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픽 쓰러지는 남자들의 본질적인 문제는,
남자 체면 같은게 아닙니다. 어차피 남자 주인공 띄워주기 위해 여자 체면을
희생하는 작품이 더 많았으니 그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지만,
진짜 문제는, 적이 약하게 보임으로써 주인공의 능력이 영 실감나게 와닿지가
않게 되어버린다는 것이겠죠. 비디오 게임의 적캐릭터처럼 한방에 그냥 픽픽
쓰러지는 스타일은 오래 끌면 식상해집니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강하고 멋진 적이 존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적이 오히려 주인
공보다 더 인기가 높아지면 또 낭패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고.
희화화된 소모성 남성 적역들을 태풍에 허수아비 날려가듯 날려버리는 것은
여성을 액션 히어로로 내세울 경우 흔히 접하게 되는 수법입니다. 느와르뿐
아니라 미녀삼총사나 툼레이더 같은 영화를 보아도 왕왕 등장하는 요즘의
조류인 것일지도. (라고 해도 실은 원더우먼 tv시리즈가 등장하던 시절부터
해오던 거니까 크게 참신하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이런 단계를 떠나서, 충분히 강력하게 그려진 적으로서의 남성과
'정면 승부'를 거쳐 호쾌하게 이기는, 진정한 히어로로서의 여성상을 탐구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화제와는 벗어나지만 소녀혁명
우테나는 어느정도 괜찮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회까지 거듭되는
결투게임의 허상이 폭로되고 그동안의 '육체적 승리'가 무의미함을 알았을 때,
그리고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여자애니까'라는 부분을 통한 역공을 당
했을 때 우테나는 진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결국 마지막까지 가보면 결코 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키오로 대변되는 남성, 혹은 '시스템'에 대해
안시가 등을 돌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결국 우테나가 정신적으로도 승리했음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극장판에서는 더욱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아키오를 '이미 죽은 망령'의 위치로 끌어놓음으로써 현실의 시스템에게라기
보다는, 우테나와 안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미망이랄까 의존심을 타파하는 것
으로 스탠스가 변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은 사이토 치호의 극장판코믹
마지막에 안시가 내뱉는 대사 '사라져라, 나의 환상!'에도 통하는 데가 있습
니다.) 어쩌면 사이토의 tv판코믹이야말로 우테나를 더욱 완전하게 승리하도록
한 것은 아닌가 싶지만...대신 여기서는 '시스템'에 대한 은유를 다 빼버리고
'빛의 디오스와 어둠의 디오스 간에 벌어지는 싸움'으로 문제를 단순화시켜
현실과 유리된 신화의 구석으로 도피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것은 좀
안타깝죠. 비록 라스트의 우테나복장을 한 안시로 인해 모든게
용서된다해도...<퍽>)
궁극적으로는, 단순히 남성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기존의 여성상을 확장하고
새로운 맛을 가미한 그런 여성이 아닌, 남녀를 떠나서 혹은 여성에게 더욱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여성 캐릭터가 히어로로 활약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갈길이 멀다...)
현실적으로 아직도 가정폭력이나 독신여성의 어려움 같은 것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는 인류사회 자체가 문제겠지만...
어차피 픽션의 영역에서라도 좀더 자유로운 발상과 전복적인 시도가 행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맹이 없는 자위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뭐 그것도
피곤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할수 없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