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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16] 허수아비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56
 





<< 허수아비 >>

Der Stromann

― 낭만의 시대, 외전[外傳] ―






햇살- 번득임- 어둠-

그리고 노란색과 갈색이 섞인 녹색.

한 명의 그림자가 숲 속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긴 군청색 코트를 차려입고 약간 찌그러진 삼각모자를 눌러쓴 40대 초반 정도의 남자로, 매우 빠른 속도로 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호흡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침착하게 나무들 사이를 헤쳐나가는 중이었다. 그는 문득 어느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휘 둘러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짙은 갈색의 눈동자와 넓은 이마가 드러났는데, 그 이마 한쪽에는 초승달 모양의 희미한 상처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의 굵기와 폭과 서로간의 거리를 재빨리 가늠해 보고는 허공으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췄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치고 잠시 동안 침묵.

몇 초 후에 그 남자가 뛰어온 방향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검은 말에 올라탄 검은 옷의 형체 넷이 나타나 그 남자가 사라진 바로 그 지점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그들은 귀 옆까지 뻣뻣하게 세운 코트 깃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을 사방으로 돌려가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생명의 기색이라고는 도통 보이지 않는 붉은 안광[眼光]이 뾰족모자 아래에서 기분나쁘게 점멸[點滅]했다.

한참동안 사방을 돌아보던 그들은 말에서 내려서서 나무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두 명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어 방해가 되는 주변의 나뭇가지를 베어 나갔고 다른 두 명은 이상한 연기가 나는 조그만 향로[香爐]를 꺼내들고 땅바닥에 가루를 뿌려가며 추적을 계속했다. 그 향로에서 나온 회색의 가루는 땅바닥에 닿자마자 색이 변하여, 조금이라도 이상한 흔적이 있으면 곧바로 눈에 띄도록 해 주었으나, 아까 도망치던 남자의 발자국은 어느 한 지점에서 뚝 끊겨 있었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아까의 남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가장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검은 형체 하나가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석궁을 꺼내어 조준을 마친 뒤 화살을 발사했다. 그러나 화살이 날아가 꽂힌 곳에 이미 남자의 모습은 없었다.

‘............?’

그 검은 형체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다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사이에,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쌓여 있던 낙엽더미가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중으로 솟아오른 낙엽들은 땅에 곧바로 떨어지지 않고 소용돌이를 그려가며 검은 형체들을 둘러싸더니, 그들 주위로 맹렬히 회전하며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남자가 낙엽의 장막을 헤치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도 많이 게을러졌군. 나를 잡고 싶으면 직접 나설 것이지, 이런 인형들을 대신 보내다니 말이야!”

네 명의 형체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일제히 장검을 빼들고 반격하려 하였으나 그 남자는 여전히 빙빙 돌고 있는 낙엽의 무리 속으로 슬쩍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반대편에 나타났다가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들의 감각을 혼란하게 했다.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확인한 그 중년 남자는, 익살맞은 포즈를 취하더니 가슴팍에 손을 넣고 보석과 흑단[黑檀]으로 장식된 피스톨을 꺼내 들었다.

“페네토 레테리바 알 크레스타Peneto Leteriva al Kresta.”

그는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정확하게 검은 형체 중 한 명의 심장 부분을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우레같은 소리와 함께 화약이 폭발하면서 뇌관을 움직여 탄알을 밀어낸다. 그리고 그 총구로부터 튀어나간 자수정[紫水晶]의 탄알이 가슴팍에 명중하자마자, 그 형체는 파란 불꽃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정체모를 잿빛 가루만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같은 식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추적자도 간단히 골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는 여유만만하게 남은 한 명을 바라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철컥 하는 소리만 들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 참, 피렌체에서 저지른 실수를 또...”

그는 손잡이를 꺾고 약실을 들여다보았다. 탄알이 떨어진 것이 확실했다.

잠시 주춤하던 검은 옷의 추적자는 곧 사태를 파악하고 장검을 고쳐잡은 뒤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남자는 아슬아슬하게 피스톨을 잡아늘여 칼날을 막았다. 그의 장난기어린 얼굴에 낭패스러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남은 탄환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장전할 시간이 모자라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는 피스톨을 다시 집어넣고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어 응수했다. 상대의 가늘고 곧게 펴진 에페와는 달리 칼날이 위쪽으로 휘어진 중동풍의 검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숲 속이 난데없이 금속과 금속이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군청색 코트의 남자는 솜씨좋게 스텝을 옮겨가며 상대의 검을 받아쳤지만, 상대방은 지치지도 않는지 십여분 동안 계속해서 그 남자를 몰아붙였다. 그 동작에는 조금의 낭비도 망설임도 없이 꼭 필요한 움직임만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체격 면에서도 상대가 훨씬 유리했다.

“제법 하는군! 그렇다면 이몸께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군청색 코트의 남자는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는 재빠르게 두어 발짝 물러서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다시 상대방의 검을 받아가며 마치 춤을 추듯 정해진 패턴에 맞춰 이쪽저쪽으로 이동했다. 상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러는 사이에 남자의 허리춤에 끼워진 주머니에서는 붉은 가루가 규칙적으로 흘러내려, 땅 위에 어떤 도형을 그려가고 있었다.

웬만큼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 남자는, 펄쩍 뛰어올라 나무 위로 달아났다. 상대방 또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구를 이끌고 잽싸게 뛰어오르려 했지만, 코트의 남자는 씨익 웃으며 안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던 녹색 보석을 꺼내들고 어떤 주문을 속삭였다. 땅 위에 그려진 마법진[魔法陣]이 빛을 발했다.

“라바 미에노레Lava Mienore...셉투스 바캄Septus Vakam!”

다음 순간, 어마어마한 빛과 열을 동반한 벼락이 숲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허공으로 도약[跳躍]하려던 그 검은 추적자는 날카로운 전격[電擊]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고 몸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원래 검은 빛을 띠고 있었던 겉옷은 불타 버리고 보기 흉한 콜타르 빛의 점막[粘膜]으로 감싸인 사지[四肢]가 드러났다.

급히 만들다 만 가면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납빛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으나, 그 한가운데서 빛나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한 당황과 흥분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검은 거구는 땅에 쓰러진 채 한동안 이리저리 뒹굴며 팔다리를 꿈틀거리다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몸 여기저기를 억지로 연결한 쇠사슬과 잘게 자른 천조각들이 엉망진창으로 흩어졌다.

“.........................”

코트의 남자는 보석을 집어넣고 나무에서 내려와 한동안 그 시체 아닌 시체를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그 뒷모습을 추적자의 새빨간 루비같은 눈동자가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계속 고개의 절반을 비스듬하게 땅에 묻은 채 나머지 한 쪽 눈으로 그 신비스런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숲 건너편으로 모습을 감췄고, 이윽고 추적자의 붉은 눈동자에서도 빛이 사라졌다. 마치 힘없이 꺼져가던 촛불이 마지막으로 환하게 타오르다가 갑자기 꺼져버리는 것처럼.





어둠- 번득임- 잿빛.

그의 의식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그저 허공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과거...

과거가 뭐지?

그가 애써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원형 경기장을 둘러싼 사람들의 함성과, 검과 방패를 들고 서로 격돌하는 근육질의 사나이들과, 굶주린 눈초리로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는 이국의 맹수와, 그것을 감정 없는 눈으로 지켜보다가 가끔씩 따분하다는 듯이 하품이나 하는 ‘귀하신 몸’들...

그런 정도였다.

그는 자기가 누구였는지, 어떤 모습으로 어디서 살았는지 몰랐다. 그저 어렴풋이 자기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들이 그를 황천에서 억지로 끌어낼 때까지는.

눈을 떠 보니 그곳은 거대한 지하 창고였다. 사방에 자기와 똑같이 납빛 얼굴을 지닌 검은 옷의 자객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없이 그저 그곳에 서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밖으로 나가서 그것을 해치우고 되돌아온다. 돌아오지 못하면 사라지거나 버려질 뿐이다.

‘그’라는 것은 현재의 그일 뿐. 사실 원래는 한 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흙으로 돌아간 고대[古代]의 송장들을 적당히 뒤섞어서 정체 모를 비술과 주문을 통해 움직이게 만든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대리자. 그들의 꼭두각시. 그들의 노예.

그들이 왜 그 초승달 모양의 상처를 지닌 남자를 죽이려 하는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임무를 수행하거나 아니면 재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암흑의 사자[使者]에게 지성이나 자의식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파도치고 있었다. 그것이 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말이란 것을 몰랐다.

하지만 분명히-

“정신이 들어요?”

그는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면 빛이 사라졌던 눈에 ‘초점을 되돌렸다’.

처음 보는 사람의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열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가난한 옷차림의 주근깨쟁이 소녀였다.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가 쓰러진 자리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불탄 자리가 다 낫지 않아서 화끈거렸고 떨어진 접합부가 헐렁헐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예사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다지 심각한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말없이 몸을 돌려 소녀 쪽을 바라보았다. 이 기괴한 검은 형체를 앞에 두고서도 그녀는 그다지 당황하거나 겁내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몸에서 나는 역한 타르 냄새가 신경쓰였는지 코를 연신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티없이 맑고 따뜻했다.

“아, 다행이다.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않길래 송장 치워야 되는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 근데 많이 다친 모양이네요. 가만있자... 배 고프죠?”

붉은머리가 아름다운 그녀는 들고 있던 왕골 바구니 안을 더듬거리더니 투박하게 생긴 호밀빵 한 덩어리와 반쯤 벌레먹은 사과를 꺼내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배고픔도 몰랐고 먹는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받아들고 멀뚱히 앉아있다가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에 다시 돌려주었다. 그녀는 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 포기하고 자기가 다 먹어버렸다. 그의 손을 거치면서 약간 더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싫은 내색 없이 기운차게 꼭꼭 씹어먹은 것이었다.

“여기서 지쳐 쓰러질 정도였으면 배고팠을텐데 별일도 다 있네. 혹시 귀족 집안의 자제이신가요? 그렇다면 이런 시시한 음식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겠죠. 하지만 몸에서 이렇게 유황 냄새가 심하게 나는 걸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뭐 상관없어요. 다친 데는 좀 어때요?”

그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결국 이 말없는 이방인에게 질려 버린 소녀는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서 그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는 소녀의 눈동자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소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맹인이었던 것이다.

“거참 묘하네. 이제까지 여러가지 옷을 봐 왔지만 아저씨 옷은 대체 뭘로 만든 건지 모르겠어요. 촉감도 이상하고 마치 피부같기도 하고 바느질 자국도 없고... 광산에서는 그런 옷을 입고 일하나요?”

그녀는 그를 광산 노동자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아까부터 자기를 괴롭히던 그 감정의 실체를 붙잡으려고 분투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흐물흐물해진 머리로는 잡을듯 말듯 안타까운 몸부림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자요, 일단 피는 멈춘 것 같아서 동여매기만 했어요.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 꼭 나을 거예요. 나쁜 영[靈]이 붙지만 않으면 말이에요.”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솜씨 좋게 가지고 다니던 수선용 옷감을 잘라 붕대 대신으로 그의 몸 여기저기에 패인 상처자국을 감싸 주었다. 이제까지 이러한 대접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그의 의식 속에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그 정체를 알기도 전에 그 감정은 어둠의 나락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의 ‘의식’은 마치 촛불을 반만 켜 놓은 싸구려 샹들리에처럼, 아직 완전히 피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어둠 속에 어지러이 떠도는 희미한 퍼즐 조각들. 물음표들. 안개구름들.

치료를 끝내고 그녀가 물었다.

“이름은 있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어째서인지 기계적으로 그런 동작을 취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있던 그녀가 목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말을 이었다.

“없다고요? 가엾어라. 방금 태어난 강아지도 이름이 있는데 이렇게 큰 어른이... 그럼 내가 하나 지어 줄게요. 뭐가 좋을까.... 그래, 제롬! 제롬이라고 부르기로 해요. 원래는 우리 오빠 거지만, 오빠는 지금 집에 없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좋은 이름이죠?”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있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렇게 하는 게 좋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가 살짝 웃으며 그의 칠흑같은 목덜미로부터 손을 떼었다.

그들은 숲속에서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 소녀는 눈 대신 예민한 후각과 손 끝으로 숲 속의 나무열매나 버섯 등을 찾아 채집했고 그는 그 뒤를 따라다니며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애초에 자기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를 까맣게 잊은 채 눈먼 소녀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 속을 자기 집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날이 저물자 그녀는 마을로 돌아갔고 그는 다시 자기가 쓰러져 있던 지점으로 돌아와 아까 붙잡다 만 기억의 파편들을 붙잡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그는 기본적으로 주술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였기 때문에 먹거나 잠자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불에 탄 상처는 저절로 아물었고 형체도 약간 인간다워졌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이 지나갔다.





“있잖아요, 제롬.”

붉은머리 소녀는 겨우살이에 쓸 땔감을 모으기 위해 숲 속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롬’도 그 뒤를 따라 말없이 걷고 있었다. 그는 소녀가 얻어다 준 낡은 망토와 밀짚모자를 쓰고 있어서 마치 걸어다니는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붉은 눈동자와 납빛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동작에서는 어딘가 인간다운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가 어깨에 나무토막을 짊어진 채 소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마을로 내려오는 게 어때요? 무슨 이유 때문에 사람들 눈을 피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이웃은 다들 착한 분들뿐이거든요. 사정을 잘 얘기하면 분명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그를 벙어리라고 생각한 그녀가 만약을 대비해서 몇 가지 단어를 가르쳐준 것이었다. 물론 부정의 의미였다.

차차 이전의 자신에 대해서 깨달아가기 시작한 그는 자기가 인간과 함께 살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잠을 자지 않았지만 그가 임무 때문에 암살한 인간들의 고통에 가득한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서 악몽처럼 물결치곤 했다. 그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을 두려워했다.

“안된다고요? 대체 왜요? 죄를 짓고 관리들에게 쫓기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몰래 넘어왔나요? 이유만이라도 알려줄 수 없어요?”

그는 또 다시 안된다는 대답을 했다.

“이건 너무하지 않나요? 나는 이제까지 아저씨를 위해서 갖은 일을 다 했어요. 옷도 가져다주고 상처도 치료해주고 글씨도 가르쳐주고 먹을것도... 뭐, 먹을 건 거들떠보지도 않길래 내가 먹긴 했지만, 흠흠. 하여튼... 보답을 하라고는 하지 않을테니 이유만이라도 가르쳐 주면 안되겠어요? 부탁이에요.”

그는 망설임 끝에 그녀의 손바닥을 잡고 그 위에 ‘오스트리아’, ‘싸움’, ‘죽음’의 세 단어를 연거푸 써 나갔다. 그녀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가만히 서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뭔가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알겠어요. 더이상 묻지 않을게요.”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서먹해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는 영문을 몰랐으나 소녀는 점차 그와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엔가 그는 소녀가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더니 숲의 다른 쪽을 향하여 뛰어가버린 것을 알았다.

그는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고 그녀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찌되었건 땔감은 그의 손에 있으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그의 예민한 귀에 째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는 땔감을 그 자리에 내던지고 소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야!”

굶주린 이리 대여섯 마리가 소녀를 둘러싸고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회색빛 털로 덮인 날렵한 몸집의 들짐승들은 요 몇달 동안 사냥꾼이 먹이를 가로채가는 바람에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소녀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들고 온 손도끼를 뽑아들고 이리저리 휘두름으로써 이리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으나 힘이 빠져 주저앉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방어하기는 어려웠다.

소녀가 빈틈을 보인 순간 눈치빠른 이리 한 마리가 공중으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그녀 쪽으로 달려들었다. 풍운의 주인공 가르강튀아를 연상케 하는 흙빛의 거구가 소녀와 이리 사이에 뛰어들어 이리의 앞발을 잡고 목을 꺾어버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의 기척을 눈치챈 소녀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질렀다.

“제롬!!!”

그는 방금 죽인 이리를 한구석에 내던지고, 나머지 이리들을 상대로 싸움에 뛰어들었다. 굶주린 들짐승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이 새로운 상대에게 달려들어 마구 물어뜯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않고 한마리 한마리씩을 몸에서 떼어내 땅바닥에 패대기치거나 공중에 휘둘러댐으로써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의 뇌리에 무언가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풍성한 갈기를 지닌 고양이과 동물을 상대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누군가를 지키려 하던 기억.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짜 그의 기억인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이윽고 죽은 한 마리와 기절한 두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이리들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 것을 알고 꼬리를 움츠린 채 정신없이 퇴각해버렸다.

그는 반쯤 망가진 밀짚모자와 엉망진창으로 해어진 망토를 둘러쓴 채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소녀는 놀란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듣고 있다가 이리들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거인에게 달려와 어린애처럼 목에 매달렸다.

“제롬! 아아 제롬!! 정말 고마워요! 난 아저씨를 버리고 도망가려 했는데... 이렇게 날... 뭐라고 해야 좋을지...”

그는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는 소녀를 땅에 내려놓고 손바닥에 ‘도망?’이라고 썼다. 그녀는 다소 겸연쩍은 기색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우리 오빠... 제롬도... 군에 징집당해서... 몇주 전에... 오시Aussie들에게... 유일하게 날 이해해준 사람이었는데... 그만...”

그는 그제서야 아까 그녀가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오스트리아 사람이건, 군인이건, 벙어리건, 뭐건 간에, 당신은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에요. 나를... 구해 주었으니까!”

소녀는 또 다시 그의 허리에 매달렸고 그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또 다시 뭔가가 가슴 속에서 떠오르려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비록 그게 무엇인지는 안개 속에 싸인 것처럼 희미해서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뒤쪽의 숲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쓴웃음을 짓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삼각모자를 쓰고 군청색 코트를 입은 갈색 눈동자의 남자.

“......허수아비도 가끔은 웃기는 짓을 하는군. 하지만...............”

그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니, 마리아노, 숲에 가는 거냐?”

“물론이죠. 항상 이 시간이면 가잖아요.”

“저...그런데 말이다. 오늘은 다른 일이 있으니 집에서 좀 거들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어제는 분명히 땔감이 더 필요하다고...”

“그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자 어서.”

“삼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죠? 전 가야 해요.”

붉은머리의 마리아노가 초점 없는 눈을 치켜뜨며 따져 물었다. 수더분한 인상의 삼촌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작은 목소리로 귀띔해주기 시작한다.

“사실은 말이야, 수도에서 군졸들이 몰려와갖고 숲을 한바탕 뒤집어놓고 있단다. 너도 알지? 얼마 전에 니콜라네 여관에 묵은 그... 좀 엉뚱한 신사 있잖니, 그 사람이 군을 불러서 외국의 스파이가 있다며 수색을 시켰다는 거야.”

“말도 안 돼요. 거기에는 스파이 따윈 없어요! 있다면 이리나 다람쥐같은...”

“어릴 때부터 숲을 들락날락한 네 말을 못 믿는 건 아니다만, 그자가 솜씨좋은 녀석이라면 얼마든지 네게 눈치채이지 않고 숨어있었을 거 아니냐. 너는 눈이... 아뿔사. 음, 어흠, 어떻든 간에, 오늘은 위험하니까 집에 그냥 있거라!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삼촌!”

“부엌으로 들어가거라!”

마리아노는 어쩔 수 없이 집 안으로 돌아왔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 제롬! 맙소사. 그들은 제롬을 찾으러 온 게 틀림없어. 그가 스파이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제롬이라도 군인들이 떼로 몰려간다면...”

“그가 걱정되나?”

난데없이 아궁이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마리아노는 거의 기절할 뻔 했다.

“맙소사! 누구세요? 어떻게 이 집 안에?”

그 목소리의 주인은 상당히 고급스런 향수 냄새를 풍기며 달콤하지만 가시가 돋힌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아가씬 그를 구하고 싶겠지?”

“누구 얘길 하는 거죠? 난 아무것도 몰라요.”

“잡아뗄 생각인가. 그러나 가슴은 정직한 법. 야수에겐 미녀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에겐 아가씨의 정성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안 그러면 내가 부른...”

그 순간 그가 바로 ‘니콜라네 여관에 투숙한 그 신사’임을 깨달은 마리아노는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듯한 느낌에 머리가 멍멍해졌다.

“그를... 어쩔 셈이죠?”

“그건 아가씨 하기에 달렸지.”

“하지만 우리 삼촌 허락이 없으면 나가지 못해요.”

“사소한 문제는 걱정 마시오. 아가씨는 그저 날 따라오기만 하면 되니까.”

그 순간 마리아노의 귀에는 작업장 쪽에서 삼촌이 열심히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그녀의 후각에는 그 남자가 꺼내든 유리병에서 흘러나오는 약품의 아릿한 냄새가 느껴졌다. 보통은 환자를 잠재워놓고 치료할 때 쓰는....?

“알았어요.”

그녀는 단번에 사태를 파악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꼭 살려주셔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가 갈 이유가 없어요.”

“흠, 최대한 노력해 보지. 적어도 군대의 손에 죽지는 않을게야.”

애매한 어조로 얼버무리며 그 신사가 뒷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마리아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신사의 친절한 척 하는 손길을 느끼자마자 그것을 뿌리치고 앞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어둠- 어둠- 또 어둠.

그는 상처입은 짐승처럼 쫓기고 있었다.

추적은 벌써 반나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벌써 해가 저물고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뒤에서는 횃불을 치켜든 붉은 제복의 남자들이 일사불란에게 그를 노리고 전진해 오고 있었다. 어째서 국왕의 근위대가 이런 시골에까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느슨해진 팔다리를 추스르면서 어둑어둑한 숲 속을 최대한 빨리 헤쳐나갔다. 덕분에 주근깨쟁이 소녀가 애써 마련해 준 새 밀짚모자와 망토가 또다시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훔쳐다 준 낡은 구두도 밑창이 빠져서 절뚝거릴 지경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여길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그 소녀를 만나야 한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까는 절벽에서...

“저쪽이다! 2분대는 나를 따르라! 3분대는 반대쪽으로 몰고 들어가라!”

“사수, 제자리에 대기!”

“반항하면 즉결처분하라! 필요하다면 나무에 불을 질러도 된다!”

“분대장님, 사수 배치 완료했습니다!”

“사격!”

따다다닥 콩 볶는 소리와 함께 부싯돌의 불꽃이 튀었다. 그와 동시에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그가 두르고 있던 망토가 순식간에 구멍투성이로 변했다.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나 몸 이곳저곳의 감각이 갑자기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움직임이 둔해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원래 상태대로라면 이따위 구식 탄환 피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겠지만, 이미 단순한 암살용 꼭두각시를 벗어난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탄환에 뭔가를 섞은 것이...

그는 비틀거리다가 제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때다! 5분대, 6분대, 그물 준비!”

“돌격!”

한 떼의 군인들이 새 잡는 데에나 쓸 법한 커다란 그물을 사방으로부터 펼쳐들고 한가운데에 위치한 칠흑의 거구를 향해 서서히 죄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저항을 그만두고 얌전히 잡힐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 숲 저편의 어딘가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롬! 제롬! 어디 있어요?”

당황한 것은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무슨 일이야? 주민들에게 단단히 일러 두었을 텐데 어째서 저런 꼬마가 들어온 거야? 빨리 찾아서 데리고 나가!”

“그, 그것이 말입니다. 분대자.....<털썩>”

“어이! 뤼시앵! 무슨 일이야? 왜 말하다 마나? 조제프! 카보! 자네들이 가봐!”

“어린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분대장님! 공기 맛이 묘한데요! 이건 분명히... <드르렁>”

“이봐! 왜들 이러나? 여기서 갑자기 자면 어떡해?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영광의 국왕군이냐! 생 루이의 이름을 걸고 명령한다! 모두 기상! 안일어나는 녀석은 내일 파리까지 구보다! 어서 일어......<음냐>”

그리고 침묵.

지평선 위에 나타난 두 사람의 형체는 군인들이 모두 동양의 수면향[睡眠香]에 취하여 쓰러진 것을 확인한 다음,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죽 보호구[保護具]를 벗었다. 마리아노와, 초승달의 상처를 지닌 그 남자였다. 그들은 달콤한 꿈에 취하여 쌔근쌔근 자고 있는 군인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물 주위로 다가온 뒤에, ‘제롬’을 덮어싸고 있는 그물을 손도끼로 끊고 그를 풀어주었다.

“제롬! 정말 다행이야!”

기운을 회복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그 형체에게 다가간 마리아노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볼을 부벼댔다. 횃불을 들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코트의 남자가 눈꼴 사납다는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신중하게 계산한다.

‘과연 녀석이 나를 알아볼까... 만약 알아본다면 그건 그것대로 또 재미있는 효과를 내게 될 것이야. 아니 나로서는 오히려 그걸 바라고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다시 그 녹색 보석을 꺼내들어 의도적으로 횃불을 거기에 갖다댔다.

보석이 내는 빛을 두 눈으로 받은 ‘제롬’은 잠시동안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양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아노는 당황하여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를 한쪽에 밀어두고 그 녹색 발광체를 향하여 화난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자가 바로 눈 앞에 서 있다. 자기를 이런 어중간한 지경으로 몰아넣어 고통만을 안겨 준 바로 그자. 초승달 모양의 상처를 지닌 그 남자가.

그는 보석을 도로 집어넣고 차분하지만 흥분이 깃든 어조로 중얼거렸다.

“결국 알아보았군.”

마리아노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무슨 일이죠? 제롬이 왜 이러는 거죠? 당신이 뭔가... 했군요. 그렇죠?”

코트의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고 상냥하지만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아가씨, 난 분명 약속을 지켰소. 적어도 ‘군대의 손에 죽지 않게’는 했으니까.”

“그러면!”

“그 다음은 내 마음대로지.”

마리아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사람도 아니야!”

“아가씨는 눈이 안 보이니까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실은 아가씨 앞에 서 있는 그 친구야말로 사람이 아니라오. 그자는 살아있는 시체지. 절대 남을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는, 허울좋은 무기물에 불과해.”

“거짓말!”

“믿든 믿지 않든간에, 난 그 친구를 없애야 하오. 안 그러면 죽을 때까지 날 쫓아올테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제롬’이 한 발 빨랐다. 그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구를 이끌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그를 덮쳤다. 코트의 남자가 엉겁결에 옆으로 굴러 피하지 않았다면 납작하게 깔렸을 것이다. ‘제롬’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남자가 피한 쪽을 향해 철권을 휘둘렀다. 남자는 다시 땅 위를 굴러 그것을 피한 다음 잽싸게 일어서서 피스톨을 꺼내더니 자수정 탄환을 세 발 연속으로 발사했다. ‘제롬’의 가슴에 사이좋게 삼각형을 이루면서 세 개의 구멍이 뚫렸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괴로움’에 떨며 비명 비슷한 소리를 질러댔다. 마리아노가 그 소리를 듣고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트의 남자는 전혀 틈을 주지 않고 아까 뚫렸던 삼각형의 정가운데에 또 하나의 탄환을 박아넣었다. 뜻 모를 주문이 그 뒤를 따랐다.

“페네토 레테리바 알 트렝글라Peneto Leteriva al Trenglar!”

그 순간, ‘제롬’의 가슴에 뚫린 삼각형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그 구멍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솟아나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 창백한 야광에 휩싸인 채 그의 사지[四肢]는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마리아노가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안돼! 제롬! 제롬! 제로옴--------------------!”

그리고 놀랍게도 ‘제롬’에게서도 무언가 말소리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그에게는 입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소리는 허파의 공기막을 직접 진동시켜 배로 내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분명 어떠한 음절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리.아.노’라고.

너무 늦기는 했지만, 그제서야 그는 자기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그 정체 모를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생명이라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그 어떤 것, 자기를 지키기 위한 전제조건,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한 토대-

-살고 싶다는 욕구.

그는 허물어져가는 손으로 망토 깃에 꽂혀있던 무언가를 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리아노는 손으로 만져보고서야 그것이 뭔지 깨달았다. 예쁘게 피어난 한 송이 앵초꽃이었다. 이 마을이 아닌 다른 곳까지 가서 따온 것이 분명했다.

꽃을 받은 것을 확인한 ‘제롬’은 분해되기 전 일순 동안,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으나, 그 말은 결국 끝맺지 못했다.

‘친절, 고맙다, 마리아노, 네가 좋..........’

푸른 불꽃이 용솟음치며 그를 삼켜버렸다.

“제롬----------------------!”

마리아노는 절규하다가 그 자리에 엎어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불꽃이 사그러진 뒤에 남은 청회색 잿더미를 바라보며 코트의 남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봤자 넌...... 인형에 불과해. 제 분수를 알아야지...... 흐흠”

마리아노는 고개를 들고 눈물 어린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보았다.

“인형이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적어도 당신보다는 훨씬 사람다웠어요! 그는...... 그는!”

약병에 그 잿더미를 주워담으며 코트의 남자가 빈정거렸다.

“그래서 오빠가 두 번 죽었다고 징징거릴 셈인가.”

얼굴이 벌개진 마리아노는 옆에 쓰러져 있던 군인의 총검을 냅다 집어들고 그에게 무작정 집어던졌다. 그는 가볍게 그것을 피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군인들이 깨어나서 이것저것 질문할텐데.”

마리아노는 힘없이 일어서서 독기서린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하늘로부터 차가운 눈발이 떨어져내린다.

코트의 남자도 돌아서서 숲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은 왠지 자신감에 넘쳐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해 보였다. 그는 마리아노의 눈물 어린 눈과 ‘제롬’의 마지막 단말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는 해결사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떠돌이 연금술사에 불과하지.”

코트의 남자는 옷깃을 여미고 숲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마리아노는 마을 어귀에서 횃불을 들고 몰려온 한떼거리의 주민들과 마주쳤다. 선두에는 당연 그녀의 삼촌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서 있었다. 그는 걱정스런 얼굴로 아무 일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마리아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슬픈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의 안주머니에는 이미 시들어버린 앵초꽃 한 송이가 바지런히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이 꽃을 자주 꺼내어 어루만지게 될 것이다. 가루가 되어 바스러질 때까지.

“마리아노, 얘야, 네 오빠가 죽은 뒤로 신경이 날카로운 건 알지만...”

“알고 있어요, 삼촌. 이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마리아노는 눈물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는...”

삼촌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어깨를 두들겨주며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날, 마리아노는 여관집 니콜라에게 ‘그 이상한 손님’에 대해 뭔가 아느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요금을 내고 어제 낮에 여관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듣기로는 개인 마차를 빌릴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사람인 것 같으나, 이 지방에 뭘 하러 왔는지는 수수께끼였다.

“혹시 그 사람의 이름을 아세요?”

니콜라 씨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미적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

“....글쎄, 그 뭐더라.... 생 제르맹 백작인가 뭔가라고 하던데...”





THE END...





(C) ZAMBONY 200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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