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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15] 죽이는 나라의 애거서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6
 





<< 죽이는 나라의 애거서 >>

Agatha in Murderland







“애거서, 너 아까부터 같은 자리만 계속 손질하고 있는 거 아니냐?”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는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 그렇네요. 아하하하, 내가 왜 이러지?”

“집안일하다 딴생각에 잠기면 사랑받지 못하느니라.”

“말씀 안 하셔도 알고 있다고요!”

“원 애두 갑자기 골을 내고 그러니. 난 이만 들어갈테니 잘 해봐라.”

예상외로 히스테릭한 대답에 어머니가 눈쌀을 찌푸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애거서 메리 클래리너 밀러는 정원사용 가위를 솜씨좋게 움직여가며 울타리 뒤편에 풍성하게 자라난 키작은 나무들을 다듬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이상스럽게 심란해서 정원 손질이라도 도우면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 이유란 것이 뭔가 생각해보니 뚜렷이 잡히는 게 없어서 더욱 속상했다. 대체 내가 오늘 왜 이러지?

“아가씨, 거실에 차 내놨어요.”

“고마워요, 글래디스. 좀 있다 갈게요.”

“빨리 안 오시면 스콘이 다 식을걸요. 아가씨도 마님이 얼마나 그런 데 까다로운지 아시잖아요. ...그나저나, 전번에 만난 그 신사분 어땠어요?”

애거서는 가위질을 멈추고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기보다 연상인 하녀의 둥글넓적하고도 능글맞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무슨 대답을 하든 간에, 그 말은 그날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이 작은 마을 전역에 쫙 퍼질 게 분명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모두가 잘 아는 이런 곳에 살면 애초부터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누구요?”

“왜 그 있잖아요. 그 군대에 계신다는 날씬하고 잘빠진 분.”

“아, 아치볼드 씨 말이죠. 그저 그랬어요. 왜요?”

“마님께선 내심 그분을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분도 아가씨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고요. 왜, 벌써 혼담이 오고가지 않았던가요?”

“그건 그렇지만.........나는..........”

“마음에 내키지 않으세요? 다른 좋은 분이라도?”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니면요?”

“.......................”

뭐가 이제까지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는지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이거, 마무리만 좀 부탁할게요.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티타임은 안되겠어요.”

“음, 그러세요. 마님께는 제가 말씀드리죠.”

눈치 빠른 하녀는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더 이상은 추궁하지 않았다.

애거서는 가위와 모종삽을 하녀에게 넘겨주고는 방충망이 달린 모자와 두꺼운 장갑을 벗어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낡은 침대에 걸터앉아, 한동안 멍한 얼굴로 창문에 둘러쳐진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오후의 햇살과 거기에 비친 가녀린 입자들의 운동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침대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들과 잉크병, 펜촉, 그리고 뭔가를 끄적이다가 만 종이들이 비스듬한 각도로 눈에 들어왔다.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코난 도일, 그리고 당장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작가들.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이웃에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도 있고 하여튼 가지각색.

그녀는 침대에 가로누운 채 펜이 놓여있는 방향으로 무심코 손을 뻗었으나 곧 흠칫하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몇 주 전에 만난 아치볼드라는 장교는 이렇게 말했었다.

“글을 쓰시는 게 취미라고요? 흠... 나쁘지 않군요. 뭐 과도하게 글에 몰두해서 집안에 불이 나도 모를 정도만 아니라면 말이죠. 하하. 그런데 대부분 그런 취미는 가정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나 빠져드는 건 줄 알았는데요? 왜 그, 브론테라던가......”

“아뇨, 저는 그런 종류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럼 동화를 쓰시려고요? 제 조카는 피터 래빗을 좋아하죠.”

“그런 것도 거리가 멀어요.”

“그럼 대체 어떤 글을 목표로 삼고 계십니까.”

“말할테니 웃지 마세요.”

“안 웃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귓속말을 듣고 나서 웃지는 않았지만 경악스러워하는 듯한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니까... 어... 말하자면... 코카인에 찌든 사립탐정이 나와서 빈민굴을 돌아보며 부랑아들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들을 말도 안되게 깨끗이 해결하는 그런 얘기 말입니까? 글쎄, 재미있기도 하겠지만... 여자가 그런 글을 쓴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할지...”

그때 얼마나 속에서 불이 나는 걸 참아가며 장단을 맞춰줘야 했는지!

애거서는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영원히 어머니와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글을 쓰기 위해 시골 마을의 구닥다리 노처녀로 남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서는 경제를 꾸려나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람 좋은 여편네 노릇 하며 살아가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사 이래로 이런 고민을 했던 사람이 얼마나 더 있었을까? 그녀는 한 남자만의 충실한 페넬로페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처럼 혁명적인 인생을 살아갈 용기도 없었다. 그 불꽃같은 여인이 투쟁을 벌인 후 2백년 간 사정이 약간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세상은 척박하고 불공평한 곳이었다. 이 시대에 전문기술도 없이 혼자 사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야 뻔했다. 공부하기 싫어 징징거리는 애들을 다독이며 가르치거나, 잘 나가는 무역회사 같은 데에서 속기와 경리에 파묻혀 파김치가 되거나, 혹은......

‘아아, 도저히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좋지!’

그녀는 마침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바로 누워 베개를 껴안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한잠 자면 뭔가 좋은 수가 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라는 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간 자다가 다시 눈을 떠도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이, 그저 두통과 무기력만이 밀려올 것이라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민에 지친 인간에게는... 휴식이 필요한 법입니다.”

이건 환각인가?

검은 머리칼로 얼굴 반쪽을 완전히 가린 창백한 피부의 남자가 방문 쪽에 서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애거서의 이성은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마비되어 있었다.

‘그래 맞아. 난 지극히~! 옳은 일을 하는 거라구.......’

그녀는 몇 번 뒤척이다가 베개를 놓친 채 사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늦었다, 늦었어!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이야! 이거 정말 큰일났군!”

‘---어라라?’

정신을 차린 애거서는 몇 가지 묘한 사실을 자각하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자기가 대체 어딘지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사방이 온통 만들다 만 체스판처럼 흑백의 무늬로 구획되어 있는 공간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욱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첫째, 그녀는 더이상 팔팔한 20대의 처녀가 아니라, 레이스 달린 플레어 스커트를 차려입고 머리에 촌스런 리본까지 맨 열두 살의 꼬맹이로 돌아와 있었다. 둘째, 방금 늦었다고 소리지르며 뛰어간 사람의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그 사람은 50세를 갓 넘긴 듯한 중년의 외국인이었는데, 달걀형의 대머리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잘 빗어넘겨 커버하고 있었고, 재미있게 생긴 얼굴에는 카이저[독일 황제]를 연상시키는 멋드러진 콧수염이 자라나 있었다. 그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손질된 연미복을 차려입고 손에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회중시계를 든 채,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절도 있게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자기의 작달막한 팔다리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대체 여기가 어딘가 궁금해져서 그 조그마한 사나이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으음, 봉주르? 날씨가 좋지? 잉글랜드는 정말 우중충해서 이렇게 좋은 날은 드물지. 안 그래? 근데 난 바빠서 먼저 가 봐야 하----어이쿠!!”

애거서는 그가 속력을 높여 달아나기 전에 제비꼬리처럼 튀어나온 연미복 아래자락을 재빨리 움켜쥐고 저지했다.

“잠깐만요!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여왕폐하가 부르기라도 했나요?”

“흠, 좋은 질문이군. 어떤 백작 부인도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지!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어! 에 비엥[그런데], 내가 그 담뱃갑을 어디다 두었더라?”

그는 뽐내듯이 프랑스어를 약간씩 섞어가며 리비에라 해안의 소금기가 풍겨나올 듯한 느끼한 액센트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건 답이 아니잖아요! 대체 여긴 어디죠?”

“내게 물어봤자 소용없어. 내 작은 회색 뇌세포는 이미 예약이 꽉 찼거든. 저런,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아가씨를 보니 모나미[내 친구] 헤이스팅스가 초조해할 때가 생각나는군. 그 친구는 항상 나만 보면 세계 제일의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놀려대곤 하지!”

“제발 그렇게 요리조리 말을 꼬지 마시고......아앗?!”

그 사나이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허겁지겁 달려가던 애거서는 발 밑에 뚫려있는 빨간색 구멍을 미처 보지 못했고, 결국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 요리조리 미끄럼을 타고 어디론가 정처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땡그랑땡그랑 종이 울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캄캄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경보! 경보! 포탄이 곧 떨어집니다. 폭발에 대비하여 몸을 낮추고 방공호로 들어가세요!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이 최우선입니다! 간호 3조, 이쪽으로!”

“잠깐만요. 여기가 어디죠? 누가 온다는 거예요?”

애거서는 여전히 열두 살의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넌 어디 가 있었길래 그것도 모르니? 비스마르크야! 저리 비켜!”

그녀가 붙잡은 어떤 부상병은 별 인간 다 보겠다는 듯 아니꼬운 표정을 짓고는 절룩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자세히 보니 어둠을 틈타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어떤 출입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부상병도 있는가 하면 그들을 돕는 간호사나 의사도 있었고, 주변 마을에서 피난온 듯한 남루한 차림의 나이든 민간인들도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다.

“......그게 누구지......?”

“뭐해? 빨리 들어가! 문 닫는다!”

그녀는 황급히 방공호 안쪽으로 기어들어갔고, 문이 닫히고 나서 곧바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천지 사방이 진동했다. 독일군 고사포의 기본 성능은 그런대로 대단했지만, 아직까지 명중률이나 사정거리는 형편없는 게 다행이었다. 빅 베르타가 등장하려면 아직 수십 년을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애거서의 눈이 어둠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주변을 가득 메운 약품상자 더미와 부상자들의 겁먹은 눈동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료진은 사력을 다해 환자들을 간호하고, 부상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병사들은 동료들을 붙잡고 있거나 의료진을 돕고, 주로 세월에 찌든 아줌마 아저씨들로 구성된 민간인들은 한구석에 모여앉아 이 전쟁이 대체 얼마나 계속되려나 떠들어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인자하게 생긴 교구목사님이 곧 운명하려는 병사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주며 그를 진정시키는 모습까지 보였다.

“어라? 넌 누구지? 여긴 아이들이 올 일이 없는데... 당장 나가...가 아니라, 지금은 포격 중이니 거기 꼼짝말고 있어! 죽기 싫으면!”

“에에?!”

그렇게 말한 사람은 간호사 중에서도 좀 튀어 보이는 검은 머리의 젊은 여자였는데, 쾌활하고도 강인해 보이는 얼굴에서는 예상치 못한 손님에 대한 난감함과 자기에게 배당된 잡일에 대한 짜증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평불만 한마디 없이 자기 일을 아주 잘 해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카울리 양, 거즈 소독 다 끝났으면 이쪽에 와서 주사약 좀 챙겨요.”

“아니, 그건 곤란해. 이쪽이 먼저야. 그렇지?”

“카울리, 여기 매트리스가 모자라. 어디 남는 거 없어?!”

“어이, 좀 봐줘. 난 몸이 한개 뿐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나 인기가 좋을 리 없으니 말이다.

“도와 드려요?”

“아니 괜찮아. 이 정도는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방해되니까 비키기나 해!”

“그래도 혹시...........”

그 작은 키의 억척스런 여성은 매트리스를 짊어지고 거즈를 간호사복 주머니에 주렁주렁 매달고 입에 약상자를 문 채로 바쁘게 뛰어가려 하다가, 자기를 계속해서 쳐다보는 소녀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살며시 돌아보고는 도무지 못본체 할 수 없었는지 다시 돌아와서 소녀에게 약상자를 맡겼다.

“저기 빼빼 마르고 걱정 많게 생긴 흰머리 아줌마 보이지? 그쪽에 전해줘. 이건 순전히 네가 가만히 있어봐야 심심할테니 시키는 거지, 내가 힘들어서 시키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둬! 그럼 가봐!”

애거서는 씩 웃어보이고는 약상자를 지정된 사람에게 가져다주러 달려갔다.

그들은 이후 몇 시간 동안 바쁘게 일했고, 이윽고 고사포 소리가 멎었다.

“수고했어, 꼬맹이. 저쪽에 가서 좀 쉬어라. 좀 있으면 집에 갈 수 있을거야.”

그 키작은 여자는 머뭇거리다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네 집이 포격에 날아가지 않았다면 말야.”

어린이에게 그런 가혹한 얘기를 용케도 한다 싶어 애거서는 눈을 크게 떴다.

“언니네 집은요?”

“응? 우리 집은 여기서 좀 멀어. 아버지가 목산데, 내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수녀원에 처넣겠다길래 밤에 도망쳐 나왔지.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여기서 일좀 하게 됐어. 뭐 그다지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지.”

애거서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멋지잖아요. 자기가 살고 싶은 인생을 찾아서 길을 떠났다는 건...”

“어린애가 같잖은 소릴 하고 있네. 이것봐. 세상 사는게 그렇게 쉬운 줄 아니? 때로는 내가 왜 뛰쳐나왔지? 하고 후회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란 말야. 때로는 진짜 눈물 쏙 빠지게 억울한 일도 당해봤고.”

“진짜요?”

“그래. 뭔지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래.”

“좋아하는 남자는 없어요?”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어린애니까 봐주지. 글쎄 있었다고 할까 없었다고 할까. 어릴 때 같이 놀던 멍청이가 하나 있긴 한데, 지금 전쟁터에 나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야.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

그 여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기절초풍하게도 여송연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애거서는 아직까지 담배피우는 여성을 본 적이 없는지라 입을 딱 벌렸다.

“못하는 게 없네요?”

“그렇게 보여?”

여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정색을 하고 연기를 뿜어대며 말했다.

“이건 말이지, 오히려 못하는 게 너무 많기 때문에... 피우게 되는 거야. 넌 아직 이해 못하겠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짓궂은 휘파람이 터져나왔다. 교대로 쉬고 있던 동료 간호사들이 일제히 얼굴을 찡그렸다.

“어이 카울리, 여긴 환기가 안되니까 좀 있다 나가서 피우지 그래!”

“쳇, 할 수 없지. 꼬맹아, 이따 보자.”

그녀는 아쉬운 얼굴로 여송연을 비벼 끄고 다시 일에 복귀했다.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애거서는 하릴없이 다른 쪽 구석에 가서 다리를 펴고 걸터앉았다. 방공호 바닥은 석회질로 되어 있어 차갑고 축축했다. 어디선가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도 들려오고 천장 한구석엔 거미줄까지 쳐져 있었다.

“......................?”

무료한 나머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애거서의 눈에 약간 거동이 수상한 병사가 들어왔다. 그는 어색할 정도로 몸을 수그리고 남들의 눈을 피해가며 빛바랜 종이쪽지를 든 채 구둣발로 바닥을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한쪽 눈에는 안대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은 꽤 고생에 시달린 듯 울퉁불퉁하고 주름진 편이었다. 그러나 그런 얼굴 위에서 반짝이는 한쪽 눈은 바다처럼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애거서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그가 바닥을 두들기는 패턴이 놀랄 만큼 규칙적이라는 것이었다. 돈. 쯔. 돈. 돈. 쯔. 돈. 돈. 쯔. 돈. 돈. 쯔. 쯔.

“저.......”

그 병사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종이쪽지를 숨기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디 안 좋으세요? 간호사 언니 불러와요?”

“아니, 됐어. 쓸데없는 걱정 말고 저리 가 있어!”

애거서는 그의 말투에 희미하게나마 독일어 액센트가 섞여있는 것을 느꼈다. 외교관으로 일하던 친척이 집을 방문했을 때 같이 데려온 독일인 무관이 연습 삼아 보여준 회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아까 그 간호사를 소리쳐 부르려 했다.

“언니? 여기 독일........................웁!”

안되겠다고 느꼈는지 그 병사는 소리없이 다가와 소녀의 입을 막고 무서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애거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소리내면 죽을 줄 알아. 내가 안전지대까지 가는 동안 함께 좀 가자.”

애거서는 그의 억센 손이 다리를 찍어누르는 것을 느끼며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제서야 그녀를 붙잡은 손을 살짝 풀어주고 다시 단단히 다짐을 시켰다. 어둠 속에서 그의 한쪽밖에 없는 눈이 도마뱀처럼 번득였다.

“태연하게 굴어. 아무일도 없는 거야. 알겠지, 킨더[꼬마]?”

애거서는 풀죽은 얼굴로 다시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포격이 끝났습니다! 모두 나오셔도 됩니다! 빨리 병원으로 돌아갑시다!”

방공호 문이 개방되고 사람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병사는 애거서의 손을 잡아끌고 나오면서 만약의 경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주었다. 물론 허튼 짓을 했을 때에 그의 아미 나이프가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도 함께.

“야아, 꼬맹아? 이제 가는거야? 그 아저씨는 누구지?”

아까의 검은머리 간호사가 다가와서 스스럼없이 물었다.

병사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미소지으며 말없이 서 있었고, 애거서는 그의 손이 등을 쿡쿡 찌르는 것을 느끼며 미리 전해들은 말을 기계적으로 되뇌었다.

“가, 같은 고향 분이에요. 귀대할 때 집으로 데려가 주신대요.”

“그래, 그거 잘됐네... 또 보자.”

“언니?”

“응?”

“아까 눈물나게 억울하다고 한 거...무슨 뜻인지 이젠 알 것 같아요.”

“뭐?”

그 키작은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애거서는 병사의 시선이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급히 얼버무리며 돌아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갈게요!”

“건강해라! 쓸데없이 죽지 말고!”

애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흘낏 뒤를 돌아보니 그 간호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병사가 다시 한번 등을 밀었기 때문에 애거서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그 허름한 야전병원을 빠져나와 숲길로 접어들었다. 어디로 가는지 묻는 의사나 다른 병사들에게는 낙오병인데 소속 부대를 찾아서 이동 중이라고 둘러댔다. 애거서는 그의 친척이며 가는 길에 집에 데려다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아까는 무의식적으로 독일 액센트가 튀어나왔지만 이번에는 상당히 조심을 한 탓인지 그의 억양은 표준적인 남부 잉글랜드 농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애거서는 그가 입을 열 기회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도망칠 기회가 늘어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인적 없는 숲 속을 한참 걸어가다가 어느 느티나무 아래에 멈춰섰다.

“그만 나를 보내주는 게 어때요? 아무에게도 말 안할게요. 진짜로요.”

“나인[아니], 그렇게는 안돼.”

그는 군낭을 뒤져 길다란 새끼줄을 꺼냈다. 그리고 소녀의 입을 미리 빼내온 거즈로 막고 그녀의 팔다리를 빈틈없이 결박한 뒤, 가느다란 목에 나머지 새끼줄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애거서의 조그만 얼굴에 막연하게나마 공포의 빛이 떠오르더니, 곧 리트머스 시험지가 파래지듯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엔트슐디겐 지[용서해라]. 나도 고향에 너만한 딸이 있지. 하지만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애는 어떻게 될까? 난 꼭 돌아가야만 해. 그러자면...”

그는 음울한 얼굴을 하고 사무적으로 중얼거리며 줄을 잡아당겼다.

애거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저항하려 했지만 뜻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에 감긴 줄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숨이 막히기 시작했고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하늘이 빙빙 돌고 가슴이 꽉 막혀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천둥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병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애거서가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무슨 일인가 살펴보러 눈을 떴더니, 자기를 내려다보던 병사의 이마에 카인의 표식을 연상케 하는 구멍이 뚫려있는 게 보였다. 그는 줄을 잡아당기던 손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푸대자루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머리를 박은 땅바닥에 붉고 끈적한 무언가가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괜찮니, 꼬맹아? 많이 놀랐지?”

“언니..............”

그 검은 머리의 간호사였다. 그녀는 한 손에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사냥용 엽총을 들고 비호같이 달려와서 소녀의 목에 감긴 새끼줄을 끄르고 결박을 풀어주었다. 거즈를 입에서 뱉어낸 애거서는 갑자기 폐로 밀려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간호사를 따라온 병사 몇몇이 뒤늦게 달려와서 그 쓰러진 스파이를 둘러싸고 시체를 조사했다.

품에서 아까의 종이조각들을 찾아낸 병사 한 명이 소리질렀다.

“이 일대 주둔 부대와 야전병원의 상세한 배치도야! 이걸 고사포 진지에 넘겨줘서 좀더 정밀한 사격을 하도록 할 작정이었겠지. 정말 큰일날뻔 했어.”

“군화 속에 쇠붙이 비슷한 게 있습니다. 대체 뭘까요?”

“전자석이군. 발전기와 전화선만 있으면 모르스 송신기 노릇도 하겠는걸.”

“어째 발장난을 많이 한다 했더니 정보를 부호로 바꿔서 연습중이었던 거였군”

“그나저나 대단한 사격 솜씨에요. 우리가 나설 일이 없을 정도군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간호사는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하고 뒷처리를 병사들에게 맡긴 뒤 애거서의 손을 꼭 잡고 야전병원으로 되돌아왔다.

“어때, 지금도 눈물나게 억울해?”

“아뇨, 눈물나게 기뻐요!”

“좋았어!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내 옆에 꼭 붙어 있도록.”

“네!”

그들이 병원 뜰에 들어섰을 무렵,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앰뷸런스 두어 대가 달려들어와 뒷문을 활짝 열고 장렬하게 부상당한 주의 어린양들을 토해 냈다. 그 많은 들것들 중 하나에 누워 있던 붉은머리 청년이 태평하게 손을 흔들며 간호사의 주의를 끌었다.

“맙소사, 토미-  토미 베레즈포드!”

“여어 터펜스, 오늘 날씨 참 좋지?”

“진짜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편지 한 통 없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편지를 보내냐? 자기가 먼저 편지하고서 그런 소릴 하면 밉지나 않지. 보시다시피 별로 안좋아. 나를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은 금발미녀의 신선한 키스 뿐이랄까.”

“쳇, 금발이 아니라 대단히 미안하네요.”

“실은, 금발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어.”

그들이 꽤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알아챈 애거서는 조용히 한쪽 구석으로 빠져나와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머리 간호사의 얼굴이 저렇게 생기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처음 봤던 것이다.

‘...................얼씨구?’

그런데 바로 그때, 전쟁터 한가운데서라면 도저히 있을 리가 없는 것을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조금 전에 만났던 그 콧수염의 사나이가 늦었다! 늦었어! 를 연발하며 병원 반대편으로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애거서는 충동적으로 그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그 사나이를 따라잡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 있었어? 웬 엽총까지 들고...”

“이야기하자면 길어. 여기 꼬마 아가씨가.....”

“무슨 꼬마 아가씨?”

“어? 분명 방금까지 여기.......”

간호사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어린 애거서도, 콧수염 사나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냐. 백일몽이라도 꿨나봐...”

“아까부터 좀 이상했어. 괜찮은 거야?”

“환자가 간호사에게 그런걸 물어보면 안되지!”

그녀는 어깨를 잠시 으쓱하고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곧 의무병 몇 명이 달려와서 들것을 병원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녀도 따라붙었다.

붉은머리 청년이 해맑게 웃었다.





“---또 이런 식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가서 콧수염 사나이를 붙잡기 일보 직전, 애거서는 또 다시 발 밑에 나타난 파란 구멍 속으로 빠져들어 한참동안 이리저리 맴을 돌며 어딘가로 흘러갔다. 그 구멍으로 연결된 통로는 몇 차원에 걸친 유클리드 폐곡선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가 그 안에 떨어진 사람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토해내고는 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나, 어린 손님이네. 어떻게 들어왔지? 문은 잠겨 있을텐데.”

다친 데가 없나 자기 팔다리를 내려다보던 애거서는 자신의 몸이 약간 자라 있는 것을 알고 놀랐다. 방 안의 거울을 힐끗 돌아보니 열다섯 살 때의 자기 얼굴이 넋나간 표정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웅, 유령이라 그런지도 모르죠. 하여튼 얼룩뱀은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무슨 얘긴지 모르겠지만, 귀여운 아이구나. 안녕.”

거꾸로 떨어져 뇌진탕을 일으킬 뻔한 애거서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르며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그 방의 주인인 듯한 30대 후반의 여인에게 횡설수설이 섞인 인사를 했다.

먹성좋게 생긴 그 부인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자판이 달린 이상한 기계와 노트 몇 권, 어지럽게 늘어놓은 원고지들, 그리고 잘 익은 사과 한 자루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갈색이지만 군데군데 새치가 섞여 있는 머리를 틀어올리고 수수한 복장을 차려입은 그 여인은 멍청한 얼굴로 뜻밖의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찾아와줬는데 이걸 어쩌지? 난 지금 일하는 중이거든.”

“아녜요. 괜찮아요. 저도 방해할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그럼...”

“아, 잠깐, 누가 또 왔네. 그쪽에서 기다려 주겠니? 곧 올테니까.”

초인종이 울리자 그 부인이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방문객은 촉새처럼 깐깐한 인상의 잘 차려입은 남자였는데, 별로 호의적인 목적으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부인은 손님을 테이블로 안내하고는 애거서에게 사과를 하나 쥐어주며 책장에 있는 책을 봐도 괜찮다고 말하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애거서는 사과를 한입 베어물고 널따란 책장을 살펴보다가 최근에 나온 듯 깨끗한 표지의 책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뽑아들었다.

애거서는 방 한쪽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표지에 새겨진 저자의 이름은 ‘애리어든 올리버’였다.

“무슨 소리야? 재고가 산처럼 쌓였다니. 당신네가 소화 못하는 책도 있어?”

“솔직히 말해서, 올리버 여사, 여사의 작품은 예전만큼 인기작이 아닙니다.”

“그래도 저번에는 그런 얘기 안 했잖아! 이제와서 그러면 어쩌라고!”

“솔직히 저로서도 이런 말씀 전하기는 싫지만, 계약을 더이상 유지할 수가...”

“알았어! 맘대로 하라고 당신 사장에게 전해! 다른 출판사를 알아보겠어!”

“이렇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어쩌면 계약금도 돌려주셔야 할지 몰라요.”

“인정머리도 없군!”

“히틀러가 치고 올라온다는 루머가 퍼져서 장사도 예전같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나더러 그 말라깽이 광신도한테 가서 책임지라고 하란 소리야?”

“자금 회전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얘기죠. 하여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당신네 사장에게 그 히틀러란 자와 함께 지옥에나 가라고 전해!”

“경영 문제로 하도 골치가 아프다보니 어디로 가라고 해도 좋아하실걸요.”

“..............나갈때 문이나 닫아.”

“그럼 이만.”

여사는 그 촉새같은 사나이를 떠나보내고 나서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애거서 쪽을 바라보다가 원고지 한 장을 그 이름모를 기계에 끼우고 자판을 잠깐동안 두들기더니 입가에 손을 갖다대고 한참동안 심사숙고하다가 결국 화난 얼굴로 원고지를 빼내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독서삼매에 빠져 있던 애거서는 종이 찢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여사는 두 손을 얼굴에 갖다대고 책상에 팔꿈치를 갖다댄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애거서는 어떻게 분위기를 풀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나오는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 부인이 쓰신 거죠? 추리소설이란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응?”

여사는 얼굴을 가린 채 메마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도 도일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나도 멋진 탐정 이야기를 쓰고 싶어! 라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여자애가 천박한 범죄에 피바다가 난무하는 추리소설이라니 당치도 않다! 라고 하셨지만 저도 지지 않고 그럼 도로시 세이어즈는 뭔데요? 라고 소리지르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죠. 진짜 터무니없는 얘기 아녜요? 여자애는 안된다니. 우리는 뭐 범죄도 안 저지르고 남을 미워하지도 않는 천사들인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한다면 그런 얘기는 절대 못할걸요!”

“그래, 그랬단 말이지.”

여사는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인을 보니까 저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수업료는 없지만 사과라면 저희 집에서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제발요.”

애거서는 도대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서 무책임하게 공수표를 남발하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자기가 꿈꾸던 대로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감격에 그런건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여사는 소녀의 들뜬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상의를 걸쳤다. 애거서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전에 산책이나 좀 할까?”

“네.........”

그들은 하이드 파크의 북쪽 끝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한참동안 말없이 걸었다. 여사는 걷는 동안 한 마디도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애거서가 가끔가다 던지는 질문에만 권태롭다는 얼굴로 답해 줄 뿐이었다. 그것도 주로 이제까지 몇 권이나 썼는지, 왜 탐정을 핀란드인으로 설정했는지, 트릭이나 인물을 생각해낼 때 무엇을 참고하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질문들이었다. 마침내 공원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을 때 애거서가 꽤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다음 책은 언제......?”

“영원히 안 나와.”

“네?”

“출판사에서 거절했거든.”

“하지만 아까 그러셨잖아요. 다른 데를 알아본다고...”

“허장성세지. 사실은 쓰고 싶은 의욕이 전혀 없어.”

“어째서요?”

“모르겠어. 어쩌면 재능이 말라버렸는지도......”

애거서는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그럴리가요! 아까 읽어본 부인의 책은 정말 대단했는걸요!”

여사는 비웃음 띤 얼굴로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 - 그러니까 한 십년 전 - 처음 썼던 책이야. 그때는 정말 세상이 내것 같았지. 꽤 인기도 얻고 돈도 벌고.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글쓰는 일이 점점 부담스러워졌어. 타자기가 밉고 펜촉이 증오스러울 정도로.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쓰고 있더라구. 난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몇 년 정도 쉬다가 다시 시작하기로 했었지.”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아까 본 대로야. 독자들은 어디에 박혀있다 다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옛날 작가를 별로 반기지 않아. 출판사는 좀더 유행을 타는 책을 만들고 싶어하고. 난 살아있는 화석이지. 오웬 경이 수정궁에 세워둔 그놈처럼.”

애거서는 오웬이 누군지 몰랐지만, 여사의 실망이 상상 이상임을 직감했다.

“그래도 부인만이 낼 수 있는 색깔을 찾아낸다면...”

“색깔이라... 글쎄. 어릴 때는 치기라도 있었지. 핀란드에는 가본 적도 없는 주제에 핀란드인 탐정을 만들어내어 재미있게 놀았고. 하지만 이제는 늙었는지 뭘 하려고 해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버려. 뭔가 새로운 구상을 내놔도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라고 내 스스로가 딴지를 걸어버리는 거야. 작가가 스스로 즐기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독자를 즐겁게 해 주겠니?”

“하지만...............”

“위로해주려는 마음 알아. 하지만 세상엔 인정해야만 하는 게 있어. 그게 아무리 눈물나게 억울한 일이라고 해도.”

“올리버 부인......”

“이제 돌아가면 사무실을 정리하고 런던을 뜰 생각이야. 하지만 그 전에 나를 찾아준 손님을 위해 사과 파이라도 만들까 하는데, 어때?”

“저는 파이보다...... 부인이 글을 계속 쓰시는 걸 보고 싶어요.”

여사는 허리를 굽히고는 다정한 얼굴로 소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까지 걱정해 주니 고맙구나... 여기서 기다려 주겠니? 저쪽 과일 좌판에 가서 신선한 사과를 더 사올게.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아, 저...........”

애거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여사는 수풀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공원 내부에 매점을 겸해서 과일을 파는 장소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애거서는 하릴없이 발밑의 돌멩이를 톡톡 차면서 길 옆의 공터를 빙빙 돌았다.

한참 지났을 때, 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

대답이 없었다. 애거서는 호기심에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다. 보나마나 작은 들짐승이나 누구네 애완견 정도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간 것이 화근이었다. 덤불이 우거진 뒤편으로 가 보니, 그곳에서는 신경질적으로 생긴 사내 한 명이 커다란 삽을 들고 뭔가를 급히 파묻고 있었다. 그는 애거서를 보고 깜짝 놀라서 삽을 내던지고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애거서는 달아나려 했으나 보폭의 차이 때문에 금방 붙들리고 말았다.

“뭘 봤지? 뭘 본 거야? 아무것도? 거짓말... 뭐 어떻든 상관없지. 미안하지만 너도 같이 땅 속에 좀 묻혀줘야겠어. 난 유치장에 가기에는 할일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싫어.........”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천국으로 가는건데 뭘 그래...”

사내는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우악스런 손놀림으로 애거서를 붙잡고 밧줄로 그녀의 손발을 묶어놓은 다음, 삽을 다시 집어들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직접 죽이기는 힘들고 껄끄럽기도 하니 그냥 생매장하려는 모양이었다. 애거서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눈치챈 사내가 진흙을 한웅큼 집어들어 입에 쑤셔넣었다. 냄새는 둘째치고라도 목이 컬컬하고 숨이 막혔다.

이윽고 구덩이를 다 판 사내는, 꿈틀거리며 저항하는 애거서를 그 안에 밀어넣고 흙을 급히 떠서 구덩이에 밀어넣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흙빛으로 덮여가고 몸이 땅과 하나가 되어간다. 애거서는 안간힘을 다해 발길질을 해서 흙이 밀려드는 걸 막으려 했지만, 사내가 낄낄거리며 휘두른 삽에 찍힐까봐 그것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애거서는 점점 좁아져가는 숨구멍 사이로 사내의 광기에 찬 얼굴을 보고 겁에 질렸다.

“..................................!!”

바로 그때, 사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뭔가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코에서 검붉은 피를 쏟아내더니 뒤쪽으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상기된 얼굴로 무거운 사과자루를 치켜든 올리버 여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자루를 기절한 사내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일어나지 못하게 두 발을 서로 묶은 다음, 허겁지겁 달려와 애거서가 묻혀 있는 구덩이를 파내기 시작했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도와줘서 애거서는 신속하게 구조되었고, 곧이어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사내를 체포했다.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첫번째 구덩이도 파헤쳐졌다. 마치 나무를 깎아놓은 것처럼 무뚝뚝한 인상의 배틀 총경은 그 안에 뭐가 묻혀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지만, 적어도 어린이가 보아서 기분좋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흙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건강한 애거서는 올리버 여사와 함께 사건 진술을 끝내고 경찰과 동행한 의사로부터 간단한 진찰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 지긋지긋한 현장을 떠나 귀로[歸路]에 오를 수 있었다.

“그때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부인이 아니었으면...”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되었었나봐. 그렇게 위험한줄 알았으면 같이 데리고 가는건데.. 정말 면목이 없다.”

“미안하면 한가지만 소원을 들어주세요.”

“응?”

“글쓰기, 포기하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아직도 그런 소리를... 나는 더이상......”

“생매장 당할 뻔한 소녀 이야기를 쓰시는 거예요.”

“...........................”

“히트할지 누가 알아요?”

여사는 방금까지 죽다 살아난 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애거서의 무신경함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아이가 내가 펜을 꺾는 것만 보고 이 세상을 떴다면...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제대로 방향을 잡는다면.

“.............좋아. 하지만...”

“뭔데요?”

“얘기를 늘리기 위해 두들겨맞고 칼로 찔리고 물도 먹고 어쩌면 더 심한 짓도 당하게 될지 몰라. 그래도 좋아?”

“앗, 그건 좀...........”

“싫으면 말고.”

애거서는 당했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셔도 돼요. 다만 손가락을 다치게 하지는 마세요.”

“어째서?”

“그 소녀도 작가가 꿈이니까요.”

“그렇구나. 고려해 볼게.”

여사와 소녀는 공원 밖으로 나오며 서로 마주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공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체구가 컸지만 비대하지는 않았고, 알맞게 벗겨진 대머리는 고상한 품위가 엿보였고, 튼튼한 안경 너머로 상냥한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분위기는 잉글랜드인보다는 미국인에 가까웠다. 애거서는 어쩐지 그 남자에게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올리버 여사? 저는 파커 파인이라고 합니다. 부인의 작품은 잘 읽고 있죠.”

“그러세요? 근데 어쩌지, 지금은 시간이.....”

“잠깐이면 됩니다. 실은 타임즈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당신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해 제보를 받았죠. 그래서 말입니다만, 저희 사무실과 제휴를 맺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 하고 여쭤보러 급히 달려온 겁니다.”

“제휴라뇨?”

“길거리에서 설명하긴 좀 복잡하군요.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며 천천히 말씀드리면 안될까요?”

올리버 부인이 망설이는 듯한 눈치를 보이며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애거서는 ‘난 아무래도 좋은데’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뭔가 낯익은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회중시계를 든 콧수염 신사!

애거서는 올리버 부인과 함께 들고 있던 사과자루를 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단히 고마우신 말씀이네요... 그럼 제 동행도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여사님의 동행이오? 혼자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어머 농담도 잘 하셔라... 바로 옆에 이렇게.......어라?”

애거서의 모습은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진 뒤였다.





“---나더러 어쩌라고오오오오오오오!!!!!!!!!!!!!!!!!!!!!!!!!!!!”

또 함정에 걸려들었다. 이번엔 녹색 구멍이다. 한참동안 대형 수영장의 자이언트 슬라이드와도 같은 좁고 길다란 통로를 통하여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던 애거서가 마지막으로 떨어진 곳은 다소 어두컴컴한 어느 1층 건물 안의 서재였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평소때 같으면 다들 자러 가서 조용해야 할 그곳은 난데없는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오 이런 세상에...어떻게 목사관에서 이런 일이!”

“피해자 신원은? 아직 시체를 뒤집어보지 않아서 모른다고?”

“밀지 말아요! 들어오면 안됩니다! 현장을 보존해야 해요!”

“경찰은? 멜쳇 대령은 아직인가?”

“그나저나 저앤 누구죠? 이 근처에선 못보던 앤데......”

난데없이 벽을 뚫고 미끄러져내려온 애거서의 모습을 보고 누가 소리쳤다.

‘......이번엔 또 뭐야?’

머리를 기둥에 부딪혀 생긴 혹을 어루만지며 애거서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머리를 만지던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까보다 마디가 길어져 있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세로로 긴 전신거울 안에서는 열여덟 살의 애거서가 겁먹은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실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의젓하고도 명랑한 인상을 주는 짧은 콧수염의 젊은 남자, 짧게 자른 검은 머리와 담갈색과 녹색이 섞인 기묘한 눈동자를 지닌 예술가 타입의 젊은 여자, 아주 깡마른 몸에 안경을 끼고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법률가 타입의 중년남, 잘 차려입고 다소 세속적인 인상을 주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친네, 불그스름한 얼굴에 널찍한 어깨를 지니고 허풍이 셀 듯한 군인 타입의 중년남과 항상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남편을 지켜보는 그의 부인, 커다랗고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뜬 금발의 멍해보이는 여자, 그리고 집 주인으로 생각되는 교구 목사와 그의 젊은 부인, 마지막으로 어깨에 숄을 두르고 백발을 말아올린 채 빛바랜 듯한 푸른색 눈동자로 사방을 관조하면서 뜨개질을 멈추지 않는 노부인이 있었다. 애거서는 그녀를 보고 순간 자기의 할머니를 연상했다.

그리고 서재 바닥 한가운데에는 나이트가운 차림의 젊은 여자가 등에 칼이 꽂힌 채 비스듬하게 엎드린 자세로 서재 바닥을 가로질러 누워 있었다. 그 때문에 얼굴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죽은지 얼마 안 된 듯 핏자국이 선명했다.

“아가씨, 어디서 왔어? 여긴 외부인이 함부로 올 곳이 못돼. 어서 돌아가.”

“저도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닌데요... 콧수염 난 외국인을 쫓다가...”

“뭔 얘기지? 헛소리까지 하는군요. 의사가 도착하면 이 아이도 진찰을...”

“차 소리가 들리네요. 헤이독 박사가 오시나 봅니다. 경찰차도 보여요.”

“아이구 더러워라, 말만한 애가 어디서 놀았길래 저렇게 흙투성이야!”

“레이몬드, 네가 저애만할 때 어땠는가 얘기해 주랴?”

“그만두세요 이모님. 지금은 비리 들추는 시간이 아닙니다.”

“난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구나.”

“정말이세요? 누구죠? 누구?”

“그만둬요 조이스. 당신도 이모님이 한번 발동걸리면 어떤지 알잖아요...”

그때 문이 열리고 경관 몇명이 우루루 몰려들어왔다. 그들을 지휘하는 키작은 사내가 목사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부하들에게 현장검증을 지시했다. 그와 함께 중년의 의사가 들어와서 도구를 꺼내들고 시체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여기 계신 분들은 클럽의 정례 모임을 하시던 중에......?”

“그런 셈이죠. 마침 화제가 살인에 관한 거였는데 진짜로 이리 되다니 거참.”

불그스름한 얼굴의 사내가 과장된 몸짓을 취하며 얘기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깡마른 남자가 말을 꺼냈지만 키작은 경찰서장은 보기좋게 묵살했다.

“여러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여기서 일단 나가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북적거리면 수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잠깐만 대령. 여기 계신 ......양이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오.”

잘 차려입은 도회풍의 노인이 능글맞게 손을 들고 말을 꺼냈다.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중간 부분은 잘 들리지 않았다.

커플임이 분명한 젊은 콧수염의 남자와 예술가 타입의 여자가 거들었다.

“맞아요. 제인 이모님은 이제까지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죠.”

“어서 말씀해 주세요. 이모님, 범인이 대체 누굽니까?”

숄을 걸친 그 노부인은 잔잔한 표정으로 사방을 스윽 둘러보더니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한 팔을 들어올려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멀뚱거리고 있던 어린 애거서를 정면으로 가리켰다.

“---저 소녀다.”

“에엣?!”

“정말이세요?”

“납득이 가질 않는군요.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맞아요. 어째서 내가 범인이란 거예요? 난 여기 방금 도착했다고요!”

애거서가 앙탈을 부리며 달려들자 그 노부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박사님, 시체의 얼굴을 이 아이에게 보여주시죠.”

의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일단 그 말대로 했다. 시체가 조심스레 뒤집혀 땅에 바로 눕혀지자 모두가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드러난 그 시체의 얼굴은----------

“.................................!!!!!!?”

바로 현재의 - 20대의 애거서 자신의 얼굴이었다.

“이젠 알았을 게다. 어째서 네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지를.”

“지금 장난하세요? 저기 엎어져있는것도 나고 여기 서있는것도 난데 그럼 대체 어떻게 내가 나를 죽였다는 거죠? 궤변도 이런 궤변이 어디있냐고요!”

사실 또 다른 자기 자신이 시체로 누워있다는 사실만 해도 충분히 괴이한 것이었지만, 졸지에 살인범으로 몰린 애거서에게는 이미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저 냉정한 노부인에게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노부인은 다시 뜨개질을 계속하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꿈을 포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

노부인은 잠시 사이를 두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구나. -대령, 그녀를 데려가세요.”

뜻밖의 대답을 들은 애거서가 멍하게 서 있는 사이에 경관 둘이 다가와서 그녀의 양쪽 팔을 끼고 연행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버둥거리며 이거 놓으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들의 팔짱은 매우 단단하여 좀처럼 빠지지를 않았다.

그때, 애거서의 시선에 또 한번 낯익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목사관 정원 바깥으로 바로 그 콧수염 신사가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놓으라니까!”

애거서는 난폭하게 외치며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경관들의 팔을 뿌리치고 놀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목사관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직 노부인만이 잔잔한 미소를 띤 채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저씨! 이번엔 도망 못가요. 제발 얘기해줘요. 여긴 대체 어디에요?”

“이런! 마드모와젤[아가씨], 아직도 헤매고 있었나?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지만- 적어도 여기는 내 아파트만큼 질서정연한 곳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하여튼 나도 내 일 때문에 도와줄 수 없어서 유감이야!”

그들은 또다시 시공의 구별이 없는 요상한 영역 속을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콧수염 신사는 어느 틈에 눈처럼 새하얀 야회복으로 갈아입고 에메랄드가 박힌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바삐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애거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에는 레이스 달린 스커트를 입은 열두살의 모습이었지만 다음 순간에는 치렁치렁한 가운을 입은 20대의 모습으로, 그리고 또 그 다음 순간에는 열다섯살로, 때로는 열여덟살로-

본인조차도 어느 쪽이 진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오! 다행히 늦지 않았군. 이제 난 가봐야 해.”

그 신사가 하늘을 쳐다보고 뭔가를 발견한 듯 쾌활하게 소리쳤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힌트라도 주면 안돼요?”

“옆에 거울들 있지? 한번 들여다 봐. 그럼 오 르부아[또 봅세]!”

콧수염 신사는 그 말을 마치고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하늘을 나는 잠수함에 올라타고 유유히 손을 흔들며 가 버렸다. 잠수함의 차창으로는 염소수염을 기르고 선량하지만 걱정거리가 많은 듯한 젊은 남자, 매혹적이면서도 공허한 얼굴로 담배를 태우는 러시아의 백작부인,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뚱한 얼굴의 비서, 그리고 명예욕에 불타는 불독 같은 남자의 얼굴들이 언뜻언뜻 비치곤 했다.

‘......거울이 어디 있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달려가던 애거서의 주위에, 마치 한여름 비온 뒤에 죽순이 솟아나듯 갖가지 모양의 거울들이 땅을 가르고 일제히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애거서는 멈춰서는 것도 잊은 채 계속 달리면서 그 거울들 안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그녀가 어느 쪽으로 달려가든 거울은 그 뒤를 쫓아가며 계속 솟아났다.

“...........................아?”

거울 속에서 그녀가 본 자신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다.

어느 거울 안에는 제일 처음에 만났던 검은 머리의 종군 간호사가 뛰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간호사의 옷을 벗어던지고 한껏 멋을 낸 차림으로 거울 밖의 애거서에게 윙크를 하며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다른 거울 안에는 두 번째로 만났던 소설가 부인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반쯤 백발로 변해버린 머리를 쓸어올리며 사과를 깨물면서 타자기를 앞에 메고 열심히 새 글을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녀 역시 거울 밖의 애거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기의 길을 향해 달려갔다.

또 다른 거울 안에는 세 번째로 만났던 노부인이 역시 숄을 걸친 채 마차를 타고 유유자적하게 뜨개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완성된 보라색 숄을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과 바꿔 걸치고 품에서 호루라기를 꺼내어 삑 하고 크게 불었다. 그녀 역시 거울 밖의 애거서에게 목례를 하더니 마차와 함께 더 먼 곳으로 달려가버렸다.

그밖에도 수많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 거울 속을 달려가면서, 거울 밖의 자기를 향하여 손짓하고, 윙크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꾸짖기도 했다. 그것을 보면서 애거서는 자기가 무엇을 찾기 위해 이렇게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인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꿈을 포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

한 명의 애거서가 열두살과 스무살의 모습으로 번갈아 변하며 달려간다.

열두살의 애거서와 스무살의 애거서가 두 명으로 분리되어 달려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둘은 하나로 겹쳐진다.

“...그리고... 내가 미래에 만들게 될 모든 것을 죽이는 일...

............................그렇구나!”

그 순간, 애거서는 달리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스스로의 의지로.

사방에 솟아나온 거울들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며 무너져내린다.

주변의 풍경이 체스판에서 장기판으로, 장기판에서 오셀로판으로, 오셀로판에서 바둑판으로, 바둑판에서 다시 체스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은 하나의 검은 점[點]으로 축소되어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그 검은 점은-

바로 침대 위에서 눈을 번쩍 뜬 애거서의 눈동자였다.

“-와우!”





“내가 며칠동안 자고 있었다고요?”

“일주일.”

“그렇게나...? 난 하룻밤밖에 안된줄 알았는데...”

“하룻밤이 다 뭐냐, 이것아. 네가 문 잠궈놓고 하도 안나오길래 다음날에 문을 뜯고 들어가보니 아주 세상모르고 자더구만. 그래서 언제까지 자나 봤더니... 네가 무슨 아프리카 수면병에라도 걸린 줄 알고 혼비백산했다.”

애거서는 파자마 차림으로 침대 위에 누워서 멀건죽에 가까운 닭고기 스프를 억지로 떠먹고 있는 중이었다. 지나치게 오래 잤기 때문에 체력이 쇠약해져서 차근차근 회복을 시켜야 한다고 의사선생님이 말했다나.

친지들이 한바탕 문병을 온 뒤에, 이웃에 사는 사람 좋은 작가 아저씨도 걱정스런 얼굴로 찾아왔다. 애거서가 글쓰기 공부를 하도록 도와준 장본인이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좀 어때? 이젠 괜찮다고? 한시름 놨구만. 마침 새 책이 도착해서 애거서에게도 한번 보여주려고 갖고 왔지. 뭐라고, 제목이 왜 이러냐고? 아니 <붉은머리의 레드메인>이 뭐 어때서 그래?! 건강해지면 심심풀이 삼아 읽어봐. 평도 해주면 더욱 좋겠어.”

그날 오후에는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밀러 양?”

“크리스티 씨! 어떻게 여길?”

아치볼드 크리스티는 각잡힌 군복이 상할세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체면을 다 내던지고 침대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거서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물론 걱정이 되어서 찾아온 겁니다. 괜찮습니까?”

“당연히 괜찮죠. 하여튼 걱정해 주셔서 고맙네요.”

“할 말은 그것 뿐입니까?”

“당신이야말로 할 말은 그것 뿐인가요?”

“당신이 먼저 하도록 해 드리죠.”

“당신이 먼저 해도 난 상관없어요.”

“당신 먼저...”

“아니, 당신 먼저.”

문 밖에서 엿듣고 있던 애거서의 어머니는 이 답답하기 짝이 없는 두 인간의 대화에 울화통이 터져 거의 문을 뚫고 들어와서 소리를 지르려 했다. - 옆에서 충실한 하녀 글래디스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거의 그럴 뻔 했다는 소리다.

“좋아요. 내가 먼저 말하죠.”

마침내 애거서는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당신은 믿을만한 사람이고 어머님도 반대가 없으시니 결혼을 고려할만 해요.”

“‘고려할만 하다’는건 대체......?”

“다만 한 가지만 제 뜻대로 하게 해 준다면요.”

“......글쓰는 거 말인가요?”

“그게 없으면 저는 죽을 거예요. 아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많은 이들이 죽게 돼요. 글쎄 어떤 의미에선 죽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나 원한다면... 대신 너무 몰입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겠어요? 그것 때문에 언젠가는 당신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까봐 걱정되는군요.”

“아뇨, 그런 약속은 못 해요.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다만 내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어서죠. 물론 그렇다고 집안 살림을 게을리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타협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이 실망할까봐 미리 이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당신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소.”

“그건 아마도 당신이 내게 반했다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겠지요.”

아치볼드는 잠시동안 그 말을 되씹어본 끝에 겨우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나도 일단 ‘고려해 보겠소’.”

“좋으실대로.”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을 하고 아치볼드가 떠나간 뒤, 애거서는 어머니로부터 ‘어떻게 그런 식으로 튕길 수 있느냐’고 장장 2시간에 걸친 설교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단호했다.

어머니가 나간 뒤에 종이조각에 뭔가를 메모하면서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내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되건, 애거서 밀러로 남건, 그건 결국 내 작품의 표지에 어떤 글자를 박아넣느냐 하는 차이일 뿐이잖아, 안 그래?”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바로 당신이죠.”

“뭐야? .........당신, 언제 여기에?”

그 검은 머리칼의 남자는 말없이 웃기만 하면서 찻잔을 내밀었다.

포근한 향기, 모든 근심을 씻어내줄 듯한 진한 맛이 느껴졌다.

“...당신도 그들 중 하나야? 내가 당신들에 대해 쓰게 되는 거 맞지?”

남자는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영롱하게 반사된 햇빛을 받은 그의 옷이 마치 어릿광대의 가장복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눈의 착각일 뿐이었다. 그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평이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단지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매력적인 가능성이죠.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독자들이 당신의 글을 보고 웃고 울고 위안을 얻고 스릴을 느끼며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겁니다. 그건 확실히 아름답죠.”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크리스티 부인으로 일생을 마치면?”

“그것 또한 당신의 선택입니다.”

그 남자는 짓궂게 웃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이 마음먹는다면 둘 다 실현될지도 모르죠. 물론 올리버 부인처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갈지도 모르고요.”

“둘 다라....... 상당한 결심이 필요하잖아, 그러면 말야, 만약 내가....... 어?”

애거서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돌려 보자, 남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옆에 내려뒀던 찻잔도 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오월의 장미를 연상시키는 짙은 향기는 여전히 애거서의 입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시트를 걷고 침대 옆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 간에...... 하루아침에 다 되지는 않을 것 같군.”

아마도 아직은 머나먼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들’을 자신의 글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 날까지는.

“이것봐. 세상 사는게 그렇게 쉬운 줄 아니? 때로는 내가 왜 뛰쳐나왔지? 하고 후회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란 말야. 때로는 진짜 눈물 쏙 빠지게 억울한 일도 당해봤고.”

간호사의 말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녀의 말은 일종의 예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죽는 건 한번으로 충분하니까...”

애거서는 기운차게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걸터앉아 펜촉을 꺼내들고 잉크병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구상하고 있던 내용을 재빠르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스타일즈 저택에서 여름을 보내던 때의 일이었다--------’

미래로의 제1보였다.





THE END





Dedicated to Dame Agatha Christie (1890~1976)

This short is a work of pure fiction.

The events in this short may not be accurate with the actual data.

(C) ZAMBONY 200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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