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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29] 울트라하 S.O.L. #2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2:33
 



기온이 제법 올라갔다. 이제는 반팔에 반바지가 일상 다반사. 거리에 녹색으로 우거진 나뭇잎들 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스며들어온다. 비라도 내려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시 하늘을 쳐다보지만 창공은 언제나 원망스런 파란색. 습도는 높아지고 거리에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애써 발걸음을 재촉하며 제각기 갈 길을 가고 있다. 아무리 지독한 더위라도 생활 그 자체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 적어도 이 지역에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땡볕이 내리쬐는 5월의 길거리를 걸어가던 하라대원과 피요대원 두 사람은 잠시 그늘 밑에 자리하고 있는 통나무 벤치 위에 걸터앉아 지친 다리를 쉬려고 한다. 모처럼 비번이라고 간만에 쇼핑이나 하러 나왔더니 삼복 더위가 이렇게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을 줄이야. 하라대원은 들고 있던 백에서 음료수 캔을 꺼내어 후배에게 건네주고, 피요대원은 허리에 차고 있던 MDA (Multiple Digital Assistant ; 다목적 디지털 휴대장치)를 떼내어 tv 수신모드로 전환했다. 마침 화면에는 저명한 지구과학자 알비레오 라스카 박사가 나와서 라마존강 유역의 환경 파괴에 대해 해설하고 있었다.

“무절제한 벌목으로 인해 훼손되는 수목량은 이미 지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이며...”

갑자기 현기증을 느낀 피요양은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최근에 인기를 모으고 있는 가수 해롤드 어비스의 보컬곡을 들으면서 두 사람은 음료수 캔을 거의 동시에 기울였다. 두 사람의 시야에 어디까지나 펼쳐져 있을 듯한 푸른 하늘이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는 5월의 하늘이.

그리고 카메라는 두 사람의 시선을 떠나, 하늘로부터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곳에는 뱀처럼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위대하고 신성한 강과 그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수풀이 있다. 사람들은 그곳을 라마존이라고 부른다.




울트라하 외전 「SISTERS OF LIGHT」

제 2장 로사Rosa




“옳지 않아.”

후덥지근한 밀림의 공기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 거대한 선풍기가 천장에 매달린 채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 두 사람의 자리가 있다.

“그건 정말로 옳지 않아.”

로사 마르티네즈는 흑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거의 자신에게 다짐하듯 강하게 말했다. 그녀와 그녀의 동료인 호세 페르데리카는 직장 근처의 싸구려 선술집 카운터에 앉아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흙빛과 물빛이 뒤섞인 삼림경비대의 대원복을 입고, 팔뚝에는 ECR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완장을 차고 있었다. 호세가 비어버린 상대방의 잔에 술을 더 따라주며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말도 했다.

“물론 원칙대로 한다면 그 지역 전부를 보호구역으로 넣지 않으면 안되겠지. 하지만 윗대가리들이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고.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할말은 있을거야. 실제로 그 지역에서 해마다 벌목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적지 않은데다, 완전히 벌목을 금지해 버리면 당장 거리로 나앉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 목공소나 목재운반업 쪽에서도 손을 잡고 로비를 벌이는 형편이니까.”

“문제는 그렇게 해서 허가를 받는 구역이 해마다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거야. 덕분에 원주민들의 생활권은 물론이고 지구 전체의 산소 생산에까지도 위협을 주게 생겼으니까 곤란하다는 거잖아. 더더욱 곤란한건 아직 허가가 나지 않은 지역에서까지 공공연히 불법적인 벌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지만.”

“마음은 알겠지만 말야, 라마존은 넓고 우리 예산은 보잘것 없어. 그나마 현지 정부들도 우리들의 파견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아서 지원도 기대할 수 없고.”

“불청객이라 이건가...”

남부 아메리고 대륙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열대우림은 지구 환경의 생명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연의 비경이다. 그러나 이곳은 수십년 전부터 무분별한 벌목과 화전의 경작, 밀렵, 그리고 관광객들의 자연파괴로 중병을 앓고 있었다. 로사와 그녀의 동료는 그러한 열대우림을 지키기 위해 AOL(국제자유연합)이 특별히 조직한 초국가적인 환경보호단체 ECR(Environmental Crime Restrictors ; 환경범죄대책반)의 멤버였다. 그러나 초국가적인 단체라 해도, 그 규모나 장비는 아직 초보 단계였고, 점점 조직화․지능화되어가는 벌목업자와 밀렵꾼들, 그리고 그들의 간섭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현지 행정부와의 마찰 때문에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 권한이나 능력도 현지 경찰과 충돌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오직 환경에 관련된 범죄만을 수사․체포․보고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재판권이나 처분권은 거의 맡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AOL 내부에 존재하는 관료주의의 두터운 벽에 의해 점차 줄어드는 예산도 골칫거리였다. 로사와 호세는 근무 도중에 잠시 틈을 내어 쌓이는 격무에도 불구하고 도통 지원해 주려 하지 않는 본부나, 도와주는 것 없이 발목만 잡는 현지 정부에 대해 서로서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신들이 바로 에코 레인저스(Eco-Rangers)입니까.”

ECR을 비공식적으로는 환경 순찰대, 즉 에코 레인저스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맥주를 다 비우고 나서 더 시킬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두 사람 곁으로 왠지 조잡한 듯한 인상을 주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적당히 햇볕에 태운 얼굴과 이런 밀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도회적인 말쑥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로사는 순간적으로 어느 경제 전문지에서 그의 사진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우드헤드 코퍼레이션의 라마존 담당 상무, 리카르도 에르난데스 씨?”

우드헤드사는 이 일대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북아메리고의 대표적인 벌목 기업이었다. 그러나 대기업에 어울리지 않는 비열한 수단을 많이 동원하여 경원시되고 있기도 했다. 특히 리카르도는 로비의 귀재로 소문나 있었다.

“저같은 사람을 기억해주셔서 대단히 영광이로군요.”

“무슨 볼일이시죠? 벌목허가에 관한 거라면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만.”

호세가 차갑게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리카르도의 각진 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별로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님을 재빨리 간파하고 용건만 말하기 시작했다.

“실은 저번주에 마소나스에서 체포된 몇몇 불쌍한 노인들에 대한 건데 말이죠.”

“그들은 허가받지 않은 구역에서 규정량 이상의 벌목을 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도저히 여기서는 구할 수 없는 정밀 사격용의 총기류로 보호동물 십수 종을 학살했죠. 어떻게 보아도 용서받지 못할 범죄였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로사의 단호한 대답에 호세 또한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밀렵꾼들이 설령 당신네 회사와 계약을 맺은 자들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죠.”

리카르도는 여전히 석고를 깎은 듯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자신의 뜻을 전하려 했다.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잡힌 이들에 대한 것까지 신경써 달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여러분들이나 저희나 피차 피곤할 뿐입니다. 어떻게든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잘해보자는 거지요. 물론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전혀 문제될 것 없어요.”

“돈으로 우리를 사겠다는 겁니까? 별로 좋은 대답은 못 드리겠는데요.”

로사의 차가운 대답에 리카르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을. 단지 상부상조하자는 뜻을 전한 것 뿐이었습니다. 저희는 사업가이고, 여러분들도 크게 보면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여기에 오신 것이니까요.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보자는 말이죠.”

뻔한 경제이론을 들먹이는 데 진력이 난 로사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리카르도 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에게 말했다.

“세뇨르 에르난데스, 당신은 돈에 대해서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이곳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군요. 당신은 첫째로, 겉으로는 좋은 말만 늘어놓으면서 사실은 우리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를 매수에 넘어갈 만큼 얼벙한 팔푼이들로 여겼어요. 둘째로, 당신은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오류를 범했습니다. 지금 당장 몇몇 사람에게 이익이라고 해서 보다 장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해가 돌아갈 일을 감수한다는 것은 오히려 비경제적이 아닐까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리카르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건 참 유감이군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시게 될 겁니다.”

로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술값을 지불한 뒤 말없이 술집을 나섰다. 호세 또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라갔다.

리카르도는 그들이 떠난 자리에 앉더니, 얼마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테킬라를 한잔 주문하고는 주머니에서 PRT(Personal Remote Transmitter ; 개인용 원격 통신기)를 꺼내들었다.

“EX-10, 예정대로다. 실수없이 하도록 해.”



거대한 계곡을 시원하게 씻어내리는 폭포수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사방에서 열대새의 합창이 들려오고 뭔가가 숲 속을 헤쳐가는 소리도 들린다.

레인저의 라마존 지부 대원은 총 14명. 그러나 그중 3명은 풍토병과 해충의 독으로 인해 근처 병원에 실려갔고 4명은 벌목꾼과 결탁한 일부 원주민들과 격전을 벌이다 부상을 입어 다른 지방으로 이송되었다. 남은 7명 중에서 비상 대기조와 행정직 요원을 제외한 3명만이 실제로 이번 순찰에 나선 총 인원이었다. 정확한 판단력과 굽히지 않는 신념의 소유자인 로사 마르티네즈, 모나지 않은 성격에 항상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그녀를 보좌하는 호세 페르데리카, 그리고 배속된지 얼마 안 되어 실수 투성이지만 자기딴에는 노력파를 자처하는 미구엘라 알론조였다. 그들은 풀베기용 단검을 들고 최소한의 장비만을 갖춘 채 우거진 수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날 그날의 정해진 구역을 순찰하고 있었다.

“이 근처부터는 콰달케나르 족의 영역이니까 더욱 주의해야 해.”

“함부로 침입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아닐텐데요? 선배님은 뭔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

미구엘라도 때로는 날카로운 직관을 발휘한다. 그러나 어딘가 주변의 공기가 이상한 것을 느낀 로사는 칭찬하는 대신 재빨리 그녀의 말을 가로막는다.

“그말대로야. 하여튼 발밑에 독사나 줄무늬개구리가 없는지 조심하고. 이상한 덩굴이 보여도 함부로 만지지 마. 아냐, 그쪽이 아니잖아!”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저렇게 흉하게 불탄 쪽으로 갈 생각도 없답니다.”

로사는 지난번 순찰 때 벌목꾼들이 임시로 가설한 자동차용 다리를 불태운 일을 떠올리고는, 한동안은 그렇게 대규모의 위반행위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마르티네즈, 이쪽을 좀 봐. 뭔가가 쓰러져 있는 것 같은데.”

“야생 원숭이 아냐? 함부로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일단...”

그러나 호세는 이미 그쪽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고 로사는 그를 말리기 위해, 미구엘라는 그들과 떨어질까 걱정되어 결국 그쪽으로 모두 몰려드는 꼴이 되었다. 풀숲과 덩굴로 가득한 그곳에 쓰러져 있는 것은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야릇한 전통 무늬로 장식된 옷감과 얼굴에 물감으로 그려져 있는 태양의 패턴을 보고 로사는 그 아이가 콰달케나르 족임을 알아차렸다.

“약초라도 캐러 나왔었나 본데? 다행히 독이 침투한 건 아니군. 뭔가 순간적인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거야. 미구엘라, 수통 좀 줘봐. 호세는 찜질약을 밴드에 개어줘. 일단 일사병에 걸리지 않게 그늘로 옮기자.”

그 소녀에게 응급처치를 하면서, 로사는 잠시 고향에서 알던 누군가를 생각했다. 그녀는 아마 지금도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이 지구 어딘가를 달리고 있으리라. 지난번 편지로는... 거기가 어디라고 했더라...

“으응......”

“정신이 들었니? 이젠 괜찮아. 해치지 않을거야.”

로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소녀에게 더듬거리는 원주민 언어로 말을 걸었다. 소녀는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아주 잠깐이나마 웃는듯 마는듯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목에 건 조가비가 흔들거렸다.

그런데 그때, 미구엘라의 비명과 호세의 둔탁한 신음소리가 로사의 귀청을 자극했다. 그들이 소녀에게 신경쓰는 동안 뒤편에서 한떼의 무리들이 달려나와 두 사람을 엄청난 힘으로 찍어누르고 포박했던 것이다.

로사는 재빨리 소녀에게서 물러나 허리춤에 꽂혀있던 신경마비탄을 T리볼버에 장진하고는 사격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모여든 콰달케나르의 전사들은 총을 보고도 겁내지 않고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잡으려 했다. 젠장, 이래서 옛날 모험영화를 그대로 따라하면 안된다니까.

로사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가장 앞쪽에 서서 접근해 오는 젊은이 두세명을 향해 몇 발을 조심스레 쐈다. 마비탄은 피부에 닿으면 급속히 터지면서 특수한 약물이 땀샘을 통해 스며들도록 하여 상대를 수시간 동안 마비시킨다. 그러나 이번에는 명백히 효과가 없었다. 탄환을 맞은 젊은이들은 약물과 앰플을 가볍게 털어버리고 묵묵히 앞으로 걸어왔다. 이럴 리가 없는데. 누가 해독제를 미리 공급하지 않은 한은 절대로 이럴 리가...

다시 생각해 보시게 될 겁니다.

에르난데스 선생, 당신이 말한 게 이런 거였다면 차라리 마피아가 낫겠어!

세 사람은 빈틈없이 포박되어 어딘가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전사들 중 어린 티가 남아 있는 한 소년이 앞으로 달려와 겨우 몸을 가누게 된 소녀를 부축하여 그 뒤를 따라왔다. 소녀는 뭔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황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로사는 끌려가면서 쓸데없이 화창한 하늘에 대고 욕을 했다.

“선배님, 그렇게 화를 내면 피부에 안 좋대요~;;;”

미구엘라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을 하고 있었다. 호세는 마치 참선하는 승려처럼 말없이 눈을 감고 있다. 체력을 아껴 두자는 얘기겠지.

깃털이 오색으로 물든 새 한마리가 난데없이 활개치며 서쪽으로 날아갔다.



“귀한 손님들을 이렇게 대접해서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사정이란 게 있어서 말이다.”

그 남자는 원주민 액센트가 섞인 에스판어로 말을 시작했다. 아마도 바깥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와 통역 일을 맡던 사람일 것이다. 나이는 한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고 희끗거리는 머리에는 깃털과 풀잎사귀가 섞여 있었으며 다른 전사들보다 두 겹 더 천을 두르고 있었다. 얼굴에 그려진 문양은 기괴하게 꼬인 새와 나무들로 보였다. 로사는 그 사정이란 게 뭔지 대단히 궁금했다.

“어째서 우리들을 공격한 것이지? 우리는 당신네 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 숲의 나무들이 잘 있나 살펴보러 다닐 뿐이야. 그 일만 끝나면 돌아갈 거라구. 빨리 우릴 놓아주지 않으면 바람개비 새가 날아와 당신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텐데.”

바람개비 새란 이곳의 방언으로 헬리콥터를 말한다. 물론 본부에는 헬리콥터가 남아있지 않았다. 석달 전 대규모 밀렵단속을 하던 중에 수소압축탄으로 무장한 밀렵꾼들의 반격을 받아, 두 대가 추락하고 한 대는 가까스로 불시착했다. 승무원은 탈출해서 무사했지만 전력이 크게 줄어든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로사는 자신의 허풍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다.

“아주 잠깐 동안이면 된다. 우리도 당신들이 나쁜 마음은 없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와 약속한 어떤 이들이 곧 오기로 되어 있어서- 그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만- 여기 있어줘야겠다.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당신네 조상의 땅을 망치러 오는데도 말인가?”

“대지는 위대하다-. 이방인들이 아무리 그 은혜를 갉아먹어도 대지는 언제고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웃어준다. 게다가 말이지, 이방인들은 몇 번만 눈감아주는 대가로 꽤나 유혹적인 걸 선사했거든.”

로사는 그 남자의 눈이 반쯤 풀려 있는 걸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그랬구나. 우드헤드사는 이곳에서 허가받지 않은 수확물을 가져가는 대신에 이 전사들에게 마약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까 마비탄에 반응하지 않았던 이유도 알만했다. 이들은 아무래도, 부족에게도 비밀로 한 채 사냥을 핑계로 따로 몰려나와 이러한 일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리라.

로사와 호세, 미구엘라는 외진 곳에 지어진 허술한 초막 안에 감금되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나무들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리카르도였다. 로사는 불타오르는 화를 겨우 진정시키고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이럴 때 그 <태양의 불꽃>이 달려와 준다면 소원이 없겠는데.”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던 호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초막 안은 습하고 더웠다.

“그게 뭔데 그래요? 처음 듣는 것 같은데?”

호기심 왕성한 미구엘라는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며 호세에게 물어보았다.

“아아, 자네가 오기 전의 일이니까 자넨 모르겠군. 사실은 나도 그게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석달 전에 우리가 산체스에서 키아라까지 헬리콥터로 대 추격전을 벌일 때의 일이었지. 그때 쫓던 밀렵꾼들이 워낙 질긴 놈들이어서... 결국 마르티네즈가 탄 녀석이 먼저 엔진을 맞아서 떨어지고, 그 다음엔 디에고가 탄 녀석이- 그래, 맞아, 그래서 디에고 녀석 지금 병원에 있는 거라구. 내가 탄 헬기도 로터가 고장나서 떨어질 찰나였는데- 바로 그때 그게 나타났던 거라고. ‘그녀가’라고 해야 할려나.”

“그녀요?”

“한 십오 미터는 되어보이는 붉은 거인이었지. 빛과 함께 홀연히 나타나서- 하여튼 나도 마르티네즈도 그녀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그때 그 밀렵꾼 자식들은 지금 그라질리아 중앙형무소에서 콩밥먹고 있지. 하하.”

로사는 자기 손목에서 붉은 광채를 내며 잠들어 있는 팔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뭔가에 놀란듯 고개를 들고는 따끔하게 한 마디 한다.

“호세, 헛된 기적을 바라기보다는 우선 우리 힘으로 뭘 할지를 생각해 보자고. 기적이란 게 필요할 때마다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

어째서인지 그 이야기를 듣는 걸 꺼리는 로사를 보고, 호세는 미소짓는다.

“예잇 마님.(^^)”

그러나 밧줄은 워낙 단단하고 초막 안은 기운을 빼놓기에 충분하게 더워서, 결국 그들은 잠시 쉬기로 했다. 중천에 까마득하니 걸려 있던 해가 어느 사이엔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밤새 내내 일어났다 깨었다를 반복하면서 밧줄을 끊으려고 안간힘을 쓴 끝에, 결국 새벽이 되어서야 포박을 푸는 데 성공했다. 세 사람은 남아있는 장비를 점검했다. T리볼버와 단검은 이미 전사들이 거두어 간 뒤였고 남아있는 것은 구명용 로프와 메디컬박스 정도였다. 본부와 연락할 수 있는 PRT는 그들이 가져가서 배터리를 빼버린 뒤 본체만 돌려주었다. 초막 안에 흩어져 있는 깨진 토기나 지푸라기들은 전혀 무기로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들은 완전히 동이 트기 전에 움직이기로 결정하고 문을 부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희미한 새벽 햇빛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쓰러져 들어왔다. 어제 보았던 그 소년이었다. 소녀와 마찬가지로 뺨에 태양의 문양을 칠하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아이였다. 호세와 미구엘라는 좋은 기회라며 달려들어 붙잡으려 했으나 로사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소년을 신중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의 등에는 핏자국과 상처들이 줄지어 나 있었다.

“무슨 일이니? 너희 동료들에게 뭔가 생긴 거야?”

로사의 원주민 언어는 유창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뜻은 통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아픈 몸을 추스리고 일어서서 세 사람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들은 소년을 따라서 아직 어둑어둑한 숲길을 달렸다. 저 앞에 콰달케나르 족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함정이 아닐까?”

호세의 걱정스런 혼잣말에 로사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가 보면 알겠지!”

마을은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어제의 그 무표정하던 전사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사방에 쓰러져 있었고 노인들과 부녀자들은 가까스로 숲으로 피해 있다가 겨우 돌아와서 남은 물건들을 수습하는 중이었다. 초막 몇 개는 뭔가가 짓밟은 듯이 우그러져 있었고 주변의 나무들이 날카로운 톱으로 잘라낸 것처럼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뭔가’의 이상한 발자국이 숲 저편, 폭포 쪽으로 나 있었다. 전사들을 선동했던 그 새와 나무문양의 사나이 또한 일그러진 얼굴로 바닥에 흉하게 쓰러져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두 배는 늙은 것 같았다.

소년은 로사의 팔을 잡아당기며 어떤 물건을 보여주었다. 어제 소녀가 걸고 있던 조가비 목걸이였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흰 조가비는 한쪽 귀퉁이가 부서져서 애처로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계속 뭔가를 얘기했다.

“치르시- 에히 아토르- 치르시-”

“그 아이의 이름이 치르시니? 알았어, 여기서 기다려. 내가 쫓아갈게.”

로사는 소년을 가족들에게 맡기고 동료들에게 몸을 돌렸다.

“호세, 즉시 이쪽으로 구급 지원반을 보내달라고 해야겠어. 저 전사들이 무기를 숨겨두는 곳을 찾아봐, 배터리가 있는지. 없다면 뛰어서라도 가장 가까운 포스트에 알려줘. 부상자도 부상자지만 약물 중독자도 있으니 서둘러야 해. 그리고 미구엘라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잔해 수습하고 혹시 깔려 있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봐줘. 내가 리카르도를 쫓아가겠어.”

“마르티네즈,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 지원이 올 때까지-”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

“선배님, 그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요. 저도 호세 아저씨랑 같은 생각이에요. 너무 무모하다구요.”

“혹시 알아? <태양의 불꽃>이 이번에는 나타나 줄지.♡”

로사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응수에 할말이 없어진 두 사람이 허둥지둥하고 있는 사이, 로사는 임시로 전사들이 떨어뜨린 창 몇개를 집어들고 구명용 밧줄로 즉석 올가미를 만들면서 발자국을 쫓아 달려나갔다.

“언제나 저렇지. 얼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같이 타오른다네.”

“오래된 노래가사처럼 들리는데요.”

미구엘라의 눈치없는 농담에 호세는 쓴웃음을 지었다.

둘은 일을 시작했다.



“세뇨르 에르난데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생각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정말로 생각없는 사람이로군요.”

“영광입니다 마담. 나는 사람들이 나를 다시보게 되는 걸 즐기죠.”

리카르도는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혼자 있었다. 로사는 창을 거머쥐고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소녀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싶었지만 상대의 지나치게 여유만만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리카르도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의 윗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어 한 가치를 피워물고 천천히 불을 붙였다. 연기가 타오르고 그는 그 맛을 음미했다. 로사는 이제 거의 사정거리에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이제 말해보시죠, 다음 계획은 뭔지?”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겠지요. 제 고향에 내려오는 잠언 중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백마디의 말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훨씬 낫다- 정말 세상의 진실이란 먼 데 있는게 아니거든요.”

분노가 치밀어오른 로사는 AOL공인 신분증을 꺼내들고 그에게 소리질렀다.

“말장난은 집어치워! 당신을 납치, 수목파괴, 그외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체포하겠다.”

“할 수 있다면 해 보시길.”

그는 그러고는 절벽 아래로 슬그머니 뛰어내렸다. 순간적으로 멍해진 로사는 그가 자살하려 하는 것인가 의아해하면서 그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폭포 아래로부터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물체가 물살을 가르고 솟아올라와 리카르도를 받아들고 상승했다. 그리고 그 흉칙한 입과 턱이 바로 로사의 눈 앞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 물체는 목공소의 작업 기계들과 티라노사우르스가 이종교배(異種交配)라도 한 듯한 기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전동 톱니로 이루어진 이빨과 손톱, 육중한 실린더와 전선이 오고가는 사지(四肢), 전파방해용 채프로 뒤덮여 은색으로 빛나는 외피(外皮), 그리고 그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는 하단부의 장력(張力)엔진. 그것은 말 그대로 거대한 벌채용 자동기계였던 것이다. 그 기계의 목 부분에 요령좋게 매달린 리카르도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섬뜩하고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에는 줄 한 가닥에 매달린 채 위태롭게 흔들리는 소녀가 울고 있었다.

“치르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우리는 저 콰달 뭐라는 족속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지. 하지만 약효가 너무 과했나봐. 녀석들의 요구가 점점 우리들이 들어주기 힘들 정도로 커져서 말이야. 결국 우리는- 아- 가벼운 의견 충돌이 좀 있었고, 그걸 절충하느라 이걸 불러들여야만 했지. 안 그랬다면 그냥 당신들을 폭포에 빠뜨리기만 해도 충분했을텐데. 세상 일이란 참 수수께끼지-”

로사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절벽 끝으로 달려나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EX-10이라는 마킹이 붙어 있는 금속판에 매달려 그 위에다 콰달케나르의 튼튼하고 솜씨좋게 만들어진 창을 단단히 박아넣었다. 그런 뒤에 그것을 발판 삼아 위쪽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무모한 짓을...”

“시끄러!”

외피에 돌출되어 나온 전선과 파이프를 짚고 암벽등반 하듯이 위로 올라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차던 리카르도는 구둣발을 두번 바닥에다 툭 치더니 구두 끝에서 용수철 장치가 된 칼날이 튀어나오자 그것을 이용하여 치르시가 묶여 있는 밧줄을 흥부 대박 톱질하듯이 슬근슬근 썰어내어 끊어버리고 말았다. 소녀는 얼어붙은 얼굴로 허공을 향해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다.

“악--------------------------------------------------!”

“안돼!”

로사는 소녀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자기의 손을 놓은 뒤,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숨가쁜 순간을 거쳐, 따로따로 떨어지던 두 사람의 궤도가 마침내 하나로 합쳐졌다. 로사는 오른팔로 소녀의 경직된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공기저항으로 인한 압박감을 이겨내려 이를 악물면서 팔찌를 찬 왼쪽 손목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중지, 검지, 엄지를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굽힌 채.

사정없이 떨어져내리는 거대한 폭포수의 소리가 둘을 삼켜버리려 하고 있었다.



치르시는 무서워서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대로 계속해서 떨어지면 난- 결국 차카타 할머니가 말했던 그 지하의 나라로 가는 걸까? 두번 다시 오빠랑 가족들을 볼 수 없는 걸까? 그런 건 싫어! 그런 건-

다음 순간, 소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더이상 추락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어디선가 나타난, 신비스런 광채에 휩싸인 붉은 거인이 그녀를 두 손바닥으로 감싸고 폭포 밑바닥으로부터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잠시동안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 거인의 가면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우아하고 기품에 찬 얼굴을 보면서, 서서히 알 수 없는 편안한 느낌과 다정한 기분이 밀려들어왔다.

당신은...  당신이군요? 숲 속에서 만났던...

그녀는 거인을 올려다보며 밝게 웃었고, 거인 또한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들은 말이 없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플라밍고 떼가 아름답게 날아가는 하늘을 뚫고 거인은 높이 날아올랐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저 절벽 아래에는 떨어져내리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는 회심의 무기인 EX-10을 다시 숲속으로 이동시켜 그해 최고의 벌목량 기록을 갱신하려는 참이었다. 레인저가 자꾸 귀찮게 자동차용 다리를 파괴하는 덕분에 이런 것까지 고안해낸 것이었는데- 마치 자기를 쫓아오는 것처럼 폭포 아래로부터 갑자기 솟아나온 거인을 보고 그는 적잖게 당황했다.

“뭡니까, 세뇨르? 이런 건 일정표에 없었는데요!”

EX-10의 내부에서 기계조작에 여념이 없던 작업원 곤잘레스가 소리지른다.

“난들 알아! 어서 고도를 낮춰! 벌채 모드에서 전투 모드로 전환해!”

“진짜로 전투를 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수당은 주는 거죠?”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야 뭐든 못할까! 어서 하라구!”

일찍이 사람좋은 호세가 <태양의 불꽃>이라 불렀던 그 붉은 거인은 허공으로부터 급회전하여 EX-10이 있는 절벽 근처의 비교적 널찍한 평원으로 내려왔다.

거인은 소녀를 주변 안전지대에 내려놓고, EX-10을 향해 공격자세를 가다듬었다. EX-10은 하단부의 자기장 롤러로 땅을 박차고 숲으로부터 무자비하게 달려나와, 거인을 양쪽 매니퓰레이터로 강타했다. 비틀거리던 거인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날렵하게 이쪽저쪽으로 점프하면서 EX-10의 강철 이빨을 피해 나간다. EX-10은 앞쪽 장갑판을 열고 벌채용 화염탄과 회전 톱날을 사출하여 공격한다. 그러나 거인은 몸 앞에 붉은 방어벽을 둘러쳐 그것들을 막고 방어벽의 에너지를 다시 전신에 받아들여 마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면서 그대로 앞으로 돌진했다. 거역할 수 없는 정당한 분노에 사로잡힌 복수의 여신처럼.

EX-10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도망치려 하지만 달려온 거인이 그 꼬리처럼 길게 늘어진 지중 탐사기를 휘어잡고 EX-10의 거체에 용서없는 자이언트 스윙을 먹인다. 거인의 가슴에 달린 푸른 수정이 점멸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별로 없다.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나무들 사이로 떨어진 EX-10을 향하여, 거인은 두 손을 복잡한 모션으로 교차시켜 에너지를 모으더니, 오른손을 앞으로 뻗고 왼손은 오른팔 상박에 붙이는 포즈를 취하여 강렬한 은색의 광선을 발사했다. EX-10과 리카르도는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처참한 불꽃 속에 사라졌다.

그 폭발의 불꽃은 수 미터 밖에 있는 마을에서도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치르시는 숲 속에서 뛰어나와 붉은 거인에게로 다가갔다. 거인은 어머니같은 자애로움과 언니같은 다정함, 그리고 수호신같은 당당함을 풍기며 소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치르시가 거인의 손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거인도 그에 답하여 서서히 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눈부신 빛이 그 일대를 뒤덮고 거인의 모습은 작은 빛의 입자로 변하여 사라져 간다.

그리고 호세와 미구엘라, 소녀의 오빠와 마을 사람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달려와서 본 것은, 그 찬란한 빛 속으로부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어나오는 로사와 치르시의 모습이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 치르시의 부족이 윙크라는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윙크도 했었으리라.

“마르티네즈! 사람 걱정하게 하고선~ 혼자 웃고있냐! 오늘 맥주값은 네가 내!”

“선배님! 아직 안죽었네요? 하여튼 명도 길어요! 언제 점이나 보러가요!”

“아니 근데 이 사람들이~ (버럭!)”

말로는 그래도 그들 또한 웃고 있었다. 치르시는 로사의 손을 놓고 오빠와 가족들에게로 달려가 눈물어린 상봉을 하고 있었다.

태양이 빛나는 밀림의 오후였다.



호세가 그럭저럭 제때 의료진을 불러와서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다만 파괴된 마을의 복구에는 정부 보조금이나 AOL의 자원봉사 등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었다. 우드헤드사가 그동안 불법으로 벌채한 목재만도 대단한 규모였다. 아무튼 뒷수습에는 그라질 정부와 ECR 본부가 서로 연대하여 나서기로 했기 때문에 조만간 뭔가 소식은 있을 터였다.

로사 마르티네즈는 태양의 붉은빛을 띤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정식인원이 몇 없는 상황에서 이런 큰 사건을 만난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지.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앞으로도 시련은 그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싸워나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는 한은.

호세가 사무실 문을 열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

“잘 돼가?”

“그런대로. 그쪽은 벌써 작성 다한거야?”

“하느라 하긴 하는데 자꾸 막히거든. 절벽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아는 건 자네 혼자뿐이잖아. 그 <태양의 불꽃>이 다시 나타난게 사실이야?”

“그러니까 나와 그 아이가 절벽에서 살아돌아온거 아니겠어?”

“하긴 그렇겠지마는...”

“뭔가 할 얘기가 있을텐데. 해봐.”

호세는 이거 당했군, 싶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꺼냈다.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있어. 어느걸 먼저 말할까?”

“좋은 소식.”

로사가 말라붙은 수정액으로 37번째 오타를 고치려 애쓰면서 대꾸했다.

“그럼 좋은 소식부터 하지. 디에고와 마리아가 완쾌되었대. 다음주면 복귀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인원이 너무 없어서 우리들 죽을맛이었는데 잘된거지.”

“그래... 미구엘라는 어때?”

“일은 잘하지만 가끔씩 속없는 소릴 해서 죽겠다구. 다음엔 네가 좀 교육시켜. 난 도무지 요즘 여자애들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면서 나아지는거지 뭘.”

호세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 먼지 쌓인 블라인드를 약간 들추며 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활기차게 사람들이 움직이고 흥정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나쁜 소식은?”

“AOL에서 우리 활동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얘기가 들려와. 예산을 깎는 건 물론이고 부서 자체를 축소할지도 모른대. 헬기 수리도 바이바이지.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이렇게나 악조건이 계속해서 떨어지는데 어째서 이짓을 계속하는걸까- 우리는?”

“글쎄... 어째서일까나.”

로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한쪽 귀퉁이가 쪼개진 하얀 조가비 목걸이를 꺼내어, 손바닥 위에 놓고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호세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웃는 얼굴- 을 위해서가 아닐까?”

“...으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동료를 바라보면서, SM78성운에서 온 ‘신념’의 여왕 후보, 아스테로사․프레미아․델․모아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Chapter 2.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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