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분류 전체보기 (326)
창작의 샘터 (88)
패러디 왕국 (85)
감상과 연구 (148)
일상의 기억 (5)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2003-05-17] 천사견습생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0
 



<< 천사견습생 >>

The Angel Apprentice







“..............................??????”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어딘가 처음 보는 장소에서, 엄청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 안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끼어 있었다. 주변은 상아나 백옥으로 만들어진 듯 완전 흰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사방에 안개라도 낀 듯 무척 흐릿해서 그곳이 어떤 건물의 방 안인지, 아니면 야외의 널따란 광장인지도 알 수 없었다.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손에 뭔가 대입 전형 서류같은 것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블레이저 교복을 입고 평범한 학생화를 신고 있었지만 기온은 온화했고 별로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가방이나 도시락통 같은 소지품은 전혀 없었다. 대체 이런 시간에 (언젠데?) 이런 곳에서 (어디야?) 교복 차림으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보다도 더 궁금한 건......

“이름과 출신지를 말씀해 주세요.”

멍하니 서 있다보니 어느새 접수처로 보이는 곳 앞에 도달해 있었다.

“-네?”

“이름 말예요. 전에 있던 곳에서는 당신을 뭐라고 불렀죠?”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동안 생각해내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런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흐릿한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뭉글뭉글하기만 했다. 저 깊은 바닷속에 산다는 대왕해파리도 이보다는 훨씬 머리가 맑을 게 틀림없어!

“.........기억이 나질 않는데요. 나는..... 나는 대체 누구죠? 아니 그것보다도 대체 내가 어째서 이런 곳에 와 있는거죠? 여기서 난 뭘 하기로 되어있나요? 죄송하지만 혹시 아세요? 네?......”

기계처럼 한치의 빈틈도 없게 재단된 보라색 옷을 입고 필기구를 손에 든 접수원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옆에 놓여있던 비누거품 모양의 기구를 손에 들고 누군가를 불렀다. 저런 모델의 전화기가 나온 적이 있었던가?

“....네, 흔치 않은 케이스인데 또 걸렸어요. 우리 부서가 아니라 케어링 가디언caring guardian에서 맡아야 할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럼 곧 사람을 보내주세요. 여기서 기다리게 하죠. 데스크 555-SB2로요...”

그 모습을 애매무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나를 뒤쪽의 누군가가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이봐, 볼일 끝났으면 빨리 비켜줘야지.”

-그 볼일이 뭔지조차도 난 모른다구요, 아줌마.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 괜히 피곤해질 것만 같아서 나는 얌전히 자리를 비켜주고 데스크 옆쪽으로 물러섰다. 통화를 끝낸 직원은 거기서 잠시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는 다음 손님을 상대로 무슨 상담을 열심히 전개하고 있었다. 나는 데스크로부터 뒤로 돌아서서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엑?!”

별 생각 없이 바라본 하늘 방향에는 좀 비일상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좀’이라고 말할 정도가 아닌데, 이건.

아무리 세계에 괴상한 마을과 요상한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서류가방을 든 날개달린 사람들이 바쁘게 공중을 지그재그로 서로 교차하며 오고가고, 마치 수증기와 솜털만으로 지은 듯한 하얀 구조물들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사방으로 뻗어있고, 마치 애들이 놀다 버린듯한 그림맞추기같은 정체모를 도형들이 색깔까지 바꿔가면서 신명나게 이리저리 떠다니는 곳이 있다는 얘긴 못 들었다구!

그제서야 나는 여전히 흐릿하게만 보이는 내 자신의 손발을 내려다보고 뭔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인정하기 싫은 그 가능성을 부인하기 위해서 뺨도 꼬집어보고 맥박도 짚어보고 눈감고 숫자도 세어보고 손가락으로 이마도 튕겨보고 별짓을 다 했지만, 익숙한 잠자리에서 깨어나거나 수업중에 눈을 뜬다거나 하는 흔해빠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예 하는 김에 물구나무도 서 볼까 하다가 교복 치마가 뒤집어질까봐 포기했다.

눈 앞이 컴컴해지고 발 밑이 소리없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 죽은 거야?

정말로?





“...그래서, 전혀 생전의 일이 기억안난단 말이지? 머리에 쥐날 일이군.”

얼마 후에 나를 맞으러 온 것은 무릎까지 오는 길다란 크롬빛 코트를 입고 부스스한 생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채 입으로는 쉴새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다소 차가운 인상에 공허한 눈을 가진 젊은 여성이었다. 나이는 한 30대 초반 정도?

그녀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냥 자기를 ‘바리’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내 이름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제가 죽어서 여기 온 건 알겠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생전 일을 잘만 기억하는데 나만 왜 이런거죠? 아까 직원분이 특별한 경우라고 하던데 뭔가 병 같은 건가요? 어떡해야 할지 도무지......”

“<시스템>의 관측으로는 네가 죽은 직후의 일밖에 알 수 없어. 지구상에 개미떼같이 퍼져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생전부터 일일이 체크할 여력이 없거든. 지금으로서 알 수 있는 건, 네가 자살했다는 것, 그리고 그때의 충격으로 기억 일부가 손상되었다는 거야. 하지만 그밖에도 또 한가지의 이유가 있더군.”

“또 한가지요?”

나는 담배연기가 싫어 손을 저으면서도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 기억하기 싫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네 자신의 무의식이 기억해내는 걸 거부하고 있는 듯 하다는 점이야. 그래서는 아무리 우리라도 손을 쓸 수 없지.”

“내 자신이 거부한다고요......? 어째서?”

“점쟁이도 아닌데 그걸 내가 어찌 알겠냐. 너 자신이 어떻게든 캐어내야지. 난 그걸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야.”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구름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가장자리 끝에 설치된 플랫폼에 서서 무한히 펼쳐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래엔 구름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엄청나게 높이 올라와 있군요!”

“아마도 성층권이나 전리층이나 뭐 그 비슷한 곳일거야.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는 단조로운 아래쪽의 풍경에 싫증이 나서 바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뛰어내리지 못해. 아래로 가려고 굳이 뛰어내릴 필요도 없고.”

“어디, 정말로-?”

죽은 바에야 뭘 못해보랴 싶어서 가장자리 플랫폼으로부터 뛰어내리려고 한참 시도해 보았지만 발이 바닥으로부터 떨어지지를 않았다. 한쪽 발을 떼어내면 다른 쪽 발이 자석처럼 달라붙고 그쪽 발을 떼어내면 또 다른 쪽 발이...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의 현재 몸은 원래 물질계에 존재하던 신체의 외형을 전자기적[電磁氣的]으로 복제하여 세밀하게 재구성한 다음에, 죽기 바로 전까지의 의식을 로딩loading한, 일종의 하전입자[荷電粒子]로 만든 빵반죽같은 존재야. 이 도시와는 강력한 정전기로 연결되어 있어서 죽어도 (이미 죽었지만) 떨어질 일은 없지.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냉장고와 자석 병따개같은 관계랄까.”

알듯말듯한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자니 정말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이해가 갔다.

“-그 말은 지금 내 기억이 불완전한 건...”

“-지금 상태가 이전의 몸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지. 다른 부분이라면 몰라도, 뇌조직이 손실되면 생전의 기억을 완벽하게 복사하는 건 불가능해. 넌 상당히 과격한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그때 불행히도 머리가 깨졌어.”

-오 맙소사!





우리는 그곳을 물러나와 요상한 튜브와 전선이 서로를 둘러싸며 복잡하게 뒤엉킨 흰색의 대형 구조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는 사방팔방으로 뻗은 여러 개의 유리관을 통해 형체를 제대로 판별할 수 없는 번개구름같은 덩어리들이 쉴새없이 순환하며 어딘가로 보내어지고 있었다.

그 괴상망칙한 장치 앞에서 목에 갈색 머플러를 두르고 파란 멜빵바지를 입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이런저런 스위치를 정성들여 조작하며 주의깊게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리는 그에게 나를 소개시키고는 몇 가지 설명을 부탁했다.

“이분은 <시스템>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걸 알고 계시는 우룩 씨야.”

할아버지는 기기를 조수에게 맡기고는, 길게 기른 탐스런 턱수염을 여유로운 모션으로 쓰윽 쓰다듬더니 얘기를 시작했다.

“스틱스 강에 온걸 환영한다. - 아니 이건 농담이지만, 제군들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장치가 말하자면 스틱스 강이라고 할 수 있지! 뭐, 스틱스 강을 모른다고? 요즘 학생들은 고전도 안 읽고 사나? 고대 희랍 신화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강인데, 거길 배로 건넌 영혼은 생전의 일을 몽땅 망각하고 저승의 시민으로 편입되는 중요한 곳이지. 그게 이 장치와 뭔 상관이냐고? 허, 거참 인내심도 없구만, 조금만 더 들어보면 나오니까 좀 기다리라구.

학생도 알다시피, 우리가 살아있을 때 터전으로 삼는 물질계는 크게 보면 하나의 거대한 순환계지. 햇빛과 빗물과 양분으로 식물이 자라고, 초식동물이 식물을 먹고,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먹고, 죽은 육식동물을 미생물이 분해하여 다시 자연으로 되돌리고... 이런 식으로 한정된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물질과 에너지가 돌고 돌며 변화무쌍하게 세계를 운영하고 있지 않던가.

근데 지금 우리가 있는 <아르크>는 그 물질계의 그림자 같은 존재란 말이야. - 뭐, 무슨 가수 이름이냐고? 떼끼! 이건 사후 시공 연속체(AfterLife Continuum)를 줄인 말이란다. 누가 처음에 쓰기 시작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지. - 사람이나 동물이 저쪽 물질계에서 수명이 다하거나 병들거나 사고를 만나 죽으면, 그 육체의 구성분자는 흙으로 돌아가 순환에 가담하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뇌에 축적되어 온 의식의 매트릭스matrix는 전자기적으로 압축되어 바로 이곳으로 전송되어 오지. - 물론 배달비가 좀 비싸서 소실되는 것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 그렇게 해서 도착한 정신체들은 바로 여기 스틱스 강에서 깨끗하고 흠집없는 본래의 생명 에너지 패턴으로 다시 걸러져 적당한 때가 되면 물질계로 내려가서 새로운 생명의 육체와 도킹하여 다음 세대의 의식을 가동시키는 유용한 매개체가 되어 주거든.

이제는 왜 스틱스 강이라고 하는지 알겠지? 너희들 언어로 표현한다면 물질계는 오래된 본체를 교체하고 재활용하는 하드웨어 공장이고 이곳은 다 쓴 부팅 디스크를 다시 포맷하여 돌리고 돌리고 또 돌리는 소프트웨어 처리장이지. 별로 깔끔한 표현은 아니지만 뭐 어쩌겠어. 인간 사는게 다 그런걸. 뭐라고? 그래, 확실히 나이 어린 학생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군. 그건 못들은걸로 해줘.“

우우, 듣고보니 뭐랄까... 그 소위 ‘영혼’이란 것이 슈퍼마켓에서 사기 세일을 벌일 때 유통기한이 지난 야채나 과일을 재포장해서 팔아먹는 것만도 못한 거였단 말인가! >_< 그런대로 감동적인 설명이었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잠깐만요. 방금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저 도시 안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뭐죠? 그리고 저같은 경우는요? 왜 저기서 포맷되어 다시 내려가지 못하고 아직도 이렇게 생전의 모습을 하고 있나요?”

우룩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느릿느릿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 사람들하고 학생은 경우가 좀 달라. 바리가 좀 있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겠지만 - 아니 자네 눈초리를 보니 지금 내가 다 얘기해주길 바라는게로군. 이런 왕골초 구미호 같으니라고! - 하여튼, 이 아르크를 움직이는 것은 <시스템>이라는 일종의 섭리 비슷한 놈인데, 우리도 그 정체는 잘 몰라. 아마도 물질계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에 상당하는 드높고 큰 존재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지. 뭐, 신이란 존재가 바로 그거 아니냐고? 아냐, 종교하곤 관계없어. 우리는 그냥 정해진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아르크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생전의 취미를 극한까지 추구하거나 할 뿐이지. <시스템>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일하면 편하다 라는 매뉴얼 같은 놈이란 말씀이야.

하여튼 왜 같은 인간인데도 취급에 차이가 나나 하면... 여기 스틱스강에 집어넣어져 물빨래처럼 깨끗하게 - 아, 이거 실례 - 포맷되는 사람들은 그냥 그저 그렇게 살다가 평범하게 생을 마치고 또 다음 생을 준비하는, 모범적인 인생들이지. 그에 비해, 저 도시에서 <시스템>의 일을 돕는 이들은...

대부분 자살한 사람들이야. 놀랐겠지?

자살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깊은 마음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 영향이 대뇌피질 안쪽에 깊게 새겨질 정도라, 그들의 의식체 매트릭스도 그냥 포맷하여 사용하기에는 좀 떨떠름한 구석이 있다구. 게다가 제대로 생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지라 의외로 생에 대한 미련이 강하지. 단순히 생각해보면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사고나 병 때문에 죽는 경우에 미련이 강할 듯 한데 실제로는 자살하는 녀석들의 념[念]이 훨씬 깊어. 아이러니가 따로 없지.

결국 그래서 그들은 포맷 전에 생전 모습대로 재구성되어 일정한 치료기간을 거치고, 희망자에 한해서는 사회봉사 비슷한 형식으로 여기 일을 돕게 하지. 그들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죄가 되느니 어쩌느니 하는건 우리 관심 밖이야. 그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 에너지를 헛되이 쓰고 주어진 기한보다 훨씬 일찍 오는 바람에 여길 인구과잉으로 만든 것에 대한 행정 제재일 뿐이지. 관공서는 아니지만 우리도 나름대로 힘들다구. 어험.

- 응? 뭐라고? 아 물론이야. 원래 <시스템>의 일을 돕던 자들도 따로 있었지, 하지만 그들에 대한 얘기는 아무리 해도 모자라니까 나중으로 미루겠어.

결국 그렇게 해서- 자살자 그룹 중에서도 치료가 빠른 이들은 결국 이리로 와서 포맷의 길을 거쳐 새로운 생을 살고, 아무리 해도 안된다거나 혹은 여기에 정이 붙은 이들은 눌러앉아 도시의 운영진이 되어버리는거지 뭐. 좀 어이없는 얘기지? 멋진 천사나 무서운 저승사자가 그득할줄 알았던 사후세계에도 여전히 재미없고 맥빠진 인간들이 비슷한 사회를 꾸려나가고 있다니 허참.

아, 물론 자살자만 있는건 아니야. 평범하게 죽은 이들 중에도, 순환에 관심 없거나 생전의 구도를 계속하고 싶다는 희망이 강한 이들에 대해서 도시는 언제나 문호를 개방하고 있지. 전자의 경우는 의식체 자체를 웜홀로 점프시켜 영원한 해탈[nirvana]의 경지로 떠나버리고, 후자의 경우는 도시 곳곳에 흩어져 살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지. 그러고보니 몇해 전에 정착한 어느 노부인은 꽤 멋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그소 퍼즐이 취미라더군.

근데 학생의 경우는 좀더 골치아픈 경우인데 뭐냐면......“

그때 무심한 얼굴로 담배를 두갑째 피우고 있던 바리가 끼여들어 제지했다.

“-됐어요, 아저씨. 그정도면 충분해요.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뭘, 언제라도 환영이지. 이런 귀여운 손님이라면 특히나.”

“자꾸 그러시면 나이들어서 호색한 소리 들어요.”

“헷! 골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네. 또 보자구!”

“다음에 잼보니 로얄 피카레스크로 한잔 사죠.”

“어이, 그 얘기 한번만 더 하면 천번째야.”

사람 좋은 우룩은 뭔가 얘기를 다 못해서 아쉽다는 표정으로 작업을 재개했고 우리는 그 산타클로스 작업장같은 묘한 공간을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나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느라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전설이나 설화 등에서 들은 사후세계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러다가, 우룩이 하려다 못한 얘기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바리, 아까 할아버지가 하려던 말이 뭐였어요?”

그녀는 담뱃불을 길가에 놓인 거품 분수에 비벼 끄고는 대답해 주었다.

“...가끔 너같이 생전의 기억을 몽창 까먹은 자살자가 등장하는데, 그들의 치료에는 좀 특이한 방법이 동원돼. 생전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기억과 진술을 바탕으로 도시 안에서도 생전의 상황을 재현하여 치료를 진행할 수 있지만, 너는 완전한 백지상태라서 그럴 수가 없거든. 그래서 결국 나같은 케어링 가디언을 동반하고 지상으로 내려가서 우리의 일을 도우며 스스로의 문제를 깨달아 나가는 우회적인 방법을 써야만 하지.”

나는 깜짝 놀라서 장난삼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넥타이를 삼킬 뻔했다.

“-지상으로요?! 다시?!”

바리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지상으로 내려가려면 등 뒤에 날개를 쫙 펼치고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우아하게 점프하여야 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영혼인데~

그리고 보기좋게 틀렸다.

그 희어멀건한 접수계를 다시 찾아가서, <시스템>의 허가를 얻기 위한 몇 가지 복잡한 서류 심사를 거치고,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중앙광장으로 나왔다.

“어떻게 지상으로 가죠?”

바리는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간단하게 답했다.

“이미 와 있어.”

“---에엣?! .....................우우와, 진짜네~~~!!!!!”

어느새 주변의 경치는 좀더 또렷하고 지저분한 지상의 어느 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낮게 뜬 태양 아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차들이 이리저리 오가고, 사방에 소음과 불빛이 윙윙거리고 번쩍거리는 그런 곳이었다.

익숙하면서도 이제는 너무나 낯설어진 곳.

간만에 지상의 풍경을 보고 울적해진 기분을 애써 누르고 나는 쾌활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한 거예요? 이렇게 순식간에?”

“초보적인 이동술이지. 어딘가로 ‘가고 싶다’고 바라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그곳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거야. 물질계에서는 어려운 스턴트지만 전자기적인 존재인 우리들에게는 식은죽 먹기지. 오래 전에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선생한테서 직접 배운 거야.”

“선생님 이름이 뭔데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 (-_-a;;;)

필요 이상으로 곤혹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보고 은근히 즐기는 듯한 바리였다.

“-저기 일감이 보이는군.”

“....벌써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까 정말로 경찰관들이 포위한 높은 다리에서 강으로 뛰어내리려고 발악하는, 꼴사납게 생긴 젊은 남자가 보였다. 머리는 호섭이 머리로 깎았고 얼굴에는 곰보자국까지 있었으며 엄청 도수가 높은 안경에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옷을 입고 다리 난간에 서서 횡설수설하며 껄떡대고 있었다. 첫눈에 보아하니 평소에는 겁쟁이인 주제에 무리하게 술기운을 빌려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죽기 전의 나도 저렇게 추하게 놀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제 어떡하죠?”

“살려야지 뭐. 아까 우룩 영감 하는 말 들었잖아? 자살자가 너무 늘어나면 아르크의 균형이 깨지게 돼. 동기는 이기적이지만 결과는 매우 이타적이지.”

“하지만 억지로 살려도 그뒤에 살아갈 방법이 없다면요?”

“그건 자기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그래도 또 다시 자살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고.”

케어링 가디언이란 의외로 근시안적인 직종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기다려!”

“전 뭘 하면 되죠?”

“처음이니까 구경만 해. 주변에 쓸데없는 거 건드리지 말고.”

“사람들은 우리를 못 보잖아요?”

“개나 고양이들은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 자극하지 않도록 해.”

“동물들은 우리를 볼 수 있나요?”

“가끔가다 재수 없으면 우리 모습이 거울에 비치기도 하지. 그럼 다녀올게!”

다음 순간, 바리의 모습은 나로부터 5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허공 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물고 있던 담배꽁초를 뱉어버리고 등 뒤에서 한아름 정도는 되어보이는 플래티넘 컬러의 날개를 쫙 펼쳐올렸다. 날개에서는 은은하게 밝은 빛이 나서 주변을 비춰주고 있었지만 물론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안 보였다. 그녀는 곧장 다리 난간 위로 날아가서 뛰어내릴락 말락 하는 남자의 어깨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툭 건드렸다. 남자는 갑자기 발을 헛디딘 듯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바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리 한쪽 끝에 서 있던 경관이 들고 있던 로프를 손짓 하나로 재빨리 이동시켜 남자의 왼쪽 다리에 감고 다른 쪽 끝을 난간에 단단하게 매어놓았다. 떨어지던 남자는 낙하를 멈추고 다리에 거꾸로 매달린 채 우스꽝스러운 시계추 운동을 선보이게 되었다.

경관들이 달려와서 남자를 끌어올렸고 죽다 살아난 남자는 모포를 덮은 채 하염없이 울다가 가족들이 달려와 끌어안자 더욱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로써 당분간 자살 소동을 벌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경과를 지켜보고 있는데 어느새 내 옆에 바리가 돌아와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던 백금 날개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대단했어요! 근데 좀.... 과격한 방법 아니었나요?”

“죽고 싶은 녀석에겐 죽는다는게 어떤건지 맛보여줘야 정신을 차려.”

하기야, 본인도 어두운 얼굴로 보아하니 곱게 죽은 처지는 아닌 모양이다. 그런만큼 함부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을 더더욱 참고 봐줄수 없는 거겠지.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뇨. 그냥. 근데... 우린 날개가 없는줄 알았는데 있긴 있군요.”

“갖고 싶어?”

나는 앞서 걷기 시작하는 그녀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죠?”

“돈벌어서 사면 돼. 3500만 헤븐Heaven 정도던가.”

“엑~~~??? 가디언 봉급은 얼만데요?”

“시급 42헤븐.”

그럼 한달 내내 24시간 일해도 약 3만헤븐 정도니까... 우아아악!

3천5백개월을 뼈빠지게 일해야 한단 말인가!

“-바보, 농담이었어.”

-이젠 나를 놀려먹는게 아주 도락이 되셨다 이거지... >_<

“그럼 빨리 진짜 방법을 말해줘요~ 말해달라구요~ 우엥~”

“스스로 찾아내.”

나는 입을 쑥 내밀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한참동안 목적도 없이 걷던 중에, 우리들은 강가에 지어진 어느 조그마한 조립식 주택 앞에 멈춰섰다. 앞뜰에 사슬로 매어져 있던,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가 보이지 않는 손님을 감지한 듯 맹렬히 짖어댔다.

바리는 두려움 없이 그 앞으로 다가가 개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자 개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짖기를 멈추고 꼬리를 흔들어댔다.

나는 대체 왜 그녀가 이 집에 왔는지 알지 못해서 어리둥절했다.

“......그래 그래......너도 많이 컸구나.... 네 할미를 꼭 닮았어...”

“저, 바리 씨, 여긴 어디...”

“당장은 묻지 말아줄래? 부탁할게.”

-너무 제멋대로야! >_<

나는 골이 나서 더이상 말을 걸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다 쓰러져가는 그 집 한구석의 방문이 열리며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야, 누가 왔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쉰이 좀 넘어보이는 반백의 할아버지였는데, 가끔씩 마른 기침을 하며 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는 마루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뭔가를 가지러 바깥으로 잠시 나갔다가 몇 분 후에 다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싱싱한 앵초꽃 다발과 담배 한 다스가 들려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잘 안나오는 수돗물을 받아 정갈히 몸을 씻고 집 뒤편에 있는 별채로 들어갔다. 호기심에서 따라들어가 본 나는 그 노인이 거기에 있는 제단 앞에 향을 피워놓고 꽃과 담배를 바친 뒤 눈물 맺힌 눈으로 절을 하는 것을 보았다.

바리는 일부러인지는 몰라도 나를 막지 않고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

대체 누구의 제단일까 궁금해져서 그 위에 놓여 있는 사진틀을 유심히 바라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기 들어있는 사진 안에는 긴 생머리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씨익 웃는 앳된 여성이 찍혀 있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지만 나는 한눈에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리의 얼굴이었다.





“-뭐 그런 거지.”

바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벌써 30년이라... 아르크에서는 불과 몇달처럼 느껴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일처럼 얘기할 수가 있죠? 당신의 일이잖아요!”

“세월이 흐르다보면 사람은 무디어지게 마련이지.”

“하지만 그 할아버지...당신의......는...”

“바보같은 남자야. 나도 솔직히 그사람이 그렇게까지 할줄은 몰랐어.”

바리는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라서였을지도 모르지. 내가 그를 골랐던 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의 실제 나이가 할머니뻘일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야릇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죽은 뒤의 모습은 그 당시의 그대로 고정되어 버린다. 영혼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지상의 모습을 참고 보아온 뒤에도 그때 그대로의 마음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사실은 소리없이 나이를 먹는 건 아닐까? 겉으로가 아니라 속으로...

“...기다리는 데는 선수였거든. 데이트할 때도. 같이 일할 때도.

그리고... 결혼식 때도. 아아, 이건 좀 너무했나...”

뭔가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많을 성 싶었지만 더이상 묻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울한 분위기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다음 일로 넘어가자고 제의했다.

“그래, 그게 좋겠군... 마침 봐둔 곳이 있어.”

그녀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며 실실 웃더니 담배를 또 한대 빼어물었다.

“이번엔 네가 해봐. 네 나이 또래의 아이니까.”

어느덧 서산에는 해가 저물고, 하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살찐 야생 비둘기떼로 가득했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는 것을 보고 이유모를 향수와 불안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우리는 서둘러 밤길을 재촉했다.





“목표물은 저기. 첫번째라 힘들겠지만, 준수한 남자아이니까 힘을 내라구.”

“생각해줘서 눈물나게 고맙네요-”

그런대로 괜찮은 주택가에 위치한 이층집 2층 공부방에 그 아이가 있었다.

나는 소리없이 (소리를 낼 수도 없었지만) 방 창문으로 스며들어 동태를 살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듯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와 같은 16세 정도의 그 남자아이는 약간 곱슬기가 있는 잘 깎은 머리에, 인기 탤런트 정도는 아니지만 길 가다가 한번 정도는 눈길을 주게 될만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군살도 없고 운동으로 단련된듯 튼튼한 몸매를 지니고 있어서 더욱 돋보였다. 교복은 방 한구석의 옷장에 걸려 있었고 집에서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다.

방 안에는 전형적인 고교생의 공부방이 다 그렇듯 참고서와 교과서와 학습지와 고전소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고, 그 뒤편 어두운 세계에 록음악이라던가 스포츠 스타라던가 하는 취미와 관련된 물품들이 스리슬쩍 숨겨져 있었다. 벽에 일렉기타도 걸려있는 걸로 보아 밴드활동도 하나 보다.

특이한 점은, 책상 오른편 위에 앵무새가 한 마리 들어있는 새장이 걸려있다는 것과, 책상 위편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 액자가 몇 개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교복 차림으로 어떤 순진하게 생긴 단발머리 여학생과 단 둘이서 찍은 사진, 그리고 그 여학생과 또 한사람, 안경을 끼고 웨이브진 머리를 틀어올린 다른 여학생과 셋이서 찍은 사진이었다. 좋은 집에, 괜찮은 취미에, 여자친구까지. 대체 이런 자식이 뭐가 아쉬워서 자살을 한담?

나는 순간적으로 바리가 집을 잘못 알려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옷장에 걸려있는 교복의 디자인은...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흠 그렇구나, 내가 생전에 다녔던 학교의 학생이라니... 어쩌면 한번쯤은 복도에서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겠네. 역시 사람의 인연이란...

그나저나 좀 우울해 보이는 그 아이를 옆에서 보고 있자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역시 고민이 있는 건 사실인가보다.

“-여보세요? 응, 민아구나. 응? 아냐, 괜찮아. 그럼, 벌써 석 달이나 지났는걸.....”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중일 때만은 애써 쾌활한 척 하고 있다. 아무리 저렇게 연기를 해도 나는 절대 못 속이지. 나라도 저럴 테니까.

“그래그래. 시험도 끝났으니 내일쯤 만날까? 전혀 신경쓸거 없어. 그러고보니 정말 오랫만이지? 음, 그러면 장소는......”

그 아이는 전화를 끊고 책상 앞으로 다가와서 책상 위의 사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다시 침대 위에 쓰러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이 들었나 하고 가까이 가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아이가 괴로운 표정으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지?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거야? 왜 그렇게 슬픈 거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록 원통할 때가 없었다.

나는 그애의 표정이라도 좀더 잘 관찰하려고 거의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보니 침대 위에 누워있는 그애의 몸 위를 비스듬하게 덮는 듯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물론 사람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으니 별로 거리낄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순간, 나의 이해를 송두리째 벗어나는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엄청나게 빠른 제트코스터를 타고 장애물로 가득한 지하동굴을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것이 사실은 그 아이의 뇌세포를 이루는 뉴런과 그 사이를 통과하는 전기신호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이름은 기억 못하면서 생물 교과서에서 본 것만은 안 까먹다니...) 내가 빠져들어가고 있는 동굴은 바로 그애의 두뇌 내부였다.

그런 식으로 그애의 두뇌 속에 빠져든 내가 완전히 그애와 일치하는 시점을 갖게 되었을 때 - 절대로 내가 보았을 리가 없는 것들이 보였다.

-------휘리릭!

아까 사진에서 보았던 단발머리 소녀가 웃고 있었다. 장소는 바로 이 방이다. 그애가 새장 안의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고 칭찬을 하자, 기분이 좋아진 앵무새가 ‘정아 잘한다, 정아 친구다’라며 꽥꽥거리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그가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듯했다. 손에 든 비디오 카메라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가 이 순간을 찍으며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나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휘리릭!

장면이 바뀐다. 그가 학교 뒤편에 있는 풀숲에서 아까 본 안경 소녀와 몰래 만난다. 그런데 분위기가 약간 요상해졌을 때, 그 단발머리 소녀가 뭔가를 찾아서 풀숲으로 들어왔다가 두 사람을 보고 만다. 잠시동안 말없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둘을 보고 있던 단발머리는 곧 홱 돌아서서 달려가버리고 두 사람은 당황한다. 그들의 목적은 누군가에게 줄 생일선물을 뭘로 할까 의논하기 위해서일 뿐, 다른 뜻은 없었는데도. 그러나 소년은 흥분하고 당황한 나머지, 안경 소녀가 놀라는 척 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눈치못챈다. 그의 눈에는 분명히 그 광경이 비치지만, 그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다르다. 그리고 또한, 그 단발머리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휘리릭!

장면이 또 바뀐다. 먼 발치, 학교 옥상에 단발머리가 서 있다. 그는 비상문을 통해서 그쪽으로 달려가려 하는 중이다. 그녀는 이미 유서까지 써 놓고 뛰어내릴 결심을 굳혔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변명하며 어떻게든 막으려 한다. 그녀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며 그를 비웃는 표정을 짓고, 씁쓸한 얼굴로 난간 저편에 올라선다. 그가 점점 가까이 달려간다. 좀더 빨리, 좀더 빨리, 조금만 더 빨리! -아뿔사,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는 순간 단발머리는 낙화암 삼천궁녀처럼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작은 소녀의 실루엣이 점점 줄어든다. 줄어든다. 줄어든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린다.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머리가 깨진 시체. 시체. 시체. 시체.

그는 슬픔에 가득한 오열을 터뜨린다. 안경 소녀가 달려와 위로하지만 그녀에겐 역부족이다. 경찰이 입회하고 단발머리의 유서 내용이 공개된다. 아버지의 실직과 부모의 불화, 떨어지는 성적, 인근 학교 불량소녀들의 괴롭힘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안다 -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이유 하나는 빠져 있다는 것을. 자기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그녀를 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는 한없는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그것이 눈물의 정체였다.

-------파파팟!

마치 백일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는 소년의 의식을 빠져나와 본래의 유령과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 방금 건 대체 뭐였지? 이런 현상에 대해선 바리 씨는 아무 설명도 안해줬는데! 어쨌든 소년이 슬퍼하는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든 도움을 줄 수 있겠...

잠깐만,

머리가 깨진 시체......?

나와 같은 학교.......

석 달 전의 사건......

그럴리가.

아닐거야. 우연이겠지. 요즘 자살자가 얼마나 많은데. 같은 학교 학생이 며칠에 걸쳐 따로따로 죽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닐거야. 절대 그럴리가...

정신이 혼란해져 침대 쪽에서 물러나서 벽 거울 옆을 지날 때였다.

바리 씨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 모습은 거울에 비칠 수 있다고. 사람들 눈에 보일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우리 자신의 눈에는 보이겠지. 그렇다면-

-맙소사......

내 앞의 거울 안에는 바로 그 사진 속의 단발머리 소녀가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다행히도 머리가 깨진 자국같은 건 없었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아니기를 바랬는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창문 쪽으로 걸어갔고 그러다 실수로 새장에 손이 닿았다.

그 순간 앵무새가 뭔가를 느낀 듯 소리쳤다. “정아! 정아 친구! 정아 방가!”

-시끄러워!

울다 지쳐 잠든 남자아이가 그 소리에 놀라 일어났고 나는 창문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참담해서 바리 씨의 조나단식 이동법 따위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 자리를 어떻게든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앵무새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아이의 슬픈 눈이 계속 생각났다.

-엿이나 먹으라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바리 씨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배연기로 도넛을 만들 뿐이었다.

“충격요법이지. ---어때, 기억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차차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비참해요.”

“하긴, 다시 떠올려서 좋은 기억이라면 무의식이 거부할리 없었겠지...”

“이제 난 어떡하면 좋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탈하거나 스틱스 강을 통해 포맷되는건 너무 억울하고, 이대로 저 아이를 지켜본다는 것도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요. 다 당신 때문이에요.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빠뜨려서 대체 뭘 어쩌실 작정이었죠?”

“말했지? 난 도와줄 뿐이라고. 앞으로 어떡할지 결정하는 건 너야.”

“책임회피로밖에 안 들리는데요.”

“그런 너야말로 지금도 계속 도망다니고만 있잖아. 안 그래?”

“............................”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도 기가 막혀서 울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과거를 떠올려서 이런 나쁜 기억밖에 없다면... 난 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내가 어떤 상태이든간에 바리는 냉정하게 이렇게 덧붙였다.

“아직 내가 맡긴 첫번째 업무는 끝난 게 아니야. 그애를 잘 지켜보라구.”

“하루가 지났는데도요? 그애가 죽는거 맞아요? 착각 아니고요?”

“난 ‘그애가’ 죽는다고는 말 안 했어.”

“............................?”

“가 보라구. 난 여기서 기다릴테니까. 다이브dive 요령을 잘 기억해 두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나는 그애가 전화로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를 떠올리고 그곳을 마음속에 상상했다. 나도 생전에 자주 가던 공원이었다. 시원한 나무그늘과 솜사탕 장수와 개미지옥이 명물인... 우와! 이렇게나 많이 기억해 내다니. 하여튼 다음 순간 나는 그 공원 한복판 분수대 위에 있었다. 실체가 없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흠뻑 젖을 뻔 했다. 옷도 이거 한벌뿐인데.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 별로.”

이런 상투적인 대화를 아직도 쓰는 인간들이 있나 싶어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더니 바로 그 소년과 사진 속의 안경소녀였다. 민아라는 이름은 이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었나.

내가 지켜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가까운 벤치로 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즐거운 듯한 얼굴로 평범한 화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금방 지루해졌다.

세심하고 말수도 적당한 소년에 비해서 안경소녀는 그다지 대화에 재주가 없어 보였다.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곧 원점으로 돌아와 뱅뱅 맴도는 걸 보니 속이 다 터졌다.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긴장해 있어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까지 있었으니 말 다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그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있었다. 소녀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의식하게 되고 분위기는 더 어색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윽고 벤치에서 일어선 두 사람은 공원을 나서서 큰길가로 접어들었고, 소음이 심해져서 나는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소녀가 뭔가 중대한 고백을 하는 건 알 수 있었다.

“난 정말로-<차바퀴 소리>-아, 안되겠어?”

“나도 네가-<경적 소리>-. 우린 좋은 친구잖아.”

“난 친구로서 만족할 수-<애 우는 소리>-. 난 좀더 다른 얘기를 하고싶어!”

“무슨 의미야? 난 아직---<생선장수의 확성기 소리>--”

“삼년상이라도 --<야구중계>--겠다는 거야? 나도 내가 언니보다 못한 거 알아. 하지만 -<또 경적 소리>-에 계속 괴로워하다가 네가 잘못되는--<개짖는 소리>-않아! 언니는 죽었어. 이젠 돌아오지 않는다구. 나만 -<경관의 호루라기>-는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네 몸이라도 생각-<뭔가 깨지는 소리>--!”

어,어,어, 언니라고라? 저 숫기라곤 하나도 없고 말빨도 딸리는데다 순 지만 잘난줄 아는 기분나쁜 괴물이 바로 내 동생이었단 말이냐앗~!!!

“난...........................”

그때,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소년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견디다 못한 안경소녀는 토라진 얼굴로 돌아서서 횡단보도에 올라선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신호등이 다시 빨간불로 바뀌고, 큰길 저편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화물 트럭이 미처 소녀를 보지 못하고 달려오다 급정거한다-!

“-----------민아야!”

엄청나게 짧은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나는 우선 재빨리 소년의 몸에 접근하여 그애의 의식에 다이브했다. 그리고 그의 의지를 나타내는 주파수를 나의 의지와 일치시켜 그애가 민아를 향해 몸을 날리도록 적절한 충동[衝動]을 입력하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길가 철물점에서 팔던 철강 와이어를 연결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단단한 쇠밧줄을 만들고 그것을 트럭의 뒷부분에 연결하여 길 양옆의 전신주에 걸리게 만들었다. 공포에 질린 민아에게까지 어떤 손을 쓸 여유는 없었다. 타이밍이 제대로 맞아떨어지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2초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환호성이 들리자 비로소 눈을 떴다.

-해냈어!

트럭은 철사에 걸려 횡단보도의 1/2을 넘어선 지점에서 멈췄고, 소년은 민아를 껴안은 채 그로부터 0.5m 떨어진 곳에 아슬아슬하게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신호등이 원래 파란불이었고 교통량이 많지 않은 시간대라 다른 차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자살이 아니잖아? 어째서......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트럭 쪽을 바라본 나는 뒤쪽 짐칸에 날개를 펼친 바리 씨가 능청맞게 걸터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또 나를 가지고 놀았어! >_<

그런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횡단보도 위에 나동그라진 소녀와 소년은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로의 얼굴을 다소 수줍은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 지켜보는 내가 다 답답했다.

“야 이것들아! 그만큼 멍석을 깔아줬는데 아직도 그러고들 앉았냐! 진짜 답답해 미치겠다!”

이렇게 소리질러 봐야 들리지 않을테니 좀더 재미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나는 겁에 질린 토끼같은 얼굴로 주저앉은 민아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의식에 포로롱 다이브했다. 나의 의식이 그녀의 의식과 동조했다. 나의 감각이 그녀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나의 의지가 그녀의 의지를 이끈다. 옳지, 언니 말을 잘 듣다니 착한 동생이구나.

나는 민아의 입술을 통해 소년의 떨리는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지하게 억울했다. 이 망할 것들~! 난 생전에 한번도 못해 본 이 이벤트를 너희들은 이렇게나 진하게~! >_<

결국 결심을 내린 듯 소년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민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정아를 잊지 못하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 때문에 괴로울 거야. 나에겐 책임이 있으니까.”

민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정아를 그리워하는 마음 못지 않게, 민아에 대한 감정도 좀더 키워나갈 여유가 생길 거야. 나 노력할게. 정말로 열심히 노력할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겠니?”

그제서야 그의 말을 확실히 이해한 민아는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노을이 깔리는 동네 길목으로 다정하게 걸어갔다.

아직은 역시 다소 어색하지만 말야♥



10



“일부러 그러다니 나빴어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람을 골탕먹일 수가?”

“내 방식이 어떤지는 이미 알고 있을텐데.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구.”

“바리씨 생전에 폭주족이나 갱단 두목이었죠? 틀림없이 그럴거야.”

나는 여전히 한방 먹은 기분에 사로잡혀 뾰로통해 있었다. 바리는 여전히 무감동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며 내 등을 가리켰다.

“남 원망할 시간 있으면 자기 몸이나 살펴.”

“에에?!”

-아니 이럴수가!

날개가 돋아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 씨만큼 찬란한 백금날개는 아니었지만, 조그맣게 접은 매미날개처럼 보이는 황금색 빛살이 확실하게 나의 등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뭔가 엄청 이득 본 기분! >_<

-아아,

  ‘스스로 찾아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날개를 얻은 기쁨보다도, 깨달음에 대한 뿌듯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바리 씨는 정말 최고의 스승이야! 이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잘 할 수 있을 듯한...

해롱해롱거리며 등에 손을 뻗어 어거지로 날개를 어루만지려는 나를 보고 바리 씨가 혀를 끌끌 차더니 이렇게 말했다.

“근데 말이지, 그거 제대로 관리하려면 비용 좀 들거야. 광택제도 필요하고.”

“엣, 광택제? 그런게 왜 필요해요? 우린 비물질이라며요?

“전자기로 되어 있으니까 먼지가 많이 달라붙는다구. 골치아파.”

“그, 그건 또 얼만데요?”

“ 2800만 헤븐. ”

“좀 꿔주세요. 취직하면 갚을게요.”

“일해서 벌어. 마침 가디언 신규채용 시즌이니까.”

아까 한 말 취소다. 바리 씨는 정말 남 생각은 조금도 안하는 철면피에 쪼잔하기 그지없는 구두쇠다아~!!! 우우우 나의 미래는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T_T

“-그건 그렇고, 본명을 알아냈잖아? 이름은 그대로 쓸 거야?”

“바리 씨, 본명?”

“아니.”

“그럼 나도 하나 만들거예요! 질 수 없엇!”

“그런걸 경쟁심갖고 하냐.”;;;;;;

“소원하던 날개를 드디어 얻었으니 그 기념으로... <나래> 어때요?”

“본명보다 더 촌시럽군.”

“캬악~~~~~~~~~~~~~~!!!!!!!!!”

잘은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쁘지 않은 미래일지도 몰라.

일단은.





THE END!





(C) ZAMBONY 2003.05.17.



:
위로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RSS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