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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06] 울트라하 익스트림 -THE 극장판- 2/3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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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SUSPICION




“한때는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어.”

유이는 휴게실에 설치된 ‘뭐든지머신’을 이용해서 지구의 악기에 대한 설명을 라하세르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뭐든지머신’은 홀로그램과 분자 결합기를 이용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물체를 재현해낼 수 있는 복제머신이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물체는 다시 원래의 ‘뭐든지분자’로 돌아가 머신의 버퍼 안에 저장된다. 원래는 교육용으로 사용되던 것이지만, 외계의 공격으로 인해 세상이 온통 엉망이 되어버린 지금의 시대에 와서는, 과거의 추억을 들여다보는 복고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한정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기계라고나 할까.

“...하지만 ‘거미집’이 우리 마을을 덮어버리고 부모님도 돌아가신 뒤로는 오직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야 했고... 어쩌다 보니 전공인 화학을 살려 폭발물을 만지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지?”

라하세르는 처음 들어보는 이국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유이는 잠시동안 말이 없더니 대답했다.

“지금은 모르겠어... 꿈도 희망도 예전에는 아주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어쩐지 모두 다 말라죽어버린 것 같아서 서글퍼져. 마치... 깜빡 잊고 물을 주지 않다가, 어느날 생각나서 다시 꺼내보니 이미 말라죽어 있는... 꽃나무같은 거겠지. 훗.”

라하세르는 건반을 두드리는 유이의 섬세한 손을 보며 말한다.

“...하지만 언젠가 평화가 돌아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아까 네가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도 하고 세계 곳곳으로 여행도 다니고...”

“...가능할까?”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면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희 세계에도 멋진 악기가 있겠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건 없어. 원리가 전혀 달라서... 그래서 나는 이 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이건 전 우주에 오직 한 곳, 이 지구에만 있는 음악이야. 그리고 어쩌면 네가 바로 그 음악을 이어 나가는 마지막 사람이 될지도 몰라.”

“...마지막 음악이라...”

유이는 태연한 얼굴로 또 다른 악보를 불러내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연주하는 손에 왠지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하면 극성이 변해서 자류(磁流)가 흐르는 거군요?”

“맞아요. 잘만 응용하면 레일건의 추진기에도 쓸 수가 있고, 뭐 하여간 무궁무진하죠. 당신의 고향에서는 본 적 없는 건가요?”

“우리는 발상 자체가 좀 달라서...”

먼 세계에서 온 방문객을 상대로 자기의 관심 분야에 관해서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은 아무 때나 찾아오는 기회는 아니다. 더욱이 그 방문객이 어느정도 자신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고 자기의 실력에 감탄하기도 할 때에는 더욱 신날 것이다. 유트는 자기가 혹시라도 현대의 가전제품 제조업자 앞에 서서 돌도끼의 제조 비법에 대해 떠들어대는 선사시대의 털복숭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곧 이야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라하세르의 고향인 SM87성운의 과학 수준이 발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지구인류의 그것보다 떨어지거나 오히려 지구인류가 생각해냈는데 그쪽에서는 아예 연구조차도 되지 않은 것들도 많이 있었다. 게다가 라하세르 본인은 과학기술에 대해 어느정도 기본은 되어 있었고 설명도 잘 이해하는 편이었지만, 전공이 과학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트가 오히려 선생님같은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과학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학문이나 예술도,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하나의 길만을 따라서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기술이 현재의 기술이 있게 하는 밑바탕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옛날의 원시인이 텔레비전을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통의 현대인도 돌도끼를 원시인만큼 정교하게 만들 수는 없다. 둘 다 자기네의 시대에서는 최고 수준의 기술이며, 필요에 따라서 생겨난 것이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툴툴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는 지훈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하세르는 몇 시간 동안 유트의 발명품들을 구경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건 뭐하는 거죠? 물뿌리개라는 거?”

“아, 그건 함부로 만지면 안...!”

“어머나, 죄송해요. 이렇게 망가지다니...”

“아니 괜찮아요. 어차피 폐기할 거였으니까. 그나마 효과는 있었군.”

“효과요?”

“이건 강력한 자계(磁界)를 형성해서 몇분동안 주변의 기계를 멈추는 건데...”

유트는 설명을 해 주면서, 문득 이걸 고쳐서 뭔가에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에 쓸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안녕? 나는 라하세르, 라하라고 불러도 돼. 예쁜 인형이구나. 내가 좀 봐도 될까?”

그러나 미냐는 경계하는 눈빛을 띠고 곰인형을 등 뒤로 감췄다.

“부모가 남겨준 유일한 끈이니...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겠지. 억지로 말문을 열어보려 할 필요까지는 없어.”

유이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며 충고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어딜 쳐다보는지 모를 눈을 하고 있는 미냐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라하세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애와 뭔가 얘기를 해 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냐는 예쁜 얼굴을 하고 있구나. 활짝 웃으면 더 예쁜 얼굴이 될 텐데. 응, 웃을 줄 몰라? 자아- 한 번 따라해볼래? 이렇게-”

“................”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술 양 끝을 코믹하게 말아올리며 하얀 치아를 씨익 내보인 채 두 손을 볼 옆에다 대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론 아무 반응도 얻지 못했지만.

“그럴 것까지는 없어. 한 심리학 한다는 우리 닥터도 쟤 말문은 열지 못했는걸. 스스로 깨어나기 전까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아마도 포근히 감싸주는 것밖에는 없을 거야.”

미냐의 두 어깨를 놀라지 않도록 살며시 감싸안으며 유이가 소근거렸다.

“미냐, 우리 밖으로 놀러갈까? 오늘은 간만에 날씨가 좋아서 달님도 보여.”

‘달님’이라는 말에 놀란 듯 미냐가 약간 움찔하더니, 감정 없는 눈으로부터 몇 방울 눈물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 얼굴은 여전히 중학교 미술시간에나 쓰던 석고상을 잘못 갖다놓은 듯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런... 미안하다, 미냐. 그 말은 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내가 그만..”

이슬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라하세르가 갑자기 미냐의 앞으로 다가가서 무릎을 꿇더니 자기의 왼쪽 뺨을 소녀의 오른쪽 뺨에 살며시 갖다대고는 놀라는 유이의 표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 눈물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뭐라고 해야 좋을까, 정말로 모르겠지만... 미냐, 난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네게서 무슨 얘기를 듣거나 뭔가를 받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너와 친하고 싶은 거야. 너를 내뜻대로 웃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웃는 걸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는 거야. 단 한 번만이라도... 닥터한테서 들었어. 네가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고... 하지만 미냐, 슬픔이란 건, 그렇게 하면 더욱더 커지기만 하는거야. 네 속에 가두어 두고 키우기만 하면...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너를 삼켜버릴지도 몰라. 그건 싫지? ...그렇다면 누구에게든 손을 내밀어 봐. 꼭 내가 아니라도 좋으니까. 꼭 지금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나, 기다릴게, 꼬옥.”

라하세르의 얼굴은 어느새 자신의 눈물과 미냐의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냐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유이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태까지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여전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사적인 감정은 임무를 위해 잠시 묻어둘 수 없겠나?”

어메 치프가 지난밤 벌레물린 자리에 군용 물파스를 바르면서 지훈을 타이르고 있었다. 벌써 겨울이 다 되어가지만 동면할 시기를 놓친 잡벌레들이 지하기지로 파고들어 대원들의 신선한 피를 노리고 있어서 골치아픈 시기였다. 때로는 외계인의 위협보다 자기 별 생물의 위협이 더 무서울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또한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불화가 더 무서울 때도.

그래서 치프는 때늦기 전에 예방조치를 해 두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훈은 그러한 치프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감정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트레인저는 모두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게 제 신조니까요.”

‘스트레인저’는 이 시대에 유행하는, 외계인을 가리키는 속어였다. 어느날 갑자기 남의 집에 뛰쳐들어와 온통 묵사발을 만들어놓고 사라져버리는 보기싫은 불청객들, 대체로 그러한 외계인만을 경험해 온 현대 지구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풍조이기도 했다. 그 단어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미지의 것에 대한 적개심과 두려움, 그리고 폐쇄적인 지구중심주의의 사상이었다. 라핀성인의 침략 이후, 이러한 사상은 생존자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고, 앞으로도 수년간 존속할 전망이었다.

“자네의 삼촌과 누나가 건전성인(健全星人) 침공 당시 희생자라는 것은 아네만...”

“그럼 더 이상 뭘 바라십니까.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치프의 체면을 봐서라도 대놓고 싸우는 일은 안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위해 제가 뭔가를 해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이건 이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구요.”



치프의 골칫거리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바로 안전지대로 대피하여 이리저리 명령만 내리는 주제에 현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배려도 없는 정부고관들의 입심이었다.

“자네의 보고서는 이미 MAAX쪽에 전송했고, 이후의 행동지침도 신청해두었네.”

M.A.A.X.(Military Alliance Against eXtra-terrestrial)란, 라핀성인의 ‘대투하(大投下)’ 이후 각국정부가 1차 연합공격을 가했으나 실패한 뒤에 2차 공격의 준비를 위해 결성된 ‘외계 침공 대비 군사 동맹’을 가리킨다. RATS조직 또한 이들의 총괄적인 지휘하에 들어가게 되어 있고, 그 명령은 전시상의 것인만큼 절대적이라 해도 좋았다.

“...그런데 말이지, 그 라하세르라는 조정자는 신용할 수 있겠는가?”

모니터의 노이즈 가득한 화면에 비친 김욱동 장관의 얼굴이 흔들리고 있었다.

“좋든 나쁘든 우리에게 가담해 온 아군이니 믿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녀가 자네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내린 판단인가?”

“어떤 답변을 듣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우리 임시정부 각료회의에서는 정규 방위군 병력의 재편성에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있는 모양일세. 그동안 자네들이 방패가 되어줘야 하는만큼 공연히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외계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는 것은 경솔한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네만, 그녀가 만약에 그 라핀성인이라는 자들의 앞잡이로 자네들을 안심시키고 내부로부터 와해시키기 위해 잠입한 것이라면, 아니 애초에 그런 세력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바로 그녀의 동족들이 우리를 침략한 자들이라면 어떻게 할 텐가?”

“그것은 위험한 가정입니다. 아직 우리로서는 정보가 거의 없는만큼 일단 그녀의 이야기를 믿어보지 않으면...”

“확실히 위험한 가정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녀를 믿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 아닐까 싶네. 신중히 결정하게나.”



통신이 끝나서 텅 빈 모니터를 한동안 들여다보며 치프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니, 어느 사이엔가 라하세르가 굳은 표정을 짓고서 그쪽에 서 있었다.

“이런, 노크도 할줄 모르나? 아아 실례, 자네에겐 익숙한 관습이 아니겠지.”

“...높은 분들이 제 도착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나 보군요.”

“다 들었나? 사실은 좀 그런 편이라네. 원래 당하고만 살던 사람은 남을 잘 믿지 못하지. 특히나 높은 사람들이 더 그럴걸. 언제 자리를 뺏길지 두려우니까.”

“치프는요?”

“나는 자네를 믿고 있네. 단지 내 생명 때문만은 아니지.”

“그렇게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감이라고나 할까? 처음 자네의 눈을 보았을 때, 아아 이친구라면 믿을 수 있겠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기에, 한 번 도박을 걸어보기로 한 걸세. 나의 운에.”

“단순한 느낌만으로? 그건 비논리적인 일이 아닙니까?”

“모든 것이 논리에 따라야만 한다면, 왜 자네는 미냐를 도와주려고 그렇게 애쓰는 건가? 유이에게 다 들었네.”

치프의 장난기 어린 반문에 라하세르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웃음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치프.”

“응?”

“감사합니다. 믿어주셔서.”

어메 치프는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책상 위의 단말기로 눈길을 돌렸다. 그것이 빨리 꺼져버리라는 손짓이었는지 잘 가라는 손짓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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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E SACRIFICE




라하세르가 지구에 온 지 약 일주일 후, ‘거미집’ 해체작업에 여념이 없던 RATS 지상부대와 방위군 공병대의 앞에 또다시 새로운 괴수가 나타났다. 온몸이 복날에 옆집개가 먹다버린 소뼉다귀처럼 하얀 칼슘-규소 복합체로 이루어져 있는 전골괴수(戰骨怪獸) ‘본데드본’은 30분동안 사방을 뛰어다니며 난동을 부렸지만 신속히 출동한 RATS항공대의 요격과, 신비한 능력을 지닌 거대(巨大) 라하세르의 활약으로 출현 45분만에 완전히 격퇴되었다. 누구의 발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전투형태에는, 울트라의 전사 라하라는 의미로, ‘울트라하’라는 코드네임이 붙었다. 이제는 대원들도 그녀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버릇이 들어서, 완전히 그들의 일원으로 여기는 태도였다.



그러나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괴수의 최후에 어메 치프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찍이 이렇게 간단했던 적은 없었는데 뭔가 이상하군... 녀석들이 이렇게 호락호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뭔가 다른 계략이 있는 것은...?”

“치프는 노파심이 너무 강해서 탈이에요. 뭐 별다른 일이 있을려구요.”

간만에 지뢰 없이도 해결하게 되자 할 일이 없어져 허탈해진 유이가 말했다.

“걱정할 일은 그것 말고도 산더미니까, 어서 기지로 돌아가죠. 오늘은 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거든요.”

역시 의심이 가기는 했지만 곧 떨쳐버리고 남들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기분에 잠긴 유트가 찬성의 뜻을 표한다. 일주일 전부터 손보고 있던 자계 발생장치가 드디어 완성될 때가 된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작업장으로 돌아가서 몰래 완성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 모두 철수한다. 단 지상부대 3조는 공병대를 지원하여 ‘거미집’의 해체에 박차를 가하도록! 나도 여기 남아서 지휘하겠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하세르는 일행과 약간 떨어져서 기지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지상부대의 퀀텀지프는 왠지 덜컹거리는 느낌이 싫어서 차라리 걸어가기를 택한 것이었다. 물론 안전한 철수를 위해서 뭔가 이상이 없는지 만전을 기하기 위해 가장 뒤쪽에 남아 척후 역할을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인간 사이즈로 있을 때에도 보통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이럴 때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아마도 지훈의 적대적인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오호, 이런! 죽음의 상이 보이는구나------------- 죽음의 상이!”

그녀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아보자 그곳에는 요상한 거적대기를 두르고 머리에는 요란한 깃털장식을 한 나이든 주술사가 길 한구석에 서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커다란 항아리 안에 온갖 약초와 탕약을 달여가며 과장된 몸짓으로 점을 치고 있었다. 항아리 아래쪽에는 ‘靑雲じじい’라는 팻말이 달려 있었으나 라하세르는 그 글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흥미를 느낀 라하세르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질문했다.

“날보고 한 소리예요?”

“그럼 여기에 아가씨 말고 또 누가 있남?”

“하지만 난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닌데요.”

“누가 아가씨 본인이 죽는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 아가씨는 아주 먼 곳에서 왔지?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절친한 친구가 한명 죽을게야. 이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못 막아.”

“내가 믿지 않는다면요?”

“믿든 안믿는 관계없어.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게 마련이니까. 불길한 일이고 하니 복채는 안 받겠어. 뭐 굳이 준다면야 사양은 안하겠지만. 아니 그런데 저게 뭐지???”

라하세르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보았으나 별다른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뭔가 희미한 그림자가 얼핏 움직인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주술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라하세르는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고, 기지 반대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어째 예감이 안좋더라니. 아까 그놈은 미끼였나......”

어메 치프와 공병대원들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마라톤 코스를 달리듯이, 죽을힘을 다해 안전지대를 찾아서 달려가고 있었다.

일주일전에 분명 쓰러졌을 전파괴수 벨제바이트의 잔해가 설명할 수 없는 조화로 인해 더욱 강력하고 거대한 장파괴수(長波怪獸) 벨제바이트-S(Spire)로 재생되어 나타난 것이다! 건물의 콘크리트와 철근까지 흡수하여 더욱 묵직하고 금속질에 가까워진 벨제바이트-S는 강력한 자장을 발산하여 기지로의 무선통신을 방해하면서 거대한 몸체로 그들을 깔아뭉갤 듯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연꽃 위에 도마뱀이 붙어있는 듯 했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보다 인간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진화한 형태였다. 게다가 기분나쁘게 생긴 네 개의 날개까지 달려 있어서 비록 고공비행은 못 하지만, 땅위로 가볍게 떠서 활공하는 재주를 갖추고 있었다.

어메 치프는 녀석의 시각을 혼란시키기 위해 지그재그로 도주로를 달려가고 있었지만 녀석은 초음파를 발산하여 물체의 위치를 잡아내는 방법으로 약간 퇴화된 시각을 보정하고 있는 듯 했다. 날카로운 열여섯 개의 발톱이 길바닥에 쓰러진 운없는 공병대원을 처참하게 난도질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시체의 수는 늘어가고, 치프를 따르는 동료의 수는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갔다. 그나마 치프가 솔선하여 미끼가 되어준 덕분에 공병대원의 1/3은 안전지대로 달아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치프는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죽을 각오를 하고 DD블라스터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블라스터의 막강한 D&D광선(Delete & Disposal Beam)도 괴수의 발톱 일부를 상하게 할 뿐, 전신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2단계 습격이라. 진작 생각해냈어야 하는건데... 녀석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전략을 바꿀 거라는 사실을 말이지... 이런 젠장;’



바로 그때였다.

“치프! 피해요!”

어디선가 나타난 라하세르가 공병대의 시체더미에서 찾아낸 드릴건을 집어들고 그쪽으로 달려와, 정확한 솜씨로 괴수의 더듬이 부분에 일격을 가했다. 바로 더듬이가 괴수의 초음파 발생부였던 것이다. 괴수가 감각에 혼란을 일으켜 잠시 멈칫하는 순간을 틈타서 어메 치프가 옆으로 돌아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이구 이런, 라하양이 이렇게 반가울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어서 탈출을!”

“사람이 하나 늘었다고 해도 어떻게 탈출을 할지는 여전히 막막한데. 저놈은 보통 녀석이 아냐.”

“기지에 연락하죠.”

“어떻게? 통신기는 녀석 때문에 불능이... 아니 그럼 설마!”

라하세르는 심호흡을 하고 변신에 사용하는 메탈부채를 꺼내어들고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마음과 마음의 교류, 울트라인에게는 이미 보편적인 기술이었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텔레파시인가!”

“...이제 됐어요. 유이와 유트, 닥터에게 알렸으니 누군가는 지원군을 보내겠죠. 어서 저쪽으로 도망쳐요. 녀석은 그동안 제가 막아볼게요.”

“하루에 울트라하를 두 번 보게 될줄이야. (^^)”



그러나...

라하세르가 하늘을 향하여 마법의 부채를 치켜들고 일련의 동작을 취하며 변신을 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와는 달리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안돼, 어, 어째서......?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러는 사이에 감각을 회복한 벨제바이트-S가 그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라하세르는 부채살 한가운데에 감춰져 있던 액정 표시창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지구인은 이해할 수 없는 문자로 간단한 메시지가 나타나 있었다.

“...소울 배터리 재충전 요망... 지구시간으로 48시간 필요... 말도 안돼!!! 이렇게 빨리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리다니! 하필이면 이럴 때!!!...”

“그러기에 가전제품은 사용하기 전에 설명서를 잘 읽어봐야 한다니까.”

눈치없는 어메 치프의 농담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들었어도 이해를 못한 것인지 여전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라하세르는 부채를 끌어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괴수가 일으키는 흙먼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뜻밖의 사태에 직면한 충격이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치프는 그런 그녀를 일으켜세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봐, 여기서 주저앉으면 어떡하나, 빨리 뛰어야지!”

“......이젠 끝장이에요. 이게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못 하는...”

그때까지만 해도 생글거리고 있던 어메 치프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다그친다.

“약한 소리는 집어치워! 연방이 보낸 조정자가 겨우 이런 수준이었나? 내가 믿음을 주었던 그 라하세르는 어디로 간 거야! 이런 일 가지고 풀이 죽어서 주저앉아가지고 어떻게 인류를 보호하겠다는 건가? 처음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의 그 라하세르는, 그 기품있고 용기있는 전사는 가짜였단 말이야?”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라하세르가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본다. 치프의 얼굴은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용기와 정열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에는, 이전에 그가 그녀를 믿는다고 했을 때 떠올랐던 바로 그 빛이 감돌고 있었다.

신뢰와 격려의 빛이.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저는 아무것도... 치프라도 먼저...”

치프가 그녀의 손에서 부채를 빼앗아들고는, 펼친 부채로 그녀의 뺨을 세게 올려붙였다. 끝내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는 라하세르.

부채를 다시 그녀의 손에 쥐어주며 치프는 말한다.

“아직도 모르겠어? 중요한 것은 초능력이 아니야. 자네의 자신감이야!”

“.................”



괴수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치프가 여전히 기운을 잃고 있는 라하세르를 부축하여 달아나려고 하는 순간, 날카로운 발톱이 허공을 가르고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바로 그때, 작은 폭발 몇 개가 일어나고 괴수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제트 바이퍼 편대가 날아와 요격을 개시한 것이다. 치프는 라하세르를 이끌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건물 앞으로 피해서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거참, 빨리도 오는군 저 친구들.”

“..................”

뜻하지 않은 하늘로부터의 공격에 벨제바이트-S는 다소 자신을 잃은 듯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제 치프의 구출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에 편대를 지휘하던 지훈은 슬슬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자 이제 저녀석이 찍소리 못하게 한방 날려주도록 할까. 스미스=제퍼슨 고압 미사일이 불꽃을 뿜으며 날아간다!

그런데 그때,

후퇴하던 벨제바이트-S가 커다란 날개를 휘둘러 만만찮은 위력의 폭풍을 발생시켰고, 그에 밀려 괴수 쪽으로 발사한 미사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바로 치프와 라하세르가 피신해 있는 건물 위쪽으로!

미사일의 유폭에 의해 바스러진 철근 콘크리트와 석고, 대리석의 파편이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덮칠 듯이 쏟아져 내린다. 치프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기 옆에 있던 라하세르를 떠밀어 안전한 곳으로 보내지만...

“치프! 안돼애애애애애애애애-----------------------------------------!”

라하세르의 뇌리에 주술사의 예언이 비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괴수는 어디론가 바람같이 후퇴해버리고, 곧이어 달려온 닥터 잼의 구급대가 치프와 라하세르를 구조하여 기지로 복귀하였다. 치프의 돌연한 부상 소식에 기지 전체가 침울한 분위기에 빠졌다. 닥터의 간절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이미 때가 늦었다는 진단이 나왔을 때에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치프,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도...”

동정론이 대다수인 기지 대원들의 입장과는 달리, 지훈은 싸늘한 눈초리로 그런 라하를 지켜볼 뿐이었다. 비난도 질책도 없이 그저 차가운 눈동자로.

만신창이가 된 채 침대에 누워서 희미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던 치프가 잠시나마 다시 의식을 회복하여 라하세르를 부른 것은 다음날 새벽 3시였다.

“......잠을 못잔... 모양이군. 눈이 퀭한... 걸 보니.”

자기가 죽어가는 마당에 남을 걱정해 주는 그 황당한 자상함에 라하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 말을 들어봤자 죄책감이 더욱 깊어질 뿐인데.

“......아무래도... 내가 내일... 아침 해를 볼 수 있을...는지, 자신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한 마디만...”

라하는 눈물을 꾹 참고 그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대체 무슨 말을? 치프, 무리하면 더 나빠질 뿐인데, 그런 것까지 무릅쓰고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내가 만약... ...게... 되면 자네가, 자네가 RATS를 맡아주게... 어려운 부탁일까?”

라하는 너무나도 황당하고 갑작스러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치프는 돌더미에 깔리더니 머리마저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

“......당황스러우리라는... 건 알지만, 이렇게 ...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하던 나는... 자네를 ...기 때문일세.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자네는 내가 예전에 알던... 어떤 사람의 눈빛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지. 그녀는... 아니, 아무튼... 내가 자네를 믿듯이 자네가 나를 믿는다면, ...나의 직관을 한 번만 믿어주게. ...그리고, 자네 자신을... 자네 자신을 믿어보게. 누구보다도.”

라하는 아무 말도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눈물이 이불을 적시는 것도 모른 채. 치프는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희미하게 쓰다듬다가 손을 떨구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자네와의... 일주일은...”

심전도 그래프가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닥터가 안경을 벗고 눈가를 훔쳤다. 다른 대원들 또한 침통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라하세르는 무얼 해야 좋을지 모른채 그 자리에 무너져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미냐는 간이 샤워장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위로부터 쏟아져내리는 샤워기의 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물은 그녀가 들고 있던 곰인형의 단추로 만든 눈에도 똑같이 흘러내렸다. 사람과 곰인형이 함께 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냐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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