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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4-05] 울트라하 : 본편 제9화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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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FORE ◆





금요일


앙끄 국제공항의 입국창구 중 한 곳에서 어떤 이국적인 분위기의 젊은 여성이 조심스럽게 입국수속을 밟고 있는 모습을 특별히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딜 가나 그렇지만, 특히 이렇게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서는 자기 일에 신경쓰는 것만 해도 바쁜 법이다.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창구 직원은 한쪽 손으로 그녀가 제시한 여권을 집어들고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하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여인은 별 필요도 없는 듯한 복잡한 서식과 절차에 질린 지 오래였지만, 끈기있게 창구 앞에 서서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은 고개를 들고 그 여인의 우수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Sightseeing?"

그러나 곧바로 따라 나온 여인의 대답에 직원의 눈은 왕방울눈이 되고 말았다.

“No, D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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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하 ― 별에서 온 여왕

ウルトラハ ― 星からの女王さま

(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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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  OPENING  :  ECLIPSE  ★



갑자기 세상을 뒤덮는 검은 어둠

이리저리 무너지는 자연의 균형

사방을 둘러봐도 의지할 곳 없네

믿을 건 오직 나의 용기뿐! (Ultraha)


절대로 물러서지도 도망치지도 않아

여기서 돌아봐도 동정받을 수 없어

남들을 바라봐도 위로받을 수 없어

두려움만 퍼져나갈뿐! (Ultraha)


불타올라라 나의 용기 세상을 밝히는 등불

솟아올라라 나의 희망 사랑을 지키는 미소!

어둠 속에 남겨져서 홀로 싸운다 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 (Never Give Up!)


부활하여라 나의 광채 어둠을 부수는 불꽃

뛰어넘어라 나의 한계 목숨을 걸고서 돌진!

절망 속에 방황하고 주저앉는다 해도

나는 다시 일어설 거야 (Just Carr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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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펫토여 하렘으로 돌아가거라

第9話 『ペットよハレムへ歸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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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앙끄시 근교에 위치한 리 엔터프라이즈 나우지사 부설 초진화생체공학연구소, 통칭 세비(SEBI ; Super Evolution Biotechnology Institute)는 월요일 아침부터 때아닌 야단법석에 휘말려 있었다. 지난 밤 동안 검은 옷, 검은 두건, 검은 색안경, 검은 장갑, 검은 군화, 검은 고양이 네로...가 아니고, 하여튼 온통 검은색으로 전신을 감싸고 극도의 은폐술을 발휘하는 일련의 괴한들이 연구소 내부에 소리없이 침투하여, 지난 7개월동안 극비에 덮여 있었던 최중요기밀구역인 제4실험실에 있던 각종 자료들을 깡그리 쓸어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범인들은 숙직근무를 하는 일부 직원과 경비 임무를 맡은 청원경찰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든 연구실이 텅텅 비는 시점인 새벽 3시를 기점으로 해서 봄처녀 가슴을 울리는 한줄기 산들바람처럼 들어왔다가 애연가가 뿜어대는 허무한 담배연기처럼 사라졌는데, 기묘하게도 리 엔터프라이즈가 자랑하던 2중․3중의 도난경보장치나 각종 신분검색시스템은 아무런 이상도 알려주지 않았고, 특별히 다른 곳보다 경비가 강화되어 있어야 마땅할 제4실험실 근처에도 때마침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시간표가 조작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범인들은 상당한 시간에 걸쳐 치밀한 계획과 사전준비를 거친 뒤에 문제가 될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서 들어온 것임은 명백했다.


혼비백산한 연구소측에서는, 본사에 알리는 동시에 앙끄시 경찰에도 황급하게 범죄 신고를 했다. 워낙 중요한 기밀이었던 만큼, 본사에서는 이 일이 새어나가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지만 연구소 측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아직 피해규모나 기타 어느것도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터라서, 언론에 알리는 것만은 유보하고 있었다. 또한 같은 연구소 직원 중에서도 전혀 혐의가 없다고 할만한 몇 사람을 제외한 전 직원이 똑같이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외부에 알리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는 연구소의 여기저기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연구소 직원들, 그리고 수사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본사로부터 파견된 조사원들과 법률가들이 통로나 연구실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범인의 흔적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수사가 진행되어갈수록 연구소 직원들이 겉으로만 협조적인 척 하면서 속으로는 뭔가를 숨기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특히 곤란한 점은, 문제의 제4실험실에서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가 진행중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고, 그나마 알 만한 사람들도 제대로 말해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윽고 수사관들은 자기들이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힌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에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이 실험실에서는 지난 수년간 리 엔터프라이즈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시켜 온 비장의 신기술이 실용화 단계에까지 다다랐다고 한다. 그 신기술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 기술을 탐낸 룽룽사의 원백석 회장이 한때 이솜인 회장에게 기술제휴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룽룽사는 리 엔터프라이즈에 대적할 수 있는 적당한 투자분야를 찾던 중에 방향을 180도 선회, ‘창조’가 아닌 ‘발굴’에 중점을 둔 대규모 고고학 지원재단을 설립하여, 준군 사태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고고학계의 버린아 노병민 박사를 스카웃, 뭔가 눈길을 끌만한 연구 성과를 얻어내어 상품화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러한 룽룽사의 빗나간 욕심이 결국 지난해의 인큐버스 사건과 같은 참극을 불러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뭔가 알아냈어요?”

감색 블라우스의 아담한 여자가 감색 수트의 어벙한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들고 있던 수첩을 옆으로 흔들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겠어요. 연구원들 모두 여기에서 행해지고 있던 실험에 대해서는 완전히 입을 봉하고 있어요. 게다가 정말로 잘 알 듯한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 아침부로 해외출장을 떠났다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데요.”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뭔가 생체공학과 관련된 성과물인 것만은 분명할텐데 말이죠. 실험자료들이라면 노트라던가 전자기록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일테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을지도 몰라요.”

“약품이라던가 실험동물 같은?”

“바로 그런 것이죠. 우리라던가 새장이라던가 그 비슷한 것은 없었어요?”

“그러고보니 이상한 것이, 아까 근처 숲 속에서 빈 우리를 하나 발견했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빈 우리라고요? 발견 당시 상태가 어땠어요?”

“저는 입회인 자격으로 구경만 했으니 자세히는 말할 수가 없지만... 크기는 고양이나 족제비만하고 안에는 터럭 하나 남아있지 않았어요. 다만 꼬리표가 남아 있었는데 연구원 중 누군가가 재빨리 회수해 가더군요. 얼핏 보니까 LP- 뭐라고 일련번호같은게 적혀 있었죠. 그리고 정말 이상한 건, 아주 튼튼하게 만든 금속질 우리인데도 한쪽 모서리가 심하게 우그러져 있고 뭔가가 빠져나갈 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을까요?”

“알 수 없죠. 아무튼 범인들이 들고 가던 중 안에 있던 녀석이 도망친 거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이제 우리는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겠어요. 갑시다.”

두 남녀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근처에 있던 정복경관이 옆의 떡벌어진 형사반장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굽니까? 외국말을 하던데......”

“ICPO라고 하더군. 리 엔터프라이즈는 다국적 기업이니까, 뭔가 국제적인 문제가 있는 모양이지.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

그때 풋내기처럼 보이는 젊은 형사가 경비원 차림을 한 남자를 데려왔다.

“반장님, 이분이 마지막 증인입니다. 성함이... 뭐라고 하셨었죠?”

“그것이 그러니께... 조필성인디유.”





목요일


그날 저녁, 세비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류천(流川)지구 미스트리스 9번가에서는 활동하기에 간편한 캐주얼 차림을 한 어떤 사람 하나가 양어깨에는 장바구니를 단단히 둘러매고 두 손으로는 자전거 핸들을 조심스레 붙잡은 채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가 오히려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하는지 아직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수더분한 얼굴에는 즐거운 기색이 완연했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적당히 잘린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흐트러지게 했다.

언덕길을 무사히 내려온 자전거는 곧 골목길로 접어들어 몇 분간 더 전진한 다음 한 번 좌회전하고 다시 한 번 우회전한 다음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연립주택에 도착했다. 소녀는 기운찬 동작으로 자전거에서 내려선 다음 꾸려놓은 짐들을 들고는 한바탕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자기 방으로 들어섰다.

“얘, 어디있니? 나야 나.”

“끼륵?”

소녀의 부름에 응하기라도 하듯, 낡은 소파 뒤에서 고양이만한 크기의 동물 하나가 쪼르르 기어나와 그녀의 발목에 애교를 부리며 매달렸다. 크기로 보면 고양이같지만 고양이보다는 오히려 족제비나 미국너구리를 더 많이 닮은, 그러나 그들하고도 어딘가 좀 달라 보이는 기묘한 생김새를 띤 동물이었다.

겉보기로는 분명 털도 있고 체온도 따뜻해서 온혈 포유류라고 짐작되었지만, 도무지 어떤 동물인지 구별하기 곤란한 점이 있었다. 이 세상 어떤 동물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가 몸 군데군데에 새겨져 있고, 발가락 수도 앞쪽은 세 개이지만 뒤쪽은 여섯 개로 각기 달랐으며, 우는 소리도 아주 낮고 가냘픈 나머지 애처로운 느낌을 주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동물을 보고 귀엽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점뿐이었다. 필요없이 사람을 귀찮게 굴지도 않고,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으려고 노력하며, 기분이 우울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깜찍한 재주를 부리며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소용이 없을 때에는, 가만히 주인의 품에 몸을 묻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금방이라도 울 듯한 천진한 표정으로 우울함을 함께 나누기까지 하였다. 정말 환상적인 애완동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그래, 잘 먹는구나. 착하기도 하지.”

뭔지도 모를 동물을 사흘 전 등교길에 우연히 도로상에서 만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주인을 찾아주려고 해도 당장은 학교공부 때문에 나설 수가 없는 터라서, 일단 자취방으로 데려와서 키우고 있긴 한데, 보고 있을수록 정이 드는 귀여운 녀석이었다.

게다가, 도대체 이런 동물은 뭘 먹는건지 알 수가 없던 차에, 냉장고에 남아있던 갖가지 잡다한 음식들을 그냥 요리조리 섞어서 주기만 해도 아무런 불평없이 잘 먹고, 소화는 도대체 어떻게 시키는지 생전에 탈이 나는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배설조차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주인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정해진 장소에 볼일을 보고는 감추는건지도 몰라. 소녀는 금방 비어버린 밥그릇에 신김치와 장조림과 계란을 섞어서 지글지글 볶은 엽기적이기 짝이 없는 음식을 다시 한가득 채워주었다. 그 동물이 무엇이건 간에, 데리고 있어서 손해날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남은 반찬 처리하기에는 그만이었으니까.

그때,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에서 히트곡 「맨발의 여왕」의 곡조가 울려나왔다.

“여보세요. 아, 미나언니?”

“야아, 순경이 요즘도 건강하게 지내니? (^_^)”

“그렇잖아도 그 이상한 교복 때문에 놀림받고 지냈는데 언니까지 그러기얏!!! (-_-)”

“아하하 미안하다 선경아, 하지만 너무 재미있는걸. 이젠 졸업했으니 놀릴 사람도 없을거아냐, 그치? (^_^)”

“그런데 무슨일로 전화한 거야?”

“자취하기 힘들지? 이번 주말에 한 번 모이자구. 타향에 올라와서 외로울텐데 사촌들끼리라도 한 번 모여야지.”

소녀는 열심히 먹이를 먹는 네발친구 쪽을 잠깐 흘낏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이번 주는 안되겠어. 다음으로 하면 안돼?”

“헤에? 네가 공부에 빠졌을 리는 없고, 애인도 없는 걸로 아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좋은 일은 뭘. 그냥 좀...”

“아하 알았다! 너도 결국 「수탉크래프트」에 빠졌나 보네? 대전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좋았어, 나도 요즘 배우고 있으니까 다음에 만나면 우리끼리 한판 하자. 아아, 지는 거? 그건 걱정 안해도 돼. 우리 직장에 아주 맹한 애가 하나 있는데 걔를 상대로 싸우면 누구라도 이긴다구. (^_^)”

살다보면 이렇게 사실과 추측을 구분 못 하는 사람이 가끔 보인다. 뭐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전화만 빨리 끊을 수 있다면.

그나저나 그 ‘맹한 애’라는 것은 누구일까?

“......물론 그럴게. 그럼 다음에 봐.”

객지생활이라도 사촌언니 하나 정도는 근처에 있으니 마음이 편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소녀는 식사를 마치고 털을 가다듬고 있는 그 동물을 귀여워 못견디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살짝 안아올려 실컷 부비부비♥를 해준 다음 말을 걸었다.

“아참, 그런데 너를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다. 벌써 나흘이나 지났는데도 주인이 안 나타나니 한동안은 더 있어야할텐데, 그냥 너라고만 부를 수도 없잖아. 그렇지?”

“끼르르륵”

“뭐가 좋을까.... 그러니까 뭔가 좀 참신하고도 너무 튀지 않는 거라면..”

방 안을 생각없이 둘러보던 소녀의 두 눈이 한구석에 비스듬하게 붙어있는 인기 TV프로 주인공 「엘프 소녀 마법사 아침햇살양」의 전신 포스터에 머물렀다.

“그래, 햇살! 햇살이라고 하자. 좋지?”

“끼륵 끼르륵~”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한 번만 보면 모두 햇살~ 햇살~ 할거야♥”

선경은 작은 기쁨에 차서 햇살이를 공중에 던졌다가 받는 장난을 계속했다.

(동물학대 동물학대 ;;;)

신나게 공중제비를 돌던 햇살이의 발바닥이 잠시 햇빛 속에 드러났다. 그 위에는, LP-001-4352-GEL이라는 일련번호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토요일


시위대의 분위기는 결코 밝지 않았다. 그들은 앙끄시 한복판 요이도(妖異島)에 있는 시의회 의사당을 둘러싼 채 제삿날 술따르는 맏상주같은 얼굴표정을 짓고 각종 요구사항이 어리버리하게 쓰여져 있는 피켓을 치켜든 채 시끄러운 대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시위라면 주로 실업자 증가와 관련한 「화이트 핸드」나 자매단체 「화이트 버드」의 집회가 대부분일 터이지만, 오늘은 특이하게도 나우국의 유력 환경보호단체들이 한데 모여 실시하는 ‘유전자합성작물의 상품화 및 일반유통에 대한 반대시위 겸, 신임시장의 가터벨트세(稅) 징수 절대반대집회’라는 길다란 제목의, 다소 방향이 흐트러진 듯한 시위였다.

“유전자 조작은 인류에 대한 범죄이자 신에 대한 반역이다!!!”

“시장은 서민들로부터 삶의 즐거움을 빼앗지 마라!!!”

“시민의 안전을 위해 DNA 상품화를 중단하라!!!”

“다음에는 채찍에까지 세금을 매길 작정이냐!!!”

“유전자 기술의 남용은 통계적으로도 이미 재앙을 예고하고 있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양초제조업자에 대한 테러를 가하리라!!!”

“아름다운 삼천리 강토와 국산 만화를 살리자!”

“닥터 코크스 만세!”

......도대체 무슨 요구를 하고 있는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제각각의 얘기가 튀어나오는데도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걸 보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무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불려나온 방위군의 일부 병력과 PETS의 대원들은 빨리 집회가 끝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비이클 위에 임시로 설치된 물대포를 점검하던 유태대원이 유성대장을 향해서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왜 우리가 이런 일까지 해야 되는 겁니까, 대장?”

“지난 몇 달간 우리가 나설만한 괴사건이 별로 없어서 윗분들의 시선이 별로 곱지 못해. 아무 일도 안하면서 세금이나 축내는 애물단지로 보이는 거겠지.”

“그런 거라면 저 건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의원들이 우리보다 더하잖습니까?”

“그치들은 서로들 싸우는 것은 잘해도 다른 집단과 싸우는 일은 잘 못하니까.”

유성대장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니힐하게 대꾸했다. 세상이 하도 살기 힘든 탓인지 요즘들어 그의 열혈도가 점점 낮아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최근 들어서 이런 종류의 시위가 늘고 있는 걸까요?”

‘소년’이 언제나와 다름없이 천진하면서도 능글맞은 얼굴로 하라대원에게 물어보았다.

“최근 수년 사이에 유전공학과 관련해서 상당한 기술적 진보가 있었고,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변했기 때문인 것 같아. 신문만 봐도 알잖아. 복제 생물, 합성작물, 유전자 지도의 작성, 유전자 조작을 이용한 품종의 개량, 뭐 그런 거 말이지. 너무 어려워서 자세한 건 잘 몰라도.”

“더 현실적인 이유는, 최근에 정부에서 유전자기술의 개발에 대한 규제 여부를 놓고 열띤 공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수억이 넘는 투자효과를 약속하는 황금시장을 놓칠 수도 없지만, 잘못하면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죠. 시위대의 진짜 목적은 그쪽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는 거라고요.”

피요대원이 들여다보고 있던 「가학동아[加虐童兒]」 최신호를 옆에 내려놓으면서 부연했다.

“그러고보니 리사(李社)가 이번에 앙끄시 교외에 뭘 지었다면서요? 그쪽도 유전학과 관련이 있다던데 불법 아닙니까?”

시사문제만 나오면 머리를 쥐어뜯는 보통사람 유태대원이 보다 알기 쉬운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직 유전자 연구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까지 규제를 할지조차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니까 당장은 불법이 아니겠지만... 법안이 어떻게 가결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아무래도.”

임무야 어찌되든 점심식사를 놓칠까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어메장관이 답해 주었다. 그가 걸터앉아 있는 임시지휘석 옆쪽에는 지난 월요일의 도난사건이 뒤늦게 단추구멍만하게 실려 있는 일간신문 쪼가리가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물론 그 기사에 신경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시설인 탓도 있었지만, 리 엔터프라이즈의 세심한 자기관리로 인해 그다지 많은 내용이 보도되지도 못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PETS에서도 그점은 예외가 아니어서, 과학에 관심이 많은 피요대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기사를 눈여겨보지 않고 있었다.

“아, 마침내 끝났네요. 다들 물러서기 시작합니다.”

쌍안경을 들여다보던 ‘소년’이 이제는 살았구나라는 얼굴로 보고한다. 근처에 있는 방위군 지휘본부에서도 상황종료를 알리는 사인이 도착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끝났다. 비번인 사람은 귀가하고, 일이 남아있는 사람은 각자 맡은 임무로 돌아가도록. 그럼 해산.”

경비근무를 끝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려는 순간, 메디컬 밴 쪽에서 약상자 챙기기에 여념이 없던 미나대원이 달려와서, 비이클에 올라타고는 막 떠나려고 시동을 거는 하라대원을 붙잡았다.

“여전히 힘들겠네요. 순찰 나간다면서요?”

“네, 무슨 볼일이라도?”

“다른게 아니고... 순찰코스상 류천지구도 지나가는 거 맞죠? 그쪽에 마침 내 사촌이 머물고 있는데 편지 좀 전해 줬으면 해서요.”

“우체국이 있잖아요.”

“그애가 자취방을 찾는 동안 주소가 일정치 않아서, 그애 집에서 온 편지를 제가 맡아두고 있었거든요. 서로 바쁘다 보니 찾아가서 전해주기도 마땅치 않고, 그나마 오늘 약속을 잡을까 했는데 그애가 또 안된다고 해서요. 여기 주소가 있으니까 그냥 우편함에 넣어만 주시면 돼요. 미안해요.”

“아뇨, 괜찮아요.”

속으로는 좀 귀찮으면서도 겉으로는 절대 내색을 하지 않는 하라대원이었다.

그것이 단련된 사람의 자세이니까.

“그런데, 미나씨.”

“왜요?”

“......대체 그 집은 편지를 얼마나 많이 쓰길래 한 자루나 되는 거예요???”

“남들이 쓰는 만큼밖에 안 써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많이.”

“사촌이 여러명인거죠.♥ (^_^)”

“....................................(-_-)”

하라대원은 차라리 자신이 단련되지 않은 사람이었더라면 소리라도 빽 질러 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쪽에서 또 실수를 저질러서 울상이 되어 있는 동거녀가 다소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쟤는 정말 숨기는 게 없을 거 같아.




선경은 화장품과 물감을 솜씨있게 발라서 족제비처럼 위장한 햇살이를 데리고 주말 장보기에 나서는 길이었다. 휴대용 장바구니를 들고 사야 할 물건들을 빠짐없이 적은 뒤에, 가는 길에 돈으로 바꿔야 할 빈병들을 챙기고는 돈지갑을 안전한 곳에 품은 채로 햇살이를 앞세우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토요일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시꺼! 쓸데없이 길게 묘사해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그녀의 행복한 외출을 뒤편에서 싸늘한 눈으로 지켜보는 한 떼거리의 회색양복 차림을 한 사나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모른다.

“통속적인 전개로군!”

...뭘 기대했는데.




“이게 마지막 다발이네요. 저집인가봐요... 어엇?”

때아닌 우체부의 역할을 맡아, 순찰을 도는 틈틈이 미나대원의 사촌들이 산다는 누추한 하숙, 자취, 월세, 전세, 오피스텔, 판자집, 비닐하우스(...) 등등을 전전하며 편지묶음을 전해주는 일에 전념하고 있던 하라대원과 피요대원은 토요일 오후를 순찰로 보내게 된것도 억울한데 이런 일까지 공짜로 해줘야 되다니 용서못해, 라는 저주를 속으로 연발하고 있었다. 저주는 아무리 많이 해도 돈이 들지 않으니까.

그때 비이클의 창 밖을 내다보며 맞는 주소를 찾고 있던 피요대원이 뜻밖의 광경을 발견하고 외마딧소리를 질렀다.

“뭐야?”

“저기 회색양복을 입은 수상한 아저씨들이 여자애 하나를 열심히 쫓아가는데요.”

“그래서? 경찰에게 맡기면 되잖아?”

“이 근처 경찰서는 3km나 밖에 있고 지금 연락하면 달려오는데 좀 걸릴걸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나서야 한다 이거지.”

그 말과 동시에 하라대원은 힘차게 액셀을 밟으며 차의 방향을 바꾸어 그 이상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끼어들었다. 너무 급한 나머지 피요대원이 들고 있던 편지다발을 떨어뜨려 사방으로 편지봉투가 휘날리는 것도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보았다 해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선경은 쇼핑카트 위에 햇살이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득 싣고 죽어라고 달리는 중이었다.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가서 쇼핑을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이상한 회색옷의 남자들이 빙 둘러서서 햇살이를 내놓으라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선경은 무모하게도 카트 째로 그들 중 가장 약해보이는 녀석을 들이받은 다음 무조건 길이 있는 쪽으로 달아났다. 당연히 회색 사내들도 따라왔고, 그 와중에 슈퍼마켓 안에 진열되어 있던 수많은 물건들이 무너지고 깨지고 흐트러지고 부서지고 뒤섞이고 우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미끄러지고 뒤집어지고 야단이 났다. 우여곡절 끝에 밖으로 나왔지만 사내들은 포기하지 않고 편대(...)를 짜서 조직적으로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들에게 차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이런 속도로는 언제 잡힐는지 알 수 없었다. 햇살이의 파리한 털이 왠지 이상한 빛을 내며 희미하게 떨리는 것도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 뒤로 쫓아오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

“내 카-----트 돌리도~~~~~~~”

바로 대머리 벗겨진 슈퍼마켓 주인 아저씨였다.


선경은 세 번째 모퉁이를 도느라 약간 속도가 느려졌다. 게다가 카트에 실린 물건들의 무게도 속도를 더 올리지 못하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다리에 힘이 자꾸 빠지고 있었다.

한 발짝 두 발짝,

잡힐락말락한 바로 그 순간에!

“올라타! 어서!!!”

어디선가 나타난 한 대의 소형차가 그녀와 사내들 사이에 잽싸게 끼어들더니 그녀의 측면으로 달려왔다. 선경은 앞 뒤 생각할 것 없이 햇살이를 집어든 다음 카트를 그냥 내버려두고 소형차의 열린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다음 순간 소형차는 무서운 속도로 달아났고,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던 사내들은 앞쪽에 있던 빈 카트만을 움켜쥔 채 관성의 법칙에 이끌려 계속 달려가다가 정면에 자리하고 있던 패스트푸드점 앞문에 보기좋게 키스를 하고 말았다.

“비, 빌어먹을... 갑자기 이상한 녀석들이 나타나서 방해를 하다니...”

“이상한 건 너희들 쪽이야.”

한데 뒤엉킨채 널브러져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내들 앞에 홀연히 두 명의 남녀가 나타나서 고소(苦笑)를 던졌다. 둘다 감색 양장을 입고 왠지 싸늘한 (‘썰렁한’이 아니다!)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ICPO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아담한 체구의 여자가 뭔가 대단해 뵈는 신분증을 슥 꺼내보이며 날카로운 말투로 그들을 제압했다. 회색양복의 남자들은 분노와 어리둥절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뒤쫓아온 주인 아저씨는 이미 이들이 던져준 소정의 돈뭉치와 카트를 찾아들고 룰루랄라 가게로 돌아간 뒤였다.




PETS의 엠블럼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청록색의 비이클은 수십 킬로미터를 계속해서 달려가다가 추적의 위험이 없을 만한 곳을 찾아서 조심스럽게 주차했다.

“됐어, 이젠 못 쫓아올거야.”

“고맙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그 사람들이 갑자기 쫓아오는 바람에...”

“뭘, 공무원이 어려움에 처한 시민을 돕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언제나 냉정한 하라대원이 별 감정없는 목소리로 태연하게 답했다.

“그런데 왜 그자들이 너를 쫓아왔던 걸까? 무슨 이유라도 있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피요대원이 끼여들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전혀 처음보는 사람들인데요.”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대로변에서 그런 난폭한 짓을 하려 들었던 거겠지. 혹시 뭔가 그자들이 찾고 있는 걸 네가 우연히 손에 넣은 거 아닐까?”

“3류 스릴러 영화가 아니라고요, 선배.”

“최근에 손에 넣은 거라고 해봐야 얘뿐인걸요.”

여전히 품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햇살이를 영치기영차 들어올리며 선경이 대답했다. 힘든 추격전을 벌이는 동안 위장색은 거의 다 지워져서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이건 처음 보는 동물인데? 피요양, 이런거 본 적 있어?”

“아뇨, 하지만 한 번 믿을만한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보죠.”

안경알을 묘하게 빛내며 어딘가에서 꺼낸 노트북을 펼치고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범지구적인 네트웍과 연결하여 잠시동안의 검색을 마친 다음에 간단하게 결론을 말해주었다.

“......데이터 불명.”

“어딜 검색했는데? 국제동물학회?”

“아뇨, D백작의 유쾌한 동물가게.♥ (^_^)”

“장난하지마. (-_-)”

“어쨌거나 불명인 것은 확실해요. 그렇다면... 이건 지금까지는 전혀 보고되지 않은 미확인 동물이거나, 아니면......”

“아니면?”

“유전자 합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종류의......”

“에이 설마, 아직 우리의 유전자 기술이 그정도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잖아.”

“작가가 미치면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아무튼 정체불명인 것만은 사실이라 이거지. 뭔가 수상한데.”

“아까 신문을 보니까 리사(李社) 연구소에서 도난사건이 있었다고 하잖아요. 혹시 그쪽과 무슨 연관이라도...”

선경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품에 안긴 햇살이를 진정시키느라 애쓰고 있었다. 햇살이는 그녀의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안한 눈동자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온몸의 털을 쭈삣쭈삣 곤두세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까 추격당할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불안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위험은 다 지나갔을텐데, 어째서?

그때 피요대원이 친절한 얼굴로 뒷좌석 쪽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네가 있던 동네는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오늘은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래? 조사도 조사지만 네가 걱정되어서 그래.”

“그래, 아까 그자들이 또 나타날지 모르니까 말야. 귀찮게 구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경찰이 아니니까.”

하라대원도 다소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선경이 그들을 돌아보며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앞쪽 차도에 불길한 느낌을 주는 검은 중형차 서너 대가 다가와서 그 자리에 멈춰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차들에서 아까와 비슷한 회색양복차림의 사내들이 절도 있게 내려서서 비이클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의 패거리들보다 두 배는 넘을 듯한 숫자였다. 게다가 그들은 특별주문한 것으로 보이는 화기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 3연장 ‘도배’ 레일건, 185년형 ‘ID도용’ 샷건, 게다가 블랙마켓에서도 구하기 어렵다는 인기최고의 전뇌흉기(電腦凶器) ‘199년형 스팸 스파이럴’까지.

“맙소사!”




‘李’자 로고가 찬연하게 빛을 발하는 고층건물의 최고층에 위치한 어느 사무실에서 범상치 않은 인상을 지닌 사나이가 몇몇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가 끝난 뒤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들 중 가장 잠이 모자란 듯한 핼쓱한 인상의 남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결국 실패작이라 이건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결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최종결과물인 LP-001-4352-GEL, - 통칭 럭키펫 시작(試作) 1호 - 그중에서도 4352번 실험체는 예상치 못한 결함을 몇 가지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실제 배양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을 정도로 미묘한 부분이었습니다만.”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럭키펫은 지금까지 소개되었던 모든 애완동물들의 장점을 모아 한 개체에 이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합성된 완벽한 유전 조작 생명체, 즉 GEL(Genetically Engineered Lifeform)입니다.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따르고 말썽을 부리는 일고 없으며 애교도 만점이어야 했지요. 그러한 면에 대해서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아도 좋았습니다만...”

“그럼 뭐가 문제지?”

자꾸만 길어지는 사설에 슬슬 짜증을 내며, 내심 저런 대사를 써준 작가를 저주하던 사내가 대답을 촉구했다.

“이 동물은 주인의 불편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 생명유지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능을 혼자 해결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먹이를 주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먹고, 더러워진 몸을 스스로 세척하며, 건강에 조심하도록 이미 프로그램이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먹이를 소화하고 남은 노폐물의 배출, 즉 배설입니다만, 이것을 아예 생략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위생이라던가 그에 따른 많은 문제도 해결되니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보고와 함께 제출된 서류를 흘낏 들여다보고 남자가 물었다.

“럭키펫의 신진대사는 100% 리사이클링을 가능케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애초의 목표는 광합성이었지만 계획 실행 중에 되도록이면 다른 동물과 비슷하게 하도록 하자는 방침이 나와서 궤도를 수정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음식이 들어가서 소화되기까지는 다른 동물과 같지만... 그 다음이...”

“그 다음이?”

“배설이라는 것을 거치지 않고 모든 섭취한 물질을 120% 완전소화시키는 겁니다. 그리하여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은 후 남은 잔여 에너지는 피하지방과 기타 쓸모없어 보이는 2차기관에 축적시킵니다. 그러다가 몇 달에 한 번 체온이 지독하게 높아지게 함으로써 복사열로 방출한다는 구조로 만들었지요. 다만 그 에너지 순환 시스템이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해서, 축적된 에너지가 한 순간에 폭발적으로 발산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번에 탈주한 4352번째 실험체도 역시 이 문제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가스 폭발 같은 대참사의 가능성도 있다는 소린가?”

남자가 서류를 책상 위에 던져놓으며 비꼬는 투로 물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핼쓱한 인상의 과학자가 안경을 고쳐쓰며 말을 이었다.

“이 4352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놈은 돌연변이로 인한 특이한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는 일단 그것을 뇌파공진중추(腦波共振中樞)라고 명명했습니다만, 자세한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연구에 쫓기는 바람에, 개발팀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는 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탓이지요. 만약 그것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킨다면......”

“나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를 않는군.”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면 적어도 대비책은 세울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그점에 대해서는 연구를 계속하도록 하게. 탈주한 실험체가 어떤 일을 벌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리고, 이 일은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외부에 알리지 말도록 하게. 알려봐야 혼란만 가중될 뿐이니까.”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핼쓱한 얼굴의 과학자가 밖으로 나갔다. 보고를 마친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건이 해결되어도 그들의 지위가 무사할지 어떨지를 생각해 보면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발걸음이었다.


“...발도제.”

사무실 구석의 커튼 뒤에 조용하게 서 있던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체격의 청년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왔다.

“연구소에 침입한 자들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겠지? 어떤 자들인지 윤곽은 잡았는가?”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역시 회장님의 생각대로인 것 같더군요.”

“...역시 룽룽인가.”

“그렇습니다.”

범상치 않은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뭔가 일이 벌어질 때가 되었군. 아까 보고된 데이터를 즉각 경찰과 방위군 쪽에 전송해 주게. 그들도 알아야 할 일이니까.”

“그렇게 때맞춰 정보를 주면 의심받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경찰에서도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정보를 내놓으라고 닦달을 해 왔으니까, 자기네들의 요구에 못이긴 거라고 생각하겠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연구는 역시 실패인 겁니까?”

“애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냥 썩히기엔 너무 아깝지. 내겐 또 다른 계획이 있네.”

“어떤...”

“군사용으로 팔아먹는 거지. 그럴듯하지 않은가?”

범상치 않은 남자는 지포라이터를 꺼내어 꽁초에 불을 붙이고는 기업인답지 않게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의 맛을 즐겼다.




감색 정장의 두 남녀는 류천지구 근방의 조그마한 카페 「블루리버(不淚利寶)」에서 조용히 커피잔을 기울이며 이제까지 얻어낸 정보를 종합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화창한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음울하고도 이지적이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 근처에는 왠지 맹독성의 스모그가 끼어있는 듯한 느낌마저 감돌고 있었다.

“정리해봅시다.”

아담한 체구의 젊은 여자가 오른손 검지를 살짝 들어보이면서 말을 꺼냈다.

“그 회색 패거리들은 룽룽사에 고용된 자들이었고, 그들은 지난 월요일 밤에 어둠을 틈타 SEBI에 잠입한 다음 다른 자료들과 함께 뭔가 이상한 동물을 집어들고 나오다가 그놈을 놓쳤고, 그 동물은 근처에 있던 이 동네로 달아났죠.”

차근차근 정리된 사항을 메모해가던 남자가 그 말을 받았다.

“그러던 중 어떤 소녀가 그 동물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낸 뒤에 그녀를 협박하여 그 동물을 받아내려다가 실패했고 그 자리에 우리가 나타난 거죠. 문제는 도대체 그 동물이 어떤 중요성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패거리들은 어차피 귀찮은 일을 하기 위해 고용된 하수인에 불과하니까 그런 것까지는 모른다고 했지만, 도난이 일어난 장소로 미루어 보아 유전자 실험에 관련된 것임은 틀림없을 거예요.”

“리사(李社)에서 자세한 언급을 피하는 걸로 보아선 아직 완벽하지 못한 것이겠죠. 뭔가 결함을 품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직 룽룽사는 그것이 어떤 결함인지 모르니까 앞으로도 계속 손을 뻗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그러나 그녀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갑자기 카페 바깥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어떤 결과’가 바로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앙끄시 교외에 자리한 PETS 본부를 향해 쏜살같이 차를 몰면서, 하라대원은 아까의 상황을 다시한번 되새기고 있었다. 보았으되 믿을 수 없고, 겪었으되 납득이 가지를 않는,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중형차에서 내려선 험상궂은 패거리들은 곧바로 비이클을 둘러싸고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 뒤 순순히 내려오라고 요구했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하라대원은 몰래 보관함 속에 들어있는 ‘회원정리’ 라이플을 꺼내려고 했지만 녀석들의 위협사격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피요대원은 노트북을 끄는 척 하면서 재빨리 본부와 인근 경찰서 쪽으로 구조신호를 발신했지만 나우국 특유의 전파장애로 인해 (하필이면 이럴 때!)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선경은 햇살이를 두손 가득히 꽉 껴안고 불안에 떨며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의 가느다란 털이 더욱 심하게 곤두섰다.

패거리들 중 한명이 다가와서 강제로 문을 열어젖히려고 할 때,

선경의 품 안에 있던 햇살이가 갑자기 눈을 맹수처럼 빛내며 무서운 힘으로 그녀의 팔을 박차고 튀어나가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회색양복의 사내들은 한꺼번에 몰려와서 그 남자로부터 성난 짐승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워낙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쉽지가 않았다.

가까스로 남자로부터 떨어진 햇살은 온몸에서 은색의 스파크를 발산하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원래의 네 배 정도 되는 크기로 부풀어올랐다. 몸만 커진 것이 아니라, 겉모양 또한 사나운 들짐승이나 길들여지지 않은 맹견을 연상시키는 흉악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색깔도 옅은 푸른빛을 띤 은색에서 검붉은 빛이 도는 보라색으로 변했다. 털이 수북이 덮여 있던 토실토실한 체형은 어느새인가 딱딱한 각질로 뒤덮인 강건한 체구로 바뀌어 있었다. 머리에는 날카로운 뿔이 돋아나고 억센 근육질로 변한 앞뒷발에서는 칼날 같은 발톱이 길게 뻗어나왔으며 톱니 같은 이빨에서는 금속질의 광채가 번득이고 있었다. 울음소리 또한 ‘끼르르륵’에서 ‘크르르르’로 레벨업한 상태다.

변태(變態)한 햇살이는 더 이상 온순한 애완동물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패거리들 중 몇몇이 용기를 내어 개머리판으로 자기를 후려치려고 달려들자마자, 햇살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민첩하게 움직이며 공격을 피하였고,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다시 그쪽으로 달려와 번개 같은 속도로 공격자들을 유린하였다. 뭐가 지나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순간적으로 다가와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그들의 몸을 후려치고 뿔로 들이받고 몸으로 밀어붙여 쓰러뜨리는 그 모습에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햇살이의 공격은 얼핏 보면 무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한둘이 아닌 공격자들의 모든 행동을 파악하고는 가장 적절한 패턴으로 반격을 가한 뒤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재빨리 물러나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그곳에 모여 있던 거의 모든 회색 양복들은 심하게 피를 흘리며 쓰러지거나 쇼크를 받고 멍한 얼굴로 주저앉거나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에 이르렀지만, 햇살이의 난동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녀석의 흉폭성은 증폭되고 있었다.

“햇살아! 이제 그만해! 이젠 됐어!!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멍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선경은 비이클의 문을 열고 뛰어나와 녀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미 제정신을 잃고 물소만한 크기로 변해버린 햇살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벌겋게 충혈된 두 눈으로 그쪽을 잠시 쳐다보더니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선경의 셔츠자락에 피가 배어나왔다. 뿔에 어딘가를 찔린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약간 스친 정도여서 치명상은 면했지만, 그녀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만만치 않았다.

으르렁거리던 괴수는 (그래, 바로 이녀석이 괴수다!) 방향을 돌려서 류천지구 중심가 쪽으로 맹렬하게 달려갔다. 달려가는 도중에도 녀석의 몸뚱이는 스파크에 휩싸여 쉴새없이 커지고 있었다.

“해, 햇살아!! 햇살아아아아아아아!!! 햇......”

그러는 동안에 정신을 잃은 회색사내들을 한무더기로 먹기좋게 (...) 포개 놓고 경찰에 간략한 사랑의 (...) 전문을 보낸 (이번에는 연결이 제대로 되었다. 빌어먹을 나우) 두 대원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탈진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선경을 억지로 태우고 비이클을 몰아 본부 쪽으로 죽어라고 달려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꽉 잡아! 저 열차가 오기 전에 건널목을 넘어갈 테니까!!!”

“선배! 한쪽에서만 오는게 아니잖아요오!!!”

...너희들 그러다가 진짜 죽을라.




“심하군요.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아요.”

펫츠 비이클의 스캐너 모니터를 들여다보면서 피요대원이 보고했다.

장관과 피요대원, 그리고 ‘소년’은, 현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여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임시본부에서 조사 및 지휘를 진행하고 있었다. 비이클의 컴퓨터와 직결된 감시위성이 괴수의 데이터를 직접 측정하여 시시각각 스캐너로 보내 오고 있다. 물론 괴수의 정체와 기본적인 관련사항은 이미 리 엔터프라이즈로부터 제공받은 뒤였지만, 그 데이터는 변태 이전의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 측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축적되어 있던 에너지 탓인가? 하지만 폭발해야 정상이 아닌가?”

“특이한 돌연변이라면 이런 현상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에너지를 폭발의 형태로 발산하는 대신에, 거꾸로 물질로 전환시켜 자기 몸을 키워 나가는 것이지요. 물질을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할 테니까요.”

“어이가 없군. 그래서 폭발하는 대신 거대화되고 있단 말이지...”

「LP-001, 코드네임 럭키펫」으로 통칭되는 문제의 실험체가 난데없이 거대화되어 류천지구 주변의 상점가 「마구사가(魔球四街)」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한지 30분, PETS의 전대원은 출격 준비를 끝내고 어메장관으로부터 아주 간단한 사전설명을 들은 뒤 저마다의 탈것에 올라타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물론 그 중에는 비이클이 무슨 오프로드 버기라도 되는 것처럼 험하게 몰아대어 겨우 제시간에 도착한 하라대원과 피요대원의 모습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때까지도 방심상태에 빠져 있었던 선경을 구급반에 인도하고 급히 출동했다.

그 동안에도 괴수는 약 3분마다 은색 스파크에 휩싸인 채 금속이 울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와 함께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같은 프로세스를 몇 번씩 거듭한 결과 현재의 크기는 거의 5층 빌딩만해졌다. 괴수의 발 아래에서는 지나가던 자동차들이 급히 방향을 돌리다가 서로 부딪치는가 하면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치던 시민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다른 사람과 뒤엉켜 쓰러지는 등 한바탕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몰라도 거리 한쪽에서는 가스관 서너 개가 폭발하여 불꽃이 타오르는 한편, 그 반대쪽에서는 소화전이 깨져서 물기둥이 보기 좋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근처 건물의 유리창은 거의 다 깨져 있었고 약하게 지어진 몇몇 건물은 제풀에 콘크리트벽이 갈라져서 보기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어린애 우는 소리와 누군가의 환희에 찬(...) 신음소리까지 들려왔다.

방위군은 마침 앙끄시 중심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화이트 핸드 - 화이트 버드 합동 노동인력처리대책수립촉구특별시위(勞動人力處理對策樹立促求特別示威) 현장을 경비하기 위해 총동원되어 있는 상태라서 일손을 낼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이번 괴수의 퇴치 문제는 전적으로 PETS에게 달려 있는 판이었다.

(하루에 시위가 두 번씩이나 일어나다니 정말로 문제가 많은 도시다)


상공에서는 언제나와 다름없이 PETS의 정예요원들이 공중공격을 준비하며 조심스럽게 괴수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대원들의 탑승기가 거듭되는 사건으로 인해 노후화된 펫츠호크 1․2호 대신에 최신 전투기인 펫츠이글 α․β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일체식의 중형고속전투기 α(알파)에는 유성대장이, 분리형의 대형전략전투기 β(베타)에는 하라대원과 유태대원이 탑승하고 있다.

펫츠이글 시리즈는 이전의 계열보다 최고속도와 연료적재량, 항속거리가 높아져, 전체적인 성능이 1.5배 향상된 타입이었다. 게다가 무장도 증강되어 이전의 호크가 3-4가지 무장을 구사하던 것에 비해 보조무장까지 통틀어 7-8가지의 최신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가짓수가 늘어난 것에 반비례하여 탄환 및 발사 에너지 보유량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중량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요즘 방위군이 겪고 있는 재정적 곤란이 진짜 원인인 듯 하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물론 그에 맞춰 지상병력도 강화되어야 하는게 정상이었지만 공중전력에 너무 많은 비용을 투자하다보니 예산이 얼마 남지 않아서, 펫츠 비이클은 약간의 엔진 개조와 탐지장비 추가를 거쳐 ‘펫츠 비이클 피요피요 스페셜’이라는 개정 버전으로 거듭날 수밖에 없었다.

메디컬 밴은 외견상으로는 별 변화가 없었지만 그동안의 쉴 새 없는 의학발전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인근 병원들과의 연락용 네트웍을 재정비하고 탑재 컴퓨터의 의료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다는 점이 차이점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새 시대에 발맞춰 간다!’라는 무휼박사의 거창한 슬로건 덕분이었다.

물론 장비재편에 드는 예산을 보충하기 위해 대원들의 새해 보너스는 모두 강제로 반납할 수 밖에 없었으니, 말은 근사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비참한 게 지구를 지키는 자들의 생활인 것이다.


“대장! 꿈쩍도 하질 않습니다! DD버스터로는 안되겠는데요!!!”

유태대원의 기차화통 삶아먹은 목소리에 긴박감이 묻어나온다.

“좋아, 제2단계 공격!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LS입자포를 사용한다!”

“옛!”

“하라군! 괴수의 정면으로 붙어서 유태군의 사격을 돕도록! 나는 측면으로 돌아가서 발 밑을 노려 보겠다!”

“알겠습니다. 정면 급속 접근!”

“유태군! 입자포를 쏠 때에는 괴수 주변의 스파크를 주위해라! 간섭파가 일어나서 에너지가 낭비될 가능성이 있다!”

“알고 있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피요군, 분석은 아직인가?”

“지금 전신 스캔을 완료했습니다만 워낙 스파크가 심하게 일고 있어서 전자기기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저녀석이 3분마다 크기가 달라지고 있는 관계로 데이터의 일관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 방금 또 1m 커졌습니다! 2차 스캐닝을 개시합니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

“1차 스캐닝과 모순되는 점만을 걸러 내어 추가시키면 생각보다 빠릅니다.”

“그럼 부탁한다. 뭔가 도움되는 사실이 발견되면 즉시 알리도록!”

유성대장은 통신을 끝내기가 무섭게 괴수의 측면으로 가뿐하게 선회비행을 시도하여 주의를 끈 다음, 괴수의 발 밑을 향해 LS입자포를 무차별로 쏴 댔다. 그러나 괴수는 아프기는커녕 간지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은 오히려 몸 주위에 퍼져 있는 스파크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펫츠이글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유성대장의 조종석 캐노피에 무시무시한 불꽃이 튀고 계기판이 진동했다.

펫츠이글 α가 고속분사를 이용하여 위로 솟아올라 도망치는 틈을 타서, 펫츠이글 β가 정면으로 치고 들어와 특별히 약해 보이는 부분만을 골라 공격을 시도해 보지만, 역시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다.

“유태군, 뭐하는거야? 전혀 먹혀들지를 않잖아!!!”

“이게 최대 출력이라고요! 아무래도 3단계 공격을 사용해야 될 것 같아요!!!”

“먼저 대장님의 허가가 있어야 해!”

“대장! 3단계 허가를 내려 주십시오! 틀림없이 통할 겁니다요!”

“아직 그러기는 일러. 괴수 주변에 둘러쳐진 스파크는 일정한 시간을 두고 강약이 변화하고 있으니까, 가장 간섭이 약해질 때를 이용해서 총공격을 해 보기로 하자!!!”

“알겠습니다. 이봐 피요양, 괴수 주변의 전자기장이 최대로 약해지는 예상 시간대는?”

“시뮬레이션 결과 앞으로 2분 11초 후로 산출되었습니다. 하라선배! 오차율은 7.3%로, 대략 플러스 마이너스 14초 정도 차이가 날 겁니다.”

“대장님, 들으셨습니까?”

“그래. 모두 괴수의 주변을 돌면서 파괴행동을 최대한 저지하고 탄알을 아끼도록 한다. 특히 기체 및 주변시설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쓰도록!”

“롸져.”

장관 일행 또한 이 작전의 성공 여부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근처의 대피소에서는 구급반의 일꾼들이 성심성의껏 주민들의 구출에 힘쓰고 있었다. 특히 메디컬 밴 옆에 가설된 응급지휘소에서는 무휼박사와 기타 구급대원들이 모자라는 약품의 공수와 넘쳐나는 부상자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는 형편이었다.

주변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을 구출하여 캠프로 옮긴 다음 경상자는 응급처치를 하고, 중상자는 인근 병원으로 옮기고, 집 잃은 사람들에게는 적십자사와 연락이 되도록 조처를 해 주고, 길 잃은 아이들이나 애완동물들은 학교 건물을 임시로 빌려주어 안전을 도모하는 등, 구급반의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특히나 오늘처럼 방위군이나 경찰의 도움이 전혀 없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상황이 상당히 나쁜 경우에는 용역회사의 크레인을 빌려와서 건물에 깔린 사람들을 끄집어내는 막노동까지 벌여야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을 것이다. (이거 써놓고보니 PETS는 119구조대까지 겸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


“거녀양, 벌써 몸이 다 나은거야? 아직 마지막 붕대도 안 풀었는데?”

“아아 그럼요. 이젠 정말 쌩쌩해요. 너무너무 기운이 넘쳐 흘러서 괴수도 한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라니까요.”

“그렇게 말 안해도 거녀양이 먹보라는 건 다들 알아.”

“......나만 미워해...... (;T_T)”

온갖 비방과 중상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환자를 간호하는 동거녀!

그러나,

“거녀양, 그게 아니야. 그 상처에는 과산화수소수가 아니라 복합연고를 써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는데도.”

“앗, 그럼 이건 맞겠죠? 짜잔!”

“그건 내가 빌려줬던 썬크림이잖아!”

“와악, 난 몰라아아아~”

“...거, 거녀양, 그렇다고 링겔병을 붙잡고 휘두르면 어떡해~~~!?”

보시다시피 이 캐릭터의 의료기술은 연재 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왜 아직껏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는가는 오직 신만이 아실 일이다.

“뭐가 어째! 주인공을 이제서야 불러낸 엉터리 작가 주제에!!!”

......어쩐지 낯이 익더라.

“그나저나 저기에 미나언니하고 같이 있는 애는 누구예요? 우리 대원은 아닌 것 같고...”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하라씨와 피요씨가 순찰중에 만났대. 저 괴수를 돌봐주다가 배신당한 (...) 애라나.”

“아......”

“안전한 본부에 남아있으라고 그렇게 일렀는데도, 저 녀석을 버릴 수 없다면서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박사님도 마지못해 함께 데려오도록 하신 모양이지. 하지만 저 몸으로 도대체 뭘 하겠어? 불쌍하기만 하지.”

“그렇군요.”

붕대귀신 선림의 설명을 듣고 겨우 납득한 거녀는 왠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비슷한 일이 내 고향 어딘가에서...

일단 상처에 응급처치를 받고 구급반에서 제공한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선경은 힘없이 그 자리에 앉아서 슬픈 눈으로 괴수가 난장판을 벌이는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나대원이 옆에서 그녀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어주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거녀의 가슴에 어떤 결의가 피어올랐다.

“거녀양, 이번에는 실수하면 안돼. 이 혈액봉지를... 어라?”

방금까지 거녀가 있던 포스트에는 주인잃은 하얀 붕대만이 펄럭이고 있었다.




“지금이다!”

예상 시각이 되어서, 제 2차 합동공격이 시작되었다. 계측기에 나타난 괴수 주변의 전자기장이 최대로 약해지는 시점과 부위를 골라내어 그곳에 공격을 집중하는 방법이었다. 만일을 위해서 실체탄인 DD버스터와 입자병기인 LS입자포를 동시에 쏘기로 정해놓았다. 먼저 펫츠이글 α가 괴수의 뒷덜미쪽으로 달려들어 아랫배와 꼬리 윗부분에 집중공격을 퍼부었으나 효과가 없자, 괴수가 α쪽으로 돌아서는 틈을 타서 β가 다시 다리와 척추부분을 겨누고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전자기장의 변화가 워낙 심해서 입자병기는 잘 먹혀들지 않았고, 괴수의 갈수록 날렵해지는 몸놀림 때문에 실체탄도 엉뚱한 곳에 날아가 쳐박히는 불상사만 속출했다.

“대장! 역시 안되겠습니다! 3단계 공격을 허가해 주십시오!”

β를 2단분리시켜서 괴수의 날카로운 뿔을 가까스로 피한 하라대원이 다소 급박하지만 여전히 침착성을 잃지 않은 음성으로 요청해 왔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3단계 공격을---------- 허가한다!!!”

모 지구방위단체의 본부장처럼 격앙된 목소리로 한껏 열혈을 불태워가며 유성대장이 허가 사인을 내렸다. β-1호의 하라대원과 β-2호의 유태대원은 각각 허가를 받자마자 조종석 측면에 감춰져 있는 비상용 패널을 열어젖히고 3자리수로 이루어진 비밀번호를 재빨리 입력한 뒤 손목 통신기에서 빼낸 조그만 열쇠를 지정된 홈에 꽂고 힘차게 돌린 다음, 전면 패널의 배치가 바뀌면서 드러난 디지털 스크린에 ‘앙끄방위군 작전통제네트웍 「호동왕자」에 접속하셨습니다. LFFM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이라는 기괴한 지시문이 나타나자 주저없이 ’Y'를 선택하고는, 트리거의 측면에 있는 히든 스위치 위에 손가락을 고정시키고 타겟 스코프를 들여다보면서 괴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찾아서 조준을 맞추었다. 조준이 완료된 순간, 두 대의 전투기는 거의 동시에 하부 해치를 열고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진공관 탄두를 꺼낸 다음, 주저 없이 괴수를 향해 발사했다!

펫츠이글의 제3단계 공격인 저주파 냉동 미사일 (LFFM ; Low-Frequency Freezing Missile)은, 앙끄방위군의 (자칭) 천재과학자로 불리는 백준박사가 E-M 결정반응탄에 이어서 두 번째로 개발한 회심의 비밀무기로, 목표의 표면에 꽂힌 다음에 탄두 중심핵에서 방출되는 초저주파를 이용하여 목표의 내부를 꽁꽁 얼리는 기발한 착상에서 출발한 발사무기였지만, 실험결과 그 파급효과가 너무 크고 잘못해서 건물에라도 빗맞을 경우 뒷처리가 무지하게 어렵다는 이유로 인해 통상전투에서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번 사건과 같이 일분 일초를 다투는 긴급상황에서도 작전지휘관의 허가를 얻지 않으면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허가를 얻은 뒤에도 방위군 네트에 접속해서 사용여부를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었기에, 발사절차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변명 한 번 길다 ;;;)

“효과가 있어야 할텐데...”

쌍안경으로 현장을 지켜보던 어메장관은 자기도 모르게 모자챙을 잘근잘근 씹으며 기도했다. 나머지 대원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미나언니, 나 잠깐 손 좀 씻으러 갔다올게.”

“그래? 나하고 같이 가도록 하자. 마침 일도 다른 사람에게 맡겼으니까.”

“아냐. 혼자 다녀올 수 있어. 별로 멀지도 않은데 뭐.”

선경은 부축해주려는 미나대원의 팔을 살며시 뿌리치고 힘든 발걸음을 옮겼다.

햇살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야 해, 좀더 가까이...




지휘석에 앉아있던 어메장관은 헤드세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격하게 소리질렀다.

“......젠장, 효과가 없었어!!!”

괴수의 등짝에 정통으로 꽂힌 2발의 LFFM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놈의 체내로 파고들기 위해 고속회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괴수의 몸체 표면에서 발산되는 전자기장의 영향으로 탄두의 정밀기기가 고장을 일으켰는지, LFFM은 괴물의 체내로 돌입하기도 전에 움직임을 멈추었고, 괴수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탄두를 발톱으로 빼내어 인근 빌딩에 쓰레기 버리듯이 던져 버렸다. 탄두를 맞은 두 빌딩은 순식간에 내부에서부터 얼어붙어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얼음상자로 변해 버렸다. 영롱한 고드름과 얼음조각들이 출입구와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난폭하게 삐져나오는 광경은 지난해 인큐버스 사건보다도 더 기괴하게 보였다.

“제3단계 공격이 효과가 없다니...... 지금은 E-M 반응탄도 재고가 없는데..”

유태대원이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라대원의 Β-1호는 하필이면 냉동되는 건물 근처를 저공비행하고 있다가, 갑작스런 온도변화로 인해 몰아친 이상강풍(異常强風)에 휘말려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장관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낙담한 유성대장이 장관의 충고를 구한다.

“계속 따라붙어서 녀석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군. 그동안 우리들은 어떻게든 녀석을 퇴치하거나 적어도 움직임을 봉쇄할 다른 방법을 연구하겠네. 자네들은 탄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녀석을 근처 무인지역으로 유도하게. 그렇지만 필요 이상으로 무모한 행동은 삼가게나. 그리고 구급반은 빨리 하라대원의 행방을 찾아서 구조하도록!”

그때 장관이 건네준 쌍안경으로 괴수의 진로를 관찰하던 ‘소년’이 끼여들었다.

“장관님, 괴수가 가는 길목에 사람이!!!”

장관은 쌍안경을 빼앗아 들고 ‘소년’이 가리킨 쪽을 한 번 보고는 경악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이런, 저거야말로 진짜 ‘무모한 행동’이 아닌가!”




“햇살아! 이제 그만해,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마!!! 제발 부탁이야!”

괴수가 넘어진 전신주와 뒤집혀진 리어카를 가볍게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도로 한가운데에, 상처입은 몸을 간신히 이끌고는 눈치채이지 않게 몰래 달려온 선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리하게 움직인 탓인지 붕대로 감은 상처에서 또다시 피가 희미하게 배어나오고 얼굴은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어서 애처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이를 구해야 한다는 열망에 불타는 이 겁없는 소녀는 길바닥에 굴러 다니는 파편들과 뒤엉킨 전선들을 피해서 꿋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나야, 선경이야. 기억 안 나? 우린 둘도 없는 친구였잖아. 비록 일주일밖에 안 되는 시간이라도... 정말 즐겁게 지냈었잖아. 같이 공놀이도 하고, 산책도 하고, 시장에도 같이 가고, 네가 좋아하는 신김치 조림도 해먹고, 같이 목욕도 하고, 또...”

...다른 건 몰라도 목욕까지 같이 했단 말이냐아아아아아 ;;;

“...네가 아무리 이상하게 변했어도, 난 너를 믿어. 네가 모든 걸 다 잊어버렸어도, 난 네가... 정말로 나쁜 괴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직 너의 어딘가에, 내가 아는 그... 귀여운 햇살이가 남아있을 거야. 그렇지... 않니? 응?”

그러나 괴수는 그녀의 눈물어린 애원이 들리지 않는 듯 스파크로 인해 지직거리는 앞발을 하늘높이 들어올려 눈 앞에 버티고 있는 벌레만도 못한 방해꾼을 짓눌러 버리려고 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가득한 앞발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덮쳐오는 것을 느끼고 공포로 온몸이 마비된 선경은 그 자리에 웅크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몇 초가 경과했는데도 자기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한 그녀는 눈을 뜨고는 서서히 일어섰다. 괴수의 앞발은 자기 머리 위에서 3미터쯤 떨어진 허공에서 뭔가에 단단히 붙잡힌 듯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겨우 움직여 주는 다리로 그 자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까지 도망친 뒤에야, 그녀는 누가 자기를 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은빛의 거인 울트라하가 어느 틈엔지 나타나서 괴수의 앞발을 꽉 붙잡고 다른 손으로 목을 쉴새없이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이... 뉴스에서 말하던... 그......”

선경은 미나대원이 걱정스런 얼굴로 달려와서 자기를 부축하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감색 정장의 두 남녀는 무너져내리는 카페를 아슬아슬하게 기어나와 인근 대피소 중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곳으로 피해 있었다. 대피소 안에 비치되어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현장의 상황이 시시각각 중계방송되고 있었다.

“저런 거 본 적 있어요?”

“아뇨. UFO구락부에도 저런 것까지는 안 실려요.”

“재미있군요. 당신이 모르는 초현상이 있었다니. 그것도 눈 앞에 벌어지는 실물인데...”

“아마 일반 언론에서 해외토픽 정도로는 다루겠죠. 그 이상은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우린 뭘 해야 하죠?”

“이제 일은 우리의 소관을 벗어났으니, 그저 구경이나 해야지요 뭐.”

이미 남자의 머릿속에는 자기가 애독하는 초현상 전문지에 이번의 사건을 소재로 한 기고문을 발표하겠다는 구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면에 푹 빠진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길에는 안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나타나 있었다.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그들의 한참 뒤에서는, 지난 금요일에 앙끄시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문제의 여성이 차가운 얼굴로 TV화면을 찬찬히 지켜보고 있었다. 괴수에게 마구 휘둘리는 은색의 거녀[巨女]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인지 쓴웃음인지 구별할 수 없는 희미한 미소가 가볍게 스쳐지나갔다.

물론 그러한 광경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뜻밖의 적이 출현하자 순간적으로 흥분한 괴수는 가려던 길을 멈추고 거인을 향해서 앞발을 들어올리고 반(半)직립자세를 취한 뒤 맹렬하게 돌진해 왔다. (기회 +22 ;;;) 거인은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고는 아까 조였던 목을 다시한번 온힘을 다해서 꽉 조여주었다. 그러나 괴수의 온몸에서 뿜어나오는 전자기장의 스파크 때문에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체력 -25 ;;;) 괴로워하던 거인은 접근전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선 다음 공격자세를 새로 가다듬었고, 빈틈을 발견한 괴수는 뒤로 돌아서서 아까보다 훨씬 길어진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거인의 다리를 세차게 갈겼다. (행운 -65 ;;;) 기습을 받고 균형을 잃은 거인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그 와중에 주변의 건물들 중 5동 가량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주민의 신용도 -40 ;;;)

“저래서는 이길 수 없겠는데요!”

‘소년’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관전평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정말 저래서는 곤란하지, 으음.”

“장관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다니까. 저렇게 격하게 움직여서야 가슴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잖아!”

“......장관님... (-_-;;;)”

이런 사람을 도촬광(盜撮狂)이라고 한다. 우리모두 불조심.


그러나 거인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건물들의 잔해 사이로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다시 괴수의 위치를 파악한 거인은 눈부신 동작으로 3단 공중제비를 돌며 괴수의 머리위로 날아가서 녀석의 뒤통수에 위력적인 니들킥을 날렸다. (성취감 +50 ;;;) 그 공격을 먹고 벌렁 나자빠진 괴수는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거인의 독기어린 두 발 아래 무참하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

거인은 마치 방금 씨앗을 뿌린 농부가 풍년을 기원하듯이 괴수의 전신을 구석구석 질근질근 밟아주었다. (쾌감 +48 ;;;) 그런 다음 괴수를 두 팔로 힘겹게 들어올려 녀석의 두 다리를 허리와 팔 사이에 꽉 끼우고 난무하는 스파크를 참아가며 염원의 필살기술 천상여왕풍차돌리기를 선보였다. (스트레스 해소 +69 ;;;) 보기좋게 내던져진 괴수는 엄청난 파장의 울음소리를 내며 5km 저편에 있는 무역회사 빌딩까지 날아갔다. 괴수의 시시각각 변하는 체중으로 인해 도중에 위치한 건물 일곱 개가 심각한 손상을 입고 두 개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주민의 신용도 -80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수는 거의 힘을 소모하지 않은 것처럼 거뜬하게 일어나서 자기가 날아온 거리만큼 다시 달려와 거인과 대치했다. (행운 -48 ;;;) 다음 순간 괴수는 자기 몸 위에서 번쩍거리는 전자기장의 스파크를 한데 모아, 거인을 향해서 전격(電擊)을 가했고 기력이 크게 소모되어 있었던 거인은 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남김없이 몸으로 받아냈다. (체력 -75 ;;;) 그러나 때맞춰 다크블루의 M모드로 변환한 울트라하는 괴로워하면서도 녀석의 공격을 계속 두들겨맞아 그것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성공, 무너져가던 육체를 되살리고 소진한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다. (근성 +82, 체력 +99 ;;;)

곧이어 눈부신 화염을 배경에 깔고 정열의 S모드로 변환한 울트라하는 장미가시가 돋힌 두 개의 채찍을 한 손마다 모아쥐고 스파이크가 탐스러운 구둣발로 땅바닥을 긁으며 - 즉 도로를 훼손하며 (주민의 신용도 -36 ;;;) - 거친 숨을 몰아쉬는 황소마냥 투지로 뭉친 자세를 내보이면서 괴수를 향해 돌진했다. (열혈․투지․체력 모두 +100 ;;;) 거인의 이리저리 바뀌는 모습에 당황한 괴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울트라하의 쌍채찍에 온몸을 봉쇄당한 채 발버둥을 치며 분노에 찬 절규를 내질렀다. (기회 +27 ;;;) 한 손으로 두 채찍을 노련하게 고정시킨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하늘로 손을 내뻗어 빛의 장막을 펼치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멍석(...)을 뽑아낸 이 정열의 화신은, 전자기장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 멍석같이 생긴 초부도체(超不導體)로 괴수의 온몸을 식당 아줌마가 김밥 말듯이 둘두리둘둘 말아서는 바닥에 풀썩 쓰러뜨린 다음에 이리저리 귀엽게 굴려가면서 스파이크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하이힐로 이리저리 밟고 차고 으깨고 두들기는 쾌감을 맛보는 것이었다! (스트레스 해소 +200 ;;;) 이 희대의 멍석말이(...)가 하도 잔혹하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그 광경을 바라본 거의 모든 사람은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오호호호홋 웃고 있을 거인이 아니라 이리저리 채이며 비명을 올리는 괴수 쪽을 동정할 정도였다.

이러는 가운데, 어느덧 울트라하의 한계시간 중 645초가 지나갔다.




“아앗? 이건 서, 설마......”

“무슨 일인데 그렇게 놀라나, 피요군?”

“큰일입니다. 당장 저 괴수를 어딘가 안전권 밖으로 옮겨놓아야!”

“무슨 일이냐고 물었네.”

“이 화면을 보십시오. 아까 전투 중간부터 저 괴수의 체내 에너지 분포가 급격히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세포구조는 이미 붕괴를 시작한 상태이고요.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앞으로 30초만 지나면 이 에너지의 불균형이 임계점에 도달하여, 대폭발을 일으킬 거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거 큰일인데, 이 근처에는 사막이나 바다처럼 폭발이 일어나도 괜찮은 곳은 하나도 없어! 사방이 내륙이라 도시로 둘러싸여 있고 그렇다고 해서 외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해도 30초 안에는 불가능하다!”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펫츠이글을 정비반에 맡기고 재보급을 기다리고 있던 유성대장이 불쑥 튀어나가더니 불타는 얼굴로 거인을 향해 외쳤다.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도 알 수 없는 확성기를 들고!!!

“어이, 거기 있는 거인 아가씨, 내 말 들리나? 즐기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냐!!! 그 녀석은 앞으로 30초 후면 --- 아니, 28초 후다! --- 대폭발을 일으킨다는 계산이 나왔다. 뭐라도 좋으니 어떻게 좀 해 봐!!! 부탁이다!!!”

말이 통할지 어떨지도 알지 못하면서 힘찬 목소리로 거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유성대장의 발치에는 어디에서 불어오는지도 알 수 없는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분명 그의 얼굴에는 비겁함과 비굴함이 아닌 자신감과 신뢰가 가득 차 있었지만, 과연 그의 부탁이 통할 것인가???

“앞으로 25초입니다!!!”

“아직도 못들었나보군! 아니면... 어차피 이곳은 너의 고향은 아닐 테니까 어떻게 되어도 좋다 이거겠지! 하지만 말이야, 내 말이 들린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우리는 지구인이고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걸! 여기가 볼품도 없고 쓸모도 없는 변두리 행성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기밖에, 여기밖에 없어!!!”

신나게 괴수를 밟는 일에 열중하던 홍염(紅炎)의 거인이 뭔가를 들었는지 살짝 고개를 돌려 유성대장 쪽을 내려다본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괴수 쪽을 다시한번 쳐다보는 그 가면같지만 위엄있는 얼굴에 미묘한 낭패감과 깨달음 같은 것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이미 괴수는 심하게 탈진하여 드러누워 있었고 전신에서는 위험할 정도로 스파크가 증대되어 폭발의 기미가 뚜렷해졌다.

마침내 유성대장은 비장의 한 마디를 외치는 것이었다!

“부탁한다............ 울트라하!!!”

그것은 그녀의 존재에 대한 그의 ‘긍정’이었다.

“앞으로 20초!!!”

거인은 멍석에 말린(...) 괴수를 두 팔로 사뿐히 안아들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구분지을 수 없는 그 장엄하고도 요염한 모습이 창공 저편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작은 폭발이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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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  ENDING  :  NEXT  QUEEN ☆



고귀함과 우아함의 향기에 싸여

세상을 발 아래 굴복시킨 그대

하지만 두 뺨 위의 눈물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당당함과 청순함의 광휘를 펼쳐

자유의 노래를 전하는 그대

하지만 그 입술의 떨림은

무엇을 구하는 걸까요


이겨내요 버텨내요 그대의 시련

아무도 함께할수 없는 시간을

다가가요 마주봐요 그대의 약점

지금이 아니면 할수없는 일들을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말하겠죠 그대의 영광

거짓과 악의가 세상 가득 채워도

사람들은 믿고 있어요

그대의 전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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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央久プロ․NOW․ウルトラハ製作委員會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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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TER ◆





1주일 후, 토요일


“정말 괜찮겠어?”

“그럼, 이젠 나도 어른인걸. 일주일이나 지났으니까 상처도 그렇게 아프지 않구 말야. 그리고 나 때문에 언니 일에 지장이 있으면 미안하잖아.”

“요것아, 그런 걱정 안 해줘도 되니까 네 건강이나 잘 돌봐.”

“알겠어. 어서 가봐.”

한숨을 쉬며 미나대원이 자취방을 나서자마자, 선경은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바보같이,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해. 이러면 안되는데.

그때 바깥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밤중에 누굴까, 라는 의문을 품고 선경은 연립주택의 안뜰로 내려섰다.

다음 순간 즐거운 환성이 집안 가득히 울려퍼졌다.

“햇살아!!!”




동거녀는 슬그머니 근처 골목에 숨어서 연립주택 안을 살피다가 미소지었다.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햇살과 선경의, 서로를 알아보고 기뻐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정말 잘 됐어.

울트라하는 대폭발이 다가온 절망적인 순간에 번개같이 지구 대기권 바깥으로 날아올라 멍석에 말린(...) 괴수를 집어던지고 안전권 밖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구의 한 대륙을 밝힐 만한 폭발의 빛을 바라보면서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는 또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어. 또다시...

그러나, 폭발의 충격파가 지나가고 난 뒤, 우주를 떠도는 잔해들 속에서 신비한 빛깔의 작은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이 그녀의 눈에 언뜻 들어왔다. 그것은 이론상으로는 단순히 괴수의 본체가 소멸되어 갈 곳을 잃어버린 생명핵(生命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죽음을 뛰어넘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소녀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실험체로서가 아닌 ‘햇살이’로서의, 순수한 열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열망을, 울트라하는 알아 주었던 것이다.

삶과 사랑의 열망을...




발도제는 리 엔터프라이즈의 상사대리인으로서 해외출장을 나가기 위해 앙끄시 국제공항에 와 있었다. 그가 지나가려는 길에는 이미 외국인인 듯한 감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가 서 있었다. 그는 정중하게 실례한다고 말하고는 그들 곁을 헤치고 나와서 6번 통로로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완동물을 무기화하려는 계획이라니, 회장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한편 감색 정장의 남녀도 간소하게 챙긴 짐을 집어들고 게이트로 나설 준비를 했다. 아담한 체구의 여자가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 전문지에서 당신의 글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니 참 유감이에요.♥”

“황당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내용이라서 기사로 실어줄 수가 없다니... 그치들은 국제뉴스도 안 보고 사나???”

“앞으로는 좀 현실적인 취미를 갖는 게 어때요?”

“그래요, 그래야겠어요.”

“좋아요. 뭘로 바꿀거죠?”

“지구를 침략하는 거대 괴수들!”

“마쓰모토상... (-_-)”

“왜요, 우리 두 눈으로 직접 봤잖아요. 한 번도 본적 없는 UFO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취미 아닌가요? 안그래요, 미도리상? (^_^)”

의뭉스런 남자의 눈초리를 외면하며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난 포기하겠어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동물이 집으로 아무 탈없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동거녀는 버스를 타고 캐사모스톤으로 돌아온 뒤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기의 자취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벌써 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고, 조그마한 별들도 수줍게 반짝거리는 밤이 찾아와 있었다.

지난 일주일도 너무 바쁘게 지냈어. 이번 주말은 좀 쉬어야지.

토요일에 괴수 한 마리 퇴치하고, 은혜를 베푼답시고 잔해 주워모아 다시 살리고, 아무런 부작용이 없나 일주일 동안 몰래 기르면서 살피고, 직장에서는 또 근무시간에 몰래 빠져나갔다고 야단을 바가지로 맞고... 정말 시험 하나 통과하기 되게 힘드네 우우.


생각에 잠긴 채 자취방까지 다 왔을 무렵, 거녀는 자기 앞길에 어떤 사람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우수어린 젊은 여성이 우아한 포즈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디선가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라하.”

잠시 동안 어리둥절해 있던 거녀는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히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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