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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01] 울트라하 S.O.L. #1
창작의 샘터/울트라하 | 2010. 7. 4. 22:33
 



방금 갓 잡은 생선마냥 신선한 아침이 또다시 밝아온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동거녀는 3월말인데도 여전히 쌀쌀한 아침공기를 불안스럽게 들이키며 현관 밖으로 걸어나와 기지개를 켠다. 활발한 집주인인 천공주씨가 거녀를 보고 인사를 하고 거녀도 거기에 답한다. 천공주씨는 집 앞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집어들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손이 미끄러졌는지 신문을 놓친다. 신문을 줍는 것을 도와주던 거녀의 눈에 어떤 기사 하나가 들어온다.

--- <위고슬라비아 지역, 계속되는 대립의 참상>.

카메라의 시선은 거녀의 자취방을 떠나 하늘로, 우주로, 그리고 다시 지구의 다른 지역으로 내려온다. 전화(戰火)가 소용돌이치는 지구 반대편으로.



울트라하 외전 「SISTERS OF LIGHT」

제 1장 이스펄Espearl



“제3반! 중상자 4명 후송입니다! 서둘러 주세요!”

“마취 준비를!”

“맥박이 떨어지고 있어요! 혈압도 비정상!”

“붕대 더 가져와! 혈액 봉지는 B형으로!”

이미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지려 하는 시각.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사방을 뛰어다니며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현장이 있다. 그것도 사방이 탄환 자국과 폭발운(爆發雲)으로 얼룩진 전장 한가운데에서.

“P선생, 이쪽입니다! 복합골절에다 총상도 다섯 군데나 돼요!”

적십자 깃발이 펄럭이는 간이 텐트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 가운데 이채(異彩)를 띠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부드럽고 길다란 푸른 머리를 뒤로 돌려묶고 핏자국과 점액질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흰 가운을 걸친 젊은 여성이 수술도구를 챙겨들고 자신을 부르는 쪽으로 달려왔다. 동료들은 모두 그녀를 P라고만 불렀다. 그녀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의학계 명사의 추천으로 적십자 의료진에 합류하여, 이 거친 전장 한가운데까지 왔다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확한 일처리와 꼼꼼한 솜씨, 그리고 헌신적인 태도는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는 터였다. 지원하려는 사람이 도무지 없는 이 바닥에서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 아이는...?”

실려온 부상자는 아직 7세가 될까말까한 갈색 머리의 소년이었다.

“코소비치 변경에서... 가족들과 마을을 탈출하다가 전투에 말려들었어요.”

“거긴 바르바니아 게릴라들의 거점 중 하나일텐데...”

“그래서 스레비아 정부군이 줄창 두들겨대고 있죠. 우습게도 이 아이 국적은 스레비아인데도 이꼴이 되었다는 거예요. 엉망진창이죠.”

“알았어. 시작하자. 헤더는 시트를 새걸로 갈아주고, 아메드는 더운물을 데워줘요. 바로 수술에 들어갑니다!”

P는 섬세한 손길로 마취를 완료한 뒤 환부(患部)를 치료하기 시작한다.

바깥에서는 멀리 총성과 포성이 댄스라도 추듯이 번갈아 들려오고 있다. 끝없이 계속되는 죽음의 돌림노래처럼.


“이런 사람을 못 봤냐구요? 글쎄요. 이곳에는 환자만 해도 여럿이고 모두들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거나 마찬가지라서요... 기억은 잘 나지 않는군요.”

“혹시 기억이 나시면 알려주십시오.”

“그런데 뭘 하는 사람이길래?”

“그건 좀 민감한 문제라서... 그럼 이만.”

검은 코트 차림의 그 키큰 남자는 책임자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그 텐트 밖으로 나섰다. 옆에서 진료 일지를 정리하면서 그들의 대담을 흥미있게 지켜본 조수가 책임자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잘은 모르지만... W.A.T.C.H.에서 왔다는군.”

“그 국제 테러 방지 조직의?”

“어떻게 잘 아네.”

“사촌이 정보기관 매니아거든요. 어쩐지 음산하게 걷더라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실례되는 소리야.”

“뭐 어때요. 듣는 것도 아닌데.”

이런 얘기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음산하게 걸어가던 그 사내가 갑자기 어느 텐트 앞에서 멈춰섰다. 펼쳐진 장막 안쪽에서 희미한 전등빛과 함께 수술에 여념이 없는 어떤 의사의 모습이 비쳐온다. 코트의 사내는 그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전에 만났던 누군가가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닮은 점이라고는 없는데도, 분위기가 어딘가...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찾고 있던 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4시간만에 P는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독한 부상이었지만 다행히도 소년의 몸이 워낙 튼튼해서 회복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미 잠든 소년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P는 땀으로 더러워진 수술모와 마스크를 벗고 피로 물든 장갑을 얼마 남지 않은 소독액에 정성들여 씻었다. 뒷처리를 끝내고 텐트 한쪽 구석에 놓인 접는의자에 걸터앉은 P는 목에 걸려있는 펜단트를 꺼내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펜단트 또한 아름다운 밝은 푸른색으로, 한가운데에 불타는 태양을 연상시키는 붉은 수정이 조그맣게 박혀 있었다. 한순간 그 붉은 돌 표면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P의 뇌리에도 지난날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아무리 수행을 위해서라도, 나는 생명을 해칠 수는 없어요, 힐더.“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면 어쩔 거지, 이스펄?’

‘그건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내 재능은 치료하는 데 있지, 파괴하는 데 있는 건 아니니까요.’

‘은하는 넓어. 파괴하기 위한 싸움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하지만 왜 하필 그 <지구>라는 별이어야만 하나요? 나는...’

그러나,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듯한 큰 진동이 텐트를 덮쳐오는 바람에 그녀의 회상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끝났다. P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황을 보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간다.

“대치중이라더니... 또 시작한 거야? 폭약?”

“그것과는 좀 달라요.”

자원봉사대의 헤더 그린스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P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째서 전쟁터 한복판에 저런 괴수가?


‘너무 방심했어. 그렇게 몰아붙이면 다 끝날줄 알았는데... 크읏!’

반쯤 말라비틀어진 홍시같은 과립이 우둘두둘 뭉쳐진 형태를 하고 있는 기괴한 형태의 거대한 생물이 나무뿌리같은 촉수를 휘두르며 육박해 왔다.

인스펙터 윈드는 공격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구르며 총을 난사하지만 그 생물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어떠한 적을 만날지 몰라서 가져온 대전차용의 강화압축탄환인데도 불구하고 긁힌 상처 하나 내지 못한다.

‘운이 없으려니까 전쟁터에서 전쟁과는 별로 상관없는 물건한테 죽게 되나...’

윈드는 탄환을 갈아끼우며 옆에 보이는 무너진 벽돌벽 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까 탄환을 쏠 때 걸린 압력으로 인해 오른팔이 아직도 시큰거린다.

그는 모종의 거래를 통해 게릴라에게 신종 생물병기를 넘기려 하는 커넥션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조직원을 쫓아서 이 적십자 캠프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추적에 걸려들어 궁지에 몰린 조직원은 자살하기 위해 그 생물병기가 들어있는 앰플을 자신의 몸에 주사해버렸고, 그 부작용으로 괴수화된 조직원의 공격 때문에 이번에는 윈드가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었다.

윈드는 사정없이 날아오는 촉수를 펄쩍 뛰어넘으며 다시 총을 발사했다. 과립 덩어리가 주변의 망가진 기계나 가옥들을 흩뿌리며 바람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유령촌이 되어버린 버려진 마을 안에 임시로 세워진 적십자 캠프는 이런 종류의 공격에는 취약했다. 이 캠프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양군(兩軍)은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겠지만 이 인조 괴수에게는 그런 걸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P선생님! 어디로 가시려고...?”

“아메드, 헤더와 함께 아직 움직일 수 있는 환자들을 옮겨줘. 팀과 케이코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앰뷸런스로! 라인스터 선생은 다른 팀에게도 연락을 취해 주세요! 저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저쪽으로 가보겠어요!”

“너무 위험합니다! 그런 거라면 저희들이...”

“괜찮아 케이코, 나도 내 목숨을 아끼니까 걱정마!”

말릴 새도 없이 백의의 P는 괴수가 난동을 부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뭐지? 저 푸른 빛....”

윈드는 갑자기 환하게 비쳐온 푸른 광채에 눈이 부신지 한쪽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괴수가 날뛰는 것을 눈치챈 양군이 서로의 병기로 오해하여 발포라도 시작한다면 난처한데!

그러나 손을 치우고 실눈을 뜬 채 그쪽을 바라본 윈드는 또 한번 놀랐다.

“......빛의... 거인?! 전에도 본 적이...!”

코발트블루의 바탕 위에 아름다운 빛의 무늬가 교차하는 거대한 존재. 그것은 일찌기 앙끄시에 나타났던 울트라하와도 닮은 또 다른 거인이었다. 윈드가 그녀를 보고 놀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두컴컴한 밤의 공기 속에서 거인의 두 눈과 가슴의 붉은 수정만이 형형(熒熒)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인은 절도있게 전투 자세를 가다듬고는, 과립괴수에게 달려들어 윈드를 내리치려 하는 촉수를 절단하고, 다시 하늘로 뛰어올라 괴수의 머리부분에 강렬한 킥을 날렸다. 괴수는 더더욱 허탈하게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뱉으며 촉수를 위쪽으로 뻗어올려 거인의 발목을 잡고 땅으로 내동댕이치려 한다. 그러나 거인은 재빨리 몸을 틀어 촉수를 끊어버리고는 땅에 내려서서 자세를 바로잡는다. 다급해진 괴수는 몸의 과립들을 한꺼번에 터뜨려 독액을 뿜어내고, 거인은 뒤로 물러서더니 손에서 북극해만큼이나 차갑고 사감선생만큼이나 용서없는 냉기(冷氣)를 뿜어내어 독액은 물론이고 괴수의 본체까지 모조리 얼려 버리는 것이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제법인걸!”

“힘내라! 환자들을 지켜줘!!!”

윈드는 대피를 서두르면서도 응원의 말을 잊지 않는 캠프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시감(旣視感)에 빠져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푸른 거인이 자기가 앙끄시에서 만났던 그녀와는 별개의 거인임을 깨닫는 것이었다.

‘...빛의 거인은 하나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도대체...’

가슴의 붉은 수정이 경고음을 내며 점멸한다. 푸른 거인은 퓨마처럼 솟구쳐올라 괴수를 단번에 어깨 위로 들어올리고는 하늘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두 손을 우아하게 휘저으며 에너지를 모으고는, 금빛으로 물든 팔을 L자형으로 교차시켜 반양자(反陽子)광선을 발사, 괴수를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윈드씨, 혹시 찾는다던 게 저것과 관련된 것이었습니까?”

책임자인 치엔 지앙 여사가 다가와서 은근히 질책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윈드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저걸 팔아 넘기려 했던 녀석을 찾는 것이었죠.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만.”

“그렇긴 해도 다행이네요. 이번에도 때맞춰 나타나 줘서.”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현대전술의 하나로 생물전이 채택된 뒤로 괴수를 병기화하려는 세력들은 어디에나 있어 왔어요. 덕분에 우리 캠프는 세계 곳곳에서 엄한 꼴을 당해 왔죠. 저 <동방의 진주>는 우리들의 수호신이랄까요...”

“동방의...?”

“이 늙은이가 멋대로 붙인 이름이지만, 잘 어울리잖아요?”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에, 푸른 거인은 다시 무수한 빛의 입자로 변하여 사라졌다. 흩어진 빛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언덕 위에 모여들어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바로 P였다. 그녀는 일시에 기운을 다 써버린 듯 피곤한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기가 지켜낸 환자들과 동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호흡을 진정시키느라 가슴에 손을 갖다댄 P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파괴를 위한 싸움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결국......”

별 생각없이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자신도 놀란 듯 말을 잠시 멈춘 P는 서서히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더러워진 옷을 털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힐더, 어쩌면 이 별이 좋아질지도 모르겠어요. 나......”

SM78성운에서 온, 치유(治癒)의 여왕 후보, 이스펄․라네스티․엘․산티아는, 그렇게 말하며 캠프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후, 캠프는 또 다른 전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피난민들과 작별했다.

P는 자기가 고쳐준 소년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완쾌되는 것까지 보지 못하고 가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제부터 가는 곳에서도 새로운 환자들과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는 것이다.

윈드 역시 치엔과 작별하고 있었다.

“담당 구역인 아메리고 대륙으로 돌아갑니다.”

“당신네 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겠군요. 휴가도 없다니.”

“알아서 조금씩 즐겨야죠 뭐.”

“우리는 파프리카로 갈 예정이죠. 호말리아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대요.”

“또 뵐 날이 온다면, 그때까지 무사하시기를...”

“당신 걱정이나 해요.(^^)”

윈드는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서 연락용 적십자 헬리콥터가 기다리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도중에 누군가 익숙한 느낌의 사람과 스쳐지나가던 순간,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P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밝은 얼굴로 약상자를 운반하고 있었다.



Chapter 1.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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