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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7] 울트라하 : 본편 제19화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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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하 2002

ウルトラハ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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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찍느냐 죽느냐!』

第19話 『VOTE  OR  DIE?』

-파동괴수 아코디오, 단위생명체 게로네스, 집합생명체 게리만도라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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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세요-!”

앙끄시의 번화가 한복판. 빼곡한 건물들 사이에 버티고 선 아코디언 타입의 생명체가 온몸의 관절을 설탕바른 꽈배기처럼 지지배배 꼬아대면서 무지 기괴하게 느껴지는 18옥타브 120데시벨의 불협화음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다. 괴수는 한발짝도 이동하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방의 건물들이 잔칫집 미싯가루처럼 와르르 바스러지고 사방의 자동차들이 뭔가에 두들겨맞은 것처럼 와자작와자작 찌그러져 가는 풍경이 실로 그로테스크하다. 괴수가 전신에서 발산하는 보이지 않는 진동파가 물체의 구성 입자를 마구 휘저어대고 있다는 증거였다. 경계태세에 들어갔어야 할 방위군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길거리에서는 분해되어가는 파편조각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부기우기 댄스를 추고 자빠졌다. 그러는 가운데,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어느 건물 측면의 비상계단에 숨어있던 아가씨 하나가 건물의 붕괴로 인해 균형을 잃고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건물 벽에 단단히 붙어 있었던 강[鋼]파이프를 두손으로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살려달라고 애를 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저렇게 팔힘이 셀 수가 있습니까? 라고 딴지를 거는 것은 생명의 끈질김에 대한 실례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거야 어떻든 간에,

“하앗!”

눈부신 오로라의 커튼과 함께 하늘로부터 누구나가 알고 있는 보라빛의 거인이 강림[降臨]하여 괴수 바로 앞의 도로에 굉음과 함께 내려섰다. 그녀는 착지와 동시에 맹렬한 기세로 달려와 눈앞에 서있는 16미터짜리 아코디언의 옆구리(로 부를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에 용서 없는 태클을 먹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호같이 방향을 바꾸더니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괴수를 들어올리고 하늘로 날아오른 다음, 왼손으로는 괴수를 허공에 던져올리고 오른손으로는 빛의 채찍을 소환하여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을 방불케 하는 표독스런 일격을 가한다. 59초만에 싸움을 끝낸 거인은 사뿐히 지상으로 내려와서 여전히 매달려 있던 아가씨를 구한다. 손바닥에 올라탄 아가씨는 친근한 웃음을 띠고 거인에게 감사한다. 근데 그 다음의 대화가 어째 좀 이상하다?!

“고마워요 울트라하. 덕분에 살았어요.”

///뭘요, 제가 당연히 할 일이죠.///

“이번 선거일에 꼭 투표하실 거죠?”

거인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 손바닥 위의 아가씨를 안전지대에 내려놓는다.

///저는 우주인이라서 투표를 못한답니다. 그럼-!///

이 괴이쩍은 대화만 빼면 언제나와 다름이 없었다. 울트라하는 아가씨 쪽을 부드럽게 한번 돌아보고는 두손을 하늘로 향한 채 힘차게 뛰어오른다. 그리고 한 줄기 화살처럼 우아하게, 파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간다...

<< 그녀가 구해준 당신의 한표, 나우민국의 미래를 바꿉니다 >>

짤막한 BGM과 함께 화면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별 관계없는 화면이 인서트.

정신을 차려보니 그것은 브라운관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선거 캠페인이 이거야?”

금지해 기자는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옆의 동료를 돌아본다. 편집기사인 윤여한은 아무러면 어떠냐는 식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 해 보이더니 대답한다.

“그런 셈이지. 효과가 있을 것 같아?”

“꽤 잘 만들긴 했네. 기록 필름과 새로 찍은 영상을 합성했지?”

“나도 얘기로만 들은 건데 마침 그쪽에 관심있는 바보가 선관위에 있어서.”

금기자는 이미 비어버린 맥주캔을 습관적으로 흔들면서 다소 짜증을 담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이러다가 피임 권장 캠페인에서까지 저 아가씰 볼까봐 두려운걸.”

“누구, 라나 장? 확실히 잘 나가기는 하지만...”

“아니, 그쪽 말고. 울트라하.”

“아, 그 얘기군. 자네가 저 거인의 초상권에 대해 민감하다는 건 알지.”

윤 기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한쪽에 쌓여있던 테이프 릴을 정리한다.

“하지만 저 정도는 공익을 위한 거니까, 본인도 이해하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오늘은 취재 안 나가? 점심 때부터 계속 여기 있는 것 같은데.”

“선거 특집 방송 때문에 우리 ‘특종! 뉴스 포인터’는 무기한 연기되었거든. 지금은 울적해서 도망나왔지만, 아마 투표일에는 엉뚱한 쪽으로 끌려나갈지도 몰라. 어제도 하루종일 나우 행정서버 이전이 어쩌구 미소녀 부양책이 어쩌구 지사안민 검심단결[志士安民 劍心團結]이 어쩌구 하는 개소리나 취재하느라 죽을 맛이었어.”

“헤에, 괴수재해[災害]도 선거에는 이기지 못한다는 건가.”

금기자는 말없이 두 번째 맥주 캔을 딴다.

“...오징어 남은 거 없어?”



...........................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PETS 본부의 구내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빵과 바나나 우유를 사갖고 오던 동거녀는 구석에 있는 대형TV에 비친 선거 캠페인을 보고 순간적으로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비닐 꾸러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뭐, 뭐, 뭐, 뭐, 뭐, 뭐, 뭐, 뭐, 뭐야 저게! 난 저런 소리 한적 없어!!!’

“거녀양 왜그래? 뭐 안좋은 거라도 봤어?”

“아니 하라선배...부르르...그런게 아니고...부르르...그냥 기분이 갑자기..”

“얼굴이 핼쓱한데. 아직도 부서 옮긴게 적응이 안되는 거야? 다들 도와줄 테니까 고민이 있으면 얘기해. 혼자 끙끙 앓다간 병나. 자, 여기 떨어뜨린 거.”

“고, 고마워요...부들부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얘길 하겠어? 난 우주인인데 저런 광고에 멋대로 나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영 그렇네요 아하하, 라던가.

“부러워하는 건가요, 울트라하를?”

하라대원과 같이 고구마케익을 자르고 있던 피요대원이 새초롬하게 한마디.

“에에?”

“자기가 너무 개성없고 평범하니까, 나도 저러면 좋겠다 싶은 거 아녜요?”

이건 또 무슨 용가리 맥치킨 먹는 소리래?

“하긴 이해할만 해요. 전에 있던 의무반에서야 환자 치료만 열심히 도우면 되었지만 우리 부서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테니까요. 게다가 원래 있던 사람들이 워낙 엄청난지라 그 안에서 살려면 골치 좀 아플거예요. 잘 지내봐요.”

거녀는 네가 지금 약을 올리는 거냐 위로를 하는 거냐? 라는 말을 꾹 삼키고 간신히 고맙다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는다. 그때 하라대원이 또 한마디 한다.

“부러워하는게 당연한거 아닐까? 우리들만 해도 이제까지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아왔잖아. 내가 만약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멋질거라는 생각도 들긴 해.”

왠지 피요대원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선배는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왜?”

그러나 피요대원은 아무 말 없이 포크로 눈앞의 케익을 절단내고 있었다. 그 몸짓을 지켜본 동거녀는 어쩐지 자기의 애완 고양이 아롱이가 통조림 깡통을 스스로 열지 못해 초조해할 때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하여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거녀양. 아직 자리 이동 덜 끝났지? 짐 옮기는거 도와줄게.”

“네? 아, 고, 고마워요.”

하라대원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이상해.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거 아냐?”

“아하하, 그럴리가요.”

그때 구석의 대형 TV에서는 엘리트 출신의 유력한 대선 후보자가 정열적으로 선거연설을 전개하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식당의 반대편 입구를 통해서, 캔커피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들어온 유성대장, 유태대원, ‘소년’도 그것을 보고 이야기한다.

“저 노친네입니까? 당선이 확실시되는 유망주라는 게...”

“잘은 모르지만, ‘리가’[李家]의 유력자라는 소문도 있다는군.”

“근데 스탠 리Stan Lee가 리가의 압박 때문에 마블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는 게 사실일까요? 만약 진짜라면 이건 전세계 미디어 업계를 뒤흔들...”

다른 두 명이 ‘소년’을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넨 잘나가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거야.” (-_-)

그들이 뭐라 하든, 브라운관 속의 정치인은 청산유수같이 떠들고 있었다.



“선거법 196조 1항을 아나? ‘천재지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선거를 실시할 수 없거나 실시하지 못한 때에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 있어서는 대통령이, 지방의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거에 있어서는 관할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협의하여 선거를 연기하여야 한다’. 물론 여기의 천재지변에는 괴수재해도 들어간다네. 유권해석상 전혀 문제가 없지.”

“그게 이번에 저희 상품을 의뢰하신 이유입니까? 어째 비현실적으로 들리는군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의 당은 이미 충분한 지지도를 확보하지 않았습니까.”

약간 벗겨진 머리에 둥근 안경알을 차갑게 빛내며 상대방 노신사가 말을 받았다. 그의 얼굴은 자기딴에는 온화한 스마일로 덮여 있었지만 어딘가 만들어 붙인 것처럼 어색해 보일 때가 간혹 있기도 했다. 말라 보였지만 허약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얼굴은 단련된 매나 족제비를 연상시켰다. 엘리트 특유의 깐깐함은 그의 주변 공기를 더욱 차갑게 냉각시키고 있었다.

“그게 말이지. A.O.L. 주둔군이 어이없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좀 험악한 분위기가 되지 않았나. 그걸 이용해서 저쪽 진영에서도 상당한 득을 봤을 거라 생각하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의 지지도에 만족하는 것보다는 보다 확실한 방법을 찾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라는 거지.”

어딘가 쌀집 둘째아들을 연상시키는 수더분한 인상의 젊은 중역은 ‘거참 묘하군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상대의 빈 잔에 보졸레 누보를 따라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표하기에 충분한 만큼의 투표가 끝나면?”

“그럴 때는 또 다른 복안이 있네. 187조 4항을 알면 쉽지. ‘천재지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개표를 모두 마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개표를 마치지 못한 지역의 투표가 선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염려가 없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우선 당선인을 결정할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게. 앙끄시는 나우민국에서 상당한 산업적 중요성과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모범도시이고 이곳의 투표수는 전체 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네. 그렇다면 선관위는 다른 곳에서의 개표가 끝나더라도 이곳의 개표가 완료되지 않는 한 곧바로 당선자를 가리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개표는 전자식으로 한다지만 투표는 여전히 손으로 써서 집어넣지. 투표함이 열리기 전에 그중 상당수를 빼돌린다면 개표는 연기될 거고 투표함을 못찾으면 결국 재선거에 들어갈 수밖에 없네. 우리 캠프에서는 그러는 동안에 그 ‘불행한 사고’에 대한 뒷수습과 구호 활동을 펴면서 여론을 우리 쪽으로 재치있게 돌리면 만사 끝이지.”

“이제야 납득이 가는군요. 거기까지 생각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한때 법관을 하던 양반답게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그 생각대로 돌아갈까? 포도주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중역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이 양반에게 잘 어울릴 만한 코드네임이 마침 하나 있기는 하군... 블랙메일[흑색선전]. 그래, 그걸로 할까.

“도와주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잘 되면 저희들에게도 좋은 일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설에 연락을 취해서 준비를 하도록 하죠.”

“심심한 사의[謝儀]를 표하는 바일세. 자네같은 인물을 만나 다행이군.”

“선생님이 ‘리가’의 일원이신 덕분이라 생각하십시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지난번 그 파티가 우연만은 아니었던 모양일세.”

그렇다고는 해도 장로회의는 용케도 이런 인간을 내게 보내왔군. 중역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일처리에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 그런데 오는 길에 보니까 선생님 차의 구동음이 좀 마음에 걸리던데요.”

“엔진이 며칠전부터 말썽이지. 수리를 보내려던 참일세.”

“아뇨, 그러실 거 없습니다. 서비스로 저희 공장에서 보아 드리죠.”

“그럼 염치없지만 신세 좀 지겠네. 요즘 유세 때문에 돌아다닐 일이 많아.”

창 밖에 비치는 나선형 조형물이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만음동 15번지에 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아니, 잠시만, 둘입니다, 하나가 아니라! 투표소 근처를 쑥밭으로 만들 기세입니다! 이, 이쪽으로 오지마, 우아아아악...!!! <지지직>”

“여기는 아름동 K-3지구 투표소, <지지직> ...를 해치웠습니다만 셋이 더 늘어났습니다! 증원을 부탁합니다! 더이상 <지직>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동합니다! ...<파직>”

“캐사모스톤 주택가 전역에 비상 경계령. <위이잉> 투표소를 중심으로 해서 방사선 대열로 진격한다! 부근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띠릭>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이도록 해라!”

“방위군 백곰부대, 들립니까? <파지직> ...는 P기관. 상황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다시 보고를 <피슉> ...십시오. 노이즈가 심합니다! <끼릭> 여보세요?”

“중장님의 허가가 떨어졌다! 가장 중요한 투표소 10곳을 선별하여 특수조를 투입하도록. 어떤 일이 있어도 투표함에는 손대지 마라! 자칫하면 선거법 241조 2항에 걸린다!”

“뭐, 시장님은 투표 끝내고 바로 꽃꽃이 모임에? 어서 연락해! 시간이 없다!”

“투표소에는 살상무기를 반입하지 마라! <치이익> 선거법 245조 1항을 준수해! 다음 방위군 예산 심사 때 꼬투리를 잡히면 곤란하다! <치지직>”

“피자 배달 왔습니다! 에, 콜라요? 오다가 괴물한테 빼앗겨서 피클밖에......”

“사방으로 흩어진 선관위 위원들의 행방을 즉각 파악하라! 선거가 재개되었을 때 위원들이 없으면 진행을 못 한다! 1급 요인 대우로 모시도록! 사이드카로!”

“에에? 풍림잭 산부인과냐고? 전화 잘못 거셨네요! <와장창>”

“혹시 경비부 P기관의 한미나씨와 통화할 수 없을까요? 사촌인데...”

“......유감입니다만 이건 긴급 회선입니다. 대체 어디서 번호를 알았죠?;;;”

ADF(ANC Defense Forces), 통칭 앙끄방위군의 중앙 지령실 스크린에는 멀티비전으로 도시 곳곳의 이상상황을 알리는 급전[急傳]과 연락이 오락가락 교차하고 있었다. 상황실 한가운데에서는 방위군의 세 거두인 청운중장, 기린참모, 바락참모가 당황스러움과 짜증스러움을 한데 비벼 잘 버무린 듯한 얼굴로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주위로 오퍼레이터와 장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서류와 서류와 서류와 서류와 또 서류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잘 짜여진 조각같은 얼굴에 50대라는 나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건강을 과시하는 듯한 청운중장은 무인[武人]답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방금 들어온 연락문을 받아들었다.

두 참모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선거일 1130시 현재, 앙끄시 전 지역 502자치구 1165개 투표소 중 73%가 정체불명의 괴생물로부터 습격을 받고 있음. 방위군 전 병력의 분산출동으로 상황은 차차 호전되고 있으나 유효전력이 크게 모자라는 시기인데다가 적의 예상치 못한 세포증식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될 가능성 있음. 이 괴물들은 전신이 검붉은 찰흙 빛깔에다가 인간과 흡사한 형태이나 피부는 해초처럼 흐물거리고, 힝글랜드 훌리건과 같은 돌발적, 격정적, 무뇌아적 행동 패턴을 보임. 어째서인지 투표하러 가는 유권자와 투표소 내의 투표함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콜라와 찹쌀떡과 금시계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음...... 이런거 조사한게 누구야?! (-_-)”

저도 모르게 웃을뻔하다가 돌아서서 손으로 입을 가리는 바락참모. 한편 서민적인 풍모에 냉정한 분위기를 내뿜는 기린참모는 중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떻게 남은 병력으로 저 많은 투표소를 지킬까 하는 것입니다. 각 동대 동원예비군에 해병대 베테랑들에 파출소 순경에 동네 태권도 사범에 만화가 어시스턴트들까지 끌어모아도 택도 없으니...”

청운중장은 잠시 낮은 신음소리를 내고는 바락참모에게 묻는다.

“P기관은 지금 무얼 하고 있소?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더니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얘기인지?”

화사한 웃음과 시원스러운 태도, 그리고 방위군 회식 장소선정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는 바락참모가 PRT(Personal Remote Transmitter ; 개인용 원격 통신기)를 뽑아들고는 상황을 체크한다. 몇마디 연락을 주고받은 뒤 보고.

“현재 저 괴물의 생태와 약점에 대한 연구로 정신이 없는 듯 합니다. 유효한 해결책을 내놓으려면 아직도 1시간 반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입전[入電]입니다. ANC-98의 전자두뇌까지 동원하여 연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군요.”

“하필 이럴 때 어메장관은 어딜 가서 자리에 없는건지 생각할수록 못마땅해.”

“중장님도 모르십니까? 아무래도 정보국이 관련된 극비사항인 듯 합니다만.”

“극비는 무슨 얼어죽을. 보나마나 어딘가 남국의 물좋은 풀장에라도 가서 광합성에 매진하고 있을테지. 어쨌든 간에, 그들에게 서두르라고 일러주시오. 방위군이 버틸 수 있는 시간에도 한계가 있어요!”



피요대원이 날카롭게 안경알을 빛내며 화이트보드에 꽤 복잡한 다층구조의 세포 구조도를 그려가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와 ‘안시’의 분석으로는, 저 괴물들은 더 큰 생명체의 세포에 해당하는 단위생명체로서, 형체는 복잡하지만 본질적으로 단세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흥분하고 다쳐도 감각이 없고 파괴해도 세포분열로 수를 불려갈 뿐이죠. 어째서 투표소를 습격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유태대원이 시큰둥하게 받아친다.

“초딩때 반장선거에서 떨어져서 가슴에 한이 맺혔나보지 뭐.”

‘소년’이 키득거린다.

“아니면 정당연설회에서 받은 도시락이 맛이 없었거나”

유성대장이 손을 들어 정숙을 유도. 피요대원은 무시하고 얘기를 이어나간다.

“어떻든 이녀석들을 분산된 상태에서 하나하나씩 잡기는 어렵다고 판단되므로, 무슨 수를 써서든 한 군데에 모아서 한꺼번에 타격을 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입니다. 유력한 방법으로서, 녀석들의 체내에 있는 특정 효소 하나를 +로 설정하고 그것을 끌어당기는 -효소로 생체 전자석을 만들어 한곳에 끌어모으는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좋아하는 미끼를 모아서 끌어들이는 방법을 병행하면 효율이 더 높아집니다. 그런 뒤에 한데 모인 녀석들에게 표면장력탄을 쏘면 납작하게 붙어서 꼼짝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 다음은 방위군의 숯불구이 아저씨들이 알아서 하겠죠.”

유성대장이 결연한 모습으로 말한다.

“하여튼 오늘 안으로 해결짓지 않으면 선거가 무사히 끝날 수 없게 된다. 장관님이 안계신게 서운하지만, 모두 힘내서 잘 싸워주도록! 그밖에 질문 있나?”

의무반에서 전투반 견습으로 인사이동한 동거녀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하지만 그 많은 괴물들을 대체 어디다 모으나요? 꽤 넓어야 할텐데.”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하라대원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소리친다. 냉정한 그녀의 얼굴에 웬일인지 화색이 돈다. “좋은 곳이 한군데 있어!”

몇분 후 청운중장은 PETS로부터의 연락을 받고 뜨악한 얼굴로 대답한다.

“---------------요이도[妖異島] 국회의사당을 비워 달라고???????;;;;;;;;;;”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시내 곳곳의 투표소를 향하여 콜라와 찹쌀떡과 금시계를 가득 실은 덤프트럭들이 일제히 몰려갔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는 PETS의 라이드 메카와 합동으로 방위군 항공전력이 총동원되어, 피요대원이 개발한 초승달 모양의 생체 전자석을 매달고 시 구석구석으로 흩어졌다. 그 선두에는 신형기인 펫츠윙-01을 조종하는 유성대장의 늠름한 모습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성능에 의문이 제기되어 훈련용으로만 활용되던 윙 시리즈는 최근에야 성능 보완 작업을 마치고 정식 채용의 길을 걷게 되었다.

투표소 주변에서 저지선을 만들고 괴물들이 투표소로 들어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가며 몸싸움과 난투전을 벌이던 방위군 지상병력은 괴물들이 하나씩 하나씩 무언가에 이끌리는 레밍처럼 떼지어 떠나가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피난갔던 주민들도 서서히 돌아왔고 선관위는 남은 시간동안 투표를 유도하고 개표를 예정대로 진행하기 위해 업무를 재개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시간은 1450시, 즉 오후 2시 50분에 육박하고 있었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민들은 귀중한 투표권의 행사를 방해당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어찌나 길게 줄이 늘어섰는지 투표소 앞에는 순식간에 팝콘장수, 엿장수, 솜사탕 장수, 핫도그 장수, 떡장수, 아이스크림 장수, 번데기 장수, 길보드 차트, 액세서리 장수, 점쟁이, 초상화가, 어릿광대, 서커스단, 기예곡마단, 음유시인, 인형극단, 코스프레 동호인들, 게릴라 콘서트, 조기축구회(...?) 등등이 몰려들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모들을 위해 인기 TV프로 『농촌초인 철갑산』(전원일기의 수백년 뒤를 무대로 벌어지는 컨트리 히어로 로망)과 『애니라이더 뮤우키』(애니동의 비밀을 손에 넣기 위해 끝없는 크로스카운터를 되풀이하는 고양이의 히어로)의 비공식 스테이지 쇼까지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축제가 펼쳐진 것이었다. (...대체 어디가 민주주의냐?;;;;;;)

그러한 열기로 충만했던 만큼, 괴물들 중 일부가 물러가기 전에 투표소를 향해서 정체모를 분말을 토해낸 것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분말은 정숙한 아가씨의 오뉴월 눈물만큼 곱디고운 입자로 흩어져... 투표소의 창문 틈이나 벽의 갈라진 틈으로 파고 들어가...

정확하게 투표함에 내려앉았다.



한편 국회의사당 안에서는 미끼에 끌려 한곳에 모여든 괴생물들이 끼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의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서로 삿대질을 하고, 뭐라고 말다툼 비슷한 것을 벌이고, 단상 위에 올라서서 괴성을 질러대고, 급기야는 온갖 화려한 기술이 난무하는 레슬링 매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미끼가 생각대로 손에 들어오지 않자 좌절하고 화가 난 나머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물론 밖에서는 방위군이 몰래 들여보낸 스파이 카메라를 통해 안의 상황을 시시각각 모니터하는 중이었지만 괴물들은 그런 데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지령실에서 전송된 영상을 바라보던 바락참모가 청운중장에게 진언한다.

“저렇게 한곳에 몰아넣을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의사당보다는 감실[甘實] 종합운동장 쪽이 낫지 않았을까요? 의사당을 부수고 새로 짓자면 뒷감당이 장난 아닐 겁니다. 국정활동의 문제도 있고요.”

거기에 대해 기린참모가 로켓 모양의 기념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대꾸한다.

“의사당은 시 정중앙에 있는 관계로, 시간과 거리를 생각해 볼 때 가장 적절한 장소입니다. 또한 녀석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붕이 있는 건물이 필요하지요.”

사실 하라대원은 순전히 국회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렇게 제안한 것이었지만, 방위군에서는 의외로 논리적이라고 제멋대로 납득해버린 셈이다. 그점에 있어서는 관료나 군인이나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청운중장은 굳은 결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받는다.

“설령 이 일로 나중에 청문회에 서게 된다고 해도 일단은 선거를 무사히 끝마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오. 지금으로서는 잘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지.”

그들은 다시 지령실 중앙 스크린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긴다.

무대는 다시 의사당으로. 넓게 트인 회의장 안에서 기기묘묘한 검붉은 형체들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동안에, PETS의 지휘를 받아 방위군 일반대원들이 중무장하고 살짝 들어와 사방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였고, 유성, 유태, 피요, 하라가 깊게 파인 회의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위층의 발코니 위에 집합하여 아래 상황을 살펴보고는 서로 눈짓을 교환한다.

대장이 수신호로 지시를 내리자 피요대원이 조심스럽게 옆구리에 끼고 있던 수트케이스를 열고 안에 들어있던 크롬빛 부품들을 조립하여 신병기 표면장력탄 발사기를 완성, 그것을 건네받은 유태대원이 가장 넓게 확산될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서 겨냥을 맞춘 뒤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폐병으로 오늘내일 하는 환자의 다소 낮고 거북한 기침소리를 연상케 하는 ‘푸슉’하는 소음이 울려퍼지고, 극장처럼 위쪽으로 넓게 트인 의사당의 구조는 그 소리를 반사하여 오페라 극장의 세레나데처럼 단아[端雅]한 울림으로 사방에 퍼뜨렸다. 뒤늦게 그 소리를 눈치챈 해초 괴물들이 사방을 둘러보며 동요하는 기색을 드러내지만, 이미 PETS와 방위군 대원들은 비상구로 빠져나가 안전권으로 대피, 그리고 괴물들의 머리 위에 발사되어 허공에 잠시동안 떠 있던 표면장력탄은 약 0.01초 뒤 화려한 불꽃과 함께 사방으로 유리빛의 파동[波動]을 확산시키면서 폭발했다.

그 파동이 만들어 낸 렌즈 비슷한 공간의 굴곡 속으로 검붉은 형체들이 하나 둘씩 빠져들어 뭉쳐진다. 살아있는 해초들의 비명이 점점 잦아들어간다...

“해냈어!” “성공입니다!” “훌륭해!” “사후 지시를!” 이런 저런 환호와 찬사로 뒤덮이는 방위군 지령실. 청운중장은 기뻐하는 다른 수뇌들을 보며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으로 답하면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을 느끼고 그 이유가 뭔지 곱씹어보고 있었다.

‘......P기관...... 무시할 수 없는 녀석들이군. 어느새 이렇게...’

확실히 3년전 인큐버스 사건 때의 혼란상을 되새겨보면 놀랄 일이었다. 그 엉망진창이던 잡동사니 집단이 저 정도로 매끄럽게 일을 처리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결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면... 이쪽에도 손을 써두지 않으면 안 되겠군. 약간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어.’

“...님, 마무리를 지으셔야죠.”

“아? 그래 그렇지. 의사당 주변의 전 부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선거운동본부에서 TV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깡마른 정치인은 뭔가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처음에는 생각대로 되어가는 듯 하더니만, 난데없이 하메른의 피리부는 사나이같은 놈들이 나타나 모든 걸 수포로 만들어 버리고 선거는 아무 탈도 없었다는 듯이 재개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쉽게 유인당해서 목적을 팽개칠 정도라니 실망스럽군. 정치인은 사무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지시를 내리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아, 전화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중계방송 보고 계십니까?”

“......보고 있네.”

다른 때보다 유난히 활기를 띤 표정의 금지해 기자가 나와서 상황을 보도하는 것을 지켜보던 정치인이 영 마땅치 않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게 뭔가? 내가 원했던 것은 개표 때까지만이라도 선거업무를 마비시키는 거였네. 이건 반나절도 안 돼서 KO패가 아닌가. 자네들이 자랑하는 그 초진화 뭐라는 기술도 영 쓸모 없구만.”

쌀집 둘째아들을 연상시키는 후덕한 풍모의 중역은 깔끔하게 다림질된 셔츠 깃을 세우면서 무선 전화의 쌍방향 스피커에 대고 참을성있게 말을 계속했다.

“실망하시기엔 아직 이릅니다. BMX-19의 성능은 저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방위군은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다고 좋아하고 있겠지만 몇초 뒤에는 아마 깜짝 놀라 뒤집어질걸요. 그리고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이제 5시 10분 전이군요. 좀 있으면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시작하게 되겠지요.”

“그게 어쨌다는 건가?”

중역은 옷맵시를 고친 뒤 빅토리아풍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말을 계속한다.

“투표함을 빼돌린다고 말한 것은 바로 당신 아니었습니까?”

움찔하는 기색을 보이며 할말을 잃은 정치인의 다음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는 다음 연회에 신고 갈 에나멜 구두를 고르면서 말을 잇는다.

“무언가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좌절되는 것보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 잘 굴러가고 있는데 망가지는 쪽이 훨씬 절망을 불러일으키기 좋다는 뜻입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리죠. 아 그리고, 차는 잘 굴러갑니까?”

“나쁘지는 않네.”

“좋은 차입니다만 좀 낡았더군요. 저 같으면 새 차를 사겠습니다.”

“언제부터 남의 차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졌나?”

“당주는 가문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을 가져야 하죠. 그럼 이만.”

통화를 끝낸 정치인은 이리튀고 저리튀는 상대방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수화기를 내려놓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녀석을 당주로 임명하다니 장로들의 꿍꿍이도 참 모를 일이군.

그때 문 밖에서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측근이 급히 달려들어와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참고인 동행 요청이라니 무슨 소리야?”



“말도 안돼애애애애애-------------------------!!!!!!!”

밖에 대기중이던 펫츠 비이클에서 계기류를 들여다보며 상황을 모니터하던 동거녀는 반쯤 날아간 의사당의 반구형[半球形] 지붕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위군의 집중공격은 한데 뭉쳐있던 괴생물들을 태워죽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주어 서로 뭉치게 만들고 있었다. 뜨거운 열풍과 지직거리는 스파크를 뿜어내며 그 형체는 급속히 하나의 존재로서 융합해가고 있었다. 유성대장과 피요대원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다.

“피요대원, 자네가 세포라고 말한 건 단지 비유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죠. 1분 12초 0.5나노세크 전 까지는요.”

본래의 검붉은색에서 더욱 짙은 검푸른빛을 띠게 된 괴수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뾰족한 돌기가 사방으로 튀어나온 머리와 세 개의 기분나쁜 눈이 방사형으로 빛나고 있는 얼굴은 상당히 이질적인 데가 있었다. 등에서는 박쥐를 연상케 하는 섬유질의 날개가 네 개 솟아나와 날개짓을 시작했다. 온몸은 해초 비슷한 비늘로 뒤덮여 있고 군데군데 암석과 같은 단단한 골격이 돌출되어 있었다. 끼르륵거리던 울음소리는 더욱 우렁차고 날카로워졌다. 이윽고 녀석이 화염에 휩싸인 의사당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물론 공기저항이나 중력의 법칙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당황하기는 지령실에서 지켜보던 청운중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왔다갔다하다가 오퍼레이터 성완두 중위의 보고를 듣고 멈춰선다.

“배싱턴의 국제괴수학회로부터 입전! 녀석의 코드네임을 결정했답니다!”

“바쁜데 이름짓기 놀이나 하고 있을 땐가! ...... 뭐라고 지었다고 하나?”

“정치적인 함의[含意]를 담아... 게리만도라Gerrymandorah 라고 합니다.”

“뭔가 영 안맞는데... 하여튼 이름이라도 있으면 욕은 실컷 하겠군.”

“그 이름이 싫다면 옵션으로 반다위곤Bandwagon 도 있다는데요.”

“그 부시같은 자식들에게 당장 나가 뒈지라고 답장 보내!!!!!! 이거야 원... 도대체 우리 국토에 나타난 괴물에 이름 하나 마음대로 못 붙이다니...!”

청운중장의 마음 속에 떠오른 어떤 결심이 더욱 더 확고해졌다.



현장에서는 피요대원이 몇가지 출력물을 대조해 보면서 계산결과를 보고한다.

“아까의 표면장력탄과 화염방사의 상승효과로 인해 괴물들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세포 결합 유전자’가 발동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사례에 대해서는 이미 힝글랜드의 과학지에서 「3중촉매의 영향에 의한 변이 DNA의 방아쇠 효과Trigger Effect of Metamorphoses DNA by the influence of Tri-catalyzer」라는 논문을 통해 예상된 바 있습니다만 눈으로 직접 보는건 처음이네요.

“삼중고에 디저트에 무시기가 어쩌고 어쨌다구?;;;;;;”

전문용어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유태대원이 눈을 희번득거린다.

“그건 백날 가도 유태씨는 저렇게 합체할 일은 없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호오 그러냐, 그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내가 널 저놈과 합체시켜 주겠다!”

‘소년’의 말도 안되는 대답에 공연히 열을 받는 유태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하라대원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일침을 놓는다.

“당장 그만하지 않으면 둘 다 오늘 밤부터 본부 뒷산에서 도마뱀과 다람쥐를 벗삼고 살게 해 주지. 참고로 오늘 저녁엔 기온이 영하 21도로 내려갈거야.”

“아앗~ 그것만은 제발~”

주변에서 이러거나 말거나 피요대원은 지구궤도 감시위성 어조사지[御操思智]가 보내어 오는 괴수의 스캐닝 데이터를 노트북으로 취합하면서 몇 가지 신경쓰이는 수치를 시뮬레이션에 대입해 보고서는 핼쓱한 얼굴이 되어 동료들을 돌아보고 소리친다. “빨리 선관위에 연락해야 합니다! 저대로 그냥 두면..........”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의사당 상공의 고도 2백미터 정도 되는 허공에 떠오른 일명 게리만도라는 양팔을 들어올리고 몸 전체에서 무기질의 케이블 비슷한 촉수를 사출하여 도시 곳곳을 향해 발사, 동시에 구름 위의 대전 에너지를 끌어들여 엄청난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며 마치 미와경부에게 조교받는 김두한처럼 괴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앙끄시 전 지역 502자치구에 흩어져 있는 1165개 투표소에 설치된 전산개표용 컴퓨터들이 몽땅 강제로 셧다운되고 부근 전산망도 철저하게 먹통이 되어버렸다. 멀리서 보면 의사당이 위치하는 시 중심부에서 사방으로 뻗어나온 에너지의 띠가 크리스마스 리본처럼 시 곳곳에 전개되어 전자기[電磁氣] 교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게리만도라의 전신에 뻗쳐있는 골격 비슷한 각질 부분에서 묘하게 웅웅거리는 형광빛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앙끄시 전역의 투표소에서 이미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기다리고 있었던 투표함들이 뭔가에 씌인 것처럼 똑같은 형광빛을 발하며 하늘로 날아올라, 유리창을 깨고 지붕을 뚫고 시 중심부로 몰려들었다. 불과 7분만에, 앙끄시에 있던 모든 투표함들이 장마철에 물먹은 행주귀신마냥 게리만도라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서너개의 완벽한 원호[圓弧]를 그리며 그 괴수의 몸 주위를 위성처럼 빙빙 돌기 시작했다. TV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앙끄시 전역의 시민들은 자기들이 행사한 표를 괴수에게 강탈당하는 어이없는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엄마, 이제 투표 다시 해야 하는 거예요?”

“아니야, 울트라하가 꼭 표를 되찾아줄 거란다. 안심하거라.”

...선거권 없는 아이들에게 그런 얘길 해봤자...;;;;;;



“이제 확실해졌군요. 저 괴수는 분명 인공적으로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입니다. 아까 우리가 유인할 때 썼던 +/- 효소의 원리를 투표함을 끌어오기 위해 역이용하고 있어요. 단위생명체들이 퇴각할 때 공기를 통해 유포되는 효소를 투표함 근처에 살포한 뒤, 지금 몸 전체를 전자석으로 만들어서 그걸 끌어들이고 있는 거예요! 저녀석의 파워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지기 때문에 자칫하면 앙끄시 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의 모든 도시가 전산망 마비 사태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우리 지휘차에 전자파 코팅을 해두길 잘 했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유성대장이 다리 부러진 경주마를 앞에 놓고 안절부절못하는 젊은 기수를 연상시키는 얼굴로 묻는다. 피요대원의 대답도 그다지 밝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기기에 무리를 주고 있어서 세시간 정도 될까말까한데요.”

눈치 없기로 유명한 동거녀가 나선다. (이런 일은 드물다)

“저, 이런 얘기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적이 효소를 자석같이 쓴다면 그걸 역이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극[極]을 반대로 한다던가 해서...”

모니터에 집중하던 피요대원이 눈을 크게 뜨고 거녀 쪽을 돌아보았다.

“당신 누구? 거녀양 아니죠? 웬일로 그렇게 똑똑한 소릴. (0_0)”

“이잉...... 칭찬은 못해줄망정 놀리기만 할 거예요?;;;”

“말은 쉽지만 그렇게 간단히 되는건 아니라고요. 하지만 검토는 해봅시다.”

피요대원은 노트북으로 몇가지 계산을 해 보더니 대장에게 정식으로 진언한다.

“아까 사용했던 생체 전자석과 방위군의 ‘그 설비’를 조합하면 어떻게든 될 듯 합니다. 그러자면 방위군의 전면적인 협력이 필요할텐데요.”

키보드를 탁탁 두들기자 모니터에는 처음 보는 차량의 설계도가 떠올랐다.

“알겠다. 지령실에는 내가 따로 연락하도록 하지. 준비를 서둘러!”

이윽고 에너지 팩 운반을 끝낸 유태대원과 ‘소년’이 달려와서 보고한다.

“대장! 충전 완료입니다. 언제든지 이륙 가능합니다!”

“방위군 항공부대는 벌써 공격에 나선 모양이던데요!”

두 대원을 지휘하러 갔었던 하라대원도 같이 돌아와서 말한다.

“대장님, 지시를.”

유성대장은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절도있게 차렷자세를 취하고 호령을 내린다.

“알겠다. 1종 긴급 사태! PETS, 전원 자기 위치로! 하라대원은 이글 α호, 유태대원은 이글 β호, 나는 윙 01호로 간다. 피요대원은 비이클에서 상황을 분석하며 녀석의 효소 결합구조를 무력화시킬 방책을 강구하라. 그밖의 대원은 피요대원의 지시에 따라 그녀의 작업을 도와주도록, 이상!”

투표함의 안위[安危]를 둘러싼 사상 초유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거나 받아라!!!”

유태대원의 β호가 가장 먼저 수직 급강하, 반지의 제왕처럼 거만하게 허공에 떠올라서 포획물을 빙빙 돌리며 뻐기고 있는 대괴수의 얼굴에 발칸포를 퍼부었다. 하라대원의 α호와 유성대장의 윙-01도 뒤따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면서 공격을 가한다. 그 여파로 지상에서는 쓰레기와 파편들이 이리저리 휘날린다. 충격파로 인해 길가의 벤치가 대파[大破]. 그 옆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전화번호부 책이 떡가루가 된다. 그 뒤에 보이는 룽룽실업 로고의 대형 전광판이 ‘프로야구 그리미스의 홍건석[洪健釋] 선수 아직도 혼수상태, 동료선수들의 노력으로 다시 온정의 물결’이라는 속보를 무심하게 전하다가 동력이 끊어지는 바람에 꺼지고 만다. 어딘가에서 미처 피난 못한 어린아이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오른쪽으로 반전[反轉]!”

“전자기 교란 때문에 이 이상 접근은 무립니다! 계기가 말을 안 들어요!”

“E-M 반응탄은? 쓸 수 없나?”

아시다시피 엔드메이커 결정반응탄은 상당한 위력을 가진 파괴무기다.

“지난번 무기감사 때 회수당했는데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아시다시피 PETS의 필살무기는 꼭 이럴 때만 회수당한다.

“미치겠구만!”

세 대의 라이드메카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어지럽게 교차하며 곡예비행을 방불케 하는 복잡다단한 패턴으로 서로를 견제한다. 허공에 떠서 상황을 관망하는 게리만도라의 세눈박이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요했다. 그러나 한순간, 그 얼굴 아랫부분의 주름진 부분이 사악하게 웃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동거녀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순간적으로 투시하고는, 통신기에 대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요--------------------------------------------------!!!”

다음 순간, 괴수는 팔다리를 몸 쪽으로 잔뜩 웅크리더니 있는힘껏 접은 팔다리를 기지개 켜듯이 도로 펴면서 주변의 전자기파를 최대한으로 증폭했다. 호크 α호와 β호가 그 영역권 안에 있다가 격렬한 기기 고장과 함께 중심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겨우 그것을 피한 유성대장의 윙-01 역시 수직꼬리날개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고도를 잃기 직전이었다.

“대장님!”

“하라선배!!! 유태대원!!”

비이클 뒤편의 임시 지휘소에서 상황을 모니터하던 ‘소년’과 생체 전자석의 설정을 재조정 중이던 피요대원이 비통하게 소리쳤다.

“여기는 α호! 더이상 비행 불능. 적당한 공터에 불시착한다!”

“여기는 β호! 이하 동문. 물에 떨어질 테니까 수상 경찰에 연락좀 해줘!!!”

“이미 연락했어요! 수질오염 시키지나 말아요!”

“W01, 아직 균형유지 가능. 장시간 비행은 무리지만 하는데까지 해보자!”

“대장님, 1기로는 무리입니다! 돌아오세요!”

“돌아갈 때가 되면 자네가 오지 말래도 간다! W01 통신끝!”

그때 모니터의 화면이 분할되면서 방위군의 청운중장이 나타났다.

“P기관인가. 여기는 지령실. 자네들이 요청한 특수차량과 항공전력을 그쪽으로 보냈다. 1분 이내로 도착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투표함을 찾아주게!”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피요대원은 호크 2기가 무사히 불시착한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설정작업에 들어갔다. 동거녀는 그 옆에서 계산의 보정[補正]과 데이터 디스크의 정리에 매달렸다. ‘소년’은 종합 관제 모니터로 주변 상황을 감시했다. 아슬아슬하게 하늘에 떠 있는 윙-01은 계속 주변을 맴돌며 게리만도라의 약을 올렸다. 이미 탄환은 다 떨어져 있었지만 선회속도는 일품이었다.

모두가 엄청나게 피곤했지만 엄청나게 열이 올라 있었다.



그리고 1분 28초 뒤 칼같이 방위군의 지원병력이 도착한 것이었다. 그 중에는 아까 피요대원의 디스플레이에 나타났던 그 차량의 모습도 있었다.

“예이~! 아메라가 왔어!”

“누가 왔다고요? 피요양 친군가요?”

“AEMRA, 반[反] 전자기파 광선 발생기(Anti-ElectroMagnetic-wave Ray Array). 지난달에 방위군 특수차량 병과에서 완성한 최신예 파라볼라 장비죠. 이걸로 게리만도라의 주변을 뒤덮고 있는 전자기 쉴드를 깨버리고 그 다음에 설정을 바꾼 생체 전자석으로 녀석의 세포를 휘저어줄 거예요. 기대해도 좋다구요.”

“말은 쉽지만 그렇게 간단히 되는게 아니라며요?”

피요대원은 동거녀 쪽을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두고봐요. 이번에는 반드시 그녀가 오기 전에 우리 손으로 해결할테니.”

“에에? 피요대원... ‘그녀’라니 설마...”

거녀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소년’도 둥그래진 눈으로 그쪽을 돌아본다.

낮의 제1차 작전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던 항공부대가 다시 생체 전자석을 매단 채 게리만도라 주변의 반경 3킬로미터를 빙 둘러싸고 포위대형을 구축했다. 피요대원이 수정한 데이터는 방위군의 중앙 서버를 거쳐 각 항공기의 컴퓨터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지상의 대형 주차장에서는 은빛의 파라볼라 안테나를 반짝이며 육중하면서도 둔탁하지는 않은 세련된 몸체를 드러낸 3대의 ‘아메라’가 괴수를 향해 조준을 맞추는 중이었다. 충전과 보급을 맡은 일반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가을걷이를 미처 다 못하고 겨울에 와서야 뒤늦게 이삭을 주우려 하는 개미왕국의 병사들 같았다.

“1단계 스탠바이.”

“출력 120%. 적정 전압을 유지할 것.”

“발사각 37.5에서 36.4로 재조정. 모니터 확인!”

“야간용 적외선 스코프를 착용하라! 감도[感度]와 배율에 유의해!”

“언제라도 좋습니다!”

“발사!”

서로 다른 방향과 각도를 맞춘 3개의 파라볼라 안테나로부터 강력한 반자력선이 발사된다. 물론 실제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궤도를 맞추기 위해 같이 발사되는 조준용 레이저 뿐이고, 반자력선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왕년의 괴수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병기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 다른 쪽 끝에 있는 게리만도라의 주변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시 전역으로 뻗어나가던 에너지의 띠가 약해지고 괴수 주변의 전자기 교란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스러움을 느꼈는지 게리만도라는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직 지상에는 눈길이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주변에 원형으로 정렬 중이던 방위군 전투기들이 윙-01의 지휘에 맞춰 괴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기들끼리의 안전거리는 여전히 유지한 채로.

“2단계 스탠바이.”

“전자기 교란 약화. 약간 더 접근해도 되겠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각기[各機], B-마그네 유닛의 수평각을 일정하게 유지하라.”

“레이저 포인터로 위치 재확인.”

“효소 배합은 전달받은 데이터에 기준하여 플러스 마이너스 10밀리쿼터.”

“투표함에 충돌하지 않게 조심해라! 돈으로도 못 물어내는 거다!”

“녀석이 이쪽을 눈치챘습니다! 시간이 없겠는데요!”

“각기, 체인지 겟타.....가 아니라, 전원 스위치 ON!"

유성대장의 약간 나사가 빠진 듯 하지만 그런대로 호방한 지시에 따라 전투기들이 생체 전자석의 스위치를 차례로 올렸다. 각 유닛에서 뻗어나온 조준용 레이저들이 어두워진 하늘을 가르는 새파란 실처럼 게리만도라의 주변을 칭칭 옭아매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그 효과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괴수가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것은 육안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몸의 각 부분에서 형광색의 발진[發疹]이 피어오르며 노출된 골격 부분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이야- 성공하겠는데요 이번엔!”

‘소년’의 깡총거리는 찬사에 조금이나마 으쓱한 기분을 느끼는 피요양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그녀가 오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의 작전은 틀림없어.”

그런데, 동거녀는 여전히 불안스런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저애, 생각보다 교활해요. 더 빨리 결정타를 가하지 않으면...”

“신경과민이에요. 저렇게 되어갖고 뭘 어쩌겠어요?”

바로 그 순간, 거녀는 또 게리만도라가 씨익 웃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아무런 표정이 없던 호박구슬같은 세눈에서 불타는 가을 밀밭같은 황금빛 광선이 뻗어나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전투기들을 차례로 불태웠다.

“안돼--------------------------------------!!!”

괴수가 허공에서 360도 회전하며 광선으로 사방을 싸악 그음으로써, 불과 45초만에 총 31대 중 18대가 당했다!

“회피! 회피!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벗어나라! 편대를 재편하라!”

유성대장은 오늘 저녁식사 시간에 들어가긴 다 틀렸군, 이라고 생각했다.

게리만도라는 더욱 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지상으로 돌렸다. 3대의 아메라 중 2대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황금빛 광선의 마수에 걸려들어 화염에 휩싸였다. 남은 1대는 가까스로 직격을 면했으나 파라볼라 부분이 크게 손상되었다. 화를 못이긴 피요대원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아냐, 이게 아냐!!!”

그녀는 잠시 턱에 손을 괴고 골똘히 생각하다 옆에 있던 수트케이스에서 뭔가를 꺼내어 조립하고는 그것을 어깨에 메고 비이클 밖으로 달려나가 가까운 곳에 있는 시영 전망대로 달려갔다. ‘소년’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멀뚱이며 그 뒤를 바라보는 사이에 동거녀도 비호같이 그 뒤를 쫓아갔다.

전망대의 엘리베이터는 비상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피요대원은 그 중 한 대에 들어가서 맨 꼭대기 층을 누르고 올라가려 한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란다. 돌아보니 동거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거녀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만둬요. 너무 위험해요.”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잖아요. 낮에 사용했던 표면장력탄의 설정 계수를 마이너스로 조정했어요. 이번엔 뭉쳐지는 대신 팍! 흩어질 거라구요. 저녀석을 이대로 그냥 두었다간 투표함은 고사하고 시 전체가 위험해져요! 봤잖아요?”

“그랬다가 효과가 없어서 녀석이 이쪽을 주목하고 반격해 오면?”

“그런 걸 일일이 걱정하면서 어떻게 시의 안전을 지켜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어떻게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보겠어요? 의무반에선 늘 안전한 곳에서 사람들만 돌보면 되겠지만, 여기는 사정이 달라요. 달라도 한참 다르죠!”

찰싹 소리와 함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피요대원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당하고만 지내던 동거녀가 감히 자기 뺨을 때리다니!

거녀는 자기도 믿을 수 없다는 듯, 후회와 분노와 안타까움과 망설임이 어지럽게 뒤섞인 얼굴로 자기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듣자듣자 하니까 못들어주겠네 정말! 싸움에 안전한 곳이 따로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진짜 오산이야. 의무반도 시시각각 위험과 싸우고 있다구. 환자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필요한 약은 없고, 수혈도 못 하는데, 괴수가 길을 막고 있어서 병원에도 못 갈 때, 그건 위험한 것이 아니란 말야? 다른 건 몰라도 방금 그 말만은,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어. 나는 괜찮다고 해도, 무휼박사님과 언니들에 대한 모독이니까! 당신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게 곧 남을 깔봐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야!!!”

“거녀양, 당신.................”

거녀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상대의 어깨를 휘어잡고 호소한다.

“자기 혼자서 세상 고민 다 짊어진 것 같은 투정은 집어치워요!!!”

피요대원은 자기 손에 들려 있는 기구와 상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온 두 사람은 다시 주차장 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퍽’

복부를 감싸고 쓰러지는 거녀. 피요대원은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 잽싸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미안, 거녀양. 하지만 당신은 이해 못해.....!’

몇초 뒤에 아픈 배를 이끌고 겨우 일어선 거녀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때 벌써 피요대원은 저 하늘 위에서 여전히 황금빛 털실 같은 광선으로 전투기들을 유린하고 있는 일명 게리만도라를 향해 표면장력탄 발사기의 조준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는 결연히 하늘을 향해 표면장력탄을 쏘아올렸다. 아니 수치를 반대로 조정했다면 계면활성탄[界面活性彈]일지도 모르겠지만.

낮과 똑같은 화려한 불꽃에 이어 유리빛의 파동이 거대한 콘택트 렌즈처럼 밤하늘에 서서히 퍼져나가, 목표물인 괴수를 휘감는다. 피요대원은 이번에야말로! 라며 미소를 지었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은 얼어붙는다. 게리만도라는 아까 전자기를 증폭시켰을 때와 똑같은 몸짓으로 주변의 공간을 응축[凝縮]시켜, 자기 쪽으로 날아오던 파동의 렌즈를 튕겨내고 말았던 것이다. 어딘지 찌그러진 오목렌즈처럼 보이는 유리빛 파동이 도로 지상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두 사람이 있는 전망대를 향해서, 직통으로!

“...........................!!!”

낙담한 피요대원이 체념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싼다.

밑에서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거녀는 가슴의 포켓에서 보랏빛 쥘부채를 꺼내들었다. 눈부신 은하[銀河]의 오로라가 전망대와 그 주위를 감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영 이해할 수 없었던 ‘소년’은 피요대원이 쏜 표면장력탄의 파동이 도로 전망대 쪽으로 내려오는 걸 보고 경악하여 구원을 요청했지만 누구도 그쪽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끔찍한 시각적 착각과 함께 전망대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는 차마 바라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뒤 눈을 떴을 때,

“................................................!!!”

차가운 밤의 적막 속에 보라빛 거인이 웅크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전망대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녀는 갑자기 시간의 틈 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나타났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손 안에 소중히 감싸고 있던 사람을 ‘소년’ 쪽으로 내밀었다. 머리에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은 피요대원이었다.

‘소년’은 거인을 올려다보면서 이제까지와는 뭔가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전에 봤을 때보다 더 경건해지고 우아해진 듯한.... 사방에서 비춰대는 탐조등과 서치라이트의 불빛을 받으며 거인은 잠시동안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내려놓은 울트라하는 곧바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투표함을 인질로 잡고 거만하게 버티고 있는 게리만도라에게 접근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두 개의 기하학적으로 생긴 눈이 형형[熒熒]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늘 저편에서 아직 살아있었던 유성대장의 윙-01이 지원차 합류한다.



“UH-01 출현! 게리만도라와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P기관도 지원체제 돌입!”

UH-01 = Unidentified Humanoid [미확인 인간형생명체] 01. 은 방위군 내에서 붙인 울트라하의 코드네임이다. 청운중장은 어딘가 안도하면서도 입맛이 쓰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가능하면 오늘은 좀 안보고 넘어갔으면 했건만...’

기린참모가 속도 모르고 옆에서 지껄였다.

“꼴에 주인공이라고 참 늦게도 나오는군요. 어디 사는 누굴까요?”

바락참모가 점잖게 나무란다.

“어쨌든 이 순간만큼은 은인이니,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되리라 봅니다.”

“옳으신 말씀이긴 합니다만...”

옆에서 더더욱 속도 모르고 성완두 중위가 끼여든다.

“시장님과 도지사님으로부터 격려 전보입니다. 더불어 다음 지방선거 유세 때 어떻게든 UH-01을 모셔와 달라는 ‘당부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리 엔터프라이즈 대표부의 격려 말씀...”

“거기 놔두게. 나중에 볼 테니.”

청운중장은 갑자기 무지하게 줄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아?”

누군가 자꾸 귀찮게 뺨을 톡톡톡 두드려 대는 감촉이 영 못마땅해서 잠을 깬다.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다시 한번 보니까 그것은 ‘소년’이 물수건으로 얼굴을 마사지하는 것이었다. 머리에는 서투르게나마 붕대가 감겨 있고 팔 다리도 어딘가 좀 쑤신다. 몸을 일으킨 피요대원은 자기가 비이클 바로 옆의 들것 위에 누워 있었음을 알았다. 잠시동안 멍하게 앞을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서 ‘소년’에게 묻는다. “거녀양, 거녀양은? 거녀양은 어디?”

‘소년’은 어두운 표정으로 자기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결국 ‘그녀’가 왔어.”

그의 손가락이 하늘 위를 가리킨다.



그곳에서는 울트라하와 게리만도라의 치열한 사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만음동 중앙광장 상공에서 캐사모스톤의 자취방 상공으로, 수리구청 상공에서 보곰7가 전자상점가 상공으로, 탄강[呑江] 선착장 상공에서 아름동 놀이공원 상공으로, 앙끄시 전역의 하늘을 누비며 그들은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견제한다. 그리고 윙-01과 살아남은 방위군 항공부대가 그 사이를 파고들며 입체적인 공격을 가한다. 황금빛 광선이 밤하늘을 가르고, 거인은 급선회하며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괴수는 급격하게 고도를 바꾸어가며 곁으로 다가온다. 거인의 이마에 박혀있는 수정이 에너지 부족을 알리며 점멸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강공으로 전환한 거인은 게리만도라의 전신에 흐르는 스파크를 이겨내며 녹말풀과 통말뼈가 섞인듯한 두 다리를 휘어잡고 장쾌한 자이언트 스윙을 날린다. 강 한가운데에 처박히는 게리만도라. 강가로 내려와서 녀석을 끌어낸 울트라하는 그 거체를 하늘로 띄워올리고, 자신도 점프하면서 괴수의 가슴팍에 위력적인 하이킥을 먹인다. 떨어져내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이단옆차기.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게리만도라는 몸 여기저기에 붙어있거나 계속 떠 다니고 있는 투표함들을 끌어내어 하나의 쌍절봉처럼 만들어서 반격을 가해 온다. 그러나 울트라하는 재빠른 몸짓으로 빛의 채찍을 소환하여 그것을 봉쇄. 다음 순간 일련의 몸짓과 함께 울트라 염력을 발동시켜 투표함들을 모두 자기 쪽으로 끌어온다. 이제 투표함들이 이루고 있는 서너개의 거대한 링은 울트라하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녀는 명실공히 ‘반지의 여왕’이었다.

괴수가 당황하여 막다른 골목에 몰린 문어처럼 등짝에서 열 개의 무기질 촉수를 뽑아내어 반격을 가해 오자, 울트라하는 투표함으로 이루어진 링 위에 강력한 대전[帶電] 에너지를 코팅하여 그것을 급회전시킴으로써 몸 쪽으로 다가오는 촉수를 모두 가루로 만들어버린다. 환상의 필살기 라하 싱크로트론의 등장이다!

그리고 마무리, 경건한 몸짓과 함께 두 팔을 교차시켜 강력한 반양자[反陽子] 광선을 발사하여 게리만도라를 형체도 없이 불태워 버린다. 분자 하나하나까지.

“좋았어! 키운 보람이 있구만.”

윙-01의 기수를 돌리며 키득거리는 유성대장을 갑작스런 통신이 방해한다.

“도~대체 대장님이 <쿨럭> 울트라하를 언~제 키웠습니까? <에취>”

“뭐야 이 목소리? 유태군인가? 용케 구조되었나 보구만”

“지금 해안 순시정 얻어타고 <훌쩍>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으에취>”

“쌀쌀한 겨울밤이다. 수영하기엔 별로겠지. 감기 조심하라구.”

“벌써 걸렸습니다. <푸헤취> 의무반에 연~락좀 해주십쇼. <에츄>”

“박사님이 화낼텐데. 지난달에 관급품 감기약을 더 써버렸거든. (^_^) 아아... 그나저나 강물 바닥에 가라앉은 β호를 어떻게 건져낼지 골치아프군...”

물에 흠뻑 젖은 쇳덩어리를 앞에 놓고 비명을 지르는 정비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유태대원은 한동안 정비반 근처에도 가지 않는 편이 몸에 좋을 것이다.



반쯤 누운 채로 거인의 활약을 지켜본 피요대원은 갑자기 억제하기 힘든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들은 결국 또다시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벗어나려 해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에 걸린 기분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동거녀까지...

얼래?

“어~~~~~~~~~~~이”

어둠 저편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피요대원은 자기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동거녀였다.

어미잃은 새끼 뻐꾸기처럼 두 팔을 파닥파닥 흔들어대며 달려오는 모습이 호들갑스러워 보였지만, 그것은 확실히, 살아 있는 동거녀였다. 폭발 속에서 미친듯이 뒹굴기라도 했는지 제복은 온통 검댕투성이에다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

먼저 그쪽으로 달려간 것은 ‘소년’이었다. 그는 놀라는 얼굴로 거녀에게 다가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피요대원 쪽으로 그녀를 끌다시피 데리고 온다. 거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뭔가가 전망대 쪽으로 내려오는 걸 보고 정신없이 반대편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후폭풍[後爆風]에 휘말려서... 저쪽 블럭까지 날아가 버렸지 뭐예요. 어딘가에 부딪혀서 한참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죠. 그런데, 와~세상에, 어떻게 그 와중에서 살아날 수 있었어요? 정말 피요양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전투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말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애요♥”

“나, 나는 그저..........................”

“아까 뺨을 때려서 미안했어요. 나도 평소엔 안 그런데 흥분하면 못말리는 성격이라서... 얘긴 나중에 하고, 지금은 좀 쉬도록 해요. 아무 생각 말고. 나요? 나는 이래뵈도 팔팔하니까 뒷정리 도우러 가봐야죠. ...아! 저기 하라 선배도 오네요. 그럼.”

동거녀는 모포를 정성스레 덮어주고 방위군 4WD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재빠르게 달려갔다. 그 뒷자리에는 불시착 때의 상처로 응급처치를 받고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한 하라대원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서서 거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그녀에게 지시를 내리고 피요대원 쪽으로 절룩거리며 걸어왔다. 피요대원은 달팽이처럼 모포 속으로 깊게 파고들어갔다. 이대로 땅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라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는 자신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얘기는 들었어. 용감하게 최전선에 뛰어들었다며?”

왠지 비꼬는 투로 들려서 눈물이 나려 했다. 어깨가 떨려 왔다.

“왜 그런 짓을 했니?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아. 나도 물론 그렇고.”

하라대원은 모포를 굳이 치우려 하지 않고 조용히 얘기했다.

피요대원은 대답 대신에 모포 밖으로 한쪽 손을 내밀었고, 하라대원은 차분하게 들것 옆에 앉아서 자기의 두 손으로 그 손을 잡았다. 차가운 밤 공기를 뚫고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이윽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선배.”

“응?”

“우리는 울트라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건가요?”

“...............................”

하라대원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계속 이대로만 머물러 있는 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아무리 그녀의 도움을 받는 일이 많다고는 해도, 이건 우리가 하는 우리 일이야.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

“선배는 그녀를 철석같이 믿는군요.”

“믿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도 있거든.”

피요대원은 가까스로 모포 밖으로 상반신을 빼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상스럽게도 조금 전까지 고민했던 것이 왠지 바보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는 옆에 앉아있는 하라대원의 야무진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선배의 그런 점이 좋아요.”

하라대원은 말없이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쓰다듬는다.

어두운 밤하늘에 여객기 한 대가 상쾌한 굉음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지령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기린참모가 관급품 맥콜을 들면서 보고했다.

“투표함의 94%가 무사히 회수되었습니다. 다소 늦어졌지만 내일 중으로는 개표작업이 이루어질 겁니다. 선거를 제때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바락참모가 참치크래커를 하나 집으며 덧붙인다.

“하지만 무수한 물적, 경제적, 정치적 손실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되죠. 의사당은 파괴되고 신병기와 항공부대가 박살났습니다. 우리 방위군에 대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조심해야 합니다.”

청운중장은 어쨌거나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걱정하고, 일단은 보람찬 하루일을 끝낸 순간의 기쁨을 좀더 오래 간직하고 싶소이다. 여러분 모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소. 건배합시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청운중장은 이 시간에 누구지? 라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바깥 복도로 나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들은 적이 없는 목소리의 사내였다.

“무슨 용건이오?”

“잉큐[InQ]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게 어쨌다는 거요? 당신은 누구요?”

“오늘 당신의 업보와 비슷한 사건을 보고 감상이 어떠셨는지요?”

“뭐라고?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협박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단지 한가지 알려드리려고 하는 거죠.”

“......말해 보시오.”

“당신의 계획,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좀더 신중해지시오.”

“내 계획이 뭔지 당신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리고 설령 안다고 해도 무슨 근거로 참견하는 거요?”

“그런 걸 다 말하려면 전화비가 모자랍니다. 이게 이래뵈도 국제전화라서요. 그럼 실례.”

“잠깐만! 아까 ‘비슷한’ 이란 건 무슨 얘기였소? 이 사건 역시 누군가가 저지른 인재[人災]라는 의미요?”

“그건 당신이 스스로 알아보셔야 합니다. 부디 건전하시길.”

“이, 이봐!!! 잠깐 기다려!!! 너 누구야!!!!!!!!!!!!!!!!!!!!!!!!!!!”

전화가 끊긴 직후, 청운중장은 통신회사에 연락해서 방금 걸려온 전화의 발신자 추적을 의뢰했다. 그러나 발신지가 힝글랜드 어딘가라는 것 말고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앞당길 수밖에 없겠군. 그는 생각했다.

문 저편에서 들려오는 기린참모의 권유를 듣고 그는 다시 지령실로 들어갔다.



“오래간만이군. 힝글랜드의 겨울은 어떤가?”

“늘 그저 그렇습니다. 건강하게 지내고 계십니까?”

“요즘은 통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말야. 시킨 일은 잘 했나?”

“혼비백산하더군요. 그런데 회장님과 연결지어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나도 공범자인데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리가 없지 않나? 만약 그가 나를 의심하게 된다면 그건 그가 갈 데까지 갔다는 얘기가 되겠지.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겠지만.”

“회장님은 복잡 미묘한 장난감을 좋아하시지요. 그나저나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둘 위인도 아닌 듯 한데, 이런 통화가 효과가 있을까요?”

“나로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를 바라고 있네. 그건 그렇고, 최근 르 프랑에서 이벤트가 있다면서?”

“벌써 알고 계셨습니까? 주변국 문화예술 관계자들이 한곳에 모이는 경축행사 쯤 될 겁니다. 그 전설의 꼴레뜨 마르시앵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군요. 필요하시면 뭐 기념품이라도 보내드릴까요?”

“아니 그건 됐어. 다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서, 혹시 구경가게 되면 나중에 얘기나 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장로회의가 보냈다는 그 정치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영향력이나 비전은 웅대하더만. 하지만 너무 단순하고 투박해 놔서 그다지 보는 재미는 없더군. 그래서 적당히 구슬러 주고 약간의 선물을 해 주었네. 다시 만나는 일은 아마 없을 테지.”

“회장님의 그 선물이 어떤 건지 궁금증이 동하는군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게나, 발도제.”



안경을 쓰고 머리가 슬슬 벗겨지기 시작하는 매섭고 깡마른 체구의 그 정치인은 도대체 자기가 무얼 잘못했길래 이런 곳에 잡혀와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푸른 정장 차림의 쌍둥이 형제가 입을 열었다.

“사무실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TS이고 이 사람은 TM입니다. 우리는 나우민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무분별한 이성문명[異星文明]의 유입으로부터 지키는 임무를 띠고 있죠. 일종의 출입국 관리관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독자들은 그들이 일명 Men In Blue 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무슨 얘긴지 잘은 모르겠지만 공무원이라는 소리군요. 내가 대체 뭘 어쨌다는 겁니까? 난 외계인도 아니고 불법입국자도 아닙니다.”

“저희는 최근 선생님께서 모종의 집회에 참석하셨다가 지명수배중인 몇몇 외계인들을 만나셨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세밀한 조사 끝에 이 사진들과 기록을 발견했지요. 모두 선생님의 차 트렁크에서 나온 겁니다.”

“무슨 말이오. 내 차 트렁크라니?”

“직접 보시죠.”

아니 이럴 수가! 나와 악수하고 있는 이 자바 불탑같은 치렁치렁한 물건은 대체 뭐야? 분명 이건 장로회의가 ‘그’와 나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주선한 그 파티였다. 내가 참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만난 사람들은 모두 정상이었고 이런 할로윈 분장행렬에나 나올듯한 호랑말코들은 있지도 않았다! 이 코끼리와 인간의 교배종같은 텁수룩한 회색 땅딸보는 뭐야? 머리가 세 개 달린 짝퉁 비룡[飛龍] 주제에 루이14세 스타일의 가운을 입고 와인을 마시는 이놈은 또 뭐고?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저, 이것 보시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 나는 분명 이 파티에 참석했지만 그때 만난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었소. 나는 그저 백인 몇명과 흑인 두어명과 동양인 여러명과 라틴인 서너명과 에보리진인 한명을 만난 죄밖에 없소! 증거가 필요하다면 나와 함께 참석했던 리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이 얘기해줄 거요! 이건 악의적으로 조작해낸 합성사진일 거라고 나는 믿소.”

TS, 아니 TM이었나? 어느쪽인지 헷갈리지만 하여튼 그가 청색 링클프리 바지를 괜히 어루만지며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리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이라뇨? 저희 조사에 따르면 그 사람은 문제의 파티에는 오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는 그날 해외 출장중이었죠. 저희가 문의해보니 그는 당신을 알지도 못한다고 하던데요.”

정치가는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그럴 리가 없소.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요! 나는 그 뒤에도 그와 만나서 식사를 하고 사업상 얘기도 하고... 그렇지, 그 자동차도 그가 고쳐준 것이오. 내 운전사와 측근에게 물어보면 리 엔터프라이즈의 공장에 갔다왔다는 사실을 증언할 거요.”

“벌써 물어봤습니다. ‘최근 3년동안에 정비한 일이 없다’던데요? 너무 낡아서 새 차를 사는게 좋을텐데도 왜 자꾸 고집을 부리시는지 라던가 뭐라던가...”

---------저 같으면 새 차를 사겠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게 그런 뜻이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건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이야. 내가 실제로 만난게 지구인이든 우주인이든 나는 그들과 아무런 깊은 관계도 아니고 아무것도 들은게 없어! 그저 같이 밥먹고 수다나 떨었을 뿐인데! 정치인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TM, 아니 TS인가? 하여튼 그는 말한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보니 선생님께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이의 생활에 대해 상당한 혼란을 느끼고 계시는 듯한데, 그렇다면 그들 중에 숨어있는 외계 테러리스트가 선생님의 잠재의식이나 갖고 계신 물건 속에 어떤 메시지라던가 암시를 심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점에 대해서는 저희가 이제부터 여러 날에 걸쳐 상세하고 세밀하게 조사하겠습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고 고통도 없으니 염려 마십시오. 다 끝나면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억을 지우셔야 할 겁니다만.”

“웃기는 소리! 나는 대선 출마자요. 지금쯤 선거결과가 공표되었을 텐데. 만약 내가 떨어졌는데 이대로 자리를 비운다면 사람들은 나를 비겁한 도망자로 오해할 거요! 그리고 만약 내가 당선되었다면 더더욱 내가 자리에 있어야지! 당신들은 내게 이럴 수 없소!”

“걱정 마십시오. 그 기간동안은 저희가 어떻게든 조치를 취할 겁니다. 그럼 먼저 기억 퇴행 실험부터 시작하죠. 자, 이 기계를 머리에 쓰시고...”

“집어쳐! 내게 이럴 수는 없어. 당신들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고 나는 전쟁 때 쌀이 없어 수돗물로 배를 채웠어!!!!!!”

“네, 네, 알아모시겠습니다. 흠, 전쟁 중에 ‘수돗물’이라...특이 사항이군.”

“당신들 후회할거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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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TUDIO ASTRONUT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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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표 당시에는 『간만의! 울트라하 스페셜[久し振りの!ウルトラハ․スペシャル]』이라는 타이틀로 게재. 이후 제4시즌 개막편으로서, 제19화로 개칭하고 일부 내용을 가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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