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분류 전체보기 (326)
창작의 샘터 (88)
패러디 왕국 (85)
감상과 연구 (148)
일상의 기억 (5)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2003-05-11] 마음의 거미줄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38
 



<< 마음의 거미줄 >>

Web of The Mind







“이, 이게 어떻게 된거야? 이 하얀 거미줄같은 게 대체 뭐지?”

잠에서 깨어난 사 악한[邪 惡漢]은 토끼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자기 몸과 그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확실히 뭔가 거미줄같기도 하고 동앗줄같기도 하고 담배연기같기도 한 가늘고 하얀 실이 자기로부터 뻗어나와 온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상스럽게도 그 무수한 실들은 자기가 움직이는 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고 그냥 움직임에 맞춰 위치가 바뀌거나 방향이 약간 달라질 뿐, 그밖에는 어떤 물리적인 영향이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하나하나의 실들은 물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빛이나 파동에 가까운 상태인 듯 했다.

그는 몇번씩 몸을 뒤집고 개다리춤을 추고 국민체조를 하면서 자세를 바꿔보았지만 실들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방 구석의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뺨도 꼬집어보고 벽을 주먹으로 쾅쾅 치기도 했지만 자기 몸만 아플 뿐이었다.

“-잘 잤나 도망자. 근데 동요하는 걸 보아하니 뭔가 변화가 생겼나보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추리닝복 차림의 악한은 당황스런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 집의 주인이자 어딘가 음흉한 데가 있는 노 상식[盧 常識] 박사가 실내복을 입고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수염투성이의 얼굴을 갸우뚱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자빠지게도 박사의 몸 주위로도 똑같은 하얀 실들이 방사형으로 뻗어나와 있었다. 악한은 다소 안심된다는 말투로 대답을 했다.

“여어, 노친네, 덕분에 엄청나게 못 잤소. 그 변화란게 뭔지는 몰라도 나만 그런게 아닌 것 같아 다행이군.”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는데. 난 평소때와 다를게 없네.”

“당신 몸뚱아리에서 뻗쳐나오는 그 거미줄이 안보인단 말요?!”

“그런건 내게 안보여. 자네 역시 뭔가 이상이 있지?”

악한은 먹이를 앞에 둔 야수처럼 성난 얼굴로 변하여 재빨리 박사의 연약한 멱살을 잡아채고 과격한 태도로 설명을 요구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영감은 이유를 아나보군. 어떻게 된 심산인지 빨리 불지 않으면 어제 먹은 돼지고기처럼 잘게 다져주겠어!”

박사는 캑캑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고 악한은 그를 일단 놓아주었다.

60이 넘어 보이는 왜소한 체구의 노박사는 조그마한 코안경을 고쳐쓰고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탁자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씨익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실에 손을 대 봤나?”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박사는 혀를 차면서 ‘버릇없는 놈’이라 혼잣말을 하고는 다시 이야기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을테니 아무 실이나 한번 잡아보게.”

미심쩍은 얼굴로 얼마동안 망설이던 악한은 오른팔을 움직여 몸 여러곳에서 뻗어나온 실 중 몇 개에 가볍게 손을 대 보았다.

그랬더니-





“-어이, 괜찮나? 쫓기는 모양이군. 자, 어서 타라구.”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고풍스런 코안경을 낀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갑자기 눈 앞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통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

그러잖아도 한탕 크게 벌이려다 수가 틀려서 몇놈 때려잡은 터라 지금 경찰에게 잡히면 곤란해질 상황이었기에,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 해도 별거 없는 늙다리니까 적당히 가다가 차를 빼앗고 혼자 도망치면 된다. 사 악한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판단하고 차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잽싸게 뛰어올랐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악한이 제대로 올라탄 것을 확인한 노인은 주저없이 차를 출발시켜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직 시간은 한밤중이고 밤거리의 가로등은 관리 소홀로 대부분 깨져 있어서 거리는 캄캄했고 인적은 없었다. 이 동네에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없는 게 분명했다.

‘................하긴....누가 이런 밤중에 나와 있을 리가.... 엇?’

그 순간, 쓰레기 봉지와 내다 버린 낡은 가구로 가득한 옆 보도에 누군가 작은 그림자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실루엣으로 보아 치마를 입은 사람인 듯 했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이런 뒷골목에 여자아이라니?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뇨.”

노인은 솜씨좋게 몇 군데 복잡한 커브를 돌아가며 경찰을 쉽게 따돌렸고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알아챈 악한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피스톨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까 총에 맞은 왼쪽 어깨가 쑤셔오면서 피로와 고통이 한순간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악한은 흐려지려 하는 의식을 어거지로 바로잡고 노인에게 물었다.

“노친네, 솜씨 하난 좋구만. 혹시 <배달부> 출신이쇼?”

<배달부>란 그들 세계의 은어로 남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는 물건이나 사람을 은밀히 운반해 주는 중개업자를 말한다.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안됐지만 본업은 따로 있지. 크게 다친 모양인데 조금만 참으라고. 곧 집에 도착하니까 총상을 봐 주도록 하지. 누추하지만 잠자리와 식사도 있네.”

악한의 마음 속에서는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지나친 친절에 대한 의혹이 더 커져만 갔다. 그가 피스톨이 들어있는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은 채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듣던중 반가운 소리지만 대체 내게 그런 친절을 베푸는 꿍꿍이가 뭐요? 난 보다시피 짭새에게도 보스에게도 쫓기고 있는데다 땡전 한푼도 없는 전과자일 뿐인데. 혹시 내 목을 노리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은건 아니겠지?”

“속고만 살았나? 난 경찰도 조직도 관심없으니 그점은 걱정말게. 자네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해서 복수하려는 마음도 없고, 자네가 저지른 일에 대해 공적인 울분을 느끼지도 않는다네. 나도 그리 떳떳치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도와줄 사람을 구하다보니 이렇게 하고 있을 따름이야.”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조리있게 이야기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악한도 이쯤되니 별로 할 말이 없어 머쓱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았는지 볼멘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싶다면 크게 착각하는거요. 난 그런거 할줄 모르니까.”

“헷, 나야말로 감사를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닐세. 일단은 좀 자 두라구.”

길거리의 표시나 건물들의 모양새로 보아 차는 교외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난 잠귀가 밝으니까 허튼 수작은 않는게 좋을거요. 도착하면 깨우셔.”

“나도 자네같은 인종이랑 대놓고 싸울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네. 허참.”

억지로 친한 체 하지 않고 솔직하게 경멸을 드러내는 노인의 말투가 악한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말하는 폼이 꽤 배워처먹은 인간 같다.

악한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어 탄알 수를 확인하고 언제든지 꺼낼 수 있도록 허리띠 안쪽에 끼워둔 뒤, 한 손을 그 위에 올려놓고 창밖에 자기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비스듬하게 누운 뒤 총상의 고통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고 새우잠을 청했다.

부자연스런 자세 때문에 허리가 아파왔다. 다리도 약간 맛이 갔나보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여기까지 왔고, 저 노인네가 한패거리를 불러 나를 넘긴다던가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또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잠이 필요했다. 그 한탕을 벌이기 위해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던 것이다. 그는 곧 모든걸 잊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말의 불안이 남긴 했지만 어차피 더이상 나빠질 일도 없었다.

앞자리의 노인은 그것을 흘끗 바라보고는 한몫잡은 도박사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우, 우와앗---?!”

하얀 빛의 실에 손을 댄 순간, 악한은 머리를 감싸쥐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엄청난 양의 불가해한 이미지들이, 소리들이, 감촉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너무나 많고 다양한 정보들이 그의 두뇌를 압도하고 감각을 혼란시키고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뒤섞어놓았다. 그 순간에는 몰랐지만 악한은 그것이 자기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기억임을 알았다.

‘너.......너희들은.....당신은.... 오지 마! 내게 그러지 마! 그만두라고!’

어린 시절의 자기를 술에 취하여 각목으로 패고 닭장에 가두어 동물처럼 기어다니게 하며 낄낄거리는 개자식(그는 절대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이 보였다. 그의 묘한 이름을 가지고 비웃어대며(그러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온갖 치사한 방법으로 따돌리고 괴롭히는 동네 아이들의 얼굴도 보였다. 그가 도저히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처음으로 한 두푼의 돈을 훔쳤을 때 용서해달라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냉정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그를 경찰에 넘긴 청과상 주인과, 제대로 먹지 못해 흐느적거리는 그를 거칠게 대하고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 나자빠뜨린 주제에 자기들끼리 (오늘 저녁에 해물탕을 먹을까 장조림백반을 먹을까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무심한 경관들이 보였다. 해결사로서의 첫 임무에서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그를 용서없이 구타하며 수입의 2/3를 (수업료라는 핑계로 눈웃음까지 지어가며) 도로 빼앗아가는 보스의 모습이 보였다. 제발 곁에 있어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과자라며 침을 뱉고 해외로 떠나버린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노박사와 처음 만난 날 저녁에 마지못해(그러나 약간은 즐기면서) 죽인 반대파 단원들의 싸늘하게 식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전히 방 저편에 멀뚱히 서 있는 노박사의 음침한 얼굴도 유령처럼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이게 당신들이 본 나라고? 저, 정말 꼴사납고 더러운 새끼군!’

더욱 더 괴로운 것은, 거꾸로 그들의 시점에서 본 자기의 갖가지 모습 또한 그의 뇌리에 사정없이 파고들어왔다는 점이었다. 병든 닭처럼 빌빌거리며 노예처럼 울부짖으면서도 군소리 못하고 맞고 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며 아버지의 비정상적인 쾌감과 절망이, 동네 아이들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대들지 못하고 훌쩍거리며 땅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아이들의 짓궂은 즐거움과 다행스럽다는 일체감이, 유치장에 들어가 벽만 긁으며 추위를 한탄하는 자기의 모습과 함께 경관들의 무관심과 경멸이, 일을 제대로 못 해내어 쩔쩔매는 자기의 모습과 함께 속으로 혀를 차며 ‘이녀석은 좀더 교육이 필요하겠군’이라고 중얼대며 어떻게 괴롭힐지 궁리하는 보스의 본심이, 자기를 버리고 떠나가는 그녀의 눈에 비친 비굴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잘못된 선택에 대한 환멸과 그에 대한 실망감에 가득한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이, 그리고 죽어가는 제물들의 눈동자에 추악하게 일그러진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각인된 자신의 모습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원망과 저주가 뒤섞인 단말마의 숨결이 느껴졌다.

‘비, 빌어먹을!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건데? 다 지나간 일이야! 이거 제발 멈춰-! 더 있다간....... 더 하다간 토할 것만 같다! 노친네, 어디있어? 어디야? 잡히기만 해봐라! 강아지처럼 목을 비틀어---- 흐억!’

이 모든 기억들은 단순한 이미지뿐만이 아니라, 그때 그 장소에서 느꼈던 분위기, 당시의 차가운 공기나 역한 비료 냄새, 충혈된 눈에서 느껴지는 이물감과 쉴새없이 펌프질하는 심장의 박동, 자기를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공허한 목소리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 쓰러져서 시체가 되어가는 자들의 허망한 눈빛과 부패로 인한 악취, 당시에 지나가던 차 소리와 어째서인지 강하게 기억 속에 각인된 휘발유 냄새 - 등등의 여러가지 감각들의 형태를 빌려서, 한데 섞인 산채비빔밥 정식처럼 전혀 분류되지 않고 한꺼번에 그의 작은 뇌세포 속에 척척 밀려들어와, 평소에 놀던 수험생이 시험 전날밤에 벼락치기를 할 때에나 느낄만한 난감함과 초고속으로 360도 회전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제트코스터를 스무번쯤 탔을 때 느낄법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50명 가량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서로 다른 여러가지 내용을(더군다나 당신에게는 전혀 듣기 좋은 내용이 아닌 것만 골라서) 귓전에서 속삭이는 것을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듣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죽~여주게 짜증난다!

“..................................켁, 우구우엑!! 흐커컥!”

그는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기의 육체를 생생하게 인식했다. 이미 바닥 이곳저곳에 토사물과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나 있었다. 자기가 그 엄청난 심상[心象]의 홍수에 취해있을 때 어떤 꼴을 보여주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노박사는 탁자 옆의 낡은 소파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때로는 몇 가지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사 악한은 자기가 놀림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기다시피해서 박사의 발치로 다가가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다시 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물론 노인의 몸에서 뻗어나오는 하얀 실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허억 허억...... 그래....이게 다 네놈이 꾸민 짓이라 이거지. 이제 볼만큼 충분히 보았을테니 거기서 구경꾼인 척 시치미떼지 말고 썩 불어!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투스텝 쓰리스텝 나인스텝을 밟고 개나리 복대도 뚫을만큼 날카로운 칼로 내장을 오려 종이공작을 만든 다음에 대략 정신이 멍해질만한 드링크 펀치를 쇠바가지로 먹여주겠어! 내 말 들려? .......허억...... 크으....”

이미 자기 자신이 대략 정신이 멍해진 상태에 빠져든 악한은 도무지 앞뒤가 안맞는 괴상한 협박을 하며 박사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신은 망가졌지만 아직 기운만은 왕성하다는 것을 파악한 노박사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멱살을 잡힌 채로 답변을 시작했다.

“.................”

“뭐라구?!!”

노인의 말소리가 모기소리만해서 잘 알아듣지 못한 악한이 소리질렀다.

“.......어제 잠자기 전에 준 약말이야. 남김없이 다 먹은 모양이군?”

악한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니까, 나더러 실험용 흰쥐가 되어 달라?”

“그런 셈이지. 경찰에 넘겨지는 것보다는 재미있지 않겠나?”

노인의 이름은 노상식 박사. 어느 분야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때는 꽤 날리던 재야 학자 중 한사람으로, 얼마 전 뭔가 독직사건인가에 연관되어 재산도 다 몰수당하고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대학을 떠나 은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런 교외의 고급주택가에 집을 얻어 이런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악한이 알 바 아니었지만, 방금 박사가 내놓은 제의는 어느 정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악한은 잼보니가 든 유리잔을 살며시 탁자에 내려놓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사소한 몇가지 반응실험에다가 새로 개발한 훈련 장치의 테스트 정도지. 결코 건강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자네의 안전은 절대 보장하겠네. 이래뵈도 나에겐 제법 쓸모있는 연줄이 있어서 이런 생활도 하고 있는거야.”

“하! 연줄이 아니라 호구들이시겠지.”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네. 하여간, 밖에만 나가지 않으면 경찰이 자네를 발견할 일은 없고,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계약을 파기하고 떠나도 상관없어. 이 안에 있는 동안 필요한 것은 가능한한 다 구해다주지. 다만 만약의 경우도 있고 하니까 밤에는 지하실에 있는 비밀방에서 자 주었으면 하네. 계약이 끝나 떠날 경우에는 이곳에서의 일을 철저히 비밀로 붙여주고. 안 그러면 내 쪽에서도 자네와 함께 한 대화 녹음을 경찰에 소포로 보내버릴 테니까.”

“너구리 같은 영감탱이라고 생각했더니 아무래도 그보다 더한 것 같군. 당신은 늑대야. 그나저나 대체 나같은 전과자를 써서 무슨 실험을 하려는 건지?”

“전과자든 뭐든, 자네는 쫓기는 몸이니 불평없이 요구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지. 아무래도 내가 좀 미묘한 위치에 있다보니 공개적으로 실험대상을 구할 수가 없거든. 게다가 자넨 건강한 신체와 평균적인 정신, 그리고 다른 이들보다 훨씬 풍부한 인생 경험을 지니고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더 이유가 필요한가?”

악한은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빙빙 돌리다가 탁자에 올려놓고 말했다.

“-당신, 아무리 봐도 비상식적이군.”

“내 이름이 NO상식이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

“-크핫하하하!”

노인의 썰렁한 말장난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웃어버린 악한은 다시 정색을 하고 권총을 집어들며 이죽거렸다.

“좋아. 일단은 갈 곳이 없으니 받아들이기로 하지. 그러나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쓰거나, 혹은 실험을 빙자해서 나를 가지고 놀려고 든다면 그날 이후론 염라대왕을 상대로 실험을 해야 할줄 알아!”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난 아직 서둘고 싶은 생각은 없네. 그럼 승낙한 셈 치고 축배를 들자구.”

“흥, 고작 이런 영양가 없는 싸구려 술로?”

노박사는 옆에 있던 병들을 집어들어 쉐이커로 재료를 혼합하고, 그걸로 상대의 잔을 가득 채워주며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한바탕 취해서 웃고 다 잊어버리기엔 이만한 게 없지. 그럼.”

악한은 썩은 미소를 흘리며 잔을 치켜들었다.

“-아싸 좋구나!”





“-그 약이 어쨌다는 거지?”

“속이 안좋다길래 위장약이라고 주었지만, 실은 그것이 진짜 실험이었지.”

멱살잡힌 사람치고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능글능글하게 말하는 노박사.

“이제까지의 그것들은 그럼-”

“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정들이었네. 준비운동이라고나 할까.”

“아주 작정하고 날 속였군! 이 시궁창에 구르는 개털만도 못한-”

“자네 눈에 보이는 하얀 실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나?”

흥분하여 박사의 목을 조르려던 악한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뭔데? 대체 뭐길래 이 빌어먹을 것들이 내 눈앞에 보이냐구!”

멱살을 잡고 있던 상대의 손을 뿌리치고 한숨돌린 박사가 잘난듯이 얘기한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 사이의 인연[因緣]의 분포를 나타내는 사회심리학적 연결망이 초상물리학적으로 실체화된 결과물이라 보면 정확할 거야.”

“-하나도 안 쉽잖아! 좀더 알아들을만한 설명을 해봐!”

참고로 악한의 학력은 고교 1년 중퇴가 전부다. 하지만 방금 박사의 말은 사실 그 분야의 대학원생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못알아듣는다고 해서 그의 잘못은 아니다.

“인간이 왜 人間인지 아나? 사람[人]들 사이[間]에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지.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매개로 세상과 인연을 맺고 스스로를 발달시켜서 점점 성장해가는 존재야. 쉽게 말해서 태어난 직후엔 부모나 후견인이 있고, 자라날 때는 선생님이나 친구가 있고, 어른이 된 후에는 상사나 동료나 연인이나 배우자가 있을 테지, 그밖에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서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서로를 알아가며 자기를 발견해 나갈거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과 간접적으로나마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인간은 하나도 없지. 만약 그런 연결을 전혀 갖지 않고도 혼자 잘먹고 잘살 수 있는 녀석이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냐. 신이지. 그렇게 사고를 전개시켜나가다 보면 종국에는 이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잇는 촘촘한 거미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 되지 않겠나? 물론 이러한 거미줄은 눈에도 안 보이고 만지거나 느끼거나 맛볼 수도 없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에 불과하지만 말야.”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같지만 뭔소린지 알 것 같기도 하군. 그런데 대체 그게 어쨌다는 거야?”

악한은 초조한 심정으로 박사 주위를 빙빙 돌며 질문해댔다.

“그 ‘거미줄’이 어느날 갑자기, 눈에 보이고 느낄 수도 있는 실체가 된다면 재미있지 않겠나? 물론 남들에겐 보이지 않지만, 그 실들을 가만히 따라가보면 어떤 사람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도 있겠지! 실들을 그저 볼수만 있는게 아니라 그 관계의 성격이나 강도에 따라서 굵기나 색깔이 다르게 표시되도록 만든다면 더욱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거야. 잃어버린 육친이나 옛친구도 찾을 수 있고, 비리나 범죄에 연루된 자들을 재빨리 잡아내어 조직범죄를 근절할 수도 있겠지. 종국에는 지구상 모든 인간들의 관계와 상성[相性]을 시각적으로 표시하는 거대한 인간지도가 만들어지게 될거야! 멋진 이야기가 아닌가?”

악한은 피식 코웃음을 치면서 박사의 얼굴 앞에 고개를 들이밀고 빈정댄다.

“내가 아무리 무식하다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는 못들어봤어. 나도 배운건 없는 놈이지만, 똑같이 눈으로 볼수 없다고 해도- 공기나 바람과는 달리, 관계라던가 도덕이라던가 마음이라던가..... 그 뭐시냐, 하여튼 그런 것들은 애초부터 실체로 표시할 수 없지 않냐고! 애당초 그런놈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꾸며낸 허깨비들일 뿐이니 말야. 날 만만하게 보고 속일 생각은 마!”

노박사는 그럴 테지, 라고 말하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나도 자네같이 생각했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겠지. 어떤 의미에선 그들이 옳아. 하지만 자네는 특별한 경우일세.”

“그래서..... 당신이 씨부렁거린 대로, 이 요상스런 거미줄들이 다 그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케-블이라 치고,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했길래 이지경이 된 거냔 말야?”

“원리는 자네같은 문외한에겐 밝힐 수 없지만 -아, 그렇게 도끼눈 뜨고 날 노려보지 말라고, 자네가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별로 쓸모없는 분야니까 그렇다는 뜻일 뿐이야.- 하여튼 간에, 나는 오랜 연구끝에 그 ‘거미줄’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네! 그것들 자체의 속성은 전혀 바꾸지 않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을 재조정하는 방법으로 말이야! 정말로 혁명적이지 않은가!”

박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어댔지만, 악한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반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내가 이런 걸 볼 수 있게 되었단 말이지.”

손가락을 깍지끼고 잠시 생각하던 악한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말야, 대체 실을 건드렸을 때의 그 정신없는 것들은 뭐야? 이 빌어먹을 약이 환각제처럼 뿅가는 효과라도 있는건가?”

박사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내가 아까 약을 다 먹었냐고 물었지? 난 분명 어제 약을 줄 때 하루에 두개씩만 먹으라고 했는데, 자넨 위장병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 말을 놓친 모양이군. 그 약을 한꺼번에 과다복용했기 때문에, 자넨 생각지 못한 부작용까지 얻게 된 거야. 애초에 내 생각대로 진행되었다면 자네는 자네 의지에 따라 그 거미줄들을 볼 수도 있고 시야에서 지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지. 게다가 거미줄을 잡았을 때, 그 반대편에 연결된 사람과 관련된 정보들을 -마치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교환하듯- 직접 자네 두뇌로 옮겨오는 능력까지 갖게 되어버린 모양이네. 너무나 많은 데이터를 한꺼번에 두뇌가 처리하려니까 무리가 생겨서 마치 마약에 취한 듯한 트립 효과를 일으키고 만 거지. 쯧쯧.”

악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박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아까 내가 보았던 것들은 내 머리속에 있던 게 아니라......”

“자네와 연결된 그 사람들의 뇌에서 온 거야. 물론 개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겠지만, 때로는 시체나 유령과도 연결망이 성립되어 생전의 기억을 재생하는 케이스도 있을지 모른다고 나는 예상하고 있네.”

악한의 얼굴이 매연으로 얼룩진 공업도시 하늘처럼 점점 어두워졌다.

“-그럼...... 이걸 원래대로 돌릴 방법은 없나?”

“아직은 없어. 유감이지만. 단계적으로 진행하려던 실험이어서 미처 치료약까지 만들 생각은 못했지. 세상 일이란게 다 그렇잖나, 응?”

이는 물론 유아독존격인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의 흔해빠진 변명에 불과하지만 당사자인 악한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평생동안...

“-이 저주받을 거미줄을 만날 보고 살아야 하고, 이걸 만질 때마다 나하고는 관계도 없는 개자식들의 기억을 대신 느끼면서 미칠 듯한 그 경험을 되풀이하라고? 나를 대체 뭘로 보고 이따위 짓을 한거냐. 이 벼락불에 프라이해먹어도 시원찮을...... 보릿골 쥐새끼같은 늙은이!!!!!!!!!!!!!!!!!!!!!!”

다시 멱살을 잡으려는 악한의 손을 살짝 피한 노박사는 소파를 벗어나 출입문 쪽으로 설렁설렁 달려가면서 외쳤다.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연구를 계속하게만 해준다면 언젠가 나을 수 있을걸세! 내가 장담하지! 그보다 자넨 정신적으로 심각한 불안정 상태에 있네. 휴식이 필요할 걸세! 그 실들을 건드리지 말고 푹 쉬라구!

내가 뭔가 방법을 찾는 동안에 여기서 꼼짝 말고--------------”

-탕!

악한은 더이상 그의 장광설을 견디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 이 집에 올 때 들고 있었던 피스톨은 박사에게 맡겨두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상의 안주머니에 손바닥만한 핸드건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노박사는 폭풍우치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유령을 본 리어 왕처럼 장엄하고도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은 채 이마에 뚫린 구멍에서 피를 콸콸 흘리며 출입문 앞에 마대자루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박사가 생[生]을 마치는 순간- 악한은 보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거미줄들이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시체로부터 툭툭 끊어졌다. 그 가느다란 실들은 갈곳을 잃은 한 무리의 뱀들처럼 서로 뒤엉키고 휘감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강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강풍은 곧바로 격렬한 심상[心象]의 대 파란이 되어 악한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하아!!!!”

박사의 온갖 사람들과의 인연이 그의 뇌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악한 것도 있었다. 유복하지만 형과 비교당하며 메마르게 자란 어린시절, 젊은 날 책벌레라는 이유로 실연당한 아픈 기억, 열심히 공부했건만 스승이 알아주지 않아서 장학금 한발짝 앞에서 좌절한 시기, 좋아하는 연구보다는 돈이 되는 프로젝트와 학교 명예에 보탬되는 외부활동에 밀려다니며 점점 꿈을 잃던 장년의 박사, 권력에 대한 탐욕에 맛들여 독직사건에 연루될 때의 조마조마한 마음과 발각되었을 때의 수치심, ‘나만 그런것도 아닌데 세상은 불공평하다’라는 원망과 재기에 대한 은밀한 야망, 그리고 실험으로 인해 변해버린 악한 자신을 보며 그가 느낀 잔인한 쾌감과 지적 성취감...... 그리고 죽기 전의......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걸 느끼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뇌를 탈수기 안에 집어넣고 빨래처럼 쥐어짜며 속에 든 것을 몽땅 빼놓은 뒤에, 염색기에 집어넣고 다시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물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본 적도 들은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풍경들이 그의 뇌속으로 밀려들어와 사고[思考]를 헤집고 감정을 분해하고 이성을 마비시키고 자아를 온통 뒤흔들어 온통 엉망진창인 핏빛 칵테일을 만들어 놓았다.

악한은 입술을 깨물고 버티다가 결국 지하실 바닥에 무너졌다.

‘..................이런 니기미................!’





이제 이 이야기도 끝으로 치달을 때가 되었다.

악한은 구사일생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늦기 전에 정신을 회복한 그는 박사의 시체를 감쪽같이 처리하고 집은 불태워 버렸다.

소방차와 경찰차들이 앵앵거리며 몰려와서 한적한 주택가에서 일어난 의문의 화재사건을 처리하고 있을 때 쯤에 그는 이미 3백킬로미터 떨어진 바다 위에 있었다. 거미줄로 뒤엉킨 세상을 보는 것도 괴로웠고 타인의 거미줄을 건드릴 때마다 느끼는 강제적인 ‘공감’도 참기 힘들었지만,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여 항구로 달려가서 배를 빌려타고 혼자 공해상으로 나간 것이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박사의 시체로부터 떨어져나온 그의 ‘거미줄’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저마다 연결되어 있는 또 한쪽의 주인들에게 달려가서 박사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라도 전해주었을까?

아무튼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거미줄들이 어떠한 혼란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그 혼란이 자기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를 뼈저리게 느낀 악한은 다시는 살인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대로 이 말도 안되는 저주를 껴안은 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악한은 박사가 죽기 전에 남긴 말들을 곱씹어보다가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십여 년 동안 사람을 피해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자금은 박사의 집을 탈출할 때 가지고 나온 예금과 자기가 보스의 눈을 피해 평소에 모아둔 비자금을 합하여 조달했다. 배를 빌리고, 차를 사고, 비행기를 대절하고, 조종술과 항해술을 통신교육으로 배워서 기동력을 확보했다. 충분히 가지고 다닐 만한 식량과 목적지의 지도를 비축하고, 어디로 가나 사람과 만나지 않기 위해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사람이 사는 마을 근처에서는 어딜 가나 그놈의 짜증나는 거미줄이 보여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아직 풍부한 자연이 남아있는 오지에는 사람의 발길도 뜸해서 거미줄의 분포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아직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들의 거미줄을 건드렸을 때 느끼는 ‘기억’들은 소위 문명인들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얌전하고 건전한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어느 호수 근처에서 식인습관을 가진 부족들과 만나 그들의 거미줄을 건드렸을 때에는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그는 그야말로 온 세상 모든 이들의 원죄와 행복을 함께 짊어진 이상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돈도 다 떨어져 갈 즈음에, 그는 퉁구스카의 유명한 구덩이에 도착했다. 울창한 원시림이 사방을 둘러싼 그곳에는, 옛날에 소행성의 추락으로 추정되는 대폭발이 일어나 커다란 크레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옛날 S국이 이곳을 관할하던 시절에는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되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동안 정세가 바뀌고 대륙도 혼란해져 이곳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녹슨 채 꺾이고 구멍뚫린 철조망만이 과거의 기억을 묵묵히 대변해줄 뿐이었다. 거기 달려있는 표지판에는 이국의 문자로 뭔가가 쓰여 있었으나 악한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발견했다.

어떤 예감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그 존재가 의도한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그는 결국 찾아내고야 말았다!





악한은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너였구나...”

군데군데 올이 빠진 싸구려 스웨터와, 유행이 다 지나간 듯한 낡은 스커트를 입은 꾀죄죄한 소녀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악한이 노박사와 처음 만난 그날 차창 밖으로 우연히 보았던 바로 그 소녀였다. 나이는 알 수 없었으나 더러운 얼굴은 무척이나 맑고 차분했다.

그리고 소녀의 주변에는... 거미줄이 하나도 없었다.

‘만약 그런 연결을 전혀 갖지 않고도 혼자 잘먹고 잘살 수 있는 녀석이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냐. 신이지.’

노박사의 자신만만하면서 허영에 차 있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악한은 가방에서 45구경 대형 라이플의 부속을 꺼내어 조립했다. 그가 그러는 동안 소녀는 별 움직임 없이 흥미로운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악한은 열에 들뜬 몸을 추스려가며 조립을 마쳤다. 그리고 마치 혼잣말을 하듯 소녀 쪽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처음에는 이 저주스런 몸이 싫어서, 자살을 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말야. 그래서 이 고통이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나 혼자 죽기에는 진짜 너무 억울했거든? 그때 노친네가 들려준 말이 팍 떠올랐지... 웃! (그는 자기 거미줄을 건드렸다) 이 찜쪄먹을 거미줄을 붙이지 않고 다니는 녀석이 바로 신일거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자를 없애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신을 죽이고 나도 따라 죽는다면 그것만큼 멋진 일이 어디 있겠나!.... 헉! (그는 또 자기 거미줄을 건드렸다) 게다가, 진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신이 죽음으로 인해 이 세계 자체가 사라진다면...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통쾌한 복~수가 되지 않겠냐고!... Oh Shit! (그는 또다시 자기 거미줄을 건드렸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당장 그만두고 세상을 이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거야. 바로 아가씨, 너를 작살 내려고. 어때, 웃기는 얘기지, 앙?”

그러나 소녀는 그의 이야기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밤이 가까워져 추위가 밀려드는데도, 마치 나들이 온 사람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먼 곳을 그저 둘러보고 있는 꼴이, 악한에게는 무지하게 거슬렸다.

“...뭐 상관없다 이거지. 그래 신씩이나 되는 존재가 나같이 우매하고 보잘것없는 인간 따위를 신경쓸 여가가 있겠냐... 지금 네 눈에는 마치 내가 먹을 것 찾으러 싱크대 위로 기어올라온 버러지나 뭐 그런거쯤으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그거야 어떻든 간에 난 할 얘기는 다했어! 이제... 가만있어! (그는 지치지도 않고 자기 거미줄을...) 이제 그 노탱구리가 시작한 뭣같은 실험의 마무리를 내가 지어주겠어! 농담 아니라구!”

소녀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그러나 좀 귀찮다는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조립된 라이플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코끼리나 하마도 죽일만큼 강력한 철갑탄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 소녀의 이마 바로 위에 도달했을 때-

총알은 그대로 소녀의 이마를 관통했고 그 순간 악한은 묘한 현상을 목격했다.

보통은 총알이 사람의 피부 표면에 닿았다면 그 사람만 구멍이 뚫리고 주변의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달랐다. 마치 공기를 가득 채운 비치볼 위에 그려진 사람 모양의 표적에 총알이 들어가면서 그 운동량으로 인해 비치볼이 우그러지면서 총알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푹 꺼지듯이...

소녀를 중심축으로 한 주변의 풍경이 갑자기 푹 꺼져버리며 한점으로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악한의 시야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밤의 어둠이 아닌 그야말로 진짜 태고의 어둠.

그곳은 대체 어디인가?

악한은 방금까지의 열기도 까맣게 잊을 정도로 소름이 쫙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의 육체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마치 자연계로부터는 절대로 생겨날 수 없는 절대적인 허무의 세계에 접어들면서, 육체마저 잃어버린 채 자신의 초라한 의식만이 덩그라니 남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허세도 호기도 모두 떨쳐버리고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훗-”

귀가 없을 터인데도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직통으로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는 무척 익숙한 깡마른 노인의 바람빠지는 듯한 웃음소리.

그리고 또 하나는 맑고 청아하지만 짓궂은 소녀의 웃음소리.

“.....................................................@%*!!!!!”

사 악한은- 아니 한때 사 악한이었던 그 의식체는 입이 없음에도 외쳐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혀서 보이지 않는 몸부림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그의 거미줄도, 그의 육체도, 그의 세계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그의 유폐된 정신과,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웃음소리만이......





THE END...





(C) ZAMBONY 2003.05.11.



:
위로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RSS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