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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08] 회전목마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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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Go-Round







“들어갈 거요, 말 거요?”

“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옆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백발에 주름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빛바랜 유니폼을 차려입은 그 매부리코 남자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동안 울타리 너머의 을씨년스런 풍경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그에게 입장권을 내밀었다.

“2년 만에 보는 진짜 입장객이군. 여기는 처음이시우?”

노인이 가위처럼 생긴 천공기[穿孔機]로 티켓에 구멍을 뚫으며 물었다.

“처음이나 마찬가지죠. 아주 어릴 때 한 번 와본 게 다니까.”

다소 기분이 엉망이었던 나는 낯선 사람과 얘기하는 게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친절하게 답했다.

그가 내게 그 반토막 난 분홍색 종이쪼가리를 돌려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추억을 돌이켜보기엔 별로 안 좋은 시기인데. 보시다시피 저 모양이라.”

그가 한쪽 손을 쫙 펼치며 울타리 너머를 가리켰다. 한창 햇볕이 내리쬐는 낯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유원지 안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놀이기구나 전시물들은 녹슬고 좀먹은 채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걸어들어가려는 장소가, 유원지가 아니라 오래된 고대의 신전[神殿]일지도 모르겠다는 야릇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런 로맨틱한 상상을 하기에는 그 유원지 자체가 너무 초라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기왕에 찾아온 거니까 한번 둘러보는건 괜찮겠죠?”

“서비스는 받을 수 없겠지만, 그냥 구경만 하는 거라면야...”

그는 옆으로 물러서면서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철제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한때는 은빛으로 반짝였을 그 출입문 또한 세월의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심하게 녹슬고 더러워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싸구려 망치 하나만 갖고도 금세 분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맙습니다.”

나는 핸드백에 입장권을 집어넣고 입구로 들어서며 그에게 말했다. 그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문을 도로 닫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경비실을 향하여 걸어가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리며 내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왔을 때는 조모[祖母]님과 함께가 아니었나? 그 녹색 털모자 쓰고 땜질한 코안경을 끼고 어깨에는 숄을 두른...”

“그걸 어떻게 아시죠?”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그냥 우연히 때려맞춘 거라오. 하여튼, 그 분이 말한 대로군. 정말 그대로야!”

“뭐가 그대로인데요?”

“차차 알게 될 거요. 어쨌거나, 아가씨가 찾는 걸 발견하길 바래요!”

그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이런 수수께끼같은 말만 남기고는 반대편으로 걸어가버렸다. 나는 잠깐동안 그의 작달막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리고 유원지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어디선가 희미한 음악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오는 것 같아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그 소리는 금방 사라져버렸다.

30밖에 안 된 주제에 벌써 환청이라니?





“폐쇄 직전의 유원지라고?”

커피잔을 자판기에서 뽑아오던 더스티 필립스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그래, 다음 달에 문을 닫는다나봐. 그 전에 한 번 봐 두려고.”

나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그의 말을 받으며 빈 약봉지를 휴지통에 내던졌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야? 당신답지 않게시리.”

“어떤 게 나다운 건데?”

“그야.....................”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입을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더니 심지어는 뭔가 잘 안 풀리는 토크쇼 사회자처럼 손가락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뭔가 대답을 찾아내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했다.

“별로 큰 의미는 없어. 요즘 좀 피곤했잖아. 그래서... 그냥 어릴 때 생각에 잠기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 말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내게 건네주며 그가 질문했다.

“한 번밖에 안 갔다면서 왜 하필이면 거기야? 더 좋은 장소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지금처럼 풀이 죽었을 때 나를 격려해준 사람을 만났지. 뭐 그렇다는 얘기야.”

그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선량하게 생긴 갈색 얼굴을 찡그리며 뭔가 미심쩍다는 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저 말야, 로시. 저번에 딕센 케미컬에게 입찰 건을 뺏긴 건 정말 유감이야. 하지만 말이지, 그건 당신 잘못도 아니었고, 좀더 나은 기회가 앞으로도 많이......”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그의 말을 끊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더스티?”

“그러니까 나는, 그 뭐냐, 당신이 너무 상심해서 엉뚱한 생각이라도 하는게..”

“엉뚱한 생각이라니, 무슨?”

그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 생쥐가 되어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혹시... 너무 피곤이 지나쳐서 극단적인 길로...”

“하! 내가 회전 관람차에서 뛰어내리거나 전망대에서 목이라도 맬까봐 그래?”

“내가 상상한 건 좀 다르지만 아무튼, 그래, 난 당신이 걱정돼.”

나는 남은 커피를 약먹듯이 억지로 들이키고는 벌떡 일어서서 그에게 말했다.

“걱정일랑 집어치라구. 나는 아직 그정도로 약해지지 않았어. 단지 기분전환이 필요한 것 뿐이야. 그렇게 신경쓰이면 함께 가던가?”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당신이 정 그렇다면... 내가 괜한 걱정을 한거라니 다행이지 뭐. 간만에 푹 쉬다 오라구. 여기 일은 걱정말고.”

“난 가끔 당신이 지나치게 나한테 신경을 쓰는 것 같다고 느껴. 그 일 이후로 말야. 당신뿐만 아니라 루크도 클로디아도 팀도.”

“누군들 안 그렇겠어? 8년을 투자해 온 프로젝트가 거의 골인 일보 직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는데 누군들 걱정 안 하겠냐고. 게다가 수석 플래너는 사고로 저세상 가고, 회사에서는 팀을 해체하겠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으니...”

“다시 말하지 않아도 잘 아니까 그만해 줘.”

“로시, 난 다른 뜻은 없어. 다만 괴로운 건 당신만이 아니라는 걸 좀 알아줘.”

“알아.”

나는 그런 그를 비웃어 주며 사무실로 돌아와서 월차 신청서를 작성했다.

거의 내놓다시피 한 처지라서 그런지 몰라도 허가는 의외로 쉽게 나왔다.





“......................”

나는 유원지 안으로 걸어들어가서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형형색색의 천막과 갖가지 구조물들 사이를 돌며 예전에 내가 다녔던 길의 흔적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라 좀처럼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기억 속에서는 오색 찬란한 컬러빛으로 채색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 세월의 무게와 풍화작용으로 인해 둔중한 회색이나 차가운 금속질로 바뀌어 있었다. 흥분에 가득한 사람들이 라이플을 쥐고 총알을 박아넣던 사격장의 표적들은 구멍이 숭숭 뚫린 채 한심하게 나자빠져 있었고,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던 작은 보트들은 노를 잃어버린 채 자기네들끼리 뒤엉켜 물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을 향해 뜨거운 솜털들을 띄워올리던 솜사탕 제조기들은 먼지와 거미줄에 뒤덮여 차갑게 식어 있었고, 한때는 밤 늦게까지 전등불을 환하게 켠 채 바삐 돌아가던 회전목마와 관람차와 그밖에 갖가지 놀이기구도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처럼 조용히 굳어 있었다.

나는 슬슬 이 황량한 공간을 돌아다니는 일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집에 틀어박혀, 코넬리아 콘웨이의 신곡을 들으며 재즈댄스 연습이나 할 걸 그랬나...

“................어라?”

분명 아무도 없을 터인 유원지 한 복판에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

나는 이 시간에 나 말고도 이런 곳을 둘러보는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져서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 희어멀건한 그림자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나는 한참동안 그 사람을 쫓아서 뛰어다니다가 어느 습기찬 모퉁이를 돌아서 한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어느 광장에 도달했다. 광장 한복판에는 세계 각국의 시간을 알려주는 여러 개의 꽃시계와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인 커다란 분수가 서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시들어버린 꽃시계를 바라보았다. 문제의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맑은 날씨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에는 구름도 없었고, 비도 내리지 않았다. 단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매서운 기류[氣流]만이 사정없이 몰아칠 뿐이었다.

나는 바람을 곧바로 받는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몸을 낮추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너무나 엄청난 풍속[風速] 때문에 귀가 얼얼하고 몸이 떨려왔다. 나는 날아가려는 핸드백을 가까스로 붙잡고 옷깃을 추스리며 눈에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눈을 잠시 감고 있었다. 앞쪽에서 뭔가가 차르르륵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뭔지 확인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다급했다.

몇 초나 흘렀을까,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주변은 아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뭔가 좀 이상한 것이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확실히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참 뒤에야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내 눈 앞에 있던 꽃시계는 더이상 시들어 있지 않았다.

시침과 분침은 아까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지만, 그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하나같이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한창때의 생명력을 뽐내며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틀림없었다. 물소리가 들려와서 옆을 돌아보니 분수에서 적어도 일곱 가지 형태의 물기둥이 솟아오르며 한낮의 더위를 식혀 주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광장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나는 그 쪽으로 걸어갔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조차 뭔가 아까와는 달라 보였다.

‘...저 포장지는... 이상한데, 지니 캔디Genie Candy가 요즘도 나오던가...?’





나는 대체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걸까 궁금해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상점들과 놀이기구마다 온갖 복장을 입은 손님들과 직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저마다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활기에 차서 이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일매일 똑같은 공원의 일과에 진저리를 내며 휴가를 꿈꾸는 사람도 있고, 가족들에게 이끌려 난처한 얼굴로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즐거운 사람들이었다. 단지 그들의 옷이 몇 년 정도 유행에 뒤진 것만 제외한다면.

사격장에서는 다시금 화약 냄새와 폭음이 진동했고, 보트를 탄 연인들은 콘크리트로 만든 모조 동굴 속에서 밀어[蜜語]를 속삭였고, 솜사탕 장수와 풍선 장수는 앞다투어 아이들을 끌어들이느라 목이 터질 지경이었고, 회전목마와 관람차 앞에는 길다란 줄이 허물벗은 뱀처럼 좌르륵 늘어서 있었다. 분명 아까와 같은 하늘 아래 아까와 같은 장소인데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다니. 나는 너무나 놀라서 그 자리에 못박혀 있다가 뒤쪽에서 큰북과 심벌즈를 붕짝짝거리며 몰려온 군악대의 가장행렬에 휘말려 5미터 정도 전진하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나는 한참동안 헤매다가 다시 회전목마 쪽으로 걸어와 보았다.

‘어떻게 된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한번 타봐야지.’

길게 늘어선 줄을 바라보며 어느 정도 기다리면 될까 가늠하고 있던 내게 누군가가 살며시 다가와서 팔을 건드렸다. 돌아보니 조그만 여자애가 서 있었다.

“무리예요. 아마 저녁이 될 때까지 못 탈 걸요.”

열한 살 정도 되어보이는 그 소녀는 칙칙한 적갈색 머리카락에 물방울 무늬 리본을 달고, 수수하지만 곱게 단장된 아쿠아마린 빛깔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얼굴빛은 다소 창백하고 파리한 느낌이었지만 어딘가 강단이 있어 보였다. 그애는 다소 맹랑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잘 아는구나. 이 근처에 사니? 여긴 자주 와?”

그애는 두 질문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그애는 자신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저었다.

“누구 기다리니?”

“뭐 그런 거예요.”

그애는 더욱 자신없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머뭇거리는 품이 왠지 거짓말을 둘러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애와 눈높이를 맞춘 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설마 길 잃은 건 아니겠지?”

“무시하지 말아요!!!”

의외로 폭발적인 반응에 놀라서 나는 잠시 흠칫했다.

“그래, 미안하구나. 네가 어리니까 걱정이 되어서 그렇게 말한 거야.”

“걱정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

한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어렸을 때는 종종 길을 잃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힘들었거든.”

“진짜요? 아줌마도 그럴 때가 있었어요?”

번쩍 들어올려 자이언트 스윙을 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나는 말했다.

“오호호... 나는 아줌마가 아니라 언니란다, 언니.....”

“내가 만난 아줌마들은 다들 그렇게 말해요.”

울그락불그락하는 내 얼굴을 본체만체하고 그애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언니라고 불러주면 뭐 줄거예요?”

“내가 왜 너한테 뭘 줘야 하니?”

“싫음 말구요.”

그애는 홱 돌아서면서 나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하지만 여기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내게 잘 보여야 할걸요.”

“그래,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

맹랑한 것. 나는 호기심 반 자포자기 반으로 그애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로시. 넌 이름이 뭐니?”

“셀리요.”

들은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빨리 안 오면 두고 갈 거예요!”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그애 쪽으로 달려갔다.





셀리는 정말 골칫덩이였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친구나 친척의 아이들을 여럿 봐 왔지만 이렇게 고집불통에다 자기멋대로인 아이는 처음 봤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애는 어디로 가든 일을 망쳐놓는 걸 즐기는 듯 했다.

“--왁!”

“아이구, 놀라라! 뭐야, 뭐! 너 누구야! 거기 서!”

“헹, 누가 설줄 알고!”

셀리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헬륨덩어리를 팔아제끼는 풍선장수를 교활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갑자기 뒤에서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었다. 턱수염을 기른 그 남자는 깜짝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풍선의 절반 이상을 놓쳤고, 그의 손을 벗어난 오색의 풍선들은 푸른 하늘 저 너머로 하염없이 둥둥 떠 가는 것이었다. 한발 앞서 달아난 그애가 포장마차 뒤에 숨어서 혀를 낼름거리는 동안, 풍선장수에게 붙들린 나는 별 수 없이 손해를 배상해 주고 아직까지 근처에 떠 있는 풍선 붙잡는 걸 도와줘야 했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우하하하하! 신난다!”

“얘, 셀리! 관람차 문을 열면 안돼! 떨어진다구!”

그 애는 관람차가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온 순간 문을 활짝 열고 확 트인 공간을 감싸안기라도 하듯이 팔다리를 쭉 뻗어 출입구를 막아섰다. 분명 바깥에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을텐데 저걸 대체 무슨 수로 연 건지...?

“우리 할망구 아파트보다도 낮은데 무슨 걱정이에요. 난 학교 3층에서도 떨어져본 적 있다구요. 트랄랄라!”

“3층이고 나발이고 빨리 닫아! 어서!”

“다음에는 카트 태워줘요, 카트!”

“너..............”

“안태워주면 뛰어내릴거예요. 하나, 둘....”

“.........알았다. 알았어. 어서 문닫아.”

“이야호!”

협박에도 도가 텄다는 것을 이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다니.

“켁, 이건 피스타치오 월넛이네요. 난 탠저린 크런치라고 했잖아요!”

“아깐 피스타치오라고 해놓고 무슨 소리야! 음식 타박하면 오래 못 살아!”

“꼭 우리 할망구 같은 소릴 하네. 하여튼 난 이거 싫으니까 알아서 해요!”

이렇게 변덕을 부리면서 아까운 아이스크림 콘을 서너개 폐기처분한 뒤에야 입맞에 맞는 걸 찾아내더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게걸스레 베어먹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다 아이스크림 매점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던지라 몇번이고 다시 줄을 서야 했던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그애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손을 올릴락말락 하던 바로 그때, 그애는 다음 한마디로 나를 더욱 어이없게 만들었다.

“어쭈, 내게 손대면 유괴범이라고 신고할테니까 맘대로 해봐요.”

“내가 왜 유괴범이니?”

“처음 만난 애한테 이렇게 돈을 펑펑 쓰는게 수상하잖아요?”

“네가 쓰도록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무슨!”

“한입으로 두말하는게 어른인가요?”

“한입으로 두말은 네가 했어. 발뺌하지 마라.”

그애는 먹다 남은 콘 부스러기를 땅바닥에 매몰차게 집어던지더니,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렇게 내뱉었다.

“아줌마도 그사람들이랑 똑같아.”

나는 ‘그사람들’이 대체 누군지 궁금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그애를 향해 이렇게 말하며 돌아서려고 했다.

“그렇다니 유감이구나. 난 이만 돌아갈테니 너도 빨리 집에 가. 이런 데 오래 있으면 멍청이 된다.”

“아줌마보다는 훨씬 똑똑하지!”

“과연 그럴까?”

그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어린아이를 유원지 한가운데 내버려두는 게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셀리의 괴물같이 영악한 심보를 생각하면 그런 걱정이 싹 가셨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해시계가 있는 광장까지 돌아왔다. 분수대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물기둥을 빚어내며 시원한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는데, 덕분에 그 주변에도 아까보다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대체 그 애는... 어째서 그렇게 제멋대로......’

피곤에 지친 나는 분수로 다가가 물가에 서서 물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창백하고, 주름이 지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감추고 있는, 맹랑한 눈빛의--

...잠깐만, 맹랑한?

“아이구 저런!”

“큰일이야!”

“부모는 뭐하고 있지!”

나는 그 순간 들려온 외마딧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비상! 안전요원은 즉시 관람차 쪽으로 와 주세요! 어린이가 매달렸습니다!”

나는 그 방송을 듣자마자 충동적으로 발길을 돌려 관람차 쪽으로 달려갔다.

누구 얘기인지 너무나 뻔했기 때문에.





유원지의 규모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관람차도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작은 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그마한 어린이가 4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거꾸로 떨어지면 타박상 한두 군데로 끝나지 않는다는 건 말하나마나였다. 안전요원들과 손님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셀리는 가장 높이 올라간 관람차의 문을 열고 손잡이에 매달린 채 뛰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달려가 상황을 살펴보다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그애와 눈이 마주쳤다. 셀리는 나를 쳐다보고 싸늘한 조소[嘲笑]를 보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어디 혼 좀 나봐라라는 식의.

‘저 애가............!’

혹시나 셀리가 흔들려서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관람차는 움직임을 멈추고 허공에 굳어있는 상태였다. 다른 칸에 타고 있는 손님들도 빨리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치다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고 할 말을 잃었다. 보호장비를 갖춘 안전요원 두어 명이 로프와 줄사다리를 이용하여 거미처럼 기어올랐고, 다른 몇 명은 관람차 본체에 설치되어 있는 비상 손잡이를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럭저럭 손쉽게 위쪽 관람차 옆에 도착했지만, 그들이 접근할 때마다 셀리가 악을 쓰며 뛰어내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애를 먹고 있었다.

작달막한 청원경찰 한 사람이 확성기를 들고 아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얘야, 위험한 장난 그만두고 어서 내려오너라! 부모님이 걱정하셔!”

그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내려꽂혔다.

“웃기셔. 우리 엄마아빠는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빠서, 내가 어찌되든 관심도 없어!!!”

그러나 청원경찰도 집요했다.

“그럼 부모님은 일단 취소다. 하지만 누구든 너를 아껴주는 사람은 있겠지? 네가 거기서 뛰어내리면 그분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 순간적인 기분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돼! 썩 내려와!”

“내게 명령하지 마! 여긴 자유국가고 난 내 맘대로 할 거야!”

어린 나이에 배운게 너무 많으면 저래서 안 된다는 거다.

졸린 눈을 한 매부리코의 청원경찰은 드디어 회유책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네가 내려와 주면 지니 캔디 10박스에 평생 무료 입장권을 주지!”

셀리는 약간 솔깃한 표정을 지으며 침을 질질 흘릴 뻔 하다가 갑자기 내 쪽을 보고 표정을 확 바꾸더니 더욱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뇌물로 뭐든 다 될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아저씨!”

“이런 젠장! 눈물로 설득해도 안되고 선물을 준대도 싫다니 배은망덕한! 당장 내려와! 안 내려오면 강제로 끌어내려서 어두컴컴한 토굴에 먹을 것도 없이 평생동안 가둬둘테다! 농담 아냐!”

“쳇, 처음엔 좋은 말로 나오더니 결국 저런다니까... 어른들이란-”

셀리는 솜씨좋게 매달린 채로 이죽거렸다.

나는 거의 환장할 지경이 되어 머리를 쥐어뜯는 청원경찰의 옆으로 다가가서 다급하게 말했다.

“그 확성기 좀 빌려주세요. 제가 얘기해 보겠어요.”

“당신, 저 아이 보호자요?”

“뭐 비슷한 거죠.”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마지못해 확성기를 건네주었다.

셀리는 바람에 흔들거리면서도 내 쪽을 보고 씨익 웃었다.

나는 확성기의 스위치를 켜고 목청껏 외쳤다.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셀리! 나 로시야!”

“그렇게 돼지멱따는 소리로 안 해도 다 들려, 아줌마.”

그애는 지옥에서 갓 올라온 풋내기 악마같은 표정으로 약을 올렸다.

“알겠어. 그럼 조용 조용히 얘기하지. 한 마디만 할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나, 길을 잃었어.”

“.......................?”

셀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청원경찰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눈을 껌뻑이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계속했다.

“너한테는 부끄러워서 말 안했지만...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 진작에 네 말을 들었어야 했던 건데.... 미안하다.”

“........................”

“그러니까... 어서 내려와서 날 좀 도와줘. 네가 있어야 해.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너보다 여기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진심이야?”

셀리는 여전히 의심스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확성기를 끄고 그애를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내 육성만으로 말했다.

최대한 입술 모양이 그 아이에게 잘 보이도록 고개를 들고.

“...날 두고 가지 마.”

셀리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그애가 소리질렀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거기 꼼짝말고 기다려요. 금~방 내려갈 테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오던 바로 그때, 갑자기 한줄기 강풍이 불어와서 관람차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바로 양옆에서 접근해 온 안전요원들이 손을 뻗으려던 바로 그 순간에, 셀리는 중심을 잃고 관람차에서 떨어졌다. 새파란 원피스 자락이 줄기에서 떨어지는 꽃잎처럼 펄럭였다.

“아---------!”

“셀리!”

나는 확성기를 집어던지고는 앞뒤 가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까의 청원경찰이 놀란 얼굴을 하고 반쯤 감겨있던 눈을 크게 떴다. 환호성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소리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나왔다.

구름이 해를 뒤덮고,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 어때?”

“닥쳐주세요.”

여전히 성질머리 하나는 고약한 셀리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말했다.

셀리는 피사의 사탑에서 던진 쇠공처럼 아래로 떨어졌지만, 다행히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나와 청원경찰이 치열하게 설득을 벌이는 동안, 관람차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안전 매트를 전개하고 그물을 펼쳐놓았던 것이다.

유원지 전속 의사의 정성들인 진찰과 매니저의 난리법석으로 가득한 설교를 들은 뒤에야, 우리는 겨우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이곳 해시계 광장의 벤치에 앉을 수 있었다. 분수대에서는 돌고래 모양과 불가사리 모양의 갖가지 조형물이 물기둥과 함께 무작위로 솟아올라 아이들을 매혹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나는 석양 때문에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참 파란만장한 하루였구나...... 이제는 어떻게...”

“아줌마.”

셀리가 머리를 기댄 채 코맹맹이 소리로 말을 걸었다.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니. 언니라고 하던가 아니면 이름을...”

“아까 그거......”

“됐어. 말하지 마. 너도 여러가지로 괴로운 것 같으니까.”

나는 그애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설익은 사과 냄새가 났다.

“..............기뻤어.”

“응?”

“입에 발린 말이라도... 그런 말은 처음 들었거든.”

“.........”

“아빠 엄마는 맨날 싸우더니 얼마 전에는 갈라선다고 해서... 할망구 집에서 사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내게는 안 들릴 줄 알고 큰 소리로 마구 떠들더라구. 당신이 낳았으니 당신이 데려가! 웃기네, 당신 애잖아, 당신이 책임져! 계속 그 모양이었어... 계속...”

나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셀리의 목소리에 울먹이는 소리가 끼여들었다.

“둘 다...나 따위는 필요도 없다는 듯이... 결국 할망구 집에 내팽개쳐두고... 요즘은 보러 오지도 않아... 그럴 거라면 왜 나를 낳았을까? 왜 필요하지도 않은 나를 태어나게 해서 그 지랄들을 다 보여준 걸까? 난 내가 정말로 싫었어.”

나는 어느 사이엔가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아까 아줌마가... 내가 필요하다고... 내게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나.......”

“그래. 알아. 다 알아...... 전부........”

그제서야 나는 왜 이 아이가 그렇게 낯익었는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실컷 울어. 놀리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대신 석양의 붉은 빛깔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광장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애가 소리를 죽여가며 우는 사이에 나는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한 탓인지, 그애의 체온이 말할 수 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애가 울음을 그치자 내가 말했다.

“그런데 말야.”

“응?”

“언제까지 아줌마라고 부를 거야?”

“사소한데에 신경쓰면 오래 살지 못해, 아줌마.”

“이게--!”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툭탁거리며 그 광장을 빠져나왔다.

어둠이 밀려왔다.





“아, 회전목마.....“

“사람들이 많이 줄었네? 지금 탈 수 있을까 몰라?”

“태워줘.”

폐장시간이 얼마 안 남기는 했지만, 다행히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 우리는 금방 회전목마에 올라탈 수 있었다. 눈부신 색동 전구의 빛이 어둠을 뚫고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둥그런 지지대가 모터의 힘을 받아 빙글빙글 돌아가고, 술안주처럼 꼬챙이에 고정된 채로 그 위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던 목마와 마차들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 있던 두 대의 백마에 올라탄 채 그 기분좋은 회전에 몸을 맡겼다. 이곳의 목마는 싸구려 플라스틱이 아닌 진짜 셀룰로이드 몸체에 털로 만든 안장까지 덮여 있어서 꽤 그럴 듯한 감촉을 선사해 준다. 정신없이 열중해서 타는 아이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겠지만.

어릴 때 장난감 오르골에서 들은 듯한 아련한 음악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나는 그 춤곡이 아까 유원지에 입장할 때 환청처럼 들려온 그 음악과 같은 곡임을 알고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생각난 김에 내가 말을 꺼냈다.

“어릴 때 할머니한테 들은 얘긴데......”

“음?”

“인생이란 끝없이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 같은 거래. 가끔 말들이 바뀌고 음악이 바뀌고 타는 사람들이 바뀌지만, 결국은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돌고 돌아 처음으로 돌아오는...”

“헤에-”

“하지만 그렇게 돌다 보면... 모든 순간 순간들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게 되거든?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크게 보면 그런 셈이고... 그러니까 모두들 돌고 돌면서 같은 일들을 되풀이하지만... 사실은 완벽하게 똑같은 인생은 하나도 없는 거야.”

“알듯 말듯한 얘기네.”

셀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아무리 괴로운 시간도... 아무리 어려운 순간들도...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떼어놓고 보면 대단히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매 순간을 즐겁게, 보람있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어.”

“아줌마네 할머니도 우리 할망처럼 곰팡내 풀풀 나는 소리만 하는구나.”

“어이, 곰팡이는 소중한 거야. 항생제도 발효식도 만들게 해 주니까.”

“난 어려서 그런거 모른다지요, 네.”

우리는 그렇게 시시껄렁한 수다를 늘어놓으며 몇 바퀴를 더 돌았다.

완전히 어두워진 유원지의 이곳저곳에서는 미화원들이 쓰레기를 치우고 안전요원들이 시설을 점검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밤의 운치를 즐기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몇몇 손님들이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셀리와 함께 해시계 광장까지 다시 걸어와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분수대 반대쪽에서 키작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더니,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셀리나! 로셀리나 브라운!”

“여기 있어요!”

그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셀리는 망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가서 그 백발 노파에게 안겼다. 때묻은 녹색 털모자를 쓰고 테이프로 땜질한 코안경을 끼고 어깨에는 크림색 숄을 두른, 전형적인 연금 생활자의 모습이었다. 셀리가 노파에게 매달려 아양떠는 모습은 아까의 과격한 언동과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아서 보고 있는 내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말로는 할망구가 어쩌고저쩌고 해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네.

얼마 후에 서로 떨어진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나를 향해 돌아섰다.

“이 아이가 가끔 이렇게 몰래 빠져나가 이 늙은이를 고생시킨다오. 정말 뭐라고 감사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만.”

“아뇨, 감사는 무슨..... 셀리가 하도 똑똑해서 오히려 제가...”

나는 뭐라 표현할 길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그 낯익은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관상이라도 보는 것처럼 내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더니 중얼거렸다. 숄에서 박하 담배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오호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정말 좋은 운명이야.”

“.........?”

“아가씨,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군. 우리 손녀딸애도 당신처럼 자라 주었으면 소원이 없겠어. 하지만 그건 무리일테지?”

“아뇨, 절대 무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그렇다고 해도 그때는 내가 이 세상에 없겠지. 그럼 조심해서 가요.”

노파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자비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녀딸을 이끌고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셀리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잠시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쪽으로 달려와서 뭔가를 쓱 내밀었다.

“지니 캔디잖아?”

“그것도 악명 높은 잼보니 맛. 난 별로 안 좋아하니까 아줌마 갖고 가.”

나는 그 은박지에 싸인 손바닥만한 물건을 받아들고 그애와 악수를 나누었다.

“다시는 죽는다는 말 하지 않을거지?”

“모르겠어. 그나저나 나 없이도 길 찾을 수 있겠어?”

“너도 이젠 돌아가야 하니까... 어떻게든 해 볼게. 할머니 잘 모셔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줌만 살 좀 빼야겠어. 운동도 하고. 아까 안겼을 때 보니까 뱃살이 출렁거릴 지경이더라고.”

“요게 진짜.”

“때리려고? 그렇게는 안되지, 안녕!”

셀리는 후다다닥 할머니 쪽으로 달려가면서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내게 혀를 내밀어 보였다. 두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 셀리의 기운찬 목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다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저 고약한 것, 끝까지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다니.

나는 아직까지 그애의 온기[溫氣]가 남아있는 사탕을 핸드백에 집어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자 이제 나도 슬슬 돌아가야 할 텐데, 어디로 나가면 되지?

“...................어?”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 있던 화단 위의 꽃시계들이 희미한 야광[夜光]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꽃잎 자체가 반딧불이의 뒤꽁무니처럼 스스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넋나간 얼굴로 화단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그 여러 빛깔의 야광이 점점 강렬해져서 눈이 부신 나머지 오른팔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아까 들었던 그 음악 소리가 또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전신을 뒤흔들만큼 강력한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또다시 밀려왔다. 그리고 시침 분침이 바쁘게 돌아가는 듯한, 차르륵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마치 게을러터진 누군가가 몇 년 동안 감지 않았던 시계 태엽을 한꺼번에 몰아서 감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하루 종일 걸어다녀서 다리에 힘이 없었던 나는 핸드백을 감싸안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 뒤에 바람이 다 지나가고 나자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눈 앞의 꽃시계는 형편없이 시들어, 애처롭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출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매부리코의 경비원이 파이프를 물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오래도 있었구만. 그래, 원하는 건 찾았수?”

“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게.......”

나는 그 적당히 시무룩하면서도 적당히 친절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찾았어요. 아저씨 말씀대로.”

“그래...... 다행이로군.”

그는 주름진 얼굴을 활짝 펴면서 웃어보였고,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내가 낮에 만난 젊은 청원경찰의 얼굴과 닮게 느껴졌다. 윤곽만 어렴풋이 비춰주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돌아서서 녹슨 출입문에 열쇠를 채웠고, 나는 어색한 인사를 남긴 뒤 그곳을 빠져나와 진입로 쪽으로 향했다. 밤이 상당히 늦은 시각인지라 지역 버스나 지하철은 좀 힘들테고... 택시를 불러야 하나?

“여어.”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주차장 저편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손짓을 했다. 필립스였다.

“웬일이야?”

“혹시 이런 일도 있을까 싶어서 대기하고 있었지. 어때?”

“눈물나는군.”

나는 일부러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마지못해 타는 척 차에 올랐다.

그가 시동을 걸었고, 날렵하게 잘빠진 황색의 쿠페는 도로를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담배를 한 가치 꺼내어 불을 붙이자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우리 회사에서는 보기 드문 비흡연자였고 게다가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다.

“너무 많이 피우지 마.”

“남이사.”

“혹시, 집안 내력이야?”

“우리 할머니도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지. 그러니까 나는 더더욱 피워야 해.”

“말에 좀 어폐가 있는 거 알아?”

“이 사악한 담배를 자꾸자꾸 피워서 지구상에서 몰아내야 하거든.”

“그래, 거룩한 사명이로군. 잘해보셔.”

“비꼬지 마.”

나는 마술사처럼 여러 줄기로 가느다란 연기를 뿜어대면서 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의사의 처방이 붙어있지 않은 작은 회색 약봉지였다. 나는 그 안의 포장을 찢고 들어있던 내용물을 손바닥 위에 남김없이 쏟아냈다.

백색, 청색, 적색, 갈색의 수상쩍은 알약들.

나는 담뱃불을 끄고 꽁초를 재털이에 버린 다음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오늘 그애와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이걸 어떻게 했을까?

“뭐 하려고 그래?”

“먹을 거 아니니까 걱정마. 토사물 봉지는?”

“좌석 오른쪽 아래.”

“고마워.”

나는 그 알약들을 모조리 봉지 안에 털어넣고 내가 갖고 있던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잘 섞은 다음 봉지 주둥이를 단단히 묶고 장난삼아 빙글빙글 돌렸다.

“속력 좀 줄여줄래? 아, 그래... 저기쯤이 좋겠어. 그렇게 계속.”

나는 차가 느린 속도로 휴지통 옆을 지나갈 때 창문을 열고 양팔을 내밀어 그 봉지를 농구공처럼 치켜들고 왼손으로 아래를 받친 다음 오른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재빨리 봉지를 던져올렸다. 그러나 봉지는 휴지통 바로 옆에 떨어져서 엉망진창으로 내용물을 토해내며 터져버렸다. 근처에 경찰관이 없었던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노 골이라 유감이군. 재도전해볼래?”

“됐어. 운전사가 별로인 탓이니 몇번 해도 똑같아.”

“그렇게 맘에 안 들면 여기서 내려줄까?”

“아니.”

“그럴 줄 알았어.”

딸아이 응석을 받아주는 팔불출 아버지같은 얼굴로 그가 웃었다.



10



나는 다시 차 안으로 시선을 돌리고 백에서 아까 받은 선물을 끄집어냈다.

운전에 여념이 없던 필립스가 곁눈질로 그 물건을 흘낏 보고는, 그리운 듯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지니 캔디로군. 어릴 때 질리게도 먹었지. 지금 이빨이 남아있는 게 신기해.”

“그래......”

“그나저나 놀랐어. 벌써 12년 전에 생산 중단된 물건인데, 어떻게 그걸?”

“...잘 아네.”

“사촌 중에 과자 매니아가 있거든. 뭐가 언제 나오고 어떻게 변했는지 몽땅 꿰고 있어. 언젠간 그걸로 책 하나 내겠대. 덕분에 나까지 이 꼴이야.”

“흐응..........”

나는 관심없다는 투로 되받았다. 아까는 분명히 반짝거리며 티 한점 없이 빛나던 깔끔한 은박 포장이 어느 사이엔가 오래 된 영화 필름처럼 빛이 바래 있었다. 제조원을 표시하는 자잘한 글자들은 뭉개져서 잘 보이지 않았고, 은박 위에 입혀진 염료[染料]들은 군데군데 벗겨져서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처들을 부정하는 것은,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세월을 부정하는 것이 되겠지... 나는 다시 그 사탕을 백에 집어넣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 더스......”

“아,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 난 너무 사람이 좋아서 탈이야. 핫핫핫”

이 인간과 7년 째 같이 다니면서도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건 아마 이런 성격 탓인 것 같다. 나는 그 자화자찬을 슬쩍 무시하고 내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지니 캔디의 상품권은 지금 누가 갖고 있지?”

“상품권? 그건 왜? 설마 부활시킬 생각이야? 하지만 로시, 우리 회사는 제약회사지 식품회사가---”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 요즘 트렌드하고 딱 맞잖아?”

나는 확신을 갖고 단언했다. 그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살다보니 엘 마디그라가 사탕을 낸단 말이지. 그거 재미있겠군.”

“제약부하고 얘기해서 아이들을 위한 건강 증진 효과도 가미하자구.”

“로시, 단순히 개인적인 추억 때문이라면 이건 좀-”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나는 백에서 콤팩트를 꺼내어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잘라 말했다.

“이건 잠재적인 시장이라구. 지금 우리 또래인 수많은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공략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라. 이런건 딕센이라도 절대 흉내 못 내.”

“어련하시겠습니까.”

그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비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지만 잼보니맛은 빼자구.”

“응? 어째서?”

“인기 최악이었잖아, 기억 안 나? 어줍잖은 술맛을 사탕에 가미한 덕분에 PTA로부터 직사게 두들겨맞은 일도 있고. 급기야는 대통령이 성명을...”

“잼보니는 꼭 들어가야 해. 그때의 아이들이 지금은 성인이 되었잖아? 틀림없이 다시 평가받을 기회가 있을 거야. 화제성이라는 면에서도 가치가 있고.”

“못말리겠군.”

“뭐 그렇다는 말이지.”

나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물자국과 피로로 얼룩진 눈가를 단장했다.

운전대를 잡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필립스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유원지는 어땠어? 찾아간 보람은 있었던 거야?”

“응.”

“그 은인이라는 사람은... 역시 못 만났겠지?”

“아니. 만났어.”

“진짜?”

“내가 아까 그 수면제를 길거리에 던져버린 것도 다 그 사람 덕인걸.”

“그거 참 기쁜 일이군. 어떤 사람이야? 나도 볼 수 있을까?”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럼.”

거울 안에서는 맹랑한 눈빛의 열한 살 소녀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걸.”

그의 갈색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르는 걸 즐기며, 나는 덧붙였다.

“바로 당신 곁에.”





THE END!





(C) ZAMBONY 200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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