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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06] 울트라하 익스트림 -THE 극장판- 1/3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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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THE INVASION




어느날 갑자기 그것들은 저 먼 하늘로부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떨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떠한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지구 전역의 대도시들을 깔아뭉개고 뒤집어엎고 마구 유린했다.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철저한 파괴와 공포의 잔해(殘骸)만이 남아서, 인류의 운명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땅 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서로서로 결합하여 복잡한 연결망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그것들을 보냈는지, 그것들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져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각지에 주둔하는 지구인의 군대가 남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그것을 해체하고 도시를 수복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그때마다 흉악하게 생겨먹은 우주괴수들이 어디선가 차원의 벽을 가르고 나타나서 그들을 장사지내곤 했다. 그 장치를 지구에 심어놓은 장본인들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들만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목적을 빠른 시간 안에 이루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우민국의 문화도시로 이름난 앙끄시 또한 이러한 침략의 손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나무가 말라죽고, 가족이 흩어지고, 풀들이 시들어 간다. 이런 상황임에도 미리 준비되어 있던 지저 대피 시설로 재빨리 몸을 피한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서로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저마다의 보신을 추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상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며 예전의 지구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생존자들의 고생 따위는 그들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오히려 운이 나빠서 지구 전역이 완벽하게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경우를 대비하여, 그 물체의 배후에 있는 자들과 외교적으로 교섭하여 자기들의 자리를 보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지상에 남아 있는 방위군이 하루하루 밀리고 있는데도 그들에게는 어떠한 복안이나 해결책 같은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은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앙끄시를 포함한 전 지구의 운명은 풍전등화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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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트라하 3주년 기념 초특급 기획! ◈

ULTRAHA EXTREME

―THE ANIMATED MOVIE―

(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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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STRANGER




“치프(Chief)! 제2방어선이 뚫렸습니다!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겠습니다!”

“사정거리에 들어오기까지 30초다! 아티-네이팜 1발 장전, 발사준비 서둘러!”

“대공포의 발사각도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적어도 2분은 걸릴 겁니다!”

“유트군, 50초로 줄여 봐, 2분은 너무 늦다!”

“치프, 25포인트에 아직 피난하지 않은 생존자가!!”

“구급캡슐을 그쪽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 다른 곳의 상황은?”

“대기권 바깥의 관측위성에서 뭔가 신호를 보내왔지만... 판독이 안 됩니다.”

“그나저나 저녀석을 어떻게든 뚫고 이 구역의 ‘거미집’을 청소해야 할텐데.”



의문의 물체가 지구를 뒤덮고 그에 뒤따른 공격으로 인해 지구의 인구가 2/3로 줄어버린 바로 그때,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각국 정부는 남은 군사력을 총집결하여, 세계의 주요 지점에서 동시에 의문의 물체들을 파괴하는 공략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갑자기, 이러한 대응을 미리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이 나타난 우주괴수들의 반격으로 병력의 60%가 전멸하고 나머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게릴라 활동에 들어갔다. 그때 나우민국을 비롯한 몇 개의 동맹국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것이 R.A.T.S.(Resistance Against Terrible Strangers), 즉 ‘대 이성인 저항기구(對異星人抵抗機構)’라는 단체였다. 그들은 이미 지구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히 증식해가면서 마치 ‘거미집’처럼 하나의 네트웍을 형성하여 인간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그 이상한 물체를 상대로, 밤낮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의 종말이야! 오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눌려 터지는구나! 어서 손을 쓰지 않으면 큰 재앙을 당할게야. 이 ‘청운지지이’의 예언은 백발백중이라네, 암 암... 참 그런데 자네들. 복채 낼 돈은 가지고 있는건가?”

...죄송합니다. 잠시 지방방송이 끼어들었습니다.



이곳은 한때 앙끄시의 번화가였던 보곰3가. 옛날 외적으로부터 이 도시를 지켰다는 성웅(聖熊) 잠=보곰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거리도 이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청남색의 이삿짐센터 상자곽같은 물체들과 그들로부터 뻗어나와 사방에 가지를 치고 있는 은백색의 광(光)와이어들로 인해 예전의 모습을 잃고 있었다. 물체들의 낙하로 인해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와 사방에 널려 있는 쓰레기더미가 그나마 한때는 이곳도 인간의 삶이 펼쳐지던 곳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지금 RATS 앙끄지부의 어메 치프와 그 부하들은 얼마 안되는 병력을 동원하여 보곰3가에서 만음동 38번지로 이어지는 지점에 뿌리박고 있는 일련의 물체들을 해체하기 위해 돌격작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쯤 되면 꼭 나타나는 전파괴수(電波怪獸) 벨제바이트의 맹공으로 인해 도중에 길이 막힌 것이다. RATS의 몇 대 남지 않은 양산형 고공 전투기 제트 바이퍼와 고속 요격기 에어 디바이더를 합친 총 일곱 대의 전투편대가 괴수의 주위를 맴돌며 신속히 요격을 펼치고 있지만, 이상한 고주파를 토해내어 기계의 제어 계통을 혼란시키는 녀석의 필살기 때문에 오히려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나머지 대원들이 이동식 5연 전자 대공포에 탄환을 재어가며 괴수와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기술담당으로 천재적인 손재주와 계산능력을 자랑하는 청년 엔지니어 유트가 끊임없이 변하는 괴수의 위치를 입력해가며 가장 효과적인 발사 스폿을 찾기 위해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통신기에서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앳된 목소리가 빠른 공격을 촉구하며 욕설을 퍼붓는다.

“이봐 지훈, 나라고 계산을 빨리 하기 싫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야. 사람이란 매사에 절도를 지킬 줄 알아야...”

“이런 제길! 정확하게 안해도 좋으니까 빨리 좀 해요, 여기서 막는것도 한도가 있다구!!!”

유트의 차분한 말에 더욱 열받은 타격왕(打擊王) 지훈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쨍쨍 울린다. 그때 제트 바이퍼 대장기를 맡고 있는 어메 치프의 통신이 그들의 어색한 틈을 가르고 노련하게 끼여들어온다.

“지훈, 목표지점으로 먼저 가도록! 나는 3번기와 5번기를 데리고 녀석을 유인할테니 미리 가서 대기하게! 유트, 발사시간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계산이 부정확해도 나머지를 속행하도록.”

“말씀대로 합죠.”



어메 치프는 숨가쁘게 조종간을 놀리며 눈앞의 괴수를 노려보는 동시에 또 다른 포인트에 통신을 보낸다. 아무래도 그는 벌써 제3의 방책을 생각해두고 있는 듯 하다.

“유이, 대괴수 압착 지뢰의 매설은?”

대답하는 것은 젊은 여자의 당찬 의지를 담은 목소리였다.

“2분 안에 끝내겠습니다. 안전지대로 대피하는 시간도 넣어야 하니까.”

치프는 급박한 손놀림으로 괴수에게 전자력 발칸을 날리면서 지시한다. 눈두덩 비슷한 부위에 맞았는지, 녀석의 움직임이 다소 느려졌지만 진행방향만은 변함없다.

“지금 그쪽으로 유인하겠다. 부탁한다.”

치프의 제트 바이퍼가 맹렬한 속도로 괴수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어가 전자력 발칸으로 충격을 주자, 아래로 펑퍼짐하게 펼쳐진 스커트처럼 보이던 괴수의 하체 부분에서 느닷없이 3중 구조로 된 연골 촉수 서너개가 튀어나와 전투기를 잡을듯 말듯 스쳐지나가며 위협을 가한다. 동시에 그가 이끄는 에어 디바이더 3번기와 5번기가 치프의 반대방향으로부터 스미스=제퍼슨 고압 미사일로 요격해 온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유트의 힘찬 지휘와 함께 대공포에서 발사된 아티-네이팜 Mk-34 탄두가 녀석의 껍질을 깨고 들어가 연기를 피워올린다. 이렇게 밀고 당기기를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괴수를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유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지훈의 제트 바이퍼가 이끄는 나머지 항공요원들이 기다리고 있다. 치프의 편대는 재빨리 그들과 합류하여 남은 탄환 모두를 퍼부어 가며 괴수의 진로를 확고하게 유지시킨다. 그때 통신이 들어왔다.

“치프, 준비 끝났습니다. 대피도 이미 완료했고요.”

“좋아, 매설지점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내가 신호하면 그때 버튼을 누르도록!”



그리하여 지오중공업이 자랑하는 위력만점의 대괴수압착지뢰(對怪獸壓着地雷) 남달리온 MAX-44 스무개가 한꺼번에 묻혀 있는 지점으로 유인된 괴수 벨제바이트는, 언뜻 보면 머리처럼 생긴 상부 돌기로부터 날카로운 바늘손을 낼름거리며 머리 위에서 뛰어놀고 있는 일곱 마리의 회색 파리떼들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치프는 적당한 때에 지시를 내렸고, 폭발물 담당 유이는 일초의 오차도 없이 점화 버튼을 눌렀다.

일곱 대의 전투기가 그 공역을 벗어남과 동시에 날카로운 폭음과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치프는 이제 얼마동안은 숨 좀 돌리겠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 연기를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미집’의 해체를 방해하기 위해 ‘그들’이 보내는 괴수는 무한정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마리를 해치우면 또 다른 녀석이 보내어지기는 했지만 일정한 시간 간격이 있었다.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해체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괴수의 처치는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

그러나......

연기를 헤치고 다시 나타나는 괴수의 모습을 보고 치프는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이 녀석은 지난번까지의 약골들과는 달리, 저 지뢰공격마저도 이겨낸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아니 일단은 스스로를 지키는 게 급선무였다!

“X할! 먹혀들지를 않잖아! 치프, 이제는 어떡하죠?”

“지상부대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이 구역으로부터 빠져나가라. 항공대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서 녀석의 추적에서 벗어나라! 내가 미끼가 될테니 전파장해를 조심하며 최대한 빨리 ‘움막’으로 돌아가도록!”

‘움막’이란 이들의 반지하식으로 만들어진 사령기지를 가리키는 은어다. 어찌 생각하면 파괴된 행성을 수호하는 전사들이라기보다는 이미 몰락한 집안을 붙들고 늘어져서 근근이 살아가는 거지와 더 비슷한 처지라는 자괴감이 묻어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치프의 제트 바이퍼 대장기는 현란한 곡예비행을 펼치며 괴수의 눈을 혼란시키는 한편 다른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되도록 그들과는 멀리 떨어진 방향으로 녀석을 끌고 가기 위해 슬슬 약을 올리고 있었다. 대원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신속히 대피에 들어갔으나, 지훈의 제트 바이퍼만은 명령을 무시하고 그쪽으로 돌아와 대장기를 엄호하는 데 주력했다.

“자네가 날 지키다 당해도 봉급이 올라가지는 않아.”

“어차피 뒈지면 봉급 따윈 어떻게 되어도 좋아요!”

“미냐도 그렇게 생각할까? ...조심해! 촉수가 그쪽으로 간다!”

처음 삐져나왔을 때는 다소 어눌하게 허공을 휘젓던 벨제바이트의 촉수는 점점 연습을 쌓을수록 노련미(...?)를 풍기게 되어, 한 번에 3개 4개를 연속적으로 구사하며 사냥감들의 움직임을 따라서 집요하게 접근해 왔다. 게다가 녀석의 동체 중심부에 있는 세 개의 돌출부가 마치 뭔가의 입술처럼 활짝 열리면서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지훈이 이상하다고 경고하려 할 때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 구멍으로부터 활활 타오르는 백열의 반양자광선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세 줄기 광선이 대장기를 정통으로 맞추려 하던 바로 그때,

하늘로부터 보라색의 광구(光球)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벨제바이트의 동체를 강타하였고 그 충격으로 인해 광선의 조준이 다소간 빗나가, 어메 치프의 대장기는 주엔진 1기만을 파괴당한 채 비상착륙에 성공했다. 그리고 곧이어 보라색의 신비로운 광구는 점점 사람의 형체를 갖추어가더니, 마침내는 18미터급의 여성형 거인으로 변하여 한손으로는 괴수의 촉수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동체를 움켜잡아 그 움직임을 봉쇄하였다.

괴로운 듯, 이제까지 내었던 것 중에서 가장 주파수 대역이 높은 고주파를 발산하며 몸부림치는 괴수를 가볍게 들어올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은빛의 거인은, 빛의 채찍을 꺼내들어 괴수의 전신을 연속으로 두들긴 다음,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괴수를 손에서 발산되는 사이코=그래비톤(心靈重力波)으로 날려버린 다음, 우아한 포즈로 두 손을 교차시켜 보라색의 반양자광선을 발사했다.

아까보다 훨씬 큰 규모의 폭발이 대지를 뒤흔들고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놀란 얼굴로 사태를 지켜보다가 안전을 확인한 뒤 폭발현장 주위로 몰려든 어메 치프와 대원들의 눈 앞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헤치고 한 명의 사람 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국적인 의상을 입은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방금 전까지 격한 전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기품을 잃지 않고 피로를 억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라하세르 바스타젠 드 올트란 6세. 당신들을 도우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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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NEGOCIATOR




“...조정자(調停者)라고? 나는 또 무슨 구원군이라도 오는줄 알았더니만...”

“미안합니다. 저는 아직 신참이라 이런 일은 잘 알지 못해요.”

갑작스런 순간 하늘로부터 나타나 위기에 빠진 RATS 대원을 구출해낸 의문의 여인은 자신을 라하세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움막’으로 돌아와서 그녀로부터 대략의 설명을 들은 어메 치프 이하 대원들은 얼마간은 흥미롭고 얼마간은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저 이상한 물체들을 지구에 보낸 장본인은, 지구인에게는 J-999 행성계로 알려진 곳에서 번식하고 있는 라핀성인(星人)이라는 외계의 세력이었다. 그들은 그전에도 여러 번 다른 별을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했지만 대부분 ‘일곱 은하 연방’이 파견한 초은하경비대(超銀河警備隊)의 정예부대에 의해서 저지당했고, 그때 입수한 자료들에 의하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실험은 행성 한 개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할 만큼 대규모이며, 시공간의 굴절과 뭔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들은 연방과는 일체의 관련을 맺고 있지 않았고, 대부분의 일들을 자기들이 보낸 기계들이나 괴수 같은 대리자를 통해서 처리했기 때문에 그 실체나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구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되풀이하려 한다는 사실이 탐지되자, 연방은 과연 이들의 소행을 저지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좀더 실험이 진행되는 추이를 지켜보며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약 2만3천 개의 가입행성 대표가 모인 연방평의회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결국 절충적인 방안으로써 ‘그들’의 목적을 알아보기 위해 당분간 직접적인 개입은 자제하되, 특별히 선임된 ‘조정자’를 파견하여 지구인류의 사멸만은 방지하자는 결론이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표준 언어로는 젠드․라․베스타 = ‘조정자’란, 어떤 이유로 인해서 습격당한 행성의 내부사정에 연방이 직접 개입할 수가 없을 때 일종의 사절로서 특별히 파견되는, 초능력을 지닌 대리자를 가리킨다.



“말도 안돼! 그렇게 궁금하면 지들이 직접 알아낼 것이지 왜 멀쩡한 우리 지구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조사를 하겠다는 거야! 우리가 무슨 말라빠진 실험실 쌩쥐인줄 알아!!!”

지훈이 흥분한 얼굴로 펄쩍 뛰어오르며 그녀에게 따지고 들었다.

“...저는 다만 명령을 받고 여러분을 보호하려고 온 것 뿐입니다. 그렇게까지 상세한 사항은 몰라요. 평의회의 결정이라는 것은 우주에서 몰려드는 수없이 다양한 지성체들의 입장을 절충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제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딘가 겁먹은 듯한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가능한한 차분하게 그들을 달래려고 애쓰는 라하세르의 모습에 왠지 측은함을 느낀 어메 치프는 흥분한 지훈을 말리며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조정자의 권한은 대략 어디까지인가?”

“현지 주민들과 협력하여 그들의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데까지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를 습격하는 괴수는 처치할 수 있어도, 저 ‘거미집’들을 청소하는 일에는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겠군요. 연방의 조사에 방해되니까...”

분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유트의 코멘트가 뒤따랐다.

“유감스럽습니다만 그렇다고 봐야겠죠. 다만 어느정도의 재량은 허락되...”

“웃기고 자빠졌네! 그냥 숨만 붙어있으면 살아있는건줄 아나? 그런 조정자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뭔지도 모르는 기계뭉치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시시각각 우리 목을 죄어오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구경이나 하러 먼 우주에서 날아오다니, 여기가 무슨 유람관광단지인줄 알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지훈이 또 소리질렀다. 옆에서 유이와 유트가 그를 붙잡고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라하세르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두 부하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내며 치프가 말했다.

“그렇군,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 수 밖에... 자자, 이런 골치아픈 얘기는 이제 그만두고, 새 식구를 환영할 준비를 합시다. 유트, 자네는 오늘 출동 내역을 정리해서 보고한 뒤에 식량창고를 좀 뒤져서 뭔가 쓸만한게 있으면 가져오게. 지훈, 자네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정비에 신경써 주고, 일이 끝나면 파티 준비 좀 도와주게. 유이, 자네는 손님에게 우리 제복을 하나 내주고, 닥터 잼에게 데려가서 건강진단 좀 받게 해줘. 그리고 ‘움막’에 남는 방이 없으니까... 당분간은 자네 방을 같이 쓰도록 하게. 여자들끼리라면 말이 잘 통하겠지. 아 그렇지, 미냐에게도 새 친구가 왔다고 알려주는 거 잊지 말라구. 무슨 일이 있는데 빼놓으면 잘 삐지거든.”

치프의 돌연한 명령에 모두들 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럭저럭 명령에 따라 각자의 일들을 하러 나간 뒤, 라하세르는 마치 누명을 쓰고 재판정에 끌려와 최종변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재판장이 공소기각을 해버린 상황에 직면한 죄수같은 얼굴을 하고 치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직 더 말씀드릴 것이 남아있는데...?”

치프는 왠지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사실은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지만... 먼 데서 찾아온 손님에게 한숨 돌릴 기회도 주지 않고 심문을 해봐야 나도 피곤하고 자네도 피곤하고 별로 얻을 게 없거든.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자네가 이곳에 적응한 뒤에 하도록 하세. 어찌되었든 이제 자네는 우리 식구니까.”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이는 뜻밖의 대답에 멍해진 라하세르를 이끌고 통로로 나가는 것이었다.



“방금 우주에서 도착한 사람 치고는 매우 건강해요. 충치도 없군.”

“네?”

“의사들끼리만 통하는 오래된 조크니까 신경쓸 것 없어요. (^^) 그나저나 궁금한데, 지금의 그 몸이 진짜인가요, 아니면 커졌을 때의 몸이 진짜인가요? 약간 구조면에서 차이가 보이기는 하지만 지구인과 매우 비슷하네요.”

30대의 뭉실한 호떡집 아가씨 같은 인상을 풍기는 의학박사 닥터 잼은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그러나 예의에 벗어나지는 않을 만큼) 외계에서 날아온 방문객을 진찰한 뒤에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진짜예요. 하지만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이건...”

“하긴 당신의 전공분야는 그게 아닐테니까, 뭐 나중에 좀더 알게 되겠죠. 아 그리고, 혹시 금기사항이라던가 주의사항 같은 건 없나요?”

“그게... 아직 지구인과 생활해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요... 이 임무를 맡기 전에는 주로 제5은하의 변경 지역에서 폴리메바의 포획 훈련을 하고 있었고...”

유이는 아무래도 그들의 새 친구와 막힘 없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한숨과 함께 왠지 가벼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힘든만큼 배우는 것도 많을 거야.

“다 끝났어요. 운동이야 뭐 저 푸대자루들과 함께 다니면 매일 하는게 운동이니 특별히 지시할 건 없고, 뭔가 이상한 증세라도 나타나면 내게 알려줘요. 대원들의 건강은 내 책임이거든.”

바로 그 ‘푸대자루들’ 중 하나인 유이가 흘겨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진찰용 트라이코더를 거둬들이며 닥터가 쾌활하게 말했다.

라하세르가 감사를 표하려고 할 때, 허름한 의무실의 문이 빼꼼히 열리며 약간 지저분한 얼굴에 수수한 복장을 한 여자아이 하나가 해진 곰인형을 든 채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12-13세 가량 되어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왠지 웃음기가 없고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소름이 끼쳐왔다. 라하세르는 아이에게 지구인의 관습대로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아이가 별 반응 없이 문을 닫아버리자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 아닌가 하고 당혹해했다.

“미냐라고 해요. 이제 겨우 12살인데, 너무 불쌍한 아이야...”

“저, 제가 무슨 실수라도?”

“네? 아뇨, 당신이 잘못한게 아니에요. 저 아이의 눈앞에서 부모가 비참하게 죽었거든. 그게 아마 한 6개월 전의 일일텐데... 맞아요. 그 상자곽들이 하늘로부터 내려꽂히기 시작할 때의 일이니까. 저애 혼자 간신히 구출되었지만... 그 이후로 말도 안하고 웃지도 않고 저렇게 유령처럼 살아가죠. 아참, 유령이 뭔지는 아까 말했었죠? 아마도...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한 실어증에, 자폐증 초기 증세까지 있어서, 보면 볼수록 불쌍한 아이예요. 치프가 우연히 데려온 이후로, 대원들 모두가 친동생처럼 아껴주고 있죠.”

라하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의 핏기 없는 얼굴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이미 눈물마저 말라버린 것 같은, 슬픔도 기쁨도 고갈되어버린 듯한 그 눈을.

“자아 라하양, ...이렇게 불러도 괜찮겠죠? 그렇게 멍멍한 표정 짓지 말고 날 따라와요. 당신이 쓸 방을 알려줄테니까. 누추하지만... 지내는데 불편하지는 않을거예요. 물도 전기도 어떻게든 들어오기는 하니까. 게다가,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인데, 무너진 상가더미에서 주워온 화장품도 약간 있다구요!♥”

물론 라하세르에게는 화장품의 개념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아주 긴 설명이 필요했다.



그날 밤 치뤄진 파티는 그다지 성대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화기애애했다. 당직 근무자와 절대안정이 필요한 부상자를 뺀 거의 모든 대원이 참가하여 간만의 회포를 풀고 새로운 식구를 환영했다. 물론 이는 라하세르를 자기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절차이기도 했지만, 그동안의 지옥같은 나날로 인해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대원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는 피로회복제 역할도 하는 것이었다. 유트는 뒤늦게야 치프의 이런 속셈을 알고 혼자서 감탄하고 있었지만, 지훈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냉동고에서 꺼내 온 합성감자케익을 포크로 찔러대며 불만을 삭이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건 간에,”

지훈의 시선은 중앙 테이블에서 주로 유이와 닥터를 상대로 천진하게 웃고 떠드는 라하세르에게 박혀 있었다.

“...나는 저 사람을 믿지 않아.”

유트는 그런 17세 소년의 짜증을 묵묵히 받아들여주고 있었다.

그런 모든 소동을 뒤로 한 채 어메 치프는 남몰래 통로 밖에 나와서 넌-스모킹 배럴을 피우고 있었다. 지하기지에서는 공기정화상의 편의를 위해 연기가 나지 않게 만든 특수한 담배를 피우도록 규정되어 있다. 치프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하며 반짝였다. 마치 셸터에 가로막혀 이미 보이지 않는 밤하늘의 별들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믿음이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로군...’



같은 시각, 보곰3가였던 자리에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있던 벨제바이트의 파편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한자리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중앙부의 코어(핵)이었던 부분의 파편이 이상한 광채를 내며 다른 파편들과, 주변에 바스러져 있던 건물이나 기계의 잔해들까지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윤기 없는 청남색 비석들이 금속이 서걱서걱 긁히는 듯한 기묘한 소리를 내며 심하게 웅웅거렸다.

불길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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