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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3-03] 울트라하 : 본편 제5화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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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VANT  TITLE  ◆



......건전성인(健全星人)의 지구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늘을 가득 메운 가지각색의 원반 편대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전부터 예견하고 있던 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 시기가 예상외로 빨랐던 것이다.

세계평화유지군 극동지부 소속 생생 경비대의 지휘관 라케시스 토마토니언, 일명 ‘황폐(荒幣)의 라키(樂喜)’에게도 이번 사태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건전성인은 그만큼 노련하고도 치밀하게 침략 준비를 진행시켜 왔던 것이었다. 적들이 보유하고 있는 최신 무기 ‘더티 알폰소’와 ‘미르그레네이드’의 위력 앞에서 평화유지군의 병사들은 무력하기만 했다. 게다가 건전성인이 비밀리에 훈련시켜 풀어놓은 미소년 부대가 시내의 중요 시설물과 정부 청사를 소리 없이 제압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한 노릇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생생 경비대의 정예 대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도시 한복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건전성인이 제시한 최후의 카드, 건전괴수 미르기라스가 출현한 것이다. 언제 괴수의 발아래 깔려 납작한 중국식 정통 호떡이 되어 버릴지 알 수 없는 상황임에도, 대원들은 용감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공격을 가하고 있다. 미르기라스는 발전소 세 곳과 하수 처리장 다섯 군데를 준비운동 삼아 파괴하고 3대 방송국을 전채로 삼은 뒤, 본격적인 파괴 활동에 돌입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는 생생 경비대의 자랑인 전격특전인수분해입자광선발사포좌(電擊特戰因數分解粒子光線發射砲座) ‘로리콘스탄트’도 과부하로 인해 사용 불능 상태였다.

“캡틴,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에너지도 바닥나고 모두들 지쳐 있습니다! 일단 후퇴한 뒤에 다음 작전으로 넘어가는 것이 어떠할지!”

황폐의 라키는 괴수가 흩뿌린 파편 조각을 가벼운 몸놀림으로 슬슬 피해 가면서 부대장 아바타르, 일명 ‘도화(圖畵)의 진현(眞賢)’쪽을 돌아보았다.

“우리에게 언제 다음 작전이란 게 있었나?”

대장의 불성실한 질문에 부대장의 무책임한 답변이 이어졌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겁니다.”

황폐의 라키는 스물 다섯 번째 파편을 슬쩍 뒤로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답이다. 전원 후퇴! 쓰다 남은 비품은 꼭 챙기도록!”


철수 준비로 모두들 바쁜 와중에도 한쪽 어깨에 올라앉은 애완용 햄스터를 가만히 다독여 주면서 정보 분석을 서두르던 이오니안, 일명 ‘홍차(紅茶)의 쥐쥐(智智)’가 소리쳤다.

“캡틴, 지휘차의 레이다에 뭔가가 잡혔는데요! 이쪽으로 곧장 날아오고 있습니다!”

“평화군 전투기 편대인가?”

“수가 하나뿐인 것으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아주 큽니다!”

라키는 또 다른 괴수가 아니기만을 빌었다.

“캡틴! 저것은?”

다른 대원들이 놀란 얼굴로 상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곧 놀라움에서 반가움으로, 반가움에서 환희로 바뀌어 갔다.

“‘그 거인’이다!”

그들의 머리 위를 통과하여 미르기라스의 눈앞에 우뚝 선 것은 농심 78성운 ‘맛의 나라’에서 온, 정의와 평화와 生生우동의 수호자, ‘울트라면’이었던 것이다!

괴수는 뜻밖의 적이 출현한 것에 적잖게 당황하면서도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여성형의 거인이 밀가루가 휘날리도록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그에 맞선다.

그 당당하고 용감한 모습을 보며, 라키 휘하 생생 경비대 대원들은, 새로운 용기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라하세르가 지구에 처음 온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 30년이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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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하 ― 별에서 온 여왕

ウルトラハ ― 星からの女王さま

(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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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ENING  :  BRIGHT  STARS ★



믿고 있었어

아무도 따라와 주지는 않았지만

오직 나만의 길을

찾아서 떠나가야 한다는걸


저하늘 너머 아름다운 별들

마치 우리를 손짓해 부르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어

이리 오라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어떤 두려움이 몰려와도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여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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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격돌! 울트라하 VS. 울트라면

第5話 『激突! ウルトラハ VS. ウルトラ―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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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돌이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드디어 그의 실력을 보여 줄 기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리 엔터프라이즈가 농심의 협력을 얻어 개최하는, 전국 생생우동 빨리먹기 대회에 캐사모스톤 지구의 대표 선수로 나갈 예정이었다.

여기서 우승하면 가문의 명예이고 학교의 영광이며 본인의 행복인 동시에, 적지 않은 상금도 약속되어 있었다. 그 돈이면 자기를 공부시키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식당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누나에게 큰 보탬이 될 것이다. 해돌이는 하나뿐인 육친인 누나가 고생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잘하면 앙끄시의 대표로서 전국 대회에 나갈 가망도 있었다. 그는 그 정도로 생생우동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둘러앉아 생생우동을 먹어 본 친구들은 항상 그의 신속하고도 막힘이 없는 기술과 소화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미 캐러중학에서는 ‘해돌특급’이라는 별명으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저런 즐거운 생각을 하며, 해돌이는 자전거 뒤쪽에 줄로 단단히 묶어 놓은 생생우동 박스가 떨어질세라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누나를 깜짝 놀라게 해 주어야지. 해돌이는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으로 TV시리즈 ‘울트라면’의 주제가를 불어제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돌이가 그의 집으로 통하는 약간 으슥한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무렵, 요란하게 치장한 오토바이를 몰고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사방에 뿌려 대며 괴상 망측한 옷차림을 과시하는 한 떼의 놈팽이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 중에서도 인상이 과히 좋지 못한 어떤 녀석이 해돌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나머지 패거리들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즉시, 녀석들은 각자 오토바이에서 내려서더니 각목, 파이프, 쇠사슬 뭉치, 싸리빗자루, 청소용 걸레, 뿅망치 등등을 챙겨 들고 해돌이 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해돌이는 양손을 내저으며 항의한다.

“이봐, 나는 너희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친 적이 없어. 왜들 이러는 거야?”

두목인 듯한 아까의 인상 고약한 녀석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거칠게 뱉어 버리고,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며 해돌이 앞으로 걸어왔다. 그 일대를 휘젓는 폭주족 패거리의 제1인자인 그의 이름은 ‘라임’이라고 했다.

그는 사냥감의 질문에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일이 좀 있지. 우리도 이러긴 싫지만 좀 내려 줘야겠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온몸이 굳어 버린 해돌이는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이빨만 딱딱 마주칠 뿐, 감히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차피 도망가려 한다 해도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막아 놓기는 했지만.

몇 분 후, 놈팽이들은 재빠르고도 효율적으로 해돌이를 손봐주고는, 덤으로 그의 생생우동 한 박스까지 들고 가 버렸다.


망가진 자전거와 함께 으슥한 길바닥에 널브러져서 정신을 잃고 있던 해돌이를 때맞춰 발견하고 병원에 옮긴 것은, 마침 간만의 쇼핑을 나갔다가 턱없이 비싸게 오른 물가에 치를 떨면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던, 동거녀였다.

병원에서는 해돌이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수첩을 뒤져보고 연락처를 찾아낸 뒤에 그의 하나뿐인 누나인 수진에게 전화를 해 주었고, 청천 벽력같은 소식에 놀란 수진은 식당 일도 그만두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거녀도 수진이 일하고 있는 식당에 자주 가서 가장 싼 음식을 시키고는 주인이 안 보는 사이에 냅킨이며 이쑤시개며 양념통이며 젓가락 등을 몰래몰래 집어 오는 일이 많았기에, 서로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수진은 의사로부터 해돌이의 상태를 전해 듣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병실 의자에 앉아서 붕대를 칭칭 감고 링겔을 꽂고 산소 마스크를 끼고 전기담요에 폭 싸여 쌔근쌔근 잠자고 있는 해돌이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던 거녀는 수진이 병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뭐라고 해야 할지...”

“이젠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도 한 일주일 반 정도 안정하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러던데요 뭘.”

“일주일 뒤에 열리는 생생우동 빨리먹기 대회에 그렇게 나가고 싶어했는데... 결국 못 나갈지도 모르겠네요. 정말로 그 일에 푹 빠져 있었는데, 불쌍한 것...”

“해돌이는 생생우동을 좋아했나 보군요.”

“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한참 동안 방황했었는데, 계속 비뚤게 나갈 수도 있었던 해돌이를 구한 것이 바로 생생우동이었죠. 생생우동을 먹기 시작한 뒤로 점점 성격도 밝아지고 나쁜 친구들과도 손을 끊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래서 앞으로는 잘 되어 나가겠지 하고, 가난하지만 즐겁게 살아 왔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로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그냥 열심히 살아 왔는데, 어째서 우리에게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늘이 원망스럽고 작가가 원망스럽고 시삽이 원망스러울 뿐이죠...”

(그런데 시삽이 무슨 죄냐 ;--)


수진의 눈물 섞인 한탄에 아무 말도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던 거녀는 다시 해돌이의 침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베개 머리맡에는 먼 옛날의 용사 ‘울트라면’의 염화비닐인형이 놓여 있었다. 30년 전 한통 합중국의 위기를, 아니 전 지구의 위기를 구한 영웅으로서, 지금도 그의 활약은 TV 드라마로 각색되어 전국 각지에서 방송되고 있었다. 이러한 인기에 편승하여 울트라면 완구 산업에 뛰어든 소노공(笑怒空) 주식회사는 선발 주자이던 용실업(勇實業)을 따돌리고 놀라운 급성장을 이룩해 냈다. 해돌이의 인형 또한 소노공 제품이었다.

“울트라면의 팬이었나보죠, 해돌이는?”

“네? 아아... 어릴 때부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마스코트예요. 외롭고 힘들 때에는 언제나 의지가 되어 주었지요. 하지만 이런 때에는 아무리 울트라면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수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훔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거녀의 마음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러한 상황을 알 리 없는 해돌이는 여전히 꿈속에서 불량배들의 들볶임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기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

‘사,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도와줘 울트라면...’


“이봐, 거녀양은 또 어딜 간 거야? 처리해야 할 서류가 이렇게 밀렸잖아!”

“아무 말도 없이 아까 나가던데요. 여느 때처럼 또 군것질하러 간 거 아닐까요?”

“(\_/) ...자넨 군것질을 다섯 시간 동안이나 하는가!!!”

결국 우리의 주인공 거녀는 쌓인 일도 제쳐 두고 사건 추적에 나섰다.

그 덕분에 죽어 나는 것은, 준군 사건 이후로 다시 4주일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구 중인 PETS본부에서, 밀려드는 의료 및 일상 업무에 정신없이 대처하고 있는 무휼박사 이하 의무반 직원들이었다. 특히나 완고하고 깐깐한 무휼박사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누르느라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귀여운 사촌 누이를 앞에 두고 솟구쳐 오르는 마성(魔性)을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 18금 게임의 주인공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한편 동거녀는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캐사모스톤 지구의 뒷골목과 유흥가를 돌아다니며, 그 일대를 주름잡는 불량배 집단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별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거녀, 아니 라하세르는 먼 옛날 이 별에 왔었던 전사 울트라면, 아니 효데스․아마조나․슝․드로메다의 전설을 상기하며,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효데스는 라하세르의 먼 친척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돗페이가 늑대로 변하고, 골리앗이 마천루 사이를 누비며, 건담 엑스가 위성 캐논을 마구 쏴 대는 달밤.

병실 침대에 누운 해돌이는 끝없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돼... 안돼... 생생우동만은 안돼... 제발 돌려줘... 제발...’

꿈속에 나타난 라임의 패거리들은 징글맞은 얼굴로 그를 비웃으며 그의 손에서 따끈따끈한 생생우동을 계속 낚아채는 것이었다. 이제는 갔겠지 하고 마음을 놓는 순간, 그들은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서 그가 먹으려고 준비한 생생우동을 날쌔게 빼앗아 가는 짓을 반복했다.

‘그만둬... 아까 괴롭혔으면 됐지 왜 또 다시 몰려오는 거야... 그만둬...’

다음 꿈에서는 TV에서 본 괴수처럼 흉악하게 변한 라임의 부하들이 그를 노리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직접 공격당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공격당하기 직전의 그 초조함이 수십 번 반복되는 것이 더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해돌이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조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꿈속에서, 히죽거리는 라임의 얼굴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게 너의 수호 천사라고? 웃기지 마라 꼬마야. 이건 그냥 말라비틀어진 고물딱지 인형일 뿐이야. 이젠 알겠냐, 응? 우하하하하하하하’

라임의 우락부락한 손이 울트라면 인형을 마구 짓이긴 다음 땅에 집어던지는 광경이 보였다. 그 순간 해돌이는 흙탕 속에 뒹구는 인형의 모습과 자기의 처지가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도와줘 울트라면... 저놈들을 해치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빌려줘...’

침대에 누워 있던 해돌이의 눈에서, 한 방울의 맑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은 은빛의 궤적(軌迹)을 한줄기 그리면서 그의 통통한 오른뺨을 타고 흘러내려, 귓가를 지나, 베개 위에 놓여 있던 낡아빠진 울트라면 인형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그 주위에 창백한 녹색의 광채가 번득이더니, 다음 순간 인형은 마치 생명을 얻은 듯이 스스로 일어나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인형은 간호사의 부주의로 열려 있었던 병실의 창문 틈새로 빠져나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침대 옆에 앉아서 밤새도록 해돌이를 지켜보다가, 피로에 지쳐 깜빡 잠이 들어 있었던 수진은, 물론 이러한 광경을 볼 수 없었다.

아마 보았더라도 믿지 않았겠지만.


같은 시각, 병원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동차용 도로에서는, 라임과 그의 똘마니들이 휘황찬란한 액세서리와 번쩍거리는 야광 페인트, 그리고 어디 쓰레기통에서나 주워 왔을 법한 누덕누덕한 깃발들로 치장한 오토바이들을 몰고 신나게 달리며 밤거리의 차가운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곳은 밤 10시경만 지나면 완전히 무인지경이 되는 소문난 우범지대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스피드를 즐기며 젊음을 구가하는 천국이었다. 물론 가끔가다 재수 없게 걸린 행인이나 자동차를 떼거리로 몰려들어 ‘만져 주는’ 재미도 짭짤했다.

한마디로 이곳은 그들만의 아우토반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방금 전에도 어느 불행한 편의점 주인에게 죽지 않을 정도의 뭇매를 선사하고 그 대가로 곰쇠맥주 두 상자와 세사미담배 여섯 상자, 가지각색의 안주 거리, 그리고 불꽃놀이에 쓰는 폭죽 몇 개를 ‘순전히 재미로’ 강탈해 오는 길이었다. 이제는 이걸 가지고 가서 한바탕 잔치를 벌일 장소만 찾으면 오늘밤은 끝이다.

라임은 이틀 전에 만난 정체 모를 신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그는 어떻게 소문을 듣고 왔는지 그들이 평소에 머무는 아지트를 귀신같이 찾아내어 그들에게 거액의 수표를 주면서 별로 일 같지도 않은 일을 맡겼다.

‘그러니까 요 동네에 사는 해돌인가 하는 녀석을 손봐주면 된다 이거지?’

‘그렇다. 이건 착수금이고, 일이 끝나면 같은 금액으로 잔금을 지급하지.’

‘그런데 왜 이런 하찮은 꼬마 녀석을 혼내 주려는 거지? 액수가 보통이 아닌 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사장님의 조카도 이번에 이 녀석과 같은 대회에 참가하는데, 이 녀석만 없으면 우승할 수 있다고 하더군. 더 이상은 나도 몰라.’

‘좋아, 우리가 맡지.’

쳇,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야비하다니까... 라임은 입맛을 다시며 해돌이에 대한 기억을 애써 잊으려고 했다. 이런 일 한두 번 해 보냐.

그러나 그들이 앞으로도 결코 잊지 못할 일이, 바로 그때 일어났다.

가끔 나타나는 바리케이드나 기타 장애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처럼 달려가던 폭주족들 앞에, 갑자기 뭔가 이상한 물건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거대한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발을 굳건히 땅에 딛고 씩씩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를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라임과 패거리들은 놀란 나머지 급브레이크를 밟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형체를 찬찬히 살펴보려 했다.

“으잉? 두, 두목, 저거 TV에 나오는 그거 아냐?”

“마, 말도 안돼! 저게 어째서 이런 곳에!”

“지금 그게 문제야? 빨리 튀자고! 여기 그냥 있다간 밟힐지도 몰라!”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바로 전설의 영웅 울트라면과 똑같은 모습을 한 거인이었던 것이다.

거인은 두 팔을 하늘로 올리고 마치 짝잃은 킹콩 같은 포효를 내뱉더니만 그들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라임과 그 부하들은 혼비백산하여 각자의 바이크를 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인의 걸음은 그들보다 훨씬 빨랐다. 그들은 순식간에 거인의 발 밑에 깔려 오징어포가 될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하는 데 성공, 인적 없는 도로를 벗어나 별별 장애물들이 밀집해 있는 주택가로 도망쳐 들어갔다. 휘날리던 깃발이나 뻑적지근한 액세서리들은 이미 여기저기에 부딪히고 긁히는 통에 다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라임과 패거리들의 얼굴에는 오직 선사 시대의 조상들이 육식동물에게 쫓기던 때에나 느꼈을 법한 원초적인 공포와 두려움만이 감돌고 있었다. 한편, 거인은 그들을 추격하기 위해 주택가로 따라 들어왔고, 무리한 발걸음으로 인해 그 근처의 많은 건물들과 자동차들이 파괴되어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캐사모스톤 지구의 조용한 주택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루 동안의 고된 복구 작업을 마치고, 임시 숙소의 지붕에 뚫린 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별빛을 벗삼아, 잠을 이루려고 노력하던 PETS 대원들은 때아닌 출동 요청을 받고 졸린 두 눈을 비비며 억지로 하품을 참아 가면서 사건 현장으로 급행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캐사모스톤의 한가운데에서 미친 듯이 아무거나 붙들고 깨부수는 거인의 모습을 보고는 잠이 확 깨 버렸다. 전설의 영웅 울트라면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 친구가 여기에 있는 겁니까? TV프로의 주인공이 왜 길거리를 두들겨 부수고 다니는 거냐고요?”

펫츠호크 1호의 부조종석에서 화기 관제를 담당하는 유태대원이 멍한 얼굴로 소리질렀다.

“나도 모르겠다. 실제 역사에서, 울트라면은 30년 전 한통 합중국에 나타나 그곳의 위기를 몇 번이나 구한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말야. 어째서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에 나타나서 난동을 부리는 것일까?”

펫츠호크 1호의 주조종석을 맡고 있는 유성대장이 거인의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상황을 관찰한 뒤 난감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대장님, 상대방은 어떠한 형태의 교신 시도에도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까요?”

펫츠호크 3호를 몰고 거인의 주변을 누비며 여러 가지 통신용 신호를 발신해 보았지만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한 하라 대원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유성대장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무고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한다면 그것이 울트라면이 아니라 울트라면 할아버지라도 저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다! 상대방이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고 있다면 협상할 의사가 없는 것이 명백하므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 전원 공격 개시!!!”

PETS 대원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내키지 않는 공격을 가하기 위해 거인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지점으로 조금씩 접근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거녀는 밤늦게까지 조사차 돌아다니다가 피로에 지쳐 잠시 쉬려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중에, 주택가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미 소방대와 전투경찰, 그리고 인명구조반 등이 달려와서 부상자를 구출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불길을 끄고, 피해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한편에는 밤중에 할 일이 없어 바람 쐬러 나왔다가 때아닌 불구경을 즐기게 된 몇몇 구경꾼들이 한참 북새통을 떨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거녀는 사람들을 헤치고 피해 지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무휼박사와 PETS 구급반이 달려와 인명 구조에 협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까다로운 인상의 무휼박사가 거녀를 알아보고는, 바퀴 씹은 얼굴을 하고 그녀를 불렀다.

“거녀양, 자네 오후 근무시간 동안 대체 어딜 가 있었는가?”

“죄송합니다 박사님. 잠깐 급한 볼일이 생겨서...”

“이 사람아, 아무리 급한 볼일이라도 그렇지, 다른 사람에게 미리 얘기라도 해 두어야 할 것 아닌가? 이게 이번 달만 해도 벌써 몇 번째야?”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 저, 그런데 무슨 사건인가요? 단순한 화재라면 PETS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을텐데...”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저쪽 어딘가에서 웬 거인이 하나 나타나서 난리 법석을 떨고 있다고들 하더구만. 그 뭐라더라. 아 그래, 울트라면이라고 알지? 그놈하고 똑같이 생겼대.”

거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순간적으로 약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가 다시 평소의 웃는 얼굴로 돌아와서 박사에게 자기가 할 일을 물어 보았다. 무휼박사는 그다지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러한 변화를 눈치채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으음 그렇지. 마침 이쪽에 비품 몇 가지가 떨어져서 그러네만, 인근 병원에 가서 급히 구해 오도록 하게. 이건 필요한 물건을 적은 목록이고, 이건 내 위임장일세. 자네 신분증은 가지고 있겠지? 그것도 꼭 있어야 하네.”

PETS는 앙끄시 일대의 거의 모든 양의원․한의원․보건소․혈액은행․안구은행․기타등등의 의료 시설들과 긴급사태를 대비한 특별 비품 공급 계약을 맺고 있어서, 무휼박사의 부탁만 있으면 언제든지 현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조달할 수 있도록 체계를 완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앙끄방위군의 예산에서 지원되므로, 아무때나 무턱대고 조달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과 같은 특1급 비상사태에만 요청을 하도록 한정되어 있다.

거녀는 자기 신분증이 제대로 손가방 안에 들어 있는지 확인한 뒤, 박사가 건네준 서류들을 들고 바람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병원은 피해 지역과 정반대 방향에 있어서 아직 불길이 미치지 않은 상태였다. 우연히도 해돌이가 입원 중인 바로 그 병원이었다.

무휼박사는, 달려가는 거녀의 뒤통수에 대고 성미 고약한 시아버지 같은 어조로 소리쳤다.

“아직 자네 근무 태도에 대한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명심하게!!!”



해돌이는 계속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꿈은 달랐다. 그는 거인이 되어 자기를 괴롭힌 못된 녀석들을 쫓아가서 혼을 내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인지 몰라도 자꾸만 어디서 파리떼같은 것들이 나타나서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는 좌절감에 불타올라 손발을 마구 휘둘렀다. 발 아래에 불길이 솟아오르고 개미떼같은 존재들이 헐레벌떡 도망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찾는 못된 녀석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더욱 더 세차게 날뛰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어차피 이것은 꿈일 뿐이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깨게 될 테니까.



거녀는 마치 엄마 잃은 하니(河泥)처럼 쏜살같이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생전에 그렇게 급하게 뛰어 본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약 5분 후 병원에 도착한 거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원 비품계로 달려가서 박사의 목록과 위임장을 전달하고 물건을 급히 준비해 줄 것을 부탁한 뒤, 해돌이의 용태를 살펴볼 겸해서 잠깐 병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 보니, 잠깐 졸다가 일어난 수진이 걱정스런 얼굴로 환자의 머리 위에 물수건을 얹어 주는 모습이 보였다.

“일하다 말고 잠깐 와 봤는데, 상태는 어때요?”

“여전히 잠만 자고 있어요. 선생님 말로는 맥박이 상당히 불규칙적이고, 호흡도 고르지 못하대요. 마치 심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이대로 가다가는 회복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무슨 소릴. 틀림없이 일시적인 증세일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도무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를 않으니...”

“지나친 걱정은 몸에 안 좋아요. 이러다가 수진씨까지 병들면 곤란해요. 잠깐동안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 해돌이는 당직 간호사에게 맡겨도 될 거예요.”

수진을 위로하던 거녀는 해돌이의 머리맡을 보고 뭔가 아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뭔가가... 저기에 있었던 것이... 지금은... 없다?

“어, 해돌이의 마스코트가 안 보이네. 수진씨가 치웠나요?”

“아뇨. 제가 아까 잠깐 졸다가 일어나 보니까 없어졌던데... 어디로 갔을까?”

거녀는 문득 아까 무휼박사로부터 들은 말이 생각났다.

‘…울트라면이라고 알지? 그놈하고 똑같이 생겼대.…’

‘…그놈하고 똑같이 생겼대.…’

‘…똑같이 생겼대.…’

거녀는 그제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거녀는 재빨리 병실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등뒤로 수진의 놀라는 얼굴이 언뜻 보였다. 거녀는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비품계 사무원의 당황한 목소리가 공기의 진동을 타고 들려 왔지만 거녀의 귀에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녀는 밤거리를 향해 힘껏 달려갔다.

거인이 서 있는 곳을 향해서.

뜨거운 불길이 밤하늘을 뚫고 솟아오르는 바로 그쪽으로.



유성대장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거인은 분명히 이쪽의 공격에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그에 비해 이쪽은 눈에 띄게 지쳐 있고, 탄약도 재장전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유성대장은 이렇게 된 바에야 갈 데까지 가 보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다시 겨냥을 맞추었다.

‘그나마 저 녀석이 진짜 울트라면처럼 필살기를 쓰지 못하는 것이 불행중 다행이군...’

거인은 아직까지 단순한 3급 괴수보다도 더 서투른 동작으로 이리저리 날뛰기만 할 뿐, 어떤 광선기나 그 외의 정교한 공격 방법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유성대장은 저놈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더욱 굳혔다. 그런데, 마치 그의 이러한 생각을 비웃는 듯이, 한 줄기 밀가루빛 에너지파가 거인의 앞으로 내민 두 손으로부터 뻗어 나왔다.

“누들 스피어! 저럴 수가!”

유성대장은 당황했다. 그것은 울트라면의 소문난 필살기 중 하나였다.

“대장, 우린 이제 어떡해야 됩니까?”

유태대원 또한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펫츠호크 1호는 에너지파에 맞아,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한 발만 더 맞으면 추락할지도 모른다!

혼란에 빠진 그들의 사고(思考)는 균형 감각의 상실에 의해 더더욱 큰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거인 때문에 살았나 했더니만 거인 때문에 죽게 되다니.’

속으로는 이런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유성대장은 기체를 바로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아직 대장이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장소를 찾느라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도 밤 시간이고, 깨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저쪽의 사건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거녀는 늦지 않게 알맞은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거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품속에서 보랏빛 부채를 꺼냈다.

다음 순간, 무지개색 빛이 그 주위를 물들였다.


“대장님, 저길!”

겨우겨우 기체의 균형을 잡고 가까운 공터에 착륙시킨 유성대장은, 피요대원의 다급한 통신을 듣고 거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또다른 거인의 모습이 그 앞에 서서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울트라하였다.

“‘그 거인’이다!”

유성대장은 30년전 라케시스 토마토니언의 대사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살았군요!”

‘소년’의 활기찬 목소리가 실로 오랜만에 들려 왔다.


울트라하는 가짜 울트라면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비호같이 킥과 펀치로 연속 공격을 가했다. 한시라도 빨리 기운을 빼기 위해서는 기습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당황한 거인은 잠시 동안 타격을 받아 주춤하더니만, 곧바로 몸을 추스르고는 반격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라하는 거인의 반격이 예상외로 능숙한 데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무래도 해돌이의 의식이 울트라면 인형과 융합된 지 너무 오래 지난 모양이었다. 해돌이는 이제 완전히 자신을 울트라면으로 인식하고, 그의 공격 방법을 흉내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TV에서 본 것을 따라 하는 어린이의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오랜 수행을 거쳐 기술을 연마한 무도가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라하는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편, 병실에 누워 있는 해돌이는 아직도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왜 방해하는 거야, 울트라하? 나는 단지 그 자식들에게 맛을 보여 주고 싶은 것뿐이란 말야! 저리 비켜, 안 비키면 그냥 두지 않겠어!...’

해돌이의 맥박과 호흡이 위험할 정도로 빨라졌고 체온도 급상승했다. 그의 갑작스런 상태 변화에 놀란 수진은 당직 의사를 부르러 뛰어갔다. 해돌이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뒤덮인 채 마구 일그러졌다.


울트라하는 거인의 공격을 계속 피해 다니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대로 폭주가 계속되는 것을 방치하다가는 이 구역 일대가 파괴되는 것은 물론이고, 해돌이 자신도 기운을 모두 소진(消盡)하여 죽을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아 죽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평생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식물인간처럼 살아가야 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그를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러나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혀 제대로 맞지도 않는 거인의 몸을 조종하면서 엄청난 힘을 휘두르고 있는 14세 소년의 의식을 무슨 수로 달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해돌이의 조종을 받는 거인은 계속해서 다양한 필살기로 울트라하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면발 스트라이크와 레드 핫 사이클론에 이어, 전광(電光) 찹스틱이 마구 난무하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진짜 울트라면이 쓴 일조차 없고 라하조차도 처음 보는, 새로운 필살기까지도 나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공격 패턴을 시험해 가면서 자기만의 기술을 익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젠장 공부나 좀 이렇게 할 것이지. 라하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해서 한 599초 동안 계속 도망 다닌 끝에, 라하는 마침내 그럴 듯한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되든 안되든 한 번 해보는 거야.


남은 시간 앞으로 60초.

울트라하는 날쌔게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공간 필드 위에 자기의 입체 영상을 서너 개 투영시켜 거인의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는 동안에 진짜 울트라하는 거인의 뒤쪽으로 슬그머니 돌아가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몇 가지 동작을 취했다. 그 순간, 울트라하의 몸이 은백(銀白)의 안개로 뒤덮이더니만 약 3초 후 다시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기들의 임무는 잊어버린 채 근처 편의점에서 밤참을 사 들고 와서 열심히 관전하고 있던 유성대장 이하 PETS 대원들은 이 광경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건 처음 보는 기술인데? 또 무슨 마술을 부리려는 걸까?”

“새로운 모드로군요.”

기록의 명수인 피요대원이 손안에 들어가는 휴대용 디지털 카메라로 울트라하의 모습을 샅샅이 찍고서, 그 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 앞으로 52초.

울트라하의 새로운 모드는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얌전하고 깔끔한 모습이었다. 체색(體色)은 깨끗한 흰빛으로 채워져 있고, 머리의 형태는 역삼각형의 모자를 쓴 것처럼 바뀌었으며, 몸 전체에 걸쳐 커다란 십자가 모양의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양쪽 손에는 거대한 주사기와 길다란 체온계를 살포시 들고 있었다. 마치 지구의 간호사라는 직업을 연상시키는 청초한 모습이었다.


남은 시간 앞으로 44초.

피요대원이 최종 분석을 마치고 나서 선언했다.

“이것은 편의상 H-모드라고 해 두겠습니다.”

“왜 하필 H인가?”

“Healer, 치료자의 H입니다.”

“그거 말 되네.”

그렇게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Nurse의 N은 '노멀‘과, Medic의 M은 ’매저‘와 혼동될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단어가 바로 그거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피요대원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모두가 납득했다.


남은 시간 앞으로 39초.

울트라하는 주사기를 거인 쪽으로 향하고는 힘차게 피스톤을 밀어 넣었다. 다음 순간, 주사기의 끝부분에서 커다란 은빛 바늘 하나가 뻗어 나와 거인의 가슴에 박혔다. 바늘의 끝 부분은 가느다란 와이어로 주사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울트라하가 다시 한 번 피스톤을 밀어 넣자, 이번에는 핑크빛의 고(高)에너지 파동(波動)이 와이어를 타고 흘러나와 거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에 이르는 모든 부분을 감쌌다. 이후 국제괴수학회에 의해서 ‘너스 웨이브’라고 이름 붙여지게 되는 또 하나의 필살기였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필생기(必生技)일지도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 앞으로 23초.

에너지 파동이 걷히고, 힘이 빠진 거인은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울트라하는 조심스럽게 거인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를 향해서 자세를 낮추었다. 완전히 탈진하여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거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은 울트라하는, 서로 무릎을 꿇고 마주보는 모양으로 해서 그를 꼭 껴안았다.

기진맥진한 해돌이의 의식 속에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목소리면서도 마치 어머니의 그것처럼 친근한 목소리가...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젠 다 끝났어. 그러니 제발... 본래의 너로 돌아와 줘... 본래의 다정한 너로...’


남은 시간 앞으로 10초.

도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할 길이 없는 PETS 대원들과 기타 주위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희대의 사이코드라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저게 난데없이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이산 가족 상봉인감?”

유태대원이 기가 막힌 나머지 씹다 만 컵라면을 넘기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병원에 누워 있던 해돌이의 얼굴에 한줄기 가냘픈 미소가 피어났다. 호흡도 맥박도 체온도 뇌파도 모두 안정되었다.

‘울트라하......’

해돌이는 마침내 마음을 열었다.


남은 시간 앞으로 4초.

야릇한 형태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두 거인의 주위로 갑자기 눈부신 광채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빛깔은 너무나 다양하여 뭐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으나 그 색채에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해 주는 뭔가가 내포되어 있었다.

다음 순간, 두 거인의 모습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PETS 대원들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병원에 누워 있던 해돌이도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물론 누구보다 제일 기뻐한 사람은 밤새도록 그를 지켜보며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수진이었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었다.

밤잠을 잊고 현장에 머물면서 사태를 지켜보던 많은 구경꾼들은 모자란 잠을 조금이나마 보충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방대와 인명구조반 및 전투경찰대도 각자의 임무를 마무리짓고 귀환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PETS 대원들 또한, 좀더 실감나는 싸움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돌아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밀린 잠 생각도 잊은 채 길길이 뛰고 있는 불꽃의 사나이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심부름을 보낸 거녀가 제때 돌아오지 않아서, 모자라는 약품을 몇 시간 늦게 공급받는 바람에, 몇몇 환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나머지,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의무실장 무휼박사였다.

“거녀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건가아아아아아아------!!!!!!”

유황 온천에 빠진 라돈마냥 마구 푸드덕거리고 있는 그의 화난 모습을 보면서, PETS 의무실 대원들은 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감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거녀양은.”


모두들 돌아가고 아무도 남지 않은 적막한 사건 현장.

그 속에서도 가장 심하게 무너진 어느 집터의 한구석에서, 어둠침침한 사람 그림자 하나가 엎드린 자세로 여기저기를 뒤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 그림자는 한참 동안 손을 더럽혀 가며 열심히 뭔가를 찾더니만, 마침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냈는지 조그맣게 탄성을 지르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흙묻은 울트라면 인형을 집어들고 미소짓는 동거녀였다.



해돌이는 예상외로 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그로부터 닷새 후에 무사히 퇴원하였다. 꿈에 그리던 대회에도 문제없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밖에, 또 다른 행운이 그에게 찾아왔다.

퇴원하는 날 이른 아침에 병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 와서, 수진이 나가 보았더니 사람은 안 보이고 깔끔하게 포장된 생생우동 한 상자만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 상자에는 ‘우승을 노려라!’라는, 도무지 뜻 모를 메시지만 적힌 예쁜 카드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결국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회 개최일이 되어, 전 앙끄시에서 모여든 쟁쟁한 선수들이 각자의 꿈을 품고 대회장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물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해돌이와 그 누나 수진의 모습이 있었다.

동거녀도 물론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약간 늦은 시간에 관람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근무 태만에 관한 무휼박사의 서슬 시퍼런 훈계를 끝없이 들어가며 그날 새벽까지 초과 근무를 했더니만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해돌이가 무사한 것을 보니 마음만은 포근했다.

자기 순서가 되어 무대 위로 달려 올라가는 해돌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진이 옆 좌석에 앉은 거녀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뭐라고 감사드려야 될지 모르겠어요. 거녀씨가 아니었으면 저렇게 빨리 회복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그날 병원에 가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어머나, 별말씀을 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요 뭘.”

“그런데 해돌이가 꾼 꿈 얘기 말인데요.”

“꿈이요?”

“네,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꾼 꿈 얘기를 해 주었는데... 자기가 울트라면이 되어서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는데, 그때 울트라하가 나타나서 구해 주었다는 거예요. 신기하죠?”

“재미있네요.”

“그런데 해돌이는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믿는 것 같아요.”

“그래요?”

“거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거녀는 한순간 당황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글쎄요... 어쩌면, 꿈만은 아니었을지도... 후훗.♡”

거녀는 밝은 태양 빛을 받으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END  OF  EPISODE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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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DING  :  STRANGE  LAND ☆



너무나도 낯선 세계

이리저리 몰려가는 사람들

그 안에 내가 있어


난생 처음보는 것도 많지만

익숙해지려고 노력해

내가 사는 곳이니까

내가 지키는 곳이니까


모두들 떠나갔지만 너만은 남아줬지

내가 상처입었을 때

아무도 모르지만 너만은 알고있지

내가 누구라는 걸


한번더 상쾌한 기분으로

이제부터 모든걸 다시 시작해

나의 하나뿐인 삶이니까

나의 소중한 ‘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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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1998

(C)GRARD  ENTERTAINMENT  1996,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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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MAKE  ◆



“…지난 주말에 일어난 캐사모스톤 지구의 대규모 파괴 사건 이후로, 각지에서 반(反)울트라인을 표방하는 과격 시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앙끄 시의회와 방위군 사령부에서는 아직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PETS의 어메 장관은, 일명 울트라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표명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개인적 코멘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캐사모스톤의 주민 대다수에게 상당한 정신적 충격도 주고 있어, 그 여파는 당분간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상 ACN뉴스, 전석환이었습니다.”


앙끄 센트럴 네트웍의 재능 있는 리포터가 보도를 마치자마자, 방 중앙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정장 차림의 범상치 않은 남자가 TV를 꺼 버렸다. 남자는 옆에 서 있는 비서에게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되어 가는 것 같군. 잔금은 약속대로 지급했겠지?”

“물론입니다. 라임파(派)의 폭주족들은 이제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방금 우리 정보원이 그들의 생명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모두 제로입니다.”

남자는 작은 눈에 광채를 번득이며, 의자 팔걸이에 달려 있는 ‘李’ 로고를 습관적으로 어루만졌다.

“수트케이스에 초소형 반양자탄(反陽子彈)을 집어넣는 트릭도 아직은 꽤 쓸만한가 보군...”

“이 정도로 미개한 행성에서는 그보다 더 값싸고 효과적인 방법도 많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는가?”

“방금 발도제 쪽에 보수 제안을 마쳤습니다. 프리랜서이다 보니 좀 오래 걸렸습니다만 그럭저럭 협상이 끝난 상태입니다.”

“잘했네. 아, 슬슬 점심 먹을 시간이군...”

“메뉴는 뭘로 할까요?”

“글쎄... 생생우동은 어떨까?”




THE  REAL  END  OF EPISODE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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