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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8-13] 울트라하 : 본편 제7화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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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EGINNING  ◆




이곳은 모든 이가 접근을 꺼려하는 동토(凍土)의 왕국.


뼛속까지 얼려 버릴 듯이 차가운 눈보라가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극지방의 얼음으로 뒤덮인 어느 평원 한 가운데에서, 방한복으로 몸을 단단히 감싼 수십 명의 외지인(外地人)들이 뭔가를 열심히 파내고 있었다.

주변에는 그들의 숙소인 여러 개의 이동식 천막과 난방 기구를 완비한 몇 대의 지휘 차량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학자 같은 인상을 풍기는 창백한 남녀 여섯 명이 여러 장의 지도와 나침반, 참고자료들을 산더미같이 쌓아 두고 관련 문제에 대해 의논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수개월에 걸친 고된 작업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탕만 쳐 온 것에 대해 슬슬 짜증을 내고 있었다. 작업의 총지휘자인 듯한 한 사내가 몇 개월 동안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자신감을 목소리에 한껏 담아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만 봐도 그것은 자명했다.

“이번만은 틀림없어요. 이번에는 충분히 계산을 검토했고, 주변의 지형이나 민간에 퍼져 있는 전설의 분포 상태도 확실하게 분석해 본 결과를 토대로 하는 겁니다. 그 점은 제가 보증하지요.”

사내가 두꺼운 털장갑을 기운차게 흔들어 보이며 다소 과장된 태도로 말했다.

“저희도 박사님과 함께 연구를 해 온 사람들인 만큼 의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벌써 지난 4개월 동안 일곱 군데나 파헤쳤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지 않습니까. 이번이 여덟 번째인데 만약 이번에도 성공 못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날카로운 매 같은 얼굴을 한 젊은 남자가 그를 추궁한다.

“그거야 물론 아홉 번째의 유망한 장소를 찾아서 다시 이동하는 수밖에는...”

“잊으신 것 같아서 상기시켜 드리는 건데, 스폰서 쪽에서는 언제까지나 계속 우리 뒷일만 봐 주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당초 3개월 예정으로 시작한 탐사 작업이 계산 실수 때문에 5개월에 가까운 장기 일정으로 변경된 것만 해도 벌써 한도를 벗어난 것이라고요. 앙끄시 쪽에서도 새로운 소식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 초조해 하고 있단 말입니다.”

먹성 좋게 생긴 장년 남자가 다시 우울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젠장! 고고학은 자동판매기에 돈 넣고 물건 꺼내는 걸 가르치는 학문이 아니란 말이오. 위대한 발굴에는 언제나 그만큼의 시련과 역경이 뒤따르는 법이외다. 현장의 사정에 따라 시간이 얼마나 더 오래 걸릴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좀더 참을성을 가지고 작업을 계속하지 않으면 아무런 성과도 없이 학계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 겁니다!”

“원칙론은 그렇습니다만 우리의 이번 탐사는 민간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겨우겨우 성립된 프로젝트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스폰서는 돈을 대주는 대신 그에 걸맞는 성과를 요구할 겁니다. 학문이 시장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는 안되겠지만, 현실은 원칙에만 입각해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고요!”

작은 체구의 깐깐하게 생긴 여성이 그의 우울증을 증폭시킨다.

“......그건 그렇지만 이번 연구는 확실히......”

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차량 바깥에서 작업을 감독하던 사람 하나가 들어와서 뭔가를 급하게 알려주었다. 통역을 맡은 키 큰 여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말을 옮겼다.

“뭔가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답니다. 얼음을 깨고 눈을 파내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하여튼 뭔가는 찾아낸 모양입니다.”

“모두 나가 봅시다.”

그들은 방한복 단추를 단단히 잠그고 회중전등과 방풍 안경을 챙긴 뒤 차례차례 밖으로 나서서 목표 지점 쪽으로 향하여 일렬로 걸어갔다. 눈보라가 워낙 심한 탓에 마음은 급했지만 무턱대고 뛰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초조한 발걸음 끝에 그들은 발굴 지점에 다다랐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금까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보거나 상상해 본 일이 없었을 그런 모습이었다.

얼음 속에서 발견된 것은 전장(全長)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눈사람이었다. 동체에 해당하는 커다란 구체(球體)위에 약간 작은 구체가 하나 얹혀 있고, 그 표면에는 눈, 코, 입으로 짐작되는 희한한 고대의 무늬가 세공되어 있었다. 또한 그 동체의 네 부분에서는 아주아주 가냘픈 네 개의 얼음 기둥이 뻗어 나와, 그다지 믿음직스럽게 보이지는 않는 사지(四肢)를 이루고 있었다. 물체의 주위에는, 왠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극지방의 추위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바, 박사님.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맞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찾아낸 겁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대(古代)의 신비를!”

집념의 사나이 노병민 박사는 감격에 겨워 온몸을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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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하 ― 별에서 온 여왕

ウルトラハ ― 星からの女王さま

(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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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  OPENING  :  ECLIPSE  ★



갑자기 세상을 뒤덮는 검은 어둠

이리저리 무너지는 자연의 균형

사방을 둘러봐도 의지할 곳 없네

믿을 건 오직 나의 용기뿐! (Ultraha)


절대로 물러서지도 도망치지도 않아

여기서 돌아봐도 동정받을 수 없어

남들을 바라봐도 위로받을 수 없어

두려움만 퍼져나갈뿐! (Ultraha)


불타올라라 나의 용기 세상을 밝히는 등불

솟아올라라 나의 희망 사랑을 지키는 미소!

어둠 속에 남겨져서 홀로 싸운다 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 (Never Give Up!)


부활하여라 나의 광채 어둠을 부수는 불꽃

뛰어넘어라 나의 한계 목숨을 걸고서 돌진!

절망 속에 방황하고 주저앉는다 해도

나는 다시 일어설 거야 (Just Carr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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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앙끄빙하기

第7話 『央久氷河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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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앙끄시 자연사 박물관 앞에는 유례없는 수의 보도 관계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수개월 전에 벌어진 준군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비난과 냉소를 받고 자취를 감춘 노병민 박사가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그 동안 극지방을 전전하며 피땀과 눈물의 대탐사를 결행한 끝에 발굴에 성공한 고대 빙하 괴수, 「인큐버스」를 데리고 화려하게 귀환한 것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번 탐사에는 리 엔터프라이즈와 어깨를 겨룰 만한 대기업 중 하나인 룽룽실업의 원백석 회장이 전폭적으로 지원을 보내 주고 있다고도 하였는데, 또 다른 소식통은 이를 지난번에 추진되었던 양사(兩社)의 신기술 공동 개발 계획이 이솜인 회장 측의 거절로 결렬된 이후 절치부심하던 원회장의 보상심리 때문에 이루어진 계약이라고도 설명하고 있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노병민 박사는 룽룽실업의 지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놀랄 만큼 단기간 안에 (원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원래 계획보다 늦어진 것이었지만) 발굴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경제 위기와 실업 대란으로 인해 그러잖아도 어려운 상황에 외국까지 원정대를 보내어 고고학 탐사를 한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여론도 있었으나,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기초과학을 등한시하는 것은 나라의 백년대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에도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어쨌거나, 소문의 노박사는 위풍당당하게 앙끄시로 개선하여 보도진들 앞에서 자신의 연구와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 상세하고도 친절하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발굴된, 에... 인큐버스라는 존재는 정확히 말하면 일반적인 의미의 괴수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제14대 음만제국(淫漫帝國)의 궁정연금술사들이 당시 지배자이던 대마요제암을오(大馬妖帝癌乙烏)의 명령에 따라 완성한 고분자인공생체(古分磁人工生體)로서, 몇몇 대단한 일에 사용되었고, 후세에는 신으로도 숭배 받았다고 전해지는 냉동거설인형(冷凍巨雪人型)입니다.”

“정확히 어떤 작업에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십니까?”

“아직 함께 발견된 빙판(氷板)기록을 해석 중이므로, 해석이 끝나는 대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질문은?”

“현재 언론에 배포된 것은 발굴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 몇 장과 대충의 설명밖에 없는데, 언제 실물을 일반에 공개하실 예정이신지요?”

“탐사대장은 저입니다만 공개에 대한 문제는 이번 작업에 많은 힘을 빌려주신 스폰서 측의 분들과 협의를 거쳐서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때 한쪽에 몰려 있던 기자들 중 다소 장난기 많아 보이는 청년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설마 그 눈사람이 깨어나서 날뛴다거나 하는 일은 없는 것이겠죠, 박사님?”

한바탕 웃음소리가 지나간 뒤에 노병민박사가 숨을 가다듬고 답변을 했다.

“이 앙끄시는 지금 여름이 한창인 8월입니다. 녀석이 있었던 곳은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추운 극지방 한 가운데였죠. 지금 와서 수천년전의 인형이 갑자기 깨어나리라고는 믿지 않을 뿐더러,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난동을 부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있던 곳과 온도차가 너무 크니까요. 지금 보관되어 있는 특설창고를 한 발짝만 나와도 금방 녹아 버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을 던진 청년은 머쓱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서서 기사를 정리한 뒤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인터뷰를 마저 듣지도 않고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프레스 카드에는 장영제(薔影帝)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훗.”

“앗? 아니, 저, 저 손등의 문장은!”

“생각났다! 하필이면 저런 녀석을 상대로...!”

“콜로니 최강의 격투가로 소문난 바로 그......!”

“......네오캐러의 공담 파이터, 퀸 오브 하트, 써니 캐쉬!”

“에익, 그게 무슨 상관이야! 쏴라 쏴라 쏴라 쏴버려!”

<<뚜두두두두두두두두두 파바바바바바바바바박>>

PETS 본부 안에 위치한, 휴게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어느 허름한 골방 안에서는 더위에 지친 몇몇 대원들이 둘러앉아 손부채를 파닥파닥 부쳐 가면서 TV화면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게슴츠레하게 풀린 두 눈은 웬일로 잘 말려 놓은 명태가 이렇게 많이 모였나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흐리멍덩하기 그지없었다. 전력 부족으로 인해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못 트는 자신들의 신세가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틀어도 더운 바람밖에 안 나와!!!”

...네, 네, 그렇습니까.



더위를 참다못해 숙소에 돌아가서 그날의 세 번째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하라대원이 방으로 들어서며 화면을 흘끗 보더니 ‘소년’에게 질문을 한다.

“이게 오늘 새로 시작한다는 그 프로야?”

“아마 그럴걸요. 중간부터 봐서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소년’이 계속 화면에만 신경을 집중하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이쪽을 바라보고 똑바로 말하라고 했지!”

그 말과 동시에 ‘소년’의 세계는 거꾸로 뒤집혔다...



앙끄시 전역을 은근히 겁에 질리게 만들었던 ‘여고생 유령은 심심해!’ 사건 이후로 벌써 2개월이 지나는 동안, PETS본부 또한 대원들의 열과 성을 다한 봉사 덕분에 눈에 띄게 복구되어 있었다. 2층의 개축은 이미 몇 주 전에 끝나 있었고, 현재는 3층의 공사를 대충 마무리지은 다음 주변 시설물의 정비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다만 지하 5층의 광대한 공간은 대원들만 동원해서는 복구하기가 곤란했기에, 그 규모를 일단 지하 2층만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장마철 수해를 대비하여 배수 시설만 남겨 놓고 봉인해 두는 데 그쳤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부근 야산에 설치되어 있던 에너지 플랜트 자체는 전혀 이상이 없어서 언제든지 필요한 동력을 공급받아 일을 더욱 원활히 처리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튼, 지상 부분은 다소 전보다 허름하고 엉성해 보이긴 해도 완전히 복구되어서, 그동안 월급도 제때 못 받으면서 이어지는 초과 노동과 긴급 출동에 시달려 가며 삽질에 전념해 온 대원들의 마음을 한없이 기쁘게 했던 것이었다.

“기쁘긴 뭐가 기뻐! 밀린 월급이나 빨리 나오게 해줘!!!”

...한없이... 기쁘게...



“아무리 할 일이 없다고 해도 바쁜 사람이 만화나 보고 있어? 한가할 때일수록 언론 보도를 체크해 가면서 시내에 무슨 일이 없는지 살피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 것 아냐!!!”

‘소년’은 하라대원의 처절한 관절꺾기에 걸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항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커걱, 사람이 언제나 일만 하고 있을 수는 없, 없는 것 아닌가요. 캑캑, 게다가 정보체크라면 말씀 안 하셔도 피요대원이 항상 하고 있는, 욱, 우욱...”

옆에 있던 유태대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소년’을 거든다.

“그렇습니다 선배님. 샐러리맨은 쉬고 싶은 겁니다.”

“제군, 우리는 샐러리맨이 아니라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지방공무원인 것이다. 항상 그점을 명심하고 책임감을 잊어서는 안 되는 거야!”

모두가 그 목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자,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나타나서, 문턱에 니힐하게 기대어 수수깡 한줄기를 잘근잘근 씹는 유성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대, 대장님, 대체 언제?”

그는 피요대원의 놀라움을 수수깡을 씹듯 간단히 씹어 버리고 명령을 내린다.

“긴급사태다. 브리핑은 생략할테니 당장 채널을 돌리도록.”

유태대원이 마지못해 채널을 돌리자, ‘긴급속보’라는 자막과 함께 앵커맨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연사 박물관에 설치된 특설 냉동창고에서 보관하고 있던 고대 괴수 인큐버스가 갑자기 부활하여, 박물관 외벽을 깨고 바깥으로 탈출, 시내로 난입했다고 합니다. 경찰과 방위군 병력이 뒤를 쫓고 있으나 이동 경로를 종잡을 수 없어서 아직까지 그 행방은 불명이고, 시내 곳곳에서 괴수의 특이한 공격으로 인한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는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습...”

“이제 알았는가? 앙끄는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알겠으면 전원 출동!”

대장의 결연한 외침에 모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출격태세에 임한다.

다만, 소년만은 못내 아쉬운 얼굴로 아까 보던 채널을 슬그머니 다시 돌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필살기 쓰는 장면이 막 나오고 있는데 하필 이럴 때... ;;;;;;”

“박! 살! 부비부비이이이이 핑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

화면에는 열혈에 불타는 세이레스 공담의 공격 포즈가 비치고 있었다.




대책본부에서 상황을 보아가며 숙의 중이던 관계자들은 박사의 설명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후 개조용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메장관은 피우다 만 와일드 세븐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방금 전에 발굴품인 빙판에 적혀 있던 기록의 대체적인 해독을 끝마쳤습니다만, 저 인큐버스라는 놈은 원래 옛 극지방에 살고 있었던 고대인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제품’입니다. 예전부터 화제가 되었었던 세계의 불가사의한 사건들 중에서 이런 것이 있었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극지방을 공중에서 촬영한 것처럼 세밀하고 정확한 지도가 고대에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공중관측을 할 수 있는 기술의 유무는 둘째치고 어떻게 얼음으로 뒤덮이지 않은 상태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원래 극지방은 지금처럼 추운 곳도 아니었고 얼음으로 덮여 있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 때문에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었지요.”

“그게 이 괴수와 어떤 상관이 있는 겁니까?”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앙끄시장 그레이트 엄민태가 재촉한다.

“기록에 따르면, 제14대 음만제국은 상당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번성할 당시의 극지방은 지금과는 달리 온대에 가까운 화사한 기후를 가진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계문명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화를 부르게 되었지요.”

“어떤 종류의?”

“온실효과입니다. 지나친 화석연료와 저분자화합물의 사용으로 인해 제국 주변의 온도가 눈에 띄게 올라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자연의 조화가 망가져 전에 볼 수 없었던 이상기후가 속출, 백성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온실효과를 거꾸로 되돌리기 위해 기후 개조용으로 저 괴수를......?”

어메장관이 무릎을 탁 치며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이 생명체는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조금이라도 자기가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닌 경우는 냉동광선과 합성 눈보라를 내뿜어 주변의 온도와 풍경을 바꿔버리는 겁니다. 음만제국의 연금술사들은 뒤늦게서야 자기들의 발명이 너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인큐버스를 잡아들여 지하에 봉인시키기는 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어서, 그 괴수가 시작한 기후변화가 되돌릴 수 없을 지경까지 진행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수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제14대 음만제국은 몰락, 그 후손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극지방을 떠났습니다. 함께 발굴된 금속제 도구들을 동위원소측정법에 의해 검사해 본 결과, 이는 약 6만6천6백7십 년 전의 일이었다고 하며, 인큐버스가 갑작스럽게 깨어난 것도 이곳으로 옮겨올 때 약간의 미세한 온도 차가 감지되었고, 그것이 괴수의 각성 중추를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박사의 연구성과에는 경의를 표합니다만 당장 급한 건 저 괴수의 퇴치입니다. 그 빙판 속에 혹시 그 문제에 대해 도움 될 만한 기록은 없었습니까?”

앙끄시 경찰국장 아마노 준문이 급히 말을 자르고 질문을 던진다.

“아직 나머지 빙판의 해독이 끝나지 않아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는데다가 운반 도중에 부주의로 파손된 것들에 대한 문제도 있어서... 유감스럽지만 좀더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이대로 기다리다가는 나우민국 전체가 옛날 음만제국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릅니다. 박사께서 연구를 계속하시는 동안 우리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저녀석의 약점을 찾아내어 공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신 분?”

어메장관의 논리정연한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다음주면 앙끄시 탄생 400주년 기념일이 찾아오고 전국적인 행사도 개최될 예정인데 이런 사건이 생겨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될 지경입니다.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는 막아주십시오!”

다음 선거를 의식한 시장의 애절하고도 가슴 뭉클한 (...) 애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바깥의 무더위로 인해 인큐버스가 냉동고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한 노병민 박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큐버스는 자신이 갇혀 있었던 냉동고 입구에서부터 간단한 얼음 터널을 만들고, 그것을 점차 바깥으로 확장함으로써 무더위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 뛰쳐나온 인큐버스는 위력적인 냉동광선으로 주위의 지형지물을 완벽하게 얼음 속에 뒤덮은 뒤, 합성 눈보라를 소환하여 주변의 기온을 급강하시키고, 게다가 뭔지 알 수도 없는 미지의 주술(呪術)을 써서 기상을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 앙끄시 전역을 얼음과 어둠으로 포장해 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몸이 적응할 수 있을만한 환경을 조성한 다음, 그 범위 내에서 활동을 계속하면서 같은 방법으로 세력권을 점점 넓혀 나가고 있었기에 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인큐버스의 광폭한 추위공세에 의해서 앙끄시는 불안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활동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때아닌 추위와 얼음의 파도에 갇혀 덜덜 떨었고, 감기, 동상, 기타 겨울철에나 유행할 질환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얼음 속에 갇히거나 추위에 적응하지 못해 동사(凍死)한 피해자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시내의 상점가에서는 갑자기 겨울 상품 특수가 상인들을 정신 없게 만들었다. 가전제품 취급점에서는 전기난로, 전기담요, 전기장판 등이, 의류점에서는 방한복, 목도리, 털장갑, 귀마개 등이, 식품점에서는 뜨거운 차와 코코아, 그리고 야채호빵이 불티나게 팔리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다른 도시로 피난을 떠나는 시민들, 추위에 대비하여 필요한 물건을 사재기하려고 다투는 주부들, 이러한 대사건을 불러일으킨 학자나 그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키려고 뛰쳐나온 시위대들, 직장 일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걱정에 휩싸여 집으로 향하던 가장들, 타율(!)학습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발령된 휴교령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즐겁게 귀가하는 학생들, 이들을 최대한 정리하고 분류하여 질서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경찰과 군인들, 이러한 온갖 사람들이 한꺼번에 길목과 길목을 막고 거리와 거리를 메움으로써 교통혼잡은 가중되고 물자부족은 격화되며 치안유지는 곤란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앙끄는 제 2의 빙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PETS 대원들은 전력을 기울여 인큐버스의 발자취를 추적, 마침내 녀석이 있는 위치를 알아내고 그곳에 집결했다. 앙끄시 전체에서 볼 때, 자연사 박물관에서 정반대쪽에 있는 아름동 지역의 중심업무지구,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은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신조광장(神鳥廣場)’이었다. 이미 주변의 모든 건물과 도로가 얼음으로 뒤덮여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유령지구에, 서로서로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방한복 스타일로 무장한 PETS의 전원이 모여든 것이다.


손수 빚은 얼음고치(...)속에서 피로를 푸느라고 잠시 움직임이 둔해져 있던 인큐버스는 그들을 발견하자 다시 몸을 일으켜 다가오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발 밑의 얼음 때문에 그 거대한 형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인큐버스의 전체 모습은 눈보라에 가리워져 희미하게만 보이고 발소리는 사방에서 메아리치며 울려왔기 때문에 대원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한랭지 사양으로 급거 개조된 펫츠호크 1호와 3호는 눈보라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 조심스럽게 저공비행만 계속하고 있었는데, 레이더마저도 어떤 원인불명의 자기(磁氣)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어 속이 탈 지경이었다. 스노우타이어와 비상용 체인으로 무장하고 난방장치를 구동시킨 채 달려온 펫츠 비이클 또한 안심할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길이 미끄러워 사고의 위험이 큰데다가 엔진이 자주 얼어붙어 발동이 꺼지는 일도 잦기 때문이었다. 현재 호크 1호에는 유성대장과 ‘소년’이, 3호에는 유태대원이, 그리고 비이클에는 피요대원과 하라대원이 탑승한 상태였다. 평소와는 좀 다른 배치였지만, 그것 또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다양한 자리배치를 미리 연습해 둔다는 취지에서 교대근무 비슷한 형식으로 짜둔 일정표에 의한 것이었다.

“헤에, 사실은 작가가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이면서!”

...세상에는 음해(陰害)를 즐기는 무리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구급반만은 겨울 스포츠를 좋아하는 무휼박사의 평소 준비(...)에 힘입어, 전원이 스노우모빌을 타고 신나게 빙판 위를 달려 부상자 구조에 힘쓰고 있었다. 적응이 비교적 빠른 구급대원들에게는 별 일도 아니었지만, 추위에 약한 동거녀에게는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방한복이 두껍고 손난로가 따뜻해도 체질적으로 적응이 안 된다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거녀의 고향 SM78성운에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존재하지 않아서, 추위에 대한 저항력을 기를 기회가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지난 겨울은 그나마 이상기온 때문에 그다지 춥지 않아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 직면하고 있는 추위는 그것과는 수준이 다른 극지방 레벨의 초저온이었다.

“조금만 참아. 저 얼음오야지만 없애면 곧 다시 따뜻해질거야.”

“어이, 방금 누구한테 말한거야?”

“응? 아아, 내 고양이 난로...”

바야흐로 거녀의 품 안에서는 애완용 고양이 아롱이가 갑갑함을 못이겨 쉴새없이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냉해(冷害)를 피해 모든 사람이 대피한 상황이라 자취방에 혼자 남겨 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거녀 자신도 손난로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던 터라서, 결국 아롱이를 품 안에 넣은 채 달려온 것이었다.

“거녀양, 탈옥수 씽챤웡이 거녀양 집에 숨었다며? 아직도 있어?”

“그건 내가 아니라고 몇번이나 말해야 알겠어욧!!!!!!”

...그러게 이름을 좀 덜 흔한 걸로 짓지 그랬어.


“장관님, 저기 다가옵니다! 현재 보행 속도는... 으앗!”

인큐버스의 냉랭한 발걸음에 방어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측을 맡고 있던 몇몇 대원들은 다가오는 괴수의 모습에 한기(寒氣)를 느끼고 옷깃을 여미며 사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제 위치를 유지하라! 공중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저놈의 진로를 방해하라!”

방어선 뒤쪽에 위치한 임시 막사에서 마이크를 붙잡고 열띤 지시를 내리는 장관의 모습에 대원들도 어느 정도는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만큼 쉽게 되어가지 않았다.

“안됩니다! 기총이 얼어붙어 위협사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A탄이나 N탄을 썼다가는 주변까지 피해가 확산될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를 대비한 비장의 무기가 있지 않은가!”

어메장관의 명령을 받은 펫츠호크 1호와 3호는 기총을 포기하고 대신 날개에 달려 있는 새로운 장비를 가동시켰다. 먼 옛날의 어린이들이 새총이라 불렀던 장난감의 모양을 본따 만들어진 그 장비는, 작동되기가 무섭게 엄청난 크기의 고탄력성 고무줄을 괴수를 향하여 연속해서 쏘아대기 시작했다.

“저, 저건 그냥 덩치만 큰 고무줄총 아닙니까, 장관?”

옆에서 구급반을 지휘하던 중에 잠깐 쉬려고 막사에 찾아왔다가 미처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 어이없는 광경을 보아 버린 무휼박사는 마치 복날에 보신탕집 주인에게 쫓기던 얼룩무늬의 잡종견이 난데없이 제트 스크랜더를 달고 하늘을 날아 도망가는 광경이라도 본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질문하는 것이었다.

“천만의 말씀, 저것은 우리 PETS의 기술진이 열흘 밤낮을 꼬박 새워가며 개발에 몰두한 끝에 완성한 신개념의 대괴수위협용초강력고탄력성화합물질자동연속발사동력장치(對怪獸威脅用超强力高彈力性化合物質自動連續發射動力裝置), 이름하여 「러버 건」이라는 물건이올시다!”

무심한 박사는 장관의 침튀기는 설명에도 전혀 감동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오호, Lover Gun이라고요? (^_^;)”

“......Rubber Gun이오! (-_-;)”

그러나 그들의 위협사격에도 불구하고 인큐버스는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 계속해서 발걸음만 옮길 뿐, 전혀 그 밖의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봐! 왜 멈추나! 적이 움직임을 바꾸기 전에는 사격을 그만둬서는 안돼!”

유성대장의 한맺힌 일갈(一喝)에 ‘소년’이 쩔쩔매며 답한다.

“그만둔 게 아닙니다. 발사기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고무줄이, 고무줄이 바닥났어요. ;;;;;;”

그들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에도 역시 한계는 있었던 것이다.


“이봐! 이쪽에 동상자(凍傷者)다! 구급반, 빨리 따뜻한 물을!”

“어머나 큰일났네, 물이 또 어디 갔을까?”

“그렇다고 실론티를 상처에 끼얹으면 어떻게 해! (\_/)”

“......향기가 좋잖아요?(^_^;;;)”

“거녀양, 이 환자 체온계 좀 봐 줘.”

“어디... 아앗? 열이 불덩이 같군요! 어서 해열제를!”

“......거꾸로 들고 있잖아.(-_-)”

“......(0_o;;;)”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못한 거녀의 간호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한편 펫츠 비이클은 너무 앞으로 나왔다가 괴수의 눈보라에 휘말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선배님, 엔진이 얼어붙어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그럼 밖으로 나와서 밀면 되잖앗!”

“타이어도 땅에 얼어붙었는데 민다고 되겠어요?”

“야전삽으로 얼음을 깨고 타이어를 파내는 거야! 어서!”

“안돼요! 바로 뒤에 와 있어요! 빨리 도망가야 해요!”

“뭐? ... 아아아악!”

그 순간, 두 대원을 태운 채로 비이클이 공중으로 비스듬히 떠올랐다. 길을 가로막고 있던 비이클을 인큐버스가 귀찮은 듯이 발로 걷어차버린 것이다. 피요대원은 타고 있던 쪽의 문이 갑자기 열리는 통에 아래로 떨어져, 주변에 쌓여 있던 눈더미 위에 둔탁하게 (...) 내려앉았으나, 착실하게 안전띠를 매고 있던 하라대원은 비이클에 갇힌 채로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지나서 (...) 어딘가의 건물 틈에 처박히고 말았다. 다행히 폭발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차체가 엉망으로 구겨져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차체 안에 우아한 포즈로 쑤셔박힌 (...) 하라대원은 흐려지는 의식에도 불구하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얼어죽을 작가놈!!! 내 다시는 눈사람같은거 만드나 봐라!!!’

...어째 귀가 되게 간지럽군.


비이클이 거리 저편으로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내던져지는 것을 목격한 동거녀는 일부러 평소 때보다 백 배는 귀여워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옆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갑자기 아롱이를 품에서 꺼내어 그녀에게 척 하고 뻔뻔스럽게 안겨 주고는 휘리릭 돌아서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선림씨이이~♥ 잠깐 이 고양이 좀 부탁할게요~♥”

“어어? 거녀양, 또 어딜 가려고 그래? 아직 일이 많이 밀렸...”

그러나 거녀는 이미 바람처럼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는데!”

졸지에 귀찮은 짐덩이를 떠맡은 거녀의 동료는, 능글맞게 자기 품에 안겨서 밥 달라는 모션을 취하고 있는 아롱이를, 황당한 얼굴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너도 저런 괴상한 주인을 만나서 참 힘들겠다, 그렇지?”

그 말에 답하듯 아롱이가 생생하게 울어댔다.

“☆야옹☆”


거녀는, 사방이 얼음으로 뒤덮인 나머지, 마치 아이스 쇼의 무대를 연상케 하는 환상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 어느 빌딩의 뒷골목으로 달려갔다. 짙은 눈보라와 땅 위로 치솟아 얼어 있는 얼음기둥들이 훌륭한 차폐물이 되어 줄 것이다. 거녀는 방한용 점퍼의 안주머니에서 그 유명한 보랏빛 부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

왜 그래?

“히잉, 넉달만에 출연하다보니 변신주문을 까먹었엉. (T_T;;)”

......지구도 이젠 끝장이군.


인큐버스는 난동을 부리며 신조광장을 벗어나 얏코스 템플로 향하고 있었다. 그쪽에는 수많은 교회와 성당이 있어서, 주변 인구밀집지역에서 대피해 온 사람들이 임시 피난처로 삼고 있었다. 펫츠호크 1호와 3호는 할 수 없이 A탄, N탄, DD버스터를 연사해 가며 괴물의 진로를 바꿔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방위군의 기타 병력들도 C2지뢰, MM폭뢰, GO수류탄을 터뜨리며 총공격을 퍼부었지만 효과가 거의 없었다. 괴물이 뿜어내는 냉기와 그 인정사정없는 발걸음에 수많은 병사가 동상을 입고 쓰러지거나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네이팜도 화염방사기도 소용이 없습니다! 녀석은 몸 주위에 강력한 자기장과 냉각 필드를 형성하고 있어서 원거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가봅니다!”

정말로, 움직이는 냉장고를 상대로 싸우려니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

“이제는 희망이 없는 것인가? 더 이상 지원군은 오지 않는가?”

마이크를 옥수수 씹듯 잘근잘근 씹어대며 내뱉듯 쏟아내는 장관의 처량한 한탄에 유태대원이 무선을 통하여 응답한다.

“여기 나온 방위군과 경찰, 그리고 우리 PETS를 제외한 모든 동원 가능한 인력은 시의 각 지역에서 구호 및 방재작업에 동원된 상태입니다! 이제 괴물을 정면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 뿐인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진을 막지도 못하고 희생만 늘게 될텐데! 결국 우리마저 후퇴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하라선배를 두고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장관님, 제발...!”

머리와 팔뚝에 붕대를 칭칭 감은 영이(零)몰골의 피요대원이 들것에 실려오면서도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짜낸다. 눈 위에 떨어져서 생명은 건졌지만 외상(外傷)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장관도 그녀의 눈물맺힌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지금 당장 구조하러 가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랬다가는 저놈이 얼마나 더 많은 피해를 내게 될지 모른다. 정말로 미안하다.”

그들이 놔두고 온 신조지구 한구석에서 영롱한 무지개색 광채가 솟아난 것은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자, 장관님, 저건?”

“오옷!”

어떻게 주문을 기억해냈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거대한 전사 울트라하의 씩씩한 모습이 그곳에 나타난 것만은 사실이었다. 장관 이하 전대원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그 쪽을 바라보았다. 인큐버스 또한 눈 앞에 나타난 새로운 적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공격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숨가쁜 일전이 벌어질 것임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인큐버스가 선제공격으로써 냉동광선을 커브로 발사했고, 거인은 재빨리 그것을 피하여 괴물의 곁에 접근, 대단한 위력의 발차기와 정권 찌르기를 연발했다. 그러나 원체 얼음으로 만들어진데다가 별 감각이 없었던 인큐버스는 모두 받아넘기고 거인을 향하여 차가운 냉기를 몸 곳곳에서 사방팔방으로 전력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인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지고 공격에서도 활기가 사라졌다. 아까도 말했듯이, 라하세르는 추위에 약했다. 더군다나 이러한 종류의 공격은 ‘타격’으로 인한 고통과는 별반 관계가 없는 것이다보니 에너지로 전환할 방법도 없었다. 울트라하는 속수무책으로 인큐버스의 주무기 중 하나인 일명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를 죽어라고 맞아가면서도, 안간힘을 다하여 반격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그 자세는 평형을 잃기 시작했다.

거인이 언제 대지에 쓰러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왜 저러는 거지? 거의 손을 못쓰고 있지 않나?”

들것에 누워서도 상황을 지켜보던 피요대원은 어느새 평소때의 냉철한 얼굴로 돌아와서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예전에 방위군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낸 울트라인의 라이프 스펙에 따르면, 그들은 애초에 겨울이 없는 세계에서 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끄떡 없지만 추위에 대해서만은 어쩔 수 없이 약해지고 만다는 결점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인큐버스를 꺾을 수 없습니다.”

“자세히도 아는군.”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이야기가 진행되니까요.”

...어이!

“그렇다면 저 거인의 「고통 피드백」 능력도 추위에 대해서만은 소용이 없다는 얘긴가. 우리가 대신 알맞은 고통을 줌으로써 에너지를 축적하게 해 주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장관의 뭔가를 매우 기대하는 듯한 (...) 두근두근 제안발표에 유성대장이 무선을 통하여 난색을 표시했다.

“아까의 공격으로 사용가능한 무기가 거의 다 떨어져서 재보급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보급을 받기 전에 무기를 다른 용도에 사용했다가 그래도 인큐버스를 이기지 못했을 경우에는 대처할 수단이 없게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감이지만 그 작전은 너무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이대로 계속 지켜보면서 응원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 거인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우리는 빨리 부상자를 후송하고 재보급을 마침으로써 재차 전투태세를 가다듬도록 하지. 모두 빨리빨리 움직이도록!”

유성대장의 조심스런 의견을 장관은 쓰디쓴 (...)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라하세르 쪽에서도 알고 있었다. 그런만큼 빨리 이 대결을 끝맺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자각(自覺)이 울트라하의 마음 속에서 메아리치며 기운을 북돋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앙끄천(央久川)의 구정물처럼 잘도 흘러간다.

남은 시간 앞으로 85초.

냉기를 막아내고 눈보라를 피하느라 이리저리 도망다니기를 계속하면서도 이 난국을 타개할 수를 생각하느라 정신없던 라하의 뇌리에 문득 한가지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다. 인큐버스의 냉정하기 짝이 없는 공격을 힘들게 받아치면서, 라하는 오른팔을 하늘로 치켜 들고 왼팔을 다른 쪽 팔꿈치에 비스듬히 교차시킨 다음, 제자리에 선 채로 전신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색채의 빛무리가 그 주위를 휘감았다. 공격해 오던 인큐버스는 그 뜻밖의 움직임에 놀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남은 시간 앞으로 76초.

광채가 사라지고 나자 그 자리에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채(...)의 울트라하가 서 있었다. 기본적인 외견은 변함이 없었으나 한랭지의 기후에 맞추어 머리에는 산타클로스풍의 털모자를 두 개나 겹쳐 쓰고 손에는 귀여운 강아지 무늬의 벙어리 장갑을 따뜻하게 끼고 있었으며 발에는 빙판 위에서의 이동력을 높이기 위한 스케이트 비슷한 금속 날이 날카롭게 돋아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보는 이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전신을 감싸고 있는 거대하고도 푹신해 보이는 인조 모피코트였다. (...동물을 사랑합시다)

남은 시간 앞으로 70초.

“또 새로운 모드를 개발해 냈군! 대단한 능력이야!”

장관의 감탄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피요대원은 눈물자국을 지우고는 마침 휴대하고 있던 노트북을 꺼내어 (도대체 어디에 들어 있었던 거냐!) 기록을 시작했다.

“C2모드라고 하겠습니다.”

“Cheese Cake Mode인가?”

여전히 뭘 생각하고 있는건지 알 수 없는 어메장관이 물어보았다.

“......Cold Climate Mode입니다. 한랭지 사양(仕樣)이죠.”

“음, 실례했네.”

거인은 몸차림을 가다듬더니 (...) 빙상선수처럼 자세를 낮추고 바닥의 빙판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가면서 인큐버스를 향하여 저돌적인 몸짓으로 달려들었다. 괴물은 가볍게 생각하고 냉기와 눈보라, 그리고 냉동광선을 내뿜어 대응했으나 울트라하의 모피코트는 그 자체가 강력한 리액티브 아머(반응장갑)였다. 라하는 코트를 이용하여 그 모든 공격을 흡수하거나 되튕겨버리고는 계속 괴물을 향해 날렵한 동작으로 달려와 약을 올리고는 다시 뒤로 빠지는 「히트 앤드 런」 패턴을 반복함으로써 일단 인큐버스의 전진을 막았다. 그러나 라하의 모피코트에도 한계는 있어서, 스물여섯 발 가량의 냉동광선을 막아낸 뒤에는 형편없이 닳아서 구멍이 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남은 시간 앞으로 53초.

라하의 코트는 거의 완전히 못쓰게 된 상태, 라하는 뭔가를 결심한 듯 괴물을 향해 전속력으로 정면돌진을 시도한다. 인큐버스는 귀찮은 상대를 빨리 얼려버리고 업무(...)를 계속하기 위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돌진해 오는 라하의 상체를 향해 인큐버스 최대의 위력을 모은 냉동광선 「다크 블리자드 일루미네이션」이 발사된다.

바로 그때,

당연히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물러설 것이라 생각한 대원들의 예상을 깨고, 라하는 걸레가 된 모피코트를 재빨리 벗어들어 될 수 있는 한 넓게 펼쳐서 냉동광선을 흐트러지게 만들고, 자신은 코트의 아래쪽에 숨어서 전진을 계속, 마침내는 인큐버스의 둥그런 배때기에 매미처럼 척 달라붙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 라하가 보여준 행동은 더욱 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라하는 괴로운 기색을 보이며 상대방을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는 인큐버스에 맹렬히 달라붙어 자기의 뺨에 해당하는 부분을 상대의 머리부품에 대고 전심전력을 다해 비벼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국제괴수학회에서 「라하 부비부비 카운트다운」이라는 학명이 붙게 되는 이 모션에, 지금까지의 모든 공격을 받아쳐 온 인큐버스마저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라하의 강렬한 부비부비를 받자, 인큐버스의 머리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절대 녹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얼음층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매미처럼 달라붙은 거인의 체온이 인큐버스의 표면에 전달됨에 따라 다른 부분에서도 균열과 해동(解冬)현상이 가속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인큐버스는 냉정을 잃고 급속히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마찰열이다! 저 괴물은 냉각 필드 때문에 멀리서 공격해 봐야 통하지 않지만, 아주 가까이서 뭔가를 동체에 마찰시키면 버틸 재간이 없는 거였군요. 그래서 저 거인은 접근전을 펼치려고...!”

놀라 아무 말도 못하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흥분한 피요대원이 소리질렀다. 이미 붕대는 어디론가 풀려 나가고 없었다.

남은 시간 앞으로 30초.

기회를 포착한 라하는 재빨리 괴물에게서 떨어져 멀찌감치 떨어진 도로에 가서 공격자세를 가다듬고 한 손을 다시 하늘로 치켜들었다. 아까보다는 좀더 빠른 변환의 의식(儀式)을 거쳐, 라하는 정열의 S모드로 변해 있었다.

남은 시간 앞으로 26초.

라하는 허공으로부터 스페시움 채찍을 소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인큐버스를 향해 연타를 날리기 시작했다. 이미 녹기 시작한 인큐버스는 그 채찍의 지독한 마찰열에 힘입어 형체를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후의 일격!

울트라하는 채찍을 몸 쪽으로 끌어당겨 아리따운 동작으로 가만히 어루만졌고, 평평하던 채찍은 금세 날카로운 가시가 삐죽삐죽하게 돋은 장미덩굴로 바뀌어졌다. 다음 순간, 라하는 채찍을 하늘 높이 치켜들어 거룩한 몸짓으로 인큐버스의 머리를 향해 세차게 내리쳤다. 불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인 새파란 장미덩굴이 거대한 눈사람의 머리와 동체를 둘로 가르고 바닥에 물결쳤다!

이 공격은 이후 세계초인학회에 의해서 「폭렬화염난무(爆裂火焰亂舞)」라는 요란한 코드네임으로 불리게 된다. 아무튼 이로 인해 인큐버스는 완전히 ‘처리’된 것이다.

남은 시간 앞으로 14초.

울트라하는 채찍을 우아하게 거둬들이고는 이마의 위험신호에 호응하듯 잽싸게 하늘로 날아올라 어딘가를 향하여 백조같은 수수한 자태를 뽐내며 날아갔다.


뜻밖의 상황에 입을 쩍 벌린 PETS와 방위군 병사들은 그날 떨어진 아래턱을 위로 밀어올리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더라는 후문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어메장관은 캠코더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래... 그것은 마치 바슈탈의 참극 같은 사건이었다.”

다소 과장이 있지만 아마노 준문의 이 회고는 분명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인큐버스 퇴치에 성공함으로써 앙끄시는 일단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만만치 않은 희생이 따랐다.

우선, 인큐버스가 일으킨 이상현상으로 인해 비록 수일 동안에 불과한 일이긴 했지만 앙끄시의 기후 시스템 자체가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인큐버스가 초래한 빙하의 숲은 그 괴물의 사멸(死滅)과 함께 같이 녹아내려 사방으로 떠내려감으로써 엄청난 수해와 빙해(氷害)를 초래하였고, 다시 찾아온 무더위에 의해 급속히 증발한 수분이 하늘에서 구름으로 순환, 수 일에 걸쳐 기습적인 집중호우가 앙끄시 전역과, 심지어는 근처 지역 곳곳에까지 밀어닥쳐, 생각지도 못한 2차 재해까지 초래한 것이었다. 인큐버스의 습격에서 비교적 안전했던 몇몇 지역을 빼놓고, 앙끄시의 거의 모든 지역과 지구가 크건 작건 그 괴물의 업보(業報)에 말려들어 피해를 입었다.

그렇잖아도 실직자와 백수들의 문제로 골치를 앓던 차에 집과 재산을 잃은 수재민과 일시적인 한파로 인한 동상환자, 호흡기질환자, 기타 환자의 급증으로 시 당국은 고민에 빠져들었고, 곳곳에서 물자 부족과 통신, 교통의 두절이 사람들을 괴롭혔다. 부모를 잃은 자식, 자식을 잃은 부모, 농작물을 잃은 농민, 기계류를 잃은 공장, 학용품을 잃은 수험생, 관광객을 빼앗긴 유원지, ...... 이 모든 것들이 이번 사건이 불러온 거대한 손해에 들어가는 항목들이었다.

수해 이후에 닥쳐올 수인성 전염병의 창궐과 경제적 손해로 인한 성장지표의 하락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무서운 복병들이었지만, 지금까지 입은 피해들만 따져 보아도 너무나 심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의 한구석에서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일구어 보자며 일어선 사람들의, 재건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재건의 노래 좋아하네! 기껏 복구한 PETS 본부도 물에 잠겼단 말이얏!”

...재건의... 노래가...




“거녀양, 많이 아프다며. 지금은 좀 어때?”

“아아... 괜찮아요 이젠. 덕분에... 정말로... 으, 에, 에, 엣취이이이이!!!”

“......전혀 괜찮아보이지 않는걸.”

캐사모스톤 지구에 자리한 어느 비좁고 허름한 자취방에서는 일주일 내내 자리에 누워 꼼짝을 못하고 고열에 시달리며 기침과 재채기(국어교육을 받고서도 이 둘을 구별 못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이 있다)를 연발함으로써 문병 온 구급반 동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는 동거녀의 뻔뻔하다못해 처량한 넉살이 계속되고 있었다.

눈보라 속으로 달려가서 그대로 ‘실종’되어버린 거녀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PETS의 수색에 의해 발견되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엄청난 힘을 소비한데다 비정상적인 추위와 그 뒤에 다시 몰려온 더위로 인한 갑작스런 온도차가 원인이 되어, 거녀는 지독한 악성 여름감기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다행히도 아롱이는 선림의 집에서 얼마동안 맡아주기로 해서 별 걱정은 없었지만, 거녀는 교대로 다니러 오는 동료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일주일 동안이나 자리보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래는 입원이 필요할 정도로 중하게 보였으나, 거녀가 고집을 부린 덕택에 집에서 치료하기로 한 것이었다.

거녀에게는 물론 병원에 가지 않을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은 동료들에게는 죽는 한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혹시라도 발달된 의학 설비로 검사를 받다가 자신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탄로나면 난처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콜록콜록, 모두들 저 때문에, 콜록, 이렇게 고생하시게 되어서, 콜록콜록콜록콜...”

“그런 소리 마. 빨리 거녀양이 완쾌되어서 출근해야 우리도 일하기 편해지지.”

“그럼 그럼. 거녀양이 없으니까는 말이지, 우리 박사님께서 잡아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주 허탈해 보이시더라구 글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무휼박사의 감춰진 인정미를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거녀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거녀양.”

선림이 사과를 깎다가 칼을 내려놓고 말을 꺼낸다.

“네?”

“그날 도대체 어딜 그렇게 급히 가야 했던 거야? 말해줄수 없겠어?”

“제가. 콜록, 어딜. 콜록, 갔었어요?”

“기억이 안 나?”

“감기가 너무 심해서 그런지, 콜록, 아직 기억이 희미해요. 콜록.”

“......알았어. 다 나으면 다시 얘기하자.”

“콜록, 그나저나, 하라선배는, 콜록, 어떻게......?”

“아, 아직 말 안해줬던가?”

“네, 으에취------!”

“운이 좋았지. 괴수가 차 버려서 빌딩 사이에 거꾸로 처박힌 자동차 속에 있었으면서도 가벼운 다리 골절상만 입고 살아남았거든. 대단한 생존 능력이라면서 모두들 놀랐다구. 더더군다나 이상한 건, 분명히 차체는 말도 못하게 찌그러져서, 타고 있던 사람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해도, 밖으로 빠져 나오기는 힘들게 눌려 있었는데 말이지, 하라선배는 그걸 빠져나와서 상처에 지혈까지 한 채로 기절해 있었대 글쎄.”

“콜록, 저, 정말이에요? 콜록,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 선배님은. 콜록.”

“그러니까 거녀양도 기운 내라고. 자리에만 누워있지 말고 말야.”

“네, 저도 노력할거예요. 으헷취!!!!!!”

거녀는 남몰래 속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찌그러진 차 속에 갇혀서 사경을 헤매고 있던 하라대원을 억지로 밖으로 끄집어내어 응급처치를 해 준 것이 사실은 누구였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헤에? 거녀양. 뭐 재미있는 일 있어? 간만에 즐거운 표정인데?”

“네? 아, 아뇨. 콜록콜록. 그냥, 그저...”

“그저...?”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선림은 다시 과일을 깎다가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거녀양?”

“네?”

“지금은 밤이야. (0_o) ;;;;;;”




청년은 다시 자연사 박물관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프레스 카드는 없었다. 단지 한 개인으로서, 그곳을 다시 봐 두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얼음괴물의 난동으로 인한 흔적은 벌써 이틀 전에 말끔히 치워졌고, 부근의 중심가에서는 다시 활기찬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바쁜 일과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바깥에서도 희미하게 보이는 특설 창고 앞의 말라붙은 물 자국들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미약하게나마 증언하고 있었다.


청년은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이쑤시개같이 가느다란 팬시담배를 꺼내 물더니 근처 영화관에서 기념품으로 산 「대괴수 라하질라」 금박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의 입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방금 아무도 모르는 죽음의 제례를 치르고 나온 사신(邪神)의 갈데없는 허망함을 말없이 대변해 주는 듯 했다.


(......보시다시피 이 작가는 쓸데없는 말로 시간만 끌고 있다.)



옆 차도에 고급이지만 요란하게 꾸미지는 않은 중형 자동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그 차의 뒷쪽 유리창이 열리고 한 명의 범상치 않게 생긴 남자가 얼굴을 쓰윽 내밀더니 손을 흔들었다. 청년은 담배불을 끄고는 차 쪽으로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형식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지만 분명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존경심이 담긴 인사였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군. 자네 얼굴을 보아하니.”

남자는 그다지 늙어 보이지 않는 수더분한 얼굴이었으나 말투는 상당히 나이 든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네. 애써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만.”

“완전히 실패인가? 그렇다면 내가 투자한 보람이 없는데.”

“성공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100% 실패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곳의 사람들이, 뭔가 중요한 것을 깨달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겁니다.”

“......자네의 조상님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것을 말이지?”

“............”

청년은 고개를 떨구고는 대답을 회피했다. 남자는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부터는 어디로 갈 텐가?”

“어딘가 먼 곳으로, 아주 먼 곳으로 갈 생각입니다. 추위를 부리는 자(者)가 오래 전에 일구어 놓은 얼음의 제국도 좋겠죠.”

왠지 시적(詩的)인 청년의 표현에 남자는 약간 눈쌀을 찌푸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런가...... 알겠네. 잘 가게. 살다보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남자는 청년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석의 사내가 무심코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뉴스캐스터의 평온하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이러한 대재해에 방비를 갖추어 놓지 못한 정부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특히 괴물 격퇴에 관련된 단체로서 P.E.T.S.라고 하는 특수기관에 대한 불만은 이상할 정도로 높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그들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우주괴인, 일명 ‘울트라하’라고 하는 거인생명체에 대해서도, 의심과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중에서도, 거인이 괴수와의 전투에서 보여준 상식을 초월하는 공격 방식과 선정적이며 변태적인 성향을 자극하는 외모, 그리고 폭력을 조장하는 그 활약 등이 모조리 생중계되는 바람에 어린 새싹들의 교육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어머니들의 주장은, 일견 귀를 기울일 만한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서 여겨지며, 이들은 곧 정평 있는 대표기관인 YWCA를 창구로 하여 반(反)울트라하 투쟁성명을...”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운전석의 사내에게 질문을 던진다.

“발도제, YWCA가 어떤 명칭의 약자인지 알고 있나?”

운전석의 사내는 잠깐 어깨를 으쓱하더니 기억을 더듬어 대답한다.

“뭐였더라... Yelling Wives' Cattish Assembly(목청높은 마누라들의 심술궂은 정기총회)였을 겁니다. 아마.”





END  OF  EPISODE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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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  ENDING  :  NEXT  QUEEN ☆



고귀함과 우아함의 향기에 싸여

세상을 발 아래 굴복시킨 그대

하지만 두 뺨 위의 눈물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당당함과 청순함의 광휘를 펼쳐

자유의 노래를 전하는 그대

하지만 그 입술의 떨림은

무엇을 구하는 걸까요


이겨내요 버텨내요 그대의 시련

아무도 함께할수 없는 시간을

다가가요 마주봐요 그대의 약점

지금이 아니면 할수없는 일들을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말하겠죠 그대의 영광

거짓과 악의가 세상 가득 채워도

사람들은 믿고 있어요

그대의 전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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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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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ONCLUSION  ◆




같은 시각, 바다 건너 니프티랜드, 사이바에도의 어떤 오피스텔 안에서는, 한 기품 있는 여성이 위성방송을 통해서 같은 뉴스를 청취하고 있었다.

“...또한 사건의 계기를 제공한 앙끄대학의 노병민 박사는 또 다시 어디론가 잠적했기 때문에, 제14대 음만제국에 대한 연구는 다시 원점으로...”

말없이 방송에 귀를 기울이던 여인은 입가에 희미한 조소(嘲笑)를 띄우더니 이동전화를 꺼내어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아스파샤? 네, 저예요. 예정대로 한 일주일 정도 앙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아뇨.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 되도록 빨리 돌아올게요. 그동안 이쪽 일 좀 돌봐 주실래요? 고마워요. 그럼요. 선물 꼭 사올게요.♥”

전화를 끊은 여인은 탁자 한쪽에 놓여 있는 신문 스크랩을 집어들고 그곳에 실린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눈앞의 괴물을 공격한답시고 애꿎은 빌딩들만 도미노 넘어뜨리듯이 좌르륵 넘어뜨리는 한심한 거인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여인은 사진을 허공에 살짝 띄운 다음 재빨리 옆에 있던 다트를 던져 사진을 벽에 정통으로 꽂아 버렸다.

“라하세르... 용케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얼마 못 갈 거야. 오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홋.”





THE  REAL  END  OF EPISODE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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