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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03] 물고 물리고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5
 





<< 물고 물리고 >>

Vicious Circle







“델라웨어 카슨 씨 맞습니까?”

“그런데요.”

“시경의 뤼 치앙 첸 경위입니다. 출근 중에 죄송하지만 질문이 있어서요.”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왜 다들 이렇게 난리죠?”

“안됐습니다만, 상사인 싱글턴 씨가 간밤에 살해당했습니다. 야근 도중에.”

“네? 어떻게요?”

“즉사입니다.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았죠.”

“세상에......”

희끗희끗한 백발에 적당히 주름진 피부와 청요리집 주인 같은 후덕한 외모를 지닌 그 동양계의 신사는 홀로그램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델리를 제지하고 몇 가지 질문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 어제 숙직이었는데 갑자기 교대하고 굳이 집으로 들어간 이유는? (“컨디션이 개판이었거든요”) 소문에 따르면 싱글턴과 앙숙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는지? (“그런것까지 꼭 대답을 해야 하나요?”) 혹시 싱글턴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다른 인물은 없었는지? (“너무 많아서 책이라도 한권 쓸 정도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얼굴이 수척해 보이는군요. 밤에 잘 못 주무신 모양이죠?”

“몸이 아프니까 잠도 잘 안 와서 독서를 좀 했어요.”

“어떤 책을 읽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고등수학 문제집이오.”

뤼 경위는 별 괴짜 다 보겠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메모를 했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셔도 좋습니다. 바쁘신데 오래 붙들어둬서 죄송합니다.”

별별 쓸데없는 질문에까지 다 대답한 뒤에야 델리는 그들에게서 풀려나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먼저 출근한 동료들을 보아하니 그들도 도중에 붙들려서 고생한 모양인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작 아침 10시부터 이정도로 완벽하게 기분을 잡치는 것도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다.

델리는 계란형의 단말기를 잠시 OFF하고 지겨운 자리에서 일어선다.

“카르멘, 시간 있어? 카푸치노나 한잔 하자.”

“듣던중 반가운 소리네. 분위기가 이 모양이니 일할 맛도 안 나더라.”

뜨거운 머그컵을 들고 두 사람은 복도 한구석의 벤치에 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늦잠을 자서 좀 늦게 나왔더니 난리도 아니던데.”

“너도 경관을 만났으니 얘기는 들었겠지. 누가 그 망녕든 댄을 죽였대 글쎄.”

“누가 제일 먼저 발견한 거야?”

“나도 렌스한테 들은 얘긴데, 오늘 아침 6시쯤인가? 길리건 씨가 아침 순찰을 돌던 중에 댄의 사무실 쪽에서 뭔가 소리가 나서 달려가보니까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는 거야. 곧 구급차를 불렀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서 의사들도 고개를 저었대. 누구하고 싸웠는지 사무실은 심하게 어지럽혀져 있었고, 흉기는 발견 못했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댄의 장식장에서 신주단지처럼 아끼던 트로피 하나가 사라져 있더래.”

“범인이 들고 갔나?”

“지문같은거라도 묻었을까봐 걱정이 된 거겠지. 내일쯤 어디 하수도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는 거 아닐까?”

“넌 소설을 너무 많이 봤어. 그건 그렇고, 기분 참 묘하다. 댄이 우리한테 심술부릴 때마다 저 영감 언제 죽나 하고 뒷다마를 마구 까댄게 한두번이 아닌데, 진짜로 이렇게 되어버리니 어쩐지 마음이 불편한걸.”

“그사람 운이니 우리가 뭘 어쩌겠니. 저승 가서 천사들에게도 심술부리지는 않길 빌어야지... 아, 그건 그렇고, 한가지 빼먹을뻔한 게 있어.”

“뭔데?”

“길리건 씨 말로는 자기가 달려갔을 때 그 사무실은 안에서 잠겨 있었대.”

“진짜??”

“그래, 이상하지? 비상 열쇠는 둘뿐이고 하나는 길리건 씨가, 하나는 댄 본인이 가지고 다녔는데, 마침 길리건 씨가 열쇠를 잃어버려서 자물쇠를 바꾸려던 참이었대. 그 때문에 오늘 아침엔 지렛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간 모양이야.”

“하여튼 그냥 다른 회사들처럼 DNA록으로 하면 될걸 괜히 비용절감한다고 구식열쇠를 쓰더니... 근데 혹시 카르멘, 길리건 아저씨가 범행을 저지르고 열쇠를 어디다 갖다버린 거 아닐까?”

“그랬으면 아예 애초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하지 괜히 의심받을 소릴 왜 하겠니. 워낙 성실하고 고지식한 분인지라 다들 믿더라고. 나도 그렇고.”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랬을까?”

“모르지. 혹시 너 아냐? 바로 이틀전에 그 영감이 네 취미를 갖고 톡톡히 망신을 준 일이...... 아, 물론 농담이지만 말야.”

“야, 이런 얘기 그만하자. 경찰이 알아서 할테니 우리는 잊는게 좋겠어.”

“네가 먼저 얘길 꺼내놓고 무슨 소리니. 하여간 그만하자는 데엔 찬성이야. 커피 잘 마셨다.”





델리는 카르멘과 헤어져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쓸데없는 일로 밤샘을 했더니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커피를 마시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한바탕 시원하게 하고 세수나 신경안정제를 좀 먹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를 뒤지던 그녀의 손에 뭔가 정체모를 물건이 잡혔다. 전에는 분명 이 안에 있었을 리가 없는... 그런 물건...

피묻은 열쇠?

‘이게 왜 여기에 있지?’

그녀는 지문이 찍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 물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분명 자기 집이나 방 열쇠는 아니었다. 차 열쇠나 사물함 열쇠도 아니었다. 열쇠의 표면에는 초정밀 세공 기술로 깨알같이 새겨진 일련번호와 회사 상호, 그리고 관리책임자의 이름이 드러나 있었다. - 댄 싱글턴.

‘......마, 말도 안돼. 난 죽이지 않았어. 누군가 지나가다 내 주머니에 살짝 집어넣은 걸거야. 그래 틀림없어. 하지만 이걸 경찰에게 가져가면 뭐라고 할까? 나도 의심스런 눈초리를 받을 가능성이 높잖아... 어떻게 하면 좋지?’

고민하던 델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나머지, 그것을 조심스럽게 휴지로 싸서 좌변기에 던져넣고 물을 내렸다. 그 손가락만한 물체는 쿠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 도시의 온갖 폐기물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종말처리장을 향하여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델리는 몇분간 호흡을 조절한 뒤에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카슨 씨? 여긴 웬일이십니까?”

“아, 저, 그게............”

델리는 자기도 모르게 싱글턴이 죽은 그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출입구는 노랗고 빨간 비닐 테이프로 빈틈없이 차단해두고 그 안에서 뤼 경위와 몇몇 사복경관들이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그들을 보조하는 정복경관들이 뭔가를 바쁘게 운반하거나 방 이곳저곳을 사진찍고, 사무실 한가운데에서는 분필로 표시된 사람의 윤곽(시체가 있던 자리가 틀림없다)을 둘러싸고 흰 가운 차림의 두 사람이 뭔가를 찾고 있었다.

델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어설프게 둘러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드라마에서는 많이 봤어도 실제로 살인현장을 보는 건 처음이어서요. 잠깐 구경만 하는 건 괜찮겠죠?”

“넘어오지 말고 거기서 지켜보는 건 상관 없지만 너무 유심히 보신다면 의심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뤼 경위와 대화 중이던 검은 머리의 젊은 형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빌리, 어차피 중요한 조사는 다 끝났고 현장 보존 조치만 남았으니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뭐 있나. 납세자에겐 좀 부드럽게 대하라구.”

“하지만 경위님, 이건 원칙의 문제입니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라고요.”

“아니, 농담 한번 해봤네. 음? 뭔가, 브로넬?”

형광물질이 섞인 횟가루와 전자식 확대경과 적외선 카메라를 가지고 바닥과 책상을 꼼꼼하게 관찰하던 흰 가운 차림의 여성이 갑자기 뤼 경위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그는 그녀가 건네준 몇 가지 자료를 받아들고 양복 주머니에서 코안경을 꺼내어 쓰더니 심각한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뭔가 위화감을 느낀 델리는 그냥 인사하고 그 자리를 뜰까 말까 고민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전...”

“아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슨 씨. 당신 협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경위님, 무슨 말씀입니까?”

청년 경사 빌리 케인이 미심쩍다는 말투로 질문했지만 경위는 그를 무시했다.

“카슨 씨, 이리로 들어오시오. 테이프를 뛰어넘든 허리를 숙이든 그건 자유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걸 좀 보아주세요. 빌리, 자네도 같이 보세.”

그가 보여준 것은 방금 발견된 듯한 지문의 적외선 사진과 (오늘 날짜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구내 컴퓨터를 통해 출력한 사원 신상기록의 사본이었다.

“이건 내 프로필이군요? 어느 틈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만 수사를 위해서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그건 그렇고, 여기 이 사진은 아까 우리 요원이 이 방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유일한 새 지문입니다. 싱글턴 씨의 것도 아니고 이 회사 사람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죠?”

“잘 보십시오. 이 지문과 당신의 지문 사이에 공통점이 있지 않습니까?”

“공통점이요..........?”

“하긴 이래서는 잘 모르겠군. 브로넬, 자네 핸드컴HandCom 좀 빌려주게.”

흰 가운의 여성으로부터 휴대용 단말기를 받아든 뤼 경위는 두 개의 작업창을 스크린에 띄우고, 한쪽에는 델리의 보안검색용 지문 데이터를, 다른 한쪽에는 문제의 사진을 스캔한 영상을 각각 띄웠다. 그리고 몇 차례의 능숙한 손놀림 끝에, 각각의 데이터에서 특정한 손가락에 해당하는 지문 하나씩을 따 내어 제3의 작업창에 띄우고, 일부러 3차원 효과까지 덧붙여 윤곽을 뚜렷하게 했다.

“자, 눈 똑바로 뜨고 잘 보시오.”

“.....................!”

비교해보니 두 개의 지문은 정확히 180도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지문뿐만 아니라 그 완만한 곡선들 사이를 꿰뚫는 조그만 상처자국의 위치까지 똑같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 아닙니까? 물론 당신이 범인일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뭔가 이상한 일이 여기서 벌어진 것만은 확실합니다. 죄송하지만 당신은 좀더 우리와 같이 있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웃기는 말씀 마세요. 저는 내일 코레니아로 출장을 가야.....”

그렇게 항변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숨이 확 막혀온다.

뤼 경위 쪽을 보려고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야에 싱글턴이 설치해놓은 전신 거울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이 거울을 가지고 옷맵시를 바로잡거나 머리를 다듬는 평범한 일에서부터 여러가지 희한한 짓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을 다 해본 터였다. 하지만 델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거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비친 어떤 광경이었다.

“.................................!!!”

거울 속의 세계에는 델리 외의 다른 사람들은 비치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이미 치워졌어야 할 싱글턴의 시체가 바로 그 자리에 어색한 자세로 마른 나무토막처럼 엎어져서 적포도주같은 피를 콸콸콸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꿇어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

델리 자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델리 자신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델리는 원래의 자신보다도 훨씬 날씬하고, 요염하고, 키가 컸다. 또한 그 얼굴은 원래의 펑퍼짐하고 겁먹은 듯한 얼굴이 아닌, 날카롭고 씩씩하고 도전적이며 자신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없어진 트로피가 피투성이가 된 채 들려져 있었고, 그녀의 뺨과 입가에는 짐승의 것은 절대 아닌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내밀어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울 밖의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되자, 씨익 웃으며 왼손을 들어 검지로 그녀를 가리켰다. 마치 ‘이게 네가 바라던 거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씨, 카슨 씨, 내 말 들립니까?!”

델리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얼굴을 감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걸로 끝인가? 정말로?”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긴장의 최고조인데.”

“랑베르 군, 그걸로는 부족해. 모처럼 찾아와서 안됐네만, 받아줄수 없네.”

“어째서입니까?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인데요!”

“우선 전개가 너무 허무맹랑해.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라는 설정은 칭찬할만하네. 솔직히 나로서는 커피를 몇초만에 타 주는 기계나 원하는 정보를 금방 갖다주는 비망록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않네만. 그래도 이 전파로 먼 곳과 이야기한다는 기계는 재미있구만. 마르코니가 보면 좋아할 거야. 하지만 전파로 편지를 주고받고 물건을 사고팔기까지 한다는 건 자네가 좀 지나쳤네. 너무 황당해.”

“그래도 그게 치명적인 단점은 아니잖습니까?”

“이보게, 우리는 소설을 쓰는 거지 과학을 예언하는 게 아닐세. 번드르한 기술만 나열한다고 그게 작품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내가 실망스런 건 주로 문학적인 면에서의 결핍일세. 등장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이고 틀에 박혀 있어서 도저히 미래 사람이라는 실감이 나지를 않아. 그냥 어느 백작가의 하녀를 주인공으로 바꿔도 충분히 얘기가 되지를 않나.”

“하녀라니 말도 안됩니다! 제 주인공은 남녀가 동등하게 일하는 시대의-”

“단지 예를 든 걸세. 내 말은 해결책이 너무 고딕 스타일이라 이거야. 이래선 에드가 앨런 포를 베꼈다고 해도 할말이 없지 않나! 자넨 자존심도 없는가?”

“................................”

“단점은 그것만이 아니더군. 어째서 배경이 아메리고인가? 왜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면 안 되었던 건가? 진짜로 저 빌빌거리는 신대륙의 멍청이들이 진짜로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이 될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원래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상상하는 게 공상소설의-”

“그럼 다음엔 자네 글이 우리 잡지에 실리는 걸 상상해서 써 보게. 그것 이상으로 불가능한 게 어디 있겠나! 이건 돌려주지.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예?”

“-꼭 파티 도중에 이런 걸 보여줘서 내 마음을 우울하게 해야 하겠는가?”

그것만은 랑베르도 할 말이 없었다. 너무 성급했던 건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드뵈이에 씨. 다음에 뵙겠습니다...”

랑프리 랑베르는 펜으로 갈겨쓴 원고를 도로 받아들고 상대방에게 인사를 한 뒤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우고는 황급히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세탁소에서 빌려온 연미복을 차려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른 채 한껏 멋을 낸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정성들여 기른 턱수염과 아름다운 녹색 눈이 특징이었다.

그는 이미 어두워진 길거리를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종횡무진으로 지나가다가 두 번이나 불량배와 맞닥뜨리고 세 번이나 마차에 치일 뻔했다. 여기저기 서 있는 희미한 가스등불만이 그의 마음을 알고 길을 인도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하늘에 뜬 달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지가 평론가면 다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하늘에서 쏴아 하고 구정물이 내려와서 그를 덮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2층에서 어떤 아줌마가 물통을 들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실연당했으면 집에 가서 약먹고 뒈지든가 세느강에 뛰어들라고! 시끄럽게 굴지 말고!”

랑베르는 더욱 비참한 기분에 잠겨들어 친구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 웬일이야? 이런 시간에! 라로쉬네 파티에 간다고 하지 않았었어?”

“카미이유으, 살기가 왜 이리 힘들지?”

“보아하니 또 깨졌구만. 이번엔 누구야? 보캉생? 에르첼? 아니면 갈리마르?”

“마티우 드뵈이에.”

“헤에, 제법 거물이잖아. 근데 꼭 이럴 때만 우리집에 오는 것 같다, 너?”

“너말곤 믿을 사람이 없거든. 좋은 연초[煙草] 들어온 거 없어?”

카미유 르블랑은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야생초처럼 풋풋한 얼굴과 공작새의 털처럼 윤기가 흐르는 머리털을 가진 20대 중반의 약제사였다. 대대로 전해내려온 가업인 약방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의학을 공부하여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의사 자격을 정식으로 얻을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어서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오랜 고향 친구인 랑베르는 삶에 위로가 필요해질 때 신대륙에서 들어온 독한 연초나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기른 묘한 식물들을 구하러 그녀를 찾아오곤 했다. 물론 언제나 외상이었지만.

“마침 잘됐어. 새로 개발한 약인데, 네가 실험 대상이 되어줘야겠다.”

작업장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약초뭉치와 유리병들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마침내 무언가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무색투명한 액체가 들어있는 조그만 약병이었다. 랑베르는 코르크 마개를 빼고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물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게 맑았다.

“위험한 거 아니지? 지난번에 네가 아스파라거스와 디기탈리스를 바꿔넣는 바람에 1주일동안이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거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한다구.”

“이번엔 그런 실수 없으니 걱정 끄셔. 동방에 갔다왔다는 여행가한테서 비싸게 구한 재료에다가 우리 집안의 비전[秘典]을 혼합한 궁극의 명약이야.”

“아직 실험중이라며 그런 소리가 잘도 나온다. 효능은?”

“근심걱정 없이 잠 잘 자게 해주는 거.”

랑베르는 멀뚱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게 끝이냐?”

“뭘 더 바래?”

“거...정력이 끝내주게 솟아난다던가, 아가씨들이 뻑간다던가. 그런...”

“내 앞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 하여튼 남자들이란...”

“미안.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해본 소리다. 정말로 그뿐이야? 그럼 수면제하고 다를 게 없잖아?”

“부작용 절대 없음이야. 두통도 숙취도 아무것도.”

잠시동안 말을 잃고 손바닥 위의 병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랑베르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아! 해 보겠어! 대신 약값은 받기 없기.”

“바라지도 않는다. 약에 찌들어서 글을 쓰는 작가에게 미래가 있겠어?”

그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미래는 바로 여기, 내 머리속에 있지!”

“인물 났네.”

랑베르는 그날 밤 하숙집에 돌아가자마자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약물을 꿀꺽 삼키고 잠자리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잤다. 원고 준비하느라 보낸 며칠간의 피로와 드뵈이에한테 멸시당한 순간의 스트레스가 마구마구 쌓여서 그를 짓눌러대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꿈에 드뵈이에가 나오길래 그를 노트르담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고 머리털을 몇 웅큼 뽑아주기도 했다.

다음날 수정처럼 또렷하고 맑은 정신으로 일어난 랑베르는 간만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 몇 가지의 메모를 준비하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주제 하나를 본격적인 단편으로 다듬었다. 잉크가 떨어져서 건너방 하숙생에게 빌려와야 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밤에는 계속해서 숙면을 취했고 드뵈이에를 골탕먹이는 꿈도 여러 번 꾸게 되었다.

며칠 후, 그는 완성된 원고를 들고 출판사 몇 군데를 전전했지만 문전박대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지그문트 뭐시기라는 털복숭이 게르만 심리학자의 요상한 이론을 바탕으로 방탕한 남자의 복수극을 풀어나가는 그의 원고를 진지하게 봐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견디다못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드뵈이에를 또 찾아갔다. 그는 정식 편집인은 아니었지만 모 유력 문학지의 간판 평론가였기에 그의 추천을 받으면 연재는 따논 당상이었다. 얼마 전에 원고를 보여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니, 드뵈이에 씨, 가발을 쓰고 계시군요? 무슨 사고라도?”

고목나무처럼 껑충한 키에 근엄한 얼굴과 커다란 솥뚜껑 손이 무기인 50대의 드뵈이에는 랑베르의 젊은이다운 경솔함을 절대 눈감아주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크게 얘기하다니 역시 자넨 무례한 자로군. 그냥 요즘 들어 머리카락이 한꺼번에 빠지는 일이 생겨서 그래. 또 그런 식으로 나오면 원고고 뭐고 밖으로 내던져 버릴 줄 알게.”

“죄송합니다. 저야 뭐 거꾸로 매달려도 싼 놈이라니까요.”

그 순간 ‘거꾸로 매달리다’라는 말에 그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눈쌀을 찌푸리는 것을 랑베르는 놓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야?

드뵈이에는 한참동안 원고를 읽더니 탁자 위에 탁 하고 던져놓았다.

“그래서 이 지그문트 뭐시기라는 자의 이론이 뭔가?”

“그러니까 인간의 의식에는 겉으로 드러난 자아[自我]가 있고, 그것을 통제하는 초자아[超自我]와 그 아래 억눌린 이드 = 본능[本能]이 있어서, 놀랄 만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죠 뭐. 제가 거기서 따온 건...”

“사람이 잠든 사이에 ‘이드 분석체Id Analyzer’라는 그림자가 떨어져나와 욕망을 대신 이루고 다닌다...라 이건가?”

“재미있는 생각이지 않습니까?”

“내겐 별로 재미있지 않은데. 이건 링글랜드의 오래된 민요 아닌가? 침대 아래에는 그림자 인간이 살고 있어서, 달이 뜨는 밤만 되면...”

“뭐 어떻습니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도 프로메테우스를 현대화하여...”

“자넨 여자들이 하는 일을 너무 후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

랑베르는 슬슬 짜증이 났다.

“겉돌지만 마시고 핵심으로 들어가 주세요. 제 글이 <르 주르날>에 실릴 수 있을까요? 그것만 말씀해 주시라고요.”

“백년 정도 더 공부하고 오게. 문체가 설익었어. 맞춤법도 틀렸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네 글에는 현실이 없어. 제발 꿈에서 깨어나게!”

“.......................”

랑베르는 그날 밤에 드뵈이에를 식탁에 꽁꽁 묶어놓고 배가 터질 때까지 끊임없이 설익은 사과와 상한 돼지고기 파이를 먹이는 꿈을 꿨다.





“드뵈이에 씨를 뵙게 해 주세요.”

목 부분까지 털목도리로 꽁꽁 감싸고 가슴과 허리를 한껏 부풀린 전위적인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깃털 펜을 놀리며 한가롭게 업무를 처리하던 여직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드뵈이에 씨는 식중독으로 입원중이십니다. 일주일 정도 뒤에 오세요.”

“아니, 식중독이라뇨? 며칠 전에 뵈었을 때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전들 아나요. 하여튼 오늘은 못 만나십니다.”

랑베르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친구가 경영하는 사이비 정치신문에 적당히 꾸며낸 기사를 써 주면서 하루하루 연명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기에 전에 써둔 원고들을 손질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나 그 ‘이드의 복수’라는 주제는 그가 가장 아끼는 것으로서, 무려 서른네번을 탈고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문제는 출판사들이 전혀 그 글의 가치를 몰라준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갈 만한 인물은 그가 아니꼽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존경하고 그가 숭배하면서도 또한 증오하는, 드뵈이에밖에 없었다.

그런데 식중독으로 입원이라?

그는 지갑을 뒤져 재정상태를 확인해 보고는 발걸음을 돌려, 드 로방 13번가의 언덕 위에 자리잡은 아담한 살롱으로 향했다. 옛날 왕정 시대에 어떤 백작부인이 사재[社財]를 털어 세웠다는, 분위기 만점의 사교 장소였다. 혁명도 독재자도 모두 다 지나가고 세상은 평온했다. 아직 세계대전의 악몽은 다가오지 않은 그런 시기였다. 랑베르는 이런 시대에 태어난 자기 운명에 감사하고 있었다.

“여어!”

“어? 카미유, 여긴 웬일이야?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니었어?”

“이번에 입국한 투르크 상인과 거래할 일이 생겨서 오늘은 일찍 마감했지. 그 약물은 어때? 잘 들어?”

“음! 별 문제 없었어. 잠도 잘 오고.”

“다행이네. 혹시나 부작용이 있을까 하고 가슴졸였지 뭐야.”

“그런거 없다고 네가 그랬잖아.”

“사실대로 말하면 네가 마시겠냐?”

“.......................”

“어이구 순진하기는. 얼굴 풀어. 대신에 오늘은 내가 쇼콜라테 한잔 살게!”

신대륙에서 넘어온 마법의 음료! 그러나 랑베르는 애써 흥분을 감추고 태연한 얼굴로 거절하려고 했다. 지금은 왠지 남의 친절을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었다.

“됐어. 사업이나 신경써.”

“어허, 환자는 약사의 말을 들어야지.”

“내가 언제부터 네 환자.........”

그때, 카미유의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랑베르는 그걸 거의 낚아채다시피 급하게 집어들어 한구석에 실린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저명한 평론가이자 문필가, 사상계의 중진인 마티우 드뵈이에 씨가 원인모를 식중독으로 입원하던 전날 밤, 몽파르나스 5번가에 위치한 그의 저택 근처에 웬 수상한 하얀 형체가 배회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건 또 뭐야?

“랑프리? 왜 그래? 뭘 보는 거야? 응?”

“...카미유...”

“말해봐.”

“그 약물에... 부작용이 없는 게 아닐지도...몰라.”

“???”

어째서 진작에 눈치채지 못했을까! 설마하니 이건...!





“퇴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난 다행으로 여기지 않네. 자네 얼굴을 또 보게 되었으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자네를 만날 때마다 꼭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기분이 영 엉망일세. 자네에게 잘못이 없다고 해도 난 그걸 참을 수가 없어. 이해하겠나?”

“....알겠습니다. 원고를 놓고 가도 되겠습니까? 하다못해 보아주시기라도..”

“거절하네. 나갈 때 문은 꼭 닫고 가게.”

“....................”

드뵈이에가 입원해 있던 며칠간, 그동안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며 어떻게 이걸 해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랑베르는 새 원고를 핑계삼아 다시 한번 드뵈이에 본인과 만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보기좋게 퇴짜였다. 그는 이제 아예 랑베르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꺼려하는 것 같았다.

“............젠장! 이젠 어떻게 되어도 난 몰라!”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꼬냑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들이키고는 (지성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하숙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자빠졌다. 외출복도 벗지 않은 채 (문명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는 잠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또 다시 드뵈이에의 꿈을 꾸었다. (맨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그 꿈 속에서, 그는....... 그들은......!

“----헉!”

랑베르는 식은땀 투성이가 되어 잠에서 깨어났다. 등잔불을 켜고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2시였다. 그는 방금 꾼 꿈의 내용이 너무나 끔찍한 나머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급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뭔가 해야 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는 다른 하숙인들이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계단을 내려와 현관문을 열고 어둑어둑한 밤거리로 달려나갔다.

그는 먼저 카미유의 집에 들렀다. 그녀는 치렁치렁한 하얀 잠옷과 나이트캡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손에는 등잔불을 들고 문을 반만 연 채 밖을 내다보았다.

“너구나, 아웅...한밤중에 무슨 일이야, 도대체?”

“너, 전엔 몰랐는데, 잠옷 차림이 더 이쁘다.”

“고작 그런 얘기하러 온 거라면 죽인다.”

“아냐, 농담이 아니라 진짜야. 물론 그게 용건은 아니지만.”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드뵈이에를 죽인 걸지도...아니 죽이게 될지도 몰라.”

그의 핏기없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를 잠시 밖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랑베르와 그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몽파르나스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그들은 달려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 ‘하얀 형체’란 게, 네가 생각한 이드의 실체화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래. 아직 가설이지만. 만약 나의 그 영감탱이에 대한 강렬한 감정과-”

“네가 그런 취향인줄 몰랐네.”

“닭살돋는 오해는 삼가줘. 순수하게 비평가에 대한 작가로서의 반감이니까!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강렬한 감정.”

“그래, 그 감정과 네가 준 약물이 어떤 식으로든 공명해서 정말로 나의 이드가 실체를 갖추고 뛰쳐나간 걸지도 몰라. 그 때문에 그녀석이 활동할 때 내 육체는 깊은 잠에 빠져 업어가도 모르게 되고-”

“하지만 오늘 밤은 쌩쌩하잖아! 그럼 이드는 아직 안 나온 거 아냐?”

“녀석의 힘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어. 이젠 내 에네르기아를 빼앗지 않고도-”

“...그런데 오늘 밤에는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그걸 이제부터 확인하러 가는거야. 하지만 제발 꿈으로 끝나기를 바래.”

“랑프리-”

“-난...... 두려워...”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드뵈이에의 저택 안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유명한 올빼미족인 드뵈이에는 아마도 이 시간까지 자지 않고 계속 연구를 하거나 책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방 안에는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랑베르와 카미유는 정원 근처에 심은 낙엽송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누군가의 그림자가 재빨리 드뵈이에의 서재 창문을 박차고 뛰어내리는 것을 포착하고는 그를 붙잡으러 달려갔다. 그 그림자의 정체는 밤손님이나 괴도신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랑베르를 그대로 본뜬 듯한 ‘하얀 형체’였다. 모든 점에서 그와 흡사했지만 전신이 밀가루처럼 생기없는 백색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두 사람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웃음을 띠며 제자리에 서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흉내까지 냈다. 랑베르는 울화통이 터졌다.

“너, 너!! 설마......................”

“야아! 내가 누구인지는 설명할 필요 없겠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저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냐?”

“궁금하면 직접 들어가 보라구. 난 오래 머무르기 싫으니까.”

카미유가 상기된 얼굴로 끼여들었다.

“어디로 가겠다는 거지? 너는 이 친구의 일부잖아.”

랑베르의 이드가 그녀의 턱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짓궂은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진짜 랑베르라면 도저히 생각도 못할 행동이었기에, 당황한 카미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오, 이젠 아니야. 귀여운 카미유. 이 도시에는 워낙 더러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어놔서, 나는 밤에 외출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까지도 흡수하는 법을 익혔어. 이제 더이상 나는 이 바보의 허상이 아니야. 독립된 개체라구. 이제 나는 세계로 나갈거야! 하르마게돈[最終戰爭]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서로 미워하게 해서, 나의 동족과 나의 식량을 늘려나갈 거라구! 멋지지 않아?”

“---이자식! 감히 내 얼굴로!”

랑베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드 쪽이 더 빨랐다. 애초에 실체가 없었던 그로서는 자기 육체의 밀도를 조절하는 일은 식은죽 먹기였다. 랑베르는 허공을 가르며 풀밭 위로 쓰러졌고 그의 등짝을 이드의 하얀 구둣발이 강타했다. 랑베르는 통증과 기침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비열한........”

“남의 일처럼 말하는군? 이젠 따로따로지만, 난 원래 너였어. 내가 저지른 일은 모두 네가 저지른 일이야. 그걸 잊지 마. 경찰이 오기 전에 마르세이유까지 죽어라고 달아나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걸! 아하하하하.”

정신을 차린 카미유가 달려와서 랑베르를 일으켜 낙엽송 그루터기에 기대게 했다. 그녀는 품에서 녹색의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꺼내어 그에게 먹였다. 어지럼증이 사라지고 뼈가 부러진 듯한 통증이 멎었다. 그러나 그들이 몸을 추스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드를 쫓으려고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몽파르나스의 밤거리를 가르고 들개처럼 달려가는 T형 포드 자동차의 투박한 엔진소리였다.

“...가버렸어.”

“...그래. 하지만 내겐 확인할 일이 있어.”

“랑프리! 설마...”

“드뵈이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해.”

“정신 나갔어? 여기서 도망쳐야 해! 저녀석 말이 사실이라면 드뵈이에는 벌써 죽었어. 게다가 현장에는 녀석의 흔적이 남아있을 거고 그건 모두 당신의 흔적이라고. 경찰이 그걸 그냥 둘 것 같애? 가니마르 경감이 알기라도 하면...”

“카미유, 걱정하는 마음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꼭 확인해봐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실을 보지 않고 도망치는 건 싫어.”

“이 순간 유일한 진실은 네가 바보멍청이라는 거야.”

“그래도 좋아. 날 기다리지 마!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

“넌 최악의 환자야!!!”

“-남말하고 있네.”

랑프리 랑베르는 건물 벽에 붙은 담쟁이덩굴을 조심스레 타고 올라가 서재 창문턱에 손을 짚었다. 머리와 두 손이 먼저 들어가고, 몸통이, 그리고 이윽고 두 발도 완전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는 난데없는 자동차 소리와 난투극의 소음으로 인해 잠이 깬 이웃사람들과 개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카미유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창문가의 책상을 딛고 내려왔다. 넓은 서재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창가는 집무실 겸 독서실로 책장이 가득했고 안쪽은 개인용의 간이 침실이었다. 그 사이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어서 건너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독서실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있다면 안쪽 방일 것이다.

랑프리 랑베르는 두꺼운 커튼을 걷고 안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래서 뭐야? 이걸로 끝이냐?”

“<공주냐 호랑이냐>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보다 넓은 가능성의 세계로 이끄는 거죠.”

“핑계는 좋구만. 근데 말이지, 네가 말한 그 얘기는, 적어도 선택의 여지란 게 있잖아. 여기서는 이미 그 노인이 죽었다! 라는 거 하나밖엔 가능성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상상력을 자극한단 소리야?”

“음, 그렇다면 제 말을 정정하죠. 양자택일에 대한 가능성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라던가.”

“내 눈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게으름탱이 작가가 빠져나갈려고 수 쓴걸로밖엔 안 보인다.”

“아니 편집장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말씀을!”

“사실이잖아.”

“꼭 사실이라고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이네.”

“......예.”

“이걸로는 부족해. 다시 써 와.”

“예에?! 하지만 이것 때문에 벌써 1주일이나 철야를...”

“고증이 부족해. 19세기말 파리가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이렇게 여러가지 마구 뒤섞어놓는 게 어디있어? 마르코니에 프로이트에 아르센 뤼팽이라? 너 진짜 제대로 조사해보긴 한거야?”

“일부분은요......”

“사람들 말하는 것도 맘에 안들어. 대체 이 시대 사람들이 뭐가 이리 가벼워? 너는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이 네가 메신저에서 노가리 까는 식으로 얘기할거라고 생각하냐? 적어도 최소한의 품위는 있어야지, 안 그러면 자신을 낮추는 것밖에 안된다구.”

“웃자고 쓰는건데 뭘 그런 것까지 따집니까?”

“우리 <주간 납골당>이 왜 판매 3위권을 유지하는지 아나? 그런걸 따지기 때문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

“그보다 더 맘에 안 드는 건, 대체 왜 허구헌날 배경이 외국이냐? 좋은 우리 역사와 산천 놔두고 초보자 주제에 해외원정만 다닐 셈이야? 네가 무슨 일제시대 낭만파냐, 아니면 해방직후 사대주의자냐?”

“편집장님, 역사까지 들먹이며 인신공격할 것까진 없지 않습니까.”

“내가 다 자네 걱정해서 이런 말 해주는거야. 좀더 뛰어난 작품을 끌어내서 나도 매상 올리고 자네도 작가로서 성장하면 누이좋고 매부좋은 거 아냐? 마감 날짜 늦춰줄테니 다른 생각 말고 다시 잘 고쳐서... 아, 잠깐만.”

갑자기 오토바이 택배가 도착하는 바람에 대화의 맥이 끊어졌다.

<주간 납골당>의 초일류 ‘전투 편집장’으로 잘 알려진 전 광석[電 光石]은 키는 작지만 재미있게 생긴 외모와 섬세한 손놀림으로 사람들을 매료하는 30대의 재간꾼이었다. 게다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독설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해, 대화의 상대방이 설령 대통령이라도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었다.

그에 비해 책상 앞에서 초라하게 버티고 서 있는 사내는, 짧게 대충 깎은 머리에 어눌한 외모와 속으로만 화를 삭이는 소심한 성격이 한데 뭉쳐져 애처로움을 증폭시키는 면이 있었다. 그는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햇병아리 프리랜서였다.

편집장은 수령증에 서명을 하고 배달원을 떠나보낸 뒤 포장된 상자를 풀어보았다. 뭔가 운동할 때 두르는 헤어밴드같은 물건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보통 헤어밴드와는 달리 뭔가 용도를 알 수 없는 크롬빛의 극소형 기계장치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게 특이했다.

“<생일을 축하한다. 밤에 잠 안올 때 사용해봐라...> 쳇, 석한이 녀석 또 엉뚱한 걸 만들어서 날 모르모트로 할 셈이구만...”

그는 그 밴드를 책상 한구석에 밀어두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거 뭐냐. 자네 스타일은... 전면적인 개혁. 그게 필요하다고. 알겠지? 무엇보다도 설명을 줄이고 대화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한 글을 써봐. 설명이 너무 길면 독자는 책을 집어던져버려. 사람들이 무슨 강의 들으려고 우리 책 보나? 재미를 느끼려고 보는 거지. 안 그래?”

“..........예.”

“좋아, 이제 가봐. 다음엔 좀더 좋은 글을 가져오라고.... 아, 잠깐만.”

“........네?”

편집장은 밖으로 나가려는 작가를 불러세웠다. 그의 얼굴에 짓궂은 너구리같은 표정이 떠오른 걸 보고 작가는 순간 오싹해졌다.

“...이 평론가 노인 말인데, 날 빗댄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리가요. 일단 생긴것도 성격도 다르지 않습니까?”

“...흠? 그래.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잘가게. 나갈 때 회계주임에게 말해서 교통비 받아가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는 꾸벅 절을 하고는 원고 봉투를 옆에 끼고 쓸쓸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걸어가는 그를 몇몇 기자가 알아보고 인사를 했고 그도 웃는 얼굴로 마지못해 답했다. 그러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던 차에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온 어떤 사람이 승강기에서 내려서면서 그를 보고 아는 체를 한다. 활동적인 복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카메라 가방을 짊어진 20대 후반의 숏컷 여성이었다.

“야아, 공상인[空 想認]군 아냐!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남주나 기자님...”

“진짜 오랫동안 못 봤지? 오늘은 무슨일로?”

“워, 원고 때문에...”

“근데 벌써 가려고? 에이 그러면 쓰나. 조금만 더 얘기하다 가. 맛있는 커피를 타줄테니까.”

“남기자님이 커피를요? 금시초문인데요?”

“이건 비밀인데 차정목씨를 닥달하면 케익도 자동으로 나와. 아까 여자친구한테 몰래 선물받아 숨겨놓는걸 봤지롱♬”

“........................”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짐 가져다놓고 보고하고 올게.”

“예..”

그녀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간 이후, 상인은 사무실 바깥 복도 벤치에 앉아 기다리다가 혹시나 싶어 원고 봉투의 내용물을 점검해 보았다. 초안은 플로피에 입력해 두었지만 편집장이 손으로 쓴 원고를 좋아해서 구체적인 내용은 원고지에 써 온 것이다. 혹시나 한장이라도 잃어버렸다면 큰일이다.

‘...아차, 10페이지와 13페이지가 없잖아. 편집장 자리에 두고 왔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다른데서...’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칸막이와 책상이 가득한 그 방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자리를 지키던 두어명의 기자들은 일에 바쁜 나머지 그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남기자는 암실에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편집장은 자기 자리에서 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얼굴에 스포츠 신문을 덮고 머리에 그 요상한 헤어밴드를 감은 채 쿨쿨 자고 있었다. 상인은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책상으로 다가가, 그 위에 피라미드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서류뭉치를 뒤져보았다. 요행히도 두 페이지 모두 찾기 쉬운 곳에 있어서,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만...이대로 가긴 좀 아까운데... 아까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겠다?’

리드미컬하게 코를 골고 있는 편집장의 태평함과 일을 다 끝낸 안도감이 상인의 마음속에 엉뚱한 생각을 불어넣었다. 그는 편집장이 몹시 아끼는 물건 하나를 몰래 슬쩍하려고 다시 책상으로 다가갔다. 객원기자나 필진으로서 여러번 찾아올 때마다 봐둔 눈대중이 있어 무엇을 찾아야 할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디보자, 이쯤에 분명 코넬리아 콘웨이의 한정판 플래티넘 CD가......’

“상인군, 뭐해?”

남기자의 천진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상인은 뒤로 물러서서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없어진 페이지를 찾으러 왔다고 더듬거리며 둘러댔다. 남기자는 약간 미심쩍어하면서도 ‘아, 그래’라고 수긍했고, 둘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두사람은 남기자가 머그잔에 끓여온 커피와 종이접시에 덜어온 케익을 가지고 건물 밖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내가 이 얘기 해줬던가? 지난번에 어떤 중국인 여자애를 만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남기자의 벨소리는 <아기코끼리의 걸음마>였다.

“잠깐만. 네, 남주나입니다. 응? 뭐? 유진씨? 어 그래, 웬일이야? 응? 비밀 얘기? 알았어. ...상인군, 잠시 저쪽에 다녀올게.”

“그러세요.”

남기자는 자리를 옮기면서 통화를 계속했다.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뭐? 그 소문난 해양생물학자 할머니가? 아, 그랬구나... 알았어. 그럼 나도 한자리 끼게 해줘. 좀 있다가 번개같이 달려갈테니까.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상인은 잠시동안 그자리에 앉아있다가 좀이 쑤셔서, 의자에서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바로 앞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못 보던 뭔가가 서 있었다. 그 존재를 눈치챈 그는 너무나 놀라서 팔을 든 채로 얼어버렸다.

“전 편집장님............?”

전광석을 쏙 빼닮은 ‘반투명의 형체’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 형체는 다소 경망스럽고 쾌활한 진짜 전광석이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을 차갑고 냉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천천히 상인에게 다가와 그의 목 주위에 손을 뻗었다. 상인은 공포와 경악에 질린 나머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 들어보세요. 광석이 형, 아니 편집장님. 아까 그건 제 본심이 아니고...”

“-를 죽여?”

“에엣?!”

“...아무리 소설이기로서니 나를 죽여?!”

“아니, 그게..........”

“입 닥쳐.”

보는 각도에 따라 뒤쪽이 비쳐보이기도 하고 안 비치기도 하는 기묘한 광학적 특성을 지닌 그 전광석의 분신은, 초인적인 힘으로 상인의 목을 거머쥐고 그의 전신을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숨이 막혀오고 자꾸만 의식이 흐려진다. 상인의 흐릿해지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상대방의 늑대를 연상케 하는 잔인한 냉소였다. 평소에 절대로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의 얼굴에 저런 표정이 떠오르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일 얘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상인군?”

남기자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방금까지 의자 곁에 있었던 상인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전화통화에 정신이 팔려서 한눈을 판 몇 초 사이에.

“상인군?”

남기자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피부를 자극할 뿐이었다.

“대체 어디 간거야?!”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누구도.





‘......누구도’

델리 카슨은 마지막 단어를 쳐 넣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햐, 이제 좀 편히 잘 수 있겠군. 그동안 진짜로 힘들었어.’

괴짜 상사인 싱글턴이나 다른 여러가지 회사일의 스트레스와 싸우다 보면, 자연히 정신은 좀먹고 건강은 바닥을 기게 마련.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야근 스케줄을 바꾸거나 휴가를 내어, 혼자만의 여유로운 밤 시간을 선용[善用]하고는 했다. 보통은 학교 때의 수학 교과서를 보면서 숫자로 만들어진 양들이 행렬로 만들어진 울타리를 넘어가는 괴이한 꿈을 꾸는 일도 있었지만, 때로는 이처럼 소설인지 뭔지 알 수도 없는 잡문을 써서 테라넷 웹보드에 투고하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거칠고 미숙해도, 자기가 생각한 이야기를 짜임새있게 배열하여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의 ID인 vendetta는 그녀처럼 소외된 사람들에게 꽤 알려진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개자식이 쓸데없는 트집만 잡지 않았어도... 회사가 무슨 고등학굔가?’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그녀의 테라넷상에서의 활동을 극비리에 캐치한 싱글턴이 며칠 전 그녀를 조용히 불러내어 장시간의 설교를 한 것이었다. 회사의 이미지에도 영향이 있고 하니 과격한 내용의 호러소설을 쓰는 건 그만둬라. 라는 요지의 설교였다. 요점은 저정도였지만 그 내용 안에는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할 여러가지 말들이 동원되어 그녀를 기죽이는 데 한몫 했다.

사실 싱글턴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조치가 꼭 필요했던 것이, 요즘들어 델리가 소설 쪽에만 신경쓰느라 회사 일에 통 의욕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델리는 아는 사람은 다 알만한 암호나 관용구를 써서 회사의 비리를 비꼬는 듯한 내용을 은근슬쩍 소설에 삽입하고는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꺾일 줄 알고?’

그녀는 새 작품을 네트에 업로드한 뒤 가정용 단말기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의 조회수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하지만 조회수보다 더 신경쓰이는 건 과연 몇 명이나 저 내용에 공감해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글을 쓰는 것 자체는 쉬워도 ‘남에게 이해받는 글’을 쓰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자칫하면 자기만족이나 타인에 대한 아부 둘중 하나가 되고 마는데, 그건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함정이었다.

‘근데 왜 하필이면 코레니아입니까?’

내가 그 나라에 관심이 있어서지 뭐! 그녀는 다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목에 착용한 통합 리모콘으로 조명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때 한순간, 그녀의 단말기 옆에 놓인 작은 손거울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지나갔지만, 그녀는 물론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그곳에 존재할 리가 없는, 그런 그림자가.





다음날 아침, 그녀는 상쾌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들뜬 기분으로 출근했다. 약간 늦게 나왔기 때문에 도로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지만, 24개월 할부로 산 에어로모빌이 벌써부터 고장이 나는 바람에 속도를 마음대로 낼 수 없는게 한이었다. 적어도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길리건씨. 왜들 저렇게 모여 있어요? 경찰관도 있네?”

“카, 카슨양... 난 도저히 말 못하겠어요. 미안합니다...”

남색옷의 수위아저씨는 대답을 회피하며 얼굴을 가린 채 구부정한 걸음을 내디디며 뒷문 쪽으로 사라졌다. 델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정문 쪽으로 걸어가 ID체크를 하고 고정식 단말기를 통해 지각사유를 신고했다. 그리고 공기압축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기 사무실이 있는 85층으로 6분 만에 올라갔다.

그러나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더욱 더 이상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명의 경찰병력이 85층 전체를 뒤덮은 채 경비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둥절해진 델리가 사방을 둘러보다 사무실로 들어가려 할 때, 동료 중의 누군가가 그녀 쪽을 가리키며 경관들에게 뭐라고 하는 게 보였다. 백발의 중년 동양인과 검은 머리의 백인 수사관이 피곤한 얼굴로 다가왔다.

동양인이 정중하게 질문을 던진다.

“델라웨어 카슨 씨 맞습니까?”

오 맙소사, 안 돼!





NEVER END





(C) ZAMBONY 200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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