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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04] 낙인
창작의 샘터/잠본이 환상극장 | 2010. 7. 4. 23:37
 



<< 낙인 >>

The Brand







엄청난 양의 햇빛이 땅을 죽창으로 내리찍듯이 쨍쨍 내리쬐는 사막!

그 한가운데에 세워진 나무기둥을 중심으로 몇 명의 사람이 모여 있다.

나무기둥에는 아랫도리만을 겨우 가린 채 심한 매질로 인한 상처와 며칠째 굶은 허기로 인해 신음하는, 짐승같은 몰골의 남자가 묶여 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심각하게 의논을 한 끝에 어떤 젊은이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그 젊은이는 잠시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잘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끝에 새겨진 길다란 도구를 가져와 불에 달군다.

여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기둥에 붙들려 있는 사람의 팔다리를 붙들고 꼼짝 못하게 하는 사이에, 젊은이가 불에 빨갛게 달구어진 인두를 묶여있는 남자의 이마에 가져다댄다.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남자가 심하게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는 것만은 느낄 수 있다. 사막에 내리쬐는 햇볕은 아까보다 더욱 강렬해지고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이윽고 얼마 뒤, 이마에 글자가 새겨진 남자는 기둥으로부터 풀려나 바닥에 쓰러지고, 건장한 사내들이 그를 어깨에 둘러매고 사막 저편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 너머로 가서 그를 내팽개친다. 사람들은 경멸과 증오가 섞인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쓰러져서 신음하던 남자는 억지로 일어나서 거의 기어가다시피 끝없는 광야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지만 눈은 겨울밤의 화톳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온 세상이 그를 버려도, 그는 여전히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대머리독수리 한 마리가 먹잇감을 노리는 듯 하늘 저편을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막의 영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옛날에는 몹쓸 짓을 한 죄인이나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에게 낙인이란 것을 찍고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짓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나마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낙인이 찍힌 자를 경멸하고, 두려워하고, 멀리하면서 자기들의 세계에 끼워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낙인을 찍히게 되어 평생동안 그렇게 살아야 했던 사람도 있었겠지요. 한번 낙인이 찍히면, 제대로 된 집에서 살 수도 없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자리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사회의 외곽에서 떠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마치 강당처럼 넓은 강의실 안에 십수 명의 학생들이 앉아있고 그들 앞에서 키작은 한 노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강의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낙인이 찍힌 자들끼리 정착하여 모여 사는 또 다른 사회가 만들어지고, 그들은 전에 있던 사회와 거의 단절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언어로는 지하세계, 천민촌, 슬럼, 집단부락, 출입금지 구역, 배드랜드, 그밖에 여러 가지 말이 이런 개념을 뜻하거나, 혹은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회를 정화하고 안전을 확보하고자 했던 낙인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깨닫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요.“

창밖에서 무언가가 날개짓을 하는지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신경쓰지 않고 홀로보드 위에 몇 가지 도해[圖解]를 전개하면서 설명을 계속한다.

“한편 이런 개념은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추상화되어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낙인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어서 공개적으로 재판을 받고 눈에 보이는 형태의 낙인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잘못이나 한때의 실수, 혹은 전혀 본인의 책임이 아닌 육체적․정신적 특징 때문에 어떠한 하나의 ‘부류’로 지적당하여 마치 낙인이 찍힌 것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취급은 보다 세련되고 교묘하게 조직화되어 있어서, 그 대상자의 낙인이 눈에 뜨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 가해지는 대우도 쉽게 알아차릴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인류는, 여러 번의 참혹한 결과와 쓰디쓴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두 가지의 낙인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시작된 것은 불과 1세기 전의...”

‘이 강의를 진지하게 들으려면 1세기로도 모자라겠는걸.’

아무리 생각해도 보나벤처 교수의 강의는 유익하기는 하지만 고루하고 지루한 게 단점이란 말야. 파울리 콘체르바는 점점 뻔한 소리만 이리저리 다른 형태로 바꾸어 유행 지난 옷감을 치수만 바꿔 내놓듯이 좌르륵 풀어나가는 교수의 목소리에 싫증을 느끼고는 눈을 반쯤 감고 노트패드를 만지작거리며 언제 수업이 끝나나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왼쪽 손목에 다람쥐 꼬리처럼 맵시있게 감겨있는 최신 모델의 바이칼 시계(BIo-CALculating Watch; 생체측정 시간기록기)를 연방 쳐다보며 하품을 했다. 학점만 충분했어도 이따위 역사심리학 강의는 아예 제끼거나 재택수업으로 돌릴 수 있었을텐데.

‘어디 보자, 지금쯤이면 분명...... 빙고.’

그는 주위를 슬쩍 돌아보다가 비스듬하게 두어 자리 뒤에 앉은 렌시아 라덴트를 찾아내고는, 그녀도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지루하다못해 퍼석퍼석한 수업에 진력이 나서 금방이라도 괴성을 지를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아무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른쪽에 앉은  두 친구에게 수신호[手信號]를 보내기 시작했다. 먼저 테없는 안경을 낀 덩치 좋은 남학생에게 그가 귀 위에 꽂고 있는 펜을 가리키고 자기 패드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그 옆의 호리호리하고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여학생에게 교수가 강의중인 칠판을 가리키고는 손으로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은 몇 초 동안 생각하다가 동시에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파울리는 오른손을 세워 이마 옆에 대는 식으로 둘에게 경례를 붙이고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의자 사이를 빠져나와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손에 턱을 괸 채 앉아있는 렌시아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놀라서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 곧 화색이 돌았고, 파울리는 출입문 쪽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교수는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장광설에 도취되어 이야기 보따리를 계속 풀어놓고 있었다.

“...한 결과 인류는 마침내 특정인에게 낙인을 찍어 따돌리는 구습[舊習]을 버리고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완전하다고 하기에는 물론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현재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평등한 자유’의 패러다임은 1세기 전만 해도 아주 생소한 것으로서...”

도저히 견디지 못한 뒷자리의 한 학생이 고개를 책에 처박고 졸기 시작했다.





말없이 강의실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구내식당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손가방을 내려놓고 나서 렌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중간에 나와도 괜찮을까? 학점 제대로 메꾸려면 꼭 들어야 하는 수업인데.”

“염려 말라니까. 벌써 선배들한테 다 문의해봤거든. 저 교수는 들어올 때는 체크가 엄해도 나가는 건 막지 않는 주의라서 불이익은 없대. 그리고 출석이 좀 모자라도 시험점수가 좋으면 의외로 후하게 주는 타입이라니까 말야. 최소 출석 일수만 제대로 채웠으면 상관없을거야.”

“그래도 오늘 강의 내용은 꽤 핵심적인 부분이라는데 건성으로라도 들어야 하는 거 아냐?”

렌시아의 모범생다운 고지식함에 피식 웃으면서 파울리는 잘난체를 했다.

“내가 누구냐. 벌써 헤르만 녀석에게 부탁을 다 해뒀지. 걔네 집 전자제품 만들잖아? 보도용 초소형 비디컴VidiCom을 볼펜처럼 위장해서 귀 위에 꽂아두고 다니니까, 필요한 장면은 다 녹화해서 볼 수 있어. 오늘 수업 끝나고 못들은 부분을 내게 보내주기로 했으니까, 너에게도 살짝 보여줄게. 게다가 필기 부분은 로시에가 그 타고난 정리 솜씨로 완벽하게 정리할 테니, 나중에 복사하면 그만이야.”

그 두 사람의 솜씨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알려져 있어서, 반 농담으로 아예 강의 부교재를 대량으로 만들어 팔면 떼돈을 벌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있었다. 그들이 돈벌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교수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손가락 걸고 약속! 그럼 오늘은 보답으로 내가 한잔 사겠어.”

“기껏 탄산수 한잔으로 넘어가려고? 기왕에 사는김에 잼보니 온더락 정도는..”

“얼씨구, 그렇게 자꾸 빈민을 벗겨먹으려 든다면 그냥 저기 있는 산소 통조림 하나로 끝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알아모시겠나이다.”

다소 야릇한 최신곡이 흐르는 가운데 화성 펀치를 마시면서 렌시아가 말했다.

“그런데 말야, 아까 그 교수가 한 말, 사실일까? 옛날에 그런 참혹하고 슬픈 일들이 있었다는 게?”

“내가 알게 뭐야. 나는 고사하고 우리 부모님도 태어나기 전이라구. 그랬으면 그랬을테고 안그랬으면 안그랬을테지. 중요한건 미래지 과거가 아니잖아?”

“어떻든 다행스럽게도 현재는 전혀 그런 일이 없는 거겠지?”

“관리국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범죄와 전쟁과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전혀 문제가 아니어라. 뭐 그런 얘기지.”

그러나 렌시아는 어딘가 마땅찮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걸로 모든 게...”

“응?”

“-아무것도 아냐. 논문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졌나봐.”

파울리는 그녀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마에 땀 같은 건 흐르지 않는데도 그녀는 그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파울리는 그날 다른 때보다 약간 늦게 집에 들어갔다. 그의 집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집합건물에 위치한 평범한 가정이었다.

순간적인 기지로 렌시아와 일보 전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은 분명 현명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일이 항상 뜻대로 잘 되는 건 아니다. 그 때문에 그는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늦었는데 자고 가지 않을래? 부모님은 포보스로 1주일간 여행을 떠났고 동생은 병원에서 연수 중이니 오늘은 집에 아무도 없을 거야.”

“고마운 말이지만 사양하겠어. 난 빨간 모자가 되기엔 너무 약아빠졌거든.”

“야아~ 날 어떻게 보고~”

“아니 그건 농담이고. 부전공 때문에 실험실에 가봐야 해. 오늘 고마웠어.”

“그래...........어쩔수 없지. 다들 스케줄이 있는 거니까...”

“강의자료 보내는거 잊지마. 보답은 할테니까.”

“보답은 무슨, 내가 좋아서 하는건데. 그럼 잘가라. 이마 조심하고.”

“너야말로.”

빨간 모자를 삼키기도 전에 할머니한테 걸려들어 아무 소득도 없이 꽁무니빼는 늑대가 된 듯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파울리는, 자기의 상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노트패드에서 익숙한 신호음이 들려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패드 옆에서 리시버를 빼내어 귀에 꽂았다. 기분좋은 합성음으로 전언[傳言]이 들려왔다.

<< 저녁 시간은 즐거우셨습니까? 헤르만 델마이어 님으로부터 메일입니다. >>

‘헤르만 녀석, 오늘은 평소보다 편집을 빨리 했나보군. 일단 오디오 부분만 들어둘까. 제대로 되었나 확인을 해봐야지. 비디오는 나중에 필기를 참조하면...’

그는 귀에 리시버를 꽂은 채 A5용지 크기의 패드를 꺼내어 화면을 띄우고 키를 재빨리 조작하여 메일을 테라넷TerraNet 중앙 서버로부터 씬 하드Thin Hard로 다운받은 뒤에 파일을 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어도 초강력 수면제를 능가할만한 보나벤처 교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내용은 딱딱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그 말투가 너무나도 생생해서 마치 나이든 노옹[老翁]이 모닥불가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그는 빨리감기 아이콘을 조작하여 자기가 듣다 만 부분부터 듣기 시작했다.

“......그 방법이란 것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또다시 상당한 노력과 투자가 뒤따라야 했지만, 그 기본적인 개념 자체는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만큼이나 혁명적이면서도 별것 아닌 건데, 그렇다고 해도 그 파급효과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방법이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도 될걸 무지하게 빙빙 돌리네. 재수없는 영감’

그는 울적함과 지루함이 뒤섞인 감정에 허우적거리며 아파트의 중앙 현관 앞에 섰다. 패드에서 들려오는 것과는 또 다른, 친절하지만 인간미가 없는 합성음이 들려왔다. << 신분과 목적을 밝히고 지정된 위치에 서 주시오. >>

그는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전자파 간섭을 막기 위해 패드를 끄고 대답했다.

“파울리 콘체르바. ID 40185274, 목적은 귀가. 스캔 요청.”

그가 정해진 발판 위에 서자 희미한 구동음이 들려오며 현관 위에 부착된 사이키델릭 조명등같이 생긴 장치가 빙빙 돌아가며 창백한 빛깔의 광선을 발사하여 마치 스나이퍼가 사용하는 레이저 조준경처럼 정확하게 그의 이마를 비추었다. 그는 평소에는 길게 기른 머리털에 가려져 있는 이마를 드러내기 위해 앞머리를 세워 들어올리느라 좀 짜증이 났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그의 이마 위에 무언가 희미한 표시가 나타나면서 빛나기 시작했다. 장치는 몇가지 다른 색의 빛으로 스캔을 반복하더니 마침내 승인되었다는 뜻으로 띠리리릭 소리를 냈다.

<< 신분 확인되었음. 들어와도 좋습니다. 개별적인 용무는 각 주택의 빌트인built-in 장치를 통해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그럼 편안한 밤을 보내시길. >>

‘걱정 마라, 네놈이 안 그래도 편안해서 죽을 지경이니까.’





그는 바닥까지 온통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둘러싸여 누군가에게 관찰당하는 듯한 묘한 불쾌감을 안겨주는 압축공기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37층으로 올라가 자기 집의 현관 앞에 내렸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이짓을 대체 몇년째 하고 있는건지... 뭐 다들 하는 일이지만...’

스캐닝을 위해 대여섯 가지의 광선이 이마를 비출 때마다 왠지모르게 가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리상으로는 분명 아무런 감각 반응이 없어야 하겠지만 감정적으로는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계속 스캔을 계속하다가 두개골 안에 묻힌 생체 칩이 튀어나오지나 않을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칩은 그의 출생시에 신중하게 주입되어 이미 두개골을 이루는 칼슘 층의 일부분으로 변해 있었으므로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 칩은 그가 죽어서 풍화[風化]될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닐 것이 틀림없다.

이제까지 인류는 망막감식이나 성문감식, 지문감식, 비밀번호 등 여러가지 체크 수단을 개발했지만, 출생시에 모든 개인에게 부여되는 이 칩의 체크만큼 완전한 것은 없었다. 그 안에는 출생직후에 세포분석을 통해 획득된 그의 고유 DNA코드와 각종 개인정보, 세계관리국의 승인 암호, 그밖에 여러가지 인간으로서는 판독할 수 없는 콘텐츠가 들어가 있었고, 복제나 도용은 100%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칩은 실시간으로 관리국의 마더 서버와 연결되어 계속 정보를 갱신하므로, 누가 타인의 칩을 악용하기 위해 최면을 걸거나 약을 먹이거나 혹은 목을 벤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곧장 마더 서버가 이상을 감지하고 차단 조치를 내리기 때문이다.

‘이마 조심해’라는 장난스런 인사가 현대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도, 이런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는 어째서 오늘따라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이 과정이 신경쓰여 견딜 수 없는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아늑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상의를 벗고는 다시 패드의 전원을 넣고 강의 파일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 방법이란... 전 인류가 ‘미리’ 낙인을 찍고 그 낙인의 관리를 컴퓨터에게 맡긴다는, 아주 획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수십년간에 걸친 세월 동안 다방면에 걸친 협의와 공조가 이루어져, 완벽에 가까운 사회 관리 시스템을 전지구 규모로 구축하고, 모든 인간의 데이터를 기록하여 컴퓨터에게 관리권을 부여하는 프로세스가 진행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낙인을 가지고 그 낙인이 있는 한 모두가 평등한 세계... 대단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제는 반대로 낙인이 없는 것이 새로운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냐고 걱정할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인류가 진출해 있는 모든 장소에 세계관리국의 손이 뻗어있는 한, 아예 낙인이 없는 인간이란 처음부터 존재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낙인을 찍는 것 자체가 시민의 신성한 의무이고, 동시에 권리를 부여받기 위한 전제조건인데, 대체 어떤 미친 사람이 낙인 없이 황야로 도망가서 혼자 살 생각을 하겠습니까?

물론 이런 개혁 자체가 전세기[前世紀]에는 허황된 꿈이나 센세이셔널한 상상을 좋아하는 작자들의 공상처럼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악몽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아마 전세기 중반에서 말기에 걸쳐 행해졌던 대규모의 항성간 전쟁과, 그로 인한 인구감소 및 사회 계층의 단순화, 그리고 종전 이후 이루어진 눈부신 개발사업의 성과와 부[富]의 축적이 아니었다면, 그 컨셉은 여전히 꿈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어쩌면 그게 인류에게는 더 재미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 낙인이 대체 어디에 있냐고요? 진짜로 몰라서 묻는 겁니까? 그게 없으면 여러분은 수업도 못 듣고 식사도 못 하고 은행에서 돈도 못 찾고 친구에게 전화도 걸 수 없고 심지어는 자기 집에도 못 들어갈 겁니다. 아하, 이제야 약간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짓는군요. 그렇습니다. 그 낙인이란 바로 여러분의 이마 아래에 하나씩 가지고 있는...“

파울리는 패드를 침대에 거칠게 집어던지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구토를 해대기 시작했다. 어째서 욕지기가 나오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토하기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THE END?





(C) ZAMBONY 200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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