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분류 전체보기 (326)
창작의 샘터 (88)
패러디 왕국 (85)
감상과 연구 (148)
일상의 기억 (5)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2003-09-03] 헬가 5/6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51
 


9.비니



“휴직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여기 머무시다니 뭔가 마음에 드시는 거라도 찾아내셨나 보죠?”

오래된 나무상자를 뜯어내어 테이블을 만들던 닐센이 쾌활하게 물었다.

“글쎄요. 토박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고나 할까요.”

나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얼버무렸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기쁜 일이군요. 휴가 삼아 천천히 쉬시다 가세요.”

“오래 있어봐야 결론은 뻔하지. 너는 네 애비나 할애비와는 달리 도시 체질이니까. 어떻게 여기를 손해 안 보고 팔아넘겨서 더 아담한 집으로 이사하나 그것만 생각하고 있을게야, 맞지?”

할멈의 노골적이고 독기어린 질문에 화가 난 나는, 아직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거칠게 쏘아붙였다.

“오, 그래? 과연 그럴까? 라스트라센 가문 사람은 항상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 철저하지! 나는 질릴만큼 봤어! 암!”

덕분에 그날 점심엔 나만 소금을 잔뜩 뿌린 수프를 대접받았다. 나 주인 맞아?

“5월 31일? 마침 그날 우리 고향에선 뼈다귀 축제를 할 텐데, 옛날 머저리같은 링글랜드 놈들이 총칼을 앞세우고 우리를 짓밟으러 왔을 때 뼈다귀와 몽둥이만 가지고 신나게 패준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굽쇼? 마침 그날 장대비가 오고 갯바람이 불어서 놈들 총이 다 못쓰게 되었대나 뭐래나! 근데 대체 그날에 대해 알고 싶은게 뭐유?”

“그러니까, 그날에 뭔가 특별한 일 같은 것은...”

“없수다. 그보다도 국제전화 좀 걸어도 되겠수?”

그는 마약중독자처럼 흐리멍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왜요?”

“이다 아주머니한테 전화 걸 시간인데 내 전화기가 망가져서.”

“알았어요, 쓰세요......”

나는 이 괴짜 정원사로부터 더이상의 대답을 끌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5월 31일도 다른 날과 별 차이 없이 평온하게 지나가고, 이윽고 밤이 왔다.

할멈은 몸이 안 좋다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정원사는 간만에 읍내의 술집에서 즐긴답시고 외박을 나갔다. 마을에서 온 일꾼들은 이미 퇴근한 뒤였다. 시구르드도 어딜 갔는지 저녁 내내 보이지 않았다.

부지런한 닐센은 정원에 등불을 켜 놓고 겨울용 땔감을 미리 패 두고 있었다. 그의 손도끼 솜씨는 꽤 정확하고 신속했는데, 바람 쐬러 나와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몸이 오슬오슬 추워졌다.

“여기 밤공기는 꽤 찹니다. 이 박하 차라도 한잔 드시지 그러세요?”

“아, 고맙군요.”

나는 그가 권하는 목제 컵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고 몇 모금 마셨다.

장작을 다 팬 닐센은 도끼를 치우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여기는 참 좋은 곳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도시에는 범죄도 많고 흉흉하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그런 일도 없지요.”

“그렇군요.”

확실히 워낙에 조용한 시골이라 사건다운 사건은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가 그런 얘기를 꺼낸 건지 나는 의아해졌다.

“그런 만큼, 뜻밖의 일이 생기면 그 충격은 훨씬 크지 않을까요?”

“뜻밖의 일이오? 무슨...... 아...................”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신이 희미해지고 눈 앞이 점점 흐려졌다. 잔디밭에 머리를 처박을뻔한 나를 누군가의 억센 손이 부축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닐센의 목소리가 아련한 꿈처럼 들려왔다.

“바로 이런 일이지. 멍청한 아가씨.”





“.............아.”

내가 눈을 떠보니 그곳은 3층 유물관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긴 뒤였고, 나는 그곳의 오래 된 의자에 강력 테이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입은 막혀있지 않았기에 나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느껴져서 포기했다.

벽에 걸려있는 백열전구 몇 개만 켜져 있고 나머지는 어둠으로 뒤덮인 그 곳은, 낮과는 달리 상당히 을씨년스런 분위기였다. 자세히 보니 전망창 한쪽에 감쪽같이 절단된 구멍이 뚫려있고, 어둠 속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대체 이런 허름한 성에 뭐 훔칠 게 있다고?

내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자가 속삭였다.

“소리질러봐야 소용없어. 마을과 3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으니까. 밤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안그랬다면 진작에 입에도 테이프를 발랐겠지.”

“당신...... 닐센!”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선량함과 정중함 대신 짓궂은 빈정거림으로 가득했다.

“한 3시간 내내 쿨쿨 자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지? 그냥 아침까지 창고에 처박아둘 수도 있었지만 기왕에 헤어질 바에야 좋은 기분으로 헤어지는 게 좋지 않나 싶어서 말이야. 이제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퍽도 재미있겠군!”

“아마 왜 이런 허름한 곳을 털러 온건지 이해가 안 될거야, 안그래?”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뒤에서 손가락을 딱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장한 체격의 괴한 몇 명이 달려와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성모상을 끙끙거리며 옮겨 왔다. 그들은 카키색 군복에 검은 스키마스크, 검은 모자, 검은 장갑, 검은 구두로 몸을 감싸고, 요상스럽게 빛나는 적외선 고글을 끼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 숨을 죽이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드릴.”

“어, 이봐, 무슨 짓이야?”

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들은 체도 안 했다.

몇 명의 다른 괴한들이 변압기에 연결된 전동 드릴을 들고 와서 성모상 표면의 석고를 조심스레 깎아내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사방에 석고 가루가 날리고 깨끗이 청소되어 있던 유물관 바닥이 더러워졌다. 석고를 떼어내고 난 성모상은 더이상 성모상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하얀 석회조각들 때문에 그것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세척.”

또 다른 괴한들이 휘발유통에 담긴 정체모를 용액을 성모상 표면에 뿌리고 세척용 솔로 표면을 깨끗이 문질러 석회조각들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광택제 비슷한 스프레이를 뿌리고 걸레로 그 위를 다시한번 닦아냈다.

“됐어. 한번 보시지.”

“.....................세상에...”

이제 성모상이 있던 자리에는 방금 전과는 완벽하게 다른 물건이 서 있었다.

바로 18세기 올라프슨 가문의 휘장이 새겨진 옷을 입은 소녀의 백금상이었다!

“이게 당신들이 노리는 거로군?”

그가 의자 앞으로 돌아 내 앞으로 걸어와서 대답했다. 역시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특유의 땅딸막한 체구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말투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독사의 이빨을 가진 불곰을 보는 기분이랄까.

“맞았어. 이 비밀을 알아내느라 고생 좀 했지. 여기에 있는 다른 것들은 보너스일 뿐이야. 당신네 가족은 이 성과 함께 유로슈에서 가장 가치있는 예술품 중 하나를 물려받았는데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걸 전혀 모르고 있더군.”

“쳇, 용의주도하시네. 혹시 당신 이름도...?”

“빌린 이름이지. 진짜 닐센은 은퇴해서 지금 자포네스에 살고 있어. 신분증명을 위조하고 얼굴을 바꾸고 그의 버릇을 연습하는 건 식은죽 먹기지. 이곳에 취직해서 5년간 별짓을 다 하며 당신 부친의 신임을 얻었어. 마침 그가 세상을 뜨고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당신이 오길래, 한탕 하기에는 꽤 좋은 기회구나 싶었지.”

“...........................젠장...”

나는 이를 악물었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이런 배신을 당하다니.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의 동료들이 백금상에 와이어를 장치하고 끌어내릴 준비를 완료한 다음 그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는 내 입에 테이프를 감아놓고 나를 앉힌 의자의 각도를 약간 바꾼 다음 그 주변에다 회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정체모를 상자 몇 개를 도미노처럼 늘어놓았다.

그가 조그만 리모콘을 꺼내어 상자들에 대고 단추를 눌렀다. 상자 위에 새겨진 액정 표시판에서 숫자 대신 초록색의 나선형 무늬가 어지럽게 춤추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면 폭탄에는 꼭 타이머가 달려있지만 사실 그런건 이미 낡았어.”

“-으으음, 으음!”

말소리가 안 나오니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의자를 덜그럭거리며 어떻게든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그가 내 발치에 총을 한방 갈기는 바람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복면 너머로 나를 비웃으며 동료들 쪽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되어서 나도 유감이야. 어쩌나 보려고 좀더 있어달라고 권했더니 그 말에 그대로 넘어올줄은 나도 몰랐거든. 뭐 크게 걱정하지는 마. 고주파 폭탄이니까 아파할 새도 없이 뼛가루만 날릴 거야. 그럼 이만.”

“으으으으으으음!!!”

그들은 백금상과 다른 유물들을 남김없이 끌어내린 다음 자기들도 와이어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순식간에 유물관 안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함께.





‘......이럴 줄 알았으면 경찰에 연락이라도 해놓을걸... 이제 어쩌지?’

나는 다시 몸을 뒤틀며 의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닐센이 감아놓은 비닐 테이프는 시간이 지날수록 물먹은 나일론처럼 내 수족을 죄어왔다. 평범한 접착용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처리를 해놓은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온몸을 뒤틀다가 의자 째로 바닥에 고꾸라져서 머리를 부딪혔다. 하지만 그 와중에 다리 쪽을 감싸고 있던 테이프가 다소 약해져서 몇 번 다리를 흔드니까 그대로 떨어졌다. 나는 처녀귀신마냥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의자를 등 뒤에 붙인 채 엉거주춤 일어나서 출입구 쪽으로 기어갔다. 한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등 뒤에서 삐리릭 하는 효과음과 함께 뭔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심장이 마라톤 선수마냥 심하게 쿵쾅거렸다. 숨이 막히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어서 문지방을 넘어 바깥 복도로 나왔다. 등 뒤에서 뭔가가 터지려고 하는 그 순간, 복도 위의 천장에서 누군가가 서커스의 곡예사처럼 줄을 타고 내려와, 내 몸을 의자에 고정시킨 테이프를 끊고, 재빨리 나를 들어올렸다.

“누구------!”

“쉿. 가만히.”

그는 엄청난 힘으로 나를 떠받친 채 잠시동안 매달려 있었다. 아래를 곁눈질로 바라보니 유물관 문 안쪽에서 엄청난 빛깔의 안개 같은 것이 사르르 밀려나오는 광경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안개라기보다는 어떤 기류[氣流]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훑고 지나간 공간은 잠시동안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 흐름은 몇 초 동안 아래 복도를 초토화시키고 나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복도 바닥에는 석회가루와 깨진 타일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 그 남자는 나를 아래쪽으로 내려다주었다. 입가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테이프를 애써 떼어낸 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꽤 요란한 파티였죠, ‘라스트라센’?”

나는 너무나 놀라서 잼보니 광고에 나온 코미디언처럼 입을 O자로 딱 벌렸다.

“----마, 마타다 씨?!”



10.헬가 - 현재



녀석들은 내가 자는 걸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오딘의 까마귀마냥 생생하게 깨어 있었다. 나는 지금 성 앞뜰의 나무가 우거진 곳에 숨어서 저 불한당들이 3층으로부터 이것저것 끌어내리는 것을 몰래 지켜보는 중이다.

그 무연탄 녀석이 알려준 얘기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지만, 이제까지 해 온 준비를 헛되이 돌릴 수는 없다는 생각도 있고 해서, 어떻게든 의식[儀式]을 결행할 생각으로 나와 있었는데... 그때 저놈들이 검은 강철의 새를 타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저놈들은 내가 성모상 속에 숨겨둔 아스트리드 전하를 찾아내어 강철 새 안에 옮겨 실으려 하고 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환청으로 들려오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어딘가 외국으로 빼돌리려 하는 게로군. 녀석들이 전하를 짐짝처럼 부리기 전에 어서 저쪽으로 가야 해!

성 안에서 뭔가 번쩍거리며 터지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시구르드, 네가 나설 때가 되었구나! 자아, 가거라!”

“멍!”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나도 몸이 전보다 많이 둔해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곁에 있던 나의 충실한 친구에게 고속[高速] 주문을 걸어서 나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도록 시켰다. 녀석은 내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새파란 털을 휘날리며 번개처럼 달려나가 불한당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이런 젠장! 저 개를 잡아! 뚱뚱한 주제에 왜 저리 빠른거야!”

“그쪽으로 간다! 놓치지 마! 헬기에 타게 하면 안돼!”

나는 시구르드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녀석들을 혼란시키는 틈을 타서, 백금으로 빛나는 나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살그머니 달려갔다. 마침 다른 짐들과 함께 화물칸에 실리기 일보직전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있는 힘을 다 하여 그녀를 질질 끌고 눈에 안 띄는 수풀 속으로 도망가려 했다.

“아니, 저 늙다리는 또 뭐야? 어서 잡아!”

늙다리라고라? (상당히 울컥)

나는 할 수 없이 아스트리드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은 시커먼 쇳자루를 내게 겨누고 조심스레 내 주위를 에워쌌다. 나는 그들이 충분히 가까운 곳까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허리춤에 숨겨둔 파우더를 사방에 뿌리고 그 동안에 개발한 비장의 주문을 외웠다.

“라가 판토메스티아Laga Phantomestia!”

녀석들이 들고 있던 쇳자루를 자기 쪽으로 돌리며 미친듯이 외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우악!”

“뱀이다! 저리 치워!”

“아냐, 옻나무야, 이런 제길, 가려워 죽겠어!”

“젠장, 다들 왜 이래? 마약했어?”

내가 뭘 했냐고? 그저 녀석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끌어내어 스스로에게 보여주도록 손쓴 것 뿐이다. 나는 내 주위를 에워싼 놈들이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쇳자루를 땅바닥에 내려치며 웃고 우는 것을 확인하고, 안주머니에서 분홍색 약병과 양초 몇 개를 꺼내어 의식을 준비했다. 좀더 정결한 장소가 필요했지만 좀 있으면 월식이 시작될테니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약병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아스트리드 주변에 뿌려가며 마방진[魔方陣]을 그린 다음, 미리 정해놓은 부분마다 촛불을 꽂고 불을 피웠다. 그리고 달이 지구의 그림자 뒤로 숨는 것을 보자마자, 경건한 마음으로 몇 가지 기본 주문을 외웠다. 대지의 기운이 한 곳으로 모이고 그에 호응하여 바람과 구름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길래 잠시 돌아보았더니, 온통 흙투성이가 된 꼬마 비니와 그 무연탄 녀석이 이리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할멈?! 대체 무슨.............”

“오면 안돼! 저리 물러나!”

나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대지와 공기를 타고 흐르는 힘이 한 곳에 충분히 모인 것을 확인한 뒤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무수한 숫자의 빛덩이들이 반딧불이처럼 모여들어 아스트리드를 감싸고 있었다.

“이그나티오Ignatio, - 두스 에키스 마시나Dus Eckis Machina!”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다급해져 다시 같은 주문을 외쳤지만 아까보다 빛덩이의 수가 더 많아졌을 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서서히 달이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초조해졌다.

“어떻게 된 거지? 플로지스톤은 충분할 텐데. 아니면 지형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 아냐, 그렇게 까다로운 주문은 아니었어. 이제까지 30번도 넘게 연습해 온 건데...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거지?”

나는 눈을 감고 의식의 순서와 플로지스톤의 분포도를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어디가 틀렸는지 점검하려 했다. 그때 비니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멈, 조심해요!”

“뭐?”

뒤로 돌아볼 새도 없이, 뭔가 단단한 송곳같은 것이 내 옆구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불로 달구는 듯한 아픔에 몸부림치며, 나는 뒤쪽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어디선가 그 위선자 닐센의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환각 주문 정도로 놈들의 발을 묶어두려던 내가 어리석었지!

“크으.................”

나는 거칠거칠한 잔디 위에 쓰러져 하늘을 바라보며, 흐려지는 의식을 돌이키려 애썼지만 아무리 해도 눈 앞이 어두워졌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옷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초생달 목걸이를 꺼내어 들어올리며 눈물지었다. 고작 이러려고 수백 년을 살아왔단 말인가?

“---안돼! 할멈! 할멈!!!!!”

비니의 것이 분명한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혼란스러운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위로 들어올렸던 손을 힘없이 아래로 떨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아스트리드님...........................”



11. 비니



할멈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는 제정신을 잃고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너무나도 급하게 뛰는 바람에 아까 마타다가 머리의 상처에 둘러주었던 간이 붕대가 반쯤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닐센이 총을 들고 나를 가로막았다.

“운좋게 살아난 모양이지만 두번째는 그렇게 잘 되지는 못할거야.”

“악당! 힘없는 노인에게 무슨 짓을!”

“힘없는 노인? 웃기시네. 저 노파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면 그런 소린 못할걸. 소문대로 역시 마녀였어. 환각제를 뿌려대고 개까지 풀어서 한바탕 정신없게 만들더만.”

그는 나와 마타다에게 총을 겨누고 한쪽으로 물러서게 했다. 그때 쓰러진 할멈의 옷을 뒤지던 패거리 한 명이 그에게 소리질렀다.

“카를레스! 이것 좀 봐! 무려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어!”

그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보석을 들어올렸다. 그 결정체는 새로 나오기 시작한 달빛을 받아 묘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닐센이 우리를 부하에게 맡기고 그쪽으로 걸어가서 보석을 받아들고 살폈다.

“너무 크잖아... 가짜 아냐? 일단 가져가서 감정사에게 보여야겠어. 진짜라면 우린 한몫 잡은거야. 자, 이제 다 챙겨넣고 그만 뜨자!”

“알았어! 어이, 헬기 이쪽으로 대!”

다시 붙잡힌 몸이 된 나와 마타다가 안타까운 눈으로 쓰러진 할멈을 바라보며 애를 태우고 있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어, 이 다이아가 왜 이러...... 아니?”

달빛을 받아 색깔을 바꾸기 시작한 그 다이아몬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닐센의 손 안에서 꿈틀거리다가 갑자기 눈부신 빛을 발하며 허공으로 떠올라 할멈과 백금상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여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그 보석은 백금상 주위에 그려진 마방진의 정 가운데 위쪽으로 떠오르더니, 마치 프리즘처럼 달빛을 끌어들여 화려한 여러 색으로 나누어서 아래의 마방진과 연결되는 빛의 정12면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12면체 안쪽에 가만히 서 있던 백금상이 아까 모여든 반딧불이같은 빛을 한몸에 받아 눈부시게 번쩍이더니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다이아몬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수십개의 빛나는 조각으로 흩어져버렸고 12면체가 사라졌다. 동시에 그 안에 서 있던 백금상의 표면에 금이 쫙 가기 시작하더니, 다이아몬드가 완전히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그 백금상도 빛과 함께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우리는 모두 파편을 막기 위해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파편은 날아오지 않고 허공으로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우리가 눈을 떴을 때 그곳에는 백금상과 똑같이 생긴 한 명의 살아있는 여성이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완벽한 중세 바인란드 어가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바 하크 아바, 라스 아트 두카르 잉게 비네 크라슬!”

그녀는 내가 역사책에서 찾아본 어느 초상화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검은지빠귀 아스트리드와!



12.아스트리드



오랜 시간 동안 꿈꾸는 것 같은 상태로 묶여 있는 것은 상당히 지루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 동안에 자기가 알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완전히 낯선 무언가가 들어서는 것을 어렴풋이 느껴가며 그런다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이래서야 뭐가 변했는지 완전히 모르는 것과 별다를 것도 없었다.

“.........................아?!”

처음에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한 멍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내 주변에서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차렸다. 오딘의 눈도 멀게 할 만큼 엄청난 섬광과 함께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내 주위를 둘러싼 검은 옷의 이교도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고, 동시에 내 바로 옆에 쓰러져 있는 초라한 노파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그녀의 늙은 얼굴, 그리고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그 목걸이-

그녀는 바로-

“--헬가?”

“......스트리.....드.....”

그녀는 쓰러진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어떤 무기에 당한 건지는 몰랐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은 분명했다. 나는 분노에 차서 이상한 쇳자루를 치켜들고 주변을 둘러싼 이교도들에게 소리질렀다.

“무례한 것들, 나의 성에서 이게 무슨 소란들인가!”

그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전혀 겁먹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내게 접근해 왔다. 나는 옆에 찬 검을 뽑아들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그들에게 잡혀 있던 어떤 여자가 내게 뭐라고 소리쳤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쇳자루를 주의하라는 얘기인 모양이다. 나는 달려가면서 오른쪽 손으로는 칼을 치켜들고 왼쪽 손으로는 월귤방패의 문양을 그리며 최대급의 효력을 지닌 결계 주문을 끌어냈다.

“본디 티에파 시나르Bondi Tiefa Sinar---”

그들은 지휘관인 듯한 땅딸막한 그림자의 지시를 받고 그 쇳자루를 일직선으로 내게 겨눈 뒤 손잡이에 달린 무언가를 눌렀다. 쇳자루 앞쪽에서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불꽃이 난무했다. 그렇군, 동방의 화승총을 발전시킨 무기인가! 언젠가 바겐홀름에 갔을 때 그쪽에서 온 상인을 만난 기억이 난다. 그의 말이 맞다면 저 무기는 탄알에 맞지만 않으면 아무 것도 겁낼 게 없었다. 나는 즉석에서 결계의 효력을 계산하여 주문의 마지막 구절을 외쳤다.

“-아도메네Adomene!”

허공을 가르며 내게 날아오던 조그만 탄알들이 내 앞에서 딱 멈췄다.

이교도들은 이런 일은 전혀 예상 못한 듯 당황하여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탄알들을 한 군데로 모아서 원을 그리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게 만든 다음 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이교도들이 팔이나 다리를 감싸고 쓰러져 신음했다. 운좋게 맞지 않은 다른 자들이 다시 무기를 발사했지만 나는 아까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돌려주었고, 몇 명이 다시 쓰러졌다.

“흠!”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달려가서 가장 덩치 큰 두어 명을 베어 쓰러뜨리고, 그들에게 잡혀 있던 새침한 얼굴의 여자와 검은 피부의 남자를 구해내어 헬가가 있는 쪽으로 보냈다. 나는 빨간 약병 하나를 허리춤에서 꺼내어 여자에게 건네주며 소리질렀다.

“아직 살아있어. 이거라면 늦기 전에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어서!”

내 말을 완전히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헬가가 쓰러져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검은 피부의 남자는 한발 앞서 그쪽에 도착하여 그녀의 맥을 짚어보는 중이었다.

이교도들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갈팡질팡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몇 명이 검은 강철의 새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내 쪽으로 공격해 온다. 자세히 보니 머리 부분에 그 땅딸막한 지휘관이 타고 있다.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오다니 상당히 문물이 뛰어난 도적들이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도적은 도적. 감탄할 일이 아니다.

나는 강철 새가 퍼붓는 이상한 화약들을 이리저리 피하여 달려가다가 옆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달려오는 걸 발견하고 반갑게 소리쳤다.

“시구르드! 마침 잘 왔어! 그때 그거, 기억하지?”

“멍!”

“그래, 한 번 해보자!”

우리는 호수를 끼고 검은 새를 피해서 나란히 달렸다. 놈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성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오자마자 돌아서서 시구르드를 앞에 세우고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주문을 끌어냈다.

“메타모포리아 레프티아Metamorporia Reptia - 라콘디토Lacondito!”

내 앞에 서서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앞발을 치켜든 채 일어선 시구르드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몸을 뒤틀며 점점 크게 자라나서, 그 옛날 세계를 멸망시켰던 펜리스처럼 거대한 푸른 늑대의 형상으로 변했다. 나는 시구르드의 등 위로 뛰어올라 등짝의 털을 단단히 붙잡고 그의 귀에 소리쳤다.

“가자, 시구르드!”

“크웡!”

시구르드는 호숫가의 젖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등에 감추고 있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녀석은 검은 새의 위쪽에 달린 펄럭거리는 날개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뒷날개 부분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

그 땅딸보 지휘관이 뭐라고 소리치며 검은 새 밖으로 굴러떨어져 호수에 빠지는 게 보였다. 검은 새는 화염에 휩싸여 땅으로 추락했고 우리는 재빨리 거기서 떨어져 도망치려 하는 다른 새를 공격했다. 삽시간에 호수 주변은 불타오르는 검은 새의 시체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렇게 신나는 싸움은 라군발트 농성전 이후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시구르드의 커다란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 잘했어. 이제 그만 내려가자.”

나는 헬가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시구르드는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함께 헬가가 누워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까의 여자가 그녀에게 내가 준 물약을 먹이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음식을 넘길 수가 없는 상태인 듯 했다. 검은 남자도 하얀 붕대를 꺼내어 상처를 지혈하고 눈꺼풀을 뒤집어 보는 등 별 짓을 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밀어내고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심장의 고동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다소나마 의식을 회복한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헬가......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리드...님... 이제야... 겨우.......”

“말하지 말라. 상처가 덧날지도 몰라. 빨리 용한 치료술사를 찾아서...”

“.......만나...게.... 되어...서... 저는.......”

“그래, 알아. 제발 죽지 마. 죽어선 안돼!”

“.....................”

그녀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당황하여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베개자루처럼 맥없이 흔들린다.

“헬가? 헬가......! 헬가!!!!”

나는 그녀의 삭아버린 얼굴에 뺨을 맞대고 비통하게 울었다.

“나를 여기에 오게 해 놓고...... 그대가 이렇게 가 버리면.....”

“저, 당신 정말 아스트리드인가요? 올라프슨 가의?”

나는 낯선 목소리가 서툴게나마 나의 모국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새침한 얼굴의 키작은 여자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아, 놀라지 말아요. 학당에서 중세어를 약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저기 저 위를......”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작은 조각들이 하늘로부터 이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저건.... 설마!?



:
위로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보이기/숨기기 가능합니다^^
RSS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