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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21] 지구를 제껴라!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0
 



<< 지구를 제껴라! >>

Take Over This Planet







“불결한 곳이군. 이런 곳은 난생 처음이로다.”

트로메․라비네르․일․네리사 13세가 레이스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15세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트로메는 의젓한 태도와 약간은 거만스런 품위를 체득한 소위 ‘귀하신 몸’이었다. 머리에는 찬란히 빛나는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관을 쓰고, 마치 중세의 승마복과도 비슷한 활동적이면서도 고급스런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바닷속에서 흐늘거리는 해초를 연상케 하는 짙은 초록색이었고, 두 눈은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영리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공간이동을 해 온 두 수행원은 어떻게든 그녀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왕녀 전하, 좀더 민도가 높은 곳을 찾아서 목표로 삼으시는 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시종장인 테오디스․루바나크가 앞으로 나와 진언했다. 숫기없고 키만 멀대같이 큰 20대 중반의 은발 미남인 그는, 평소엔 얌전하다가도 한번 꼭지가 돌아가면 물불을 안 가리는 주인의 행동을 보살피느라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참고로 사람들에게는 어째서인지 ‘오디’라는 ‘매우 만만한’ 별명으로 불린다.

“시끄럽다! 무릇 정복이란, 미개하고 우매한 것들을 우월한 문명의 힘으로 사정없이 내리누르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길일진저. 아직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물러서려 하다니 자네는 어이하여 그리도 패기가 없단 말인가?”

“전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미천한 것이 그만 실언을 했사옵니다. 망극하옵니다.”

오디는 말 잘못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고 쪽박만 깬 꼴이 되어 슬금슬금 다시 뒤로 물러났다. 제길 대우가 좋다고 해서 멋도 모르고 떠맡은 자리가 하필이면 렘브리아계에서도 소문난 말괄량이 왕녀의 수발이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무래도 이번에 귀환하면 그냥 궁정 정원사 자리나 다시 알아봐야...

“마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이 애초의 목적지와 일치하는지 확인하라!”

묵묵히 옆에서 오카리나를 닮은 휴대용 컴퓨레터를 체크하고 있던 왕실 비서 엘마이다․파라비스타가 별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보고한다. 초콜릿색 피부와 은은한 윤기가 흐르는 붉은 머리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보통 키의 여성이었다.

“틀림없이 일치합니다. 소벨리오계 제3행성 바시스... 이곳 주민들은 ‘지구’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만... 그 위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 어느 반도국가의 중심 도시입니다. 생활 수준은 매우 척박하고 주민의 불만이 꽤 거센 편입니다.”

그들이 이동한 곳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도시 한구석의 폐품 처리장이었다. 시간대는 어슴푸레하게 사방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녘이다. 사방에 널려 있는 망가진 전자제품과 플라스틱 쪼가리들을 한심하다는 눈길로 돌아보던 트로메는 보고를 듣고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실습을 시작할 수 있겠군. 미리 봐둔 집무실로 가자!”

뒤에서 쭈뼛쭈뼛하고 있던 오디가 다시 나서서 한마디 한다.

“그런데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어째서 하필 이 변두리 행성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도가 낮고 별로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 지역입니까? 약간만 시야를 넓혀봐도 상당히 장래가 촉망되는 지역이 널려 있사옵니다만...”

트로메는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기려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한껏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시종장을 돌아보더니 위엄을 잃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평생 시종장밖에 못하는게다, 오디. 자네가 말한 그 잘난 지역들을 먼저 공략한다면 보나마나 전 행성은 물론 다른 별에서 온 실습생들의 눈길을 끌게 될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런 지역들은 이곳 주민들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느정도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을 터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최소의 인원과 노력으로 정복을 하려는 판에 그런 곳을 먼저 공격했다가 크게 실패라도 하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물론 책임 못지지요.”;;;;;;;

“그럼 군소리 말고 나를 따르라! 또 다시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면 젤라누스로 5백년 귀양을 보낼 줄 알도록!”

“.......모든 것은 전하의 뜻대로.”

오디는 더더욱 움츠러들어 아예 껍질 속으로 들어간 달팽이처럼 처량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은 처리장을 빠져 나와 인적 없는 차도로 접어들어서 한참동안을 걸어갔다. 트로메가 위풍당당하게 앞서고 수행원 둘이 약간 떨어져서 뒤를 따라갔다. 벌써부터 다리가 아파진 오디가 마이다에게 속삭였다.

“이러지 말고 그냥 집무실까지 공간이동하면 안되는 거야?”

“처음에 전하가 좌표 계산식을 착각하는 바람에 이동을 엉뚱한 곳으로 좀 많이 했었잖아. 그 때문에 오늘 사용할 수 있는 제국 캐쉬백 포인트가 얼마 없어.”

“성은이 망극할 일이로군!”

“인내심을 가져. 그게 당신이 할 일이잖아?”

적갈색의 롱 코트를 휘날리며 의젓하게 걸어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 오디가 더욱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나저나 도대체 왜 갑자기 때이른 정복 타령이래? 전하는 제대로 지도자 시험을 치르려면 아직 몇 사이클은 더---”

“한마디로 말해서 사기를 당했거든.”

“사기?!”

“전번에 왕실 아카데미에 초빙 강사로 온 브리드 잔더라는 양반 있잖아.”

“있었지.”

“선택과목으로 <우주정복론>을 가르쳤는데 별로 인기가 없었는지 교습비 전원 무료라는 파격적인 광고를 때렸고 우리 왕녀님이 거기 꼴딱 넘어갔지. 그런데”

“그런데?”

“<교재비 별도>였대.”

“아니 그럼 도중에 다른 과목으로 바꾸면...”

“학기 다 끝날 때쯤 밝히고, 교재를 구입 안하면 학점에 반영이 안된다고 협박한 게지. 당연 교재비는 다른 수업의 교습비를 훨씬 넘는 고액이었고.”

“그럼 그 수업 들은게 아까워서 휴가까지 내고...?”

“어떻게든 본전을 뽑겠다는 생각이야, 전하는.”

“...............................;;;;;;”

오디는 사태의 어이없음을 새삼 깨닫고 말문이 막혔다.

“-빨리들 안 오고 잡담만 할 건가?”

“아, 예. 가옵니다. 가고 말굽쇼-”

주인의 재촉에 두 마리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가는 두 사람이었다.





태양이 은은하게 빛나는 일요일!

“무릇 한 세계를 정복하는 데에는 그 주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한정된 시간 안에 물자와 노동력을 사방으로 효율좋게 이동시켜 주는 수송수단이다. 같은 수송수단이라 해도 그 규모와 활동범위는 천차만별인데- 음, 그렇지! 떠올랐다 떠올랐어! 내가 생각해도 정말 멋진 계획이야! 마이다! 오디! 썩 이리 나오거라!”

브리드 잔더의 「정복공부 절대로 하지마라」 제3장을 기세좋게 읽어내려가던 트로메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수행원들을 불러냈다. 집무실이랍시고 겨우겨우 빌려서 며칠 밤을 샌 끝에 그나마 보금자리처럼 꾸며놓은 커피전문점 2층 방에서 밀린 잠을 자던 마이다와 오디는 잠이 덜 깬 눈을 하고 겨우 기어나왔다. 마이다는 그나마 쿨한 표정에 단정한 네글리제 차림으로 방문 틀에 손을 대고 우아하게 서 있었지만 오디는 흐트러진 잠옷에다 곰인형까지 끌어안고 머리에는 까치집을 짓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비실비실해서 쓰나! 이제부터가 정복의 첫걸음이다!”

“......저....전하...... 그렇게 말씀하셔도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아함”

“....전하께는 면목없는 일이옵니다만... 반나절은 생활비 벌러 알바하고 반나절은 집안일 하느라 요 일주일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잤습니다요. 좀 봐주시면...”

“엄살이 심하군! 나 또한 그동안 밤을 새워가며 그동안 배운 걸 복습하고 연구해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정복을 진행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단 말이다. 까놓고 말해서 쉬고 싶은 마음이라면 내가 더할 것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라. 우리의 정복활동이 빨리 끝날수록 이곳에서의 힘겨운 생활도 더 빨리 마무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네들의 수고를 한시라도 신속히 끝내주고자 하는 나의 이 하해같은 마음을 왜 몰라주는 겐가!”

아전인수격인 트로메의 역설에 감동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두 사람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재빨리 외출준비를 끝낸 트로메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질렀다.

“강요는 하지 않겠다. 자네들이 갈 수 없다면 나 혼자라도 가야겠지!”

“히익- 아닙니다 농담이었습니다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혹시나 엉뚱한 일로 왕녀가 다치기라도 하면 자기들의 신상에도 안좋다는 걸 잘 아는 두 사람이었기에, 한번 발동이 걸리자 엄청 빨리 준비를 끝냈다. 그들은 전날에 먹다 남긴 목성비빔찌개와 말라붙은 햇반을 적당히 데워 안 넘어가는 식사를 억지로 마치고, 한 벌뿐인 지구에서의 외출복을 꺼내어 분자[分子] 다리미로 대충 손질한 뒤에 어지러운 방을 하는듯마는듯 정리하고 열쇠를 굳게 잠근 뒤 집을 나섰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가시는 것이옵니까?”

오디가 졸린 눈을 비비며 공손히 질문했다. 낮 동안 집무실을 지키다가 밤에는 싸구려 나이트클럽의 웨이터를 맡아 발에 불나게 뛰고 있는지라, 지구에서의 외출복 또한 쫙 빠진 연미복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버스’라는 것부터 공격한다!”

“버...버스 말입니까?”

선글라스로 얼굴을 감춘 마이다가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반문했다. 밤에 집무실을 지키고 낮에는 향수가게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만큼, 수수하지만 세련된 블라우스와 플레어 스커트 차림에, 목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들어간 스카프를 매고, 머리에는 코브라 무늬가 들어간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대중 교통수단인 모양이더군. 그 버스라는 것을 장악하면 원주민들의 발을 효과적으로 묶어놓고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만하면 알겠지?”

머리에 파란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뺨에는 홍조를 띤데다가 꽉 붙는 쫄청바지와 동물그림이 그려진 캐주얼 티셔츠까지 입은 트로메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듣는다는 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누가 보면 삼촌 부부가 어린 조카딸을 데리고 외출하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평범한 3인조였다.

외모나 입은 옷들이 다소 언밸런스해서 문제긴 해도.

“하지만...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그 버스라는 것은 한 대가 아니라 이 시내에만 해도 수백 대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 셋이서 그걸 다 장악합니까? 무슨 방책이 있으신지요?”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는 마이다가 날카롭게 질문한다.

“으음 핵심을 꿰뚫는 예리한 지적이야. 나도 그 테라넷이라는 물건 덕분에 기본적인 것은 일주일 동안 다 조사해뒀지. 물론 우리의 한정된 인원수로 그런 대규모의 작전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난번 바겐세일에서 산 이것이 있지 않은가!”

녹음이 울창하게 우거진 신작로를 걸어가며 트로메가 뭔가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인스턴트 솔저 모듈 <나와라 일반병>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이것만 있으면 1회에 3백명을 넘는 클론 병사를 즉석에서 양산하여 침략에 이용할 수 있지. 일단 우리 셋이서 버스 하나를 시범 케이스로 삼아 납치하는 과정을 연습한 뒤에, 그걸 프로그램화하여 이 모듈에 입력한 다음 병사를 생산해서 시내 전역에 풀어놓으면...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다! 아 이건 어제 배운 여기 속담인데 무지하게 쉽다는 뜻이지. 아마도 여기 원주민들은 일어나서 음식을 먹는 것보다 누워서 먹는 게 훨씬 소화가 잘 되는 모양이다.”

“속담이야 어떻든... 참으로 훌륭한 계획이시옵니다! 역시 전하의 일이라면 안심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게 틀리지 않았군요!” (......진짜?!)

속보이는 아부를 늘어놓으면서도 속으로는 걱정이 태산인 오디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벼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보조를 맞추던 마이다는 빌딩가로 접어들었을 때 약간 신경쓰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어느 건물의 거울처럼 맑은 유리창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친 것이다.

문제는 그 그림자는 건물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밖에 서 있던 누군가가 비친 것처럼 보였음에도, 정작 그 창문 앞에는 사람이라곤 없었다는 점이었다. 대충 보아하니 그 그림자는 긴 생머리에 담배를 피워문 키큰 여자와, 그녀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교복차림의 단발머리 여학생인 듯 했다.

“....................???”

그러나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떠 보니 그림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기분 탓인가.......’

마이다는 더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일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저, 전하, 대체 언제 시작하는 겁니까! 벌써 세시간도 넘게 왔는데요!”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며 애써 균형을 잡느라 고생하는 오디.

“조용히 해! 지금 생각 중이잖아. 도대체가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제대로 움직일 공간도 없으니... 어떻게든 이 원주민들이 빨리 내리길 빌어야지!”

키큰 인간들의 숲에 둘러싸여 빽빽 소리지르며 얼굴을 찡그리는 트로메.

“이곳의 표현으로는 <콩나물 시루>라고 하더군요. 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도 학구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 침착하게 사전을 찾아보는 마이다.

겨우 6시간 15분만에야 사람들의 물결이 빠져나가고 버스는 다소 조용해졌다. 빛나던 태양도 서쪽으로 꼴깍 넘어가고 시간은 어느덧 한밤중이 되었다.

“좋아, 다음 정거장에 닿기 전에 앞으로 나가서...”

“2분 남았습니다. 차가 막히지 않으면 1분 48초 안에 도착할지도.”

“먼저 복장을 바꾸고 파괴무기를 꺼내어 운전자를 위협하고...”

“승객들의 기선을 제압한 뒤 차를 지정한 장소로 몰아가게 한다 이거군요!”

“이제부터의 활동을 컴퓨레터에 빠짐없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만들도록 해.”

세 사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쑥덕공론을 듣고 있던 뒷자리 아줌마가 별 괴상한 인간들도 다 있네 라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안고 있던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다음 정거장이 가까워지자, 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운전석 옆까지 살금살금 다가가서 일부러 헛기침을 한 다음 어색한 손놀림을 취해 보이며 손목에 걸고 있던 기계의 스위치를 눌렀다. 세 사람의 복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서부 개척 시대의 기병대를 연상케 하는 렘브리아 왕실 스타일로 전환[轉換]되었다. 그러나 마이다는 속으로 이 옷을 분자전송하느라 또 몇점이나 포인트를 까먹었을까 저도 모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트로메가 가슴에서 파괴력 만점의 디플라스크 건을 꺼내들고 위압적으로 소리질렀다.

“지구의 우민들이여 잘 들어라! 이제부터 이 교통수단은 우리 위대한 렘브리아-마르세스 성간[星間]대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감을 선언하노라! 그대들은 이 행성 위에 대대적으로 행해질 영광스런 진출의 프로세스를 몸소 체험하는 첫번째 기회를 맞..................우켁!”

기사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음 커브에서 거칠게 차를 급회전시키더니 정거장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에 차를 세우고 손님을 계속 태웠다. 차가 급회전할 때 미처 대비하지 못한 트로메는 휘청거리며 뒷문 쪽으로 엎어졌고 당황한 수행원들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필사적으로 바둥거렸다.

“저저저, 전하! 조심하십시오! 그쪽에는 기둥이!”

“무어라? 아이규규규!”

그러나 때는 늦어서 이미 왕녀의 이마에는 커다란 혹이 생기고 말았다. 오디는 3개월 감봉을 입 속으로 되뇌이며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어찌어찌해서 마이다의 부축을 받고 겨우 다시 일어선 트로메는 연설을 계속하려 했으나 기사가 차를 출발시키다 말고 또 다시 차를 세우는 바람에 이번에는 운전석 옆 보호대에 키스를 하고 말았다. 기사가 차를 세운 것은 정거장에서부터 헐레벌떡 쫓아온 두 명의 남자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태도가 어째 좀 수상쩍었다.

“어 취한다 <끄윽> 뭐야 이거? 태우지도 않고 그냥 가다니 <끄억> 사람 무시하는거야? 앙!”

......그들은 우주인보다 무섭다는 전설의 취객이었다!

그것도 손에는 마시다 만 잼보니 병을 들고 마구 휘둘러 대는!

“<히끅> 이봐 아저씨, 시민의 발이 <딸꾹> 시민에게 그러면 정~말 안되는거쥐~ 어이, 무시하지 말고 이쪽 좀 보라니까! <꾸루룩>”

상황을 파악 못한 자칭 침략자 3인이 멀뚱한 얼굴로 바라보는 동안에 취객들은 요금함과 버스 안 여러곳을 구둣발로 뻥뻥 차더니 급기야는 운전석으로 달려가 애써 외면하려 하는 기사를 끌어내서 멱살을 잡고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운전대가 제멋대로 돌아가고 버스가 콘트롤을 잃은 채 엉뚱한 방향으로 마구 달려가기 시작, 공포에 질린 승객들이 비명을 지르고 젊은이 몇이 달려나와 취객들을 말리려 하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를 않는다.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되어간다...





“전하, 이쪽으로 피해 계십시오.”

가장 먼저 침착을 되찾은 마이다가 트로메를 운전석 뒷자리로 모신 뒤에 자기는 운전석에 올라타고 차를 멈추기 위해 이것저것 다 만져보며 노력을 거듭한다. 오디는 어느새 싸움에 끼여들어 취객들을 기사한테서 떼어놓으려 하지만 역부족이라 뒤로 나동그라지고 만다.

생각지도 않은 일로 계획이 틀어져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트로메는 마이다가 예상외로 고전하자 분통을 터뜨린다.

“마이다, 빨리 제동을 걸지 않고 뭐하는 겐가?”

“유감스럽게도 제동장치가 때맞춰 고장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전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에에이, 저리 비켜. 제동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어쩌시려고요, 전하?”

“문을 열어다오. 강제로라도 멈추게 하리라.”

“너무 위험하옵니다! 차라리 오디에게 시키시는 편이...”

“나더러 부하를 위험에 빠뜨리라는 겐가?”

“.......................”

마이다가 말없이 레버를 조작하여 앞문을 열어주자, 트로메는 길다란 코트 깃을 망토처럼 나풀거리며 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버스 옆면에 몸을 단단히 고정시킨 뒤 디플라스크 건을 꺼내어 앞바퀴를 겨냥했다. 잠깐동안 호흡을 고른 뒤 조준이 맞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방아쇠를 당긴다! 뻗어나온 반양자[反陽子] 빔이 나선형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서 타이어를 픽 하고 터뜨린다.

그녀는 뒤이어 자력 슈즈로 버스 표면을 딛고 바깥으로 완전히 나왔다. 중력의 방향과 수직을 이룬 채 엄청난 공기의 흐름을 받아가며 조심스럽게 걸어가서 뒷바퀴에도 같은 동작을 되풀이, 버스의 한쪽 바퀴 두개를 전부 무력화시킨다.

버스 안으로 다시 돌아온 트로메는 다음 지시를 내린다.

“오디, 자네는 저쪽 창문을 통해서 남은 바퀴를 파괴하게!”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취객의 주먹에 몇대 깨진 채 울상이 되어 있던 오디는 낑낑대며 뻑뻑한 창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몸을 쑥 내민 뒤 허리에서 비커프 건을 꺼내어 바퀴 두개를 순식간에 터뜨렸다. 소년시절 궁정 연례 사격대회에서 일등상을 휩쓴 솜씨도 아직은 쓸만했다!

바퀴 네 개가 완전히 나간 덕분에 차의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뒤편에서는 취객들과 승객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대혼전을 벌이고 있다. 기사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는지 자리에 엎어져서 승객 몇몇이 필사의 인공호흡과 심장 마사지를 시도한다.

트로메는 스피드가 떨어진 것을 놓치지 않고 마이다에게 단호히 지시한다.

“가장 피해가 적을만한 방향으로 차를 돌려서 안전한 곳에 처박히게 해!”

“잘못하면 우리도 다 죽습니다, 전하! 차라리 놔두고 공간이동하는게...”

“원주민을 헛되이 죽게 하는 건 진정한 정복자의 자세가 아니다!”

“결과가 어찌되어도 전 모릅니다!”

침착한 마이다가 이런 소리를 내뱉을 지경이니 꽤 심각하긴 했나보다.

하여튼 그녀의 운전으로 방향을 돌린 버스는, 바리케이드 열두 개와 주인없는 포장마차 세 대와 휴지통 일곱 개와 자전거집 하나와 장식용 불상 네 개를 박살내고 서서히 속도를 떨어뜨린 끝에 어느 수목원 입구의 나무들 사이에 처박혀서 마침내 멈췄다. 승객들이 환호성을 올렸고 뒤늦게 달려온 경찰들이 차에 올라타 취객들을 연행해 갔다. 밖에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로 가득했다.

트로메는 만족한 얼굴로 마이다를 칭찬하고 이젠 자기들을 바라보는 원주민들의 눈길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며 차에서 내려섰다. 그러나 천신만고끝에 다시 깨어난 기사 아저씨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 밖으로 나와서 엉망진창이 된 차를 보고는, 뜨악한 얼굴로 외쳤다!

“이런 우라질! 차가 완전히 걸레가 되었잖아그려! 그냥 뒷문 옆에 비상 레버만 하나 당기면 되는 걸 왜 이지경으로 만들었누!!!”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마이다와 오디는 감사할줄도 모르다니 정말 배은망덕한 종족이라며 길길이 날뛰려는 트로메를 꽉 붙들고 그녀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채 밤의 어둠 속으로 잽싸게 줄행랑을 쳤다.





“그로부터 3개월.”

오디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이다에게 말했다.

“정말로 많은 침략활동을 벌였지만 도대체가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다니.”

마이다가 컴퓨레터로 일정을 정리하다가 게슴치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만 말하지 마. 전하도 나름대로 노력한 거라구.”

오디는 한구석 침대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왕녀를 힐끗 바라보고 말했다.

“노력의 방향성이 문제라는 거야, 내 말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버스는 이제 잊어버리자, 제군. 뉴스를 보아하니 요즘은 그 지하철인지 뭔지 하는 것이 버스를 밀어내고 유망한 교통 수단으로 떠오르는 모양인데, 이번엔 그쪽을 공략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조망하는 바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그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소 한산한 시간대의 지하철을 골라 잡아타고 성공적인 침략 패턴을 실현하여 데이터를 수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곳에도 의외의 방해꾼은 있었다. 그들이 전투복을 전송받아 일장연설에 들어가려 할 때였다.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쉽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의심하며 길잃은 어린양들을 미혹하는 무리들은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지니~ 구원받는 길은 오로쥐 믿는것 뿐입니다! 자 따라하십시오. 믿~슙니다! 할렐루야!”

성경을 옆에 끼고 종말이란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푯말을 든 아저씨라던가,

“말리지 마! 죽어버릴거야! 장애인이라고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우워어어어!”

“쓰러뜨려! 병을 뺏아! ......빨리 역무원을 불러와! ......언제적 일이라고 아직도 모방범죄야!!!”

페트병에 수상한 약품을 담고 와서 불을 붙이며 위협하는 괴인이라던가,

“............................................................”

아무 말없이 (혹은 음악을 연주하며) 전단을 나눠주거나 우라지게 비싼 껌을 파는 쪼그라진 맹인들이라던가,

“자~ 우리모두 광화문에 닿기 전에 연습하죠!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한산하던 차 안을 가득 메우고 뭔가를 응원하러 가는 엄청난 인원들이라던가,

하여튼 그런 사람들의 물결로 인해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힘만 낭비한 채 쫓겨나오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트로메는 끈질기게 다음 목표를 찾아내었다.

“인원의 수송만큼 중요한 것은 물자의 원활한 이동이다. 그것은 평시에나 전시에나 상관없이 사회의 모든 분야를 활성화시키고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른바 ‘물류’라고 불리는 이 분야를 장악하는 것 또한...”

브리드 잔더의 「세계정복 길라잡이」 제11장을 읽고 감명을 받은 이 어린 왕녀는 재빨리 부하들을 이끌고 중부 고속도로로 달려나가 물자를 수송하는 컨테이너 트럭을 습격하는 작전을 세우고 의기양양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째서인지 이틀이 지나도록 한대의 컨테이너도 지나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기던 오디가 지나가던 용달차를 세우고 물어보았다. “혹시 왜 컨테이너가 다니지 않는건가 아십니까?”

“소식이 깜깜하군. 지금 운수조합이 집단으로 운송거부 투쟁중이우.”

“에엣?! 그럼 혹시 그게 언제 끝날지 아시나요? 저희는 며칠내로 트럭을 습격해야 하는데...”

“뭔소린지 모르겠지만 쉽게 끝날지 어떨지 나도 모르겠수. 며칠 더 있다 오는게 좋을거요. 지금 그것 때문에 수출이 올스톱되어서 난리라고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아참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벌금 물어요.”

“................................”;;;;;;;;;;;;;;;;;;

이리하여 물류 장악 작전도 멋지게 실패했다.

하지만 트로메는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왕족이었다.

“문명을 구축한 지성체의 경우, 한 사회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다 자라서 경험과 지식을 쌓은 성숙체[成熟體]들이지만, 그들의 예비과정으로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유생체[幼生體]들 또한 나름대로 중요하고 비중있는 구성원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을 장악하여 공포심과 복종심을 심어준다면 정복에는 그만한 지름길이 없으며...”

브리드 잔더의 「촌놈 다스베이더, 우주정복을 배우다」 제8장을 읽고 감명을 받은 트로메는 당장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가까운 학교 근처로 출동했다. 다수의 학생을 상대하는 것은 버스나 지하철 작전의 실패도 있고 하니 삼가기로 하고, 일단 약해보이는 학생 한두명씩을 공략하는 패턴을 실험하기로 했다.

그러나 목표 학생이 으슥한 곳을 걸어가는 걸 잡으려 할 때에...

“야, 말라깽이! 이런 길로 가면 우리가 못 잡을 줄 알았냐? 지난번에 바치라고 한 세금은 언제 줄거야? 자꾸 이런식으로 떼먹으면 왕언니가 가만 안있는다는 거 잘 알텐데?”

“미, 미안해...... 지금 집에 돈이 없어서... 조, 조금만 더 기다려주라...”

“얘들아, 들었냐? 기다려 달랜다. 내참. ....이런 년은 본때를 보여줘야 해!”

입에 담배까지 꼬나물고 이마에 ‘나 불량하오’라고 써붙인 듯한 짧은 치마의 패거리들이 나타나 목표를 새치기해가고 말았던 것이다. 목표물이 가방을 빼앗기고 할큄을 당하고 실내화로 마구 두들겨맞는 것을 보고 열받은 트로메는 부하들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서 당당하게 꾸짖었다.

“한창 나이의 처자들이 이게 무슨 짓들인가? 청소년은 행성의 미래라고 하였거늘 좀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같은 또래를 괴롭히고 잔인한 짓이나 하고 있다니 부끄럽지 않은가? 당장 그 아이를 괴롭히던 손을 거두고 정중하게 사과하라!”

“이건 또 뭐야? 서커스단이 동네에 들어왔나? 얘야~ 언니들 일에 끼여들지 말고 저리 멀리 꺼져라 훠이 훠이~”

“이런 무례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트로메가 허리춤에서 에페 드 루미에[光劍]를 빼들고 그 무례한 처자들과 맞장뜨려 하자 뒤에서 달려나온 수행원들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리고, 하나 둘씩 구경꾼도 몰려들어서 좁다란 골목길이 순식간에 와글와글.

그러나 그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에게 누군가 다른 인물이 접근한다. 30대 초반의 미끈하게 생긴 회사원이었다.

“학생, 착하게 생겼군. 무거워서 그러는데... 짐 좀 들어주지 않을래?”

그로부터 약 1시간 후,

“........그 아이가 없다!”

엄청 난동을 피우며 난폭 여깡패들을 물리친 트로메는 ‘말라깽이’라고 불리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에 큼지막한 배뱅이 안경까지 낀 여학생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문득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전하는 걱정도 팔자셔. 그 사이에 도망쳐서 집으로 갔나보죠 뭐.”

오디가 하품을 삼키며 낙관적으로 이야기한다.

“그게 가장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만.”

마이다가 트로메를 진정시키며 덧붙인다.

“아냐. 뭔가 느낌이 이상해. 마이다, 아까 그애한테 추적기 붙여놨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하셔서 붙여놓기는 했습니다.”

“그걸 따라가자! 가봐서 무사하면 그냥 돌아가고, 아니면...”

“아니면?”

“그땐 나도 몰라!”

그들은 모여드는 인파를 뚫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겉보기엔 멀쩡하게 생긴 남자는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눈 앞에 포박되어 있는 여학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묘하게 들떠 있었고 말이나 몸짓에서도 상당히 흥분된 기미가 보였다. ‘말라깽이’는 차라리 아까 왈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가 나았다는 생각을 하며 겁에 질려 있었다.

“오빠는 말야~ 너같이 파릇파릇한 아이들을 보면 사랑스러워서 어쩔줄은 모른단다. 겁도 나고 힘도 들겠지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제 내 손에 들어왔으니 너를 내게 어울리는 완벽한 상대로 길러주지~ 아이고 귀여운 것”

‘말라깽이’는 겁이 났지만 겨우겨우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었다.

“...저...그런데요... 철사가 너무 단단해서 아프거든요... 안 아프게... 노, 노끈 같은 걸로 바꿔주시면 안될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도망가거나 하면 안된다는거 잊지마.”

눈에 광기를 띠기 시작한 남자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철사줄을 끊고 그녀를 풀어준 뒤 휘파람까지 불어가면서 미리 준비해둔 상자를 뒤져 노끈을 들고 왔을 때, 우레같은 소리와 함께 지하실 천정이 와르르 무너지고 마치 18세기 군인같은 복장을 한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아무런 양해도 없이 다짜고짜 뛰어들어왔다. 여자 중 한명은 16도 채 되어보이지 않는 녹색머리의 소녀였다.

“-내가 이럴줄 알았지.”

“정말로 뭔일이 있기는 있었군요. 세상에!”

“이곳 속담에 <늑대를 피하니 호랑이가 달려들더라>는 게 있죠. 후훗.”

남자는 비일상적인 사태에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나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다, 당신들 누구야? 이, 이, 이건 명백한 불법 주거 치, 침입이야.”

“사람을 불법으로 납치 감금해둔 주제에 웃기고 있네! 마이다는 저애를 대피시키고, 오디는 경찰에 연락해. 원래 목표는 이게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냥 놔둬서는 안되겠어. 이 고귀하신 몸이 정복할 별에 이런 파렴치한이 남아 있어서야 체면이 안 선다구!”

“또 도졌어. 전하의 나쁜 버릇이...”

“좋지 뭘 그래.”

수행원들이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동안 분노에 불타는 트로메는 광검을 뽑아들었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남자는 옆에 있는 곡괭이를 집어들고 공격하려고 달려든다.

“---어딜 감히!”

트로메는 검을 오른손에 든 채 가슴팍에서 왼손으로 디플라스크 건을 빼내어 날쌘 동작으로 곡괭이를 쏘아 맞춘다. 눈부신 빛과 함께 금속 부분이 증발하고, 남자는 자루만 남은 곡괭이를 멍한 얼굴로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휘두르며 반격을 시도하지만, 트로메는 능숙하게 허리를 굽혀 그 타격을 요리조리 피하고, 전광석화같이 남자의 곁으로 스쳐지나간다.

“합!”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가 잡고 있던 곡괭이 자루는 마치 어묵조림처럼 토막토막으로 나누어져 산산이 흩어지고, 남자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백짓장이 된다.

남자는 허탈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트로메가 그의 목에 검을 겨눈다. 임무를 마친 두 사람이 뒤늦게 달려와 그 옆에 충성스럽게 정렬한다. 오디가 방에서 찾아낸 무언가를 귓속말로 설명하고 트로메의 표정이 심각하게 어두워진다.

“한 가지만 알아둬. 여자애들은 너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냐. 너희같은 놈들에게 길러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구.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거야. 그런 것도 모른 채 그애들의 미래를 함부로 짓밟으려 한다면 그건 행성 하나를 멸망시키는 것만큼이나 비열한 짓이야!”

트로메의 열변에 남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한다.

“나, 나는, 아, 아직 아무것도, 안했어. 나, 나쁘게 하려고 한게, 아, 아냐”

“틀렸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이런 데까지 유인해서 자유를 빼앗은 것만으로도 너는 아주 나~쁜 일을 한 셈이지. 오늘 일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상처와 불신이 되어 그애의 가슴속에 남을 거야. 그걸 완전하게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그렇겠지. 너에겐 어차피 세상이 게임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말야 아저씨, 네가 납치한 사람은 도트와 픽셀로 이루어진 게임 캐릭터가 아냐. 울고 웃고 땀도 피도 흘리고 느낄 줄도 아는 인간이야!”

남자는 할 말을 잃은 채 입만 뻐끔거리며 주저앉아 있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넌 게임오버당해도 싸.”

밖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바깥 계단으로부터 사람들이 달려들어오는 소음도 들려왔고,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트로메는 검을 거두고 부하들에게 고개짓을 했다. 그들은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천정의 갈라진 틈을 향하여 뛰어올랐다. 어딘가 멀리서 뻐꾸기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뭔지 모르게 된 남자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잠긴 지하실 문이 부숴지고 경관 서너명이 달려들어왔다.





“그때는 진짜 놀랐었지. 전하가 그렇게 화난 건 처음 봤으니까.”

방바닥의 걸레질을 마친 오디가 씁쓸한 미소를 띠며 회상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야. 피해자가 자신과 같은 또래였잖아. 마치 자기가 그 일을 당한 것처럼 느껴져서...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겠지.”

마이다가 왕녀가 발로 찬 이불을 다시 덮어주며 말한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응?”

...애초에 전하도 그 애를 괴롭히려 하지 않았었나? 라고 오디는 말하고 싶었으나, 그다지 적절한 얘기는 아닌 듯하여 입을 닫았다.

“......오디...... 그러니까 너는 평생 시종장인게다......... 음냐....”

“전하?!”

화들짝 놀란 오디를 향해 마이다가 웃어보이며 입술에 손가락을 댄다.

“잠꼬대야.”

“........마이다..... 그건 맞는 말이다......하지만 내가 보기엔....쿨....”

썰렁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오디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나원참, 잠꼬대까지 이런 식이라니. 역시 왕족은 달라.”

마이다가 말없이 웃으며 옆에 놓여있던 컴퓨레터를 들어올려 사진을 찍는다.

“전하 잠자는 사진은 뭘 하게?”

“정복용 데이터를 하나도 못 모은다면 이런거라도 가져가야 하지 않아?”

“야야, 아예 은퇴후에 제국통신사에 팔아먹는건 어때? 왕실 스캔들 감으로”

“..............네 이놈들.................무엄하도다...........쩝쩝.....”

이번엔 동시에 놀란 오디와 마이다가 잠시 트로메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큰 장난이라도 공모하다 들킨 것처럼.

“근데, 진짜 자는거 맞아?”





“전하, 무립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지도자가 안 옵니다!”

오디가 소리질렀다.

“나도 알아. 근데 대체 왜 안오느냔 말야? 분명 일정표에 따르면 행사는 벌써 시작했어야 하잖아!”

그들은 거대한 묘역[墓域] 한구석에 심어져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가지 사이에 숨어서 열나게 디지털 쌍안경으로 사방을 탐색하던 중이었다. 이곳은 오래 전 아주 슬픈 사건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묻힌 곳이라는데, 트로메 일행은 원주민들의 지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 무슨 기념행사 때문에 이리로 몸소 행차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그를 납치하여 본격적인 정복을 개시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바깥에 나가있는 마이다에게 연락해봐. 뭔가 일이 틀어진 것 같애.”

엉덩이 아래의 나뭇가지가 자기의 무게를 못이겨 부러질까 조심하면서 오디가 마치 보라색 해삼처럼 생긴 통신기를 스윽 꺼내어 마이다를 호출한다.

“.....아, 여보세요. 그래. 아직도 지도자가 안오는데. 뭐, 뭐라고? 그래?!”

“-무슨 일인데?”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웬 개발도상의 개체들이 엄청난 숫자의 동아리를 이끌고 몰려와 입구를 막고 있어서, 지도자가 늦어진답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간 우리 계획이 완전히...”

“개발도상의 개체라면 원주민들이 <학생>이라 부르는 그 유닛 말인가?”

“바로 그겁니다.”

바로 아래쪽 나뭇가지에 요정처럼 걸터앉아서 균형을 유지하던 트로메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정보가 노출되었구나.”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오디가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우리 계획을 눈치챈 걸까요?”

“틀림없어. 그러나 아직 권력조직에 액세스할 만한 권한이 없기 때문에 지도자에게 제때 경고하지 못하고, 대신 저렇게 몰려와서 몸으로 막고 있는 걸거야. 지도자가 곧이곧대로 제시간에 여기 오면 우리가 습격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서 말이지. 정말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개체들이군. 우리가 한방 먹었어.”

“감탄할 때가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이제 어떡합니까?”

트로메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무한정 기다릴 수도 없으니까 철수하지 뭐. 마이다에게도 연락해.”

철수준비를 하던 오디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전하.........”

“응?”

“이 정복실습 말입니다.”

“그게 뭐?”

“앞으로도 계속하실 겁니까?”

트로메는 뭘 당연한걸 묻느냐는 듯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깜찍하게 말했다.

“아직 휴가는 백년 정도 더 남았잖아? 우주는 넓고 할일은 많아!”

“제 말이 그말씀입니다! 우주는 넓은데 왜 하필 여기만 고집하십니까?”

“----------재미있잖아?”

주인의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오디는 먼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뒤늦게 합류한 마이다는 그런 그를 요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걱정없다는 듯이 씨익 웃는 트로메가 있다.

피곤에 찌든 세 명의 그림자가 공간이동한다.

한편 묘역 밖에서는 일련의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자기들이 본의아니게 지도자를 외계인의 마수로부터 구출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기동대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며 <아메리고에 대한 굴욕외교 중단하라!>를 외치고 있었다.





THE END!





(C) ZAMBONY 0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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