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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02] 짜릿한 복수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37
 



<< 짜릿한 복수 >>

The Sweet Vengeance







“---이런 썩어빠진 호랑말코같은! 아이구 머리야, 여기가 대체 어디지?”

“다행이야, 부장님이 눈을 떴어.”

“십년 감수했네! 부장님, 저희들이 보이세요? 부장님! 여보세요-?”

반쯤 벗겨지기 시작한 흰머리와 불룩 나온 헛배가 특징인 알레그리시모 네트워크사[社]의 총무부장 댄 싱글턴은 전신을 엄습하는 통증을 참으면서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치켜 떴다. 즐겨 쓰던 뿔테안경이 마침 없어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가 누워있는 곳이 어느 산골 통나무집 안의 허름한 간이침대 위라는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벽난로가 조용히 불꽃을 피워올리고 침대 곁 테이블에는 손도 안 댄 채 식어빠진 야채수프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목소리를 보아하니 옆에 있는 사람은...

“...산티아고? 그리고 파스빈터도 있나? 그밖에 다른 사람들은?”

멋드러진 금발에 호수같이 파란 눈으로 인기깨나 끌게 생긴 로렌스 파스빈터가 부장의 머리에 놓여있는 물수건을 갈아주며 대답했다.

“전혀 연락이 안 됩니다. 아무래도 우리 셋만 조난당한 것 같습니다.”

“조오난?!”

그제서야 싱글턴의 잘 안 돌아가는 먼지쌓인 두뇌가 활동을 개시하여, 자기들이 사내[社內] 연례행사로 되어있는 단체 등반 도중에 다른 이들과 떨어져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싱글턴 자신이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미끄러진 것을 기억해 냈다. 아직도 전신이 욱신거리고 특히 오른다리와 왼팔의 감각이 없었다. 그는 끄응 힘을 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조난이라? 그거 놀랠 노자군! 아니 그래 이렇게 될때까지 자네들은 뭣들을 하고 있었나? 내가 애초에 반대했는데도 결국 자네들이 부추겨서 이렇게 눈내리는 날에 등반을 감행하더니 꼴 좋게...아니 이 부분은 취소하지. 하여튼 나는 파스빈터 자네가 왕년에 마터호른도 K2도 문제없이 올랐다고 하길래 그것만 믿고 허락한 건데! 어떻게 책임질 셈인...”

평소에도 독설과 불호령으로 정평이 나 있었던 싱글턴의 입담은 자신이 부상을 입은 상황인데도 전혀 수그러들줄 몰랐다. 기껏 구해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이거냐 싶은 표정으로 파스빈터도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부장님. 제가 등반을 한건 근 10년 전 얘기라고요. 게다가 반대라니요? 올해는 이상기온 때문에 곤란하다는 사장님을 필사적으로 설득해서 이번 등반을 실현시키신 건 전적으로 부장님의 판단이었습니다!”

“그건 자네들의 술수에 말려들었다고 해두지. 하여튼 각오해야 할거야!”

은은한 흑진주색 피부와 흐드러지는 검은 머리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카르멘 산티아고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를 반복하는 것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식어버린 수프 그릇을 비우고 새 수프를 갈아넣다가 갑자기 열이 올라 버럭 외쳤다.

“그런 얘기는 그만하세요! 일단은 이 눈속을 빠져나가서 산을 내려간 뒤에나 책임을 따져야 할 거 아닌가요? 부장님은 지금 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러고보니 머리가 저릿저릿하긴 해. 일단은 말하는 대로 해야겠군. 수프나 빨리 줘. 그나저나 파스빈터, 연락이 전혀 안된단 말인가?”

“휴대전화는 통화권 밖이고, 눈으로 길이 완전 봉쇄되었어요. 이 산장에 설치된 전화기도 낡아서 말을 안 듣습니다. 장작도 별로 안 남아서 봉화를 피울 수도 없고 말이죠.”

“어떻게든 빠른 시간 내에 방법을 찾아내. 무엇 때문에 회사가 자네들에게 봉급을 준다고 생각하나?”

“걱정마십쇼, 부장님의 그 수다스런 입만은 무사히 내려가게 해드릴테니까요!”

“뭐가 어쩌고 어째? 잘리고 싶어?”

파스빈터는 조각상같은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버릇없는 애새끼 같으니라고. 제놈이 기저귀차고 『크런치 스카웃』같은 만화딱지나 보고 있을 때 나는 5대양 6대주를 돌아다니며 비즈니스가 뭔지 배웠다고! 도무지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옆에서 짐을 정리하던 카르멘이 조용히 말했다.

“다들 극한상황이라 지쳐있어요. 좀 진정하시고 나을 궁리나 하세요.”

“...미안, 그래도 자넨 의지가 되니 다행이야. 그나저나 거기 수프가 참 맛있어 보이는데 이거 허리가 쑤셔서 일어날수가 없군. 좀 일으켜 주겠어?”

그러나 카르멘은 고개를 숙인 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카르멘? 산티아고양? 산티아고 대리?”

그녀의 웃음소리는 더욱 높아져서 통나무집을 울릴 정도로 퍼져나갔다.

“왜그래? 내가 뭔가 웃기는 얘기라도 했나?”

키득거리던 그녀는 등 뒤에서 쇠가 땅바닥에 끌리는 듯한 거친 소리와 함께 뭔가를 끄집어냈다. 푸줏간에서 고기 자르는 데나 쓸 만한 커다란 칼이었다.

“...여봐, 농담은 그만두라구! 내가 이런 꼴이라고 해서 곯려줄 생각이라면..”

그녀는 마치 사람이 180도 달라진 듯 이리저리 풀어헤친 머리를 귀신처럼 휘날리며 쫙 째진 눈빛으로 자기의 상관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아니었다.

“---더이상 당신 비위 맞춰주는것도 이젠 질렸어-- 거지같은 호색한 영감!”

“그만두------!!!”

싱글턴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기의 목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느꼈다.

터치다운!





잠시 1주일 전으로 돌아가보자!

“이것도 일이라고 해온 건가? 내가 언제 이런 식으로 계획을 짜라고 했나?”

싱글턴은 깐깐하게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언제나와 같은 트집을 잡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지난번과 같은 서식으로 해도 괜찮다고...”

상대는 델리 카슨이라는 작고 통통한 체구에 특징없는 갈색머리를 한 여사원이었다. 가뜩이나 센스가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외모와 비맞은 어린양같은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같은 사원 제복을 입었어도 백 배는 더 초라해 보였다. 카슨의 두껍고 둥그런 안경 너머에서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며 싱글턴은 더더욱 짜증을 부렸다.

“요령이 없군. 그건 이 항목에서 저 항목까지만이라고 했을텐데? 프리젠테이션을 위해서는 좀더 상세한 계산과 통계자료를 첨부해야 한다고 했지 않나!”

“그래서 이렇게 알기 쉬운 형식으로 첨부했습니다만...”

“이런 알록달록한 장난감 그래프로 뭘 하라는 얘긴가? 우린 세계를 상대하는 대기업이야. 보다 격조있고 품위가 넘치게 디자인을 해야지!”

점점 트집의 내용이 샛길로 빠진다고 느낀 카슨은 항변에 나선다.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틀림이 없습...”

“관두게 관둬. 역시 자네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어. 인물이 곱지를 못하면 성격이 좋거나 일이라도 잘 해야지. 그런다고 커피를 맛있게 끓일 줄을 아나, 술자리 분위기를 잘 띄우나- 대체 뭐하러 회사 들어왔나? 내가 자네 같았으면 벌써 짐 싸서 어디 푸줏간 일이나 알아보러 다녔을 걸세! 이건 그만 놔두고 나가보라고. 마무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테니까.”

푸줏간이라는 말에 카슨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델라웨어 메릴랜드 카슨이라는 버젓한 이름이 있음에도, 주변 사람들은 애칭인 델리와 성씨인 카슨을 결합하여 그녀에게 ‘델리카트슨’(푸줏간)이라는 경멸어린 별명을 붙여주었다.

오죽하면 아침마다 그녀를 보고 하는 인사가 이런 것이겠는가.

“오호 이런, 어느 <델리카트슨>에서 오셨나?”

자기의 시종일관 우울한 얼굴과 펑퍼짐한 몸매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그녀 본인도 알고 있었지만, 제발 그런 식으로 모욕을 주는 것만은 삼가줬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뭔가? 아직도 할말이 있나? 그런 식으로 사람을 쳐다보는건 어디서 배웠어?”

“...아닙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속으로는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이 거지같은 호색한 영감아!’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꾸욱 억누르고 카슨은 부장의 사무실을 나왔다. 흥, 이번에도 내 작업을 몽땅 가로채어 그 누군가의 실적만 높여주려는 속셈이시겠지. 싱글턴과 총무부의 어느 사원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은 이미 사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본인들이 워낙 철두철미한데다 싱글턴의 입김도 있고 해서 그다지 표면화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진짜로 심혈을 기울인 노력의 산물인데 그걸 이대로 꿀꺽해가다니 양심도 없지! 카슨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뭐, 점심시간에는 파스빈터 씨와 데이트가 있으니,

좀 기분이 나아질지도?





“오 신이시여.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겁니까? 여긴 어디람?”

온통 찢어진 옷과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를 추스리며 몰아치는 파도 사이로 겨우겨우 일어선 로렌스 파스빈터는 황망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폭풍이 몰아치고 비바람이 휘날리는 어느 바닷가에 쓸려내려온 것이다!

“어이! 무사했군! 파스빈터 자네 맞지?”

철벅거리며 저편에서 낯익은 두 사람이 뛰어온다. 싱글턴과... 산티아고.

“부장님? 카르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는 분명히... 회사 창립 기념 크루즈 여행에 나서서...”

“갑작스런 폭풍을 만나 배가 두동강났어요. 우리 셋만 간신히 이 섬에 떠내려온 것 같아요. 사방을 찾아봤지만 다른 사람은 안 보이고, 날씨도 이 모양이라”

“산티아고의 말대로일세. 나원참 그러게 내가 위험한 바다유람은 그만두고 산에나 가자고 했더니 사장님이 말을 안 들어서...”

“에? 선상에서의 바베큐도 나쁘지 않다고 하신 건 부장님이잖아요!”

파스빈터는 이런 상황에서도 책임을 회피하는 싱글턴의 독선이 마땅찮았다.

“지금 그게 문젠가?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더 힘을 합쳐서 위기를 타개할 생각을 해야지, 그래, 상사를 흠집내서 기분좋은가? 하여튼 떠내려오는 물건들이라도 건져서 말리는 것부터 시작하세. 산티아고 양은 숲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나 땔감을 찾아봐 줬으면 하는데...”

“그러죠. 근데 비가 이렇게 오는데 장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정 안되면 서로의 체온으로라도....”

“부장님, 회사 안이었다면 스캔들 감입니다!”

부장의 짓궂은 키득거림에 눈을 흘기며 카르멘은 숲으로 사라졌다.

로렌스 파스빈터는 다시 무릎 깊이의 바닷물에 들어가 둥둥 떠다니는 표류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날씨로군요. 빨리 비가 그쳐야 뭔가 제대로 할텐데 말이죠. 일단 저쪽에 흘러내려오는 구명대라도 건질까요?”

“아니, 그전에 할일이 있네.”

그게 뭐냐고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파스빈터는 자기의 상체가 거역할 수 없는 강한 완력에 의해 물 속으로 밀려넣어지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싱글턴이 자기의 얼굴을 물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부글 부글 부글 부그르르르륵?! 꾸륵 꾸륵?!’

아직 귀는 물에 잠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말소리가 아프리만치 선명하게 들려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인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난 예전부터 네놈이 싫었어. 이 얼굴만 반반한 지골로 새끼야!”

파스빈터는 저항하려 했지만 그의 의식은 이미 통제를 벗어나 저 깊고 깊은 해저 2만리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밑바닥은 아직 멀었는가? 바닥은?

터치다운!





잠시 1주일 전으로 돌아가보자!

“뭔지 맞혀봐요.”

변함없이 예의바르고 나긋나긋한 로렌스 파스빈터는 작고 예쁜 상자를 보여주며 옆의 돌난간 위에 앉아있는 델리 카슨에게 속삭였다. 그들은 점심시간을 틈타 회사 옥상에 꾸며져 있는 휴식공간에 올라와 있었다. 붐빌만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없어서 주위는 조용했다. 그러나 카슨은 누군가가 일부러 사람들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출입문 곁에 ‘내부수리중’ 표지를 붙여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글쎄요, 뭘까? 짐작도 할 수 없을만큼 멋진 것이었으면!”

로렌스는 웃음을 참아가며 상자를 열어서 보여주려는 듯한 모션을 취하다가 잽싸게 손을 거두어들이고, 기대에 차서 바라보고 있던 델리는 숨을 삼키더니 매우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보여주기 전에 한가지 조건이 있죠.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

어리둥절한 델리의 안경을 젠틀한 동작으로 살짝 벗기더니 그가 속삭였다.

“눈을 감아요.”

분위기에 말려든 델리는 주저없이 시키는 대로 하고 기대 반 불안 반의 야릇한 심리에 잠겨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1초... 2초... 3초...

그러나 5분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이상하게 여긴 그녀가 눈을 떠 보니 로렌스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있었다.

가뜩이나 근시가 심해서 주변의 사물이 유령처럼 흐릿하게만 보이는 판에 안경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를 뜻한다. 물론 평소에 잘 다니던 길이라면 어떻게 더듬더듬 찾아가겠지만, 뜻밖의 전개에 당황한 델리는 침착을 잃고 사방을 헤매기 시작했다.

“로렌스? 파스빈터 씨? 어디 있죠? ...거기 아무도 없어요?”

그렇게 휴식공간을 장님처럼 빙빙 돌던 델리가 중앙 분수대에 다가갔을 때,

“꼼짝마, 해적이다!”

놀라서 뒤돌아보려는 순간 카슨은 자기의 상체가 거역할 수 없는 완력에 의해서 물 속으로 밀려넣어지는 것을 느끼고 더더욱 당황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로렌스가 튀어나와서 자기의 얼굴을 분수대의 물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부글 부글 부글 부그르르르륵?! 꾸륵 꾸륵?!’

그는 그 짓거리를 1분 쉬고 다시 반복하고 1분 쉬고 또 다시 반복했다.

어디선가 다른 사원들의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함이 당혹감으로 바뀌고 당혹감이 분노로 바뀌고 분노가 살의[殺意]로 바뀌는 것을 델리는 놀랄 만큼 냉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물론 심장은 아직도 쿵쾅쿵쾅 뛰고, 폐는 공기가 모자란다고 아우성이었지만.

나중에 안경을 돌려주며 파스빈터는 단지 장난이었다고 말했다. 안경을 벗기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중요한 전화가 걸려와서 잠시 아래로 내려갔었는데, 돌아와보니 델리가 헤매고 있길래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래 본 거란다.

“스릴있잖아요? 날씨도 더워지는데 시원하기도 하고. 유머를 모르시는구만.”

하지만 그는 델리가 흡연실 근처를 지나다가 그와 다른 남자직원들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진짜 프로포즈할 생각이었어, 렌스?”

“미쳤냐?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무다리와!”

“하여튼 자네가 이겼어. 진짜로 그렇게 순진할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야.”

“자네들 모두 내게 빚진거 잊지마. 내깃돈은 꼭 챙길거라구.”

델리는 안으로 쳐들어가서 ‘그래 처음부터 다 짜고 벌인 짓거리였다 이거지! 날 뭘로 보고 그런 짓을 했냐 이 얼굴만 반반한 지골로 새끼야!’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조용히 분노를 삭이며 반쯤 열려 있던 흡연실 문을 살그머니 닫고 그 자리를 떠났다.

퇴근 후에 카르멘에게 한잔 쏘면서 털어놓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이게 뭐람. 너무나도 비[非]낭만적인 경험이야. 손톱이 다 부러졌잖아!”

가슴이 깊게 파인 섹시한 자주빛 드레스를 입고 목에는 총천연색 스카프를 매고 머리를 한껏 틀어올린 사내 패션의 여왕 카르멘 산티아고는 불시에 찾아온 현기증으로 인해 파티장 한가운데에서 쓰러진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몇 분간 정신까지 잃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걱정스레 주위로 몰려들어 흥은 이미 깨진 뒤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연미복 차림의 싱글턴도 근심스런 얼굴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오 이런 맙소사, 산티아고양, 괜찮겠어? 의사를 불러줄까?”

“---찮아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바람 좀 쐬고 나면--- 아 어지러워.”

“공기가 탁해서일지도 모르죠. 발코니로 제가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예쁜 여자한테는 특히나 친절한 (가끔은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친절한) 로렌스 파스빈터가 그녀를 부축하여 발코니로 나갔다. 걱정하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자리로 돌아가고 밴드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파티는 계속되어야 한다.

“고마워요. 이젠 좀 기분이 나아진 것 같네요. 대체 무슨 일이람?”

“그래도 회사였으니 망정이지, 산이나 바다였으면 어쩔 뻔 했어요?”

“맞는 말이에요. 사내 창립 기념행사를 파티로 돌린 건 탁월했어요.”

“대신에 저 영감탱이 콧대가 피노키오만큼 높아졌지만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불쌍한 당나귀들이고요.”

별로 웃기지도 않는 동화 얘기를 해가면서 쓴웃음을 띠는 두 사람이었다.

파란 고급 양복에 고급 드레스셔츠와 물결무늬 나비넥타이를 맨 로렌스는 제법 근사해 보였다. 본판이 워낙 근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특별한 분위기에서 보고 있자니 더욱 더 보석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사귀는 그 늙다리가 슬슬 재미가 떨어지면 이 말[馬]에 한번 걸어볼까나... 그래, 그것도...

“---저게 뭐죠?”

얘기를 듣지 않고 딴생각 중이었던 카르멘은 뭔가 싶어서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려고 몸을 발코니의 난간 위로 쭉 뻗었다. 그때 뒤에서 뻗어온 손이 그녀의 스카프를 잡고 엄청난 힘으로 졸라매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서 눈이 휘둥그래진 카르멘은 저항하려 했으나 목은 더욱 더 죄어들기만 했다. 호흡은 괴로워지고 눈은 튀어나올 지경이 되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로렌스 파스빈터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단단하게 조르면서 남은 한 손으로는 사진 한장을 들이밀고 마치 사람이 변한 것처럼 표독스런 말투로 이야기했다. 사진을 본 카르멘의 동공[瞳孔]이 더욱 크게 확대되었다. 거기에 찍혀있는 두 남녀는...

“그래, 천년만년 멍청한 사내들이나 뜯어먹고 편하게 사시겠다 이거지? 창녀같은 년! 아니지, 넌 창녀만도 못해- 그들과 너같은 앨 비교하는 건 수천년을 이어져 온 유서깊은 직종에 대한 모독이겠지. 아하, 그런 눈으로 볼 건 없어. 이제 곧 편하게 해줄 테니까. 응!”

“으읍- 죄발 샬려- 읍- 무후웁-”

그러나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카르멘 산티아고는 발코니 바깥으로 던져져 무한한 허공을 지나서 차가운 바닥을 향해 맹렬히 자유낙하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진로에는 나뭇가지나 천막 같은 방해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영원과 같은 시간이 지난 뒤에, 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치다운!





잠시 1주일 전으로 돌아가보자!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다 잊어버리고 팍팍 마시자구. 세상 사는게 다 그렇잖아. 일일이 그런거 갖고 싸우자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거야, 그렇구말구.”

짐짓 위로하는 투로 잼보니를 한잔 따라주며 카르멘 산티아고가 말했다. 그들은 어두침침하지만 눅눅한 분위기가 착착 감겨드는 재즈까페 「리날도」에서 솜사탕같은 음악에 잠긴 채 대작을 하는 중이다.

“그래도 넌 나만큼 힘들진 않겠지. 미인에다, 몸매 좋지, 성격도 좋지, 말도 잘하고...”

“얘가 별 소릴 다하네. 난 오히려 네가 부럽다. 머리도 좋고 일도 열심이잖아. 게다가.”

“게다가?”

약간은 기대하고 있던 델리에게 돌아온 대답은 꽤나 가혹한 것이었다.

“넌 남자때문에 골치아플 일은 절~대로 없을 거 아냐. 평범구리구리하게 생겼고, 눈에 잘 뜨이지도 않고, 집으로 전화가 귀찮게 걸려오지도 않을테니까.”

카르멘은 장난스럽게 델리의 목에 감긴 머플러를 잡아당겼는데, 가끔 지나치게 힘을 줘서 진짜로 목이 아플 때도 있었다. 그러나 델리로서는 카르멘만큼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도 달리 없었기에, 싫은 소리는 하지 못했다.

“--으응, 그래.... 그렇지.”

카슨은 쓴 술잔을 기울이며 웃어 보이려고 애썼지만, 속으로는 폭포수같은 눈물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얘가 지금 위로하는거야 자기 자랑을 하는거야?

“하여튼 힘내라구. 그 개도 안물어갈 말뼈다귀같은 싱글턴이야 언젠간 무덤에서 들쥐밥이 될 신세고, 기생 오래비 파스빈터는 그 반반한 얼굴만 믿다가 큰코다칠 상이라니까! 그전에 내가 그 인간들한테 어떤 말을 들었냐 하면 글쎄...”

“그 얘기는 그만하자. 그나저나 저번에 말했던 그...”

“아, 잠깐만. 네, 여보세요?”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델리의 말을 끊는 산티아고. 근데 전화기에서 새어나오는 상대방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많이 들은 듯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카르멘 산티아고는 눈에 띄게 밝은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끊더니,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먼저 가 봐야겠다고 이야기한다. 델리 카슨은 우물에 빠진 사다코같은 심정으로 ‘좀더 있어주면 안돼?’라고 묻지만...

“진짜 미안하게 됐어. 아버지가 위독하시대잖니. 안가면 나 찍힌다구. 그럼 다음에 봐. 놀림당했다고 비관해서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거나 하지는 말구.”

자기가 먹은 건 당연히 델리가 내주려니 하는 태도로 황급히 빠져나가는 산티아고. 그녀의 뒷모습을 뭔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델리의 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들어왔다.

급히 나가면서 핸드백에서 떨어졌나? 내일 만나면 돌려줘야...

‘----------------------------!!!’

델리 카슨의 표정이 무관심에서 놀람으로, 놀람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소리없는 증오로 바뀌어 갔다. 사진 속에는 너무나도 정다운 표정의 카르멘과... 싱글턴이 찍혀 있었다. 내가 5년동안 저 영감을 봐왔지만 저렇게 입이 귀에 닿을 정도로 웃는 얼굴은 한번도 못봤는데!

‘...그럼 설마, 내 일을 맡기겠다는 <그 누군가>가......?’

사진을 곱게 파일에 집어넣고 지퍼를 닫은 델리 카슨은 독한 잼보니를 순식간에 여름날 냉수마시듯 들이키고는 또 한잔을 따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까페 한구석의 주크박스에서는 코넬리아 콘웨이의 「Don't Trust Your Friend」가 구성지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델리 카슨은 안경알을 번득이며 어떤 생각을 서서히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창녀같은 년! 아니지, 넌 창녀만도 못해- 그들과 너같은 애를 비교하는 건......’

그녀는 다이어리와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계속 저 상태로 있는 겁니까?”

사이좋게 공중에 매달려 있는 세 개의 듀랄루민 캡슐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그런 거죠. 일종의 냉동수면 비슷한 겁니다. 다만 그 사고 당시 신체조직이 상당부분 훼손되어서 지금 현재로서는 뇌조직과 극히 최소한의 생명중추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저기에 연결된 시스템으로 커버하고 있어요. 빨리 기계 몸이라도 만들어주지 않으면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죽어갈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대답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안그런가요?”

“-계속 저대로 두면서 루프Loop 상태로 맞춰두라는 주문이었죠? 그렇다고는 해도 끊임없이 같은 꿈을 꾸게 프로그램을 해두는건 좀 잔인하지 않나요? 죽을 때 죽더라도 다양한 자극을 맛보는 편이 더 편할 텐데요.”

“이유는 묻지 마세요. 돈은 이미 지불했으니까.”

“-알겠습니다. 프로그램의 내용도 손님께서 지정해둔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코딩만 짤 뿐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니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겁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또...”

상대는 눈을 찡긋해 보이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장사꾼은 어디나 똑같다.

“비밀만 지켜주시면 다른 서비스도 소개해 드리죠.”

그녀는 직원과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사소한 서류에 사인하고, 시체보관실 비슷한 분위기의 을씨년스런 캡슐 챔버를 빠져나오면서 한기[寒氣]를 느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때맞춰 그 세 명이 탄 프로펠러기가 사고를 낸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뒤의 모든 과정은 극히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장례 등의 모든 절차가 끝난 세 명의 시체를 뇌사 직전에 병원에서 몰래 빼내어, 아무도 알 수 없는 이곳으로 옮겨와서 저 장치에 접속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사고로 죽은 사촌 스토니의 연줄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이야.

이제 그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되풀이되는 죽음을 맛보게 되리라.

그리고 어쩌면, 운이 좋아서 시스템이 잘 돌아간다면,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델라웨어 카슨은 밝은 거리로 나오면서 말할 수 없는 희열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입술 한 구석에 늑대를 연상시키는 잔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THE END





(C) ZAMBONY 200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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