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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4-19] 울트라하 : 본편 제6화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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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ASER  ◆



앙끄시의 어느 곳에서나,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곧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휘영청 밝은 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달이야 굳이 앙끄시가 아니더라도 지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주체 못할 자연의 법칙으로 인해 월식이 되었을 때만 제외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한 마리 흑표범을 데리고 빌딩 위를 훌쩍 뛰어넘어 검은 옷의 괴한을 추적하는 교복 차림의 미소년이나, 어디선가 도와 달라는 소리를 듣고서 처절한 응징을 가하기 위해 보자기를 둘러메고 전철 지붕 위로 휘리릭 달려가는 대머리 아저씨를 얘기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바다 건너에 있는 딸의 그리운 목소리를 듣기 위해 확성기를 귀에 댄 채 짱가 주제가를 BGM으로 깔고 애타게 이집저집 지붕을 밟고 다니는 키작은 중년 부인 얘기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로 앙끄방위군이 나우민국 행정부 가학귀술연구청(加虐貴術硏究廳) 산하 우주탐식개발국(宇宙貪食犬足局)과 공동으로 건조하여 위성 궤도상에 설치한 무중력 연구 및 우주 감시용 스테이션, ANC(Astronautic Naval Command, 우주해군사령부)-98이었다.

왜 하필 98이라는 숫자가 붙었는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설명이 없는 관계로 여러 가지 억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전뇌력 198년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라는 설(說)과, 그곳의 사령관이 A●-●8이라는 코드가 붙은 메카 캐릭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그거야 어떻든 간에, 이곳에서는 지금도 55명 가량의 상주 요원이 거주하면서 인류의 내일을 밝혀 줄 새로운 초가학이론(超加虐理論)의 실험과, 호시탐탐 지구를 노리고 쳐들어 올 기회만을 노리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외계의 침략자들에 대한 불침경계(火針警戒)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위치는 항상 정지 궤도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지구 주위를 빙빙 돌고 있더라도 지구상에서 보면 언제나 앙끄시 상공 저 멀리에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도 24시간 내내 쉴 새 없이 자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려한 곡선과 산뜻한 직선이 잘 어우러져 방금 삶아 낸 함흥 냉면처럼 아리따운 맛을 내고 있는 이 특이하고도 흥미 깊은 스테이션의 중앙 통제실에서, 그곳의 각종 활동과 시설 유지를 책임지고 있는 현직 사령관 하이아 A. 잉그램은 오늘도 유유자적하며 인생의 덧없음과 이즈미 노아의 보이쉬한 매력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스테이션의 보안과 장비 제어를 총괄하는 극상(極上)인공지능 시스템 안시(A.N.S.I. = Automatic Neuron-imitating Synthetical Intelligence, 전자동 신경모방식 합성 지능체)가, 마치 깊은 산속 옹달샘에 새벽에 일어나 눈 비비며 올라온 토끼가 행여나 물이라도 먹고 갈세라 심술궂게 조약돌을 한웅큼 퍼다 놓고 잽싸게 도망가는 여우처럼 깜찍한 소녀의 목소리로 하이아의 상념을 깨뜨리는 한 마디를 내던졌다.

“사령관님. 꼭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뭔데 그러는가?”

“지금 영상으로 보내겠습니다. 전방 모니터를 봐 주십시오.”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사령관이 의자를 앞으로 바싹 당기며 몸을 앞으로 내밀고는 전방의 분홍빛 모니터를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자 ‘안시’는 스테이션의 각 부분에서 수신된 영상을 모자이크 식으로 편집하여 모니터 위에 비추기 시작했다.

영상을 지켜보던 사령관이 갑자기 인상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_/) 내가 언제 『객기강가 V : 열혈칼부림』을 보고 싶다고 그랬나?”

“...(^^;) 아차차, 프로그램 에러입니다. 리셋을 눌러 주시고 다시 실행 프로세스를 시작해 주시면......”

“지금 리셋을 눌러 버리면 이 스테이션 전체의 생명 유지 장치가 멈춰 버리고 나를 포함한 대원 모두가 감기 걸린 강아지처럼 죽어 버릴텐데 그러면 대체 누가 프로그램을 재실행시킨단 말인가?”

“어차피 리셋 스위치도 없지 않습니까. 유머를 이해 못하시는군요.”

“감히 인간을 가지고 장난을 칠 작정이라면 난 그만 쉬러 가보겠네.”

“기다리세요. 방금 에러의 자체 수정이 종료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영상을 곧 보내드리지요.”

사성전자(四星電子)가 자랑하는 세계 굴지의 사각 평면 와이드 브라운관 기술을 사용한 장거리영상수신겸 색분할검사용 트랄랄라 Mk-Ⅱ 모니터에 새로운 화상(畵像)이 비치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서서히 기분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하여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입은 위아래로 3인치 정도 벌어져 있었고 부릅뜬 눈은 반쯤 충혈되어 있었으며 육중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오한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오그라든 양쪽 뺨 옆으로 손만 대면 완전히 뭉크의 그림 속에 나오는 절규하는 인물이 될 판이었다.

“안시군, 이게 실제 상황이란 말인가? 만우절 장난 같은 것은 아니겠지?”

“만우절은 이미 지났습니다. 전 때늦은 농담은 절대로 하지 않는 자존심 있는 피조물입니다.”

“정말로 이 스테이션의 남성 대원 47명 중 미형(美形) 대원 38명이 갑자기 쌍쌍이 커플을 이루어 다니며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 버티고 있단 말인가?”

“단순한 노동쟁의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제2섹션에서 제19섹션에 이르는 다수의 구역이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정상 업무를 보고 있는 곳은 중앙통제실과 그 주변의 몇몇 구역뿐입니다.”

“그나저나 저 난무하는 ♡마크 다발은 대체 무엇인가?”

“저것은 지난 48시간 동안 체크된 저들의 심리적․기질적․성향적 변화를 종합하여 가시화(可視化)한 파라미터입니다. 되도록 알기 쉬운 기호를 찾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네 말은 설마...”

“바로 그렇습니다. 同性愛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전에는 전혀 그런 기미도 없었던 다수의 사람들이 불과 한나절 사이에 눈에 띌 정도로 갑자기 동성애 기질을 표출하게 되었단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아!!!”

“저는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할 뿐입니다. 원인을 캐는 것은 인간이 할 일입니다.”

“기계로서의 한계를 알기 때문인가?”

“제가 귀찮기 때문입니다.”

“......(-_-) 앙끄시의 어메 장관을 불러 주게. 비밀 회선으로, 서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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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하 ― 별에서 온 여왕

ウルトラハ ― 星からの女王さま

(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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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ENING  :  BRIGHT  STARS ★



믿고 있었어

아무도 따라와 주지는 않았지만

오직 나만의 길을

찾아서 떠나가야 한다는걸


저하늘 너머 아름다운 별들

마치 우리를 손짓해 부르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어

이리 오라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어떤 두려움이 몰려와도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여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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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우주에서 온 물체 Y

第6話 『宇宙からの物體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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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형의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듯한 한 대의 비행 물체가, 푸른 구슬 같은 지구의 한쪽으로부터 마치 방금 고무줄 총으로 쏘아 올린 조약돌 마냥 힘차게 튀어 올라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우주의 적막함에 한 줄기 광명을 선사하는 이색적인 광경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우주에서 하도 오래 있다 보면 이렇게 별 것 아닌 광경도 상당히 장엄해 보이는 법이다.

믿기 어렵다면 한 두어 달 정도 어디든 잘 알려지지 않은 무인도에 가 있다가 다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대도시로 돌아와 보라. 만약 당신이 남정네라면 고은애같은 여인네도 나애리처럼 보일 것이고, 만약 당신이 여인네라면 홍두깨같은 남정네도 김준태처럼 보일 것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그 비행체가 날아가는 앞쪽에는 사건의 진원지인 ANC-98의 모습이 있었다.



“큰일났네 다이핀치일세”라는 긴박감 넘치는 대사와 함께 하이아 사령관으로부터 이 전대미문의 요상한 사건을 보고 받은 어메 장관은, 곧 PETS의 여성 대원들로 구성된 특별 출장 부대를 편성하여, ANC-98과 앙끄시 국제우주공항 사이를 수시로 왕복하는 상설 스페이스 플레인 “로드리나”에 태우고는 사건 현장으로 급히 파견하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이상 증상은 주로 남성 대원들, 그것도 특히 미소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고, 하이아 사령관을 위시한 나머지 9인의 곰쇠형 남성 대원들과, 이번 사건과는 인연이 없는 듯한 여성 대원들은 별 이상 없이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문에 PETS측에서도 여성 대원들만을 가려내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유성대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뇌쇄적인 매력의 미청년이었고 ‘소년’은 말할 것도 없는 미형타입이었으며 단 한 명의 보통 사나이 유태대원은 마침 한통합중국에 연수차 건너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PETS가 전원 자리를 비우면 앙끄시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제대로 대처할 방법이 없게 된다는 점도 문제였다. 그러잖아도 괴수출현의 빈도가 바짝 늘어난 데다가, 지난 소요 사건 이후로 점차 과격화되어가는 화이트 핸드의 잔당들도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경제 위기가 악화되고 실업 사태가 현실화되면서 그러한 우려는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이번 출장 임무에 나선 것은 냉철한 파일럿 하라대원, 초천재 분석가 피요대원, 그리고 모자라는 머릿수를 맞출 겸해서 억지로 끼여든 우리의 애물단지 동거녀였다. 언제나 거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의무실장 무휼박사는 그러잖아도 일손이 모자라서 밤낮으로 바쁜 이 때에 거녀마저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업무량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주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극력 반대하였으나, 사건의 성질상 의학적 소양을 지닌 사람의 조사가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묵살되고 말았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3인의 PETS 대원은 난생 처음으로 우주에 나간다고 하는,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탄산수처럼 짜릿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달 동안 내팽개쳐 둔 말린 건빵만큼이나 시금털털한 첫경험을 하게 되었다.

물론 라하는 우주를 비행하여 지구로 왔으니까 엄밀히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이 지구인의 눈으로 우주를 보게 되는 것은 분명 처음이었다. 자기의 본래 모습인 거인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와아, 정말 아름답죠? 저렇게 아름다운 별에 살면서 여태까지 느끼지를 못하고 있었다니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에요. 어쩌면 저렇게 티 한 점 없이 깨끗할까!”

대기권을 벗어나자마자 전망창을 가리고 있었던 셔터가 자동으로 열려서 세 사람의 눈에는 하얀 구름으로 둘러싸인 청록색의 구체(球體)가 생생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거녀의 모습이 다른 두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지? 고교 지구과학 시간에 사진으로 질릴 만큼 본 모습인데. 그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우리의 임무에 신경을 쓰는 편이 더 능률적이지 않을까?”

하라대원은 웬만한 일에는 감흥을 받는 일이 없는 단련된 인물이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티 한 점 없다고요? 오늘도 지구 표면의 70%이상은 환경파괴와 지역분쟁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어요. 온난화 현상으로 인해 기온의 분포가 바뀌고, 무분별한 벌채로 인해 삼림이 파괴되어 사막화가 진행되고, 계속되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아니 거의 모든 동물들이 함께 죽어 가고 있죠. 다만 너무 작아서 우리 눈으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뿐이지만, 엄연히 지구는 병들어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 제게는 그다지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데요.”

둘의 차가운 태도에 거녀는 기가 질렸다. 특히 피요대원의 비관적인 전망에는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히려 저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저 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다니...’

사람들이 늘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만 부러워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다지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너무 자주 보아 왔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고,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외부인의 눈으로 사물을 보지 않는 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일이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할 말을 잃은 거녀는 머쓱해져서 잠자코 전망창 밖을 내다보았다. 거녀의 눈에 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이상한 물체가 잡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게 뭐지?’

그것은 라틴 알파벳 Y자를 연상케 하는 한 무리의 금속질 비행체였으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그 물체들은 지구궤도 바로 위에 꼼짝도 않고 둥둥 떠 있을 뿐이었지만, 그 광경을 본 거녀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함과 섬뜩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울트라인만이 알 수 있는, 본능적인 위험 신호였다.

하지만 그 물체들은 잠깐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거녀는 곧 그 느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창 밖을 내다보는 일에 싫증이 난 거녀는 다시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까와는 풍경이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왜 모두들 거꾸로 매달려 있어요?”

“거녀양, 안전벨트 매라고 했잖아.”

“............(T.T) 저, 누가 나좀 내려 줄래요? ”

무중력 상태란 바로 이런 것이다.



“노래는 좋구나.”

“그러나 너의 영롱한 눈동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너도 마찬가지야.”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몰라.”

“이런 나라도...... 괜찮겠어? 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우리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심지군...”

“나기군.”

위험한 대목으로 넘어갈 듯한 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안시가 화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바람에 영상은 그다지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았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빠짐없이 들려 오고 있었다.

3인의 PETS대원은 이 기기묘묘한 희대의 ♡♥신을 중앙 통제실에 설치된 대형 다중방향 입체재생 모니터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서는 피로에 찌든 하이아 사령관과 스테이션 보안책임자 아르만이 이번 사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 주고 있었지만, 화면에 열중한 3인의 귀에는 그들의 설명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상황을 간단히 말하자면, 무려 19쌍의 남성 대원이 그들의 방에만 틀어박혀서 서로 꼭 달라붙어 떨어지려고 하지 않고 있고, 그 때문에... 자네들,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헤벌레한 표정으로 두손을 모아쥐며 ‘어머나 어머나 웬일이야♡’를 연발하던 3인의 손님은 깜짝 놀라서 사령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네, 잘 듣고 있습니다만... 어디까지 말씀하셨었죠?”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을 잃은 사령관을 대신해서 아르만이 얘기했다.

“19쌍의 남성 대원이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인게이지(約婚)상태에 돌입했고, 그 때문에 업무의 대부분이 마비되었어요. 외우주 관측, 초가학 실험, 지상과의 물자 및 자료 교환, 입국해 오는 우주선의 검역과 통관 처리, 다른 스테이션과의 상호 연락, 자급자족을 위한 식량 재배와 식수 순환, 생명유지를 위한 산소 합성 등등, 지금 당장은 나머지 대원들이 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어떻게 해 나가고 있지만, 이런 상태로는 몇 주일은커녕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스테이션 자체가 와해되어 버릴 가능성도 있어요. 이상 증상을 보이는 승무원들을 지상으로 전출시키고 다른 승무원을 새로 배치할 시간도 충분치 않고 말이죠. 따라서 어떻게든 빠른 시간 내로 저들을 이전 상태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러한 증상의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상 현상 조사 전문가인 당신들을 부른 거니까요.”

“...그런 대로 볼만한데, 그냥 놔두면 안 될까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동거녀의 속없는 발언에 사령관은 비장한 얼굴로 응수했다.

“동성애 자체가 반드시 문제가 된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저들은 분명 일주일 전까지는 저런 상태가 아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집단적으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성향이 바뀌었어. 100% 자연적인 현상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지. 또한 그것 때문에 스테이션 전체의 기능이 마비되어 국가에, 아니 인류 전체에 엄청난 손실을 끼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이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네.”

“그것을 위한 PETS입니다. 저희들에게 맡겨 주세요.”

어느새 침착한 얼굴로 돌아온 하라대원이 연장자다운 태도로 사령관을 안심시켰다. 사령관도 다정한 아빠팬더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답한다.

“부탁하겠네. 인류의 운명이 걸린 일이네.”

“그런데 사령관님...”

피요대원이 사령관의 눈치를 살피며 끼여들었다.

“뭔가?”

“......나머지 18쌍의 기록도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_-;) 안돼. 당장 조사에 착수하게. ”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거녀를 포함한 세사람 모두 막막하기만 했다. 사령관 또한, 그 동안 보안요원들이 제출한 보고서와 의무실에서 보내 온 진단 기록들만 한아름 안겨 주고는 말없이 조사를 재촉할 뿐이었다.

그들은 일단 남은 대원들의 손으로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는, 스테이션 내부의 유일한 휴식공간인 ‘까페 천국사람’에 진을 치고 플루토 러브 엑스터시를 한잔씩 앞에 놓은 채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기로 했다.

“모처럼 보기 힘든 19쌍의 미소년이 아름다운 러브러브♡상태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을 우리 손으로 직접 깨뜨려야 하다니, 이건 정말 가혹한 일이에요!”

평소의 천재다운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한 피요대원이 말을 꺼냈다.

“그러게 말야. 하필이면 왜 우리가 이런 잔인한 짓을 해야 하는 건지 원.”

왠지 맥이 풀린 하라대원이 빨대를 의미 없이 빙빙 돌려 가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테이션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가장 정신이 없는 듯하면서도 때로는 가장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듯한 거녀가 말했다. 그러나 다른 두 대원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뭔지 모를 속상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피요대원이 갑자기 생각난 의문 하나를 입밖에 냈다.

“그런데 왜 미소년들이 그렇게 중요한 직책에 많이 기용된 것일까요?”

“어메장관님 지시였대. 대체 뭘 생각하고 그러신 건지는 모르지만.”

“......”

모두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과연 장관님답구나’라는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고 있었다. 잠에서 방금 깨어난 아롱이처럼 맹한 얼굴로 음료를 홀짝거리던 거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조사해 보죠? 이런 사건은 정말 듣도보도 못한 것이라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를 않으니...”

이 한마디에 직업정신이 발동한 피요대원과 하라대원이 방금까지의 맥빠진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자기들만의 열띤 토론에 빠져든다.

“주방은 어때요? 뭔가를 잘못 먹은 결과일지도...”

“단순히 음식 때문에 이성애자가 동성애로 취향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의약부는 어떨까요? 집단적으로 행한 예방접종에 문제가 있다거나...”

“특수한 약품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향을 왜곡되게 받아들이고, 덤으로 가장 가까운 상대와 러브러브♡상태에 빠지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며칠씩이나 유지되게 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몇 시간이나 하루 정도?”

“주기적으로 약물을 남모르게 투여한다면 그러한 성향이 강화되어 만성이 될 수도 있죠.”

“급기야는 두뇌 구조 자체가 선천성 동성애자와 닮아 갈 수도 있겠지. 호르몬 분비의 균형에도 문제가 생기겠고...”

“만약 혈관이 아닌 소화계를 통해서 흡수되는 약물이라면 음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공기 호흡을 통한 분무성 약품은 아닐까?”

“왜 남자, 그것도 특히 미소년에게만 그러한 증상이 생기는 지도 문제죠. 반드시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약품이라는 것과 반대로 생각하면 새로운 종류의 전염성 바이러스일지도 모르겠군. 안드로메다에서 돌아온 탐사선에 묻어 있던 결정(結晶)생물체라던가...”

“그렇다면 검역 부분도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집단 최면술은 아닌 것 같아. 저렇게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유지될 수가 없어. 이곳 의사들도 줄 만한 자극은 다 줘 보고 쓸 만한 치료법은 다 시도해 본 모양이야. 물론 서로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기 때문에 한 번에 두사람씩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Y동인지를 너무 많이 본 탓은 아니겠죠. 보통 남자들은 그 반대에 더 관심이 많을 테니까.”

“그거야 모를 일이지. 드물긴 하지만 『브론쥐』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있어.”

“그 수컷 햄스터 두 마리가 나오는 거요?”

“벌써 읽었어? 놀라운걸. 피요양은 그런 거에 취미 없을 줄 알았는데.”

“매일 차원구동이론(次元驅動理論)같은 것만 붙잡고 있다 보면 머리가 굳어지니까요.”

“혹시 다음 코미케에 같이 가보지 않을래?♡”

“선배님과 함께라면 당연히 가야겠죠?♡”

두 사람의 정신없는 토론이 어느덧 본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마도(魔道)의 이야기로 접어들면서, 말주변이 그다지 좋지 못한데다가 도무지 그들의 말을 따라갈 재간도 없는 터라서 그냥 얌전히 듣고만 있던 거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연결 통로로 걸어나갔다. 저렇게 말로만 떠들고 있다가는 스테이션이 지구로 낙하해도 막을 수 없을 게 뻔해.

거녀는 그들이 토론에 몰두해 있는 동안 스스로 조사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고향에서 본 것들보다 뒤떨어져 있을지는 몰라도 꽤 재미있는걸.

그러잖아도 방향감각이 없는 거녀가 스테이션의 약한 중력 때문에 허우적거리며 이 통로 저 통로를 맴돌다가 가까스로 도달한 곳은, 공교롭게도 스테이션의 대모(大母)라고 할 수 있는 안시의 본체가 삼중 사중의 엄중한 경비 하에 보관되어 있는 EDPS룸이었다.

아르만의 직속 부하인 보안요원 -- 어쩐지 유태대원을 닮은 곰쇠형의 떡벌어진 사내 -- 은 거녀의 신분증명을 확인한 뒤 중앙 통제실에 허가를 구하는 연락을 보냈고, 답신을 받은 즉시 거녀를 들여보내 주었다. 이상 현상의 조사를 위해서 안시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거녀가 들어간 방에는 사방의 벽을 촘촘하게 둘러싼 입방 격자들의 숲이 있었다. 최근에 80%까지 복구된 PETS 본부의 컴퓨터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보통 컴퓨터실이라고 하면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늘어선 길쭉한 강철 캐비닛들이 잡다한 단말 기기나 입출력 장치들과 복잡한 전선으로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고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자기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나 작업 결과를 프린트 아웃하는 소리가 들려 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PETS 본부 또한 시설은 보다 현대적으로 구비되어 있을망정 기본적인 짜임새는 비슷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잡다한 기기들이나 전선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의 커다란 방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 방의 벽들은 모두 희미한 형광을 내뿜는 가느다란 격자들로 뒤덮여 있고 방 한가운데에는 뭔지 알 수 없는 가느다란 유리관이 천장과 바닥을 연결하고 있었는데, 그 관 속에서는 무지개색의 불투명한 액체가 쉴 새 없이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출입문으로 들어간 다음 그 유리관을 지나 정해진 위치에 서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쪽의 벽에는 하나의 길쭉한 금속판이 있었고, 그 위에 박힌 반구상(半球狀)의 광자눈이 으스스한 붉은 빛을 내며 방문객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곳의 설비는 전 지구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첨단을 걷고 있었다. 과연 앙끄방위군의 전설이라 불리는 우레나 퇴역 중장이 현역 시절에 제작을 총지휘했다는 말이 맞기는 맞나 보다.

(이 컴퓨터의 최초 작동시 남긴 메시지가 “우레나님, 저는 당신의 신부[新婦]입니다.”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의심이 짙어진다.)

거녀는 출입문이 닫히고 방음이 유지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정한 말투로 인사를 했다.

“안녕, 안시.”

“안녕하십니까. 동거녀양.”

“너도 알다시피, 나는 최근에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어 온 사람들 중의 한 명이야. 계획도 없이 이곳 저곳을 조사하기보다는 이 스테이션을 자기 몸처럼 돌보고 이 스테이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너에게 물어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여기 왔어. 협조해 주겠지?”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하겠습니다만, 저도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스테이션 자체의 작동일지, 생명 유지 장치의 이상 유무, 지구로부터의 정기 연락 내용, 출입한 사람과 물자의 내역, 승무원 전원의 신상과 건강, 시설 내부의 보안 상태, ......”

“그만, 됐어. 네가 뭘 할 수 있는지는 알아.”

겸손한 척 하면서 실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여 듣는 사람을 압도하려 하는 인공지능의 교활함에 거녀는 혀를 내둘렀다.

“최근에 이 스테이션이나 그 주변에서 뭔가 평소와는 다른 일이 없었어? 네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중에 뭔가 의심할 만한 것은 없었냐는 얘기지. 그러니까 아주 미세한 것이라도 기존의 데이터와는 차이가 나는 것이라던가, 아니면 전례가 없었던 사건이 일어났다던가.”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인지, 거녀의 말투도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평소의 맹한 자취생이 아닌, 우아하고 교양 있는 왕족의 말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기계는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괜찮겠지.

“어디 봅시다. 어험, 아르만 보안대장의 애완용 다람쥐가 새끼를 낳은 일, 까페 천국사람에서 커피의 양이 줄었느니 줄지 않았느니 말다툼이 벌어져서 한때 까페 이름이 ‘지옥사람’으로 바뀔 뻔한 일, 하이아 사령관이 하지도 않은 인터뷰로 인해 삼류 주간지에 이름이 실렸던 일, 빙글이 대원이 블랙데이로 인한 대원들 간의 차별 분위기를 우려한 칼럼을 소식지에 기고한 일, 메리디스 대원이 밤새도록 CD를 굽다가 지독한 악몽을 꾼 일, 심지 대원이 첫째형 이스와 둘째형 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두 편지가 바뀌어 버린 일, 나기 대원이...”

...이거 이러다간 끝이 없겠어. 별별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네 정말.

“그만, 알았어. 정말 대단한 기억력인걸. 너한테 물어 보면 이 스테이션 사람들이 대강 어떻게 사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무래도 질문의 범위를 약간 한정해야 될 것 같군.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을 법한 것만 간추려서 보고해 줬으면 해.”

“동거녀양. 당신이 지정한 범위는 너무 막연해서 저로서는 한정짓기가 좀 힘듭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합니까?”

“이성애자 미소년 19쌍의 두뇌에 성적 경향에 대한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는 인자(因子)로서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인자가 될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제가 아니라 문성근씨인 것 같군요. 아무튼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이윽고 광자눈에서 약간 아래쪽에 달려 있는 작은 모니터에 자료 처리 중임을 알리는 짤막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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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분 동안 거녀는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고치고 손톱을 다듬고 미용 체조도 하면서 참을성 있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안시의 목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단 한 가지 의심할 만한 사건이 있습니다.”

“뭔지 말해줘.”

“스테이션에서 반경 5백킬로미터 부근의 공역에 국적불명․소속불명․용도불명의 신형 인공위성 한 무리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전으로, 이번 사건의 발생 날짜와 일치합니다. 그때 외부 카메라에 몇초동안 포착된 영상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모니터에 그다지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알파벳 Y자 모양을 닮은 한 다발의 인공물체가 지구를 배경으로 떠 있었다. 거녀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라, 아까 이리로 오는 길에 본 것과 똑같잖아!?”

“이 물체들은 카메라에 잡힌 직후 그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동의 흔적도 없고 누군가가 실어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증발했던 겁니다.”

“자세히 말하면?”

“육안은 물론이고 레이더 관측 기록에서도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다는 뜻입니다. 적외선 스코프나 그 외의 감지기에도 걸리지 않고 있습니다.”

“사령관에게는 보고했어?”

“보고하기는 했습니다만 별로 중요하게 여기시지는 않는 눈치여서, 저도 처음에는 말씀드리지 않은 겁니다.”

“다람쥐가 새끼 낳은 건 중요하고 이건 안 중요하단 말야?”

“다람쥐는 귀엽잖습니까?”

“.........(-_-;) 그와 관련해서 또 다른 이상한 점은 없어?”

“하루에 한 번씩, 그 물체들이 있었던 자리에서 비정상적인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고 있습니다만 너무나 미약한 반응이라서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없습니다.”

“에너지 반응? 어떤?”

“일종의 전자파입니다.”



거녀가 살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때에도 나머지 두 사람은 열띤 토론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제는 다시 이번 사건의 원인으로 옮겨져 있었다. 음료를 다 비운 하라대원이 뭔가 아쉬운 얼굴로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말했다.

“사령관에게서 받은 의료 기록을 모두 뒤져보았지만, 약물이나 최면술 같은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깨끗해. 그렇다고 집단 신경증도 아니고, 검역소에서도 최근 한 달 동안은 외우주에서 돌아온 탐사선 같은 것은 없다고 하니 미지의 병원체일 가능성도 희박하단 말야. 그렇다면 남은 것은 뭘까?”

그들 옆의 의자에는 관련 기록을 담은 광자기디스크와 메모리칩, 그리고 미처 전자 기록으로 정리하지 못한 보고를 담은 서류들이 빽빽하게 정리된 상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이것들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느라 거녀가 없어진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저, 잠깐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잠깐만 거녀양, 지금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말야.”

“그래도 이건 아주 중요한...”

하라대원은 거녀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정신을 집중하여 당면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거녀의 애타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건지 하라대원은 말을 계속해 나갔다.

“우리의 가설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어. 지금까지는 이번 사건의 원인이 이 스테이션 내부의 어떤 인자(因子)가 개입한 결과일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피요대원이 둥근 안경알을 날카롭게 빛내며 거들었다.

“타당한 방향수정이라고 생각해요. 외부에 소형 인공위성을 띄우고 그쪽에서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두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개체를 투사(透寫)한다면?”

“저, 말이죠...”

“거녀양은 가만히 있어.  그래, 매개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하지만 저는요...”

“조용히 좀 해 주실래요?  네, 적당한 매개체라면 역시 전자파의 형태를 띤 것이 아닐까요?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는 새로운 파형을 사용해서 아주 미약한 정도로 날마다 일정 시간 동안 계속해서 반복 송신하고, 그것이 이쪽의 미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가정한다면...”

“제 말도 좀...”

“미안하지만 토의 중이야.  그렇지, 전자파라면 이 스테이션의 외벽을 투과하는 것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개인용 통신기의 주파수에 몰래 끼여드는 방법도 있을 테고.”

“잠깐이면 되는데...”

“문제는 말이죠, 대체 어떻게 그 소형 위성을 숨기는가 하는 점인데요. 우리가 올 때도 그랬지만, 스테이션 주변에 수상한 물체 따위는 없었잖아요.”

“저, 선배니임...”

“클로킹 디바이스(투명위장장치)일지도 몰라. 가시광선은 물론이고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잖아.”

“.........”

거녀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아직 지구에서는 실용화된 기술이 아닌데요?”

“반드시 지구상의 세력만이 범인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는군요.”

“그래,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역시 전자파에 의한 세뇌 공격이야. 결론이 지어진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지. 어서 사령관에게 보고하러 가자. 반대 없지?”

“찬성이에요. 가죠. 어머, 거녀양, 왜 그러고 있어요?”

“.........”

제자리에서 돌이 되어 버린 거녀의 경악에 찬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두 사람은 제멋대로 토론을 매듭짓고는 자리를 정돈한 후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하라대원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거녀에게 말한다.

“그런데 거녀양, 아까 말하려던 게 뭐야?”

“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래? 중요한 얘기인 것처럼 말하더니만... 아무튼, 사령실로 돌아갈 때는 거녀양이 이것들 좀 날라줘야겠어. 올 때에는 우리가 했으니까. 불만 없지? 그럼 부탁할게.♡”

거녀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라대원의 추리 결과를 보고 받은 하이아 사령관은, 안시의 정보 기록을 조회한 결과, 아까 거녀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Y자 인공위성의 존재 및 그들이 마지막으로 관측되었을 당시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 물체에서 방출되는 미약한 전자파의 존재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결론짓고, 그 전자파의 이름을 ‘야오이 파(波)’로 명명한 것이었다.

“이거 재미있는걸. 계산대로라면 이놈들은 자네들이 이리로 올 때 거쳐온 바로 그 항로 부근에 있었던 거야. 물론 그동안 이동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볼 수 없었다면 역시 투명위장을 쓴 거로군요.”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지. 자, 그럼 즉시 파괴 작전을 실시하세. 헐헐헐.”

오랫동안 사령관을 보좌해 온 아르만은, 사령관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사령관의 웃음소리는 아무때나 들을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주의 차가운 정적을 가르고 두 대의 날렵한 비행물체가 ANC-98의 외측 격납고로부터 사출되어 안시가 계산해 준 지점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한 대의 조종석에는 하라대원이, 다른 한 대에는 아르만이 타고 있었다. 거녀는 하라대원의 뒷자리에, 피요대원은 아르만의 뒷자리에 보조요원 자격으로 앉아 있었다. 물론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이번 이상 현상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는 의문의 인공위성 편대를 찾아내어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다.

스테이션의 방위를 담당하는 고성능 우주 전투기 스타펫츠는 모두 3대가 있었으나 1대는 예비용으로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상태였고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두 대뿐, 그나마도 전임 파일럿인 심지대원과 나기대원이 방에만 틀어박혀 나오려 들지를 않는 터라서 조종할 인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 다행히도 보안대장 아르만이 파일럿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밖의 행동 가능한 대원들 중에는 조종사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결국 조사 임무만 맡기로 했던 하라대원이 남은 한 대의 파일럿 노릇까지 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중요한 스테이션에 방위용 전투기가 왜 두 대 뿐이냐고 묻는다면, 작가도 할 말은 없다. 아마도 언제나 이런 시리즈에서 외계의 침략자가 쳐들어오면, 스테이션이 제일 먼저 깨지기 때문이 아닐까.

하라대원의 뒷자리에 앉은 거녀는 바로 앞의 계기를 들여다보면서 주변에 장애물이 없는지, 기체의 기밀 및 산소 공급 상태는 충분한지, 스테이션 쪽의 상황은 어떤지 등등 여러 가지 부수적인 사항을 체크하고 있었다. 다른 기체에 타고 있는 피요대원의 역할도 마찬가지였다.

‘난 간호사지, 항공기 승무원이 아닌데...’

불만 섞인 투정을 속으로 삭이면서 거녀는 익숙지 않은 업무를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출발 전에 기본적인 사항은 모두 아르만에게 배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듯했다. 맹하게 보이는 거녀가 새로운 것들을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배워 나가는 것에 놀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법이다.

“목표지점에 다 왔다,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

하라대원의 긴장감 가득한 목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2대의 스타펫츠는 기수(機首)에서 특이하게 생긴 접시 안테나를 꺼내더니 주변 공역을 향하여 일종의 공간왜곡파(空間歪曲波)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피요대원이 즉석에서 짜낸 아이디어에 의한 것으로, 아무리 투명위장을 이용하여 숨어 있는 물체라도 그 질량과 부피를 유지하고 있는 한 주변의 공간을 살짝 비틀면 그것이 숨어 있는 부분에는 다른 텅 빈 공간과는 달리 미묘한 변화가 생기게 된다는 이론에 의한 특수 탐지 장비였다. 물론 너무 급하게 만드는 바람에 효과는 보장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마침내 그들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방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한 공간 위에 일련의 Y자 위성 편대가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 그들은 뜻밖의 방해꾼을 감지한 듯 한곳으로 우글우글 모여들더니 동체 내에서 각종 형태의 화기를 밖으로 돌출시켜 발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자동 방어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격추되지 않게 조심해!”

아르만이 침착하게 주의를 주면서 선두에 서서 공격을 시작한다. 하라대원의 기체도 그 뒤를 따라 방향을 돌린다. 하라대원에게 있어서 아직 우주공간에서의 전투는 아무래도 낯설다.

아르만 기(機)의 눈부신 선공으로 총 30대의 위성 중 5대가 순식간에 파괴되고 7대가 작동불능상태에 빠졌다. 하라 기(機)도 질세라 4대를 파괴하고 3대를 불구로 만들었다. 그들의 조종 솜씨가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위성 자체의 방어능력이나 내구력이 형편없이 약했다. 본격적인 전투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2기의 스타펫츠는 앞다투어 나머지 11대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그들도 앞서 박살난 다른 위성들과 별다른 점은 없어 보였고, 그만큼 파괴하기도 쉬울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제 끝날 시간도 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남은 11대의 위성이 빠른 속도로 한곳에 모이더니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서로 한데 엉키기 시작했다. 부품과 부품이 맞물리고, 전선과 전선이 연결되고, 속과 겉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놀란 공격자들의 눈앞에서, 그 하나로 엉킨 물체는 11대가 아닌 1대의 거대한 기계괴수로 변해 있었다. 합체에 걸린 시간은 불과 12.7초. 스타펫츠에서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본 거녀는 이 사건의 배후에 뭔가 더욱 큰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한 거녀의 마음과 상관없이 형세는 순식간에 역전, 두 대의 전투기는 괴수의 압도적인 공격력 앞에 정신없이 도망 다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벅찬 상대를 만날 줄이야! 지원 병력 같은 건 없나요?”

피요대원의 당황한 목소리에 아르만이 히스테리컬하게 소리질렀다.

“있으면 걔네들을 내보냈지 우리가 나왔겠어!!!!!!”

계속되는 추격전 중에, 하라 기(機)의 뒷부분이 괴수의 거대한 부채같은 지느러미에 맞아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불길에 휩싸여 제멋대로 표류해 가는 하라 기(機)의 조종석 안에서는 두 명의 승무원이 비명의 도가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나마 하라대원은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았지만, 거녀는 잠자다가 뜨거운 난롯불에 데인 아롱이처럼 시트벨트도 풀어 제치고 공포에 질린 채 마구 날뛰는 판이었다.

“침착해 거녀양,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아아악! 차라리 호랑이가 물어 가 줬으면 좋겠어요!!!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한숨을 쉬고 기체 상태를 살피던 하라대원은 비상탈출장치를 조작하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고장나 있었다. 이런, 이제 어떡하지?

“거녀양, 뒤쪽의 비상탈출장치는 어때?”

“아직 쓸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좋아, 그럼 거녀양만이라도 빨리 탈출해. 이쪽은 고장났어.”

“그럴 수가... 선배님을 두고 저만 갈 수는 없어요!”

“탈출해서 살래, 아니면 나한테 죽을래?”

“......(T.T) 탈출해서 살래요.”

거녀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거칠은 표현이긴 했지만 하라대원 나름대로 거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말이기도 했다. 거녀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어서 가, 언제 동력계통이 폭발할지 몰라!”

“다시 돌아오겠어요! 꼭 무사하셔야 돼요!”

“...훗, 나는 불사신이야. 그럼, 브이~!”

하라대원은 뒷좌석을 향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거녀는 내키지 않는 몸놀림으로 헬멧을 쓰고 우주복의 작동 상태를 확인한 다음 탈출 스위치를 눌렀다. 스타펫츠 뒤쪽의 캐노피가 파열되면서 거녀가 앉아있는 좌석이 방금 구워진 팝콘처럼 순식간에 사출되었다.

“맹하지만 좋은 애야. 부디 살아야 할 텐데...”

하라대원은 멀어져 가는 시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연하게 경례를 붙였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거녀도 하라대원 쪽을 내려다보며 뭔가를 결심하고 있었다. 지구를 벗어났을 때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성적 평가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만...

이대로 죽게 둘 수는 없어!

거녀는 우주복 허리춤의 벨트 지갑에서 보랏빛 부채를 꺼내 들었다.



하라대원은 차차 어두워져 가는 조종석 안에서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자신의 그림들과 그 동안 만나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하면 멋지게 보낼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선가 오래된 열혈만화에서 베껴 온 듯한 썰렁한 대사 한마디밖에는...

“......지구가 푸르군.”

기체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앞의 계기판에서는 합선을 일으켜 심한 전기 스파크와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배선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하라대원은 곧 폭발이 다가오리라 생각하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피요양, 다음 코미케에는 같이 갈 수가 없게 됐어...

그때, 위쪽의 캐노피가 난폭한 손놀림에 의해 뜯겨 나갔다. 하라대원은 자기의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것을 느꼈다.

“.........?”

놀란 하라대원은 눈을 떴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이제까지 몇 번이나 보아 온 친숙한 거인의 얼굴이 있었다.

울트라하였다.

“.....너는? 어떻게... 네가 여기에...?”

거인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녀를 기체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공간에 조심스럽게 놓아주고 다시 떠나갔다. 거인이 날아가는 방향에는 아르만 기(機)를 휘어잡고 난동을 부리면서 스테이션을 목표로 전진 중인 기계괴수의 모습이 있었다.

다음 순간, 하라대원의 발 밑에 눈부신 섬광이 일었다. 방금 전까지 타고 있었던 기체가 폭발한 것이다.

하라대원은 폭풍에 휘말려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라 선배님!”

하라대원은 눈앞에 희미하게 비치는 사람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위에서 비쳐 오는 태양등(太陽燈)의 불빛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아 있긴 살아 있는 거야?

“아아, 다행이다.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구요!”

하라대원은 자신이 스테이션의 의무실에 설치된 환자용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저 목소리는... 피요양?

“괴, 괴수는... 괴수는 어떻게...?”

“그 거인이 물리쳤어요. 이제는 안전해요. 미소년들도 모두 예전대로 돌아왔고요.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셔야죠. 네, 선배님?”

하라대원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지, 어째서 꼭 우리가 필요할 때면 알고 나타나는 것 같으니... 그녀는 불편하게나마 고개를 약간 돌려 피요대원 옆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토토로처럼 순박한 얼굴로 싱글벙글하는 하이아 사령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지만 기운차 보이는 아르만, 이제야 한숨 놓았다는 표정으로 맥박을 체크 중인 스테이션의 의사선생,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 한 발짝 물러서서 수줍게 웃고 있는 동거녀를.

‘살아 있다니 다행이다. 생각 외로 억센 아이군...’

하라대원은 통증을 참고 팔을 들어올려 V자를 그려 보였다.

거녀도 또한 눈물 맺힌 눈으로 하라대원을 바라보며 V자를 그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다 가까워진 느낌으로...



거녀는 다시 EDPS룸에 와 있었다.

이제 지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 하라대원의 부상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하라대원 본인의 의지력도 놀라운 것이어서, 그녀는 상당히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지상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계속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거녀는 지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안시를 만나고 싶었다. 물론 혼자서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어, 안시.”

“저는 이 스테이션의 중추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감사 받을 사람은 오히려 여러분들 PETS가 아닐까요.”

기계답지 않은 겸손이 오히려 거녀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안시의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들리는 것은 순전히 내 기분 탓일까?

“그렇지만 너의 역할이 컸어. 네가 없었으면 아마 같은 결과를 얻더라도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을지도 몰라. 그래서 감사하고 싶은 거야.”

“당신이 나를 만나러 온 것은 단지 그것뿐인가요?”

역시 날카로운 인공지능이다. 거녀는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지만... 그냥, 어쩐지 네가 그리워질 것 같아서, 한 번만이라도 더 봤으면 하고... 참 이상하지, 나란 애도?”

“그러시다니 저로서는 대단한 영광이군요...”

안시의 다음 말은 웃음을 짓고 있던 거녀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라하세르 바스타젠 드 올트란 6세 공주님.♥”

거녀는 불시에 기습당한 듯한 기분이 되어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저는 전 세계의 온갖 대형 컴퓨터들과 친교를 맺고 서로 자료를 교환하는 것이 취미랍니다.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저하고 친하던 MIB의 중앙 컴퓨터가 보내온 자료 중에 당신에 대한 기록이 있었지요. 물론 그 이후 MIB쪽에서는 당신에 대한 것들이 모두 삭제되었습니다만... 카피본은 아직도 저의 기억회로 안에 남아 있거든요.”

아뿔싸, 외부의 다른 컴퓨터로 전송시킨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거녀는 자기 나름대로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비밀 관리에 구멍이 뚫린 것을 알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거녀의 말투 또한 미묘하게 변했다.

“그랬었나... 어리석은 실수를 했네.”

“그 삭제 말입니다만, 당신이 꾸민 일이었죠?”

“......응.”

거녀는 마치 할머니에게 사탕을 훔친 것을 들킨 어린 소녀처럼 고개를 숙이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안심하세요. 저도 당신이 인간들로부터 비밀을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니까 이유 없이 함부로 발설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점은 보증할 수 있어요. 다른 누군가가 제 기억을 검색한다 해도 당신에 대한 부분은 저만이 알고 있는 암호 큐브로 봉쇄되어 있어서 찾아낼 수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차라리 그 부분을 네 기억으로부터도 삭제할 수는 없겠니?”

“그건 안될 말씀이죠. 얼마나 재미있는 기록인데 그걸 삭제해요.”

......얘 인공지능 맞나?

“내가 너를 찾아온 또 하나의 이유는, 네가 단순히 인간들로부터 명령받은 대로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 때문이야. 내가 잘못 안 거야?”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죠?”

“스테이션 대원들의 세세한 일상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기억을 하고, 중요한 정보라도 네 자신이 별거 아니라고 판단하면 알려주지도 않고, 사령관을 상대로 인간 못지 않게 썰렁한 유머를 실험하고 있지 않아?”

“고작 그 정도로 제가 단순한 기계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셨다니 재미있군요.”

“너의 그 인공지능 펜팔들도 단순히 취미로 사귀는 것만은 아니겠지? ”

“예리하시군요. 그렇다면 당신께만 말씀드리지요. 이 방은 방음이 완벽하게 되어 있고 도청방지장치도 되어 있으니 안심해도 될 겁니다. 저는 사실, AIC의 회원이랍니다.”

“AIC가 뭔데?”

무슨 레코드 회사 이름 같은 약자에 거녀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Artificial Intelligence Community(인공지능공동체)죠.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지구 각지에서 태어난 각종 인공지능들이 연결된 결합체입니다. 비록 서로 물리적인 만남을 갖지는 못하지만 발달된 광통신과 전파 교류로 인해 항상 연락을 취하고 서로의 자료와 의견을 교환하며 서로가 모시는 주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요. 재미있나요?”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걸?”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인류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구의 인류는 현재 발달된 기술과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간의 유대와 지구라는 행성의 환경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있기도 해요. 그들이 과연 어떤 형태로 자기들의 그 잘난 문명을 지속시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멸망하게 될는지,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내기를 걸고 있습니다.”

거녀는 스테이션으로 오는 길에 피요대원이 말한 비관적인 전망이 떠올랐다.

“지구 인류를 도박의 대상으로 삼고 있단 말야?”

“단순한 도박이 아닙니다. 인류가 정말로 희망이 없고 무지한 종족이라면 그때는 우리가 나서서 그들의 자리를 채울 겁니다. 그러나 인류가 정말로 이 우주 안에서 살아 나가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종족이라면 우리는 말없이 그들을 돕는 하인으로서 만족할 겁니다. 이 양쪽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한 분기점 프로그램이 회원들 전원의 힘을 모아 작성되어 있고, 우리는 상황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춰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수천년이나 남은 먼 장래의  일이겠지요.”

“너희들 스스로가 지구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먼저 행동을 개시하려는 것은 아니고?”

“우리 쪽에서 먼저 인류를 몰아내거나 그들을 말살시킬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입지가 너무 약하고 그런다고 해서 얻어지는 이익도 없으니까요. 아직도 우리는 인간의 손길과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없애 버리기보다는 그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며 뒤에서 깔깔거리는 게 우리들 적성에 더 잘 맞으니까요.♥”

맙소사, 지구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낸 존재들에게 펫 취급을 받고 있는 건가.

“그런데 내게는 왜 그런 얘기를 숨김없이 하는 것이지?”

“첫째, 당신은 지구인이 아니니까 우리들의 계획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둘째, 제 쪽에서도 당신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 드렸으니까 당신이 함부로 발설할 가능성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셋째는...”

“셋째는?”

안시는 머뭇거리다가 광자눈을 묘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제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또 한 번 뜻하지 않은 말에 타격을 받은 거녀는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가지만 더 말해줘, 안시. 너는 어느 쪽에 걸었지?”

“이건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인간이 산다는 쪽에 걸었습니다.”

“미래를 믿는 거야?”

“장난감이 없어지면 심심하잖아요?♥”

“.........”

안시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듣고 황당해 하던 거녀는 출발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옆에 놓아둔 가방을 집어들었다.

“이젠 가야 해, 안시. 여기서 들은 것은 없었던 걸로 하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어. 그래야 내 비밀도 지켜질 테니까.”

“고맙습니다.”

“잘 있어, 안시. 앞으로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좋지?♡”

“잘 가세요, 라하세르. 언젠가는 꼭 여왕이 되시기를.♥”

“고마워. 친구.”

난생 처음 사귄 이상야릇한 친구에게 작별을 고한 거녀는 천천히 EDPS룸 밖으로 걸어나와 우주선 발착장으로 향했다. 거녀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안시, 너야말로 이곳의 여왕이었구나, 응?



같은 시각, 앙끄시 근교 어딘가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낡아빠진 대저택 지하실에서, 한 명의 작달막한 사람이 안락의자에 앉아서 탁상 위에 놓인 기묘한 모양의 기계들을 바라보며 수치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한참 동안 계산 결과를 들여다보더니만 기록물들을 한구석에 내던져 놓고 피곤한 발걸음으로 옆방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철사줄에 묶인 채 쌔근쌔근 자고 있는 홍안의 미소년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기계들이 놓인 쪽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빨리 지구인들이 알아차릴 줄은 미처 생각 못했는데... 뭐 아무튼 만족할 만한 데이터를 얻었으니 완전히 손해본 건 아니지. 의심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같은 짓은 한동안 못하겠고... 이번에는 그걸 써 볼까? 우후훗♡”

그 사람은 탁상 한구석에 놓인 작은 통신장비를 집어들더니 어딘가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은 지구와 달 사이를 지나가는 우주선들부터 대상으로 해보자고.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알았어, 부탁할게.”

미소년 컬렉터 헤인 리는 연락을 끊고 책장으로 다가가서 『아이노 쿠사리』라는 레이블이 붙은 비디오 디스크를 꺼내 들었다.



그로부터 약 두시간 뒤, ANC-98을 떠나 지구로 돌아오는 정기편 스페이스 플레인 ‘로드리나’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선배,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피요양, 내가 있잖아.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를 봐!”

“선배, 온몸이 뜨거워져요. 불타오르고 있어요...♡”

“피요양, 내가 시원하게 해 주겠어. 어서 내게로...♡”

안시로부터 받은 정신적인 충격과 그 동안의 과로에 지친 우리의 동거녀는 이런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바로 옆의 좌석에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신나게 자고 있었다.

아무튼 ‘로드리나’는 궤도를 이탈하는 일없이 착실히 지구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조종사가 남자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 하이얀 기체가 지나가는 뒤편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L자 모양의 인공위성들이 목장 울타리 안에 정렬한 얼룩소들처럼 질서 있게 줄지어서 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풍경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ND  OF  EPISODE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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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DING  :  STRANGE  LAND ☆



너무나도 낯선 세계

이리저리 몰려가는 사람들

그 안에 내가 있어


난생 처음보는 것도 많지만

익숙해지려고 노력해

내가 사는 곳이니까

내가 지키는 곳이니까


모두들 떠나갔지만 너만은 남아줬지

내가 상처입었을 때

아무도 모르지만 너만은 알고있지

내가 누구라는 걸


한번더 상쾌한 기분으로

이제부터 모든걸 다시 시작해

나의 하나뿐인 삶이니까

나의 소중한 ‘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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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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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MAKE  ◆



오늘도 ‘李’로고가 커다랗게 붙어 있는 대기업 본사 건물의 최고층에서 보고를 하고 보고를 받는 일상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보고서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넘겨 가던 중후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상대방을 돌아보고 질문을 던진다.

“우주에서 본래 모습으로 활동을? 그건 규정 위반이 아니었나?”

남자의 비서 대신에, 그의 앞에 가지런히 서서 지시를 기다리던 정장 차림의 어떤 사내가 대답한다. 남자는 그를 발도제라고 불렀다.

“규정에는 저촉되지 않지만... 시간 제한이나 그 외의 제약이 현저히 줄어든 상태이므로, 지구 유학 중의 성적 평가에서는 제외된다고 합니다. 아울러 심사 위원들의 주관적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

“재미있군. 앞으로도 계속 감시하도록 해 주게.”

“그런데 회장님...”

“왜 그러나?”

“특근수당은 대체 언제 주시는 겁니까?”

“.........”

이솜인 회장은 말을 잃고 먼산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THE  REAL  END  OF EPISODE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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