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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3] 헬가 4/6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50
 


7.비니



“아, 여기 있다.”

나는 기록을 뒤져보다가 문제의 헬가로 추정되는 검은머리 여자의 초상화를 찾아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떤 단서도 될 수 없었다. 지금의 할멈은 말 그대로 마귀할멈처럼 쭈그러진 상태라,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을 들이대면서 젊은 시절에는 이랬다고 우겨도 반박할 건덕지가 없었다. 헬가라는 이름도 사실 이 근처에서는 흔했으니까 꼭 동일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벌써 3백 년 전의 일인데...

다만 그 얌전하고 어딘가 음울한 소녀의 초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이 사람 주인 때문에 마음고생이 꽤 심했나 보네’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은 조바심을 내며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끝내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아서 실망한 듯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 할멈과 눈매가 좀 닮은 것 같기도 해.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다만 이 지역의 전설을 알려주는 어떤 책에 따르면 헬가는 융성기를 구가하던 올라프슨 가문을 하루만에 무너뜨려버린 사악한 마녀라고 되어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그녀의 주인인 화사하고 씩씩한 영주의 딸과 그녀가 함께 그려진 초상화는 어딘가 장소를 잘못 찾아와서 우왕좌왕하는 만담콤비처럼 느껴졌다.

“토박, 할멈 어디 있는지 알아요?”

“주방이나 홀에는 없어요. 지하실에 간 건 아닐까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는 시구르드가 수문장처럼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새파란 털에 늑대를 연상시키는 외모는 매력적이었지만 할멈이 너무 응석을 받아준 탓인지 살이 뒤룩뒤룩 찐 게 문제였다. 케르베로스 역을 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으음. 그렇다고는 해도, 15년 전에 본 할멈의 개와 정말로 많이 닮았다. 그 사이에 새끼를 낳은 건지도 모르지.

“야, 네 주인은 아래쪽에 있니?”

“멍!”

나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살금살금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시구르드는 이미 내 냄새를 익혀두었기에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고 파리만 잡고 있었다.

이번에는 쇠창살이 박힌 출입문 저편에 불이 켜져있는 게 보였다. 발소리를 죽이며 가까이 다가가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5월 31일입니까?”

뒷마당에서 내가 들었던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남자 목소리였다.

“그날 월식[月蝕]이 있기 때문이지! ‘그분’을 다시 뵈려면 달의 힘이 가장 약해지는 시기를 택하지 않으면 안돼! 그게 뭐 문제가 되나?”

상대방은 물론 헬가 할멈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거야?

“보세요, 저는 부인을 방해하러 온 게 아니니 긴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날만은 제발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마시고 잠자리에 드셨으면 해요. 안 그러면 상당히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겁니다.”

“이젠 늙은이를 협박까지 하나?!”

“협박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그날은 안됩니다. 다른 월식일도 얼마든지...”

“시끄러워!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그날을 위해서 준비해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헛소리야! 기껏 여기까지 와서 그런 소릴 하려거든 당장에 나가! 또 허튼 수작을 벌이면 비니에게 자네가 수상하다고 말하겠어. 그 검은지빠귀는 나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내 말을 믿어주기는 하니까.”

“제발, 부인......”

“잠깐만, 바깥에 누구지? 거기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있어!”

그녀가 출입문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나는 왠지 두려워져 재빨리 계단 위로 도망쳤다. 이곳의 주인은 나였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별로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니었고 할멈에게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 매서운 눈 앞에서는 어릴 때부터 꼼짝 못했으니까.

계단 아래에서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누군가 나오는 실루엣이 비쳤지만 일부러 나를 쫓아오지는 않았다. 급히 올라오는 나를 보고 시구르드가 왜 그러냐는 듯이 컹컹 짖었지만 무시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내 방까지 달려올라가 시트를 뒤집어쓰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 성채에는 뭔가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는 게 분명해.

나는 5월 31일 밤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여기에 머물면서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아, 여보세요? 알레그리시모 벨싱키 지사? 인사계의 린드그렌씨 좀 부탁해요. 내, 휴직계 연장신청을...”



8. 헬가 - 1704년



“요즘 전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거 아세요?”

“소문?”

그녀는 백금빛으로 빛나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우물에서 길어온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망토를 받쳐들고 수건을 건네 주며 말했다.

“저번에는 라군발트의 숲에서 무려 드래곤을 타고 다니시더라고 하더군요.”

“헬가,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나는 그녀의 칼과 장신구를 손질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했다.

“돌아가신 부친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어째서 아직도 마법에 정신이 팔려 세월을 허비하고 계시죠?”

“내가 영지를 망하게 한 것도 아니고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도 않았는데 그깟 취미에 시간 좀 쓴다고 해서 불만들이란 거야?”

그녀는 얼굴을 닦고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다소 화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깟 취미라고요? 이젠 소문을 듣고 외지에서 손님까지 오지 않던가요.”

“아, 맞아. 그랬지. 지금 어디 있지?”

“식당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만나보실 겁니까?”

“안 만날 이유도 없잖아? 여기, 머리 땋는 것 좀 도와줘.”

나는 그 말대로 해 주다가, 그녀의 목에 낯익은 단검이 줄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잠시동안 머뭇거렸다. 새파란 칼집 위에 박힌 누르스름한 호박[琥珀]이 눈동자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응, 이거? 군델 거야. 바닷속으로 사라져서 시체도 못 찾았다니까 남은 건 이것 뿐이지... 참 우습지 않아? 그렇게 커다랗던 사람이, 죽으면서 남긴 흔적은 고작 이런 거라니...”

“전하.”

그녀가 내 쪽을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그만 잊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난 또 무슨 소리라고... 헬가, 잊고 말고는 내 자유지. 그대가 뭐라 말할 일은 아니야.”

“후회하고 계신 거죠? 그때 그분을 두고 온 것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영주님은 뛰어난 술사[術士]시라고 하던데요?”

밝은 색 머리칼에 깨끗한 피부를 지닌 40대 중반의 그 방문객이 말했다. 그는 서방의 어느 나라로부터 밀사[密使]로 파견되어 바겐홀름으로 가던 도중에 우리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조만간 눈보라가 그치면 빙하를 넘어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그 남자는 아스트리드의 친절한 환대에 감사하며 깍듯한 예의를 표했지만, 때때로 호기심어린 눈으로 성 안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듯 했다.

그는 흰색과 검은색이 잘 조화를 이룬 수수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며 쉬는 시간에는 자기가 가져온 악기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는 어딘가 남들과 거리를 두는 듯한 면이 있었고, 그는 자기의 신상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장미무늬의 캐스킷에서 신기한 보석들을 꺼내어 구경시켜 주었는데 그 돌들에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뭔가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소문이 과장된 것 같군요.”

아스트리드는 차분하게 말하며 식사 테이블을 물렸다. 그녀의 의자 옆에서 의젓하게 식사를 하고 있던 시구르드가 주인의 기분이 언짢아진 걸 알고 고개를 약간 들었다.

바겐홀름으로의 위험한 원정 이후 2년이 흘렀고, 그 동안 결국 시구르님이 돌아가셔서 그녀가 정식 영주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 지방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올라프슨 가는 전에도 몇몇 훌륭한 여성 지도자를 길러낸 적이 있었고 아스트리드의 언니들 중 두어 명도 자기 직권으로 혹은 남편 대신에 멀리 떨어진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스트리드는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기에 큰 반대는 없었다.

아네르슨은 충실한 보좌역으로서의 소임을 다했고 원정에서 살아돌아온 호가드는 노환으로 은퇴한 반 로겜 공의 뒤를 이어 그녀를 돕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날 이후 사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옆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찾아왔다.

방문객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럼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시다는 겁니까?”

“개인적인 취미로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쓸만한 정도는 아닙니다. 그나마도 요즘은 정무[政務] 때문에 예전처럼 몰두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러나 나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군델의 죽음을 확인한 이후 마치 사람이 변한 것처럼 공격마법과 방어술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전에는 주로 사소한 치료약이나 재미로 처방하는 염색약 정도에 머물렀던 그녀의 연구는 지난 2년 동안 놀랍게 발전했다.

그녀는 더이상 내게 실험실을 맡기지 않았고 열쇠도 바꿔버렸지만 나는 타고난 요령으로 새 열쇠를 손에 넣은 다음 몰래 숨어들어가 그녀의 서류들과 실험한 재료들을 살펴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대로 내버려둬서는 안되겠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날에는 그녀가 인적없는 숲 속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약간의 파우더와 주문 몇 마디로 전광[電光]을 끌어들여 백 년 묵은 고목을 태워버리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물론 내게는 비밀로 한 것이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뒤를 따라간 뒤 숨어서 지켜본 것이다. 진짜 저 정도라면 숲에서 드래곤을 타고 다닌다는 소문도 퍼질 법 했다.

그녀의 이동[移動] 주문은 훨씬 정확해졌고 치료주문과 해독주문도 상당히 정교해졌다. 자기의 실력이 좀더 괜찮았더라면 죽은 군델의 운명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그러한 집착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영지의 재정이 파탄나지 않은 건 오로지 실력있는 신하들 덕분이다. 지난번 원정 이후로 유능한 인물들이 한꺼번에 은퇴하거나 죽는 바람에 때로는 나까지 그녀의 사무를 도와야 했다. 회계나 편지 대필에 대해서도 제법 많이 배웠다.

“그거 유감이군요. 사실 저도 마법이나 신기한 일들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영주님께 한 수 배울 수 있을까 싶어 여쭤본 건데...”

“가르쳐드릴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석하군요.”

아스트리드는 방어적으로 잘라 말했다. 그녀도 이 남자를 못미덥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새로 들어온 어린 시녀들을 지휘하여 테이블을 치우고 디저트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꺼지기 시작한 등잔 몇 개에 다시 불을 붙이고 식사를 마친 시구르드를 시종에게 맡겨 산책을 시키도록 했다.

불꽃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묘한 빛을 띠었다. 그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예의바른 표정을 짓고 쾌활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옆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미소는 어쩐지 음험하게 느껴졌다. 이런 손님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그 개인적인 연구는 집무실 외의 다른 곳에서 하시겠지요? 한번 구경시켜 주실 수는 없으신지.”

“다른 곳에서 하는 건 맞습니다만 지금은 쓰지 않습니다. 포기하시죠.”

“정말로 유감입니다.”

그는 더 이상 거기에 대해 말하지 않고 대신 앙리 왕의 복잡다단한 궁정생활에 대한 별별 희한한 체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재간은 좌중을 순식간에 침묵시킬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디저트 이후에 나올 뜨거운 박하 차가 늦어지는 것을 알고 주방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더 이상의 대화는 듣지 못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그날 밤이었다.

나는 내 방 침대에 앉아 내 발치에 놓인 꾸러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꾸러미에는 이제까지 성 안에 살면서 사용했던 물건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추위를 막기 위해 해달피 목도리와 짧은 망토를 둘렀다. 이제 문제는 아스트리드에게 편지를 남길지 아니면 직접 그녀에게 이별을 고할지 둘 중 하나였다. 나는 깃털펜을 집어들고 잉크를 묻힌 뒤 글자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동방인이 발명한 ‘종이’라는 물건이 최근 무역선을 타고 흘러들어왔는데, 꽤 쓸만하다.

‘친애하는 아스트리드 올라프슨 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여기에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어......’

2년간 생각을 바꿔보려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그 운명적인 날 이후 아스트리드와 나는 일에 관한 것 말고는 서로를 피하기 시작했고 대화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어린 시녀가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었고 나는 다른 시녀들을 지휘하는 위치로 올라가 더 큰일에 정신을 쏟았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오늘 그녀가 간만에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을 때 다소 놀랐었다.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나를 대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과거에 매달린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군델에 대한, 지나간 세월의 실수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혀 자신의 마법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영지의 일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건성으로 임하면서 신하들에게 맡기는 부분이 점점 늘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괴롭고 싫었다.

‘......왜냐면 전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하, 제가 그런 행동을 취하도록 만든 것이 전하였다는 것도 잊으셔서는 안 되겠지요. 전하와 저는 서로에게 나쁜 영향만 계속 끼쳐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전하와 애초부터 만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지도.....’

여기까지 쓰다가 나는 그만 펜을 집어던지고 종이를 찢어버렸다.

이건 아냐.

이제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눈물이 치밀어올랐다.

이런 식으로 끝내는 것은 올바른 게 아닐지도 몰라.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쓰다가 찢어버린 편지조각이 침대 위에서 바람에 날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치우는 것도 잊어버린 채 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분명 이 시간쯤이면 아스트리드는 뭔가 또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겠지.

직접 만나서, 말해야 한다.

전하도 나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요! 라고.





“.....................?”

실험실 안은 어두컴컴했고 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문의 창살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그녀는 적어도 오늘 밤에는 여기 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하기야 이상한 방문객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서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해보기로 하고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그때 방 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언젠가의 그 환청이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이번에는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의 언어로 (r음과 콧소리가 꽤 많이 섞인 언어였는데) 주문같은 것을 (마치 주기도문 외듯이) 암송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갖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

실험실 한구석의 선반 앞에 그 방문객이 서 있었다.

그는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내가 들어온 것을 알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고 여유만만했으며 당황한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아! 시종장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별로 보여주고 싶어하시지 않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호기심이란 놈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요.”

“클로드-루이 씨.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보시다시피 달빛을 벗삼아 약간의 독서를.”

“이 지하실은 완전히 막혀있는데 달빛이라고요? 거짓말도 정도껏....”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는 주로 여기에다 달빛을 담아가지고 다니죠.”

그는 선반 위에서 크리켓 공 비슷하게 생긴 둥그런 유리 세공품을 들어올렸다. 자세히 보니 그 세공품 속에서 은은한 빛이 비쳐나오고 있었다.

“그거야 어떻든, 전하의 허가도 없이 이런 내밀[內密]한 장소에 드나든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비대장을 부르겠어요.”

나는 벽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호출용 줄을 잡아당기러 다가갔지만 어느새 그는 유령처럼 내 앞에 나타나서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우고 약올리는 듯이 흔들어 보이며 나를 가로막았다. 그는 마치 금방 만든 송어 타르트에 달려들려는 아이들 앞을 막아서며 ‘그러면 안되지’라고 말하는 엄마같이 굴었다.

“당신 주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전 그분이 연구하고 있던 어떤 처방이 하나 필요할 뿐입니다. 잠시만 눈감아 주신다면 얌전히 물러갈 것이고 여러분에게 어떤 불이익도 없도록 할테니까요. 자아.”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웁!”

그는 다시 내 눈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내 뒤에 나타났다. 그는 내 등에 바싹 붙어 한쪽 손으로는 내 입을 막고 다른 쪽 손으로는 허리를 부드럽게 감싼 다음, 귀에 대고 느끼하게 속삭였다.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어쩔 수가 없군요.”

“이거 놓----”

그는 미소지으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코에 들이댔고 나는 그 향기에 취해 몸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냥 잠들어 버렸다면 차라리 낫겠는데 이런 식으로 정신은 멀쩡한데 몸만 움직일 수 없게 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는 뻣뻣해진 내 몸을 정중하게 방 반대편의 의자 위에 앉혀놓은 뒤 실험실 문을 잠그고 다시 자기가 하던 일로 돌아가려 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음은 활화산이었지만 몸은 차갑게 식은 생선 같았다.

“클로드-루이! 은혜라고는 모르는 무례한 자로군!”

그때 문을 박차고 상기된 얼굴로 아스트리드가 걸어들어왔다. 그에 이어 붉은머리 아네르슨과 개암나무 호가드, 그리고 경비대장이 잠에서 덜 깬 눈으로 급히 외출복 옷깃을 여미며 같이 달려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시구르드까지 경비대장의 뒤를 따라 들어와서 짖어댔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앉아있는 위치가 워낙에 절묘하여 겁먹은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오호, 올라프슨 공! 이렇게 밤중에 뵙는 것도 색다른 느낌입니다그려!”

“헛소리 집어쳐! 헬가를 놓아주고 이 방에서 썩 꺼져라!”

“영주나 되시는 분이 바이킹 두목같은 언사를 남발하시면 되겠습니까.”

“남의 조상 가지고 뭐라고 하기 전에 자기 일이나 잘 하시지!”

아스트리드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아들었다. 그가 반항하면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기세였다. 방문객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진심으로 상대해 드리는 편이 예의겠군요...

-본디 티에파 바탄Bondi Tiefa Batan - 니르스 암 나쿠로스Nirs Am Nakuros!”

그가 괴이한 주문을 외자마자 그의 캐스킷에서 보석 몇 개가 튀어나오면서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그 보석들은 그의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며 빙빙 돌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강렬한 섬광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나는 그 폭풍에 휘말려 의자와 함께 넘어지고 말았으나, 차차 감각이 돌아오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려 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도 손을 움직여서 빼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다행히도 눈물샘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모양인지 눈가에 금세 찐득한 액체가 가득 찼다.

실험실은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으나 예상외로 깨지거나 불탄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 밖으로 밀려나간 아네르슨과 동료들이 안으로 들어오려 아무리 애를 써도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그들을 막고 있는 것처럼 들어올 수가 없어서 당황하는 게 보였다. 시구르드는 초조한 기색으로 마구 짖어대면서 눈 앞의 허공에 대고 덧없이 발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방문객과 아스트리드는 방 안에 남아서 서로를 주시하며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보같이. 저 정도 결계마법은 기껏해야 1시간이야.”

“대신에 당신도 당장 깨는 방법은 모르지 않습니까? 도박을 거는거죠.”

“.............닥쳐!”

아스트리드는 칼을 높이 치켜들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문객은 비잔틴풍의 날이 굽은 단검을 두 개 꺼내어 양손에 들고 마치 무용하듯 부드럽게 움직이며 그 칼날을 모두 막아내었다. 마치 그녀를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칼날과 칼날이 움직일 때마다 불꽃이 번득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팔다리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꿈틀거렸다. 아마도 내게 건 주문의 효력이 별로 길지 않은 걸 보면 그는 원하는 것을 거의 다 찾아내고 금방 나갈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선반에 매달려서 힘이 없는 다리로 균형을 잡으며 일어섰다.

아스트리드는 그와는 달리 정공법으로 파고들었지만 그의 화려한 요령에 농락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인정사정 없는 전쟁 기술을 배워 온 몸이고, 방문객은 심심풀이 이상으로 검술을 배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결국 밑바탕이 드러날 지경이 되자, 형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그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다리가 여전히 후들거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사방이 흔들거렸다.

“이제는 항복하는 게 좋을텐데!”

“검술은 당신이 위라는 걸 인정하죠. 하지만 아직 2막이 남아있습니다.

-셉투스 토르네 이바Septus Torne Iva, 라콘디토Lacondito!"

주문이 끝나자마자 아스트리드 주위에 갑자기 두 사람의 그림자가 더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모두 방문객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셋 중 둘은 그림자가 옅어 보였지만 쉴 새 없이 서로 자리를 바꾸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를 가려내기는 힘들었다. 세 명의 클로드-루이는 씨익 웃는 얼굴로 그녀 주위를 맴돌며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우아하게 칼을 휘둘러댔고 아스트리드는 정신없이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어떻게든.... 도와야 해!’

나는 선반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마침 그가 어둠 속에서 서류를 살피기 위해 놓아두었던 빛나는 세공품이 놓여있었다. 내가 서서히 힘이 돌아오기 시작한 손으로 그 발광구[發光球]를 집어드니 희미한 달빛 정도로 빛나던 유리 표면이 더욱 밝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집어드는 사람의 심리상태나 체온에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어깨 위로 치켜들고 아스트리드와 방문객이 싸우는 쪽을 향해 냅다 던지며 황급히 소리질렀다.

“전하, 눈을 감으세요!”

섬광이 번득였다.

“이런! 이것을 그런 식으로 쓰리라고는...”

당황한 방문객은 물러서기 시작했고 땅에 떨어지며 깨진 유리조각에서는 정체모를 빛줄기가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퍼졌다. 그 빛줄기가 지나가면서 방문객의 잔상[殘像]들을 꿰뚫고 지나가자, 세 명의 방문객 중 두 명은 점점 흐물거리면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스트리드는 섬광으로 인해 눈이 멀까봐 감았던 눈을 뜨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힘을 다 써버린 나는 그녀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시 맥없이 쓰러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꼴사나워 보이겠지.

“헬가!”

“올라프슨 공, 아직 당신의 상대는 접니다!”

그가 아까 내게 보여주었던 앞에 나타났다 뒤에 나타났다 하는 기술을 써서 그녀를 혼란시키며 내 쪽으로 오는 것을 막았다. 이제 우리는 실험실 안에서 삼각형을 이루며 각각 자기의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책장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려 했고 아스트리드는 내 쪽으로 달려오려 했고 방문객은 그녀를 가로막으려 했다.

아스트리드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본디 일리스트라투라Bondi Illistratura!"

그러자,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던 방문객이 곤충표본처럼 한 지점에 못박혔다. 팔다리는 여전히 움직일 수 있었으나, 걸어서도 다른 방법을 써서도 이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품 속에서 꺼낸 파우더를 방문객 주위의 공간에 뿌리며 또 다른 주문을 발했다.

“셉투스 바캄Septus Vakam!"

파우더가 둥둥 떠 있는 공간에서 방문객을 중심으로 하나의 원이 그려지고 그 원의 표면에서 날카로운 전광[電光]이 일어나 중심에 묶여있는 방문객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책장의 책 몇 권을 떨어뜨리면서 겨우 일어선 나는 놀란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방문객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전광이 꽂히기 직전에 외쳤다.

“디펜도시아넬라Dependosianella!”

그러자 희미한 우윳빛 막 같은 것이 그의 몸 주위에 덮이며 전광을 막아내어 그 충격을 상쇄[相殺]했다. 그는 잡혀있으면서도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여유만만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마치 시장에 물건을 사러 와서 ‘이것보다 더 좋은 건 없나? 시시한 가게로군’이라고 하는 듯한 표정으로.

“같은 술사를 상대로 싸우는 게 처음이라 그런 겁니까? 약해요 이건.”

그의 도발에 넘어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는 손으로 복잡한 문양을 허공에 그려가며 짜증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오래간만에 보는 열의와 활기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에 그토록 생기가 감도는 것을 본 게 대체 몇년만일까.

“얕보지 맛! 플라티나 아브사티올라Flatina Absatiolla - 라르가트Largat!”

그녀가 허공에 그린 문양에 떠오른 빛이 한점으로 집중되더니 강렬한 백금빛 파장을 지닌 한 줄기의 광파[光波]로 변하여 방문객을 향해 뻗어나갔다.

“흠!”

그러나 영악한 클로드-루이는 코웃음을 치며 품속을 뒤적이다가 어떤 물건을 하나 꺼내어 능숙하게 그 백금색 빛줄기를 되받아쳤다. 그가 꺼낸 것은 역시 장미의 무늬가 기하학적으로 새겨져 있는 청동빛의 거울이었다. 세상에 마법을 튕겨내는 거울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사실 오늘 보는 것들 전부가 처음 보는 짓거리들 투성이 아닌가!

허를 찔린 아스트리드가 낭패스럽게 중얼거렸다.

“아차! 노르넨의 거울을 갖고 있었나!”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반사된 빛줄기가 미묘하게 각도를 바꾸어 방 다른 쪽에서 빌빌거리고 있는 내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버둥거리다 힘이 돌아오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눈을 감은 그 순간, 내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헬가, 일어서지 마!”

아스트리드였다. 그녀는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결계를 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내 앞을 막아서서 그 주문을 자기 몸으로 그냥 받아내고 말았다. 나는 빛을 받은 그녀의 몸이 발끝부터 서서히 백금 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알고 경악하여 소리질렀다.

“아냐..............이럴수는 없어............!!! 전하!!!”





영악스런 클로드-루이는 아스트리드의 봉쇄주문에서 풀려나자마자 발빠르게 아까의 선반 앞으로 다가가서 서류를 뒤적이다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재빨리 그것을 품에 집어넣었다.

“진작에 결계를 쳐놓고 시작했더라면 간단했을 것을... 못할 짓을 했군.”

그는 서서히 백금상으로 변해가는 아스트리드와 그녀를 둘러싸고 우왕좌왕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꾸벅 숙여 정중히 인사하고는 이동[移動]주문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희미한 벌꿀 냄새가 풍겼다. 정말 사라질 때마저도 느끼한 놈이구만.

“전하! 괜찮으십니까!”

실험실 주변의 결계가 풀리고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던 아네르슨 일행이 달려들어왔다. 그러나 그들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충직한 시구르드는 방금까지 클로드-루이가 서 있던 자리를 빙빙 돌며 냄새를 맡더니 시끄럽게 짖어댔다. 개들은 저렇게 맘껏 소리라도 지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아스트리드님!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어떻게 하면 좋죠?! 전하가 거신 주문이니 푸는 방법도 분명.....”

“없어, 헬가.”

“없다뇨?!”

“사실은 아직 효력을 역전시키는 주문을 못 찾아냈어. 그러나 녀석의 도발에 화가 나서 무심코... 내가 너무 경솔했어.”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아스트리드님은 역시 아스트리드님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전하는......”

“나도 알아. 나도..... 알고 있어.”

아스트리드의 전신을 뒤덮어가던 백금의 막[膜]은 점점 형세를 넓혀나가 지금은 그녀의 가슴 아래까지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 막에 덮인 부분은 생기를 잃고 조각상마냥 굳어버린 채 영영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어떻게든 해보려고 주문서를 살펴보고 약병들을 뒤졌지만 실마리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호가드는 경비대장을 위층으로 보내어 성 안을 샅샅이 수색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도록 지시했고, 아네르슨은 침착하게 아스트리드의 곁으로 다가와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기록 준비를 했다. 그녀는 가슴 위까지 백금으로 뒤덮이면서도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고 엄숙하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대들 둘은 다른 신하들과 의논하여 성을 통치할 다음 영주를 조속히 선출하고 이제까지 해오던 일들에 차질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쓰라. 중요한 일들은 전부터 그대들에게 맡겼으니 어떻게 하는지는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알겠습니다. 전하의 행방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하던지 여행갔다고 하던지 맘대로 처리하라. 이 실험실과 내 개인적인 소지품의 관리는 헬가에게 일임하겠다. 시구르드도 포함해서.”

“문서에 서명을 남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펜을 빌려다오.”

이제 목까지 백금으로 덮인 아스트리드는 점차 움직이기 어려워져 가는 입술을 움직여 몇 가지 주문을 외웠고, 그러자 아네르슨의 손을 떠난 깃털펜이 허공을 가르고 문서 위로 날아가 몇 가지 부가사항을 기술하고 또렷하게 아스트리드 올라프슨의 서명을 남긴 다음 땅 위에 힘없이 떨어졌다. 이 정도의 힘을 지닌 인간이 자기가 내뱉은 주문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다니 정말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헬가에게 할 말이 있다. 그대들은 자리를 비켜주게.”

“예, 그럼...”

이제 방에는 나와 그녀, 그리고 시구르드만 남았다.

나는 눈물어린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미 백금으로 변한 왼쪽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이제 와서는 뭐라고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을 했고 오히려 아스트리드가 나를 위로하려고 말을 꺼냈다.

“울지 말도록. 나는 죽는 게 아냐.”

“하지만 전하......”

“내가 없어도 그대는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백금 어깨를 붙들고 눈을 똑바로 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런 말씀 마세요!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이제 당신은 여기서 도망가면 그만이란 건가요? 당신은 겉으로는 위대한 척 하면서, 실제로는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고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똑같은 일을 했을 때는 어땠죠? 나보다도 더 의기소침하고 겁쟁이가 되어서, 과거의 꿈만 꾸고, 마법이란 그물로 스스로를 옭아매기만 했죠. 나는 적어도 당신이 나를 탓하거나,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이 꿋꿋하게 딛고 일어서서 나를 비웃어 주길 바랬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그래서 난........ 난 당신을 미워해요. 난 당신을 미워한다구요!”

시구르드가 나의 감정이 격해진 것을 느끼고 구슬픈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눈물어린 눈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되풀이했다.

“당신을 증오해요.”

백금이 점점 위로 차올라와 아스트리드의 아래턱을 파묻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동안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쓸쓸함과 따뜻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이미 입술의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아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편지, 읽어 보았다. 헬가...”

“예에?”

“의논할 일이 있어 그대 방으로 갔다가... 미안하군, 그런 줄은 몰랐다. 난 내 자신만을 탓하느라... 그대 쪽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거지. 그대를 미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그대는 내가 밉다고 했지.”

“전하?”

“하지만... 그래서 내가 기쁘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까? 나는 이제까지 그대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도 몰랐어. 그렇지만.....”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도 바보인 걸까.

이런 순간에까지도.

“전하!”

“이제야...  겨우... 속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그대와......”

“--아스트리드!”

이제 그녀의 입은 완전히 백금으로 뒤덮였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어서 다시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잠깐동안 울먹였다. 잠시 후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완벽한 하나의 백금 조각상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줬던 것과 똑같은 발키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시구르드가 나와 그녀의 발치에 번갈아가며 머리를 비비면서 늑대가 동료를 잃었을 때 내는 것과 흡사한 울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여력조차 없었다.

나는 조각상의 차가운 뺨에 얼굴을 부벼대며 그들이 나를 떼어낼 때까지 계속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래 이렇게 울어보긴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울면 울수록 내 마음은 점점 깊은 심연[深淵]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바로 저년이야! 저년이 전하를 죽인 거라고! 나한테서 에릭을 빼앗아 가고 이제는 우리 백성들한테서 아스트리드님을 빼앗아 갔어!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저 자리에 서 있을 생각을 하다니 배짱도 좋지!!!”

이제는 평범한 어부의 아내가 되어 애를 두셋 정도 낳은 밀라는 기운찬 목소리로 나의 죄를 성토하며 주변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아스트리드가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 뒤, 긴급회의에서 새 영주가 추대되고 화려한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올라프슨 가문의 자녀들은 아스트리드 외에도 많이 있었지만 모두 예전에 다른 영지로 진출하여 한자리씩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에 신경쓸 만한 여력이 없었다. 결국 새 영주로는 그들 중에서 가장 한가한 편이었던 딱다구리 올라프가 추대되었다. 그는 울겐헤임에서 완두콩을 키우며 시문이나 쓰던 한량이었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고 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취임식 자리에는 나도 시종장 자격으로 서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서 귀로는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환청을 통해 밀라의 가시돋힌 말소리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밀라의 말에 신경쓰는 사람은 그 당시에는 없었지만, 그 소문은 날이 갈수록 점점 크기를 불려가더니 급기야는 나를 올라프슨 가를 파멸시킨 마녀로 몰아붙이는 전설로까지 발전하게 되니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그녀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할 이야기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어느날 아스트리드의 실험실을 정리하던 나는 그 여우같은 클로드-루이가 빼앗아 간 문서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서 필사적으로 자료를 뒤져 보았다. 마침 선반 위에는 그가 서류를 뽑아갈 때 실수로 떨어뜨린 일련번호표가 떨어져 있어서 그것과 남은 자료를 대조하며 찾는 것은 간단했다. 그러나 아스트리드가 남긴 실험 기록이 꽤 많은 탓에 일일이 뒤져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몇 주 후, 나는 드디어 그 일련번호가 붙은 보라색 약병을 찾아냈다. 레이블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Εlixir’라는 단어 하나만 휘갈겨쓰여져 있었다. 아스트리드는 공식 문서 외의 뭔가를 쓸 때는 상당히 악필이었다.

“설마, 불로불사의 영약....?”

나는 언젠가 아스트리드의 주문서에서 우연히 보았던 그 단어를 기억해냈다.

하지만 당장에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약병을 보관해두고 다시 내 일로 돌아간지 며칠 뒤, 나는 아스트리드의 개인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기 위해 열쇠로 그곳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아스트리드를 꼭 닮은 백금의 조각상 - 사실은 그녀 본인 - 이 누구의 손길도 거부한 채 덩그라니 서 있었다. 그때였다.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은.

‘......여긴 어디지......? 추워...... 어두워.............’

‘헬가? 헬가! 어디있어......? 그대가... 그대가 보이지 않아.....!’

“맙소사..........!!!”

나는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이 점점 커지더니 어느날 갑자기 나로 하여금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게 했다. 나는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신하들을 설득하여, 아스트리드의 조각상을 보호하기 위해 그 위를 일단 석고로 덮어두고, 엄중히 경비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실험실로 달려가서, 망설임 없이 그 보라색 약병의 내용물을 비웠다. 성공할지 어떨지는 나도 모른다. 그녀의 처방은 워낙에 무책임하고 예측불허이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한히 계속될지도 모르는 백금의 감옥 속에 갇힌 그녀를 다시 한번 인간의 세계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이 필요했고 그건 보통 인간의 수명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시간의 감옥 속에 가둔 것이다.

“니벤헤임 양. 애석하게도 먼저 갑니다. 전하를... 아스트리드님을 부탁...”

언제나 충성스런 신하였던 붉은머리 아네르슨은 나보다 겨우 열살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50세는 더 들어보이는 외모로 세상을 떴다. 그 이후 하나씩 하나씩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저세상으로 갔고, 나만이 홀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쟁과 기아, 한파와 해일. 성채는 날이 갈수록 초라해지고 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으나, 나는 나름대로 익힌 재주를 사용하여 계속해서 이 성에 일자리를 얻고 실험실을 내 뜻대로 움직여 왔다. 아스트리드에게 배운 결계주문이 침입자를 막고 실험실을 원래대로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언제나 내 곁을 충실히 지켜주는 시구르드에게도 나는 몇 가지 처방을 내렸다. 이로써 시간의 감옥을 같이 감내[堪耐]할 동지가 생긴 셈이다. 그러는 도중에 나는 아스트리드가 가끔 밤중에 드래곤을 타고 다녔다는 소문이 어떻게 해서 퍼지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알았다.

“...............................”

팽팽하던 얼굴에는 주름이 지고, 윤기는 없어도 완벽하게 새카맣던 머리는 점점 백발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옛날에 아스트리드가 잘못 처방한 약을 먹었을 때처럼 나이든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몇 시간이 지나도 약효가 떨어져서 다시 젊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처방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불사약은 ‘불사’만 보장했고 ‘불로’는 가져다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꾸준히 내 얼굴에 나이테를 새겨 왔다. 이제는 아마 예전의 나를 아는 그 누구도 몰라볼 정도로 쭈그렁 노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나이든 내 얼굴이 더 좋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지나치게 나이가 들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면 큰일이기에, 나는 가능한한 모든 처방을 동원하여 더 이상의 노화를 막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시구르드는 나와 생리적으로 많이 달랐기 때문에 처방을 따로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어쨌든 성공했다. 개들의 생명은 사람보다 짧지만, 나의 처방을 받은 시구르드는 웬만한 대왕거북보다 오래 살게 되었고, 더군다나 별로 눈에 띄게 늙지도 않았다. 질투가 날 정도로.

그러던 어느날, 서쪽에서 온 사신을 통해 내 앞으로 소포가 하나 배달되었다. 그 안에는 이상한 빛을 발하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와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서’라는 메모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포장에서는 희미한 벌꿀 향기가 풍겼다. 누가 보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 느끼하고 여우같은 자칭 백작.

나는 그 보석을 호수에 던져버리려다 생각을 바꾸고 잘 보관해 두었다.

그것이 벌써 3백여 년 전의 일이다...

......3백 년? 맙소사... 벌써 그렇게 되었나!

아스트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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