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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23] 너무 늦은 귀향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34
 



<< 너무 늦은 귀향 >>

Homecoming, Too Late







“어이 하미르, 아직도 내게 볼일이 있나?”

그 자신의 흐느적거리는 의식[意識]과 몇 개의 비루먹은 안락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을씨년스런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해리슨 스타보드Harrison Starboard는 귀찮다는 투로 지껄이고 있었다. 유령처럼 창백한 상대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럼 이시카와, 자넨 어때? ... 라주르 자넨? ... 아브살롬? 오맬리? 손더스? ... 왜 다들 계속 말이 없는거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만 봐서는 도무지 모른다구!!! 뭐든 얘기좀 해봐! 안들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전우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건 진짜 지독한 악몽이다. 어째서 나만 이지경이 된건지 모를 일이다! 하기야 해답은 벌써 오래 전에 나와 있었다. 살아남은 게 나 혼자 뿐이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를 보낸다는 건 좀...

“야 이자식들아! 이 형님이 왜그러냐고 묻는데 어째서 한놈도 대답을 안하는거야! 그렇게 초라한 꼴로 나타나서 내게 죄책감이라도 심어줄 셈이었나? 차라리 유령이면 유령답게 하늘도 날고 피도 뚝뚝 흘려가며 분위기도 좀 잡아봐! 얼굴이 녹아내리고 해골이 드러나면서 저주를 퍼붓든가 벌레를 토해내든가 해 보라고! 내가 아무리 상상력이 부족한 놈이라지만 너희들까지 그러면 어떻게 하냐?”

그는 마침내 분통을 터뜨리며 가장 가까이 있던 라주르의 멱살을 붙잡고 연방 국세청이 납세자 주머니 털어내듯이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상대는 여전히 얼음장같은 무표정을 유지할 뿐이다. 차라리 그 반쪽만 남은 손으로 내 목이라도 조르란 말야!

미칠 것만 같은 고독감과 절망감 속에서 스타보드가 울부짖기 시작했을 때 정적을 깨고 아주 멀리서 기상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눈 앞이 흐려지고 창백한 동료들은 하나 둘씩 망각의 심연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간다...

“안돼! 가지 마!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이대로 가면 어떡해! 지난번에도...”

다음 순간 스타보드는 발 밑의 바닥이 갑작스레 무너지고 자기 몸이 끝없는 나락으로 대책없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자 어린 아이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헉!”

그는 전신을 감싼 냉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그의 몸은 마치 장례식에 쓰는 관처럼 생겨먹은 프리징 캡슐freezing capsule 안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오래 시간 냉동수면에 들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새도록 타자기 앞에 매달려 대작을 탈고한 문필가만큼이나 피로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직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손발은 남의 것인 마냥 어색했다. 항법 컴퓨터는 주인의 이런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캡슐 옆의 상태 점검 모니터에 << ALL CLEAR[상태 양호] >> 라는 표시를 대문짝만하게 띄워놓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전신을 감싼 탈력감과 무기력함을 억지로 털어버리고 뭔가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캡슐 본체와 그의 몸 이곳저곳을 연결하고 있던 가느다란 광섬유들이 후두두둑 떨어져나갔다.

“...또 같은 꿈을 꿨나... 한번만 더 꾸면 스무 번이겠구만...”

해리슨 스타보드는 짜증스런 기억을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젓고, 사물함을 찾아 선내복을 꺼내 입었다. 그러고는 항법 컴퓨터에게 우주정의 현재 좌표를 재점검하여 지구와의 거리를 산출하도록 지시하고, 직접 기본 시스템을 점검한 다음, 압축냉동된 퀵샌드와 가니메데 파스타를 찾아내어 간단히 요기를 한다.

그러나 먹는 동안에도 꿈에서 본 얼굴들이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젠장!”

스타보드는 플라스틱 포크를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우주정 안의 인공중력이 충분치 않은 탓에 포크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천장으로 튕겨올라갔다.

수십년 간 계속된 똑같은 비상식량에 질려버린 탓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좀더 근본적인 감정이 그의 마음 속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망향[望鄕]이나 폐소공포증과도 약간 다르고, 죽은 동료들에 대한 죄의식이나 두려움도 이제는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단지 살아가는 게 귀찮고 귀찮고 또 귀찮을 뿐이었다.

우주에서 계속 이러다가 지구에 닿을 때 쯤이면 전세기[前世紀]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광기[狂氣]들린 산지기처럼 변해버리는 거 아닐까?

병 안에 담긴 피로회복제를 들이키며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미끼였고, 나는 미끼들의 찌꺼기라 이거지...’

그는 뒷정리를 하면서 자기가 왜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나를 돌이켜본다.





지구시간으로 서기 3002년 12월경, 행성 지구를 중심으로 한 태양계 연방은 지구로부터 약 3천 광년 저편에 있는 젤라누스 은하의 해러칸Harakhan 제국과의 전쟁에서 최종국면에 도달해 있었다. 초기에는 열세에 몰려 있었던 SSDF(태양계 방위군)은 각 전선에서 최후의 힘을 결집한 대반격에 나서서 점차 흐름을 바꿔나가기 시작했고, 애초에 그다지 전력이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모성[母星]의 최후가 닥쳐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이주할 땅을 찾기 위해 무리하여 침략을 서둘렀던 제국군은 점차 패색이 짙어졌다.

이러한 약점을 눈치챈 SSDF는 정예병력을 3개의 함대로 재편성하여 동시공격에 들어갔고, 종국에는 신성화[新星化]가 진행중인 해러컨의 태양에 핵융합을 촉진시키는 신병기 ‘파이어클록FireCloak’을 쏘아넣겠다는 극악무도한 협박까지 동원하여 제국의 항복을 얻어내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시키기에 이른다. 그것까지는 좋았지만, 원래는 3방향에서 합동으로 공격하는 분산전력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제17함대 기함 어스라이트Earthlight 호가 예상 외로 눈부신 전과를 세우는 바람에, 나머지 2개 함대가 미처 활약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 버렸고, 그래서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허겁지겁 귀환을 서두르던 2개 함대는 강화조약에 찬성하지 않는 변방의 수비전력과 충돌하여, 의외의 손실을 입고 쓰라린 패주[敗走]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승리의 뒤안길에 가리워진 어처구니없는 개삽질도 역사에는 하나 둘쯤 존재하는 모양이다.

스타보드가 소속되어 있었던 볼리바르급[級] 쾌속순양함 메테를링크호는 그 2개 함대 중 하나인 제32함대의 주전력 중 하나였다. 불시의 기습을 받고 전의를 상실한 32함대는 우왕좌왕하며 귀환을 서둘렀지만, 결사의 각오를 굳히고 공격해 오는 적의 사쿤탈라급[級] 전투정들이 워낙 거세게 포격을 가해오는지라 아무런 손실 없이 달아나기는 어려웠다. 결국 메테를링크호를 비롯한 전함 수 척이 우주의 먼지로 변해 어이없이 사라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간신히 함대를 재편성하여 행성 중력장 근처에서 긴급 리프[leap; 공간 도약] 태세에 돌입했다.

스타보드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 문버드형[型] 탈출정에 타고 그 아수라장을 빠져나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살기 위해 동료들을 버리고 재빠르게 행동하여 여기에 있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는 불길이 피어오르고 금속이 녹아내리는 좁다란 통로를 지나쳐, 앞뒤를 막아선 동료들을 짓밟고 미친듯이 내달렸을지도 모른다. 제발 태워달라는 누군가를 매정히 뿌리쳐 버리고 황급히 해치를 닫아버리고는 급발진 버튼을 누르며 식은땀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핸드건을 꺼내 정신없이 휘둘렀던 듯한 기억도 있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메테를링크호가 격침될 때 격납고를 빠져나온 탈출정은 그의 기체[機體] 말고도 스물여덟 대 정도가 더 있었다. 그 중에는 운좋게 리프 직전의 아군함에 구조되거나 근처 주둔기지까지 자력[自力]으로 날아가서 도움을 받은 녀석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너무 운이 없어서 우주의 미아가 되거나 적의 은총으로 원자분해된 녀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떠올리면서 스타보드는 자기만 뻔뻔한 것은 아니었던 거라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곤 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었던가? 인간이란, 어차피 그런 생물이야...”

하지만 그도 완전히 운이 좋은 건 아니었다. 미친듯이 안전권까지 빠져 나가서 기체 여기저기를 점검해 본 그는 이 탈출정에 실린 간이[簡易] 리프 시스템이 정기점검 때문에 사용불능이란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그 장비만 제대로 작동하면, 전함 클래스처럼 한달음에 태양계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짧은 거리를 연속적으로 점프함으로써 수 개월 안에 귀환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통상의 반응엔진만 가지고는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그 옛날 고대[古代] 라다브리아 인[人]들이 여행자를 위해 개설해 둔 고정식 워프게이트(지구인들은 보통 ‘스타브릿지StarBridge’라고 부른다)의 힘을 빌리더라도 30년은 족히 걸릴 터였다. 게다가 지구와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는 초공간 통신 장치는 모함에만 실려 있었고, 탈출정의 라이트 트랜시버로는 반경 40광년의 행성들과 연락을 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야말로 우주에 버려진 고독한 한 마리 늑대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반응엔진이 주변 공간의 방사선과 광물질을 채집하여 자동으로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었고, 비상식량과 프리징 캡슐은 5인분이 준비되어 있어서 그 혼자서 쓰기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게 위안이었다. 문제는 지구로 향하는 경로의 계산과, 기나긴 여행 기간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 뿐이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는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일단 캡슐에 들어가서 잠이 들었다. 호기로운 기분도 아직은 남아 있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꼭 해야만 한다.

하지만 냉동수면에 들어갈 때마다 그는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기묘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무표정하게 노려보는 동료들의 시선을 받아가며 오랜 시간을 감내[堪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들이 여행 내내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선내 시계가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은 아마 3028년에서 3030년 사이일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따로 없구만 젠장. 항법 컴퓨터의 계산으로는 이제 태양계 근처까지 와 있다. 2시간만 더 있으면 ‘데카Decca’가 보일 것이다. 빌어먹을 여행이 이제서야 끝나려는 조짐이 보이다니 정말로 기쁘다... 그야말로 성모님의 목덜미에 찐하게 입이라도 맞춰드리고 싶을 지경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가히 신성모독적이라 할 수 있는 코멘트를 섞어가면서 스타보드는 음성 기록 장치에 자기만의 항해일지를 남기고 있었다. 그는 연방 종교위원회가 이 기록을 교황에게 들려주며 자기를 불경죄로 걸고 넘어지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이렇게 웃어본 게 몇년 만이던가?

19회에 걸친 냉동수면으로 인해 그의 생체시계는 근 28년에 달하는 외부의 시계보다는 훨씬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꿈 속에서 시달린 기간을 합친다면 역시 긴 세월은 긴 세월이었다. 그는 지구에 돌아가면 그 증세가 없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제10행성 데카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튼 조금만 더 지나면 지구와 연락이 가능해진다. 이제는 저 삼나무 관처럼 흉물스런 캡슐쪼가리와 맛대가리없고 푸석푸석한 비상식과도 안녕이다. 그동안 지구는 어떻게 변했을까? 지표에 내려서면 잔디에 얼굴을 파묻고 이렇게 외칠 거다. ‘씨발 누가 내게 빼갈 한잔만 사 달라구!’ 냉동수면의 영향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덜덜 떨리고 뱃속이 얼어붙는 기분이다... 앗 잠깐, 지방방송이 끼여드는군.”

수십년간 꺼져 있던 통신기의 ‘수신’ 표시등이 켜지고 사람의 말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지는 것을 들으며 (일부러 외부 스피커로 연결하고 음량을 키워 두었다) 해리슨 스타보드는 잠시나마 ‘인류로 태어나서 다행이야’라고 기쁨에 젖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걱정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같은 케이스가 하나뿐이라면, 그리고 저들이 ‘미끼 함대’들의 꼴사나운 최후를 기억하기 싫어한다면, 혹시 나는 제거 대상이 되는거 아냐? 그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음모론같은 생각이 또 머리를 어지럽힌다.

“여기는 데카 주둔 지구군단[地球軍團] 402순찰중대 비냐 로마노브나 중사입니다. 귀하의 신원을 밝혀주시오.”

그동안 군 자체의 명칭이 바뀔 정도로 시대가 변했단 말인가?

스타보드는 잠시동안 호흡을 가다듬고 (상대가 의심할 정도로 오래 뜸을 들이지는 않도록 조심하면서) 또박또박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해리슨 스타보드 소위, 태양계 방위군 제32공격함대 7중대 2소대. 그밖의 모든 데이터는 이미 6개월 전에 프로브[탐색기]를 통해 지구로 전송했음.”

“귀환병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본부에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상대가 지구로부터 정보를 조회하고 지시를 받는 동안, 스타보드는 모니터를 가득 메운 은빛 물총새같은 신형기의 날렵한 모습을 감상하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저거에 비하면 내가 조종했던 AFX-3200은 날아다니는 커틀렛이겠군. 쳇.

정확히 3분 58초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본부로부터 입국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귀하를 궤도 스테이션으로 유도하여 정중히 모시라는 지시입니다. 태양계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스타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딱딱한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었다. 갑자기 짓궂은 농담이 떠올랐다.

“중사, 미안하지만 한가지만 대답해 주겠나?”

“말씀하십시오.”

“감기의 특효약은 개발되었나?”

“설마 그것 때문에 멀리 돌아서 오신 거라면, 몇년 더 있다 오셔야겠는데요.”

“아냐, 미안해. 내가 졌네.”

스타보드는 중사의 위트 있는 대답에 만족했다.

그 정도로 그는 대화에 굶주려 있었다.





“그다지 명예로운 귀환이 아닌 건 확실하네만”

홀로그램이 아닌 실물로서 창 밖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지구의 푸른 대지를 무심히 바라보며 강 철삼[姜 哲杉] 제독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스타보드의 귀환을 환영하는 리셉션을 막 끝내고 지구군 통합본부에 있는 제독의 사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스타보드는 아직도 급하게 맞춘 예복이 영 어색한지 자기 팔다리를 자꾸만 내려다보곤 했다.

“그래도 자네는 드넓은 우주공간을 홀로 항해하여 기적같은 귀향을 실현해 낸 보기 드문 인재일세. 아마 며칠 뒤면 연방의 모든 사람들이 자네의 이름과 업적을 기억하게 될 게야. 그건 장담할 수 있지.”

스타보드는 한때 SSDF 사관학교에서 자기에게 비행술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주름살 투성이의 칠십대 퇴물장교로 전락해 버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명예고 나발이고 전 관심 없습니다. 전쟁에 다시 끌려나가지 않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나저나 제가 없는 동안에 정말 많은 것이 변했더군요. SSDF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UESF(통합지구 우주군)가 들어서고... 그렇지만 내 살아생전에 해러컨 친구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환담을 나누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세월의 풍상에 부식되긴 했지만 여전히 억센 근육과 단단한 의지를 지니고 있는 강 제독은 검붉게 탄 농부같은 얼굴 위에 장난기어린 웃음을 띠고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지난 1차 해러컨 대전 직후만 해도 상황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했네. 하지만 그동안 양측의 온건파들이 여러가지로 애써온 결과, 두 세계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지. 물론 시련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야. 불과 3년 전이긴 하지만, 해러컨의 강경파 군주들이 지구측 병기 메이커와 결탁하여 2차 대전의 수렁에 빠져들 뻔한 일도 있었네. 아무튼 그동안의 탐사 노력이 성과를 거두어서, 해러컨 사람들은 에리다누스Ⅳ에 신천지를 얻어 황폐해진 옛 고향을 버리고 장대한 이주 계획에 들어갔지. 그들이 다시 자리를 잡을 때 쯤이면, 지구인들도 그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네.”

하지만 메테를링크호의 격침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는 스타보드로서는 제독의 범우주적인 낙관주의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평화로운 세상이 돌아온 건 좋은 일이죠. 그나저나... 저는 언제 이 원숭이 양복을 벗어던지고 평범한 민간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세상의 관심도 차차 식게 될 테니 그리 오래가진 않을거야. 그리고 얼마동안은 우리 아카데미에서 지난 대전의 상황이나 우주에서의 서바이벌에 관한 형식적인 강연을 좀 해줬으면 하네. 물론 그에 합당한 수고비와 혜택도 있지. 혹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 쪽에서 주선해 줌세.”

그러나 가족들은 지난 대전 초기에 적의 초자력 병기로 인해 잃어버리고, 먼 친지들은 태양계 외곽으로 이주해 버린 뒤였기에, 해리슨 스타보드에겐 그다지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곤 없었다. 사귀던 여인들은 자기 생활을 찾아서 행복하게 지낼 테고, 죽은 동료의 가족들에겐 별로 할 말이 없고, 생각해보면 강 제독만이 유일하게 그와 과거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셈이었다. 군 상층부가 이런 점까지 배려하여 강 제독을 그에게 보내준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얄밉도록 똑똑한 처사였다!

“......아뇨, 당장은 생각나는 얼굴도 없고, 안 만나는 게 좋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제독님을 뵙게 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것보다 부탁드릴 일이...”

“뭔가?”

눈에 띄게 초췌해진 상대의 얼굴을 새삼스레 뜯어보며 제독이 물었다.

“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을 수 있을까요?”

지구에 도착한 뒤에도 여전히 꿈에 동료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님? 스타보드 대위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왠지 어수선하고 뒤숭숭한 밤이었다. 바이칼 시계를 쳐다보니 새벽 3시였다.

또 그 꿈이다. 결국 견딜 수 없게 된 그가 밖에서도 들릴 만큼 크게 소리를 질러댄 모양이었다. 그는 인터컴을 통해 걱정스럽게 질문해 오는 당번병에게 이젠 괜찮으니 그만 잠 좀 자게 내버려 두라고 거칠게 쏘아붙이고는 엎드린 채 머리 위에 베개를 뒤집어썼다. 정신과 치료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 용하다는 에던 피츠버그 박사의 클리닉도 그의 증세에는 뾰족한 답을 내주지 않았다. 이래가지고서야 아무리 2계급 특진에 많은 보상을 해준다 해도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다.

그는 잠을 청하려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애쓰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에 있는 홈바Home Bar로 가서 잼보니나 한잔 마시려고 잔과 술병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아까 대답하면서 눌렀던 인터컴의 스위치가 아직 켜져 있었던지, 밖에 있던 당번병이 누군가 지나가던 중인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 마침내 시작된다는 겁니까? 한판 크게 붙겠군요.”

“3년 전 이래 처음이니 ...도 많겠지만, 희생도 그만큼 클 테지.”

“그럼, 이 방에 계시는 분도 불려나가는?”

“그의 경험이 후진들에게 큰 도움이 될테니, 전선에 몸소...게 하는 것도”

뭐시라? 한판??? 전선??? 희생???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

스타보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좀더 잘 들어보려고 인터컴에 귀를 바짝 댔지만 그들은 이미 대화를 마친 뒤였다. 하지만 스타보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생각해 내고 잠이 확 깼다.

아까 낮에 강 제독의 부관이라고 인사했던 30대의 여성 사관이었다. 이름은...

아마 제베타 슈로커라고 했던가.





“---이렇게 뛰어보는 건 누트로니아 전선 이후 처음인데! 죽겠구만!”

해리슨 스타보드는 간단한 짐만 챙겨들고 마치 도둑처럼 당번병과 보초의 눈길을 피해서 통합본부 옆의 장교 숙사를 살그머니 빠져나와 근처의 환경 보호 구역으로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었다.

전날 밤의 희한한 대화가 마음에 걸렸던 그는 사관학교 시절에 배운 스파이 기술을 응용하여 고위장교들만 출입 가능한 정보통제실에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본 결과, 지구뿐만 아니라 태양계 전체에 걸쳐 크나큰 뭔가가 일어나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사방에 분산되어 자원봉사나 대민구호에 힘쓰고 있던 통합지구 우주군 - 속칭 ‘지구군단’의 모든 병력들이 일사불란하게 어떠한 목적을 위해 집결하고 있었다. 우주함대가 각 행성과 위성의 궤도 스테이션에 모여들고 행성 방위 전력이 대공방어태세를 갖추었으며 첩보부대가 사방에서 정보를 모아들이고 있었다.

세계의 주요 도시는 기능을 일시 정지한 뒤 짜임새있게 지어진 시가[市街]블럭을 재배열하여 전투 포메이션을 갖추기 시작했고, 민간인들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질서정연히 대피소로 달려들어갔으며, 기껏 재생시켜 놓은 산과 들과 바다의 환경보호구역에는 두터운 에너지 방어벽이 둘러처져 뭔가를 대비하고 있었다.

통제실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오퍼레이터들도 업무에 정신이 없는 나머지 그가 있다는 사실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어젯밤의 그 슈로커 대위였다. 인사기록과 소문에 따르면 2차 해러칸 대전 때도 여군들로만 구성된 특무[特務]전투함 ‘플레아데스’를 이끌어 눈부신 전과를 올린 재원이라고 한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스타보드는 직감했다.

그래서 황급히 도망쳐 나온 것이다. 앞뒤 생각도 없이 그냥 단김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탈출정은 딴 놈에게 양보하고 <콜록 콜록> 조용히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헐떡 헐떡> 전몰장병 기념탑에 이름이나 <허억 허억> 남길 걸 그랬어...”

헐떡대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는 밤나무숲을 지나 널따란 초원으로 접어들었다. 어릴 때 헤이우드의 풀밭을 즐겁게 달리던 생각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등 뒤에서 뭔가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온다. 구동장갑Active Armor의 엔진음.

구동장갑이란 2990년대 후반부터 SSDF 기술부문이 개발하기 시작한 개인용 전투장갑복을 뜻한다. 스타보드가 현역이던 3000년대 초에는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캐터필러로 움직이면서 이동포대 역할을 하는 AAX[eXperiment] 시리즈가 막 실전배치되려던 참이었다. 30여년 만에 돌아와 보니 그것이 훌쩍 커버려서 이제는 비행기능에 변형기능까지 갖춘 AAA[Advanced] 시리즈가 보병중대의 주축을 맡고 있었다. 엔진 구동음 구별하는 데 귀신같은 재주를 발휘했던 스타보드의 청각은 며칠 전에 겨우 두어 번 들어본 그 구동음을 번개같이 알아채고 그의 두 발을 더욱 빠르게 재촉하였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위협사격인 듯한 배럴의 소음도 들려왔다. 발밑의 풀들이 보이지 않는 뭔가에 제멋대로 짓눌려 픽픽 고개를 숙인다. 초음탄[超音彈]이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낀 스타보드는 이거 장난이 아니네,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명색이 선배인데 이렇게 여우 사냥하듯이 하기냐?

“하미르는 항상 ‘체력은 알라의 선물’이라고 하며 열심히 운동을 했지... 내가 그 말을 들었더라면...<헉 헉> 그러고 보면 이시카와는 자기 할아버지가 닌자라며 숲이라면 맡겨 달라고 했어, <헐떡 헐떡> 하지만 우리가 강하한 지점엔 숲은 고사하고 풀 한포기도 없어서... <하아 하아> 그때 그친구 표정이 정말 기가 막혔는데! <콜록> 한동안 라주르는 그걸 갖고 이시카와를 놀려대는 데 재미를 붙였잖아... <하아 하아>”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는 달리면서 죽은 동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더이상 무표정하게 자기를 보고만 있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손뼉을 쳐 대면서, 그를 놀려대고, 야유하고, 비꼬고,

그리고 응원하고 있었다.

“...젠장... 살 거야... 너희들을 짓밟고 부지한 목숨인데 <하아 하아> 이제와서 다시 전장에 나가갖고 내던지면... <흐어 흐어> 너무 아깝잖아? 그러니까 난 도망쳐서라도, 배반자가 되어서라도, <헉 헉> 죽어도 살 거라고-----!!!!!!!!!”

그가 그렇게 소리치는 순간, 머리 위로 접근한 황색의 구동장갑 하나가 마취 스프레이를 분사하여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는 조리가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주 엄청난 쇼를 보여주었더군.”

시무룩한 얼굴로 자기 앞에 끌려온 스타보드를 바라보며 강 제독이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수갑도 포박도 전혀 없이 그를 정중히 모셔왔다.

“숙사에만 머물다 보니 폐소공포증에라도 시달리게 된 건가? 아니면 꿈에 계속 나타나는 유령들이 자네를 충동질하기라도 한 건가? 이렇게 소동을 벌일 필요 없이 그냥 외출 허가를 신청했으면 몇 개월이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텐데 어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스타보드는 서서히 고개를 들고 제독의 검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자기의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귀차니즘으로 충만해 있었던 그의 푸른 눈에서는, 이제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형형[熒熒]한 생명력이 솟아나고 있었다.

“제독님까지 저를 속이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죠?”

제독은 이건 또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누가 그런 얘길 하던가?”

“지난 밤에 당번병이 부관과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통제실에도 들어가 봤죠.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하고 굉장한 물자가 움직이고 있더군요. 이제와서 지구군단이 쿠데타에라도 나설 리도 없을테니 이건 전쟁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 아닙니까?”

“흐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스타보드는 제독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뭐라고 하시든 간에 저는 이제 전장엔 안나갑니다. 이젠 진심으로 살고 싶어졌거든요. 배신자라 하셔도 좋고 비국민이라 하셔도 좋습니다만 더이상 우주에서 누가 죽어가는걸 보고 돌아오는 건 싫단 말입니다!”

격하게 소리치던 스타보드는 제독이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걸 보고 갑자기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뭐가 우습죠?”

제독은 당황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제베타를 바라보았다. 젊은 부관에 대해 그는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힐문했다. “아직 그에게 얘기 안해 줬나?”

점점 더 궁금해진 스타보드는 자기가 하던 말도 잊고 마침내 제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뭘 말입니까?”

제독은 이 불쌍한 사람아, 라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스타보드 군, 이건 민방위 훈련이라네.”





THE END!





(C)ZAMBONY 200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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