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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3] 헬가 3/6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49
 


5. 비니



“이곳이 이른바 ‘유물관’이죠.”

닐센과 나는 3층의 어느 방 앞에 와 있었다. 그곳에는 이 성채의 모든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자료와 시대별 유물들이 고스란히 정리되어 있었는데, 문화재 수집에 열심이었던 할아버지가 시작해서 아버지 때에 마무리한 전시물이었다. 전시된 유물들은 가짓수는 많았지만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라 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3백 년 전에 썼던 도자기라던가 등잔 받침이라던가 벌레먹은 말안장이라던가 석고로 어설프게 만들어진 등신대[等身大]의 성모상 같은 것들 뿐이었으니 주목을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만약 이 성을 팔아치운다 해도 유물들을 붙여서 값을 좀 올릴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은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중요한 유물들은 다 여기 모여 있는 거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나머지가 있다고 해도 아마 창고에나...”

“가격보다 찾아내는 비용이 더 들겠네요. 시장성 제로군요.”

“솔직히 말해서 마이너스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이 성은 주거성은 좋지만 나머지는 영 꽝이라서.”

“토박의 생각은요?”

“제게 물으신다면 한번 살아보시고 천천히 결정하시라고 하겠어요. 경치도 좋고 집도 살만하고 귀찮게 구는 통신판매 광고도 없고...”

“참고할게요.”

닐센은 외벽 수리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쪽으로 향했고 나는 몇 가지 목록을 검사하기 위해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성채 뒷길의 으슥한 곳에서 누군가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은 기억은 있는데 어딘가 낯선 그런 목소리였다. 마치 이제까지 로덴하겐 사투리로만 말해 온 어떤 사람이 벨싱키 표준어를 지껄이는 것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D는 ...을 주시하고 있더군요. 아직 ...에겐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확증이 없고 공연히 ...만 퍼뜨려서는 일이 ...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 ...가 오는군요. 다음에 다시 ...하겠습니다. 그럼.”

목소리가 끊어지고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리고 달려가려 하는 순간에 내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짜증을 억누르며 전화를 꺼내어 정중하게 받았다. 내가 아는 목소리긴 했지만 반갑지는 않았다.

“글쎄 에릭슨 씨. 몇 번이나 말해야 아시겠어요? 아직은 성채를 팔 계획이 전혀 없으니 좀더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요. 아뇨, 나는 분명히 ‘아직’이라고 했어요. 아무리 당신이 여기를 사들여서 크런치랜드나 마담 솔베르 기념관같은 걸 만들고 싶어도 세상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거라고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부동산업자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황급히 끊은 뒤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둥지둥 그곳을 떠나 정원 쪽으로 다시 와 보니 거기서는 무사태평한 마타다가 스프링클러 장치로 잔디에 물을 주면서 접는의자에 누워 만화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할멈이 기르는 황소만한 개 시구르드가 다리를 뻗고 누워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좋게 보면 한가한 거고 나쁘게 보면 빈둥빈둥이다.

나는 일부러 눈썹을 찌푸려 보이며 말을 걸었다.

“마타다씨, 다른 일은 없나봐요?”

“아, 로스트레선! 있으면 가져다주쇼. 허벌나게 망쳐 드리지.”

“됐어요.”

나는 창고에서의 일을 마치고 다시 유물관으로 올라갔다. 아까 보았던 그 성모상이 왠지 신경쓰여서 다시 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저런 동네 교회에서도 안 받아줄 허술한 작품이 어째서 이런 유서깊은 건물에?

가까이 다가가서 유리 커버를 벗기고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의외로 이곳에 살았던 누군가가 신앙심이 깊어서 어설프게나마 직접 만든 거라던가 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시험삼아 톡톡 두들겨 보았지만 속이 빈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손대다가 손상시킬까봐 도로 커버를 덮었다.

‘.....이런 거에 신경쓰는 내가 바보같아... 나도 꽤 심심한 모양이야..’

그런데 어느 새 나를 따라왔는지 유물관 문턱에 서 있던 시구르드가 큰 덩치를 뒤뚱거리며 이끌고 들어오더니, 그 성모상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것을 덮고 있는 커버 앞으로 가서, 마치 뭔가를 조르는 것처럼 앞발로 그 위를 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 있던 빗자루로 녀석을 내쫓았지만 시구르드는 마지못해 나가면서도 계속해서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정말이지 도움되는 식구가 하나도 없다니까....... 누구누구는 빼고..”

피곤해진 나는 옆의 자료들을 심심풀이로 들춰보다가 마침 3백 년 전의 이야기를 다룬 지방 역사책을 꺼내보았다. 전공과는 관계 없었지만 대학 때 친구를 따라 중세 바인란드 지방의 역사를 다루는 수업을 들었다가 이 지방이 의외로 드라마틱한 역사를 갖고 있는 걸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우리는 심심풀이로 배운 중세 바인란드어를 가지고 엉터리 연극을 하기도 했다.

어디보자, 당시 영주의 이름이...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올라프슨.

‘......에이 설마, 그냥 우연이겠지. 헬가가 아무리 독종이래도 3백 년이나 살았을까봐?’

그런데 그 책에는 더욱 더 기상천외한 기록이 있었다.

‘18세기 초에 행해진 바겐홀름 공국과의 협정은 당시 영주의 딸 검은지빠귀 아스트리드가 주도한 모험적인 원정을 통해 얻어진 성과였다. 그때 그녀를 위험에서 구해내고 협정 서류를 본국에 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헬가라는 이름의 시녀...’



6. 헬가 - 1702년



“바겐홀름 공국에 말입니까?”

“아버님이 저렇게 위독하시니 어쩔 수 없지. 내가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너무 위험합니다! 빙하 지대를 건너서 배로 한참 가야...”

“그러니까 더더욱 내가 가야 한다.”

그 악몽같은 축제가 있은 뒤로 3년이 흘렀고, 주인님과 나는 전만은 못해도 다시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이에 흐르는 서먹한 기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현재는 그동안 나이가 들고 병약해지신 시구르님의 대행으로서 아스트리드가 성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풍차의 나라에서 왔다는 고집쟁이 이주민의 후손인 반 로겜 부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스트리드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그는 하얗게 센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다시 전하를 설득하려고 말을 꺼냈지만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시녀이자 비서로서 참석하여 그녀가 앉은 의자 옆에 서서 지켜보던 나도 조마조마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아스트리드님 혼자서는 곤란합니다. 누군가 지켜줄 사람이..”

“그거라면 내가 맡겠소.”

회의실 문에 문짝 대신 드리워진 휘장을 걷고 섬세하면서도 억세게 생긴 30대의 남자가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는 아스트리드와 같은 백금의 머리칼과 푸른 눈을 갖고 있었지만 덩치는 한뼘 정도 더 컸고 얼굴은 용맹무쌍하나 어딘가 시인같은 멋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곁눈질로 훑어보고 그가 전에 들은 소문의 주인공임을 알았다. 바로 그, 라군헤임 성의......

“떡갈나무 군델! 당신이 어떻게 여길?”

“거의 10년 만이지, 검은지빠귀 아스트리드? 숙부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님이 날 이리로 보내셨는데, 도중에 광풍을 만나서 좀 늦어졌지. 내가 그대의 원정에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어.”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인데, 검은지빠귀는 아스트리드의 어릴 때 별명이었다. 유난히 그 새를 좋아해서 붙여진 것이라는데, 본인도 별로 싫어하지는 않았는지 결국 성인식 때 그것을 별호[別號]로 택하게 되었다. 재판장에 끌려나온 나를 검은지빠귀라고 부른 것도 그다지 나쁜 뜻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이죠! 당신이 간다면 발할라를 통째로 들고 가는거나 마찬가지예요!”

“발할라에는 비유하지 말아줘. 그러잖아도 내가 데려온 친구들은 당신이 발키리라며 곁에 안 가려고 난리더라구. 하핫!”

나는 생전에 아스트리드가 그렇게 발랄하게 기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괜찮겠지, 부관?”

“으음, 아스트리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군델님이 동행해 주신다면야... 좋습니다. 하지만 안 계실 동안의 집무는...”

“그대와 아네르슨이 같이 맡아주게. 그 사람은 내정에 정통해 있고, 그대는 군사에 능하니 서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아네르슨이 발드헤임에서 돌아오는 대로 계획을 짜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착착 회의를 진행시켜 나갔고 마침내 끝이 다가왔다.

“그러면 구체적인 인원 편성과 물자 조달은 내일 아침까지 끝내고, 점검이 완료되는 대로 출발, 앞으로 1개월 안에 바겐홀름에 도착해서 협상을 끝내도록 하지. 헬가, 그대는 내가 없는 동안 여기 남아서 내 물건들을...”

그 순간 나는 왠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저도 모르게 끼여들었다.

마치,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예감.

“전하, 저도 함께 가도록 해 주십시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험한 길이야. 그대에겐 너무 위험하다.”

“전하에게서 그런 말씀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저도 전하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시려는 겁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관리와 무장[武將]들이 눈만 껌뻑이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몇 초 동안 무언[無言]의 싸움을 벌였다. 영원과 같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뒤, 내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을 짐작했는지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딘가 다소 지친 목소리였다.

“---알겠다. 함께 가도록 하자. 하지만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즉시 돌려보내겠다. 그점은 알아다오.”

“황공하옵니다.”

우리는 준비가 완료되자마자 떠났다. 바다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두터온 털옷과 말린 고기로 무장한 채, 휘날리는 눈보라를 뚫고 며칠간 개썰매로 빙하 지대를 건넌 다음, 트로나르 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범선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

가는 길에는 사실 그다지 많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서 힘들긴 해도 위험스런 여행은 아니었다. 본디 바닷가의 선원마을에서 자라난 나는 이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나는 아스트리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일과였다. 분명히 그녀는 평소 때와는 어딘가가 달랐다. 낮에는 용감하게 무리를 이끌고 여행길을 독려하면서도, 밤만 되면 뭔가 넋이 나간 듯 눈보라 때문에 달도 별도 잘 안 보이는 하늘만 죽어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떤 때에는 자기 손에 낀 영주의 반지와 군델이 잠들어 있는 가죽텐트 쪽을 번갈아 쳐다보며 뭔가를 저울질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하루는 남들 눈을 피하여 으슥한 곳에서 함께 뭔가를 얘기하는 두 사람을 우연히 보았는데, 아스트리드는 내가 보는 것을 알아채는 즉시 군델과 극히 사무적인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내게 뭔가 숨길 일이라도 있나?

“그런 건 없느니라!”

물론 그녀는 딱부러지게 말했다.

그러나 군델만 나타나면 꿈꾸는 듯한 눈이 되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는담?

그거야 어떻든 우리는 훌륭하게 예정된 기간 내에 바겐홀름 공국에 도착했고, 아스트리드는 특유의 외교술로 (공부가 싫어서 내게 떠넘겼다면서 알건 다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절묘한 협상을 벌여 우리 쪽에 이득이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사고도 불상사도 없었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원정이 되었다.

문제라면 딱 하나 있기는 했다.

“헬가, 어딜 다녀오는 거지?”

나는 미리 준비해둔 말로 둘러댔다.

“서적 암시장입니다, 전하. 전에 말씀하셨던 아그리파의 고서를 찾으러...”

“그래서 찾았는가?”

“유감스럽게도,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가 볼까요?”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만 들어가 쉬게.”

“예, 그럼 전하도 평안히...”

나는 뒤통수에 확실하게 꽂히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그 방을 나왔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바로 돌아오는 길에 일어났다.

“선장, 빠져나갈 길이 없는건가?”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돛이 부러지기 직전입니다!”

“방향조절이 안됩니다! 부상당한 사람은 아래층으로!”

“제기랄, 녀석들이 연기를 피워서 앞이 안 보여!”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가 이 진로를 통해서 간다는건 극비인데!”

“지금 그게 문제야! 어떻게 뚫고 나갈지나 생각하자구!”

빙산이 가득한 북해의 수면 위에서 우리가 탄 쾌속범선 발드헤임 호는 해적선 세 척의 합동 공격을 받아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활과 석궁과 구식 투석기 몇 대를 갖추고 있는 것에 비해, 저들은 동방에서 수입한 화약과 갈고리 달린 로프와 고래 심줄같은 근성까지 갖추고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쇠뿔을 반으로 가른 듯한 가늘고 뾰족한 형태의 소형범선에 나눠타고 우리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압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세 척 중 한 척은 몸통 박치기라는 극단적인 수로 물리칠 수 있었지만, 우리 쪽의 피해도 가볍지 않았다. 돛이 부러져 너덜너덜해졌고 방향키가 망가졌으며 옆구리 한쪽에 구멍이 뚫렸다. 승선한 22명 중 일곱 명이 바다 속으로 사라졌고 네 명이 부상당했다. 남은 열한 명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뜻밖에도 그 상황에서 뭔가 신선한 생각을 제시한 것은 군델이었다.

“아교를 먹인 조그만 보트가 하나 있지?”

“예, 탈출용이긴 합니다만 이런 상황에선...”

선장인 개암나무 호가드가 눈을 멀뚱히 뜨고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아스트리드와 시녀를 제외한 9명은 마침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자들이다. 이 인원을 3조로 나눠서 3인은 배를 지키고 6인은 각각 조를 짜서 다른 배 2척에 특공을 가하여, 두 사람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자!”

“두 사람이라니, 설마, 군델.....”

“걱정마, 난 안죽어. 이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아버님과 잘 헤쳐왔다고.”

“하지만 나만 갈 수는 없어! 내 마법도 미숙하지만 전투에 도움이 될 거야. 이런 때에 지도하는 자가 도망치면...”

그는 갑자기 열정적인 몸짓으로 그녀의 두 어깨를 감쌌다.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아버지처럼.

“아스트리드.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너야. 네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에 돌아가서 바겐홀름과의 협상결과를 알리지 못하면 기껏 준비해둔 교역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고 그러면 백성들의 생활도 어려워지겠지. 게다가 영주 대행인 네가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남아있는 자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칠거야. 우리들은 어찌되든 너는 한시 바삐 돌아가지 않으면 안돼. 시녀는 여기에 있어봐야 전투에 도움도 안 되니 너와 함께 가는 편이 더 좋을거고.”

도움이 안된다고라? (또 울컥)

뺀질한 군델치고는 꽤 쓸만한 정론[正論]을 내놓은 셈이었지만 여전히 부하를, 아니 그를 걱정하는 아스트리드는 어째야 할지 모르는 표정을 짓고 그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싼 채 서 있었다.

군델은 잡혀있던 손을 풀고 칼집을 움켜쥐었다.

“야, 검은지빠귀,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래두? 10년 전에 말했었지, 네가 위험에 처하면 반드시 내가 곁에 있겠다고. 그 약속을 지킬 기회가 온 걸지도 몰라.”

“군델.......”

“꼭 살아서 돌아갈게. 지금은 나를 믿고 네가 살아줘. 일생일대의 부탁이다.”

군델은 자기가 차고 다니던 단검 중 하나를 떼내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것을 잠깐동안 내려다보던 아스트리드는 비장한 어조로 답했다.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하지만 한가지는 명심해.”

“뭔데?”

“살아돌아오지 못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크하핫! 당연하지. 네 시녀나 잘 지켜줘라.”

그는 내 쪽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고 나는 부루퉁해져 고개를 돌렸다.

호가드와 다른 선원들도 찬성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이렇게 두들겨맞으며 약해질 바에야, 중요한 사람을 먼저 보내고 걱정없이 실컷 싸우는 게 그들의 전사로서의 기질에도 맞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질이다.

그들은 재빠르게 인원을 배정하고 해적선들이 소강상태에 빠져 쉬고 있을 때 (말하자면 새벽녘에) 전광석화처럼 미리 준비해 둔 널빤지를 배 사이에 걸치고 슬그머니 넘어가서 눈에 보이는 해적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조타수 자리로 달려가 배의 방향을 변경, 우리 배와의 간격을 넓히고 보트가 빠져나갈 공간을 확보했다. 그 사이에 아스트리드와 나는 중요한 물건 몇 가지만 싣고 보트에 올라탔다. 그리고 배들의 배치가 바뀌는 순간 우리는 바다를 향해 출발했다.

해적들이 깨어나 반격을 시작한 듯 천둥같은 고함소리와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화살이나 포탄에 맞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숙이고 열심히 노를 저었다. 북해 특유의 차가운 해류가 우리의 보트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때 해적선 쪽을 지켜보며 노를 젓던 아스트리드가 비명을 질렀다.

“군델! ...맙소사! 아냐, 그럴리가!”

“아스트리드님, 왜 그러시죠?”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며 겁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게 말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한 기분나쁜 음성으로.

“군델이... 군델을 닮은 사람이... 내게 손을 흔들다가... 도끼에... 하지만... 아니겠지? 군델은 아니겠지? 살아오겠다고 했는데... 분명 그렇게 약속했는데...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나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노를 멈추고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차리세요! 지금은 아스트리드님 본인을 챙기셔야 하잖아요! 군델님도 분명 아스트리드님이 여기서 약해지면 싫어하실 거라고요! 네?”

“내가 약해지면..............”

그녀는 잠시동안 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보트 옆 수면에 불발탄이 떨어져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다시 노를 잡았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고 다음날 점심때 기운이 거의 다 빠질 무렵에 항구에 도착했다. 거기서 이틀을 기다려 보았지만 군델 일행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수평선을 바라보며 하루종일 서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헬가, 나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를 두고...”

“무슨 말씀이세요! 일어나셔야 합니다. 영주님은, 백성들은, 전하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은 어떡하구요! 여기서 포기하시면 안됩니다!”

나는 체온을 잃어가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우리는 또 다시 액운에 부딪혔다. 항구에서 식량과 개썰매를 조달하여 빙하 지대로 들어선 우리는 몇 년만에 처음으로 찾아온 거대한 눈보라를 만난 것이다. 갈 때 만났던 눈보라들은 이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었다. 사방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버린 눈과 얼음의 폭풍 때문에 우리는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 빙하 한구석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동굴 속으로 몸을 피했다.

썰매를 끌던 개들도 대부분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버리고 이제는 눈에 띄게 새파란 털을 가진 한 마리만이 살아남아 우리 곁을 지키고 있었다. 좀 덩치가 커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몇번 나막신으로 두들겨 패 주고 초보적인 마법으로 불꽃을 보여주니 (이상한 주인을 모시다보면 별걸 다 배운다) 고분고분해졌다. 원 주인에게 그 개의 이름을 들어두긴 했는데 눈보라로 인해 다 까먹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델 생각에 점점 의욕을 잃어가던 아스트리드가 열병에 걸려 앓아눕고 말았다. 군델의 말과는 정반대로 내가 그녀를 지켜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가져온 탕약과 양피지에 적어놓고 다니는 몇 가지 치유 주문을 시험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좋은 약도 사랑 때문에 멍든 사람의 가슴을 치료할 수는 없다.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웠다. 그리고 지금 그녀도 배워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죽어버리면 그걸 배운 의미가 없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나는 빙하의 얼음을 깨어 물수건을 만들고 그녀의 달아오른 이마를 식혀주었다. 잘 안 켜지는 부싯돌로 모닥불을 피우고 남은 육포와 곡류로 죽을 끓여 어떻게든 그녀에게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의욕이 없어서야...

“...신임장과 협정 문서가... 저 상자에 들어 있다. 몇가지 중요한 것은 이 자루에... 채워 두었고, 약과 주문서는 그대가 더 잘 알겠지... 여기서 기다리다가 눈보라가 그치면... 재빨리 빠져나가... 성으로 가라. 저 개는 이곳 출신이니... 그대를 안내해 줄 거야... 난 상관...말고...”

열에 들뜬 채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던 그녀가 마침내 잠들었다.

이윽고 눈보라가 한동안 잠잠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잠시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심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까지는 털옷이 어떻게든 추위를 막아주고 있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여기 있으면 위험했다. 나는 중요한 물건들을 간추려 자루 두개에 나누어 넣고 필요없는 것들은 모두 버린 후 그 자루를 내 가슴 쪽에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는 썰매의 잔해를 이용하여 들것 비슷한 것을 엮고 그 위에 아스트리드를 눕힌 후 남은 밧줄로 그녀를 단단히 고정시킨 뒤 들것 채로 등에 짊어졌다. 다행히도 그녀의 키는 나와 비슷했고 쇠약해진 탓에 몸무게가 심각할 정도로 줄어 있었다.

나는 모닥불을 끄고 개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소리질렀다. 녀석은 만약을 대비해서 아스트리드가 걸어준 올라프슨 가의 휘장을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되든 안되든 나도 몰라! 가자, 멍멍아!”

“멍!”

그녀석도 내 목소리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기운차게 앞으로 달려갔다. 아스트리드가 먹지 않고 남긴 죽을 전부 먹이고 충분히 쉬게 했기 때문인지 상당히 기운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동굴 밖으로 나와서 기억나는 대로 길을 짚어가며 발드헤임 방면으로 가는 길을 찾아헤맸다. 눈보라가 시도때도 없이 다시 찾아와 우리를 교란시켰지만 개는 신기하게도 옳은 길을 찾아내어 서서히 우리를 인도해 갔다. 내 등 뒤에서는 고열에 시달리는 아스트리드가 가끔 가다 헛소리를 하거나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헛소리의 열마디 중 한마디에는 꼭 군델, 시구르님, 돌아가신 어머님, 그리고...

“헬가... 헬가... 어디 있어? 그대가 보이지 않아. 어디에 있는거야? 헬가!”

보일 리가 없지.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여기에 있어요! 아스트리드님 바로 뒤에요! 저는 항상 여기에 있었어요! 안 들리세요?”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듣지 못한 듯 계속 헛소리를 되풀이했다.

좀 더 걸어가다 들것이 풍압[風壓]으로 인해 망가져서 우리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결국 나는 아스트리드를 업고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에게도 마침내 공복과 추위와 피로가 사이좋게 찾아왔다.

내 다리는 물먹인 솜처럼 무거워지고, 눈은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하기야 눈보라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그전에도 흐릿하기는 했지만.

‘......안돼...... 여기서 쓰러지면... 그럴 수 없어... 안된다구...’

내 발자욱 소리가 달라진 걸 눈치챈 개가 내 쪽을 돌아보고 짖어댔다. 나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입술이 얼어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보이려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주술에 걸린 점토인형처럼 앞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나갈 뿐이었다. 내 등을 통하여 뒤에 업힌 주인의 체온이 느껴져 왔지만 점점 싸늘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내 쪽의 체온이 내려가고 있는 건가?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당신을 죽게 할 순...없어... 당신도 나같은... 그런........’

나는 마침내 자연의 위력에 항복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아스트리드의 경직된 손발이 내 엎어진 몸뚱이 위에 멋대로 겹쳐지는 게 느껴졌다. 개가 우리 쪽을 돌아보고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리도 점점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저 자고만 싶었다.

계속해서 짖던 개는 우리를 버려두고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결국 너도 우리를.... 잘먹고 잘살아라... 이 개같은....... 아참... 원래 개였지......’

한동안 안 들리던 환청이 다시 들려왔다. 그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귀에 꽂힌다. 그러나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내게 그 의미를 파악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꿈결에 들려오는 바람소리처럼 느껴질 뿐.

‘저기 저거 보여? 늑대인가?’

‘아냐, 개처럼 보이는데? 왜 저리 급하게 달려오지?’

‘허리에 뭔가를 감고 있어! 횃불 좀 가져와 봐!’

‘올라프슨의 문장이잖아! 빨리 촌장님께 알리고 저 개가 온 방향을 수색...!’

나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내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나는 아스트리드의 침실에서 병상에 누운 그녀를 간호하다가 피로가 쌓여서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기대어앉은 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중이었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눈을 뜬 것은 살며시 내게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일어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 병상에는 아스트리드가 여느때와 다름없이 누워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묘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호흡도 고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베겟머리로 살며시 다가가서 무미건조하게 속삭였다.

“호흡이 엉망진창이네요. 주무시는 거 맞아요?”

“-프흠!”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다 살아난 주인에게 할 말은 아니라고 봐.”

“기운을 차리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나는 쌀쌀하게 되받았다. 그녀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대가 자고 있는 동안에 아네르슨이 들어와서 얘기해 줬어. 나와 문서를 짊어지고 루벤하겐에서 발드헤임 근처까지 눈보라를 맞아가며 걸어왔다던데? 깨우려고 하길래 피곤할테니 그냥 놔두라고 내가 말렸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아버님이 살아계신 동안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어. 바겐홀름과의 사업도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겠고. 무엇보다도 그대를 잃지 않아서 기뻐.”

“.........군델님은요?”

나는 일부러 심술을 섞어 물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호가드와 다른 선원 두 명만 겨우 살아돌아왔지. 나머지는 아마......”

그녀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내 눈을 피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 할 때 문이 활짝 열리고 반 로겜 공[公]이 시퍼런 털의 개 한 마리를 끌고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정말로 기쁩니다. 그래서 제가 애초부터 이 원정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 말을 하며 일부러 눈썹을 치켜세웠다) 군델님과 전하가 한통속이 되셔서 고집만 부리지 않았어도...”

“고작 그 얘길 하러 내 방까지 온 건가, 부관?”

그는 차렷자세를 취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물론 아닙니다. 이 개의 용맹한 활약 덕분에 두 분이 구조될 수 있었다는 걸 알려드리려고 온 거죠. 니벤헤임 양이 발드헤임에서 불과 몇 리 떨어진 지점에 맥없이 쓰러졌을 때 (그는 이 말을 하며 양해를 구하듯 내게 미소지었다) 이 개가 마을까지 달려가서 사람들을 데려왔거든요. 그래서 영주님께서는 이놈을 아주 귀여워하십니다. 아예 이름도 지어주셨죠. ‘시구르드’라고.”

“아버님다운 이름이야.”

그녀는 냉소적으로 말하면서도 손을 내밀어 그 개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시구르드가 기분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반 로겜 공은 성의 군사적 상황에 대해 몇마디 알려주고는 몸조리 잘 하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시구르드는 나와 잠시 장난을 치다가 벽난로가에 쪼르르 달려가서 눕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잠시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다소 혼란스런 빛을 띤 채 무언가를 갈구[渴求]하고 있었다.

“헬가.”

나는 그 말 다음에 무슨 얘기가 나올지 두려워져서 일부러 눈을 피했다.

“한참 늦은 얘기지만, 그대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가만히 눈길을 내리깔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괘념치 마십시오. 이미 죽은 사람의 일이고, 저는 다 잊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그 청년을 사랑했지? 그것이 비록......”

“...짝사랑이라 해도 말이죠. 그러나 이젠 더이상 전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전하도 군델님을 잃었으니까요.”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것과는 별개야. 군델을 잃은 건 슬프지만, 그는 임무를 다하다가 명예롭게 죽은 거다. 그러나 그대의 경우는 내......”

나는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조용히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를 않아서 목소리가 평소보다 어색하게 들렸다. 내가 말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멀리서 들려오는 남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내게 자제력이 없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전하는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의미지?”

그러더니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의아함에서 의혹으로.

“.........설마! 그때 암시장에 갔다는 건........”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암시장에 간 건 사실입니다. 아그리파의 책을 찾은 것도 거짓은 아니었죠.”

“그러면...?”

“하지만 그때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었어요. 어릴 때 만났던 어떤 선원과 우연히 다시 만났답니다. 제 애비라는 인간과는 달리 꽤 좋은 사람이었죠.”

“선원?”

“그는 제 어머니 쪽의 친척이고, ...... 해적의 정보원이었죠.”

그녀의 얼굴이 놀람과 흥분으로 가득한 화려한 색깔로 물들어갔다.

“그에게... 우리 진로를 알려 주었나?”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까지 잘 알아왔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완벽하게 낯선 얼굴을 보여주었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 무언[無言]의 응시 속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나는 더이상 얘기하지 않고 그 방을 나왔다. 시구르드가 잠에서 깨어나 칭얼거리며 내 무릎에 매달렸지만 나는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나갔다. 아스트리드가 어떤 심정으로 내 뒷모습을 지켜보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긴 복도를 지나가는 데 어느 방으로부터 또 다시 환청이 들려왔다.

‘아스트리드님이 무사히 돌아오신 건 무엇보다 다행이지만, 이번 원정에서 잃은 것도 많았소. 군델님의 전사[戰死]는 우리 뿐만 아니라 라군헤임에게도 큰 손실이오.’

‘한동안은 바겐홀름과의 교역으로 정신없게 생겼습니다. 생산량을 조절하여 수급을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그점에 대해서 주의해주길 바라네 아네르슨. 그나저나 시구르님의 건강이 예전만 못하니 그것도 걱정이군. 따님이 돌아오셔서 호전되긴 했지만 치료술사 말로는 며칠 내로 또 의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네.’

‘조만간 아스트리드님이 대행에서 벗어나 정식 영주가 될 수도 있겠군.’

‘시대는 변하고 있소. 이런 때일수록 우리 신하들이 힘을 합쳐 올라프슨 가를 잘 보위하지 않으면 안되지.’

‘변하는 시대라.......’

내가 이해할 만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았다.

그러나 내가 그 방으로부터 멀어질 때까지 환청은 머릿속으로 계속 밀려왔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문을 잠그고 침대에 앉아 멍하니 밤을 새웠다. 나를 바라보던 아스트리드의 슬픈 눈이 떠올라서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았다.

다음 날, 나는 내쫓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여느때와 다름없이 기운찬 웃음으로 나를 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서는 어딘가 전에 없던 그늘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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