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분류 전체보기 (326)
창작의 샘터 (88)
패러디 왕국 (85)
감상과 연구 (148)
일상의 기억 (5)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2003-05-07] 저 양을 잡아라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38
 



<< 저 양을 잡아라 >>

Catch That Sheep







“어럽쇼, 언제부터 이쪽 도시에 시에스타[낮잠] 풍습이 생겼나?”

라디미르 보코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변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의 도로 위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마치 잠의 요정 샌드맨이 눈에 모래라도 뿌린 것처럼 양순하게 잠들어 있었고, 차도 위의 자동차들도 운전자들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동을 끈 채로 잠이 들어버려 모두 제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아니 운전자들이 시동을 껐다기보다는, 그들이 잠드는 순간 엔진도 무언가의 강력한 작용에 의해 멎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이렇게 해서, 여느 때 같으면 모두들 출근 혹은 퇴근(밤일하는 사람의 경우)하느라 분주할 터인 이 시간대에 거리의 모든 기능이 올 스톱해버리는 묘한 광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별일 다 보겠네. 시에스타라면 점심먹고 오후 늦게에나 하는 것일 테니 그건 아니겠고, 지금은 한창 바쁠 때인데... 도시 사람들이 하룻밤새 집단으로 나르콜렙시[수면병]에라도 걸린 건가? 정신과 의사들이 떼돈 벌 기회로군.”

그러잖아도 나날이 밀려오는 마감일자에다가 평소에 그를 괴롭히던 불면증까지 더욱 심해져서 요즘 들어 통 잠을 못 잔 라디미르는 사이좋게 자기만 쏙 빼놓고 저렇게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니 은근히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면면도 가지가지였다. 열심히 아침운동을 하다가 쓰러진 조깅복 차림의 아가씨, 구걸의 신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향하던 맹인 거지, 길가에 좌판을 펼쳐놓고 아침을 거른 바쁜 직장인들에게 핫도그를 팔던 아저씨, 오늘은 어떻게 담탱이를 골탕먹이고 수업을 땡땡이칠까 열심히 궁리하며 학교로 가던 고교생들, 그 중에서도 가장 걸작인 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잠든 걸 보고 몰래 그 틈을 타서 지갑을 빼내려고 접근했다가 자기도 얼떨결에 잠들어버린 소매치기였다. 라디미르는 그 바로 50센티미터 뒤편에 순찰 중이던 경찰관이 경찰봉을 들고 호루라기를 입에 문 채 곯아떨어져 있는 걸 보고, 저 소매치기가 과연 잠이 깬 뒤에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여느때와 전혀 다를 게 없는 사람도 있긴 있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지난밤 잼보니로 마구 병나발을 불다가 쓰레기 봉지 옆에서 행복한 얼굴로 곯아떨어진 취객이 누워 있었다.

“그나저나, 이것이 집단 현상이라면 어째서 나만 멀쩡한거냔 말이야? 누구보다도 잠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난데 말이지. 으으음”

그는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세상에 자기 혼자만 덩그라니 남겨진 듯한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고 우울에 빠져들었다. 그는 감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젓고 팔운동을 크게 한번 한 뒤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신선한 커피우유와 호두파이 조각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 계산대에 돈을 적당히 던져주고 나올 때 보니까 역시나 점원들도 빗자루나 맥주상자를 들고 잠들어 있었다.

“어이! 그대로 자고만 있으면 월급 다 달아난다구!”

라디미르는 자기가 직업적인 강도도 아니고 남의 금전등록기를 뒤지는 나쁜 버릇도 없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억지로 기분을 띄우기 위해 찬 우유를 마시고 서걱거리는 파이를 물어뜯으며 일부러 활기찬 모션으로 길거리를 행진했다. 그러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의혹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3번가의 모퉁이를 돌아서서 건널목을 제멋대로 건너 자기가 일하는 잡지사 쪽으로 접어들어 보니 근처 식당에서 기르는 늙은 개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 옆 담벼락에는 역시 근방에서 자주 보던 검은 도둑고양이가 우아하게 꼬리를 감고 취침 중이었다. 자세히 보면 담벼락에 붙어 행진하던 불개미 떼까지 가만히 움직임을 멈추고 붙어있었다. 수직으로 붙어서 잠을 자고 있는건가?

“이럴 때 꼬리에 폭죽이라도 달아주면 기가 막힌 장면이 연출되지. 흐흐”

라디미르는 옛날의 철없던 개구쟁이 시절 자주 했던 장난을 회상하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같은 짓을 사람에게도 해보면 어떨까 라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스테레오 시스템을 빌려와서 시끄러운 헤비메틀이라도 틀어볼까? 아니면 공사장의 토목기계를 끌고 와서 땅을 파거나 굴을 뚫는건 어떨까? 혹은 아주 소박하게 근교 농가의 수탉 한마리를 데려와서...

“.............................?!”

앞쪽 모퉁이를 믿을 수 없으리만치 빠른 속도로 달려 꺾어들어가는 묘한 그림자를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치 날으는 솜사탕 같은...

그러나 그는 기분 탓이려니 하고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시간의 흐름은 변함없다는 건가.... 벌써 12시라니.”

해는 중천에 떠올라 점심때가 다 되었건만 여전히 아무도 일어나지 않고 거리도 변함이 없다. 무슨 곡절인지 바깥 지역으로부터 유입되는 자동차나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도시는 호흡을 멈추었고 공기는 온화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뭔가 말할 수 없이 적막한 분위기가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라디미르 보코프는 이러다가 진짜 전세계가 정지하고 자기만 남는게 아닌가 싶어 불안해졌다. 다른 사람 같으면 기회다 하고 평소에 못했던 일들을 실컷 하며 방탕하게 즐길만도 한데, 우리의 고지식한 라디미르는 단지 ‘오늘도 내일도 이 모양이면 밥은 어디 가서 먹지? 난 인스턴트는 질색인데’라던가 ‘하미드에게 꿔준 돈이 꽤 되는데 그 친구가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같은 군걱정이나 해 가면서, 시계를 바라보고, 창밖을 내다보고, 사무실 안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는 옆자리 책상에 엎어져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덩치 좋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불쌍한 조르디아노! 이런 때 깨어 있었다면 동네의 맛좋은 식당은 모조리 쳐들어가고도 남았을 텐데... 안됐어. 우리팀 제일의 미식가가 아니었던가!’

......굳이 안 해줘도 되는 남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확실히, 동료들이 잠들어 있는 걸 보며 그들이 이런 상황에서 홀로 깨어 있다면 어떤 짓을 벌일지 상상해 보는 것도 심심풀이로는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피곤하다고 아우성이었던 그웬은 분명히 남들과 어울려서 그냥 잘 테고... 이놈의 직장 너무 지겹다던 빈스는 짐꾸려들고 여행을 떠나겠지. 세상은 자기의 미모를 너무 몰라준다고 불평이던 해리엇은 거리로 뛰쳐나가 멋진 남자가 잠들어 있지 않나 찾아볼지도 모르겠고... 항상 요즘은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며 분개하던 데릭은 잠들어 있는 범죄자들을 몽땅 짊어지고 경찰서에 배달해 주려나? 세끼 밥食보다 만화가 좋다던 밥Bob은 평소에 보고 싶었던 만화책을 싹쓸이해 와서 하루 종일 읽을 듯 하군, 챠우는 남들보다 결벽증이 심하니까 분명 팔을 걷어부치고 청소를 시작할거라는 생각이 들어. 어쨌거나, 다들 깨어있다면 꽤 재미있어했을 텐데...’

그나저나 그건 그렇다치고, 난 대체 뭘 하면 좋을까?

라디미르는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난감했다. 물론 일상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한없는 시간이 주어진다고 무조건 좋아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평소에 무얼 하고 싶었는지, 해소하지 못한 욕구가 무엇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먹을 걸 노략질하여 쑤셔넣는 건 취향이 아니었고, 비디오나 책을 빌려보고 싶은 생각도 안 들고, 그렇다고 누워 자는 부녀자를 납치하여 하렘을 만들거나 하는 파렴치한 짓도 체력이 딸려서 불가능했다. 뭔가 시작한다고 해도 얼마 안 있어 이 마법이 풀리고 사람들이 깨어나면 자기의 체면과 사회적 명예는 어찌될 것인가?

이건 마치 분골쇄신 회사만 위해 일하던 상사원이 명예퇴직 다음날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을 때 느낄만한 난감함과도 비슷했다. 하고싶은 일을 한다고 해도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야 안심하고 할 텐데, 이런 진공상태 속에서는......

“골치아픈 생각은 이따가 하고, 뭐라도 먹으러 가야겠다. 분명 카페테리아 냉장고 안에 육포가.....”

그러나 운명이란 녀석은, 그를 곧바로 식당으로 보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우와앗--------------------!!! 거기 아저씨 비키라구 비켜!!!”

쨍그랑랑와장창창쿠당탕!

충혈된 눈을 반쯤 감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사무실 앞쪽의 커다란 전망창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격렬한 전기 스파크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외부로부터 엄청난 속도의 기류[氣流]가 흘러들어왔다. 고층빌딩이라서 안과 밖의 기압 차가 생각보다 큰 탓이었다. 다행히도 안전유리였기 때문에 파편이 넓게 튀지는 않아서, 사무실 안의 동료들은 무사했다. 그들은 이런 북새통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태평하게 잠만 자고 있었다.

“뭐, 뭐, 뭐, 뭐, 뭐야.......?”

전망창을 깨고 라디미르의 정면을 향해 날아온 것은, 아까 얼핏 보았던 거대한 솜사탕 같은 형체였다. 어찌보면 만들다 만 불량 솜사탕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햇볕에 말린 이불보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갓 깎은 푹신푹신한 양털 뭉치 같기도 한 그 물체는 놀랄 만큼 가벼운 동작으로 라디미르 옆을 스쳐지나가 사무실 반대편의 벽을 뚫고 잽싸게 도망쳤다.

라디미르는 전기의 찌릿한 느낌에 놀란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으나 겨우 균형을 잡고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그런데-

“앗! 일어서면 안돼! 부, 부딪힌다-----!”

“엉?”

꽈다다다당!

라디미르는 상황파악이 잘 안된 나머지 멍하니 서 있다가 정면으로 날아들어온 그림자와 정통으로 부딪혔다. 눈에는 번쩍번쩍 못보던 별이 가득 보이고 세상은 회전목마라도 탄 것처럼 사정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는 뇌진탕을 걱정할 새도 없이 사무실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었다.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마구 욕을 퍼부었다.

‘................니미럴......내가 두번다시 솜사탕 먹나 봐라.........’





“-----------그, 어, 무, 뭐를 찾으러 왔다고?”

머리에 손수건과 압박붕대를 대충대충 감은 라디미르 보코프가 되물었다. 그들은 일단 카페테리아에 내려와 냉장고에 있는 음식 몇가지를 점심 삼아 꺼내놓고는 별로 우호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말했잖아. 이해력이 영 개차반이군.”

“내가 어떤 상태인지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한번만 더 얘기해줘.”

“도망친 전기양[電氣羊]을 잡으러 온 거라니까. 이제 됐어?”

“아까 그 털뭉치가? 호, 그럼 너는 양치기란 말이구나?”

“당신네 표현으로 한다면,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정말 책임 안 질거야?”

라디미르는 자기와 접촉사고를 일으키고도 사과 한 마디 없이, 오히려 당신 땜에 다 잡은 양을 놓쳤으니 책임지라고 어거지를 쓰는 이 정체모를 소녀를 보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는 은은한 금발 머리에 15~16세쯤 되어 보였고, 검은 무늬장식 테두리가 달린 하얀 블라우스와 폭신한 가죽바지를 입고 식당에서 세모꼴로 접어놓은 냅킨과 비슷한 형상의 깃털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그림책 속의 양치기가 늘 그렇듯이 끝이 구부러진 커다란 나무 지팡이까지 들고 있었다. 얼굴은 그다지 밉지 않게 생겼지만 눈에는 초조한 빛이 가득했고 말투에는 거만함이 배어 있었다.

아무래도 소녀가 사는 곳은 현실 세계와는 또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인데, 그곳에서 기르는 특산품인 전기양은 인간의 꿈[夢] 에너지에 특히 민감한 바, 어느날 그중 한 마리가 실수로 우리를 빠져나와 이쪽 현실 세계에 파고들어서, 그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잠재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게걸스럽게 허기를 채우는 모양이었다.

소녀가 양을 제 시간에 데려가지 못하면 혼날 거라는 사실은 안 봐도 뻔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상대의 건방에 오기가 발동한 라디미르가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이봐, 자꾸만 내게 책임지라고 말하는데 오히려 잘못은 그쪽이 더 큰거 아냐?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뛰어들어서 사람 놀라게 하고 충돌해서 부상까지 입힌 건 분명 그쪽이라구! 아직도 머리가 얼얼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올 지경이란 말이야... 만약에 제대로 걸고 넘어지면 업무방해에 재물손괴에 과실치상까지 성립한다고! 게다가 말이지, 애초에 저 망할 놈의 것이 이 도시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다 잠들게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너희가 관리를 잘못한 게 이유 아니던가?”

소녀는 모자를 약간 삐딱하게 고쳐 쓰더니 도끼눈을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훗, 말 하난 청산유수로군.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어떻게 해서든 그 양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일손이 필요하다는 사실 뿐이야. 내가 저녀석을 데리고 내 영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네 마을 사람들도 천년만년 저렇게 자고 있을텐데, 그래도 좋아? 응?”

그녀는 도전적인 눈길로 라디미르의 갈색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소리질렀다. 세상에 저애는 자기 양떼도 저런 식으로 다루나? 그나마 한 마리만 도망친 게 용하군. 저쪽 세계에선 양치기가 의외로 존경받는 직종일지도 모르지...

라디미르는 이마에 내천[川]자를 그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하긴 이대로 입씨름만 하느니 차라리 협력해서 되도록 빨리 마무리를 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오후에 할일도 없고 하니...

마침내 결단을 내린 그는 왠지 상한 듯한 베이컨-참치-감자 샌드위치를 조심스럽게 씹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도와주길 바라는데?”

소녀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실실 눈웃음을 치며 그에게 속삭였다.

“미끼가 필요해♥”

라디미르는 자기가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이러고 있으면 오는 거야? 믿어도 돼?”

그들은 건물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30대 초반의, 수염이 듬성듬성하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헐렁한 외모의 예비 아저씨가 온몸에 끈적거리는 아교로 오리털을 처덕처덕 바르고 그 위에다 솜과 인조 양털로 만들어진 침대 커버를 뒤집어쓴 모습은 꿈에서라도 별로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다. 게다가 전기양의 방전[放電]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정전기 방지제를 잔뜩 뿌리고 피뢰침까지 연결하여 그 꼴은 더더욱 볼만하게 되어갔다.

하늘을 나는 신비한 양치기 소녀는 수백번 놓친 범인을 이번엔 꼭 잡으리라 다짐하며 투지를 불태우는 민완형사같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기양은 이미 잠든 인간은 건드리지 않아. 깨어 있는 인간이 잠에 곯아떨어질 때의 안락감과 그 뒤에 발생하는 REM수면의 파동을 주식으로 삼지. 그래서 계속 새로운 인간을 찾아서 헤맬거야. 하지만 행동반경이 그리 넓은건 아니니 언젠가는 당신의 반응을 쫓아 여기에 나타날걸. 아까처럼 말야.”

“난 불면증 탓인지 전기양을 봐도 잠이 안 오던데.”

“녀석은 그걸 알아차릴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않아. 일부러 말해주지만 마.”

“그럴듯하지만 이런 분장은 대체 무슨 필요가 있다냐?”

“그냥 재미로♡”

라디미르는 속으로 양치기의 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젠 화낼 기운도 없다...... 그건 그렇고 네 솜씨, 믿어도 되는거야?”

“못믿겠다면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지. 핫핫”

“네가 날 줄 아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하여간에 말야, 이래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실패한다면 난 더이상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알아서 하라구. 이 세상이 이대로 잠들어서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난 더이상 신경 안 쓸 거야!”

“성질급한 양반일세.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 아니까 지금은 입을 꼭 닫고...... 제기랄, 왔어!”

“뭐? 난 안 보이는...... 우거헉!”

양치기 소녀는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에너지를 충전하더니 마치 마녀가 빗자루 타듯 지팡이 위에 걸터앉아 날기 시작했고, 미리 지팡이 끝에 강철처럼 단단한 매직 로프로 연결되어 있던 라디미르의 몸은 숨쉴 사이도 없이 하늘로 같이 떠올랐다. 아래를 쳐다보자니 고소공포증이 발동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오오우아~~~~~~~~~~~~~~~~ 이런 검사스러운 일이!!!!!!!’

눈부신 창공을 배경으로 하나의 탐스러운 털뭉치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귀에 거슬리는 울음소리인지 뭔지를 내며 사방에 전기 스파크를 흩뿌리면서 날아오고 있었다.

소녀는 신중하게 방향을 조절하면서 하늘에 뜬 상태로 잠시동안 미끼를 허공에 매달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자기의 기색을 지우기 위해 호흡을 멈추고 움직임도 완전 정지한 채 눈을 감고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미심쩍은 듯 주변을 빙빙 맴돌던 전기양은 마음을 굳혔는지 날쌔게 방향을 바꾸어 미끼를 향해 내리꽂히듯이 날아왔다.

거의 손 끝에 닿을락말락한 데까지 온 순간, 소녀는 침착하게 지팡이와 함께 자기 몸을 180도 아래로 회전시켜 거꾸로 매달린 꼴이 되어서 전기양을 향해 손을 뻗쳤다. 그 순간의 반동으로 라디미르를 감싼 털봉투는 스프링을 부착한 오뚜기처럼 위쪽으로 튀어올랐다.

전기양은 아슬아슬하게 소녀의 손을 벗어나 다시 오른쪽 위로 상승했다.

“야이~~~~ 좀더 잘할 수 없어?! 어지러워 먹은게 다 넘어오려 한다~!!!”

“미끼는 닥치고 구경이나 해! 다시 한번 간닷-!!!!!”

소녀는 날쌔게 몸의 각도를 틀어 지팡이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시계추처럼 격렬하게 아래위로 흔들리던 라디미르도 겨우 평형을 되찾았다. 그는 울렁거리는 속을 꾹 누르며 ‘내가 왜 샌드위치 따위를 먹었던고’라며 땅이 꺼지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전기양은 그들의 위쪽 하늘에서 동태를 살피며 잠시동안 맴돌다가 다시 미끼를 노리고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뜻모를 금색의 부호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는 올가미와 약병을 꺼내어 양손에 쥐고 심호흡을 했다. 평소에도 윤기가 흐르는 소녀의 모발이 반사되는 저녁 햇빛을 받아 가을날 보리밭처럼 물들었다.

“조금만 더 참으라구. 「메리에게는 아기양이 있었네~」라도 부르면서!”

“내가 무슨 토머스 에디슨인줄 아냐---!”

“그럼 아무 노래나 불러. 원 어른이 땍땍거리기는.”

긴장감이 넘쳐흘러 바닥에 얼룩을 만들 정도로 공기가 팽팽해진 순간, 전기양은 망설임을 날려버리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수직활강 포즈로 달려들었다. 유체역학과 항공역학을 완전히 무시한 멋진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아까보다도 더욱 가까이 라디미르의 뇌를 노리고 접근해 오는 순간 --- 소녀는 지팡이 자체를 180도 회전시켜 다시 아래를 향하여 매달린 꼴이 되어 전기양의 정면에 약병을 던졌다.

푸아앙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약병이 무지개빛 연기를 내며 터졌고 그 연기를 들이마신 (어디로?) 전기양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다음 순간, 소녀는 지팡이를 둘러싸고 있던 두 다리를 놓고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서 몸을 가뿐하게 회전시켜 아래위를 바로잡은 다음, 정확한 솜씨로 전기양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부분에 올가미를 던져 꽉 졸라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허공에 떠 있던 지팡이가 그녀의 발밑으로 미리 내려와서 그녀를 태웠다.

소녀는 올가미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 뒤, 모자 속에서 작은 창살 달린 깡통을 꺼내어 전기양 쪽으로 살짝 던졌다. 옥수수 통조림 정도의 크기이던 깡통은 순식간에 사과상자 정도로 커져 전기양을 그 안으로 끌어들였고, 창살이 닫히며 철컥 소리가 났다.

소녀는 자세를 바로잡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점검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기운차게 소리질렀다.

“오예! 드디어 잡았~으. 인정하긴 싫지만 아저씬 정말 최고의 미끼...얼래?”

소녀는 지팡이 끝에 줄로 매달려 있어야 할 털봉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알고 아연했다. 매직 로프는 아까의 격렬한 회전운동으로 인해 깨끗이 잘려나간 뒤였다!

“...........................웁스.”





“미안, 쏘리, 고멘, 엔트슐디게, 알다시피 그건 사소한 실수였어!”

4개 국어로 요란하게 사과하는 셈 치고는 어째 성의가 없어 보인다.

“남은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했는데 사소---하다고!”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지 안그래? 나도 아저씨가 죽는건 바라지 않았어.”

불행 중 다행히도, 라디미르 보코프는 추락하는 도중 건물 한쪽 끝에 튀어나와 있는 깃대에 침대 커버가 걸려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난생 처음 경험한 고공에서의 추락 때문에 그의 정신은 별나라를 헤맸고 입에는 게거품이 가득했다. 양치기 소녀가 건져줘서 겨우 지상으로 내려온 그가 사무실 내의 간이 욕실에서 온갖 지저분한 장식을 씻어내고 사람다운 꼴이 되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날 저녁 8시의 일이었다. 이미 해는 서산으로 꼴까닥 넘어가고 사방은 칙칙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아침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은 세상모르고 계속 자는 중이었다.

겨우 냉정을 회복한 보코프는 소녀에게 물었다.

“전기양을 잡았는데도 왜 다들 자고 있는거지?”

“빼앗긴 꿈 에너지를 보충하려면 내일 아침까지는 자야 할거야. 내일쯤이면 다들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으니까 걱정말라구.”

다행히 따뜻한 계절이었으므로 얼어죽거나 감기에 걸리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다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앤드로이드라면 전기양의 꿈을 꾸겠지만... 사람이니까 나도 몰라.”

“꽤 박식하시군. 여기엔 얼마나 자주 오는거야?”

“관광 시즌에는 반드시. 요즘은 괴질 때문에 힘들지만♡”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들은 다시 건물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빌딩가 저편으로부터 불어와 낮 동안의 열기를 식혀준다. 마치 지난 하루동안의 일이 꿈만 같다. 그중 일부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이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이다.

양치기 소녀는 지팡이를 점검하고 짐들을 챙겨넣은 뒤에 밤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그 꾸밈없는 동작이 전에 본 도둑고양이의 발랄함을 연상시켜 라디미르는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아직은 웃을 수 있는 게 기뻐서.”

“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변같지만, 뭐 상관없지. 살아났어도 정신이 망가졌으면 정말 난리났을텐데 웃을 수 있다니 걱정 안해도 되겠네?”

“네 임무는 다한 거잖아? 내가 죽는다고 뭐 달라졌겠어?”

“만약 그랬다면 난 그 벌로 아저씨 일생을 대신 살아줘야 했을지도 몰라. 하긴 우리 기준으로 보면 몇달 고생하는 것밖에 안 되지만.”

“-뭐시라?!”

“우리 규칙은 묘한게 많지. 하여튼 덕분에 고향으로 바로 갈 수 있게 되었어.”

“그러면, 넌 나에게 빚진 셈이군.”

“-꿈 깨셔.”

그 건방진 소녀는 혀를 쏙 내밀며 그렇게 말한 다음 지팡이를 들고 옥상 한쪽 가장자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라디미르는 그 모습을 보며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만난 지 불과 반나절밖에 안 되었는데도.

“......저기.”

이륙 준비를 하던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거겠지?”

“아마도. 전기양이 탈주하는 사태는 그렇게 흔한 게 아냐. 당신네 세계의 시간으로는 천년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일이지. 게다가 그런 때에 항상 당신처럼 불면증 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라디미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얄궂은 기분이 들었다.

“살다보니 불면증에 감사드리게 될 날이 올줄은 몰랐는데”

“알잖아? 세상에 쓸모없는 건 하나도 없어. 아저씨같은 놈팽이도 포함해서.”

“여전히 건방진 녀석일세.”

양치기 소녀는 쓴웃음을 짓더니 지팡이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우수에 차 있었다. 그것을 본 라디미르는 문득 이 소녀의 나이가 겉보기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직접 물어볼 정도로 예의가 없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다른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이름, 너의 이름은?”

“이름?”

“그래, 개체를 표상하는 기호 말이야. 그런 게 너희에게 있다면.”

“몇 개 있지만 지금은 이거 하나만 쓰고 있어. - 벨로리타.”

“벨로리타라... 너같은 시건방에겐 좀 과분하지만, 그런대로 멋지군.”

“남의 이름 갖고 함부로 나불대다간 죽어.”

라디미르는 오른손 검지를 위로 흔들며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아아, 날 죽이려면 전기양 한트럭은 동원해야 할거야.”

피식 웃으며 하늘을 나는 양치기 소녀는 점점 높이 날아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라디미르는 그 모습이 한 개의 빛나는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대도시의 하늘에 나타날 리가 없는 무수한 별들이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어째서 전 시민의 생활에 하루동안의 공백이 있었던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 왜 우리 사무실 전망창만 깨져 있는 건지도 이상하고. 하기야 그 정도는 보험으로 처리되겠지만, 일이 끝날 때까지 임시 사무실을 빌려쓰는 것도 귀찮잖아?”

빌 조르디아노가 끊임없이 입안에 자질구레한 간식을 집어넣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얘기한다. 그는 24시간동안 이렇게 끝없이 에너지를 공급하는 기인이다.

“얼마 전에 읽은 만화에 이런 설정이 나오는데 말이죠.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의 집단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루를 지우고 그 하루 동안에...”

막내격인 밥 웨스트우드가 좋은 건수를 만났다는 듯 열띤 토론을 벌인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한동안 도시 기능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면 몇가지 혼란을 건너뛰어야 할걸. 일단 모든 스케줄이 엉망이 되었고 사람들 생활리듬도..”

원칙주의자인 데릭 왕이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한다.

“이걸 어쩌면 좋지! 어제 저녁에 소개팅이 있었는데 놓쳐버렸어! 만약 내 운명의 남자가 거기에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면~? 이건 누가 책임지냐구~~~!”

해리엇이 사자처럼 열에 받쳐 투덜거리자, 결벽증이지만 사려깊은 챠우 싱메이가 ‘도시 전체가 잠들어 있었으니 그 소개팅도 연기되었을지 모른다’고 위로한다. 그 뒤편에서 열심히 교정쇄를 보고 있던 그웬 드렉슬러가 외친다.

“이 부분은 보코프씨 원고가 들어가야 하는데, 누구 그사람 못봤어?”

조르디아노가 태평한 얼굴로 답한다.

“아까 전화했는데, 오늘은 절대로 일 안하고 잠만 잘거래. 어제도 불면증 때문에 보통 고생이 아니었대나봐. 휴직계와 원고는 책상서랍 안에 들어있을거야.”

“가만, 그렇다면 라디는 어제 낮도 깨어 있었던거겠지? 그친구는 혹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알려나?”

데릭이 의문을 제기하자 조르디아노가 남은 얘기를 전해준다.

“그거야 알수 없지. 근데 내게 한 말이 좀 요상했어. 자기는 아무래도 자고 있을 때보다 깨어 있을 때 꿈을 더 많이 꾸는 것 같대나. 그리고......”

“그리고?”

“오늘은 꼭 전기양의 꿈을 꾸고 싶다는 말도 했어.”

“------전기양? 뭐야 그게?”

그웬이 벙찐 얼굴로 물어보지만 조르디아노도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아냐, 불면증이 심해서 나사가 한군데 풀렸나보지.”

동료들이 이렇게 입방아를 찧거나 말거나, 장본인인 라디미르 보코프는 자기의 조촐한 하숙방에서 하루종일 행복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그가 과연 전기양의 꿈을 꾸었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신만이 아실 일이다.





THE END!





(C) ZAMBONY 2003.05.07.



:
위로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RSS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