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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3] 헬가 1/6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8
 





<< 헬가 >>

Helga's Tale





0. 프롤로그 - 1943년



프리츠 헬멧에 칙칙한 카키색 군복을 입고 소총을 비스듬하게 치켜든 십여 명의 게르마니아 군인들이 쌀쌀한 날씨를 무릅쓰고 묵묵히 행군하고 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황야를 헤매다가 깎아지른 산맥을 배경으로 새파랗게 펼쳐진 호수와 그 주위를 둘러싼 허름한 성채[城砦]를 발견하고 멈춰선다. 완전히 황폐해진 성 안에서는 인기척은커녕 들짐승의 기척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을 지휘하던 하사관은 눈 앞에 우뚝 선 낡은 돌벽과 그 앞에 펼쳐진 해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에 선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들 중 몇 명이 로프와 갈고리를 준비하여 해자를 가로질러 줄다리를 만들고, 병사들은 한명씩 한명씩 줄을 두 손으로 붙잡고 조심스레 해자를 건넌다. 가장 어린 병사가 발 밑에 펼쳐지는 새카만 물을 내려다보고 현기증을 일으킬 뻔 하지만, 그럭저럭 무사히 건너는 데 성공한다.

병사들은 수류탄으로 커다란 철문 한구석에 구멍을 내고 안으로 몰려들어간다. 그들은 몇 명씩 조를 편성하여 성 안을 이리저리 뒤졌지만, 사람은 고사하고 식량이나 일용품조차 찾지 못하고 같은 곳을 맴돌기만 하다가 지친 표정으로 중앙 홀에 다시 집결했다. 그때 어느 병사가 하사관에게 뭔가를 보고하고, 그들 중 몇 명이 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하계단으로 내려간다. 아래쪽에서 뭔가가 번쩍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그러고 나서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하사관과 척후대가 돌아오지 않자, 남아있던 병사들도 궁금한 나머지 그쪽으로 몰려간다.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던 병사들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박쥐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린다. 그들을 두렵게 하는 원인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가는 앞길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마침내 가장 아래층에 다다른 병사 한 명이 굳게 닫혀있는 지하실의 문을 발견한다. 그는 녹슨 자물쇠를 개머리판으로 부수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그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하사님? 다들 어디 있습니까? 브라운? 쾨너? 뒤리히? 응답하라!”

“바, 바우어? 저 쪽에 뭐가 움직이는 것이!”

“잡아!”

다음 순간 그 안에서 뭔가가 번쩍 하고 빛났다. 땅을 울리는 굉음이 들리더니, 우당탕 쿵쾅 와지끈 뻐그적 와그작 아그작 후루룩이 그 뒤를 이었다.

마무리는 한줄기 구슬픈 늑대 울음소리가 대신했다.

의외로 널따란 지하실의 벽 한 구석에 뭔가 거대한 짐승의 실루엣이 비쳤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점점 작아지더니 진돗개만한 크기로 줄어들어, 때맞춰 지하실 문 앞에 나타난 어떤 구부정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컹컹거리며 달려갔다.

백발의 노파가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그 짐승을 쓰다듬어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잘했다... 고얀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1. 비니



“도착했습니다, 손님.”

“고마워요.”

나는 택시 트렁크에서 짐가방을 꺼낸 후 목적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날은 유난히 햇빛이 강해서 손바닥으로 눈 위를 가려야만 했다. 빙하지대 가까이에 위치한 이 싸늘한 나라에서는 보기드문 날씨다.

“그런데... 진짜로 여기였던가.......?”

바깥에서 본 크레그손 성의 전경은 그렇게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 3백여 년 전에는 이곳 영주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대[大]요새였다고 들었지만, 그동안 거듭되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 키리냑 호수를 둘러싸고 둥글게 뻗어 있던 성채의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유실되고, 가운데의 본진[本陣]만 남아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세계대전 당시에 이 성을 소유하고 있었던 귀족 집안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해서 내부는 그런대로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 집안에서는 이 성을 매물로 내놓았고, 덕분에 지금 이곳은 우리 라스트라센 가[家]의 별장 비슷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곳이 영주의 저택이던 3백 년 전에는 고작해야 읍내에서 돼지나 잡고 있던 무지렁이 가문이었으니 출세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사업으로 축적한 재산을 투자하여 이 성을 손에 넣으려고 애쓴 사람은 다름아닌 내 할아버지였다. 그분은 소년시절부터 이 마을에서 지냈기 때문에 성채에 대한 추억이 남다른 편이었고 애정도 대단했다. 덕분에 나도 어릴 적에는 방학을 이곳에서 보내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어 있었고, 그래서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성 안의 이곳저곳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왜 그러시죠? 이곳이 아닌가요?”

담황색 콧수염을 기른 붉은 얼굴의 운전사가 내게 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옛날에 와 봤을 때에 비해 너무 작아 보여서요.”

“어릴 때는 세상 모든게 다 커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나는 택시를 떠나보내고, 앞에 해자가 파여있는 커다란 목제 대문 앞으로 가서, 어떻게 안에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려야 하나 망설이다가, 길 옆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포스트 위에 초인종 비슷한 게 있는 걸 알아차리고 그걸 눌렀다. 꾀꼬리소리 같은 기계음이 들려오더니 누구냐고 묻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네트 라스트라센이에요. 이미 연락을 드린 걸로 아는데요.”

“아아, 새 주인님이시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다리를 열겠습니다.”

육중한 철문이 앞으로 열려 다리가 되고, 그 안에 있던 철제 셔터가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 다리 위를 지나 해자를 건너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관리인인 닐센입니다. 토박 닐센. 그냥 토박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나를 맞이해 준 것은 땅딸막하지만 서글서글해 보이는 40대의 털보 아저씨였다. 뭔가를 고치다가 나온 듯 작업복 차림에 공구를 들고 있었다. 꼭 마음씨 착한 드워프를 길에서 만난 듯한 느낌을 주는, 포근한 사람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비니라고 불러주세요. 이곳에는 오래 계셨나요?”

“한 5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만 알 건 다 알죠. 안내해 드릴까요?”

“일하시는 도중이니 제가 그냥 둘러볼게요. 침실과 식당만 어느쪽인지 미리 알려주세요.”

“뭐 별로 위험한 곳은 없으니 그렇게 하죠.”

나는 침실에 짐가방을 올려놓고 성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어느 복도 한구석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음침한 계단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그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점점 어두워지는 걸 알고는 준비해 온 회중전등을 켰다. 그런데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니 문이 삐걱거리며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조그마한 형체가 계단 저 아래쪽에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오싹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낮은 비명을 지르며 전등불을 그쪽으로 들이댔다.

“나원참,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내가 오크나 트롤이라도 되는줄 알아?”

그것은 무지하게 나이먹은 어떤 여자의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녀는 빛이 비치는 곳까지 올라와서 짜증스런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오히려 자기가 더 놀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밀라?!”

“에에?”

“아, 아니야. 그럴리가 없지. 밀라는 죽었어. 그것도 벌써 오래 전에. 하지만... 그럼 대체 넌 누구지?”

아무래도 나를 다른 누군가로 착각한 모양인데... 앗, 그러고 보니 나도 내 눈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게 대체 몇 년 전이었지?

“...헬가? 헬가 할멈? 맞죠? 저 모르시겠어요? 라스무스의 딸 비니.”

“뭐야, 누군가 했더니 검은지빠귀였군!”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그녀가 나를 부르던 악의 섞인 별명이었다.

우리는 함께 계단을 올라와 복도를 거닐었다. 그녀는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일흔 살 가량의 노파였는데, 머리 위에 눌러쓴 수건 사이로 푸석푸석한 백발을 늘어뜨리고, 허리를 구부린 채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가면서, 이따금씩 멈춰서서 마른기침을 뱉었다.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놀라운데요. 어떻게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하고 하나도 안 변하셨죠? 전 할멈이 그동안에 돌아가셨을 거라고...아차차.”

“난 상관없으니 맘껏 떠들어. 나이란 건 원래 바보들이나 먹는 거니까.”

“그럼 할멈은 그렇게나 나이가 든 뒤에야 현명해졌다는 소리네요?”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합죽하게 다문 그녀의 험상궂은 입에 잠깐 냉소가 감돌다가 사라졌다.

“하여튼 만나뵈어 반가워요. 다들 옛날과는 바뀌었을거라 생각했는데.”

“바뀐 건 맞아. 검은지빠귀 네가 어릴 때는 고용인들도 많았고 친지들로 항상 바글바글했지. 기억나냐?”

“예. 그런데..”

“하지만 멍청한 네 애비가 사업을 말아먹은 뒤로는 유지비 마련하기도 어려워져서 다들 떠나보내고 마을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젊은놈들이나 불러와서 가끔 청소나 하는 정도가 되어버렸다구.”

“헤에......”

“지금 여기서 살며 일하는 건 나와 그 털복숭이 관리인,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도 의심스런 정원사 녀석 뿐이야. 네 애비가 죽었다는 얘길 듣고 나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고 생각했지. 암.”

“그러시군요...”

“그런데 네가 이걸 물려받은 게냐? 난 솔직히 말해서 네 애비가 이 성도 팔아치우고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친척도 다 해외로 뜬 판이라.”

“아버지도 이 성을 좋아했어요. 할아버지만큼 열광적인건 아니었지만.”

“난 뭐 상관없어.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지하실엔 내려오지 않는게 좋을게야.”

“왜죠?”

그녀는 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히죽거렸다.

“저주가 걸려 있거든.”

“분명 내가 아홉살 때에도 할멈은 똑같은 얘길 했었죠.”

“그냥 겁주려는 거였다면 네가 어른이 된 뒤에도 같은 소릴 하지는 않아.”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나는 호기심과 오싹함이 뒤섞인 눈으로 물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주세요. 사실은 뭐가 있는 거예요? 도서관? 고문실? 아니면 흡혈귀의 관이나 인조 괴물? 그것도 아니면 그냥 청소 도구함?”

“어허, 너무 많이 알려고 들지 마, 다쳐!”

아무래도 이 할멈이 잠든 사이에 몰래 가보는 편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화제를 바꾸어 다시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정원사라는 사람은 어디......”

“나를 찾고 있수?”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우리 앞의 복도에 검은 피부의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불량스런 표정으로 풍선검을 질겅질겅 씹으며 빨간색 베레모와 녹색 머플러를 메고 사용 연한이 다 된 듯한 전동가위와 싸구려 제초제를 챙겨든 채 너덜너덜한 멜빵바지 차림으로 분주히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는 짐을 한쪽에 내려놓고 손을 바지에 쓰윽 문지르더니 내게 내밀었다.

“쿠나 마타다라고 하우. 만나뵈어서 영광이우, 오는 길에 재미 좀 봤수?”

나는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말투는 어딘가 신경을 거스르는 면이 있어서 불쾌하게 느껴졌다.

“저는 비니예요... 재미요? 뭐, 별로.. 그런데, 이곳 분이 아니신가봐요?”

“우리 집은 파프리카 남단에서 주술용 인형을 깎아 팔던 유서깊은 집안이지. 그러나 요즘 경기가 불황이라 해외로 나서게 되었수. 누구 저주할 놈 있으면 나한테 부탁하쇼.”

“아니, 뭐, 그런 건 없지만... 잘 부탁드려요.”

“요! 할멈, 요즘도 지하 골방에서 귀신들과 노슈? 가끔은 나가서 광합성도 하셔야지 안 그러면 얼굴에 표고버섯이 자랄거유.”

“감히 누구에게 희롱이냐! 네 할 일이나 잘 하라구, 무연탄!”

신경질적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물러섰다.

“쳇, 난 그래도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아가씨, 이따가 봅시다요.”

정원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를 노려보는 할멈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 나라도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건만 어쩌다 저런 천한것들까지 오는게야.”

“예의는 없지만 악의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인데요. 사이가 안 좋나 봐요?”

“사이고 뭐고, 요즘 이 고장이 꼴이 말이 아니야.”

“왜요?”

나는 할멈의 눈에 핏발이 서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물어보았다.

“일주일 전에는 이상한 동방인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엉뚱한 길만 묻고 가더니, 이틀 전에는 웬 등산객 차림을 한 여자가 산은 놔두고 들판만 이리저리 들쑤시며 돌아다니질 않나. 바로 어제는 또......”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다 싶어서 나는 말을 가로막았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저도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그럼 됐죠?”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냥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왜 따라와?”

“어차피 구경할 거면 익숙한 사람과 함께 가는 게 좋잖아요?”

“구경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일하러 가는 중이야.”

이 할멈은 이런 사람이다.

“할멈에게도 과연 어린시절이란 게 있었을지 궁금해진다니까요.”

“....................”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창문 너머 머나먼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개인지 늑대인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호숫가에 앉아있던 물새들이 한꺼번에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2. 헬가 - 1694년



“버릇없는 녀석! 거기 서지 못해? 오늘은 기필코 버릇을 고쳐주겠어!”

듣기만 해도 끔찍한 그 쉰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엉망진창으로 해진데다 제대로 빨지도 않아서 본래 색깔을 잃고 회색이 되어버린 치마가 달릴 때마다 거추장스럽게 나풀거렸다. 숨이 턱에 차고 가슴이 칼로 에는 듯 사정없이 아파왔다. 맨발바닥에는 뾰족한 돌조각들이 이리저리 부딪히고 박혀들어왔지만 아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영양실조로 인해 가늘어진 내 다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볼품없게 느껴졌다. 마치 잠깐이라도 멈춰서면 썩은 장대처럼 맥없이 꺾일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토끼처럼 잘만 달리니 신기하기도 해라.

“잡히기만 하면 거꾸로 매달아서 백대 정도 채찍질을 하고 말처럼 물을 먹인 뒤에 육포를 떠서 오딘에게 제물로 바칠테다! 내가 못할줄 알아?”

그 추하게 갈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퀭한 눈에 술독이 올라 벌개진 얼굴을 하고 불룩 튀어나온 배를 다 떨어진 양털 셔츠로 억지로 감춘 채 양손에 깨진 병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우스꽝스런 동작으로 열심히 언덕길을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40대의 주정뱅이이며, 머리 벗겨진 망나니이고, 한물간 선원이며,

그리고 내---

-아차!

“---워, 워! 진정해, 비케!”

말이 뭔가에 놀라 히힝거리며 펄떡펄떡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마터면 내 앞의 모퉁이를 돌아서 달려오는 어떤 기수[騎手]와 정면으로 충돌할 뻔했다. 기수는 고삐를 잡고 능숙하게 말을 진정시켰고, 나는 넘어질락말락하던 몸을 겨우 바로잡으며 재빨리 길 옆으로 비켜서서 그 쪽을 올려다보고 사과하려 했다.

“아아, 어쩌면 좋지... 죄송합니다, 나으리! 용서를-”

다음 순간,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갈색 털에 흰 갈기를 나풀거리는 말 위에 활동적인 가죽옷을 차려입고 옆구리에 채찍과 단검을 찬 소녀가 앉아 있었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백금[白金]의 머리카락은 두 줄기로 가늘게 땋아내려 어깨 위에 늘어뜨린 채였고, 햇빛 때문에 옅은 갈색으로 탄 얼굴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건강미와 노련함을 풍기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어 살 정도밖에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냉정한 눈초리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맑고 푸른 눈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품이 배어 있었다. 말의 등 뒤쪽에는 금방이라도 전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잘 손질된 보호구와 병장기가 햇빛을 받아 창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끔 가다 귀하신 분들이 마을을 방문할 때 먼발치서 구경한 일은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에 비하면 내 핼쓱한 재투성이 얼굴과 이가 득실거리는 검은 머리에 볼품없는 차림새는 정말로......

“-호흡이 엉망이군. 쫓기는 중인가?”

“...예?”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리를 꺾어져라 굽히며 사과한 뒤에 냅다 뛰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아, 잠깐만....”

그러나 나는 못들은 척하고 계속 달렸다. 저기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언제 그 지독한 늙은이에게 잡힐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힐끗 뒤를 돌아다보니 그 소녀는 말등 위에 앉은 채로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외면하고 오른쪽으로 꺾어 골목으로 들어간 뒤에 다시 두 번 정도 왼쪽으로 돌아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발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저 무작정 쫓아오지 못할 길을 골라가며 달릴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어느 초라한 대장간 뒷길에 도착하여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잡았다!”

누군가의 억센 손이 내 어깨를 뒤에서부터 붙잡았다. 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술내를 풍기며 씩씩거리는, 아주 익숙한 딸기코가 하나 있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냐? 이 동네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살던 데라서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단 말이다, 이것아! 허튼 짓은 그만두고 순순히 돌아가자! 언제까지 내 속을 이렇게 썩일거냐, 엉?”

그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나는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싫어! 안 돌아갈거야! 돌아가봤자 또 맨날 술마시고 때릴거면서!”

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가 나에게 따귀를 한방 선사했고, 나는 눈에 아스가르드의 불꽃이 튀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내 머리채를 붙잡은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왔고 나는 공포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요즘들어 매를 덜 맞아서 그런지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구만. 죽은 지 어미를 빼다 박았어.”

나는 겁에 질렸으면서도 순간 화가 치밀어 소리질렀다.

“엄마 얘긴 하지도 마! 돌아가실 때 보러 오지도 않은 주제에!”

그는 나를 으슥한 벽 한구석에 밀어붙이고 주머니에서 사냥용 칼을 꺼냈다.

“오냐 그래. 이젠 어른도 몰라보고 바람이 단단히 났나본데 어디 이래도 달아날건지 두고 보자! 내가 마지막 원정 때 뭘 배워왔는지 알아?”

용감함을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만들어보이는 그의 무모함을 익히 아는 나로서는 그가 뭘 하려고 하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새된 소리를 질러대며 발버둥을 쳤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내 얼굴에 칼날을 들이댔다.

“진짜 고통이 뭔지 알면 좀 고분고분해지겠지.”

“싫어-! 놔줘!! 저질! 악당! 주정뱅이! 말미잘! 오징어!”

“입 닥치지 못해?”

바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대왕오징어의 촉수같은 검은 물체가 번개같이 뻗어와서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칼을 나꿔챘다. 그는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았고 나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쫓아갔다. 아까 만났던 그 귀하신 몸이 채찍을 든 채 말을 몰고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는데, 그의 칼은 바로 채찍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 아이에게 펜리스의 발톱자국이라도 새겨줄 작정인가?”

“뭔 상관이야, 참견 마!”

그는 상대가 그다지 나이들어 보이지 않고 게다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술에 취해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 바로 전에 고삐를 당겨 말이 앞발을 들고 일어서게 한 다음 말을 탄 채로 그의 머리 위를 살짝 뛰어넘어 내 옆에 와서 섰다. 당황한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는 들고 있던 채찍을 그의 등짝에 사정없이 내리쳤고 그는 내장이 쪼개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채찍 몇 대를 더 때리고 나서 그녀는 일갈[一喝]했다.

“덤벼들기 전에 상대를 좀더 잘 살피는 게 어떨까?”

“으, 무슨......”

그녀가 자기 뒤에 고정되어 있던 방패를 들어 그의 눈앞에 내보였다. 그 위에는 몇 가지 식물과 동물을 장식적으로 짜맞춘,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툴툴거리며 그것을 쳐다보던 노친네의 얼굴 빛이 갑자기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잠시동안 우물쭈물하더니, 마침내 도약할 준비를 하는 개구리처럼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런 황송할 데가. 올라프슨 가[家] 분이신줄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이 문장을 알아보는 걸 보면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이군. 고개를 들라!”

그는 쭈뼛거리며 머리를 들고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아직까지 벌벌 떨고 있었던 팔다리를 진정시키며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눈에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고개를 저으며 냉정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백주 대낮에 여자애를 상대로 무슨 험한 짓을 하고 있는가? 저쪽 빙하 건너의 사나운 야만족들도 그런 짓은 하지 않거늘.”

“그, 그것이 말입죠... 소인의 여식[女息]이옵니다만, 하도 버릇이 없고 집안 일도 게을리하여 혼구멍을 내려던 참이었고, 다른 뜻은 없었사옵니다. 부디 선처를...”

“자기 자식이면 개 다루듯 맘대로 해도 좋다는 소린가?”

“허어, 전하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란 매를 들지 않으면 도통 말을 듣지 않는 것들입죠. 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이따금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될 수도...”

내가 들어도 도무지 말이 안되는 소리를 잘도 하고 있다.

“경우에도 맞지 않는 문자를 쓸 작정인가? 확실히 자녀를 교육할 때는 매를 들면 안된다는 법은 없다. 허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칼질을 하고 상처를 내도 좋다는 법 또한 없지 않나! 빙하 요새의 감옥에서 몇 년 살아보고 싶은가?”

“처, 천만에요! 전하의 말이 백번 옳습니다요. 제가 술이 과하다보니 좀 생각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번 한번만 좀 봐 주십시오. 취중에 일어난 일은 오딘도 눈감아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에헤헤”

그는 어거지로 웃는 얼굴을 꾸며대면서 갖은 아양을 다 떨고 있었다. 그가 초라한 모습으로 마구 혼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고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스러운 기분이 들어 기분이 나빠졌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로 그가 내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자)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알아들었다면 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보냈다간 자네는 또 딸에게 못할 짓을 하고 술이나 가난에 그 탓을 돌릴 터.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

“하오면 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는 망설임없이 말안장에 붙어있던 비단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그에게 던졌고, 그는 엉겁결에 그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는 꾸러미를 풀어 속을 확인하더니 눈이 등잔만큼 휘둥그래져서 귀하신 분을 쳐다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반짝거리는 뭔가가 가득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직후 그녀는 내게 손짓을 하여 자기 쪽으로 다가오게 했다. 나는 내심 불안했지만 그녀의 눈초리에 압도당하여 조심스레 그쪽으로 걸어갔다.

“저, 전하......?”

“이 아이를 데려가겠다. 모자라면 나중에 성의 재무관에게 청구하라. 하지만 그 돈으로 술이나 퍼마시고 쓸데없이 낭비한다면, 그때는 진짜 극형을 내리겠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아, 알겠사옵니다! 그 아이는 전하 뜻대로 하시옵소서! 좀 버릇이 없고 못났지만 그래도 손재주 하나는 쓸만합지요.”

그는 술이 확 깬다는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소리쳤다. 애써 무게를 잡으려 하고 있었지만 ‘이게 웬일이냐 땡잡았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건 눈빛만 보면 금세 알 만했다. 뒷집 과부와 놀아나는 데 방해되는 나를 떠나보내는 게 그리도 좋은가? 나는 모멸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참동안 잊고 있었던 발바닥의 상처가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집행관을 보내어 계속 그대의 생활을 지켜보게 하겠다. 돌아가라.”

그는 꾸러미 속의 내용물을 세어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다가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꾸러미를 챙겨든 뒤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고는 성큼성큼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기 바로 직전에 내 어깨를 툭 치며 ‘전하 잘 모셔라. 괜히 사고쳐서 돌아왔다간 알지?’라는 말을 능글맞게 속삭였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끼눈으로 땅바닥만 쳐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사라져가는 주정뱅이의 뒷모습을 경멸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반쯤 겁먹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위기를 벗어난 건 좋았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부자유스런 몸이었고 나의 처분을 결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주정뱅이 꼰대도 싫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귀하신 몸을 믿는 것도 어려웠다. 그야말로 펜리스를 피해서 달아나니 미드가르드의 뱀이 달려든 꼴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많이 놀랐겠군.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지 말고 이리로 오도록.”

나는 그 말대로 했다. 그녀는 말 옆구리에 고정된 보호구 등을 풀어서 자기 몸에 착용하고 무기는 위치를 바꾸어 말안장 옆쪽에 비끄러맸다. 그리고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타라는 시늉을 했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전하! 저는 걸어가도 충분합니다.”

“그 발로 말이냐?”

나는 그제서야 온통 까지고 멍든 내 발을 내려다보고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사는 곳까지는 갈길이 멀다. 아무 말 말고 타는게 좋을게야.”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말등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난생 처음 말에 다가가는 것이다보니 요령을 잘 알 수가 없어서, 그녀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참동안 고생한 뒤에야 안장 위에 오를 수 있었다.

말등에 손을 얹은 채 엉거주춤하게 균형을 잡고 앉아있는 내 앞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훌쩍 뛰어오른 그녀는 고삐를 잡고 말을 출발시켰다. 옆에 매달린 방패와 활이 시계추처럼 조금씩 흔들거렸고 우리 둘 역시 말의 몸놀림에 따라 미묘하게 양 옆으로 흔들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이름은?”

“........”

긴장이 풀리고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잘 들리지 않는다.”

“-헬가입니다. 헬가 니벤헤임.”

“멋진 이름이군. 나는 올라프슨 가의 아스트리드다.”

나는 당신 이름이 더 멋지다고 받아칠까 생각하다 주눅이 들어 그만두었다.

“예, 전하.”

“딱딱한 경칭은 그만두지. 나는 아직 관직에 오른 것은 아니다.”

“예..... 아스트리드님.”

“몇 살인가?”

“열 셋입니다.”

“가족은?”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동생 둘이 있었으나 작년에 전염병으로...”

“안됐군. 그 주정뱅이와 함께 사느라 고생이 심했을 테지.”

“황공하옵니다.”

안됐다고? 그래, 당신네는 그 한마디로 모든 걸 덮어두려 하지. 그러고 나서 자기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하며 제자리로 돌아가 음유시인의 노래나 즐기면 그만이지. 하지만 우리는 그 다음부터가 시작이라구. 언제나 그렇듯이.

“--부터는 내리막이니 조심해.”

“예? 방금 무슨............... 아앗!”

완만한 속도로 걸어가던 말이 어떤 비탈길에서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달려내려가기 시작하자, 딴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굴러떨어질 뻔했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앞쪽에 앉아있던 아스트리드의 허리를 꽉 움켜잡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팽팽하게 긴장한 등에 몸을 밀착시켰다.

흙먼지를 휘날리며 민첩하게 달려가던 말은 평지가 나오자 서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가 고삐를 당기고 말을 길 한쪽에 멈춰서게 했다.

나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트리드가 뒤를 살짝 돌아보며 짓궂게 웃음지었다. 지상에 내려온 발키리의 미소.

“처음 타는 것 치고는 꽤 대응이 빠르군?”

나는 저도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너무나 갑작스러워... 무례를 범하려던 게...”

“상관없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뒤에 태웠으니까.”

“그러나 저 때문에 전하의 옷이...”

그녀의 허리춤은 내 손 때문에 회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울상이 되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말도록.”

나는 의외로 마음이 넓구나 하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녀의 다음 말이 모든 것을 뒤집어버렸다. 해맑은 얼굴로 날리는 토르의 쇠망치.

“어차피 내 세탁물은 모두 그대에게 맡길테니 잘 된 일 아닌가?”

“..................그, 그렇군요. 그렇죠...”

“그럼 다시 출발할까?”

나는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앞날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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