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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5] 울트라하 S.O.L. #3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2:35
 



“어, 이건 거녀양 앞으로 온건데?”

PETS의 각 대원들 앞으로 배달된 우편물을 사무국으로부터 받아와 분류하던 선림이 이사람에게도 이런게 오는가 싶은 표정으로 문제의 소포를 집어들고 외쳤다. 마침 반대편에서 차트 정리를 돕던 동거녀가 그 소리를 듣고 잽싸게 달려왔다.

“아, 고맙습니다. 제게 오는거 맞아요.”

“그런데 거창하게도 국제우편이네... 발신지가 북아메리고 쪽인데? 그곳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아니면 무슨 통신판매라도?”

“별건 아니고 그냥 유학간 친구가.”

어느새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고 거녀의 등뒤에 나타난 미나가 구슬리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애교어린 눈빛으로 말한다.

“거녀양~ 어서 풀어봐야지~? 혹시 먹을 거라면~ 설마 이 헐벗고 굶주린 선배들을 모른체 하지는 않겠지이이~? 그렇지 응~~~???”

“그러고보니 제법 묵직한데, 뭔지는 몰라도 같이 한번 봐.”

거녀는 프라이버시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차마 거절하지는 못한 채 포장을 풀려고 했다.

“안돼-----------------ㅅ!!! 탄저균이 들어있으면 어쩔거야? 일단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장갑을 낀 뒤, 철저한 역학조사를 거쳐서 문제가 없으면 그때 개봉하도록!!!”

라운지에서 대원들의 커피를 손수 끓여 운반해 오던 무휼박사가 히스테리컬하게 외쳤다.

“그도 그렇네요. 누가 하죠?”

“뭘 새삼스레 묻고 그래? 주인이 해야지.”

거녀가 돌아보니, 그들은 이미 사무실 밖으로 도망가서 염주와 성경을 들고 기도 중이었다...

“명복을 빌어줄게. 그동안 즐거웠어~”

“저세상에 가도 내꿈에 나타나지마~”

거녀는 한숨을 푹 쉬고 검사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탁자 위에 켜놓은 MDA에서 시사 뉴스가 흘러나왔다. 화면에는 불타는 이국의 거리와 화염을 등지고 선 희미한 형체가 비쳤다.

“...에 분노한 백인 폭도들에 의해 일어난 방화와 소요가 어느 사이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초인과 괴수의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저께 밤에 클리블랜주 아말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현재까지 명확한 원인과 경과가 밝혀지지 않아...”

거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스포이드를 떨어뜨릴 뻔했다.

소포의 발신지는 아말감시(市), 소인은 어제 날짜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울트라하 외전 「SISTERS OF LIGHT」

제 3장 하지메Hazime




아메리고 합중국, 클리블랜주, 아말감 시, 메이데이 331번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맞으면 매우 아플 듯한 돌멩이 여러 개가 카페 「아기낙타Cubby Camel」의 유리를 깨고 들어와 테이블 서너 개에 흠집을 내고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사거리 쪽을 향하고 있는 쇼윈도 위에는 이미 불쾌한 색깔의 스프레이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와 구호 같은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갈겨져 있었다. 며칠 전에 두 번째 수난을 당했던 것을 고쳐놓자마자 또 이꼴이다.

라자드 엘 카산은 식기를 닦던 손을 말리지도 않은 채 앞치마 바람으로 황급히 가게 문을 열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주변에는 새끼고양이 한 마리도 없었다. 방금 원동기를 몰고 달아난 듯 역한 가스 냄새와 몇 개의 바퀴자국이 길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마에 옆으로 누운 내천(川)자가 그려질 만큼 심하게 인상을 쓰며 거칠게 문을 닫고 카운터 뒤로 돌아왔다.

짐작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손쓸 방법이 거의 없어서 기분이 엉망이었다.

“또 그 사막의 도적떼같은 녀석들 짓이냐?”

“네, 카바르 아저씨. 여기 사람들 인정머리는 진짜 사막보다도 더 메말랐나봐요.”

주인 아저씨는 유리에 거꾸로 비치는 'HARAB GO HOME!'이란 문장을 찌푸린 검은 눈으로 바라보며 뇌까렸다.

“...여기가 우리 집인데 어딜 가란 소린지 원? ...평소에도 우리들을 비뚤게 보는 녀석들은 있어 왔다만, 지난번 그 사건 이후로 잘 지내던 사람들마저도 우릴 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아서 영 불안하구나. 자디, 넌 교습소 갈 시간이니 뒷정리는 내게 맡겨라. 어차피 오늘은 손님도 별로 없을 것 같으니까.”

“죄송해요. 빨리 돌아와서 남은 일 도와드릴게요. 그럼.”

“약속 꼭 지켜야 해.” (^^)

라자드는 앞치마를 벗어놓고 허름한 웃옷을 걸친 뒤 <2급 중장비 운전․정비>라고 적혀있는 서적류를 가방 속에 챙겨넣고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나가기 전에 카운터 뒤에 놓여있는 터키식 오르골을 바라보고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엄마, 다녀올게요.”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지름길로 질러가야겠어.’

별로 인적이 없는 샛길로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옆의 나무 담장을 깨고 몇 대의 불법개조 바이크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 나왔다. 헬멧으로 얼굴을 감춘 운전자들은 위협적인 태도로 그녀를 둘러싸고 진로를 방해하면서, 뜻 모를 비속어와 폭언을 퍼부어 대었다. 반쯤 겁에 질린 라자드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그들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흙먼지와 배기가스에 숨이 막혀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를 에워싼 패거리들은 각각 나이프와 쇠사슬, 메리켄, 각목 같은 흉기를 내세우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라자드는 그 패거리들이 웅얼거리는 소리들 중 ‘교역센터...비행기...더러운 하랍인들...무한한 정의...심판...’이라는 얘기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그것이 어째서 자기를 습격하는 이유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특정한 의미보다는 어떤 정해진 리듬에 따라 되풀이되는 듯 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여 다시 일어서서, 가지고 있던 비취빛 웨스트팩 가방을 방패 삼아 머리 위로 휘두르며 저항하려 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패거리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들은 숨소리도 인기척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마치 일사불란한 병정개미의 무리처럼.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녀의 정신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볼 여유를 잃고 있었다. 뒤쪽에서 둔탁한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고 그녀는 아픔에 절규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리드미컬한 일렉기타의 소리가 스폰지같은 공기를 부드럽게 가르고 그들 주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낮고 애잔한 발라드조로 시작한 그 연주는 차차 격노의 파도를 타고 복잡한 이중나선을 그리며 점차 높은 음계로 옮아가더니, 거칠고 빠른 프로그레시브 락으로 바뀌어 듣는 이의 혼을 반쯤 빼놓는 신묘한 트랜스trance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공격을 가하려던 패거리들은 물론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라자드까지도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태양의 역광(逆光)을 받아 그 모습이 잘 구분되지 않는, 어떤 사람의 우아하고 침착한 자태가 가까운 인가의 지붕 위에 서 있었다!

“타앗!”

그 사람이 딛고 있던 지붕을 박차고 올라 눈부신 태양을 등지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여어, 남이 연주하는데 폭력을 휘두르다니 무례하다고 생각지 않아?”

들고 있던 기타를 등에 맨 채 땅에 사뿐히 내려선 연주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패거리들을 둘러보았고, 그들은 라자드를 둘러싼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연주자 쪽으로 달려들어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라자드는 그제서야 연주자가 검은 중절모에 검은 가죽재킷과 검은 캐주얼 바지를 입고 남색의 반투명 선글라스를 낀 연갈색 단발머리의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고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패거리들은 연주자를 에워싸고 한꺼번에 달려들었으나 연주자는 날쌘 동작으로 그들의 공격을 하나하나 봉쇄하면서 물 흐르듯 유연한 킥과 펀치의 조합으로 그들을 한명씩 쓰러뜨려갔다.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상대는 그 힘을 역이용하여 제풀에 거꾸러뜨리고, 기술로 덮쳐오는 상대는 그와 대등한 레벨의 기술로 응수하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결정타를 먹이는 식이었다.

결국 라자드를 포위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패거리들은 10분 안에 모두 쓰러졌고 무사한 자들마저도 뭔가의 명령을 받은 듯 머뭇머뭇하며 달아나 버렸다. 라자드는 바로 그 순간 쓰러져 있던 패거리들의 그림자가 마치 살아있는 듯이 슬금슬금 움직이며 한곳에 모여들어 땅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연주자가 다가와서 라자드의 손을 잡고 일으켜세우려 했다.

“괘, 괜찮아요. 혼자서 일어설 수 있어요. 도와주셔서 고맙...”

“타협했나?”

“...에?”

“끝까지 싸울 수는 없었던 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죠? 불가항력이었어요. 당신도 어떤 상황인지 봤잖아요?”

“좀더 생각을 제대로 했었다면 싸울 수도 있었을 텐데!”

“구해준 것은 감사하지만요, 훈계를 들을 생각은 없어요. 나는 당신같은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니까, 그렇게 싸울 수 없었던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나도 좋아서 당한 건 아니라고요.”

“꼭 나같이 싸울 필요는 없겠지. 너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낼 수는 없었을까?”

“가르치려 들지 말아요! 싸우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는 거잖아요. 게다가, 우리가 싸워야 하는 건 눈에 보이는 저런 녀석들만이 아니라고요. 생활 구석구석에, 모든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매일같이 우리를 옥죄는 것이 하나씩은 존재하죠. 그 모든 것과 싸운다는 건 너무도 무모한 일 아닐까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래라저래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다른 볼일이 없다면 그만 가보겠어요. 하지만 나중에 저희 카페에 오시면 보답으로 석류술 한잔 정도는 드릴 수도 있겠네요... 앗, 왜 이러세요!”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말은 잘도 하는군. 가만히 있어봐. 덧나도 난 모르니까.♡”

그녀는 한 손으로 라자드의 어깨를 꽉 잡고 머리의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허리춤의 포켓에서 지혈제와 소독약, 붕대를 꺼내어 능숙한 솜씨로 응급처치를 해 주는 것이었다. 라자드의 갈색 얼굴이 홍당무가 된 것을 보고, 중절모의 여자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강요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녀석들은 반드시 다시 온다. 그때도 누가 지켜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 노림받고 있는 하랍계 주민은 너만이 아니니까.”

그제서야 아까의 ‘그림자’를 기억해낸 라자드는 뭔가 물어보려 했지만 이미 연주자는 등을 돌리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을 맞아가며 거리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묘한 사람이었어. 치료도 받았으니 이젠 나도 가볼까.’

그러나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차 몇 대가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면서 그 주위에 멈춰섰고, 경관 몇 명이 달려나와 쓰러져 있던 용의자들을 상한 푸대자루처럼 호송차에 꾸역꾸역 밀어넣고 출발했다. 그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라자드에게 검은 양복의 키큰 남자가 다가와서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대 테러 특수기관의 윈드라는 사람입니다만,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오늘 수업 듣기는 다 틀렸어..............’ (-_-)



“그런 벼락을 맞을 녀석들이 있나!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로구나.”

“정말로 그때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큰일날 뻔 했죠. 얼마나 놀랐는지.”

“자디, 전부터 하려던 얘기다만... 역시 밖에서 일하는건 너무 위험해. 특히나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차라리 중장비 기사는 포기하고 이 카페를 물려받아 경영하면 어떻겠니? 나도 나이가 나이인만큼...”

“아저씨, 성의는 감사하지만요, 저는 역시 커피포트보다는 크레인에 더 흥미가 있어서요.”

“나도 알긴 안다만... 너희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을 좀 해 보렴.”

라자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 얘긴 그만하죠. 아 잠깐만요. 손님이 오셔서 좀 보고 올게요.”

메뉴판과 식기를 들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노인은 탐탁치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어.”

유연하게 뻗은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모자챙을 올려붙이며 그녀가 미소지었다.

“?! - 정말로 올 줄은 몰랐는데요.”

“나는 공짜를 좋아하거든♡ 여기 테킬라하고 스시 정식. 술은 온더락으로.”

“뻔뻔하기도 하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참, 아직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네요? 나는 라자드, 친구들은 자디라고 불러요. 그쪽은?”

“하지메.”

“니프티에서 오셨나요? 어쩐지 초밥을 찾더라니.”

“아니, 약간 사연이 있어.”

그때, 불독같이 생긴 키작은 백인 중년이 일련의 패거리를 이끌고 가게로 들어왔다.

아저씨의 환하던 얼굴에 방금 구겨 뭉친 원고조각처럼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한편 관할 경찰서의 임시사무실에서는 W.A.T.C.H. 소속의 인스펙터 윈드가 특별국제회선을 통해 나우민국의 유성대장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는 중이었다.

“이상이 피해자의 진술 전부입니다. 그 ‘그림자’가 사라진 이후 용의자들은 곧바로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일부는 깨어났어도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라면, 전부 잠재적으로나마 상당한 민족주의자 기질이 있어서 하랍계 이주민들에 대한 반감이 꽤 컸다는 것과, 동일 교회의 신도라는 것 정도입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이라, 뭔가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는 어떤 것이 개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비싼 국제통신비 물어가며 저희들에게 연락을 취하신 건 그 때문에?”

“어차피 공금에서 나가니 난 손해볼 일도 없고 해서요.”

“악덕 공무원이시군. 말씀하신 사례가 그곳에서만 일어나고 있나요?”

“아니 사실은, 이 지점을 중심으로 점점 북부 아메리고 전역으로 확대되어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암시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이 주로 폭도화되어 특정 소수집단에 테러를 가하는 겁니다. 문제는 그들이 평소에는 전혀 그런 일과는 상관없는 일반 시민들이라는 것이죠.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았거나 뭔가 사상적, 종교적 배경이 갖춰져 있는 확신범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일전의 교역센터 사건으로 인한 민족감정의 과다성향만이 공통적이죠. 뇌파 검사 결과 그들의 뇌 자체에 뭔가가 영향을 주어 평소에 잠자고 있던 감정을 분출시키게 한 듯 합니다만, 아직 그게 뭔지는 밝히지 못했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일이로군요. 아 잠깐 실례. 베팅한 경주말이 선두에 섰어요!”

“경마장?! 이번에는 말과 관련된 외계의 침략입니까?”

“아니 단순히 휴일을 건전하게 보내기 위한 취미라는 것이죠 음하하.”

“.........................”

윈드는 자기 돈이 아님에도 통신비가 왠지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종료할 때가 된것 같군요. 그쪽도 행운을 빕니다. ...아, 웨슬리, 뭔가?”

다른 회선의 연락을 받은 윈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수화기를 든 채 앉은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섰다.

“인종 폭동? 알았어, 곧 가겠네.”



“그 얘기는 전에 다 끝나지 않았던가요, 그린백 씨? 아무리 천금을 준다고 해도 이 건물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목좋은 땅을 늘려서 투기에 이용하고 싶겠지만 난 이곳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이곳은 나뿐만 아니라 자디의 모친에게도 소중한 곳이니까요.”

카바르를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난쟁이 그린백이 말했다.

“그것도 당신네 알라의 뜻입니까?”

“장사는 장사고 종교는 종교, 인정은 인정이고 사업은 사업입니다!”

“아무래도 당신이 그럴 것 같아서 오늘은 특별한 사람을 모셔왔지.”

그가 턱짓을 한번 해 보이자 몰려온 사람들 뒤에 대기하고 있던 창백한 얼굴에 장발을 기른 외눈의 남자가 앞으로 나와서, 뱀가죽으로 만들어진 채찍을 꺼내더니 무서운 스피드로 그것을 휘둘러 손님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위의 식기들을 차례로 낚아채 손님들의 얼굴에다 덮어씌웠다. 그러나 그때, 또 다른 보라색 가죽 채찍이 끼여들어 손님들의 얼굴에 접촉하려던 식기들을 모두 낚아채어 본래의 자리에다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두번째 채찍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여유만만한 미소의 하지메. 그러나 그 얼굴은 검은 중절모에 반쯤 가려져 있어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는다.

“뱀채찍의 명인 스네이크 아마모토 - 과연 멋진 솜씨군. 하지만 당신은 아무리 그래도 합중국 두번째야♡”

“두, 두번째라구? 그럼 첫번째는............?”

휘익------------♬ 쯧쯧쯧쯧쯧~

오른손 중지와 검지로 모자챙을 들어올리며 짧고도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더니, 오른손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가소롭다는 듯이 혀를 차던 하지메는, 바로 오른손 엄지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으음, 정말로 그런지 어디 한번 보자! -승부다!!!”

“뭔소릴 하는거야 아마모토? 방해꾼은 어서 배제하고 우리 사업 얘기를...”

“미스터 그린백, 일단 이 게임이 시작된 이상 내 방식에는 간섭하지 말기로 했었지요!”

“................”

테이블에 놓인 쟁반 위에다 각설탕을 층층이 쌓아놓고 숨을 죽이는 카페의 주인 카바르. 스네이크 아마모토는 원래 일자로 쌓여있던 각설탕을 채찍으로 재빨리 집어내어 훌륭하게 균형잡힌 트라이앵글(삼각형) 배열로 다시 세운다! 그에 걸린 시간은 불과 15초!

‘어떠냐’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지메쪽을 돌아보는 아마모토, 그러나 하지메는 전혀 감탄한 기색이 없이 하품만 하며 ‘언제 끝나나’하는 표정을 짓다가 자기 차례가 오자 이거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빛을 지어보이며 일자로 층층이 쌓여있는 각설탕을 앞에 두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초고속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랍게도 각설탕들은 3차원으로 배열되어 두 개의 오망성이 가로와 세로로 겹쳐진 복잡한 형태로 다시 세워진 것이었다. 그에 걸린 시간은 불과 9초! (...뻥이 너무 심하잖아...)

드디어 카페 밖으로 뛰쳐나온 스네이크 아마모토와 하지메의 대결이 벌어진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채찍을 주고받으며 서로 휘감거니 감기거니 하다가 다시 풀고 안전거리로 떨어졌다가 다시 서로 접근하며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대접전이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아마모토의 뱀채찍이 하지메의 오른팔목을 단단하게 휘감아 그녀가 채찍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자 어떠냐! 이제 나의 승.....엇?!”

하지메의 왼손 소맷부리에서 두 번째의 보라색 채찍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그녀의 왼손에 쥐어지더니,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 왼손 채찍으로 방심하고 있던 아마모토의 손목을 가격하여 그가 채찍을 놓칠뻔하게 함으로써,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도 채찍을 고쳐쥐고, 양손의 채찍을 자유롭게 휘둘러 상대의 움직임을 제압, 필살 진공채찍회오리 공격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었다!

“바, 반칙이다! 다른 무기를 숨겨가지고 있었잖아!”

그린백의 당황스러운 반박에 하지메는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돌아서고, 바닥에 쓰러진 아마모토는 이를 악물며 뭔가를 몰래 꺼내려다 하지메의 채찍 4연참에 그것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는 가슴에 초소형 리볼버 2정을 감춰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아, 이러면 누가 더 치사한 걸까♡” (어깨 으쓱)

“어, 어떻게 그것까지...”

“결판을 내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겠어. 미쉘 고우하트라는 여자를 죽인게 네놈인가!”

“모, 몰라! 난 그런사람은 몰라! 들어본적도 없다고!!!”

“그럼 누가 알지! 말해봐!!!” (목조르기 x 15)

“허- 허억, 그건... 아마도 바칸소주의 빌리 더 클린트...”

“알려줘서 고맙군-!” (뺨따귀 x 20)

“으, 으악-----------------!!!”

아마모토는 거지꼴이 되어 나가떨어지고 그린백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쳐들고 같이 몰려온 주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그의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보신 바대로, 자탄Zatan의 무리들은 인간보다 훨씬 더 신묘한 솜씨와 달콤한 목소리로 여러분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데 능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의 테러에서도 보았듯이, 하랍인들이야말로 그러한 자탄이 세상을 미혹시키는 데 가장 유용하게 쓰는 주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하랍인들이 여러분의 마을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가는 걸 두고만 볼것입니까! 아니 그래서는 안되는 겁니다! 이제 성스러운 전쟁의 불길을 피워올리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나는 이 자리에 부동산 개발업자가 아닌 여러분의 신을 모시는 마몬교회의 목자로서 임하여......”

카바르 아저씨와 라자드, 그리고 걱정스런 마음에 몰려나와 사태를 지켜보던 인근의 하랍계 주민들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사태에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방랑의 불가사의 소녀 하지메만이 그 광경을 차가운 눈빛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자드는 그녀의 시선을 쫓다가 선동에 말려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기묘하게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악하고 있었다. 하지메의 기타가 희미한 푸른 빛을 발하며 저절로 울렸다.

불길이 피어올랐다...



윈드는 정신을 가다듬고 그들이 몰려들어 이상한 제식(祭式)을 치르고 있는 낡은 교회로 숨어들었다. 다행히 외부의 침입은 고려하지 않았는지 자물쇠는 헐거웠다. 낡았지만 규모가 커서 집회장소로는 안성마춤이었고 재건축을 대비하여 대형 크레인이나 건설자재도 널려 있었다.

아말감시는 이름 그대로 여러가지 인종들이 모여서 옹기종기 살고 있는 샐러드 바구니의 대표적 존재였지만, 현재는 광기에 사로잡힌 백인들의 마을처럼 보였다.

파프리카계, 카시아계, 이스패닉계 등등의 타민족들은 쓸데없는 소동에 휘말리기 싫어서 대부분 따로 대피한 지 오래였고, 백인들은 그 ‘뭔가’의 영향으로 빈틈없이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그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제지하지도 않는 약간의 사람들로 나누어져 서로에 대한 간섭을 끊고 있었다.

그리고- 시민의 24% 정도를 점유하고 있는 하랍계 주민들이 바로 그 광기의 무리들에게 붙들려 처형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광기의 무리들은 백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소수이긴 해도, 백인 외의 타민족들이 거기에 가담하고 있었던 건 분명했다.

타오르는 불길, 조잡한 십자가에 매달린 갈색 얼굴과 검은 눈동자들, 해롤드 어비스 콘서트에라도 온듯이 환호하는 흰옷의 사람들. 다만 그 환호는 뭔가 공허하고 기계적이었다.

“이건 마치 중세의 마녀사냥이 아닌가. 절대로 놔둘 수는 없어!!!”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는 했어도, 관할 경찰서의 인력 대부분을 점유한 백인 경관들이 어째서인지 적극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중 일부는 ‘숭고한 사명’을 방해하지 말라며 오히려 윈드를 습격했으나 그나마 다른 동료들에 의해 억류되었다)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윈드 혼자만이 이 본거지에 숨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마치 전에 누가 남겼던 <미쳐라! 미치지않은 자야말로 미친자이다!>라는 잠언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저렇게 몰개성하게 미치는건 사양하겠어. 난 미쳐도 튀게 미치고 싶거들랑.”

윈드는 불 꺼진 통로를 재빠른 발놀림으로 주파, 중앙 예배실과 외부 통로를 잇는 중간 구역으로 넘어갔다. 그가 촛불이 희미하게 밝혀져 있는 어느 회랑으로 들어선 순간, 빗발 같은 납총알이 그를 향해 쏟아졌고, 그는 재빨리 엄폐물이 될만한 커다란 관들과 상자들 사이를 숨어다니면서 모습없는 적들을 향해 EM건(전자기 중화총)을 발사했다. 아무리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라도 본래는 선량한 시민이기 때문에 이쪽으로서는 함부로 죽일 수 없어서, 전자기파에 의한 실신효과만을 노리고 이 총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저쪽은 그런 걱정없이 실탄을 신나게 쏘아대는지라 그만큼 불리한 싸움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명중된 사람들은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한편, 그들의 그림자는 계속 땅속으로 스며들어 한군데로 모이고 있었다...

이 탁자 뒤에서 저 상자 아래로, 저 상자 아래에서 그 제단 옆으로, 그 제단 옆에서 이 탁자 뒤로, 쉴새없이 구르고 뛰고 점프하고 포복하면서 날아오는 총탄에 신경쓸 틈도 없이 그저 본능만으로 저쪽 편의 적을 찾아내어 EM건으로 캐치하는 힘겨운 길을 돌파한 끝에, 드디어 중앙 예배당의 문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윈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삼류 오컬트 호러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군! 빌어먹을!!!”

그는 자기가 전날 저녁 식사도 걸렀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목자라기보다는 KKK단 간부 같은 꼬라지를 하고 제식을 주재하던 그린백은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매달려 있는 라자드를 가리키며 추상 같은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다른 포로들은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나 라자드는 비교적 또렷한 정신으로 상황을 파악하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옆의 십자가에 묶인 하지메를 곁눈질로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유유자적하게 휘파람을 불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뿐이었다...

“이제 가증스럽게도 백인 남자들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중장비라는 신의 선물을 배우고 익혀 그 자리를 빼앗으려 함으로써 우리 신 뿐만 아니라 자기네 신의 율법까지 어기게 된 이 죄인을 신의 칼날로 심판하여 세상에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신의 이름을 등에 업고 사람을 괴롭히면 복이라도 받는다더냐, 이 개뼉다귀야!!!”

“누, 누구냐? 이 엄숙한 신의 전당을 모독하는 불경한 자는?”

“훗, 네놈들이 신의 사도라면 나는 정의의 사도지.”

입고 있던 양복은 오래전에 해지고 기껏 멋부려 입은 옅은분홍빛 와이셔츠는 소매가 날라가서 전위적인 패션이 되어버린 것에도 개의치 않고, 오른손에는 EM건, 왼손에는 강철 반지, 어깨에는 탄창, 목에는 체인 목걸이를 장비한 인스펙터 윈드는 그렇게 말한 뒤 전력을 다해 포로들이 잡혀있는 제단 쪽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를 막아서는 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EM건의 전자기에 찌릿찌릿한 경련을 맛보거나, 반지를 끼고 체인을 감은채 날리는 필살의 <흑풍강철권>을 맞고 나가떨어지고는 했다. 물론 한명이 쓰러질 때마다 새로운 그림자가 땅속으로 도주했다.

하지메는 이 모든 소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지구인의 의식을 지배해온 것인가? 몇 천년의 긴 주기에 걸쳐서?///

///증오와 반목의 감정은 본래 이들이 가지고 있던 것에 지나지 않지. 우리는 그것을 좀더 부추기고 확대시켜 배양(培養)할 뿐이다.///

///네놈들이 그것을 식량으로 삼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분쟁을 만들지 않는다. 지구인들 자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생명 주기를 이어나갈 뿐이다.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외부인인 네게 있는가?///

///이래서 정신생명이란 놈들은 대화하기가 피곤하다니까. 타 생명에 대한 배려라는 것은 너희들의 패러다임에는 존재하지 않나보군?///

///우리가 존재함으로 인해 지구인들도 자신들의 폭주하는 인구를 통제할 수 있고, 지루하지 않게 적당한 자극을 제공받을 수 있으니, 일거 양득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 우리는 지구인을 멸망시키려 하지 않는다. 단지 공생할 뿐이다!///

///영원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한다면, 그건 멸망시키는 것보다 더 나빠!///

///더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이곳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지구인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든 우리가 서식할 조건이 갖춰진다. 우리는 때를 기다릴 뿐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건 지구인 자신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돼.///

///어리석은! 생존을 나쁘다고 하는 법칙이 우주 어디에 있단 말인가?///

///법칙의 문제가 아냐.

......바로 내가 너희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야!!!///

하지메는 마음을 결정했다.



천하의 윈드라도 인해전술에는 견디기 어려웠다. 엄청난 광기와 무감각으로 무장된 수백명의 신도들이 샌드위치 포진으로 그를 압박하여 한곳에 몰아넣는데 성공한 것이다. EM건의 출력도 한계에 부딪혔고 강철반지는 내구력의 문제로 산산조각났으며 탄창은 이미 다 떨어졌다. 윈드는 그럼에도 최후를 인정하지 않고 싸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라자드가 묶인 십자가 아래에서 불꽃이 치솟기 시작했다. 각각의 십자가 아래에 용광로에 맞먹는 고온의 대형 버너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위치를 당긴 것은 아까의 패배 이후 그린백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던 아마모토였다.

불길은 서서히 라자드의 발치까지 타오르고 있었다. 뜨거움과 고통에 라자드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결코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타협한 건가?’

---아니야, 절대 그러지는 않아. 절대로.

라자드는 마지막으로 하지메가 묶여있는 쪽을 바라보려고 억지로 고개를 약간이나마 돌렸다.

‘아?!’

그러나... 그 십자가는 비어 있고, 줄은 아무렇게나 풀려 있었다.



갑자기 강렬한 푸른 빛 한줄기가 창밖으로부터 유리를 깨고 예배당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그 빛은 서서히 커져서 예배당 안을 가득 메워, 그 빛을 받은 신도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 빛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자 안에 숨어 있던 미지의 존재는 땅속으로 숨어들기도 전에 어둠의 입자로 소멸되었다. 그리고 그 빛은 제단 위로 올라와, 인간형의 모습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빛이 사라지고 제단 위에 무엇이 서 있는가를 본 윈드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바로 울트라하와 닮은 은색의 우아한 전사였던 것이다!

“울트라하.....? 아니 달라, 그렇다면... 또 하나의......!!!”

전사는 은색 바탕에 남색의 스트라이프가 멋드러지게 장식된 유연한 몸을 지니고 있었는데, 가슴에 배치된 유선형의 문양과 컬러 타이머의 배열은 하지메의 기타와 똑같은 도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엄청난 빛에 눈부셔하던 라자드는 은색의 전사를 보고 놀라움과 왠지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전사는 전광석화같은 동작으로 라자드의 아래에 타오르던 불을 끄고 그녀를 십자가로부터 떼내어 안전한 곳까지 옮겨놓고는, 제단에 멍하니 돌부처처럼 서 있는 그린백에게 다가가 양손바닥을 아래위로 교차하는 모션을 취하더니, 그 손바닥에서 나온 프러시안블루의 특수광선으로 그의 전신을 감쌌다. 괴로워하던 그린백의 몸에서 검붉은 색으로 얼룩진 ‘그림자’가 마구 일그러진 모습으로 분리되어, 창 밖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동시에 아까 도시의 지하로 스며들었던 다른 모든 ‘그림자’들도 교회 앞마당으로 모여들어, 사악한 붉은 빛을 발하며 그린백의 ‘그림자’를 핵으로 서로 합체,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어둠’이 만들어졌다. ‘어둠’은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 밀려오는 ‘그림자’들을 계속 받아들여, 점점 더 요사스런 빛을 띠어 갔다.

그때 윈드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아차! 저놈, 설마 뭔가로 또 변화하려는 건...?”

모든 신도가 쓰러지고 상황이 진정된 듯한 예배당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포로 중에서 유일하게 의식을 회복한 라자드, 애초에 미칠일이 없었던 윈드, 그리고 광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약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던 아마모토. - 윈드는 재빨리 아마모토를 향해 달려갔지만, 그는 족제비같이 그를 떨쳐버리고 창 밖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어둠’이 아마모토를 향해 밀려들고 그는 감격에 찬 얼굴을 한 채 두 팔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둠과 융합한 그의 신체는 15미터의 석회질 거인으로 변해 있었다. 덜 굳은 시멘트를 연상케 하는 진회색 바탕 위에 핏빛으로 얼룩진 복잡한 혈관들이 물결치며 이어져 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하지메씨!!!”

풀려난 라자드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앞에는 역시 같은 크기로 거대화한 아까의 전사가 나타나 있었다. 윈드는 나머지 포로들을 구출하다가 그 소리를 듣고 그리로 달려가 물어보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라자드는 얼굴을 돌려 그를 돌아보더니,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잠깐 미소짓다가, 살며시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스러움과 경탄이 뒤섞인 눈빛으로.

“방랑의 헤로인이죠.”



은색의 전사는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오른손을 몸 쪽으로 당겨 전투 자세를 취한다. 석회질 거인이 정면으로부터 달려와 공격을 가하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엔가 위로 비스듬히 점프하여 전사에게 뒷발차기를 날린다. 공격을 받은 전사의 은빛 얼굴에 불꽃이 튀고 석회질 거인은 반대편 광장에 내려서더니, 땅에 엎어진 전사를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한다. 거인의 혈관으로부터 검붉은 빛의 형체없는 ‘어둠’이 흘러나와 전사를 뒤덮고 질식시키려 한다.

“그냥 둬서는 안되겠어!”

“어딜 가는 겁니까?”

“끝까지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거든요!”

어리둥절한 윈드를 남겨둔채 라자드는 근처에 있는 크레인차로 뛰어올라갔다. 빌딩 건설용의 크레인보다는 작았지만, 거인이 있는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라자드는 교습소에서 배운대로 조심스럽게 수순을 밟아 크레인차를 가동시킨 뒤에 거인 쪽으로 이동하여 크레인 앞에 달려있는 5백톤짜리 철구(鐵球)를 거인의 가랑이 부분에 격돌시켰다. 석회질 거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크레인차는 더욱 기세좋게 녀석을 공격한다. 라자드가 소리친다.

“하지메씨! 내 말 들리나요! 나, 끝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어떻게 되든... 끝까지 해볼 거니까, 내 나름의 방법으로 싸울 테니까! 당신도... 당신도...........!!!”

쓰러져 있던 은색의 전사가 크레인차를 올려다보고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인다.

전사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일어나서 오른쪽 손으로부터 광탄(光彈)을 연속발사한다. 광탄을 직통으로 맞은 석회질의 거인이 잠시 후퇴했다가 다시 앞으로 달려오더니 몸의 일부분을 뿔처럼 돌출시켜 전사에게 몸통박치기를 가한다. 전사는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하여 하늘로 날아올라서는, 발 끝에 에너지를 모아 강력한 킥을 먹이고, 석회질 거인은 상당한 데미지를 입는다.

그리고 전사의 연이은 손날찍기와 이단옆차기의 연속기로 인해 석회질 거인의 체표면에 뻗어 있는 혈관이 파열되기 시작한다. 석회질 거인이 코끼리와 해표의 울음을 섞은듯한 기묘한 목소리로 신음하고 전사는 그로부터 한발짝 물러서서 두 손 끝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리고 양손을 앞으로 모아 손바닥을 X자로 교차, 두 손을 각자의 방향으로 펼치면서 C자형의 에너지 커터를 발사하여, 석회질 거인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린다.

“샤앗!”

연이어 전사는 전신에 에너지를 집중시키더니, 그 에너지를 양팔에 전달하여 두 팔을 기울어진 L자 형태로 교차, 엄청난 위력의 반양자(反量子)광선을 발사하여 상대를 분자레벨까지 분해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타앗!”

기나긴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찾아온다.

밝아오는 아침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은색의 거인이, 저 멀리서 달려오는 소녀를 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상대방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이는 두 여인.

소녀가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거인은 함성과 함께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다른 도시로?”

“그 소란으로 인해 가게도 잿더미가 되고, 아저씨도 잔해에 깔려 돌아가셨으니... 이제 여기서는 더이상 마음 둘 곳이 없거든요. 씁쓸하지만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몰라요. 어중간하게 양다리 걸치고 있기보다는 한가지에 전념하는게 더 마음 편하기도 하고. 다행히 아저씨가 예전에 처리해두신 덕분에 남은 돈도 있고. 무엇보다도, 여기에서는 이제 더이상 예전같이 지낼 수가 없을테니까요.”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군요. 하여간 하시는 일 잘 되시길 바랍니다.”

“여길 찾아오신 건 저 때문만은 아닌가 보죠?”

“무슨 말씀이신지?”

“하지만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도.”

“아마도 말입니까.”

“언제까지나, 세상과 싸우기 위해서.”

윈드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른 도시에서의 유사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윈드는 아말감시를 뒤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합실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 윈드는 우연히 남색 기타를 멘 검은 중절모의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윈드를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로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는 아주 작은 한 순간의 일이었다.

윈드는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러나 꿈 속에서도, 그는 한가지 의문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 몇 명인거지...... 이 지구에 와 있는 건......?’

같은 시각, SM78성운에서 온 ‘불굴’의 여왕 후보, 하지메․지라이진․루․히소는 건초를 가득 실은 트럭 짐칸에 올라타고는 기타를 두들기며 평화로운 지구의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과거의 일 같은건 모두 흘려버린 채.

트럭은 석양을 바라보는 어떤 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Chapter 3. END




동거녀는 도무지 내력을 알 수 없는 터키식 오르골을 책상에 놓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거라고 해봐야 전혀 모르는 하랍인 모녀의 단란해 보이는 사진과 서명 뿐. 정비 기술자 차림을 한 어머니와 스커트 차림의 아직 어린 딸이 사이좋게 웃고 있었다.

거녀는 그것보다도 소포 안에 동봉되어 있던 하지메의 짤막한 편지가 신경쓰였다.


‘내가 찾아갈 때까지 보관 부탁해.

-하지메-




- P.S. 잃어버리면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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