이 가까워오는 건 분명했다. 주변의 건물들은 전부 기업의 사무실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사람이 전부 빠져나가고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가 지나친 어느 건물 위로 ‘돌아온 우리의 친구 지니 캔디Genie Candy!’라고 새겨진 촌스러운 전광판이 무지개색으로 어지럽게 번득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온통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어느 건물의 1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건물 내부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빛바랜 코트는 아까보다도 더 심하게 해지고, 발에 붙어있던 신발 가죽은 도망치는 와중에 떨어져나가고, 두 손과 얼굴은 꽁꽁 얼어서 피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느껴진다. 그녀의 입에서 또 다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아까와는 달리, 그녀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그녀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탄식이었다.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그녀는 유리창에서 고개를 돌리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투우[鬪牛]를 탄 붉은머리 소년이 그 쪽에 있었다.

열다섯살 정도로 보이는 그 주근깨쟁이 소년은 은은한 에메랄드 그린으로 채색된 헥사폴리머제[製] 방호복을 입고 반투명의 재질로 만들어진 전자 도끼Axe-Flare를 등에 메고 있었다. 소년이 타고 있는 소는 전신이 메탈릭 블루로 빛나고, 날카롭게 휘어진 뿔과 빨갛게 빛나는 광전자 눈을 지닌 대전차용의 리니어로이드linearoid였다.

소년이 남부 아메리고 특유의 쾌활하지만 어딘가 비꼬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왕자님이라도 찾아온대냐?”

“........................”

소녀는 눈을 약간 찡그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까는 불쌍한 엥겔 남매를 용케도 해치웠더구만. 하지만 일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잘 풀리는 건 아냐.”

“............................”

한껏 멋을 부린 자기 말에 전혀 반응이 없자 소년은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봐, 나도 이러기 싫지만 ‘할머니’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어. 싸우기 싫으면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안 그러면 내가 송장 치우게 생겼으니까.”

“..........송장이야.”

“뭐?”

“...우린 이미 송장이야. 살았든 죽었든 간에.”

“-건방지게!”

소년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소의 잔등을 두들겨 앞으로 돌격하게 만들었다. 소는 마치 진짜로 흥분한 짐승처럼 발굽을 바닥에 몇번 두들긴 다음, 소녀 쪽으로 급하게 내달려 뾰족한 뿔을 정통으로 갖다박았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소의 두 뿔은 소녀가 등지고 서 있던 강화유리에 박혀 있었다.

소년은 당황하여 소에게 물러서라고 명령하려다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고 그들이 있는 쪽을 향하여 뭔가가 날아오는 것을 감지했다. 무려 다섯 방향에서 크루즈 미사일처럼 날아오는 성냥다발의 기척을!

“젠장!”

유리에 박힌 뿔을 빼내려고 몸을 틀던 투우를 둘러싸고 화려한 폭발이 일어났다. 소년은 그 바로 직전에 잽싸게 뛰어내려 도끼를 등에 멘 채 아랫바닥을 굴러서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 유리파편과 금속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페드로?!”

자욱한 연기와 화약 냄새가 가신 뒤 소의 실루엣이 다시 나타났다. 사지는 멀쩡했지만 광전자 눈 두개가 모두 파괴되고 통제회로가 고장났는지 주인도 몰라보고 날뛰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기계의 구조를 파악한 소녀가 일부러 취약한 장갑[裝甲]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모양이었다.

미쳐버린 기계 소가 자기의 음성명령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쪽을 향해 무작정 달려오자 어안이 벙벙해진 소년은 허리에 붙어있던 작은 리모콘을 꺼내 비상정지Emergency Power Off스위치를 눌렀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소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멈춰섰다. 소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녀석은?!”

짜증을 내며 사방을 돌아보던 소년의 눈에 낯익은 형체가 비쳤다.

“거기 있었군! 감히 나를....!”

농락당한 것에 화가 난 소년은 도끼를 뽑아들고 그 그림자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검은머리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가슴 앞에 모으고 있던 두 손을 앞으로 펼쳤다. 성냥개비 하나가 떠올라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 너의 능력은 이미 다 파악했어!”

소년은 최면에 걸려들지 않도록 눈을 감더니 손목에 감고 있던 얇은 플라스틱 링을 풀어서 눈 주위에 바이저처럼 두르고, 가슴의 탐지장치에서 뻗어나온 선을 연결했다. 그의 눈을 감싼 링이 붉게 빛나고,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적외선을 통해서 환각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 안 그래?”

검은머리 소녀는 얼굴에 약간 당황한 빛을 띠었으나, 곧 뭔가 좋은 생각을 해낸 듯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소년의 성난 도끼질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바구니에서 계속 성냥을 꺼내어 아까와 마찬가지로 허공에 띄워올렸다.

그들은 그 건물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쫓고 쫓기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마치 목숨을 건 쥐와 고양이 게임을 하는 것만 같았다. 검은머리 소녀는 어딘가 적당한 곳을 찾아서 숨어 있다가 들킬 만하면 도망쳤고, 분노에 찬 소년이 능숙한 솜씨로 도끼를 내리칠 때마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덕분에 애꿎은 건물 주변의 전시물과 벤치와 공용 단말기와 표지판들만 화를 입었다.

“...................???”

그렇게 계속 소녀를 쫓아가던 소년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거지? 한 사람이 아니라니!”

그는 환각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적외선 스코프를 통하여 목표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미 건물 안팎의 상황은 완벽하게 조사해둔 터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므로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려면 멀었고, 요행히 이 건물에는 숙직이나 경비원도 없었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누군가가 끼여들지 않는 한 소녀의 체열[體熱]만을 탐지하여 쫓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예상을 뒤엎는 일이 벌어졌다.

‘말도 안돼... 그녀석일리가 없어...!’

그의 적외선 스코프에 동시에 잡힌 서모그래프thermograph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모두가 그가 기억하는 검은머리 소녀의 체형과 행동패턴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분신술을 쓴다 해도 적외선 스코프를 속일 수는 없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젠장, 침착해. 분명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거야... 이게 고장났거나 아니면 내가 피곤하거나 둘 중의 하나야. 너무 급하게 쫓아다니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침착하게 원인을 알아내서, 고치기만 하면, 그 꼬마 따윈... 헉!?’

누군가의 손길이 어깨에 닿았다. 소년은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저 가로수 뒤편으로 돌아가는 조그만 붉은 형체가 보인다. 이번엔 진짜 그녀석이다. 허상이 어깨에 손을 짚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 몇 그루가 전자 도끼의 시퍼런 빛과 함께 쓰러졌다. 그러나 그곳에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그가 다시 뒤를 돌아보자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형체가 보였다. 이번엔 진짜겠지. 다시 몸을 돌려 쫓아가는 그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아까와 똑같은 체형의 서모그래프가 그의 바로 옆을 통과했다. 이럴리가 없다. 그럼 저기 반대편 자판기 쪽으로 가고 있는 그림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난 여기 있어.”

“-너?!”

미칠 노릇이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또 다른 그림자가 보인다. 이 황당한 사태에 점점 참기 힘들어진 소년은 결국 바이저를 벗어제치고 자기의 육안으로 소녀를 찾기로 결심했다. 이건 다 기계가 고장난 거야. 훈련에서 그토록 우수한 성적을 거둔 내가 잘못될 리가 없어. 이 망할놈의 기계가 나쁜 거라고. 그러니까...

‘.............................이...........’

바이저를 벗은 소년은 사방을 둘러보고는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를 둘러싸고 무수한 성냥개비들이 불을 피워올린 채 사방에 둥둥 떠 있었다.

그 성냥불은 보통 불이 아니었다. 성냥 그 자체나 주변의 공기에서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원소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들여 보통 성냥보다 훨씬 밝고 강하고 오래 타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믿기 힘들 정도의 열을 발생시켜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의 온도를 낼 수 있었다 - 이를테면 인간의 체온과 같은.

또한 그 불꽃은 그 열의 밀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주변의 공기를 모아서 일정한 모양의 필드[場]를 형성할 수도 있었다 - 이를테면 어느 특정인의 체형과 같은!

소년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그곳에 서 있었다. 잘못된 것은 그 자신도 바이저도 아니었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의 얕은 꾀에 빠진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미 때는 늦었다.

“아차! 다시 스코프를 착용해야....”

“뒤를 봐.”

“뭐야?”

그제서야 그는 뭔가가 둔탁한 발소리를 내며 자기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아까 정지시켜 두었을 터인 리니어로이드가 다시 작동하여 자기 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멈추라고 소리질러 봐야 소용없었다. 그는 리모콘을 찾아서 허리춤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걸 찾아?”

“어느 틈에............!”

소녀는 얼굴에 싸늘한 웃음을 띠고 리모콘을 들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리모콘은 저절로 불꽃을 일으키더니, 화덕 위에 오래 놓아둔 쿠키처럼 파삭거리며 타들어갔다.

소녀가 유감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이젠 못 쓰겠네.”

“-두고 보자!”

소년은 이를 악물고 투우가 달려오는 반대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아는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갈짓자로 달려서 소를 혼란시키려 했지만 녀석의 우수한 추적회로만큼은 고장나지 않았기에 별로 소용이 없었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린 소년은 전자 도끼의 스위치를 최대 출력으로 올리고 있는 힘을 다해 그 쇳덩어리를 상대로 달려들었다.

“페드로오오오오!”

쉭쉭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빛이 번득였고 기계 소는 네쪽으로 갈라졌다.

소년은 도끼를 치켜든 채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제기랄....이게 무슨 꼴이야...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다시...”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소녀를 쫓으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눈앞에 성냥불 하나가 날아들어와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맹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풀렸다.

검은머리 소녀는 다시 바구니를 챙겨들고 눈 덮인 시가지를 건너 어디론가를 향해 떠났다. 그녀의 뒤편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빌딩 벽에, 거미처럼 매달려 있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그것은 바로 도끼를 짊어진 녹색 옷의 소년이었다.

“...굉장해...콩덩굴로 만든 성탄 트리야...이 위에는 분명히 거인이 살고 있겠지...그녀석을 죽이고 황금알을 낳는 오리와... 노래하는 하프를 훔치면...난 부자가 될거야...난 부자야..부자.....부자....”

그의 눈은 이미 열 살짜리 어린애 특유의 철없는 정열로 가득했다.

검은머리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가면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안녕, 잭.”

열심히 빌딩을 기어오르던 소년의 그림자가 발을 헛디뎌 40층 아래로 떨어졌을 때, 이미 검은머리 소녀의 모습은 그 곳에 없었다.





시 교외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어느 연구시설. 이미 시간은 아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고 서쪽 하늘에 걸린 달은 희미한 빛을 내며 이별의 시간을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아침이 오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일이라면 더욱.

“..........................”

눈부신 섬광과 함께 시설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붉은 상의를 입고 검은 곰털모자를 쓰고 총검식 라이플을 치켜든 사람 크기의 주석[朱錫] 병정들이 잔뜩 몰려나와, 사방팔방을 메우고 침입자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엉망으로 무너진 철골이 동화[童話]에서 튀어나온 듯한 외형을 갖춘 경비용 리니어로이드와 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경비병들이 사고에 정신이 팔려 모두 그쪽으로 몰려간 것을 확인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반대편 건물 쪽으로 몰래 숨어든다. 지문인식장치가 그녀의 손을 금방 알아보고 따뜻한 인사말을 건네온다. 안녕하세요 카논[火無]양, 오랜만이네요, 하지만 주인님이 당신을 들여보내면 안된다고 하는데 어쩌죠?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미리 준비해 둔 성냥개비 두어 개로 말없이 회로를 쇼트시킬 뿐이다.

검은머리 소녀는 어두운 복도를 거리낌없는 태도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리면서 키큰 형체 하나가 중무장형 주석병정 1소대를 이끌고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그 자리에 나타났다. 소녀는 개의치 않고 계속 걸어갔다. 휘번득거리는 광전자 눈과 무엇이라도 분쇄할 수 있는 전동식 치아를 가진 그 형체는, 연미복 옷깃을 쉴 새 없이 만지작거리며 짐짓 신사인체 하는 태도로 선포했다.

《실험체 MM-0427, 통칭 카논․훠오차이[火柴]. 당신의 현재 행동은 규정위반입니다. 당신은 여기 있어서는 안됩니다. 녹터스 플란토에 있는 당신의 쿼터로 돌아가서 대기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나머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성냥불로 병사들의 목을 그어버렸다.

맨 앞에 서서 요란을 떨던 키큰 인형도 그들과 함께 목이 날아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옷깃을 만지작거리던 기계팔은 부러지고, 몸통 여기저기서 꼴사납게 삐져나온 광섬유 다발이 연보라색으로 반짝였다. 반대편에 떨어진 그의 목은 아직도 커다란 맷돌같은 치아를 딱딱거리며 메시지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목을 잃어버린 그의 몸통은 목을 찾는 듯 남은 팔을 휘두르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검은머리 소녀는 그 광경을 보고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곧 잡념을 떨쳐버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끝이 없는 듯하던 복도가 결국 끝나고, 그녀는 에델바이스의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표면을 가만히 두들겼다.

“들어와요.”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고 소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 문은 다시 저절로 닫혔다. 그와 함께 전동 자물쇠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머리 소녀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은 널따란 사무실이었는데, 중앙에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우아하게 만들어진 목제 책상이 있고, 그 주변에는 유리문이 달린 3단식 책장과 최신식 데이터뱅크와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스탠드바가 갖춰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특별히 디자인된 꽃술 모양의 양전자 컴퓨터와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 몇 장이 펼쳐져 있었다.

책상 앞에는 50대 중반의 연분홍색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액자에 담긴 어떤 사진을 들고 옛일을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곧 그녀는 액자를 엎어놓고 일어서서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놓고 소녀 쪽으로 걸어왔다. 한때는 꽤 아름다웠을 얼굴에는 깊은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호리호리한 몸매는 자신과 안정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검은머리 소녀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수심 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너였구나. 정말로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할머니’.”

소녀는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 집사는 만나 봤느냐? 네가 온다길래 마중하러 보냈는데.”

‘할머니’의 천연덕스런 거짓말에 오기가 생긴 소녀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 호두까기 인형이라면, 아마 지금쯤은 잠꾸러기 계곡Sleepy Hollow에나 가 있을 걸요.”

“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다음 회의 때 건의해 보아야겠어.”

그 여인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옆에 놓여있는 서류에 목 없는 인형의 스케치와 몇 가지 메모를 남겼다. 소녀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더 비위가 뒤틀렸다.

검은머리 소녀는 앞으로 다가서며 발작적으로 소리질렀다.

“‘할머니’에게 우린 대체 뭐죠?”

“너희들은 내 사랑스런 아이들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니?”

여인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소녀의 눈을 마주보며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왜 우리가 사람을 죽여야 하나요? 우린 그저 ‘할머니’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것 뿐인데... 그래서 이곳에 온 건데... 어째서 우리에게 그런 일을 시키시는 거죠?”

“그래서 그게 싫다는 게냐?”

“그래요. ‘할머니’가 시키시는 일이면 뭐든 따르겠지만... 이건 싫어요. 제발 우리를 이런 일에서 풀어주세요. 우리가 남들의 행복을 깨뜨리지 않고, 우리끼리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들끼리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들끼리’라는 말은 어폐가 있구나. ‘너와 나머지 아이들’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이 계획에 들어온 이래 불만을 가진 아이는 너 하나뿐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만족하고 내 말대로 따르고 있어. 그런데 어째서 내가 너의 말대로 해야 하지?”

‘할머니’의 단호한 태도에 움츠러든 검은머리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이제까지 몇 번이고 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이렇게 나오면 그들은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약간 달랐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형이 아니니까요.”

‘할머니’는 이 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는지 다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제정신을 회복하고 가소롭다는 듯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호, 그래! 제법 많이 컸구나. 그런 생각을 할 정도라니. 마음은 알겠다만 너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단다. 왜 그런지 알겠니?”

“아뇨.”

실망한 소녀는 바구니에서 성냥을 꺼내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할머니’가 웃음섞인 목소리로 쾌활하게 말했다.

“그럼 잘 생각해봐. -섬벨리나Thumbellina!”

말을 마치자마자 여인은 재빠른 동작으로 뒤로 물러나더니 책상 뒤로 숨었다.

소녀는 성냥에 불을 당기려 했으나, 바로 그 순간에 사무실 바닥과 천장으로부터 무수한 인형들이 쏟아져내려와 그녀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에 앞치마를 두른 갈색머리 여자아이를 본뜬 초소형 리니어로이드였다.

그 인형들은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며 검은머리 소녀의 전신을 뒤덮고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 5초만에 소녀는 바구니를 빼앗기고 인형들이 만든 인간띠에 묶여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애처럼 손뼉을 치며 땅에 눕혀진 검은머리 소녀에게 다가와서 떠들어댔다.

“로즈에게 감사해야겠군. 지금은 국내에 없지만, 정말 재미있는 인형을 많이 만들어 주었지. 하긴, 내가 만드는 인형도 거기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지만-”

검은머리 소녀가 팔다리와 머리카락이 땅바닥에 고정된 채 버둥거리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인형이 아녜요, 난-”

‘할머니’는 과연 그럴까?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땅에 놓여있던 바구니에서 성냥 하나를 꺼내들어 바닥에 대고 가볍게 그었다. 성냥에 불이 붙었다.

“너에게 주어진 능력 중에서 가장 성냥팔이 소녀다운 것이 바로 이거였지.”

그녀는 말을 계속하며 그 성냥불을 소녀의 얼굴에 들이대고 일정한 패턴으로 흔들었다. 검은머리 소녀의 눈동자가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성냥불의 불빛을 이용해서 상대를 최면에 빠뜨리고, 환각을 보게 만들기까지 하는 능력. 하지만 이 최면술 자체는 내가 가르쳐준 거란 사실을 잊지 말아라. 다른 점이라면 너는 전혀 손을 쓰지 않고도 그걸 할 수 있다는 거지만... 지금은 안 되지. 섬벨리나에게는 너의 정신동력을 차단하는 장치가 되어 있거든. --자아, 다 됐다!”

소녀의 눈동자는 이제 완전히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게 되었다.

‘할머니’는 킬킬거리며 일어서서 성냥불을 조심스레 끄고는 호출기를 조작하여 주석병정을 불렀다. 마치 해초가 바위에 달라붙은 것처럼 소녀에게 달라붙어있던 섬벨리나 중 일부가 배열을 바꾸어 그녀를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고, 사무실에 들어온 병정들은 곧바로 소녀를 일으켜세워 전자수갑을 채웠다. ‘할머니’는 말없이 반대쪽 문을 가리켰고, 병정들은 소녀를 끌고 방을 나갔다.

그 나이든 여인이 코웃음쳤다.

“인형이 아니라고?”





어느 틈에 수리를 마친 무쇠이빨의 집사가 발에 달린 바퀴를 굴리며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왔다. ‘할머니’가 미소지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이제 한시름 놓았어. 상처는 어때?”

《자동복구장치가 작동되어 금방 고쳤습니다. 제가 할 일을 다한 겁니까?》

“물론이지. 자네의 성능이라면 저애와 한판 붙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건물이 엉망이 되고 저애의 경계심도 높아졌을 거야. 자네가 파괴되는 척함으로써 저 아이의 긴장을 풀고 방심하게 만들 수 있었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대로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저 애에게 건 암시는 웬만해서는 풀리지 않을 게야. 결국 자기가 다른 아이들에게 했던 그대로 당하는 셈이지. 자기를 동화의 주인공으로 믿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혹은 서서히 신진대사가 떨어져서 죽겠지. 뭐 어느쪽이든 상관없어. 세상에 성냥팔이 소녀는 많으니까........”

그렇게 말을 잇던 ‘할머니’의 표정에 갑자기 당황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잽싸게 주인의 심전도 변화를 체크한 집사가 물어본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랙커, 저 아이가 동료들과 싸운 기록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감시위성에서 찍은 확대영상 말입니까? 그건 이미 보셨...》

“처음부터 끝까지 말고, 마지막에, 아이들이 최면에 걸린 뒤를!”

집사의 가슴팍이 열리고, 초망원 렌즈에 잡힌 디지털 영상이 별도의 스크린 없이 공간에 바로 투영된다. 빨리감기와 되감기를 반복하던 끝에 원하는 시점의 영상을 찾아낸다. 책상 앞에 편하게 앉아서 잼보니까지 한잔 따라놓고 그것을 운동경기 보듯 하나하나 관찰하던 ‘할머니’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그레타 엥겔은 과자로 착각한 채 눈을 집어먹었고, 기절한 오빠 한스에게도 나눠준다. 이건 ‘헨젤과 그레텔’이다. 잭 스타인버그는 콩덩굴이라 믿고 고층빌딩을 기어올라가다 떨어져 죽었다. 이건 ‘잭과 콩나무’다. 그래, 여기까지 보면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어. 저애들에게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게끔 만들기 위해 동화와 관련된 암시가 걸려있었을 터.

하지만 아까부터 뭔가가 계속해서 ‘할머니’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손을 휘저어 쫓아내도 자꾸만 달려드는 여름날 모기처럼 계속해서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체 뭐가?!

“...............맙소사!”

그제서야 겨우 불안의 정체를 알아낸 그 중년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뿔사! 이런 간단한 걸 몰랐다니!

《주인님, 무슨 문제라도?》

“MM-0427의 호송은 예정대로 진행중인가?”

《그렇습니다만.》

“그 애를 한시라도 더 빨리 여기에서 먼 곳으로 보내야 해! 으음...그러니까 자포네스나 코레니아 정도로 먼 곳에 말야! 호송차에 직통으로 연결해서 지시를 변경하도록!”

《변경했습니다. 그러나 주인님의 암시가 완벽하다면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야. 그 아이가 동료들에게 건 최면에는 이중의 의미가 숨어있었어. 이대로 가만 두었다간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할머니’는 사람보다 기계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런 때만은 사람의 재치가 그리웠다. 기계는 뭔가를 설명해줘도 ‘그 말이 옳습니다’ ‘그것은 틀립니다’ 이 두 가지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다. 뭔가 한참 궁리하여 기발한 답을 찾아냈다 해도 깜짝 놀라거나 같이 기뻐해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모든 것을 인형으로 취급한 업보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열이 팍팍 오른 상황임에도 그 나이든 여인은 침착하게 자기가 내린 결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에 서 있는 기계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자기가 내린 해답을 재확인하는 의미에서.

“랙커, 성냥팔이 소녀의 줄거리는 알지? 성냥을 그을 때마다 환상을 보는...”

《주인님께서 제 메모리에 저장해 주셨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들이 문제였어. 저 아이가 동료들에게 건 최면은 겉으로는 그 동료들이 맡은 캐릭터와 상응하는 환각을 보게끔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을 따라가는 것이기도 해!”

《확실히 동화 속에서 소녀는 세 번 꿈을 꿉니다.》

“그래! 첫번째 환상은 맛있는 성탄 음식이었고, 두번째 환상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였지. 그렇다면, 세번째는...”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거대한 철문이 양옆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틈새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몽롱한 눈을 하고, 전신이 타오르는 불꽃에 휩싸인 채, 두 팔을 앞으로 벌리고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의 모습이.

“할머니..........안아줘요.................”

나이든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뭐가 말인가, 브로넬?”

중년의 동양인이 반문하자, 흰 가운 차림의 여성 검시관이 일부만 까맣게 탄 사무실 바닥을 가리키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 불탄 자국을 잘 보세요, 경감님.”

“시체가 있던 곳에서부터 일직선으로 길게 끌리는군.”

“게다가 불탄 시체가 있던 주변에는 탄 흔적이 거의 없어요. 그렇다면 분명 주변에 불이 나서 타죽은 건 아닐테고, 죽은 사람 혼자만 불이 붙었다는 얘긴데, 자살이든 타살이든 간에 불이 붙은 사람은 괴로워서 바닥에 딩굴거나 물을 찾아 다른 곳으로 달려가거나 했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흔적이 전혀 없네요.”

“미리 독살하거나 잠재운 후에 불을 붙였을 가능성은?”

뒤에서 듣고 있던 흑발의 백인 청년이 딴지를 건다.

“빌리, 우리가 바보인줄 알아? 시체를 자세히 검사해 봤지만, 약물은 검출되지 않았어. 게다가 시체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상태도, 자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어. 뭔가에 놀란 것처럼 똑바로 서 있는 채로 타 버렸더라니까.”

“최면술로 붙박아놓은 뒤에 불을 붙였거나...”

“아무리 강한 최면이라도, 타죽을 만한 고통이라면 깨진다구.”

뤼 치앙 첸 경감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두 사람을 뜯어말린다.

“알았으니까 그만들 싸워. 브로넬, 방해해서 미안하네, 계속해주게.”

검시관은 가볍게 목례하고 작업으로 돌아갔다.

“하여튼 괴기스런 일이군. 그런데 사망자의 신원이 누구라고 했지?”

“DNA검사 결과 이 연구소의 소장인 크리스티나 안데르손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경망스럽지만 일은 확실히 하는 빌리 케인이 서류를 건네준다.

“로스테르담 출신, 바인랜드 종합대학 졸업... 전공은 심층심리학과 범죄학에 아동문학이라, 뭔가 언밸런스한 취향이군. 딕센 엔터프라이즈 뉴턴 지부의 간부로서 뛰어난 실적을 거두어 이곳 연구소 책임자가 되었고... 일하는 틈틈이 부모 없는 고아들을 거두어 돌봐주는 복지시설을 후원... 경력만 봐서는 모범시민 아닌가?”

“모범시민이 뒤가 구린 경우도 많죠.”

“원한 관계는?”

“기록상으로는 없습니다. 회사 내에서도 특별히 사이가 나쁜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사람보다 기계를 더 가까이해서 문제긴 했다던가.”

“그 기계들은 뭐라고 증언하나?”

“그게 말입니다만...감시 카메라나 경비용 리니어들이 뚜렷한 증거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기록을 못했거나 누군가가 파기한 흔적이 있어요. 그들을 제외한 인간 직원들은 대부분 아침 열시에나 출근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안데르손 여사가 집사로 사용한 리니어는?”

“이상스럽게도 행방불명입니다. 본사에서 몰래 실어갔다는 얘기도 있고.”

뤼 경감이 머리를 긁으며 인상을 썼다.

“이래서 딕센하고 관련된 사건은 맡기 싫다고 했는데 말이야.”

케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출입문 쪽을 가리켰다.

“저 엉망으로 망가진 문도 희한하고 말이죠.”

“크리스마스 유령이라도 찾아왔나?”

모처럼의 성탄절까지 가족과 찢어져서 일에 파묻혀 있자니 별 말이 다 튀어나왔다. 그러나 케인의 대답은 그보다 한수 위였다.

“제가 알기로는 벽을 깨고 들어오는 유령은 없습니다. 그냥 뚫고 들어오죠.”

뤼 경감은 고개를 저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모르겠고 현장은 이상한 흔적만 남아있고...이래서야 어떻게 보고서를 쓴담?”

“전 어디까지나 경감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자네 학창시절에도 혼자서 리포트 쓴 적 없지?”

“경감님, 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그때 비쩍 마른 타입의 정복경관 한 사람이 들어와서 경감에게 귓속말을 한다.

“뭐라고? 또 방송국이... 아냐, 쫓아보내는 것도 한두번이니 이번은 내가 나가지. 어떻게든 둘러댈테니 걱정마. 케인, 쓸만한 게 있나 계속 살펴보게.”

“말씀대로 합죠.”

경감은 저지선을 넘어 바깥 복도로 나갔다. 무선마이크를 든 리포터와 카메라를 든 스탭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뤼 경감님? FNN의 제시카 맥켄드루입니다.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한말씀...”

“아직 조사중이라서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피해자가 안데르손 여사인 것은 사실입니까?”

“그건 오늘 저녁 뉴스를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 저녁 뉴스를 만드는 게 저희들이거든요. 그러지 마시고 한말씀만.”

“경찰은 전력을 다하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것이니 시민 여러분은 걱정 마시고 생업에 종사해 주십시오. 이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좀더 실제적인 정보는 없으신가요? 저희 정보통에 따르면 안데르손 씨는 최근 공금유용 혐의로 내사를 받은 일이...”

“그럼 내게 묻지 말고 그 정보통에게 물어보시면 되겠구려.”

“안데르손 씨가 후원하던 고아들이 최근에 갑자기 사라진 사실도 아십니까?”

“그건 아동복지과에 가서 물어보세요. 자아 자아 어서 비켜주시오!”

한편 경감이 나간 뒤 책상을 이리저리 뒤져보던 케인은 서류들 틈에 거꾸로 놓인 액자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들어올려 안에 있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선량해 보이는 40대 중반의 여성이 작업복 차림으로 어느 시골 농장에서 열댓 명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여성의 바로 앞에는 유난히 활짝 웃는 표정을 지은 아이가 함께 찍혀 있었다. 백발이 섞인 검은 머리의 동양계 소녀였다. 소녀는 그 중년부인에게 안기는 듯한 자세로 친밀하게 기대어 서 있었고 그 부인 또한 소녀의 한쪽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마치 한 가족처럼.

마치 연인들처럼.





THE END





(C) ZAMBONY 200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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